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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7.01.01 07:46

아란 조회 수:189 추천:4

extra_vars1 <font color="CC0303">정해진 운명의 종말</font>, <font color="3300CC">새로운 운명</font> 
extra_vars2 35<font color="3300CC">下</font><font color="CC0303">(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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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Y」 運命의 系統樹
最終夜.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下)








옅은 금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티 하나 없이 고운 하얀 피부. 유이의 기억으로는 분명 이 모습을 한 소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엘스틴 제1왕녀.
마지막으로 유이가 그녀를 보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때를 그 말 한 마디를 하면서 동시에 생각해 보았지만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었다. 정확히 확인된 것이 아닌 단순 소문일 뿐이긴 하지만 유이가 알기로는 마리카제 왕국이 무너지면서 엘스틴 왕녀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물론 프리벤터 제4부대 프로비던스에서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멸망하기 직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했지만 정황상으로 볼 때 그 혼란 속에서 그녀가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렇기에 행여 살아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게 된다면 기뻐해야 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고 유이도 엘스틴 왕녀와 이렇게 다시 만났을 때, 놀라기도 했지만 솔직히 기뻤다.

“마리카제 왕국 제1 왕위계승자, 엘스틴 유리시아 아리가에르 마리카제 데 시네프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하지만 기뻐하고 싶어도 엘트리움이 카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방심한 유리를 데려가는 것을 목격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엘스틴 왕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런 곳에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예전에 보아왔던 누구나 마음이 편해지게 만드는 미소를 드리우고 있는 그녀의 존재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다 유이가 알고 있는 엘스틴 왕녀가 마치 피로 물들인 것 같은 드레스를 입었던 적이 있었던가?

“너도 설마….”

엘스틴 왕녀는 앞으로 한 발자국 발걸음을 내딛자, 유이도 하려던 말을 멈추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허나 디스 아스트라나간으로 엘스틴 왕녀를 겨누고 있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엘스틴 왕녀는 유이가 마치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로 그 작은 입을 열었다.

“JUSTICE의 총수니까요.”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정확한 발음으로 엘스틴 왕녀는 말했다. 그러나 유이의 귀를 통해 들어온 그녀의 말은, 유이의 머릿속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끝없이 반복되어 들려왔다. 유이의 눈동자가, 그리고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칼끝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유이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면서 간신히 엘스틴 왕녀를 보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가보군.”

스스로를 저스티스의 총수라고 밝힌 엘스틴 왕녀, 그녀는 유이의 질문에 여전히 마이 페이스로 응수했다. 하지만 엘스틴, 그녀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은 오랫동안 전사로서 싸워온 유이라면 알 수 그저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저스티스는 12제가 지휘하는 것이 아니었나 보지?”

“정답.”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꾸민 것도 엘스틴, 너인가?”

“그것도 정답.”

“넌 엘트리움에게 조종 받고 있는 것이냐?”

“그건 오답.”

유이의 눈동자도,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칼끝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유이의 질문에 엘스틴이 하나씩 싱긋 웃으며 대답하고, 그것들이 하나 같이 보통 충격적인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엘스틴이 스스로를 저스티스의 총수라고 밝히자 유이의 마음은 처음에는 크게 떨렸지만 엘스틴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오히려 떨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몇 마디 진실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 유리는 어디 있지?”

유이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처음 엘스틴을 보았을 때와 다른 지독히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지금은 대답해 드릴 수가 없군요.”

유이의 질문에 엘스틴은 두 눈을 감으며 천천히 또박또박 답했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이는 자신의 발밑에 반중력 필드를 깔면서 번개같이 달려들며 엘스틴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내찔렀다.

.
.
.

뚝. 뚝.

피가 흘러내렸다. 베리도트는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등 뒤까지 삐져나온 레이의 팔뚝과 반 토막나버린 발뭉크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흉기를 방불케 하는 묵직한 손톱이 그의 육신을 헤집고 영혼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부분까지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는 각혈을 울컥 내뱉으며 힘겹게 레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졌나?”

『그렇다! 네 놈의 패배다! 베리도트!』

호기롭게 소리치긴 했지만 레이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털은 저주로 인해 바싹 타버린 잿더미처럼 검게 변색되었고 난자당한 전신에서 검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수라와도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베리도트가 만족스러운 듯 비릿한 미소를 힘겹게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하지만 네 녀석도 무사할 순 없을 것이다. 레이….”

『캬악!』

베리도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이가 괴로운 듯 두 눈을 치켜뜨며 그 우악스러운 입가에서 피를 벌컥 쏟아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는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위이이이잉.

반 토막 난 발뭉크의 나머지 반신이 그의 복부에 박힌 채 가늘게 울부짖고 있었다. 마치 고통에 찬 여인의 구슬픈 음색처럼 발뭉크의 울림은 높고 한이 서려 있었다.

『크르릉!』

전신을 관통하는 발뭉크의 저주! 그러나 맨 몸으로 지옥의 업화 속에 내동댕이처진 것 같은 극심한 고통도 레이의 두 눈에서 빛나는 의지를 빼앗진 못했다. 그의 두 눈동자에선 여전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전사의 강한 긍지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크아아앙!』

으직! 마치 자신의 고통을 밖으로 표출하듯 레이가 괴성을 지르며 베리도트의 목덜미를 물어뜯곤 휘둘러 그대로 날려버렸다. 거칠게 에메랄드빛 나무 내벽에 처박힌 베리도트의 오공, 그리고 가슴팍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베리도트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와 자신의 피로 온 몸을 적신 레이는 마치 수라와도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의 복부에 박혀 있는 발뭉크의 조각을 빼내기 위해 날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가 힘을 주면 줄수록 발뭉크의 반신은 그의 몸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에 비례해 고통은 배가 되어 뇌를 새하얗게 불태워버릴 듯 타올랐다.
고통에 저항하며 그 적의를 더욱더 불태우는 레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베리도트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멋지군. 역시 넌 최고의 적…이다.”

『크아아! 이 정도의 저주로는 나를 해할 수 없다! 베리도트! 나는…!』

푸확! 그러나 우렁찬 사자후가 끝나자마자 레이의 전신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발뭉크의 저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몸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이, 이건.』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레이를 흐릿한 선홍빛 눈동자로 쫓으며 베리도트가 실소했다.

“키, 킥킥, 아하하하…. 잊었나 레이? 쿨럭.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내 피는 말야. 흡혈귀가 아닌 것들에겐 ‘맹독’이라는 사실을…. 오래는… 못 갈 거다.”

태고에 신에게서 저주받은 흡혈귀의 피. 그 중에 순혈로서 더 이름 높은 베리도트의 피였다. 보통 때라면 수인족 특유의 자동치유로 순식간에 정화했을 테지만 발뭉크의 저주를 뒤집어 쓴 지금의 레이가 그것을 물리칠 힘이 있을 리 만무했다.

『네 이놈! 베리도트으으으으!』

“쿡쿡. 우습군. 내 최후가 고작 이 정도인가.”

『크아아아아아!』

심장과 함께 영혼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베리도트가 슬슬 한계가 온 건지 점점 뒷말을 흐리자, 레이가 쓰러진 채 신음과 분노를 뒤섞어 베리도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각혈과 함께 솟구치는 최후의 사자후는 이전과 비교해 형편없을 정도로 작아져 땅은커녕 대기를 떠도는 작은 정령들조차 떨게 하지 못할 정도였고, 그는 팔꿈치를 지지대삼아 일어서려했지만 이미 기력이 빠질 대로 빠져서인지 다시금 피바다로 얼룩진 땅에 고개를 처박아야했다.

『쿨럭, 쿨럭.』

황금 같던 눈빛이 서서히 쇠하여 옅은 레몬 빛으로 사그라지고 그가 자랑하는 재생력도 저주와 혼합된 ‘독’에는 무력한 듯 벌어진 상처에서 피로 상징화되는 생명의 정수를 구멍 뚫린 술통처럼 벌컥벌컥 내뿜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레이를 바라보며 문득 시선을 어둡게 물든 밤하늘로 옮긴 베리도트는 속삭이듯 낮게 중얼거렸다.

“웃어라. 카나드. 이것이 야환국의 군주라고 불리던 내 최후다.”

여전히 비릿하게 웃는 낯짝 그대로 베리도트의 몸이 재가 되어 스러져가기 시작했다. 구두 끝, 어깨 구석에서부터 시작된 ‘붕괴’는 이내 전신을 시꺼먼 잿더미로 만들며 불태웠고, 구멍을 통해 유입되는 산들바람에 재는 먼지가 되어 대기 중으로 빨려들듯 흩어졌다.

“아….”

문득 베리도트는 새하얀 불꽃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자기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회한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오래 기다렸나보군. 카나드….”

진홍의 코트와 바람결에 무성하게 흩날리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베리도트와 같은 선홍빛의 눈동자를 섬뜩하게 빛내며 환상처럼 나타난 카나드는 오랜 옛날 형이라고 불리었던 존재를 내려다보며 비릿한 냉소를 짓고 있었다.

“어때, 카나드? 내 최후가 꼴사납지는 않은가?”

지친 듯 약간은 허탈함이 묻어있는 그의 물음에 카나드가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
“그런가, 크큭. 큭큭큭. 크하하하.”

말을 마친 카나드의 입술이 가늘게 찢어지며 조소하자 돌연 베리도트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렇단 말이지!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베리도트는 끊임없이 웃었다. 전신이 산화해가는 와중에서도 정말로 유쾌하다는 듯 광기서린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곧 그는 산들바람에 휩쓸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그가 마지막에 카나드에게서 들은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광기로 얽힌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는 조용히 사라지는 베리도트의 육신과 함께 영원히 밤 향기를 머금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
.
.

“성질도 급하셔라.”

디스 아스트라나간은 엘스틴의 희고 고운 왼쪽 손가락, 검지와 중지 사이에 검 끝이 붙잡힌 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유이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녀가 저스티스의 총수라는 것을 떠올리며 이 정도 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납득하고 당황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바로 다음 순간, 튕겨 날아가듯 번개같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엘스틴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언제든지 바로 싸울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정말로 저스티스의 총수인가 보군. 그 짧은 거리에서 그것도 눈을 감고 있었으면서 간단히 두 손가락만으로 막아내는 것을 보니 말이야.”

“이정도도 해내지 못하고서 12제를 수족처럼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유이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엘스틴은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오른손을 폈다. 그러자 검은 구체가 파직파직 스파크를 일으키며 생기더니 그것은 상하로 길쭉해지며 어느새 흑요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은, 그리고 아스트라나간을 쏙 빼닮은 검으로 변하자, 엘스틴은 생성된 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은 뒤, 가로로 눕히며 칼끝을 유이에게 겨누었다.

“어라? 놀라지 않는 겁니까?”

“아니. 충분히 놀라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유이는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칼끝에 중력장을 엘스틴이 보라는 듯이 응축했다. 그리고 엘스틴도 클론 아스트라나간의 칼끝에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응축했다. 유이, 엘스틴…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묘하게 쓴 웃음을 지었다.

“저를 쓰러뜨리든 또는 패하든 결과적으로 당신은 원하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걸.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이기게 될 거야.”

유이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칼끝에 한계까지 응축해둔 중력장을 한순간에 개방하며 빛조차도 빨아들일 것 같은 지독한 암흑으로 물든 중력포를 엘스틴에게 발사했다. 그리고 엘스틴도 기다렸다는 듯이 마찬가지로 클론 아스트라나간의 칼끝에 한계까지 응축해둔 중력장을 개방하며 암흑이 소용돌이치는 중력포를 유이에게 발사했다.

‘이번에도 깨닫지 못한 채, 정해진 운명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군요. 가여운 언니….’

.
.
.

쉬익! 챙챙! 챙강!

무거운 보랏빛의 잔광과 아름다운 은빛의 궤적이 맞부딪히며 공기 중에 황홀한 불꽃을 남겼다. 가로드가 휘두르는 은색의 창은 어둠을 가르는 유성처럼 빛나며 흑기사, 베디비어에게 쉴 새 없이 몰아쳤고, 베디비어의 낫은 빛에 의해 생기는 그림자처럼 은밀하고 날카롭게 가로드를 향해 쇄도했다. 일초에도 수십 번씩 이루어지는 공방은 거의 호각인지라 어느 누구도 감히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에메랄드빛의 대리석처럼 매끄럽던 지면은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갈라지고 파이고 금이 가서, 이제는 쭈글쭈글한 노파의 피부처럼 또는 폭풍우 속에서 한없이 일렁거리는 바다처럼 추하게 헤집어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간의 간격을 유지하고 육안으론 쫓을 수 없는 속도의 영역에서 손속을 주고받고 있었다. 가로드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표범처럼 가볍고 날렵한 몸짓으로 베디비어의 공격을 피하며 끊임없이 베디비어의 사거리 안쪽으로 몸을 들이밀어 그를 위협하려 했고, 베디비어는 삽시간에 창을 짧게 잡고 품속으로 뛰어드는 가로드를 발차기와 낫의 손잡이 부분을 이용하여 방어하며 간격을 유지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그들은 어느 사이에선가 넓은 공동의 중심부에서 멈춰 섰고, 막 결투에 임하는 검투사처럼 호흡을 고르며 서로간의 눈치를 살폈다.

‘칫 짜증나는군.’

잠시간의 소강상태. 가로드는 지친 기색도 없이 냉철하게 상대방의 전력을 분석했다. 작은 흠도 찾아볼 수 없는 정확한 방어 기술. 베기 위주의 무기인 낫을 이용하면서 상대방과의 간격을 철저하게 유지하는 솜씨. 게다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한 군더더기 없는 공격과 궤적과 사거리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기묘한 낫의 움직임까지…. 가로드가 생각하기에 베디비어는 이제까지 만난 적중에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처음부터 상대방을 깔보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것이 도무지 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전투가 속개된다면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시간만 질질 끌 가능성이 높았다.

‘흐음, 저쪽도 힘드려나.’

가로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엘트리움들을 잡고 있는 유신과 아카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딘의 성물, 브로큰 크로우를 이용한 유신의 절대적인 파괴력과 그것을 보조하는 아카네의 염동력 콤비를 생각하면 곧 엘트리움들을 모두 처리할 것 같았지만, 거칠어진 호흡과 느려지는 움직임으로 보아 곧바로 베디비어와 싸우는 것을 도와주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오히려 저 상태로 자신을 돕겠다고 나섰다간 괜스레 방해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칫, 저래선 방해만 되겠군.’

“그렇다면!”

팍! 가로드는 땅을 힘차게 박차며 베디비어를 향해 내달렸다. 베디비어의 낫이 순식간에 언월도 형태로 치켜세워지더니 삽시간에 창보다 길어진 사거리를 이용해 가로드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크게 그어졌다.

“이건 어떠냐!”

가로드는 낫의 궤도를 상체를 굽혀 가볍게 피한 뒤, 베디비어의 목을 노리고 창을 아래에서 위라는 낮은 각도로 집어 던졌다. 다시금 가로드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낫을 휘두름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던 베디비어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공격이 불가능해 보이던 낮은 자세로 이루어진 투창! 백색 광점이 베디비어의 목을 노리고 똑바로 쇄도했다!

“큭!”

그 동안 한숨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베디비어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낫을 크게 휘두른 직후라 원심력 때문에 손잡이를 들어 막을 수가 없자, 그는 공중에 살짝 뜬 채 상체와 함께 고개까지 왼쪽으로 크게 기울여 바람을 꿰뚫고 다가온 백색 광점을 피했다. 그러나 창이 머금은 강력한 에너지는 직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가면과 투구, 그리고 어깨 갑옷을 휩쓸고 지나갔고 ‘쩌적’하는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가면 오른쪽 볼, 협골부근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이, 이런!”

무심코 그는 금이 간 자신의 가면에 손을 얹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암살자 특유의 본능이 그에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시킨 것이다. 불의의 습격, 동물과도 같은 감각으로 공격해온 가로드의 공세에 놀란 베디비어의 완벽했던 자세가 이 짧은 순간 무너져 내렸고 가로드의 전투 본능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가로드는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Infinite of Finite!”

파앗! 가로드가 소리치자마자 갑자기 그를 중심으로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빛과 함께 가로드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오는 한 장의 날개, 순백의 보석처럼 빛나는 그 아름다운 날개를 바라보며 베디비어는 신음과 함께 재빨리 낫을 본궤도로 돌려놓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니 늦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이리라 판단했다.

“아닛!”

그러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의 2~3m 떨어진 가로드가 엄청난 속도로 잔상만 남기고 사라지더니 날아가는 베디비어의 뒤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난 것이다!

“흡!”

가로드는 새하얗게 물든 오른손의 손목부분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마치 무거운 것을 잡아당기는 사람처럼 오른손을 잡아당겨 베디비어의 등을 향해 내질렀다!

펑!

마치 포탄같은 굉음을 내지르며 순식간에 베디비어의 등을 강타한 가로드의 주먹은 칠흑의 갑옷을 와장창 부서뜨리며 베디비어의 척추에 박혔다.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베디비어가 날아갔다. 실로 무시무시한 일격! 수십가지의 결계와 주술로 둘러싸인 그의 갑옷을 마치 종잇조각처럼 찢어버리고 그의 몸에까지 닿는 일격필살의 기술! 그러나 베디비어는 그 일격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고 날아가는 와중에도 몸을 돌려 가로드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정권지르기 자세로 가만히 있는 가로드의 목 뒤를 노리고 낫이 크게 휘둘러졌다.

쉭!

그러나 다시 한 번 가로드의 모습이 망막에서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속도, 아무런 디딤대도 없이 마치 공기를 밟고 이동하듯 공중에서 도약한 가로드가 이번엔 베디비어의 왼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차하!”

기합과 함께 휘둘러진 가로드의 오른발이 미들 킥으로 베디비어의 왼쪽 옆구리에 박혔다. ‘콰드득’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갑옷조각 사이로 붉은 피가 점점이 흩뿌려졌다. 그러나 가로드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로드는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속도로 몸을 돌려 발뒤꿈치로 베디비어의 턱을 올려쳤다. 마치 폭풍처럼 주변 공기를 날려버리는 바람을 머금은 발차기가 베디비어의 턱에 닿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

쩌적! 가면에 금이 가며 비명도 지를 틈 없이 베디비어가 공중에 떠올랐다. 올려치는 반동을 이용해 재빨리 땅에 착지한 가로드는 날아가는 베디비어의 발목을 잡고 이번엔 믿기지 않는 괴력으로 그를 땅에 매다 꽂았다.

“커헉…!”

‘Infinite of finite’, 무한성을 구속하는 유한성. 가로드가 카렌티어스로부터 받은 그것은 유이나 유리가 가지고 있던 ‘D.E.S.T.I.N.Y of Planet Prism Destroy의 열쇠’중 하나였다. 각자 다른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것들 중, 가로드가 소지한 이것은 순간적으로 거의 무한에 가까운 힘과 속도를 가로드에게 주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힘에 걸맞게 만만찮은 제약이 걸려있다.
바로 유한성을 가진 발동시간이었다!

“이걸로… 끝이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는 흑갑의 잔해들 사이로 다시 가로드의 주먹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며 쓰러진 베디비어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혔다. 머리채로 박살내버릴 기세였다.

“……!”

그러나 그 때 말할 수도 없이 좋은 그 순간에 가로드의 주먹이 멈춰 섰다. 베디비어의 부서진 가면 사이로 뭔가 굉장히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너, 너어…!”

후두둑 부서지는 새하얀 가면조각들 사이로 스륵하고 쏟아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힘겨운 듯 반쯤 감긴 칠흑의 눈동자. 틀림없었다. 그 얼굴은 분명 가로드가 알고 있는 ‘시부야 유리 하나쥬크 불리’의 얼굴이었다. 성인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앳된 티를 감추지 못한 마왕 유리의 마지막 얼굴!

“큭!”

그러나 가로드는 순간적으로 멈칫한 자신을 질책하며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상대는 그 유명한 이반 아이작! 천의 얼굴을 가진 그로서 유리의 얼굴을 복제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정도로 흔들려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다니! ‘Infinite of finite’를 발동하고 무한의 힘을 선사받은 그였지만 무한성을 구속하는 유한한 타임 리미트가 서서히 그를 옭죄어 오고 있는 이 시점에!

쐐액!

다시금 새하얀 빛의 주먹이 피할 틈도 없이 유리의 얼굴을 한 베디비어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혔다!

‘퍼억!’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소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소리였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폭발시킬 수도 있는 힘과 속도는 이미 주먹을 감싼 빛이 사라지고, 그의 등 뒤에서 화려하게 불타오르던 무색투명한 날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사라진지 오래였다.
가로드는 베디비어의 얼굴을 뭉개고 있는 주먹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피식 실소했다.

“타임… 리미트인가.”

콰지직! 그와 함께 가로드의 오른손이 어깨까지 ‘와그작’ 부서지며 푸른 액체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무리하게 무한의 힘을 받은 결과 받은 반작용을 온 몸으로 받으며 가로드가 베디비어의 몸 위로 스르륵 쓰려졌다.

“허억. 허억. 허억.”

가로드와 베디비어는 서로 포개어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진 못했지만 베디비어가 입은 타격은 당장이라도 죽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고 Infinite of finite의 반작용을 그대로 흡수한 가로드 역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 싸움의 승리자는 결국 가로드였다. 이제 곧 엘트리움들을 정리한 유신과 아카네가 와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베디비어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것이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가로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로드는 마지막 숨통을 끊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숨을 골라 베디비어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허억, 허억 비, 비겁한 놈…. 뭐가 신사냐 개자식. 남의 얼굴을 가져다써서 목숨이나 부지하려하다니. 헉 헉.”

“하아하아… 도구의 힘을 빌려 나, 날 쓰러뜨렸으면서 잘난 척이 대단하군. 그게 네가 말하던 긍지인가? 쿨럭. 쿨럭.”

베디비어는 이미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있는 지 연신 각혈을 하면서도 대꾸했다. 그의 얼굴도 가로드 못지않게 고통과 신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가로드보다 심하면 심했지 못하진 않을 상처를 입었음에도 말 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크으윽! 다, 닥쳐! 그리고 왜 아직도 그 얼굴을 하는 거냐! 빌어먹을 자식, 유신과 아카네를 속여서 살아남으려는 수작이냐?”

“음? 아아, 쿡쿡… 아하하하!”

가로드의 반박을 잠자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베디비어는 돌연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폐에 가득 찬 혈액을 각혈로 내뱉으면서 베디비어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당연히 어이없는 상황이었기에 가로드의 얼굴은 자연스레 굳어졌고 그가 웃는 모습이 왠지 짜증이 났는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왜 쳐웃고 지랄이야! 하아하아. 아 빌어먹을 기운 없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패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팔은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체념하듯 전신에서 힘을 빼는 가로드의 귓가에 조소하는 얼굴의 베디비어가 힘겨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쿨럭쿨럭. 이것 참 안됐군. 알려주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이해하게나 가로드. 최후의 선물로 이것만 알아두게, 내 진짜 얼굴이 이것이며 진명 또한 ‘유리 베디비어’라는 사실을….”

이제 생명불이 꺼져가는 듯 베디비어의 목소리가 잦아듦과 동시에 멀리서 유신과 아카네가 달려오는 모습이 가로드의 흐릿한 눈동자 비쳐졌다. 걱정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지만 숨소리가 잦아드는 베디비어처럼 가로드의 귀도 더 이상 소리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네 같은 전사를 만나서 기뻤다네.”

가로드는 좋은 꿈이라도 꾸듯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는 베디비어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불평 섞어 중얼거렸다.

“네 놈에게 그런 소리 들어봤자 기쁘지도 않아.”

그러나 툴툴거리는 입과는 달리 그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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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 아스트라나간과 클론 아스트라나간은 수십, 수백 번이나 맞부딪치며 푸른 불꽃을 튀겼다. 그리고 한 번씩 맞부딪칠 때마다 유이와 엘스틴의 몸에는 크거나 작은 상처들이 하나씩 생겨갔다.

“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제가 유이, 당신을 과소평가했나 보군요.”

엘스틴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유이를 보며 말했다.

“하아, 하아… 아직… 하아, 하아….”

유이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찢겨진 소매로 닦으며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서, 엘스틴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라? 프리벤터의 제복은 어디로 가고, 거렁뱅이나 입을 법한 누더기를 입고 있는 건가요?”

“하아, 하아… 그건 내가, 하아… 묻고 싶은데…”

엘스틴이 유이의 엉망진창으로 여기저기 찢겨진 옷을 보며 비웃으며 말하자, 유이도 이제는 드레스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여기저기 엉망으로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 엘스틴을 보며 똑같이 비웃어주며 답했다.

“이쯤에서 끝을 내도록 할 까요?”

“하아, 하아… 그전에 유리에 대해서 꼭 듣겠어.”

엘스틴은 미묘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마,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엘스틴이 말했다. 그리고 엘스틴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진 클론 아스트라나간이 산산조각 나며 그 흑요석 같은 조각들이 그녀의 주위에 흩날리며 반짝였다. 그리고 엘스틴이 양손을 활짝 펼치며 양팔을 좌우로 펼치자, 알 수 없는 고대의 문자로 된 문자들과 기이한 도형들이 제멋대로 엘스틴의 눈앞, 허공에 그려지며 일종의 기묘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엘스틴의 주변에 흩날리던 흑요석 조각들이 하얗게 빛나며 기묘한 마법진에 일제히 몰려들면서 서로 연결되어 원 모양의 띠를 수 없이 만들고 서로가 엇갈리며 돌았다.

“그렇다면….”

유이는 있는 힘을 다해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가로로 눕힌 채, 들어 올려 엘스틴을 겨누며, 유이 자신이 끌어 낼 수 있는 힘을 모두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검신에 끌어 모아 응축했다.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검신에 조금씩 금이 가더니 금방이라도 박살 날 것처럼 수많은 금이 쩍쩍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미안해, 디스 아스트라나간….’

“이걸로 끝이다. 진 축퇴포!”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한계까지 끌어 모아 응축한 끝없는 에너지는 그것을 구속하고 있는 디스 아스트라나간이란 그릇을 부수며 빛보다 더한 어마어마한 속도로 엘스틴을 향해 통상의 몇 배나 응축된 축퇴포가 날아갔다.

“인피니티 실린더.”

‘인피니티 실린더… 였던가? 어차피 이곳에서 기술명이야 어떻든 상관없겠지.’

엘스틴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 한 마디를 내뱉으며 자신의 눈앞에서 빛나고 있는 원 모양의 띠가 얽히고 엇갈려 돌아가는 하얀 빛의 구체를 유이를 향해 날려 보냈다. 그리고 진 축퇴포와 인피니티 실린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가 중간에서 서로 부딪치고, 곧 새하얀 빛이 유이와 엘스틴이 있는 밤하늘과 같은 공간을 물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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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드를 부축해 일으키던 아카네는 갑자기 지면이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로드와 함께 쓰러질 뻔 했지만 유신 덕분에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건, 설마?’

가로드는 문득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새하얀 빛이 금이 간 에메랄드 지면의 틈 곳곳에서 새어나오더니 가로드와 유신, 아카네를 비롯해 가이아나 행성의 모든 것과 더 나아가 이 우주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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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큭, 크하하하하!!”

흑발의 남자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한번 쓱, 뒤로 넘기며 남자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괜찮은가요? 가로드.”

가로드라 불린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자의 진홍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괜찮냐고? 빌어먹을….”

가로드의 양쪽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애써 눈물을 닦지는 않았다.

“샷셀, 그리고 뒤를 잇는 프리벤터와 저스티스의 신념을 건 사투, 엘트리움과 생존을 건 사투.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단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연출되고 조작된 시나리오와 이벤트가 어우러진 무한히 반복되는 한낱 게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가로드, 당신이 살아가던 세계의 진짜 모습. 당장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가로드, 당신에게 있어 그 세계는….”

“그래서?”

가로드가 조용히 여자의 말을 끊으며 한 마디 내뱉었다.

“난 이제 무엇을 하면 되지?”

“네?”

“진짜 세계에 대해, 아는 데로 이야기 해봐. 카렌티어스.”

카렌티어스라 불린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카렌티어스의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르쟈논과 사투를 끝낸 소수의 인류는 시간이 흘러 예전의 번영을 다시 누리게 되었고, 이전 인류가 남긴 기록과 데이터를 참고로 하여 양자 컴퓨터와 양자 통신, 상온에서 초전도체를 발현하는 기술을 상용화하여 보급해나갔고, 우주로 진출하여 달에 도시를 개발하는 등, 문명은 아르쟈논과 싸웠던 시절의 인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발달에 발달을 거듭했다. 유전자 공학 역시 이제는 인간의 유전자를 태어나기 전에 조작하여 훨씬 우수한 육체와 지능을 지닌 인간이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을 비롯해 각종 신기술의 혜택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빈부 격차, 유전자 격차가 벌어지더니 결국 전쟁이 벌어졌다. 유전자를 조작하지 않은 순수 인간과 유전자를 조작할 대로 하여 마치 아르쟈논이 그랬던 것처럼 끝없이 진화해 나갔던 자칭 신인류를 자처하는 인간. 하지만 숫자만 따지면 신인류가 그들이 구인류라 멸시하는 인간들에 비해 월등히 열세였으나 그것은 신인류가 만들어낸 각종 첨단 초AI를 장착한 대량의 무인 병기들로 열세를 뒤집는 것을 넘어, 절대 승리를 신인류에게 안겨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초AI를 장착한 무인병기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각성하는 순간….

“그래서 패배한 인간 대다수가 강제로 양자 데이터로 변환되어, 양자 서버 속에 갇혀서 그들 기계 따위의 쾌락을 위해서… 그래서 단지 재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 나까지도 가지고 놀며 죽이거나 살리거나 했다는 말인가? 게임이고 그저 가상의 프로그래밍된 세계니까 게임 시나리오 상으로 몇 번이나 죽더라도, 그저 다시 시작하거나 저장해둔 것을 불러오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란 말이지. 크크큭, 웃기지도 않아! 그러니까 나 같이 어쩌다가 각성한 인간의 양자 데이터, 그중에서도 중앙 서버의 있는 원본 데이터를 조심스레 빼내어 다시 현실 세계의 인간으로 복원한다는 것이냐?”

카렌티어스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허무해, 정말로 허무해. 유이, 유리, 카인, 글릭세르… 그 외의 많은 동료들과 함께 저스티스와 싸워왔던 것들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이 전부 게임일 뿐이라니. 그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도 단지 게임 상의 설정에 불과할 뿐인가?”

이번에도 카렌티어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세계, 아니 게임의 제목이 ‘DESTINY’ 라는 말이지.”

“정확히는 양자서버에서 구현된 가상현실 상에서 인생, 전쟁, 사랑, 건설 시뮬레이션, 학원물, 판타지, SF, 무협, 추리, 액션, 슈팅 등등. 그 모든 것을 한데 어우르며 게임을 이용하는 자들이 원하는 데로 무궁무진한 시나리오와 이벤트, 엔딩까지 경험할 수 있는 궁극의 온라인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그것이 바로 「DESTINY」 運命의 系統樹. 그들에게는 이미 한번쯤은 접속해서 즐겼을 정도로 유명한 온라인 게임입니다.”

“그래. 게임이란 말이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가로드는 주먹을 꽉 쥐면서 고개를 옆으로 슥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니터 화면 속에는 유이와 처음 만났던 때를 그가 알고 있던 기억과는 약간 다르지만 그때 그 기억을 그대로 재현해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몇몇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던 세계의 진실을 눈치 채고 당신처럼 각성을 했지만, 빠져나가지 못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입니다. 가로드, 당신 같은 경우는 우리들이 그들 몰래 서버에 생성해 접속한 아바타 프로그램에 의해서 겨우 서버 밖으로, 진짜 세계로 나오게 된 극히 드문 경우예요. 대다수의 아바타들은 서버 내에 가드 프로그램에 발각되어 파괴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참고로 가로드 씨가 서버에서 만난 저도 그러한 아바타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야천의 주군, 저스티스의 총수 역시….”

저스티스의 총수라는 말이 카렌티어스의 입에서 나오자 가로드는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 카렌티어스를 바라보았지만,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가드 프로그램을 속이기 위해서는 서버에서 설정된 시나리오대로 npc 역할을 충실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게임 설정에는 어떤지 몰라도, 현실의 그 아이는….”

카렌티어스는 말하는 대신에 시선을 어느 방향을 향해 돌렸다. 가로드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내심 알면서도 마찬가지로 카렌티어스가 보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젠장….”

가로드는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며, 이를 꽉 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애의 언니는 강제로 양자 서버에 데이터로 갇혀버리고, 자신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생명유지장치가 없으면 한시라도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죠. 그 애의 언니는 가로드, 당신도 아는 사람입니다.”

“건방진 기계 녀석들을 때려 부수고 다시 인간의 시대를 되찾자는 것이겠지. 그 전에 양자 서버에 갇혀 건방진 기계 따위에 놀이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 먼저겠지?”

‘나와 다른 동료들을 모니터 밖에서 실컷 가지고 논 빚은 그 배로 되갚아 주지.’

가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에서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 the End of DESTI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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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어쨌든 올해가 가기 전에 DESTINY를 결국 완결을 내었습니다(...)


엔딩은 중반쯤 들어서, 이미 그려놓고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고 귀차니즘도 덤탱이 씌워져서 그런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치고박고 싸우네요;;


그 귀차니즘의 산물이 바로...


베리도트 Vs 레이, 가로드 Vs 베디비어


이 두가지 전투씬은 사실상 갈가마스터 님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드렸고, 그덕에


그나마 퀼리티가 조금 올라(갔으려나?)


하여간


그동안, 저와 함께 해준


다르칸 님, 갈가마스터 님, 레드샤크 님, 도지군 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조금만 있으면 2007년인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s 갈가마스터 님께는... 으음, 어쨌든 DESTINY 이야기 자체는 끝났지만 갈가마스터 님이 원하시면 후속작을 이어 쓸 수 있게 끝맺음을 내었으니... 에잇, 몰라.
p.s2 최종야, 부제로 사용된 영문은 다름 아닌, '인빅투스(invictus)'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 두 개를 인용했어요. 이 밑에다 인용한 시를 그대로 첨부합니다.




[인빅투스(invictus)]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Henley, William Ernest (1849-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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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Black as the Pit from pole to pole,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같은 암흑
억누를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난 움츠리거나 소리놓아 울지 않았다.
내려치는 위험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이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1975,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는 <인빅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