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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전쟁 「Prisoner Princess」

2006.12.24 10:13

갈가마스터 조회 수:1960 추천:2

extra_vars1 조용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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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이잉.

  모터가 억지로 역류하는 소리와 함께 응급실의 문은 금새 열렸다. 자동제어로 작동되는 문이기에 ID카드를 대면 열리게끔 설계되었지만 가끔 기계 오작동으로 인한 문제 때문에 좌물쇠가 걸려 있지 않는 한 이렇게 수동으로도 열리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길버트는 문을 열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니나가 그를 제지하려고 손을 뻗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순간적으로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머뭇거려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길버트가 완전히 사라지자 니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벽에 기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길버트에게 한줄기 희망을 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울음을 달랠 때와는 전혀 달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이 전부였으니까.

  “…도미니크….”

  그녀는 도미니크의 이름을 작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데 길버트를 믿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Prisoner Princes」
Wish to the Star
제 11 화. 조용한 미소





  “문 여는 매너가 완전 꽝이로군.”

  과연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는 키 작은 늙은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주제에 의사랍시고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긴 하지만… 머리도 감지 않는 건가? 서릿발처럼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미친놈처럼 산발하고 돋보기 안경너머로 두께가 10cm정도 되어 보이는 의학서적을 흘겨보는 것이 꼭 은둔형 폐인 같았다. 그는 바로 이곳 어스워드 본진의 프리닥터(*)로서 닥터 D라는 가명을 가진 괴짜 노인이었다. 그는 보는 바와 같이 손에서 좀처럼 책을 놓지 않는 지독한 독서광으로 유명했는데,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곰팡내 나는 책이라든지 구석에 촘촘히 쌓여 있는 수북한 서적의 산을 보면, 이곳이 응급실인지 도서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라는 인간이 저런 세균덩어리를 응급실에 들여놓다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응급환자라도 이런 곳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긴 그 때문인지 저 미치광이 늙은이가 온 뒤로 이곳은 도무지 응급실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위급한 환자라곤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는 조용한 곳이 되어버렸다. 아직 숙소가 정해져 있지 않은 도미니크가 이곳에 온 이유도 조용한 곳에 짱 박혀서 궁상이라도 떨고 싶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쯤 되면 저 미치광이에게 본진의 응급실을 맡긴 볼케인 단장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물론 그 유명한 유성우 낙하 사건이 있은 직후, 용병세계의 도래와 맞물려 등장한 프리닥터들이 이렇듯 한 곳에 눌러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거니와 하물며 책에 파묻혀서 현실 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는 듯한 이런 늙은이를 응급실장이라는 직함으로 떡하니 앉아 있게 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실 저 늙은이가 실력이 있다는 것이 하늘의 장난이라면 장난이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응당 저런 사람에게 목숨을 맡겨도 괜찮을까라고 의문부터 들겠지만, 저 노친내가 손봐서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라곤 이 세상에 단 셋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아들 내외와 사랑스러운 손자라는 것이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일테지만…. 어쨌든 그가 실력 있는 의사라는 사실에 거짓은 없었고, 그나마 저기 쌓여 있는 책들이 완벽하게 소독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면 작으나마 위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닥터 D가 명망 있는 의사라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길버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아닌 겉모양은 멀쩡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길버트는 반투명 유리로 차단되어 있는 응급실에 집중하며 스쳐지나가듯 대답했다.

  “난 매너랑 담 쌓은 사람이야, 늙은이.”
  “쯧쯧, 쇼펜하우어 왈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면 동물이 사람이다’라드니, 내가 그 비관론자 미치광이의 말에 동의를 할 줄이야. 정말이지 멧돼지가 따로 없어.”
  “시끄러, 나 지금 화났으니까 성질 돋우지 마. 도미니크 안에 있지?”

  독설가인 닥터 D는 못내 아쉬운 듯 푸념조로 혀를 끌끌 차더니, 손가락으로 병실 문을 가리켰다. 니가 찾는 인간은 저 안에서 궁상떨고 있으니 알아서 끌고 사라지라는 뜻이었다. 단순히 독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길버트는 대답도 없이 응급실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환자가 누워 있어야 할 침대 위에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도미니크의 모습이었다. 이불과 배게 사이로 삐져나온 주황색 머리카락이 그가 도미니크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서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 같은 동생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더러운 슬럼가에서 몰살당했다. 거기까진 이해하겠다. 그럼 거기서 동생들 따라 뒈지던가 할 것이지 여기까지 살아 돌아온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니! 길버트는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병신 같은 새끼! 어서 일어나지 못해?!”

  기어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길버트는 도미니크의 머리맡까지 가서 이불을 잡아당겼다. 도미니크는 처음엔 이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소 저항을 했으나 우악스런 길버트의 손아귀에 견디지 못한 침대보가 뜯어져 나가며 몸을 돌리고 누워 있는 그의 전신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

  그 순간 길버트는 넝마가 된 이불을 든 채 말없이 도미니크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갓 태어난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가늘게 떨고 있는 그의 모습과 촉촉하게 젖어 있는 배게가 눈에 들어오니 이성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마치 빛이 두렵기라도 하듯 팔로 얼굴을 가린 도미니크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고요하지만 처절하게…. 그 옛날 아무도 모르게 오열하던 자신과 같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길버트는 그 때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쳇!”

  길버트는 지치기라도 한 듯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를 흘리며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에 들린 이불을 땅 바닥에 훌쩍 내버리며 그는 도미니크에게 물었다.

  “…울고 싶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목이 메여 울먹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싫었겠지. 그 때문에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공간을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이리라. 실컷 울고 울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울고 또 울고 싶었으리라. 그것 외엔 떠올릴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을 테니까.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들은 대답이 없고 죽은 자들은 살아남은 자에게 끝도 없는 후회와 회한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것을 길버트는 잘 알고 있었다.
길버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받치고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궁상 그만 떨고 일어나.”
  “…….”

  문득 길버트가 낮고 서늘한, 무서운 목소리로 도미니크에게 말했다. 부탁이 아닌 명령. 당연스레 도미니크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란다고 일어나면 그것이 병신, 호구인 것이다. 그러나 길버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어-나-라-구!”

  그는 불 같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도미니크의 멱살을 끄집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희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 대면한 도미니크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시뻘겋게 부어버린 눈자위와 얼굴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울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멱살을 잡고 있는 길버트의 손을 붙잡은 채 아직까지 눈물이 아롱거리며 맺혀 있는 호박석 같은 눈동자로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분하냐? 지금 기분 같아선 아무나 죽이고 싶겠지? 그럼 벌떡 일어서서 닥치는대로 죽여 새꺄!”

  길버트는 그대로 도미니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당탕탕!

  “끄으응. 교양이라고는 발톱의 떼만큼도 없는 놈들.”

  병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닥터 D는 짐짓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며 책을 덮어들고 밖으로 나섰다. 저쪽 볼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하고 아늑한 자신의 방으로 가서 책이나 마저 읽을 요량이었다.

  “음?”

  그런데 방 밖으로 나서자마자 문득 그의 시야에 마치 죄라도 진 듯 벽에 바짝 기대고 숨어 있는 니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에서 굉장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일까? 니나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보랏빛의 눈동자를 내리깔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보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붕대에 휘감겨 있는 그녀의 오른손이었다. 핏물이 살짝 베어 나온 것이 하도 주먹을 꽉 쥐어서 상처가 도진 모양이었다. 그는 두꺼운 안경코를 슬쩍 들어 올리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남 걱정하기 전에 자기 걱정이나 좀 할 것이지.”
  “예?”

  지나가는 어투로 그가 말하자 니나는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닥터 D는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 눈썹을 움찔거렸지만 말을 반복하는 걸 싫어하는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곁을 스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 모를 그의 말을 곱씹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에서 도미니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이래요?!”

  도미니크는 길버트의 손에 의해 땅에 처박힌 뒤에야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말문을 열고 소리쳤다. 울먹이는 음성, 적대적인 눈동자.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건 길버트가 아니었다. 그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는 권력의 그림자, 자신의 동생들을 모조리 죽여 없앤 형태 없는 어둠,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가 그의 눈동자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자신을 불사르는 양날의 검이었다. 끝없는 자학과 길을 잃은 분노는 결국 주인의 몸을 갉아 먹을 뿐이기에.

  길버트는 그것을 아들의 목숨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알 수 있었다.

  “왜 이러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길버트는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서 질질 짜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동생을 사지에 남겨두고 용병질이나 한다고 노닥거린 네 놈이 뭐가 잘나서 울고 지랄이야?!”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그래! 난 울 자격도 없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잖아? 매일 같이 죽이고 죽어나가는 그 지옥같은 전쟁터에 그 애들을 내버려두고 간 내가 속죄할 수 있는 일이 그 애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것 말고 뭐가 더 있는데?
도미니크는 금방이라도 길버트의 말에 반문하며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차마 입 밖에 내지도 못한 채 자조하며 자기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할 뿐이었다. 비겁하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분노를 억누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답이 궁해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비난이 자신을 향해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병신! 그럼 나가 뒈지면 되잖아!”

  퍽! 자학적인 그의 태도에 못 견딘 듯 길버트가 달려들어 도미니크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보호자를 위한 간이침대가 뒤집어질 정도로 크게 처박힌 도미니크를 노려보며 길버트는 성난 황소처럼 씩씩 거렸다.

  “오만한 새끼…. 비겁함에도 정도가 있는 거다! 동생들의 주검을 앞에 두고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놈이 그런 사치스런 소릴하고 자빠져있어? 하! 결국 죽을 용기도 없어서 살아 돌아온 주제에 질질 짜면서 용서를 빌어보시겠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이 널 용서해 주기라도 할 거 같았나보지?”

  길버트는 도미니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런데 니가 착각하는 게 있어! 네 놈이 용병의 문턱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이미 그런 사치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타인의 목숨을 팔아서 돈을 버는 더러운 새끼가 어디서 그런 물러터진 생각을 하고 있어! 네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 네 목숨도! 그리고 니 동생들의 목숨도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되어버린 거야! 니가 이제부터라도 아니, 멀리 볼 것도 없어! 얼마 전에 있었던 아르빌 요새공략전에서 네놈의 해킹 때문에 죽어 나자빠진 반란군의 목숨만큼 너희들 목숨의 값어치는 떨어진 거라구!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면서 우리들의 영혼은 점점 타락하는 거니까!”

  그는 도미니크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일으켜 세운 뒤, 그의 두 눈을 내려다보며 이어 말했다. 회색 캡 아래에서 너무 오랫동안 불을 지펴 재가 되어버린 눈동자가 눈물로 흐려진 도미니크의 호박석 같은 눈동자를 똑같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듯 타올랐다.

  “넌 결국 동생들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이 위험한 도박에 참여한 거야! 그 한 푼도 안되는 쓰레기 같은 영혼을 코인으로 내걸고! 이래도 네가 울 수 있다고 생각해? 울어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고상한 척 울고 있으면 원죄로 더럽혀진 네 영혼의 값어치가 올라가기라도 할 것 같아?!”
  “…흑 흐이잉….”

  기어코 도미니크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참지 못하고 뿜어져 나왔다.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길버트의 독설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찔렀고 정곡을 찔리자 반박할 말이 너무도 요원했다. 반박하고 싶다! 나는 죽기 싫어서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고! 결코 나 자신을 위해 동생들의 생명을 담보로 건 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이미 길버트의 말에 동조하며 그에게 끝이 없는 고문과 린치를 가해왔다. 그 고통과 절망은 눈물로 상징화 되어 마치 용암처럼 밖으로 분출되어 흘러 나왔다.
그의 오열을 묵묵히 보고 들어주던 길버트는 마지막 희망의 싹조차 잘라버리겠다는 듯 도미니크의 코앞에 대고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네 놈을 위해 아주 좋은 걸 하나 알려 주지. 극비인데 말야. 그 슬럼가를 폭격한 녀석들….”

  순간 도미니크가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길버트를 올려보았다. 호박색 눈동자에 어렴풋이 스쳐지나가는 살기(殺氣), 그것을 놓칠 길버트가 아니었다. 조명을 후광으로 받아 온통 회색빛 일색인 그는 도미니크를 조롱하듯 히죽 비웃으며 청천벽력같은 선언을 내렸다.

  “…그 녀석들, 바로 우리 어스워드야.”

  도미니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부들부들 떨린다. 초점을 어디 한 곳으로 두지 못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눈동자. 숨이 막히는 지 헛숨을 들이키며 떨리는 눈동자로 길버트의 시선과 교차한다. 길버트는 그의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듯 짐짓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놀랐냐? 뭘 그리 놀래? 그것이 용병이고, 그것이 네가 그렇게 동경해오던 어스워드야. 우리가 사람 죽이는데 연령을 따질 것 같았나보지? 네 동생들 목숨은 과연 얼마였을까 궁금하지 않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도미니크는 비명을 크게 내지르며 길버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나 그런 것 쯤 간지럽다는 듯 길버트는 꿈쩍도 안했고 몇 번을 때려도 반응이 없자, 도미니크는 길버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큭!”

  일부러 놓아준 걸까? 아니면 손을 물린 것 때문에 놓아준 것일까? 너무도 손쉽게 멱살이 풀리자 도미니크가 미친 듯이 길버트의 품속으로 몸을 날렸다. 전형적인 싸움공식처럼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그 위를 점해 공격하려던 속셈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체급차이가 너무 났다. 하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선 무술의 고수도 상대를 봐가며 공격을 하진 못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당당하게 버텨선 길버트는 어금니를 뿌드득 깨물며 두 손으로 도미니크의 어깨를 고정하고 명치를 무릎으로 올려쳤다.

  “컥!”

  순간 위액이 역류하고 호흡이 멈춰버렸다. 도미니크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확인할 틈도 없이 길버트는 뒤이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반대쪽으로 넘겨버렸고 천장이 빙글 돌아가는 듯한 환상과 함께 도미니크는 ‘앗’하는 사이 크게 매치기를 당했다.
길버트는 웃기지도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 치며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는 도미니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려 도발했다.

  “어때 분하냐? 죽이고 싶냐?! 내가 죽이고 싶지? 그럼 덤벼! 얼마든지 상대해줄 테니까!”
  “으아아아!”

  벌떡 일어난 도미니크가 먼저 그에게 몸을 날렸다.

.
.
.

  독일과 덴마크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킬Kiel 항. 발트해 킬 만 안쪽에 위치한 이 커다란 항구는 북해와 발트해를 잊는 킬 운하의 동쪽 입구에 해당하는 도시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웅장함이라던지 중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니콜라이 성당의 아름다움은 제쳐두고라도 등화관제도 없이 지상의 별바다를 연상케 하는 도심의 전경은 전쟁통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밤의 이중성을 상징하듯 화려하게 타오르는 네온사인의 불빛과 술에 거나하게 취해 밤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을 유혹하는 밤의 요부들은 휘황찬란한 보름달 아래에서 어지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바이에른사(社)가 독일 연방으로부터 사들인 이곳은 네오 제네시스사(社)와 북유럽 기업 연맹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무언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도 공습은커녕 전쟁과는 거리가 먼 도원경인양 스스로의 타락과 쾌락을 위해 달음박질하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 인간들의 야누스적인 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평화롭군.”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도심의 마천루들 틈새로 군항이 보이는 평범한 여관집 창문에서 퀸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밤이슬에 동화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저 타락한 도시바람이 익숙했던 것일까? 여전히 무심한 표정의 퀸은 늘상 어둡기만 했던 평상시와는 달리 다소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퀸이 그런 소리도 다 하시고. 여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나보죠?”

  퀸의 곁에서 쌍안경처럼 생긴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들고 항구를 살피던 하빈은 측정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실실거렸다. 기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애주가인 그의 성격상 지금 당장이라도 주점으로 달려가 킬 항 특제 군항맥주를 잔뜩 들이키고 싶은 걸 참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 증거로 그의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맥주 캔을 들 수 있었다. 그는 캔을 비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목이 말라왔는지 측정기를 퀸에게 냉큼 넘기며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하빈이 냉장고 안에서 시원한 맥주 캔을 꺼내는 것을 보며 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쿵!

  그 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익숙한 갈색머리의 동양인 청년이 성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는 한 권우였다.

  “여, 권우씨. 어디 소득은 좀 있나요?”

  하빈이 캔 뚜껑을 시원하게 따며 말을 걸자 갈색머리의 청년, 권우는 짜증난다는 듯 소파위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소득은 개뿔. 개미 한 마리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방비가 완벽해. 빌어먹을…. 꼴에 발트해 함대의 모항이다 이거지.”
  “흐음. 비홀더에서 정보를 받았어도 이래서야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

  하빈이 들이키는 맥주를 바라보며 한 권우 본인도 갈증을 느꼈으나 지금 상황에 맥주가 목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한 권우는 맥주를 청하는 것 대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크게 내쉬는 걸 택했다.

  “벌써 한 달인가. 아버지가 저기에 잡혀 있는데 손도 못쓰다니.”

  한 달. 한 권우의 아버지 한 권태 함장이 바이에른 사 휘하의 유령 함대에게 끌려간 지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번 일은 기밀의 수준도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비홀더 길드에서 정보가 도착하는데 일주일의 시간을 허비해야했고 덤으로 독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곳까지 오는 것도 꽤나 긴 시간을 잡아먹어야 했다. 무엇보다 지금 AT는커녕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을 정도로 변변한 장비조차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방어군과 함대가 정박해 있는 군항에 침입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었다.

  “볼케인 단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나.”
  “흥, 어스워드 총 전력을 동원해도 어려운 작전이다. 이곳이 왜 여태 공습 한번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닐 테지?”
  “제길! 특작부대가 있잖아!”

  퀸이 코웃음치며 대꾸하자 권우는 자포자기라도 한 듯 큰 소리로 퀸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음을 권우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휴우, 이건 정말 만만치 않죠. 항만 시설을 경비하는 상비 병력만 오천에 바이에른 사병대 소속 AT가 모두 3개 대대 128기. 발트해 함대 휘하 해병대 일만 오천에 현재 이곳에 정박해 있는 함대 소속 구축함 5척에 순양함 2척, 중형항모 1척. AT 수송목적 강습 양륙함이 2척이니까, 휘우, 함대 소속의 AT만도 100기가 넘는군요. 모르긴 몰라도 유령 함대도 근처에 있을지 모르죠.”

  휘파람으로 절망적인 보고를 마무리한 하빈은 비홀더 길드가 제공해준 자료를 침대 위에 훌쩍 내버리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상황은 절망적, 어찌어찌 침투는 성공한다 쳐도 탈출하는 것까지 안전하길 바랄 순 없었다. 한권우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아무 말 없었고 그저 조용히 소파의 푹신함에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그래도… 갈 수 밖에 없겠죠?”

  하빈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항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색색으로 빛나는 도시의 향연 속에서도 유일하게 어둠 속에 잠겨있는 킬 군항은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도 퀸은 나즈막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아무런 해답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저 무기력하게. 이것이 퀸의 가장 큰 단점이자 현 상황에선 다른 이들의 기운까지 빼앗아 갈 정도로 더없이 좋지 못한 습관임에 분명했다.

.
.
.

  “하아, 하아.”

  엉망이 되어 버린 응급실 바닥엔 두 사람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온통 난장판이 되어 버린 그곳은, 장장 한 시간동안 이어진 두 사람의 싸움 덕분에 침대며 의자는 물론 탁자에서부터 환자들을 위한 각종 장비들까지 구겨지고 부서지고 엉망으로 흩어져버려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처참했다.

  “질긴 새끼.”

  거구의 길버트는 지친 듯 땀을 질질 흘리며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주로 얻어터진 쪽은 벌써부터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도미니크 쪽이었지만, 때려도때려도 좀비처럼 일어서면 패는 사람도 지치는 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도미니크는 정말 질기게도 일어났다. 마땅히 손속에 사정을 둔 것도 아니었는데 아픔도 모르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지 일어나고 또 일어난 것이다.
하긴 무리해서 일어난 덕택에 그만큼 더 맞았으니 도미니크의 상태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끄응.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삭신이 쑤시는군.”

  길버트는 숨을 다 골랐는지 한층 가뿐해진 모습으로 흐느적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문득 담배 생각이 간절했는지 조끼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담배 곽과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격렬하게 싸운 덕택에 담배는 처참하게 우그러진 상태였지만 개 중에서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것 하나를 용케 찾아낸 그는 담배를 어금니에 물고 그 끝에 불을 붙였다. 필터를 깊숙하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길게 내뱉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후우… 어이 도미 벌써 지쳤냐?”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도미니크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입안이 너무 심하게 터져서인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숨 쉴 때마다 입안과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것이, 맞아도 정말 심하게 맞은 모양이었다. 얼굴은 시뻘겋게 부어올라 눈도 뜨기 힘든 지경이었고 심장은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쉴 새 없이 펌프질하며 전신으로 피를 보내고 있었다. 머리는 윙윙 울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그것 때문에 현기증이 나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아하아.”

  하지만 왠지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인지 눈물은 금새 말라버렸고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다보니 뭔가 다 부질 없어졌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발길질하고, 달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힘이 모자라 주변 물건을 무기로 삼아 닥치는 대로 잡아 던지고 휘두르고, 그것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동생들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주먹이 길버트의 몸에 닿을 때마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동생들의 시신은 사라지고 길버트의 주먹이 안면을 강타할 때마다 회색 잿더미로 휩쓸린 고아원의 형상이 허물어져갔다. 늘상 동생들 뒤치다꺼리와 삶에 대한 애환 때문에 복잡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도미니크로서 이것은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백치처럼 몸을 움직이는 것이 이렇게 상쾌하다는 걸 그는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큭큭. 대답이 없는 걸 보아하니 내가 이긴 셈이군.”
  “하아, 하아…. 하아?”

  뜬금없는 말에 도미니크가 숨을 고르다가 멈칫했다. 이건 어차피 체급과 힘, 그리고 전투경력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불리한 싸움이었다. 애시당초 강아지한테도 당해내지 못하는 도미니크가 길버트를 이긴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겼다고 만족하는 길버트를 보자 도미니크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었다. 도미니크가 겨우 뜬 실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돌연 길버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농담이다 농담! 낄낄. 아 그 면상 보니까 웃겨 죽겠네. 꼭 라비니가 만든 호박 파이를 보는 것 같은데?”

  길버트는 그렇게 킬킬거리며 슬금슬금 일어나 출구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윽고 출입구 앞에 도착한 그는 꼼짝도 못하는 도미니크를 돌아보곤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히죽거리며 말했다.

  “자, 그럼 이 몸은 이제 갈 테니 여기 정리는 네 놈이 알아서 해놔. 여기 닥터 은근히 무서우니까 알아서 하라구.”
  “마, 말도…!”

  도미니크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픈 것도 잊고 입을 열었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통을 맞봐야했다. 길버트는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논 주제에 그게 재밌어서 죽겠는지 연신 껄껄 웃으면서 기어코 나가버렸고 도미니크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혼자 남게 되었다.

  ‘저, 저 썩을 인간.’

  사람을 반쯤 죽여 놓고 농을 건네다니, 거기다가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책임전가까지? 저 사람이 과연 제정신인지 도미니크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도미니크는 곧 체념이라도 한 듯 출구 쪽을 향했던 시선을 천장 쪽으로 옮기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하아….”

  하기사, 생각해보니 지금에 와선 길버트에 대해 별 반감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허탈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단순한 녀석이었나?’

  동생들을 몰살시킨 원수가 어스워드. 그 말을 길버트에게 들었을 때 그는 꼭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동경하고 있던 이상향이 철저하게 무너진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성을 잃은 이유의 대부분은 물론 동생들을 죽였다는 분노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깨어져 버린 환상에 대한 배신감도 어느 정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람 죽이는데 연령을 따질 것 같았나보지?’

  물론 알았다. 용병들이란 사람들을 죽이는 직업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스워드에 동경심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그저 멋있어서? 돈을 잘 벌어서? 유명하니까? 이제 와서 느낀 거지만 그는 어스워드가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여겼던 것 같았다.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히어로처럼, 동화 속에 나오는 용을 잡는 용맹한 기사처럼. 그저 맹목적인 추종이 그가 가진 동경의 원천이었으리라. 어스워드의 단장 볼케인 프라이야에 대한 수많은 소문과 승승장구하며 어디서든 패하지 않는 용병단의 전설. 그것은 어린 시절 슬럼가의 암흑 속에서 살고 있던 도미니크에게 꿈이자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목적은 동생들이라는 당위성을 잃었고 목표는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허탈하고 허망하여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고작 하루 동안 그리고 이 1시간 남짓의 싸움으로 모두 소진돼버렸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 커다랗던 불길도 지금은 아스라한 반딧불처럼 작아져 가슴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것이 사라지자 남는 것은 허탈함 뿐. 허무라는 이름의 허허벌판에 버려진 외톨이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의문스럽고 하잘 것 없이 느껴졌다. 삶에 대한 의욕조차 잃고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가르쳐줘. 난… 앞으로 어떻게…해야 하는지. 난… 뭘 해야 하지?”

  그는 형광등의 눈부신 빛 사이에서 대답하지 않을 동생들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자문했다. 길 잃은 양이 어미를 찾아 끊임없이 도움의 울음을 터뜨리듯 그는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묻고묻고 또 물었다.

  “뭘 하긴 뭘 해. 상처치료하고 잠이나 푹 자야지.”

  그러나 대답대신 들려온 것은 다소 신경질적인 노인의 냉소적인 목소리였다. 놀란 듯 고개를 쳐드니 난쟁이처럼 왜소한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두툼한 콧수염과 돋보기안경, 흡사 알버트 아인슈타인처럼 산발된 머리카락. 그는 바로 이 응급실을 맡고 있는 닥터 D였다.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주먹질이나 하고…. 야만스러운 놈들.”

  닥터 D는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며 주머니에서 위생장갑을 꺼내 손에 끼고 도미니크의 곁에 앉았다. 도미니크의 부풀어 오른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곧 혀를 끌끌 차며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부위를 일부러 쿡 눌러서 도미니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도 그는 서릿발같은 눈썹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쯧쯧쯧, 어린놈이 엄살은. 네 놈도 꼴에 남자라고 늙은이 손은 싫다 이거냐?”

  도미니크의 몸이 타박상외엔 상한 곳이 없어보이자 관심을 잃었는지 닥터 D는 무책임하게도 환자에게서 시선을 떼버렸다. 도대체가 치료를 해주겠다는 건지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게 엉망진창인 응급실만 스윽 둘러본 그는 문득 화가 난 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완전 도살장을 만들어놨구먼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짐승 같은 놈.”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할 수 있나니…”라고 중얼거리며 닥터 D의 분노가 사그라지나싶더니 갑자기 그의 시퍼런 두 눈에 넝마가 되어 버린 책 한권이 포착되었다. 빙하가 만들어낸 피요르드 지형의 U자 계곡처럼 꺾인 침대와 그 위에 엎어진 보호자용 간이침대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있는 그것은, 닥터 D에겐 꽤나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그가 소유한 수많은 책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서 느긋하게 읽으려고 침대(?) 옆에 놔둔건데, 저것이 삽시간에 걸레 수준이 되어 갈기갈기 흩어져 있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진공 보관되는 고서들처럼 귀한 책도 아니었다. 다만 책을 신성시하는 그에게 있어서 마치 채찍질 받은 순교자처럼 처참한 몰골을 한 책의 안타까운 형상은 길버트의 야만스런 모습과 겹쳐져 참을 수 없는 분노로서 다가왔던 것이다.
문득 잔잔한 호수 표면에 작은 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잠잠했던 그의 거친 주름살들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고 돌연 벌떡 일어난 그가 신경질적으로 출입구 쪽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어이! 거기 숨어있는 처자 이리 와봐!”
  ‘처자?’

  도미니크가 궁금한 마음에 힘겹게 눈을 돌리자, 반쯤 열려 있는 출입구 사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니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미니크는 순간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니, 니나?! 아야야야야….”
  “아, 도미니크….”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이라도 한 건지 니나는 얼굴을 살짝 상기시킨 채 그제야 슬금슬금 도미니크의 곁으로 다가왔다. 너무 심하게 부어서 마치 미트볼처럼 보이는 도미니크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보랏빛 눈동자를 살포시 내리깔았다. 말이 없는 그녀처럼 도미니크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겸연쩍은 듯 시선만 돌릴 뿐이었다. 그 때 그 둘의 사이로 닥터 D가 끼어들었다.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이니 너도 용병이니 응급처치방법쯤은 알 테지.”
  “예, 조금은….”

  니나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닥터 D는 의료 키트를 니나에게 떠넘기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잠시 정적의 시간이 흐른 뒤, 밖에서부터 엄청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니나가 조심스레 도미니크에게 다가갈 때쯤이었다. 두 사람의 두근거림이 극에 달할 때쯤 들려온 것은 닥터 D의 분노에 찬 일갈이었다.

  “네 이노옴!”
  “으잉? 이 늙은이가 왜 이래? 어어어어? 우악!”

  콰당!

  “도망친다고 내가 놓칠 줄 알고!”
  “헉! 늙은이 오늘 비아그라 먹었어? 다리는 짧으면서 존내 빠르네!”
  “닥치지 못해?! 이 야만스런 놈아! 오늘은 기어코 네 놈의 땅콩만한 뇌를 해부하고 말테닷! 오랑우탄 같은 놈!”

  우당탕쿵쾅, 마치 폭풍우와 해일이 밀어닥친 듯 굉장한 소음이 이어지고 의자가 날아가는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닥터 D와 길버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하,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마침내 그 소음이 잔잔해지자 도미니크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너무 어이가 없고 또 닥터 D에게 쫓기고 있을 길버트를 생각하니 고것 참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의 머리에선 동생들을 잃은 슬픔은 눈 씻은 듯 사라지고 현실을 보고 있었다.
입 안이 터진 것 때문에 아파서였을까? 아니면 죽은 아이들의 환영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문득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대신 도미니크는 한층 성숙해진 마음으로 이미 사라지고 없는 아이들을 향해 미소지어주었다.

  ‘미안해 얘들아.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 오랫동안 살아줄게. 너희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경험해서 언젠가 너희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들려줄 거야. 살고 또 살고, 성경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 날까지 살아남아 너희들 대신 받은 귀한 목숨 그대로 지켜나갈게. 너희들의 죽음이 가져다준 값진 교훈… 절대 잊지 않겠어.’

  문득 그는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니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입가의 미소만은 그대로 두고 그는 니나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

  “안녕, 니나? 좋은 아침이지?”
  “응?”

  따사로운 와이키키 해변의 바닷물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청록색 머리카락과 자수정처럼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연보랏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도미니크가 말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더니, 밖이 한밤중인 것을 상기하며 니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미니크의 호박석 같은 눈동자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잔잔하지만 따스한 미소를 입가 가득히 띠우며 대꾸했다.

  “…으응, 정말 좋은 아침이야 도미니크.”

  그녀의 미소를 가슴 깊숙한 곳에 담으며 도미니크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고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니나의 몸에서 나는 아련한 향기가 콧속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말끔하게 씻어주며 그를 꿈속으로 인도했다. 요 며칠 동안 미뤄왔던 수면에 대한 욕구가 한꺼번에 노도처럼 밀려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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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아자~ 한달이 넘게 끌어온 프리즈너심~~~ 켈켈켈
아무도 저에게 사건다운 사건을 넘겨주지 않으시니 심심하잖아욤~~!
여튼, 한권태 함장 구출 작전이라는 사건을 만들었으니~~~

아란님 고생 좀 하심!! 켈켈켈!!!

여튼, 이걸로 도미니크 찌질모드는 끝이셈~~ 킬킬킬킬~
아란님하의 음습한 요청은 단숨에 거절이삼!
찌질은 아카라 하나로 족했어욤.
요즘은 미하엘 놈이 말썽이다만.... 그 놈은 상관 안하기로 했으므로~ 패에스~~



PS:한동안 글을 안 썼더니 퀄리티는 개쪽임돠. =ㅅ=;; 이상하게 글이 잘 안써지심...
(생각해보니 당연한 건가.... ㅡㅜ)


PS2: 어라?! 이거 앞 줄 한칸 띄우는 것 적용 안되네요!! 이건 명백한 차별이야 ㅡㅜ

PS3: 잠깐, 독일이랑, 루마니아랑 시차가 어느 정도 차이나드라... 3시간이었나? 한시간이었나? =ㅁ=; 에라 모르심~ 어쨌든 지금은 한 밤중.


에에에에엥?!?!?! 이거 왜 장르 변경이 없어!!!!!!!!!!!!!!!!!!!!!11 커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