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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7.01.01 07:36

아란 조회 수:91 추천:3

extra_vars1 <font color="CC0303">정해진 운명의 종말</font>, <font color="3300CC">새로운 운명</font> 
extra_vars2 35<font color="3300CC">中</font><font color="CC0303">(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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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Y」 運命의 系統樹
最終夜.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中)








한편 유이 일행은 에메랄드 나무 밑바닥을 향해 빠르게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애초에 유도했던 대로 대다수의 엘트리움들이 밖에 몰려 있었기 때문인지 가는 길은 수월했고 기껏해야 만난 적이라곤 작고 보잘 것 없는 엘트리움들 뿐이었다. 자잘한 것들은 피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 그들은 어느덧 넓은 공동에 이를 수 있었다.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고대 원형 경기장처럼 휑하고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그곳은 유이 일행이 들어온 입구 맞은편에 또 다른 입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인공적으로 깎아 만든 듯 녹색으로 빛나는 광물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빼곤 그 어떤 예술적인 면모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왜 이런 공간을 만든 건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공동의 바닥면은 마치 얼음판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있어 마치 거울처럼 그 위를 지나는 모든 사물을 비췄고, 지금은 그 위를 바람처럼 질주하는 네 명의 이방인들을 비추고 있었다.
유이 일행은 멀리 보이는 출구를 향해 이제껏 그래왔듯 힘차게 내달렸다.

“멈춰.”

그러나 공동의 중앙쯤에 이르자 뭔가 낌새라도 챈 듯 유이의 손짓과 함께 전원이 멈춰 섰고, 다음 순간 너무나도 당연하단 듯이 매복하고 있던 엘트리움들이 보랏빛 장막을 뚫고 나타났다.

키엑! 키에엑!

그림자처럼 땅에서 스르륵 올라오거나, 벽면을 뚫고 나오는 녀석들, 공기 중에 뚫린 검은색 구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녀석들까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갖가지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각양각색의 엘트리움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행은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엘트리움들은 분명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단지 짜증나는 적일뿐이었다.

“역시 매복하고 있었나.”

가로드가 은색 창을 움켜쥐며 포위 진형을 짠 엘트리움들을 노려볼 때였다.

텁. 텁. 텁.

가죽을 치는 것 같은 둔탁하고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정면의 엘트리움들 사이로 검은 갑옷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한 남자가 박수를 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마치 악마를 형상화한 기괴한 갑옷을 걸치고 무표정한 밀랍인형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 자는 천천히 엘트리움들 사이를 해쳐 나와 유이 일행을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소. 유이 R 세이비어. 역시나 ‘그림자의 여제’라 불리며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던 분답군요.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오.”

흑기사가 귀족식으로 부드럽게 굽힌 허리를 펴고 다시 고개를 들자, 가로드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은 뭐냐?”

“나 말인가? 흐음.”

흑기사는 가로드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신과 가로드, 아카네를 차례차례 바라보며 뜸을 들더니 오른손으로 턱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짐짓 고민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거 난처하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워낙에 많은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살았었으니…. 굳이 소개하자면 ‘이반 아이작’정도일까?”

“이반 아이작이라고?!”

과연 전 저스티스였던 유신은 12제이자 '도플갱어'의 수령이었던 이반의 이름을 듣자마자 깜짝 놀랐고 당황한 유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로드가 실소를 터뜨렸다.

“레이 미스테리오에 이어 이반 아이작인가? 유신, 네 녀석이 몸담고 있던 저스티스란 곳도 참 재밌는 곳이었군. 혹시 네 녀석도 나중엔 안면몰수하고 우리한테 덤비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가로드의 핀잔 섞인 위협에 순간적으로 발끈한 유신이 재빨리 대꾸하며 이반을 향해 소리쳤다.

“이반! 넌 왜 엘트리움들과 같이 있는 거지? 설마하니 엘트리움들에게 마음이라도 빼앗긴 건가?”

이반은 유신의 물음에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깝다는 듯 답했다.

“쯧쯧, 유감이네만 유신. 나는 마음을 먹는 자이지 결코 먹히는 자가 아니라네. 레이를 봤다면 어느 정도 알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 그리고 지금은 ‘베디비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말을 하다말고 이반의 왼손이 자신의 가면을 쓰다듬고 지나가나 싶더니 창백한 밀랍가면이 순식간에 기분 나쁘게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가면 뒤의 이반은 아직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유신을 비웃듯 조소 섞인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불살 이반 아이작’은 가짜. 모든 것이 가짜였으니까.”

“네 놈은 도대체…!”

거리낌 없는 이반의 말에 화가 난 유신이 뭐라고 더 말하려들자, 가로드가 유신의 팔을 붙잡아 제지하며 말했다.

“어이어이, 열 좀 식히라구.”

“큭!”

유신이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며 흥분을 천천히 가라앉히는 기색을 보이자, 이번엔 가로드가 이반, 아니 베디비어를 향해 물었다.

“좋아, 그럼 베디비어라고 했나? 내가 들은 바론 말이지. 이 모든 일이 네 녀석이 섬긴다는 그 ‘야천의 주군’인가 뭔가 하는 놈의 뜻이라던데 말야. 네 놈도 그걸 알고 있나?”

“흐음… 그러고 보니 마침 가로드 샤갈이란 자도 있었군. 그 여자, 카렌티어스가 말해주었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하긴 그렇군. 좋아! 답하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그러지? 어차피 모든 건 다 주군의 뜻이다. 나는 그저 각본대로 자네들의 뼈를 여기다 묻으면 될 뿐이야. 그분의 뜻이 세상의 파멸이 됐든 재생을 위한 파괴가 됐든지 난 할 일을 할 뿐이다.”

“크큭. 좋아, 끝내주는 유언이로군. 명언이다.”

가로드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무기인 은색의 창을 머리위에서 한 바퀴 붕붕 돌리곤 베디비어의 심장을 겨누었다. 은색의 창이 가늘게 떨며 녹색의 아지랑이 같은 것에 둘러싸였다.

“그럼 슬슬 시작해보지. 어린 친구들.”

베디비어는 어둠 속으로 자신의 손을 쑥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둠에 가려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베디비어의 팔이 어깨 째 사라지나 싶더니 이내 커다란 ‘낫’ 하나가 그의 손에 이끌려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은 비록 거무튀튀한 근육들과 핏줄이 뒤엉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생명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우웩. 징그러워.”

아카네의 짧고 굵은 평과 함께 초승달처럼 길게 구부러진 날의 중심부에 박혀있는 거대한 눈알이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새빨간 실핏줄이 흰자위 위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그것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피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기지개를 펴듯 부들부들 진동하며 기괴한 괴성을 내질렀다.

키에에에!

그 순간 손잡이 부분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튀어나오더니 베디비어의 팔뚝을 꿰뚫고 팔의 절반을 휘리릭 감쌌다. 잠시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던 베디비어가 입을 연 것은 ‘낫’과 그의 전신에서 보랏빛 기운이 음산하게 흘러넘치는 때였다.
베디비어는 ‘낫’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자,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들의 목숨을 담보삼아 도박을 하는 것도 여기서 끝이다!”

키에에엑!

마치 ‘진격’을 외치는 장군처럼 우렁찬 낫의 괴성과 함께 주변을 완벽히 포위하고 있던 엘트리움들이 일제히 유이 일행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이, 조장.”

유이가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움켜쥐고 싸울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베디비어와 대치하고 있던 가로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유이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가로드를 바라보자 청색의 로브로 전신을 가린 가로드의 어깨에서 희미한 에메랄드빛의 오오라가 서서히 빛을 더해가며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유이가 물었다.

“왜?”

은색의 창이 휘황찬란한 에메랄드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녹색 빛으로 물드는 순간, 가로드가 말했다.

“내가 길을 뚫는 순간, 뛰어라.”
“가로드?”

“으랏차아!”

유이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가로드는 쪽빛으로 둘러싸인 창을 마치 투창처럼 베디비어를 향해 집어던졌다.

콰쾅!

녹색의 빛을 유성처럼 흩뿌리며 날아간 창은 이내 커다란 폭음을 내며 푸른빛을 뿜어냈다. 빛은 그대로 베디비어를 집어삼키며 일직선으로 나아갔고 출구까지 죽 늘어선 엘트리움들을 일격에 몰살시킬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달려!”

그 틈을 타 가로드가 유이를 향해 소리쳤다.

“……!”

가로드의 뜻은 창을 던지는 순간 눈치 챘지만, 유이의 성격상 그냥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유이씨 빨리!”

촥! 유신은 먼지의 장막을 뚫고 튀어나온 여신상형태의 엘트리움을 브로큰 크로우로 찢어버리며 소리쳤다. 여신상형 엘트리움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보랏빛 불꽃에 휩싸여 소멸했다. 그 틈에 염동력으로 다른 엘트리움 하나를 소멸시킨 아카네도 소리쳤다.

“빨리요 유이씨!”

방금 전까진 베리도트의 마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아카네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이는 순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아카네와 유신의 결연한 표정을 보자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곤 가로드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갈색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유이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먼저 갈께, 가로드….”

“아아, 곧 뒤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서 나 대신 유리 녀석 머리 좀 때려줘. 다음부터 고생시키면 얄짤 없다고.”

유이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며 먼지구름 사이로 보이는 출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로드가 중얼거렸다.

“녀석을 부탁한다, 유이.”

깊은 신뢰와 애정을 담아 중얼거리는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비켜!”

유이는 앞을 가로막는 몇몇의 엘트리움들을 디스아스트라나간의 중력폭풍을 이용해 쓸어버리곤 그대로 출구를 빠져나갔다.

키에에엑!

유신은 때마침 공중으로 튀어 오른 거미형 엘트리움을 브로큰 크로우의 손톱으로 찢어버리며 말했다.

“잔챙이는 저와 아카네가 맡겠습니다, 가로드씨.”

“오, 마음이 통했나? 그럼 부탁하지.”

“무용을 빕니다.”

유신과 아카네는 곧바로 주변에서 몰려드는 엘트리움들 사이로 몸을 날렸고 브로큰 크로우와 염동력의 콤비네이션을 이용하여 엘트리움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

휘리릭! 캉!

갑자기 먼지구름 저편에서 은색의 창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더니 가로드 앞에 박혔다. 그것은 바닥에 비스듬하게 꽂힌 채 몇 번인가 부르르 떨더니 이내 멈춰 섰고 가로드는 무표정하게 창이 날아온 먼지구름 저편의 검은 그림자를 주시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갈색 눈동자와 붉은 의안이 이제는 의미가 없는 안경 안쪽에서 빛을 발하며 어둠 속에 숨어있는 사신의 실루엣을 쫓았다.

“키엑! 키엑!”

서서히 구름이 걷히자, 괴성과 함께 육질로 이루어진 기묘한 낫을 여유롭게 어깨에 걸친 흑기사, 베디비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하나 하물며 흠집 하나도 없는 그의 모습에 가로드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칫, 폼만 잡는 엑스트라는 아니었나. 상처하나 없다니.”

가로드는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리며 앞에 꽂혀 있는 자신의 창을 뽑아들었고, 그는 창을 몇 번 붕붕 돌려보더니 곧 전투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조장을 쫓지 않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뭐 물어도 대답해주진 않겠지?”

분명 여기를 최종 방위선처럼 말하던 녀석이 유이가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없었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가면 뒤에 숨은 베디비어의 얼굴에선 실마리가 될 표정조차 읽어낼 수 없었다. 볼 수 있는 거라곤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가면의 겉 표면 뿐.

“물론.”

베디비어는 두 손으로 낫을 움켜쥐어 공세자세를 취하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가로드의 말을 일축했다.

“훗, 그렇군.”

가로드는 붉게 빛나는 오른쪽 의안으로 상대방의 미세한 움직임을 쫓으며 가늘게 웃어보였다.

“째째한 녀석. 원래 중간보스는 말이지. 이 대목에서 모든 것을 밝히고 사라져야 한다고!”

팍! 예고도 없이 가로드가 힘차게 땅을 박차며 베디비어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은색의 궤적이 흘러넘치는 에너지와 뒤섞여 눈부시게 빛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거리에 들어선 베디비어의 심장을 향해 점이 되어 쇄도했다.

캉!

베디비어는 뒤로 짧게 도약해 가로드와의 거리와 상대속도를 맞추며 창의 목 부분을 낫의 손잡이 부분으로 가격해 옆으로 흘려보냈다. 일점에 집중되는 날카로운 창의 파괴력을 여유롭게 흘려내며 베디비어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주군, 이들은 우리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여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군께서 부여한 필연과 우연의 산물. 어두운 밤하늘을 밝혀줄 ’운명의 계통수‘. 예정된 이 모든 줄기들이 주군의 뜻에 빛을 더해주길 빌겠습니다.’

가로드의 공격을 방어만 하며 뒤로 물러서던 베디비어가 돌연 즐거운 듯 멈춰서더니 경쾌한 몸놀림으로 낫을 휘둘렀다.

.
.
.

유이는 아무도 없는 공허한 통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저 에메랄드빛의 벽과 바닥, 천장으로 이루어진 공허한 통로 저편으로 쉬지 않고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저 멀리 문이라고 볼 수 있는 에메랄드 벽이 보였다. 유이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힘차게 휘둘렀다. 한 방에 박살나 사방에 흩뿌려지는 에메랄드 광석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선 순간 유이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긴 대체?”

지겹도록 보아온 에메랄드빛의 벽이나 바닥, 조각들은 고사하고 자신의 손조차도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어둠에 물든 공간이 유이의 눈앞에 펼쳐졌다. 유이는 즉시 뒤돌아서서 자신이 들어온 곳을 바라보려고, 아니 찾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존재조차도 확인할 수 없는 끝없는 암흑의 공간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쥐고 있는 손의 감각 덕분에 겨우 자신을 인지할 수 있을 뿐, 심지어 자신이 발로 밟고 서 있는 바닥의 감촉마저도 얼굴을 스쳐지나가던 한기나 바람조차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분 나쁜 곳이야. 초혼의 동굴보다도, 냉동캡슐보다도….”

유이는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위로 올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주변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칠흑 같은 공간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유이는 조용히 눈을 감은 뒤, 심호흡을 하며 동요하는 심신을 가라앉혔다.

“거기냐!”

유이는 본능적으로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거꾸로 쥐고, 재빨리 오른팔을 내리며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날을 뒤로 향하게 하며 내찔렀다.

키에에엑!!

푹 찌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엘트리움이 죽어가며 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유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즉각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바로 쥔 뒤, 오른쪽으로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여전히 베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수십의 엘트리움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유이는 눈을 감은 채로 몇 번씩이나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이곳저곳 휘두르며 검무를 추었고, 그때 마다 엘트리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유이가 검무를 끝내며 우아하게 무릎 꿇고 앉자, 뒤에서 엘트리움의 비명소리가 아닌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유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자신의 발에 중력을 약화시켜서 총알처럼 달려들며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검신에 중력장을 전개하며 그대로 내찔렀다.

‘찌르는 감각이 없어?’

엘트리움을 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디스 아스트라나간의 검신을 통해 베고 있다는 감각이 오른손을 통해 전해졌고 그 뒤를 이어 엘트리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런데 찌르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다니? 유이는 자신의 공격을 보이지 않는 상대가 피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였기 때문에 상대가 눈치 채었다 해도 쉽게 피할 수는 없으며 하다못해 어떤 것으로든 막아내려고 시도할 것이고 그럼 최소한 부딪치는 감각은 느껴졌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유이는 순간, 자신의 손목을 누가 잡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그림자의 여제다운 실력이군요.”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는 소녀의 목소리, 유이는 손목을 잡는 누군가의 손을 냉큼 뿌리치며 뒤로 물러선 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겨누며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넌 누구지?”

“제가 누군지를 묻기 전에 우선 상대와 시선을 마주봐야 하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그렇군.”

유이는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유이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끝없는 암흑이 아닌, 밤마다 보았던 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빛났던 밤하늘과 같은 공간. 그러나 그것보다도 유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너, 너는!”

유이는 마치 예상치 못한 전개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연극 관객마냥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

쾅! 콰광!

발뭉크의 검붉은 섬광과 레이의 손톱이 일으키는 거친 돌풍이 서로 맞부딪혔다. 육안으로 쫓기도 힘들어 궤적의 잔상을 쫓고 본능으로 검과 손톱을 피하며, 기이한 궤도로 휘둘러지는 검광과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찌르고 베고 갈랐다.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 아득히 벗어난 그들의 힘과 속도는 에메랄드 결정으로 이루어진 나무 내부를 휘젓고 다니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수려는 듯 곳곳에 파괴와 재앙의 흔적을 새기며 끝도 없이 서로간의 손속을 겨뤘다.

『캬아앙!』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레이의 손톱이 베리도트의 몸을 가르자 수백 마리의 까마귀와 숫자도 셀 수 없이 많은 흡혈거미로 변화한 베리도트의 육신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갈 곳을 찾지 못한 레이의 힘은 거친 돌풍을 일으키며 수십 마리의 까마귀와 흡혈거미들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땅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지만 베리도트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고 레이의 뒤에서 육신을 재구성한 베리도트가 어둠에 휩싸인 발뭉크를 길게 찔러들어 가며 소리쳤다.

“짐승으로서 죽어라! 레이!”

그러나 레이도 그리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흥!』

그는 이런 것쯤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코웃음치며 재빨리 상체를 반쯤 뒤로 돌려 발뭉크의 붉은 섬광을 한 치 차이로 피해냈다. 심장을 노린 베리도트의 일격은 레이의 가슴에 긴 혈흔만을 남기고 허무하게 빗나갔으며 레이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아가리를 벌려 발뭉크를 쥐고 있는 베리도트의 팔목을 물어뜯었다.

우드득!

피골이 뒤틀리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베리도트의 오른팔이 발뭉크와 함께 뜯어져나갔고 이어 무방비가 된 베리도트의 몸통에 레이의 우악스러운 손톱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퍼엉!

그러나 베리도트의 몸통은 순식간에 어둠과 까마귀로 변해 흩어졌고, 폭풍 같은 권풍(拳風)에 밀려난 베리도트의 육신은 사위를 검붉은 어둠으로 물들이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다시금 육체를 재구성했다.

『크르릉.』

그러나 레이는 베리도트를 쫓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서서 베리도트를 노려만 보고 있었는데, 돌연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오더니 대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슈우우우!

스친 상처를 통해 유입된 발뭉크의 저주를 순수한 힘으로 중화시켜 빼내는 경이를 바라보며 베리도트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숙적.’

모스베라토 카나드 대공이 사라진 지금, 권태에 빠져 있던 베리도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강력한 존재. 끝없는 살육과 서로간의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가 마치 마약과도 같아 베리도트의 얼굴에선 환희와 광기가 뒤섞인 광소(狂笑)가 사라질 틈이 없었다.
너무도 즐거웠다. 이렇듯 싸움이라는 것은 즐겁고 즐거워서 끝없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는 동생에게 영원히 살아가는 저주를 덮어씌웠고 영원히 그와 대적하며 싸워주는 숙적으로 남아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카나드가 죽고 나서 생긴 공백과 허무함, 그것에서 파생되는 공허함과 권태. 삶의 목적을 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그와 목숨을 건 사투를 하게끔 종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카나드의 역할을 레이가 완벽하게 대신하여주고 있었다.
영원히 지속되는 싸움과 저주. 그러나 그것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의 베리도트에겐 그리 많이 남아 있질 않았다.

‘아프군. 출혈도 멈추지 않는 건가. 큭큭큭.’

뚝뚝. 베리도트의 발아래에서 검붉은 피가 서서히 고여 가는 것이 보였다. 아까 아카네에게 당한 상처가 점점 더 벌어져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피와 생명을 그에게서 앗아가고 있었다. 전신을 마비시킬 정도의 고통과 갈라진 혼의 그릇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생명력.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 정도로 심하게 당한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 딱 한번 있었다. 그건 바로 아카네의 아버지 모스베라토 카나드 대공이었다.

‘후훗, 생각해보니 부녀가 사이좋게 내 영혼에 상처를 입혔군. 피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건가?’

자칼을 되찾은 카나드와 일전을 벌였을 때를 떠올린 베리도트는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듯 피식 조소하며 어둠 속에서 다시금 발뭉크를 꺼내들었다. 그는 저주를 완전히 해소한 레이의 미간을 발뭉크의 검 끝으로 겨누며 말했다.

“이대론 끝이 없겠군, 어떤가, 레이. 한 방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건?”

『크르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나보군, 베리도트.』

“호오? 제법 눈치가 빠른데. 고양이 크크큭.”

『크르릉.』

레이는 비웃듯 낮게 ‘가르릉’거리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가 결심을 굳힌 듯 황금빛 안광을 빛내며 눈을 뜨자 그의 주변에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기(氣)가 대기 중의 공기를 요동시키며 빛을 발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진동하고 에너지를 흡수한 공기 입자가 미친듯이 유동하며 질풍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천지를 뒤흔드는 힘을 지속적으로 방출하며 레이가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 와라 살인귀(Bloodthirsty killer)! 광기와 밤의 황제여!』

“큭큭큭, 크하하. 크하하하하!”

베리도트는 유쾌한 듯 몸을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그야말로 자신이 인정한 숙적의 모습! 싸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에 응해주는 레이의 모습에 그는 정말 태어나서 두 번째로 큰 흥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 ‘레이 미스테리오’지! 크하하하! 킥킥킥. 캬하하하!”

쿠르릉. 이어 발뭉크가 검붉은 안개에 휩싸이더니 먹구름이 몰아닥치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뇌전을 내뿜었다. 발뭉크의 검붉은 검신을 완전히 뒤덮은 검은 안개, 저주는 마치 무저갱의 암흑과 같은 공포와 광기를 내뿜으며 베리도트의 몸을 어둠으로 잠식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홀로 서있는 악마의 그것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베리도트의 선홍빛 눈동자가 환희와 광기로 번뜩였다.

“간다! 용자(Brave man)! 야수들의 제왕아!”

『캬아아아아아앙!』

콰광! 예고도 없이 베리도트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튕겨나갔다. 그의 몸을 감싼 검붉은 색 어둠은 녹색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버리며 날카롭게 질주했고, 레이의 전신을 투명하게 감싸고 이글거리는 기의 파동은 그의 목구멍에서 내질러지는 사자후와 더불어 지축을 뒤흔들고 에메랄드 나무의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혀버릴 듯한 지진을 일으켰다.
붉은 뇌전을 번뜩이며 질주하는 검은 섬광이 이윽고 레이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레이가 괴성을 내지르며 기의 폭풍으로 둘러싸인 주먹을 베리도트를 향해 내리꽂았다. 두 개의 상반되는 힘이 서로 맞부딪히자 망막을 태워버릴 듯한 빛이 어둠과 뒤섞여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며 타올랐다. 어둠과 빛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듯 뒤섞이지 않고 솟구치며 처절한 싸움을 시작하였고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흑백의 파동은 녹색의 공간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레에에에에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베에리이이이이도오오오트으으으으으!』

그 아바돈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발뭉크를 든 베리도트와 레이가 서로간의 목숨을 내건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은 더욱 강해지고 짙어져서 이윽고 그들의 전신이 잠식될 때까지 부풀어 올랐다.

콰광!

정적. 끝을 알 수 없는 혼돈의 힘은 그들이 있는 장소를 처절하게 짓밟으며 소리마저 빨아들이는 듯 정적 속에서 크게 확장했고 이윽고 그 한계까지 팽창한 무력의 소용돌이는 거대한 폭풍으로 변해 사위로 몰아닥쳤다. 갈 곳을 찾지 못한 폭풍은 그대로 에메랄드 나무 외벽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며 밖까지 솟구쳐 올랐고 흑백 모노톤의 에너지 폭풍이 허리케인이 되어 분출되었다.
이내 결판이 났다는 듯 폭풍은 서서히 그 기운을 잃고 새벽녘의 이슬처럼 사라져갔고, 에메랄드 나무에 휑하니 뚫린 거대한 구멍 사이로 먼지에 휩싸인 그림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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