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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일곱별

2010.10.17 10:04

乾天HaNeuL 조회 수:1010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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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1 새로운 만남


 


  어젯밤까지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맑은 햇살이 촉촉한 땅을 감싸 안았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들어갔다.
  새들은 평화롭게 지저귀며, 나뭇가지는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렸다. 나뭇잎과 꽃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실로 아름다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하지만 숲속에 서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한 채 서로 대치한 상태였다.
  스무 명 안팎의 병사들이 두 명의 남녀를 포위하였다. 병사들은 남자와 여자를 노려보며,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더욱 강하게 움켜주었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탄탄해 보이는 체구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었다. 얼굴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으로, 특히 불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특색이었다. 검은 두건을 눌러쓴 머리에서는 황금빛 머리칼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반팔과 긴 바지에, 그 위로 푸른색으로 된 여러 방어구를 착용하였다. 허리춤에는 칼도 하나 찼다. 여러 모로 봤을 때 단순한 여행자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남자 옆에 서있는 여자는 왠지 모르게 사내아이를 연상시키는 차림이었다. 짧은 푸른빛의 머리칼과 입고 있는 갑옷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계란형의 얼굴, 커다란 푸른 눈동자, 매끈한 코, 앵두 같은 입술, 늘씬한 몸매 등, 여성의 아름다움도 지녔다. 다만 등허리에 매여 있는 커다란 검이 왠지 모를 위화감을 가져다주었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청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병사들의 수를 하나하나 세본 뒤, 이번에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짜증나.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불필요한 의뢰에 나서야 하나고. 변경의 마을에 편지를 전하는 일 같은 것은 다른 놈을 시키면 되잖아. 장마철에 퍼붓는 빗속을 뚫고 편지를 건네주었더니, 이번에는 국경 수비 대장한테 편지를 전하라고 하지를 않나. 그렇게 기껏 또 편지를 전해주고, 이제는 맑은 날이 왔다 싶었는데. 맑은 날이 아니라 사람을 죽일 듯 더워서 미치겠네. 게다가 저런 덜 떨어진 인간들하고 조우할 건 또 뭐야?”
  분명 낮은 소리로 말하는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옆의 동료와 주변의 병사들까지 다 들을만한 소리였다.
  “이게 다 그 변태 마스터 때문이야. 그 인간 이런 의뢰만 안 시켰어도 똥개훈련은 안 해도 됐잖아.”
  “시끄러워.”
  옆에 서있던 여인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맑은 음성이었지만, 어조는 매우 차가웠다.
  “니나, 솔직히 말해서 그렇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임무 따위 다른 놈 시켰으면 그만이잖아.”
  “시끄럽다고 했잖아, 베리!”
  여인은 등허리에 매달린 검을 칼집 째 뽑고는, 그것으로 남자의 입을 강하게 후려쳤다.
  “악! 아프잖아! 이게 얼마나 아픈데 왜 또 때리는 거야? 니나 정말 나 이빨 나가는 거 보고 싶은 거야?”
  “시끄럽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리고 나는 안 맞아봐서 모르겠다!”
  “악!”
  니나는 베리의 입을 또다시 칼집으로 가격했다. 이제 벌겋게 달아오른 입술을 어루만지며 베리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저 놈들 뭐하고 있는 건가?”
  “그러게 말일세. 혹시 애정행각이 아닐까…….”
  병사 한 명의 중얼거림이 니나와 베리의 귀에 들어갔다. 그들은 동시에 그 병사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듯 말하였다.
  “아니거든, 이 쫄따구야!”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물어!”
  분노에 가득 찬 음성에 병사는 입을 다물었다.
  “허허, 저것들이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네. 우리 수가 저 연놈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데, 어찌 저리 당당하게 설칠 수가 있는가?”
  “하하하, 혹시 모르지. 정신 나간 미친 연놈일지도.”
  다른 병사들이 껄껄대며 웃기 시작하였다. 베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또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넋 나간 놈들 같으니. 어디서 시끄럽게 웃고 난리야. 그리고 지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수를 운운하고 난리야. 하여간 저런 졸개 녀석들이 매번 수만 믿고 설치다가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거야. 저런 놈들은 번개를 몇 대 맞아봐야 정신을……, 악! 왜 또 때려?”
  “아까 전부터 시끄럽다고 말했는데, 여전히 그 입을 놀리고 있구나.”
  매섭고 차가운 눈초리로 베리를 노려보며 니나가 말하였다. 베리는 피가 나기 시작한 입술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니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병사들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니나의 시선을 받은 한 병사가 앞으로 나오면서 코웃음 치며 말을 꺼냈다.
  “그러는 네 년이야 말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 땅을 돌아다니는 데 특별히 이유가 필요해? 여기가 파탈리아의 영토인지 케이롄의 영토인지도 모르는 천치는 아니겠지?”
  “아하, 그랬어. 맞아, 여기가 파탈리아 영토였지. 하하하하, 내가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그런 것도 까먹었습니다 그려, 아가씨?”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니나를 약 올리는 행태였다. 병사의 어조 역시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다.
  “나이를 그렇게 처먹었으면 집에서 손자들이나 보든가. 여기는 왜 건너 와서 난리야. 미친 놈 같……, 윽!”
  베리가 또다시 혼잣말을 떠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입가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등에서 저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 번 만 더 떠들면, 그 입 영원히 나불대지 못하게 찢어버린다.”
  니나의 심연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에서 마치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살기 어린 눈초리에 베리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러니 여기에 건너 온 이유를 말한 다음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니나는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땅에다 내리꽂으며 말하였다. 검은 보기만 해도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검의 길이도 길이였지만, 면이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또한 검의 손잡이도 꽤 긴 것을 봐서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투 핸드 소드인 듯싶었다.
  “어이쿠 그러십니까? 그런 무거운 검을 사용하시는 천하장사시니 저희가 알아서 모셔야 하겠습니다. 킥킥킥.”
  병사 하나가 배꼽을 움켜잡으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저 년이 생긴 것이 꼭 사내 놈 같은데, 하는 짓도 꼭 그런 것 같네.”
  “그럼, 그럼. 저 몰골을 보게. 저게 어딜 봐서 여자 같은가? 하하하.”
  병사들은 손가락질을 해대며 비웃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다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확실히 사내아이처럼 머리도 짧게 깎았고, 흉갑 때문에 가슴이 아예 편평하게 보였다.
  “그래도 여자랍시고 배꼽을 드러내놓고 다니고 굽 높은 부츠도 신고 다니지 않나. 어떤가? 자네 요새 여자가 궁하다고 했으니, 저년한테라도 좀 회포를 풀지 그러나?”
  “에이. 국경으로 돌아가면, 저 년보다 잘 나가는 창녀들이 많은데, 뭣 하러 저런 머슴아 티가 풀풀 나는 년을 상대하나?
  “그렇게 생각하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하하하하!”
  병사들이 대놓고 웃기 시작하였다. 가만히 쭈그려 앉아서 병사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던 베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일어섰다. 베리는 귀찮은 듯 하품을 길게 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포위한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 꽤 높아 보이는 나무를 낑낑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놈은 또 뭐하는 거야?”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베리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베리는 간신히 나무를 타서 올라간 다음, 튼튼히 보이는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았다. 베리는 턱을 괸 채, 시야를 아래로 고정시켰다.
  “너희들 오늘 장례식 한 번 제대로 치루겠다. 오늘 우리 누님 기분이 정말 안 좋은 것 같거든. 너희 같은 바보 녀석들은 정말 매너라는 게 없다니까.”
  베리는 오른손 집게로 니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병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니나에게 집중되었다.
  “…….”
  니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서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격을 받아 실의에 잠긴 여자 아이처럼 보였다.
  “에고, 저 아이가 충격을 받지 않았나? 자네 말이 너무 심했네.”
  “에이. 나만 그랬나. 자네도 머슴애 같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리고, 우리는 사실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뭘 그러나.”
  “하하하, 그렇지?”
  병사들은 여전히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베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불쌍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니나에게 옮겼고, 결국 베리가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무례한 놈들…….”
  니나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동시에 니나의 손에 거대한 검이 들렸다. 병사들이 깜짝 놀라며 검과 창을 다시 고쳐 잡았는데, 그 순간 니나의 모습이 병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한 병사의 코앞에 니나가 나타났다.
  “……!”
  깜짝 놀라며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니나가 검을 휘둘렀다. 날이 아니라 면을 사용했는데, 마치 커다란 몽둥이에 후려 맞은 것처럼, 병사가 뒤로 나가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니나를 욕하던 바로 그 병사였는데, 그 자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짓이겨진 갑옷이, 방금 전 니나의 공격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말없이 증명해주었다.
  “이, 이 년이!”
  아직 힘의 파악이 덜 된 병사가 창을 들고 돌진하였다. 니나는 가볍게 옆으로 피하며, 그 반동력으로 반 바퀴를 더 회전하였다. 또다시 날이 아니라 면을 사용하여 병사의 머리를 내려쳤다. 투구가 산산조각이 났고, 병사는 창을 떨어뜨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가, 강하다! 다들 대열을 갖춰!”
  “어, 그, 그래!”
  남은 병사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의 강함을 이제야 파악을 했는데, 여전히 자신들의 수적 우위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니나의 검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일 때마다, 한 명씩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니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나뭇가지 위에서 느긋하게 관람하던 베리가 양손을 입에 가져다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그냥, 여기에 왜 왔는지 말하고 얼른 튀는 게 좋아. 잘못하다가 오늘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릴 놈도 생길지 모르니까!”
  베리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들의 상관의 성격을 보건대, 도망은 곧 죽음이었다.
  “다, 다 같이 공격하면 승산이 있네!”
  “그, 그래! 모두 공격하세!”
  “어!”
  케이롄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니나에게 달려들었다. 포위한 상태에서 동시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니나에게는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니나는 엄청난 도약력으로 점프하면서 병사들의 검과 창을 모두 피하였다.
  “……!”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하며 공중에 떠있는 니나만을 쳐다보았다. 마치 나비가 날아오르듯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뒤, 니나는 땅으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것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니나는 땅에 있는 먹잇감을 찾은 독수리처럼 병사들을 노려보았고, 그들에게 가까워지자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은 병사들의 몸과 갑옷에 닿지도 않았지만,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덕분에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땅에 안전히 착지하자마자 니나는 벌떡 일어섰다. 등에 눈이라도 달린 것인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검들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강한 괴력으로 그것들 모두 떨쳐내었고, 뒤로 회전하듯 돌아섰다. 니나는 그 회전력을 검에 실어 뒤에 있던 병사들ㄹ 전원을 날려버렸다.
  이제 서있는 사람은 니나뿐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모두 땅에 쓰러졌고,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비비꼬고 있었다.
  니나는 가장 가까이에 쓰러져 있던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그 자의 목에 겨누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국경을 넘어 온 이유를 말해라.”
  “…그, 그건!”
  “말해라!”
  니나는 검을 병사의 목까지 밀어 넣었다. 덕분에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병사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국경을 넘어 온 이유를 모두 불었다.
  “그래? 수상한 사람을 쫓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수색하는 중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제,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는 그거 이상으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제발 목숨만은……!”
  손을 비비며 애걸복걸하였다. 니나는 병사의 가련한 모습에 피씩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고, 그 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니나가 검을 칼집에 도로 꽂아 넣으며 뒤돌아서자, 그 병사는 옆에 떨어뜨린 창을 들었다. 그리고는 “죽어라!”라고 외치며 그 창을 냅다 집어던졌다. 창은 정확하게 니나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는데, 니나는 가볍게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 창을 피했다.
  “…….”
  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빠져 있는 병사를 응시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눈길로 병사를 노려보던 니나는, 다시 돌아서서 병사에게 다가갔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가 잠시 넋이 나가서…….”
  병사는 이번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하지만 니나는 그 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리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주변에 정신을 잃지 않은 다른 병사들도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한 남성이 오늘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악!”
  엄청난 괴성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참 동안이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던 그 병사는 마침내 기절하였다. 몸은 축 늘어졌고, 입에서는 거품이 잔뜩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뾰족한 굽으로 내려찍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발에 힘을 준 채 이리저리 비틀었으니, 정말로 이제 다시는 남자 구실 하기는 글렀다.
  “도, 도망가자! 저 년은 악마다!”
  “으악! 괴물이야. 어떻게 저런 끔찍한 짓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병사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기절해 있는 다른 병사들은 어찌 되거나 말거나, 그들은 헐레벌떡 도망쳤다.
  “베리. 이제 그만 내려와.”
  “예, 알겠습니다. 내려갑죠.”
  니나의 부름에 베리는 지체하지 않고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하려고 했지만, 실수로 앞으로 한 번 구르고 말았다.
  “아고고…….”
  베리 앞에는 흙탕물이 있었다. 하필 그 흙탕물에 구르는 바람에 옷이 완전히 젖고 말았다. 그는 울상이 된 얼굴로 일어서며 몸 이곳저곳을 툭툭 털어냈다.
  “바보. 아직도 그렇게 둔해서 어떻게 할 거야?”
  “에고, 나도 몰라. 이런 건 나하고 영 안 맞으니까. 나는 그저 앉아서 머리나 굴리는 게 제격이라고.”
  니나의 말투가 사뭇 부드러워졌다. 천천히 베리에게 다가가서 흙탕물에 젖은 옷과 망토를 손으로 대충 털어주었다.
  “그런데 니나.”
  “왜?”
  “저 놈들이 쫓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죽었겠지. 그 절벽은 너도 알잖아. 어제까지 비도 왔고. 급류에 휘말려 이미 죽었을 거야.”
  베리와 니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별달리 관계도 없고, 죽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그들은 대략 10분 동안 말없이 걸었다. 주변에서 숲 이곳저곳 뒤지는 케이롄 병사들의 소리도 들렸지만, 다행이 만나지는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케이롄의 병사들과 또다시 조우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풀숲 밖으로 튀어나온 갈색 피부의 손이었다.
  “저거 뭐야. 사람 손이잖아. 왜 이런 곳에 사람 손이……. 설마……?”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찾은 것 같은데.”
  베리와 니나는 천천히 그 장소에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가늘고 긴 손가락과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를 지닌 여성의 손 같았다. 나머지 팔 부분부터는 무성히 자란 풀에 완전히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니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낯선 사람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손이 차갑고 손끝이 쭈글쭈글해진 것이 물속에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
  “일단 꺼내보자.”
  “어, 그래.”
  둘은 눈에 보이는 손과 손목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끌어 당겼다. 매우 짧게 깍은 검은 머리가 풀 밖으로 나왔고, 다음으로는 등이 보였다. 마침내 그 사람을 완전히 풀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뭐야 이 옷은?”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흰색의 상의와 짙은 회색빛의 바지를 입은 사람이었다.
  베리는 낯선 사람의 어깨의 양 옆을 붙잡고 천천히 뒤집었다.
  “…….”
  “…….”
  그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밤송이처럼 짧은 머리칼 덕택에 남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얼굴은 마치 여자처럼, 아니 미소녀처럼 생겼다.
  긴 속눈썹, 오뚝한 콧날,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 진한 곡선형의 눈썹, 계란형의 얼굴 등, 아무리 봐도 여자를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거기에 더하여 물에 흠뻑 젖은 옷이 몸에 밀착되어 있는 지라, 호리호리한 체구와 가늘고 긴 팔다리가 완전히 드러났다.
  “완전 여자 같이 생겼네. 그나저나 이 녀석 살아 있기는 한 거야?”
  “숨은 붙어 있나 봐.”
  미세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니나가 손을 뻗어 목의 경동맥 부분을 만져보자, 미약한 맥박도 느껴졌다.
  “케이롄의 멍청한 놈들이 죽을 똥을 싸가며 찾던 놈이 이 녀석 같은데. 근데 뭐하는 놈인데 국경은 넘어……. 아니지 아무리 봐도 이 옷은 파탈리아 사람 것도 아닌데.”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특히 상의의 가슴 부분 주머니에 새겨진 문양은 어느 국가나 집안에서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어느 국가에도 없는 문양이야. 어떤 민족도 입지 않는 옷이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
  풀을 밟으며 걸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니나의 귀에 들렸다. 니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천천히 일어서서 뒤를 돌아보자,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사람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다른 병사들보다 몇 직급 이상은 높아 보이는 자로, 니나와 베리가 매우 잘 아는 사내였다. 자신들이 케이롄 국경을 여러 번 오고갈 때, 미친 듯이 추격하던 국경 수비 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오, 이거, 이거. 우리 국경 지대를 자주 침범하던 골칫덩이를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
  사내의 거친 음성이 베리와 니나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는 영 듣기에 거북했다.
  “오늘 완전 날 샜네. 왜 하필 여기서 네 놈을 봐야 하는 거야. 아 미치고 환장하겠다.”
  기절해 있는 소년을 붙잡고 있던 베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아니 네 놈은 지키라는 국경은 안 지키고 왜 남의 영토를 넘어오고 난리야?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냥 집에서 발이나 씻고 잠이나 자라.”
  “큭큭, 남의 국경을 제 집 드나들 듯 침범하던 쥐새끼가 말이 많군. 나야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네 녀석들 같은 놈들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내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주고 싶다면, 일단 네 녀석들이 먼저 나에게 잡히는 것은 어떤가?”
  “웃기고 있네. 네 놈한테 잡혀서 이상한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겠다. 이 변태 성욕자야.”
  베리가 침을 내뱉으며 말하였다.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네 녀석들의 마스터인지 뭔지 하는 년도 만만치 않던 것 같은데. 오죽하면 케이롄까지 소문이 퍼졌겠나? 그란디스 비르의 마스터는 남녀 가리지 않는 변태 중의 변태 쿼터 다크 엘프라고. 크하하하.”
  대장이 웃자 밑의 부하들도 따라서 웃었다. 베리와 니나는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당초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표정과 더불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길게 내쉴 따름이었다.
  “뭐 나도 네 놈들 잡아가는 것보다 거기 쓰러져 있는 녀석부터 끌고 가는 것이 먼저라서 말이야. 그냥 녀석만 건네주면 오늘은 눈을 감아주지.”
  “뭘 눈을 감어? 여기는 파탈리아이고, 케이롄은 강 건너인데. 이미 이 녀석은 우리 거나 다름없다!”
  “호오…, 꽤나 자신감에 넘치는 군. 하지만 여기서 너희 성까지는 하루는 더 가야하는 곳인데, 뭘 그렇게 믿고 있나? 고작 두 명이서, 설마 수백에 달하는 나의 병사들을 모조리 상대할 속셈인가?”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풀숲을 헤치며 또 다른 병사들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제 어림잡아도 근 백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니나와 베리, 낯선 소년을 에워쌌다.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틈도 없었고, 또 싸워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아 당연히 믿는 게 있지. 내가 싸움은 못해도 말이야, 한 가지 할 수 있는 게 있거든.”
  베리가 천천히 오른팔을 위로 올렸다.
  “…무슨 뜻이지?”
  “아, 이걸 보면 알잖아.”
  사내가 묻자 베리가 눈으로 팔목에 찬 팔찌를 가리켰다. 아무런 세공도 없어서 평범하다 못해 단조로운 팔찌였다.
  “이게 뭐처럼 보이지, 수비 대장 어른?”
  “…….”
  베리의 질문에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매서운 눈초리로 베리의 얼굴을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고로 이것은 작년에 케이롄의 한 유적에서 찾은 거야. 이름은 하늘의 심판인지 뭔지로 지었어. 아마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고문서에도 그와 비슷한 이름일거야. 물론 고대어겠지만.”
  “…….”
  병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였다. “고대의 유물”이라 소리치며 겁에 질린 사람도 있었다.
  “…네 놈.”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말하였다. 베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더 위로 뻗었다. 팔찌가 빛을 받아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였다. 빛이 조금씩 강렬해질수록 겁에 질린 병사들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
  “모두 본국으로 귀환한다. 신속하게 성으로 되돌아가라!”
  “예? 예! 예!”
  “알겠습니다!”
  대장의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국경 수비 대장이 뒤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내 눈에 걸리면 그 땐 지옥이 너희 앞을 기다릴 것이다. 성에는 마도사도 있다는 걸 기억해둬라.”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 수비 대장 어른.”
  베리는 약 올리듯 목례하였고, 사내는 휑하니 가버렸다.
  “너 입담 좋은 것도 간혹 쓸모가 있네.”
  “아고고, 그래도 사용하지 않고 끝낸 게 다행이야. 이거 한 번 사용하려면 머리가 미칠 거 같거든. 뭔 놈의 의지인지 뭔지. 아니 그냥 시동어만 외치면 발동 되어야 정상 아니야? 사람 귀찮게 의지는 왜 또 중요하고, 빛은 또 왜 비춰야하고, 악! 왜 또 때려?”
  니나가 또다시 베리의 입을 쳤다. 이번에는 칼집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저 사람 깨려고 하잖아. 좀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응?”
  베리가 고개를 숙여서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썹과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고, 눈을 막 뜨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입에서는 신음 소리도 흘러 나왔다.
  “어이, 이보셔. 정신이 드나?”
  베리가 소년의 볼을 톡톡 쳐댔다. 소년은 한참동안이나 신음 소리를 하며 얼굴을 찡그렸는데, 마침내 눈을 떴다.
  커다랗고 동그란 검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었다. 아니 얼굴만 보자면, 완벽하게 소녀였고, 그것도 매우 귀엽고 예쁜 미소녀였다.
  “귀…….”
  서있던 니나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입에서는 뭔가 말이 튀어나오려 했는데, 베리는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무슨 말인지 눈치 챘다.
  “귀여워!”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며 소년을 확 끌어안았다. 소년은 갑자기 발생한 사태에 깜짝 놀라 저항하려 했지만, 여자답지 않은 괴력을 지닌 니나의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웁……! 웁!」
  소년의 얼굴은 정확하게 브레스트 플레이트 아머에 눌렸다. 덕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이, 니나! 이러다가 사람 죽는다! 니나! 니나! 정신 차려!”
  “꺅! 귀여워! 귀여워!”
  사람 몇을 순식간에 박살내고, 거기다가 남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가운 미소로 짓밟던 니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소녀 같이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베리 입장에서 보면 완전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러다가는 낯선 소년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니나의 어깨를 흔들며 말리려 했다.
  “니나 정신 차리라니까!”
  베리는 니나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댄 채 소리를 크게 질렀다. 니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팔에 힘을 풀었다.
  「켁, 켁!」
  급하게 숨을 몰아쉬려다가 사래가 들린 소년은 기침을 연신 해댔다. 니나는 미안한 마음에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저기 괜찮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니나. 오늘 완전 사람 하나 죽일 뻔 했네. 하, 나 원 참.”
  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민망해진 니나는 집게를 맞대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도대체 뭔가요? 사람을 죽일 일 있으신가요? 완전 죽는 줄 알았잖아요. 켁. 도대체 여긴 어디인데, 이런 이상한 사람들만 잔뜩 있는 거야?」
  소년이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그 즉시 둘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저기…, 이거……. 아무래도 그거 같지 않아, 니나?”
  “아마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년은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가득 찬 눈초리로 베리와 니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삼각형 모양의 대륙 중앙에 위치한 왕국 파탈리아는 팔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국가였다. 그렇게 넓은 영토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파탈리아에 살았다. 덕분에 대륙을 지배하는 세 개의 제국들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유지했으며, 다른 나라와 빈번한 전쟁을 치루면서도 끝까지 버텨냈다.
  왕국의 수도는 네뷸라였으며, 사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번화한 도시였다. 매우 거대한 외성에는 귀족들과 평민들이 거주했다. 내성 안으로는 왕족들이 사는 왕궁이 존재했다.
  귀족들의 주요 거처는 외성 안 곳곳에 퍼져 있었지만, 가장 많은 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은 내성 근처였다. 웬만한 평민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경비병들이 늘 지키는 곳이었다.
  “아…, 오늘도 덥네. 어제도 덥더니.”
  베리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이 충혈 된 상태였다. 뒤로는 휘파람을 불며 사뿐하게 걷고 있는 니나가 있었고, 바로 그 뒤로 후드가 달린 얇은 외투를 뒤집어 쓴 사람이 걷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처음 본 것들에 감탄사를 터뜨리기도 했고, 경비병이 나타날 때면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를 더욱 깊숙이 썼다.
  “망할. 늘 생각하는 거지만, 귀족들이 사는 곳에도 포탈을 하나 만들어야 해. 외성 끝자락에다가 포탈을 설치해 놓으면 어쩌라는 거야? 여기까지 걸어와야 하잖아.”
  베리 일행은 내성 근처에 있는 귀족들의 저택에 난 도로를 걷고 있었다. 화려함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성향이 여실이 드러난 커다란 저택과 정원이 그들 양 옆으로 펼쳐졌다.
  “게다가 망할 놈의 템펠덴 저택은 내성 입구 바로 옆에 있으니, 어쩌자는 거야! 차라리 내성의 포탈로 갔다가 그리로 가는 것이 더 빠르겠다!”
  “시끄러! 아까 전부터 계속 시끄럽잖아! 이 아이가 놀라면 어쩌려고 그래?”
  니나가 베리의 등을 발로 뻥 차버렸다. 지나가던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니나를 쳐다보았는데, 얼굴을 알아보고는 급히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하아……. 알았다고. 알았어! 에라이…….”
  베리는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다시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마침내 베리 일행은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철로 된 거대한 문 앞에 선 베리는, 손잡이 부분에 양손을 올리고 힘껏 밀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그들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저택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넓은 정원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다. 잘 가꾼 나무들도 곳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에는 푸른 잔디가 돋아났는데, 징검다리처럼 평평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그 돌 위를 걸었다.
  정원에 난 길을 지나 마침내 저택에 도착하였다. 대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 대략 오 분 정도 시간이 걸릴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의 정원이었다. 저택 역시도 2층 규모로 매우 컸다. 바로 눈앞에 있는 휘황찬란한 현관과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저택의 벽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특히 덩굴장미가 벽 한쪽에 붙어 자라나 아름다운 꽃을 다퉈가며 피어냈다.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대리석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복도 자체도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어서 오세요, 베리타스, 니나.”
  저택에서 일을 하던 하녀들이 베리와 니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차림이 상당히 특이하였다. 일단 메이드답게, 검은 상의와 치마와 스타킹, 하얀 앞치마와 카츄사를 입고 있었다. 문제는 상의가 가슴골이 다 드러날 정도로 푹 파졌다는 점과 치마는 하늘하늘 거리는데다가 매우 짧아 팬티가 보이기 직전이라는 점이었다.
  “마스터는 지금 어디에 있어?”
  무덤덤한 표정으로 베리가 물었다.
  “지금 주인님께서는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 그래? 그런데 혹시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건 아니지?”
  “예? 그건 저희도 잘…….”
  “하긴 그렇겠지. 아침에 그 방을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니까. 아무튼 고마워.”
  베리가 손짓을 한 번 해준 다음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다른 문보다 훨씬 화려한 문 앞에 다다랐다. 베리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뭐야. 아직도 자는 거야?”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베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니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니나는 이마에 손을 얹은 다음 고갯짓으로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베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잘 정리된 화려한 소파와 탁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잘 정리된 책상이 놓여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도 있었다. 또 귀엽게 생긴 인형들과 여러 장식품들이 방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뭐야……. 안에 없잖아?”
  정작 중요한 주인이 부재중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의 낌새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에고, 다리 아파 죽겠네.”
  베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니나는 앉지 않고 주변에 놓여 있는 인형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어루만졌다.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문 밖에서 서성였다.
  “뭐해? 어서 들어와.”
  베리가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손짓으로 안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뒤집어 쓴 후드를 마침내 벗었다. 마치 여자아이처럼 생긴 소년의 얼굴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소년의 눈도 베리처럼 붉게 충혈 되었다.
  “여기 앉아. 며칠 길을 걸어왔으니 힘들 테니까.”
  소년은 베리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베리의 손이 소파를 두들기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소년은 천천히 걸어가 베리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도대체 그 망할 작자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른 아침에 어디 갔을 리는 없고. 그러니까 니나……”
  베리가 투덜거리며 시선을 니나에게 돌렸다. 그와 동시에 베리의 말문이 막혔다. 니나의 등 뒤에 갑자기 한 여인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낯선 여인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고정했다. 자신보다 키가 큰, 그리고 아마 웬만한 남성보다도 키가 커 보이는 여인이 속옷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속옷차림의 여인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니나의 흉갑을 벗겨버리고는 갑옷 안에 감춰져 있던 풍만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니 가져다 댄 것 이상으로 마구 주무르기 시작했다.
  “꺅!”
  니나가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횡으로 휘둘렀다. 속옷차림의 여인은 가볍게 몸을 뒤로 숙여 검을 피했다. 허리가 뒤로 젖혀진 상태로 빙그르 오른쪽으로 돌더니, 니나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달링, 보고 싶었어. 어머, 여행 다녀오는 중에 가슴이 좀 더 커졌나 봐. 만져지는 감이 더 좋아졌넹. 아이 좋아랑.”
  그녀는 니나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매우 농염한 코맹맹이 소리였다.
  “이…, 변태 마스터가!”  니나는 왼손으로 옆에 착 들러붙은 여인을 밀어내고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여인은 균형을 잃으며 뒤로 쓰러졌고 검에 직격으로 맞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검이 여인의 몸을 통과해버렸고, 그녀의 몸은 스르르 사라졌다.
  “힝, 그런 무서운 물건을 함부로 휘두르면 안 돼. 여긴 집안이잖앙. 게다가 아름다운 너한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야.”
  어느새 니나의 등 뒤에 찰싹 들붙은 여인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마스터 그만해. 손님도 있다고.”
  “응? 손님?”
  베리가 말하자, 여인은 시선을 베리 옆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로 돌렸다. 얼굴이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달아오른 소년이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꺅! 정말 귀엽게 생겼당!”
  여인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베리와 소년 사이로 끼어들어간 뒤, 소년의 양 볼을 붙잡고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꺄악! 남자인데 여자 아이처럼 생겼엉! 커다란 눈에 오똑한 코에 촉촉하게 젖은 것 같은 앵두 같은 입술까지. 이거 여자라고 해도 믿겠다. 그리고 이거 뭐야. 피부가 갈색인 것이 꼭 다크 엘프 같잖아. 머리만 확 길었어도 미녀라고 불러도 되겠당. 이거 뭐야? 응? 뭐야, 베리베리?”
  중간에 소년이 입을 놀리며, 「뭐하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정신이 다른 것에 확 팔린 여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저, 저기요?」
  다시 한 번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인은 소년의 몸 이곳저곳을 관찰하면서 감탄사를 연신 터뜨릴 뿐이었다.
  소년은 그제야 여인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있었다. 조금 가늘고 매섭게 생긴 파란 눈동자, 날카로운 콧날, 얇고 가늘며 긴 입술, 초승달 모양의 눈썹, 비스듬히 치워놓은 짙은 녹색 머리칼, 사람을 찌를 법한 턱선을 지닌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눈이 나쁜 것인지 안경까지 썼는데, 덕분에 지적인 이미지를 살짝 풍겼다.
  “이 아이 뭐양? 응? 말해 봐, 베리베리.”
  “하아……. 난 베리베리가 아니라 베리타스라니까! 제발 그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지 좀 마, 변태 할망구야!”
  “힝……. 난 할망구가 아닌걸. 아직 오십도 안 넘은 청춘이란 말이야. 시집도 못 간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베리의 말에 여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베리는 더욱 화를 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애당초 하는 짓이 이상하잖아. 갑자기 나타나서 여자의 가슴을 움켜잡지를 않나! 아니 그렇게 만지고 싶으면 자기 걸 만지면 그만 아니야? 왜 니나나 다른 사람들 가슴은 그렇게 만져대는 거야? 이 변태 할멈아!”
  매우 빠른 속도로 비난을 퍼부었다. 여인은 우는 시늉을 하며 힐끔힐끔 베리의 화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거 만지는 건 좀 이상하잖앙.”
  “…애당초 다른 사람 가슴을 만지는 것도 이상하거든. 남자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 잡혀가 손 잘리는 거 몰라?”
  “힝! 몰라 그런 거. 난 어차피 여자니까. 그것도 나라들의 법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다크 엘프의 피가 사분의 일이나 흐르는 쿼터라고!”
  여인은 우는 시늉을 더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을 편 채 말하였다.
  “저 파렴치한 인간은 당장 말살시켜야 해.”
  “아주 그냥 번개를 몇 방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변태 할망구야!”
  “힝…….”
  니나와 베리가 잔뜩 화를 내며 말하였다. 게다가 베리는 오른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팔찌로 여인을 위협하였다. 여인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죄 없는 소년을 확 끌어안았다.
  「웁! 웁!」
  소년의 얼굴이 정확하게 여인의 가슴 사이에 파묻혔다. 다른 남성들 같으면 천국을 상상하며 즐거워했겠지만, 얼굴이 밀착되는 바람에 숨을 쉴 수가 없는 소년에게는 오히려 지옥이 떠올랐다.
  “어이 마스터.”
  “힝? 왜?”
  “저 사람… 그러다 죽겠다.”
  “…….”
  베리가 손가락으로 소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호흡을 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팔의 힘을 풀어주었다. 여인의 품속에서 해방된 소년은 헉헉대며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런데 베리베리.”
  “뭐야.”
  “이 아이 정말 누구야?”
  “몰라. 주었어.”
  “정말? 그러면 내가 가져도 돼?”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여인이 묻자, 베리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머릿속에 든 생각이 모두 이상한 것들뿐이라 도저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베리가 입만 벙긋하며 말을 하지 않자, 여인의 시선은 니나에게로 향했다. 니나는 마침 검을 칼집에 꽂아 넣고는 소파로 와서 앉았다. 니나는 여인의 눈길을 받자 냉랭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키시스야.”
  “응? 뭐라고?”
  “키시스라고.”
  “설마 그 키시스?”
  여인이 재차 묻자, 니나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홱 돌려버렸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리베리 진짜야?”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언어와 행색이 처음 듣고 보는 거니 아마도 그렇겠지.”
  “정말?”
  베리의 말에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연약한 초식 동무 같았다.
  “저기 정말로 키시스?”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년이 여인의 질문에 답할 리가 없었다.
  “맞나 보네. 그러면 정말 오랜 만에 차원의 문이 열린 거넹. 거의 백 년 만이었던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잖아. 일단 저 사람부터 어떻게 해 봐.”
  베리는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파며 말하였다.
  “그래? 그러면…….”
  여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벽에 있는 책장으로 깡충깡충 뛰어가더니, 먼지가 수북이 쌓인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때마침 하품을 길게 하던 베리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그리고 여인에게로 급히 달려가려고 했는데,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여인이 뭐라 주문을 외운 다음에 손가락으로 소년을 가리켰다. 여인의 손에서 하얀 광선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것이 정확하게 소년의 머리에 명중하였다. 소년은 갑작스런 공격에 피하지도 못하고 광선에 정통으로 맞았는데, 광선이 머리에 닿자마자 폭발을 일으켰다.
  “이 봐! 마법 성공률 제로인 네가 마법을 사용하면 어떻게! 게다가 언어 관련 마법은 6서클도 넘잖아. 차라리 길드에 있는 다른 놈을 불러다가 부탁하면 될 걸 가지고 왜 네가 하냐고! 이 머저리야!”
  베리가 잔뜩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니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급히 소년에게로 달려왔는데, 소년의 얼굴을 톡톡 때리며 정신을 차리라고 외쳤다.
  가뜩이나 갈색 피부였는데, 방금 전의 폭발로 완전 검게 얼굴이 그을린 소년은 해롱거렸다. 머리는 좌우로 움직였고, 눈은 반쯤 풀렸다.
  “이, 이봐! 정신 좀 차려 봐.”
  “지금 길드에 마도사 없어?”
  “응. 없어.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했지롱.”
  니나가 여인에게 물었다. 큰일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무사태평한 얼굴로, 아니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린 채 여인이 답했다. 니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만 벙긋거렸다. 도저히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에고고, 이, 이게 뭐야.”
  소년은 정신이 조금 맑아졌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였다. 그것도 다른 세 명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였다.
  “거짓말…….”
  “말도 안 돼.”
  니나와 베리는 경악했다. 다크 엘프의 피가 사분의 일이나 흐르지만 성공률이 제로인 마스터가 성공했다. 그것도 6서클이나 되는 고위 마법을 성공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에 니나와 베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호호! 그것 봐. 성공했잖앙!”
  마스터가 매우 즐거워하며 깡충깡충 뛰었다.
  “우리 귀엽게 생긴 아이양. 이름이 뭐야?”
  “예?”
  소년도 그들의 말이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제 말을 알아들으시는 건가요?”
  “그럼, 그럼. 내가 마법을 사용했지롱. 6서클이나 되는 고위 마법을 내가 성공했지. 호호, 나한테 고맙게 생각해.”
  “아, 예. 그, 그거 고맙습니다.”
  소년은 엉겁결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스터는 깔깔대며 웃었고, 소년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이름이 뭐양?”
  “예? 제 이름이요? 기수라고 하는데요. 서기수예요.”
  “응? 이름이 서기수라고 해? 참 특이한 이름이넹. 아, 참고로 내 이름은 메모리아야. 풀 네임을 말해주자면 메모리아 프라그멘 제스 템펠덴이지만, 메모리아라고 불러줭. 아니다, 넌 귀엽고 멋있고 예쁘기까지 하니까, 특별히 리아라고 불러도 돼. 호호호.”
  메모리아는 자신의 볼을 기수의 볼에 댄 채 마구 비벼댔다. 기수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볼에다가 마구 뽀뽀까지 해댔다.
  “저, 저기 이러시면 고, 곤란합니다. 제발 놔주세요.”
  기수는 손으로 메모리아의 얼굴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생긴 것과 달리 힘이 무척이나 좋아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언제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놨는지, 볼에 키스 마크가 여러 개가 새겨지고 말았다.
  “말하는 것도 참 귀엽네. 너 참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는 목소리까지 지녔구나. 아직 변성기도 안 지난거양?”
  “예? 아, 변성기요. 사실 지난 지 한참 되었는데요. 그게…….”
  기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확실히 기수의 목소리는 중성 톤으로 남녀 구분이 불가능했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여자처럼 꾸미고 다니는 것도 괜찮겠넹. 호호.”
  “예? 아, 아니 그런 건 좀. 아니 그리고…….”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안 되었다. 낯선 곳에 갑자기 떨어져서 병사들에게 쫓겼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급류에 휘말려 간신히 살아났다 싶었더니 이상한 여자가 갑자기 끌어안아 숨 막혀 줄을 뻔 했고, 이번에는 속옷 차림의 여성한테 희롱당하고, 단 이틀 만에 별별 일을 다 겪었다. 그래서 기수는 황당한 나머지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이것 좀 놔주세요.”
  “그래. 변태 아줌마. 그만 좀…….”
  베리가 메모리아를 말리려고 입을 열며 다가갔다. 그런데 니나가 더 빨리 움직여서 기수에게서 메모리아를 떼어내 한쪽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그리고 기수 옆에 턱 하니 앉았다.
  “힝 뭐야?”
  메모리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니나를 바라보았다. 니나는 고개를 살짝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차가운 시선을 메모리아에게 잔뜩 보내주었다. 메모리아는 결국 체념을 했고, 울상이 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옷 좀 입어라, 이 변태 색골아.”
  “그런 건 귀찮단 말이야.”
  “하아……. 도대체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 하여간 부끄럽다는 말을 모르는 것 가타.”
  베리의 말에 메모리아와 니나가 동시에 “내가 뭘?”이라고 말하였다. 베리는 더욱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기수는 잠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관망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기수에게 집중되었다.
  “한 가지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뭔데?”
  기수의 말에 베리가 답하였다. 기수는 베리를 쳐다봤다가 시선을 살짝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카스티안 대륙 중앙에 위치한 파탈리아 왕국. 네가 살던 세계와는 아주 다른 곳일 거다. 뭐, 이렇게 된 것도 운…, 아니 여러 가지 상황에 말린 거라고 생각해.”
  “예?”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베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베리는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메모리아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메모리아는 손을 맞잡으며 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차원의 문에 빨려 들어온 거야. 그래서 전혀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우리 세계로 건너왔징.”
  “차원 이동이라든가 뭐 그런 건가요?”
  “응. 뭐 비슷하겠지? 아마?”
  메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차원의 문은 나도 잘 몰라성. 사실 드래곤들이나 조금 알 거양. 그런데 네 세계에도 드래곤이 있을라낭.”
  메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기수를 바라보자, 기수는 “드래곤은 살지 않지만, 책에서 본적은 있어요.”라고 답하였다.
  “네가 살던 세계와 여기가 비슷한가 보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뭐라고 할까, 제가 원래 살던 곳은 마법 같은 것도 없고, 드래곤과 같은 생명체도 없어요. 사실 지성을 지닌 존재는 인간이 유일할 거예요. 아마도…….”
  “응? 그래? 그러면 다크 엘프에 대해서 잘 모르겠넹. 사실 내가 쿼터거등.”
  기수의 말에 메모리아가 자신의 양쪽 귀를 덮은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며 말하였다. 기수의 시선이 메모리아의 귀로 향하였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뾰족하였다.
  “순혈들은 귀가 훨씬 길지만, 나는 사분의 일만 피를 이어받아서 뾰족하기만 해. 하지만 피부색은 그대로 다 이어받았징. 뭐, 너도 갈색 피부라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말이양. 호호호.”
  메모리아는 즐겁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하지만 기수는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맞잡았다. 눈을 살짝 감은 것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뭘 그렇게 생각행?”
  “예? 아 그게…….”
  “혹시 차원의 문에 빨려 들어올 때 다른 사람들도 있었던 거양?”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더니 이상한 곳으로 이동했었거든요. 그리고는 곧바로 무기를 든 병사들한테 쫓겨서 계속 도망만 쳤어요.”
  기수는 악몽 같았던 어제 일을 떠올리며 힘없이 답하였다. 얼굴표정은 매우 침울했고, 시선은 땅에 고정된 상태였다.
  “다만…….”
  “다만?”
  기수가 말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본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수는 미간을 찡그려가며 열심히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그 어둠에 휩싸일 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봤던 것 같아요. 사실 제 주변에 여섯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주변이 컴컴해질 때 그분들의 모습만은 보였어요. 그리고 다시 환해졌더니 보이지 않았고요.”
  “그러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 세계로 넘어왔을 거양. 같은 세계에서 건너오더라도 도착 지점이 제각각인 경우도 많았거든. 그런데 이상하네. 보통 차원의 문이 열릴 때는 많아야 세네 사람까지만 휘말렸었는데, 일곱 명?”
  메모리아가 안경을 매만지며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든 눈을 위로 뜨더니,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고, 제일 오른쪽 위의 서랍을 열었다. 메모리아는 서랍 안에 담긴 양피지로 된 종이를 한 장 꺼내들었고, 다른 손으로는 책상 위에 놓인 인주를 하나 집었다.
  기수는 멍한 표정으로 메모리아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자의 속옷 차림을 태어나서 처음 본거라, 영 부끄럽고 적응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 여깅.”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메모리아가 기수 앞으로 종이와 인주를 밀어주었다.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 앞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저기 여기에 뭐라고 쓰인 거죠?”
  시선을 종이의 문자들에게 고정시킨 상태로 물었다. 말은 통했지만 무슨 문자인지 통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메모리아가 웃으며 답하였다. 이제까지 잠잠히 앉아 있던 베리와 니나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쭉 빼들어 기수가 들고 있는 종이의 글들을 읽어보았다.
  “이, 이게 뭐야!”
  “…….”
  베리와 니나가 깜짝 놀라며 기수가 들고 있던 종이를 빼앗으려 하였다. 하지만 메모리아의 반응이 더 빨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수 반대편의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기수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기수의 오른손을 낚아채고는 붉은 인주에다가 기수의 엄지를 가져다댔다.
  “에?”
  상황파악이 덜 된 기수가 메모리아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이, 들고 있던 종이는 어느새 그녀의 손으로 넘어갔다.
  “도장 꾸욱!”
  메모리아는 즐겁게 말하며 인주가 묻은 기수의 엄지를 문장 제일 마지막 줄의 오른쪽에 가져다 댔다. 기수가 깜짝 놀라며 손을 뗐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선명한 지문이 새겨진 뒤였다.
  “무,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
  “응? 그런 건 나중에 차차 알려줄겡. 호호호.”
  기수가 물었지만, 메모리아는 답해주지 않았다. 메모리아는 베리와 니나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서더니, 급히 책상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왼쪽 아래에 놓여 있는 금고를 열어 안에다가 종이를 집어넣고 쿵하고 닫았다. 베리가 열심히 쫓아갔지만 허사였다.
  “이런!”
  베리는 애꿎은 금고를 주먹으로 내리 쳤다. 주인 외에는 절대 열리지 않는 마법의 금고였기 때문에, 기수의 지장이 찍힌 문서를 빼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저, 저기 방금 전 문서에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초초해진 기수가 니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니나는 기수의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기만 할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아, 뭔가 머리가 돌 것 같아. 이런 폐쇄된 공간에 저 인간이랑 같이 있다가는 내가 미칠 거야. 분명 미칠 거야. 아 돌겄네.”
  베리는 검은 두건을 벗더니 자신의 황금빛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뒤,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베리는 방을 나서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며 기수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베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다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갔다.
  “나도 그만 쉬어야겠어.”
  니나는 평소의 차갑고 침착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꺼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밖으로 향했다. 그녀 역시도 나가기 전에 기수를 불쌍한 눈길로 쳐다보고는 갔다.
  “저기, 메모리아 씨라고 하셨죠?”
  “메모리아 씨가 아니라. 리아라고 부르라니까. 우리 사이에는 그냥 리아라고 불러줘. 응? 응? 그렇게 불러줄 거징?”
  “예? 아, 예. 리아 씨.”
  “그게 아니야. 리아! 호칭은 빼고 그냥 리아라고 불렁.”
  방해꾼들이 사라지자 메모리아는 기수의 옆에 달라붙었다. 기수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매우 매혹적인 말투로 말하였다. 마치 기수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기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저, 리, 리아. 방금 전의 문서는 도대체 뭔가요?”
  말을 더듬으며 기수가 묻자, 메모리아는 씽긋 웃으며 답했다.
  “그란디스 비르의 가입서야. 너는 거기에 지장을 찍었고, 따라서 오늘부터 그란디스 비르의 길드 멤버가 된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란디스 비르? 길드?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기수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메모리아게 물었다. 메모리아는 기수의 목을 감싸던 팔을 풀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바닥에 한쪽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 천을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나는 말이지.”
  장난기로 가득 찬 음성이 아니었다. 유혹하는 것 같은 달콤한 음성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코맹맹이 소리도 아니었다. 평소와는 달리 침착하면서도 낮게 깔린 매혹적인 음성이었다.
  메모리아는 기수의 반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고, 전체적으로 매우 느긋한 모습이었다. 메모리아는 자신의 시선을 기수의 눈에 고정시킨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래 보여도 그란디스 비르의 마스터이고, 남작의 작위를 받은 귀족이야. 그리고 내게는 너를 도와줄 의무가 있어.”
  “예?”
  메모리아의 말에 기수가 반문하듯 물었다.
  “나의 길드에 속한 사람이 너를 구해 이곳으로 돌아온 시점부터, 나는 너를 도와줄 의무가 있어. 도움을 원하는 의뢰인을 절대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의 철칙이야.”
  “하지만 제가 길드에 가입하는 것과는…….”
  기수는 길드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메모리아가 기수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키시스는 나라들이 원하는 힘을 지니게 돼. 너는 나라들의 소용돌이 휘말리게 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키…시스?”
  “이세계인을 부르는 우리들의 호칭이지. 다른 사람들을 가리킴과 동시에 강한 힘을 지닌 자를 뜻하기도 해.”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어요. 마법은커녕 검도 다루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기수의 말을 듣고 메모리아가 빙긋 웃었다.
  “그럴 지도 모르지.”
  “그로 저는 지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찾아야 해요. 돌아갈 방법도 알아내야 하고요. 그래서…….”
  “그래서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것이 좋아.”
  기수의 말을 또다시 끊으며 메모리아가 말했다. 기수가 시선을 메모리아의 얼굴에 고정시켰는데, 그녀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길드가 하는 일은 의뢰의 해결과 유적 탐사야. 따라서 적대국까지 파고 들어가며 여행을 다니고, 나라들 곳곳의 정보를 수집하지.”
  “그러니까 그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정보도 알아내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빙고!”
  메모리아가 손가락으로 기수의 얼굴을 가리키며 답했다. 그녀는 기수를 향해 씽긋 웃어주더니,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자신의 책상 위로 걸어갔고, 그 위에 놓여있는 도장 비슷한 것을 집어 들었다. 메모리아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기수에게 다가오자,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 물건을 가리키며 “그건 뭔가요?”라고 물었다.
  “일단 오른손부터 줘봐.”
  “예? 예.”
  불안한 내색을 띠운 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메모리아는 기수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았고, 손등에다가 도장을 탁 찍었다.
  “이걸로 가입은 끝!”
  메모리아가 도장을 떼었다. 기수의 손등에는 원 안의 정삼각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핑크빛이었다.
  “참고로 베리베리는 왼쪽 가슴 부위에 새겼어.”
  “혹시 이게 길드 마크인가요?”
  “그래. 이걸로 너는 그란디스 비르의 일원이야. 그리고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은 각지에 퍼져 있는 유적들을 조사하는 게 될 거고.”
  메모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도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수는 메모리아의 말에 깜짝 놀라며 동그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도 아직 고대의 유적들에 무슨 힘이 있는지 다 몰라. 혹시 알아? 그 중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을지.”
  “아, 그렇군요.”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지내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게 낫잖아? 네 힘으로 사람들도 찾아 나설 수 있고,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있고.”
  기수가 메모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기수가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를 숙여 메모리아에게 인사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예법에 메모리아는 잠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윽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며 말하였다.
  “그란디스 비르에 온 것을 환영해.”
  메모리아의 말에 기수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기수의 얼굴에 처음으로 여린 미소가 감돌았다. 그 모습에 메모리아는 또다시 이성을 잃고, 기수에게 달려들었다.
  “꺅! 정말 귀여워!”
  “켁, 이, 이거 놔주세요. 수, 숨 막혀요!”
  기수의 키는 대략 175cm 가량이었고, 메모리아의 키는 그보다 5cm 가량 더 컸다. 게다가 메모리아는 현재 탁자 위에 올라간 상태였다. 결국 기수의 머리는 메모리아의 가슴 위치에 있었고, 그녀가 팔을 뻗어 머리를 끌어당기자, 또다시 가슴 사이에 머리가 파묻히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웁웁!”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기수는 열심히 양 손으로 메모리아를 밀쳐내려고 하였지만 도대체 무슨 힘이 그리 센 것인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기수는 속으로 ‘정말 숨 막혀 죽는 거 아니야?’라고 절규하며 계속 몸부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