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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 운명의 일곱 가지

2007.05.27 09:29

갈가마스터 조회 수:1488 추천:5

extra_vars1 Nacht und Tra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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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숲의 중심부까지 들어선 샷셀과 비밀특무대 일행은 조심스럽게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무성한 잡초들과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 덩굴들, 하늘조차 가려버린 빼곡한 활엽수들과 대낮임에도 진득한 안개로 둘러싸인 부스 숲은, 태양빛조차 가리며 숲을 통과하려는 자들에게 회색 어둠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오랜 세월 인간들의 출입을 막고 여전히 태곳적의 숨결을 간직한 원시림은, 아직까진 성역을 침범한 인간들에게 순순히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 아아! 짜증나! 짜증나 죽겠네!”
  화르륵!
  돌연 앞서가던 블레어의 몸에서 짜증 섞인 불기둥이 솟구쳤다. 그러나 지옥불에 버금가는 불꽃의 회오리도 고작해야 그 주변의 수풀을 새까맣게 만들었을 뿐, 수분을 가득 머금은 나무와 주변 공기엔 그을음 정도의 피해밖에 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불꽃에 깜짝 놀란 것은, 그의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던 닥터 에뮤알과 카폰, 이 두 사람이었다. 에뮤알은 하얀 가운의 소매가 시꺼멓게 그을렸으며, 카폰의 경우 머리카락 끝에 새하얀 재가 들러붙을 정도였다.
  불꽃이 사라지자, 에뮤알이 주먹을 치켜들고 블레어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외쳤다.
  “이 멍청한 불원숭이 놈아! 네 학습 능력은 유인원을 넘어 붕어 수준이냐? 아까부터 네 불꽃은 소용없다고 쓰지 말라고 했잖아!”
  분명 이들은 한 시간 전만 해도 블레어의 불꽃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숲에 길을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원이 인원이다보니 이 방법이 꽤나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닥터의 말마따나 어느 정도 숲의 중심부까지 들어서자 상황은 돌변했다. 어느 시점부터 블레어의 불꽃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보면 알다시피, 불꽃이 아무리 거세게 타올라도 나무는커녕 이파리조차 불태워버리기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볼 정도였으니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일종의 결계나 정령 같은 초현실적인 힘이 숲을 보호하는 것 같았다.
  불의 정령 살라만더의 힘을 사용하는 블레어에게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는 숲은, 신의 저주와도 같았다.
  “크아악! 내가 알게 뭐야! 지금 이놈의 숲 때문에 돌아버리겠다고! 가도가도 숲, 나무, 뱀, 벌레! 또 숲, 나무, 뱀, 벌레~! 게다가 이놈의 안개! 안개! 안개! 아우우욱! 싸그리 불태워 버릴까보다! 게다가 카발리아 총토오오옹!”
  블레어는 도끼눈을 부릅뜨며 이번엔 그의 뒤에서 유유히 따라오고 있던 레이첼을 향해 화살을 돌렸다. 그의 곁엔 발터가 소리도 없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수풀을 스치는 소리는커녕 기척조차 없는 것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서자, 왕년에 사신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던 그 늙은 집사의 힘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블레어는 손을 휘둘러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이놈의 숲, 북쪽이 어디랍디까? 이 빌어먹을 안개 때문에 하늘도 안보이고, 나무는 베어봤자 나이테의 방향이 몽땅 제각각이고! 이거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거요?”
  닥터는 웬일로 블레어의 말에 동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카폰 또한 불안한 눈초리로 조심스럽게 레이첼을 향해 눈을 흘겼다. 사실 그건 이곳에 몰려있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였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죽음의 숲속에서 식량도 없이 강행군을 벌이고 있는데 이런 불안감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이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레이첼 카발리아의 심중이었다. 무작정 따라가며 불안해하는 것보다야 인솔자의 설명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덜 불안하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모든 이목이 인솔자, 레이첼 카발리아를 향했다. 레이첼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블레어를 바라보다가, 문득 상의 호주머니에서 은색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휴대용 시가 케이스인지, 안에는 질 좋은 궐련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레이첼은 그 중 하나를 빼 입에 물었다. 그는 입술 끝에 궐련 끝자락을 문 채 발터를 향해 눈을 돌렸다가, 문득 블레어를 주시하며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불.”
  “으잉?”
  뜬금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블레어가 인상을 구겼다.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레이첼은 입술 사이에서 시가를 까닥거리며 귀찮다는 듯 재차 말했다.
  “불 말이다 부울. 귀관의 귓구멍은 장식인가?”
  이 사람은 도대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던 블레어는 문득 기운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 심각한 상황에서 작은 떨림조차 없이 고요한 레이첼의 푸른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이쪽이 열내는 것이 하찮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블레어는 포기하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손가락 끝을 궐련 끝에 갖다 대고 불을 붙여주었다.
  “후우—”
  레이첼은 있는 힘껏 궐련을 빨아들이며, 만족한 듯 희뿌연 연기를 후우 내뱉었다. 연기는 안개 속으로 빠르게 흩어지며 매캐한 냄새를 사방팔방으로 흩뿌렸다. 뒤늦게 블레어는 자기가 휴대용 성냥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관자놀이에 울긋불긋한 핏줄을 세우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제 말 좀 해보쇼. 우리가 맞게 가는 겁니까?”
  “모른다.”
  “에엑?!”, 모든 이들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곧 불안이 현실이 되어 이들을 휩쓸었고 저마다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며 두런두런거렸다. 특히 쿠마다스 비밀특무대의 동요가 심했는데, 그건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이브라함 과장만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연고도 없는 아이스타스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인데, 그 에이브라함이 비명조차 없이 횡사한 것이다. 그런데 인적조차 없는 이런 숲 속에서 길을 잃고 굶어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이들이 느끼고 있을 공포심에 비하면 카폰과 에뮤알, 블레어는 대범한 편이었다(카폰은 거의 울듯한 표정이었지만). 오히려 블레어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레이첼의 말이 더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이것이 ‘모른다’라는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이던가?
  “그만!”
  문득 레이첼의 음성이 천둥처럼 여기저기서 떠드는 목소리를 잠재워버렸다. 그는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든 채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이 앞에 뭐가 있는지, 이 방향이 맞는 방향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건 내 실책이며, 이 숲을 과소평가한 내 오만에서 비롯된 문제니까,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지.”
  레이첼은 ‘사과’라는 표현 대신 ‘시인’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지휘관으로서 사과는 남발하면 안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끌고 온 사람으로서 그는 끝까지 이들을 이끌 책임이 있었으며, 실수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병사들의 사기에 좋지 못했다. 휘하 부대원들이 리더에 대해 불신하면, 그 파티는 이미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칫 잘못하면 지휘권이 붕괴될 가능성도 있었다. 레이첼은 궐련 한 모금을 빨아들인 후, 다시금 말을 이었다.
  “후우—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가겠는가? 지금에 와서 돌아가는 것은 더 위험할 수 있는데? 이 해괴망측한 곳에 들어선 이상, 뒤를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귀관들은 잘 알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판단했다, 이 빌어먹을 숲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해답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고. 이 숲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 지금 상황에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니면 내가 귀관들을 잘못 본 것인가? 고작 과장하나 잃었다고 쿠마다스의 신병(神兵)들이 두려움에 덜덜 떨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구걸하는가?”
  척!
  순간 비밀 특무대의 눈빛과 자세가 변했다. 흔들거리던 초점은 뚜렷이 레이첼을 향했고, 구백여명, 천 팔백여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어둠 속에서도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우리들은——!”
  문득 그들 중 신부복을 차려입은 한 여자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로즈마리 수녀라고 했던가? 귓불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단발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여성으로서 여장부 기질이 다분한 그는, 에이브라함의 부장직을 맡고 있던 자였다. 그녀는 등에 머리 하나는 더 큰 라이플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총검 대신 날카로운 십자창(十字槍)이 달린 기형의 무기였다. 로즈마리 수녀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상인 갈색 눈동자에서 총명한 빛을 발하며 굳게 여문 입술로 다음 말을 토해냈다.
  “우리들은— 오딘의 검이자, 하임달(Heimdall)의 뿔피리(Gjallarhorn)! 신의 파수꾼이 되어 이 세계를 위협하는 적을 감시하고 쳐부수는 것이 우리들 5과 걀라르호른(Gjallarhorn)의 사명!”
  로즈마리 수녀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들은 누구인가!”
  “우리들은 영광스러운 오딘의 자식들이자, 하임달의 뿔피리, 걀라르호른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두려운가?!”
  “Nein(아닙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이여! 죽음이 두려운가?!”
  “Nein!”
  “형제자매들이여, 내 그대들에게 묻나니,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오딘의 뜻에 반하는 이단자들에게 피의 단죄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가 할 일은 주신 오딘의 적을 토벌하는 것이다! 순교하신 에이브라함 과장님의 뜻이 바로 그러하였으며, 나는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죄인들에게 단죄를 내릴 때까지 행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다시 한 번 묻노니, 이 나를 따르겠는가?”
  “Ja(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발할라의 문턱까지 로즈마리 수녀님을 믿고 따르겠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과장님의 대리가 되어 그대들을 이끌 것이다! 걀라르호른의 신념과 오딘교단의 명예를 위해!”
  “Ja!”
  로즈마리 수녀는 이윽고 손을 내리고 한층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구석에 숨어 숲의 한기에 덜덜 떨고 있는 한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아까 레이첼에게 그들의 신병을 맡긴 추기경급 인사 반 데 디트리히 주교였다.
  “괜찮겠습니까, 디트리히 추기경.”
  “큼큼. 정식 절차는 아니지만 임시로 내가 허가하겠네, 로즈마리 수녀.”
  “감사합니다.”
  로즈마리 수녀는 묵례로 디트리히 주교에게 예를 표한 뒤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카발리아 경, 저흰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이것은 순교한 에이브라함 신부님이 저희에게 내리신 역경과 시련, 우리들은 신뢰와 명예를 위해 그대를 따를 것입니다.”
  우직한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너무나도 당당하고 냉철한 어조. 레이첼은 순수한 호의로 새롭게 5과의 과장직을 수행하게 된 로즈마리 수녀를 바라보곤, 시가를 땅에 버려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고맙군, 그럼 계속 가볼까. 발터— 우리들이 앞장선다. ‘손님’분들을 최대한 빠르게 목적지로 데려다드리자.”
  “알겠습니다, 주인님.”
  흡족한 표정의 발터와 희미하게 웃고 있는 레이첼이 앞장서고 비밀특무대가 우르르 몰려가자, 후미에서 블레어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에뮤알을 향해 중얼거렸다.
  “닥터, 저것들 어지간히도 돌았나본데? 저딴 궤변에 놀아나냐, 미친놈들.”
  “큭큭큭, 그렇게 치면 총통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도 저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갔잖아.”
  “흥, 나는 달라, 샤이란이 아니었으면 이런 꽉 막힌 곳엔 들어오지도 않았다구, 누구한테 얽매이는 건 딱 질색이니까. 아아— 그러고보니 그 아가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블레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을 보았다. 터벅터벅, 건들거리며 불량스럽게 일행의 뒤를 따라가던 그는 뭔가 잊은 것이라도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더니, 주변을 휙휙 돌아보곤 닥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꼬맹이는?”
  “음? 그러고보니…….”



  “에, 또…. 여기는 어딜까요.”
  한편 어린 마왕자, 카폰 크라이슬러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 속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이첼 총통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을 들으며 가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뭔가를 느끼고 있었는데, 잠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사이, 이렇게 모두들 사라지고 혼자만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것이다.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역시 주변에선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걸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심장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공포가 불현듯 고개를 쳐들었다.
  “브, 블레어 씨—! 에뮤알 씨—!”
  목청껏 소리질렀지만, 대답은 오로지 나무들 틈새로 돌아오는 메아리가 전부였다. 무섭고 두려웠다. 어린 시절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몸이 떨려왔다. 그 때도 무서웠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그를 감싼 풍경에서 온통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기묘한 향기가 그의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고 하늘조차 지워버린 숲의 어둠은 영혼을 옭죄어 왔다. 말 그대로 카폰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부스럭.

  공포가 극대화 되어 뇌리를 지배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뒤쪽 수풀 사이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카폰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어 애꿎은 심장만이 전신에 부족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쿵쾅거리며 그의 머리에 울려왔다. 주변의 소리가 모조리 사라졌기 때문일까? 목구멍너머로 마른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수 없었다. 그토록 음울하게 지저귀던 새들도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곤 모두 숨어버린 것 같았다.
  ‘치, 침착하자. 지금의 나는 정의를 수호하는 샷셀의 요원 중 하나야. 그 동안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겨왔잖아! 귀신이든 짐승이든, 이런 것에 겁을 집어먹어선 어쩌자는 거야!’
  그렇다, 그동안 숱하게 싸워보았던 12제—이스트울프, 카타스트로프나 홀리웨이, 데드웨이를 비롯하여 이번에 기차를 습격한 그 도미노 칼라베라까지. 그들에 비한다면 귀신이든 짐승이든, 태곳적의 괴물이든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간신히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카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수풀 속을 흘겨보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걸까, 아니면 안에 숨어있는 무엇인가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걸까, 무성한 잡초들이 흔들흔들, 불꽃처럼 기묘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 올 테면 와봐! 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카폰이 완전히 몸을 돌리고 비장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 수풀 속에서 형상을 알 수 없는 시꺼먼 무엇인가가 불쑥하고 튀어나왔다.
  “우—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결국 카폰은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Destiny
        ~Seven branch of Fate

                                                 The 33th day. Nacht und Traume(밤과 꿈)





  “으으으으.”
  다시 눈을 떴을 때, 카폰의 시야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하늘을 가린 숲의 어둠이 가늘게 뜬 그의 시야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꼴사납게 기절이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죽어서 명계(冥界)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카폰은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꿈…인가?”
  카폰은 당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전히 코끝에서 아련하게 맴도는 기묘한 향기와 솨아아— 산들바람이 이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시원한 소리가 아직도 그를 몽현(夢現)의 경계에서 헤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숲 안을 음울하게 감도는 회색 안개와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숲의 노랫소리, 꽃향기를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향기가 뒤섞여, 꼭 환상의 세계에라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카폰은 멍하니 숲의 어둠 속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비된 감각이 하나둘씩 돌아오며 서서히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부스럭

  “와, 와앗! 와아악! 와악!”  
  또 다시 뒤쪽에서 수풀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들려오자, 잠에서 완전히 깨버린 카폰은 화들짝 놀라 거의 기어가다시피 몸을 끌며 뒤에서 나타난 뭔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미친듯이 팔다리를 휘저었다. 마광포도, 그가 가진 마왕으로서의 위엄도, 뭣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따라 살기위해 몸부림을 쳤다.
  ‘이, 이렇게 죽는 건가? 나 카폰 크라이슬러, 마왕의 힘을 이어받은 내가 이렇게 죽고마는 건가? 아, 어머니 보고 싶어요.’
  카폰이 절망 속에서 유언을 남기고 있을 때, 그의 뒤로 가까이 다가온 검은 형상이 그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저어….”
  그제야 카폰은 발광(發狂)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의 귓전을 강타한 나지막한 음성. 그건 먹이를 앞에 두고 포효하는 육식동물의 으르렁거림도 아니었고 숲의 괴물이 내는 탐욕스런 괴성도 아니었으며, 귀신이 내는 귀곡성도 아니었다. 그건 맑고 투명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카폰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경직된 목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을 기절하게 만들고, 이렇듯 혼비백산하게 만든 존재를 직시할 수 있었다.
  어깨까지 잔잔하게 물결치며 내려오는 화이트 바이올렛 빛의 머리카락과 핏기조차 없어 인형이 아닐까 의심되는 티 없이 맑은 피부, 게다가 카폰을 바라보면서 어둠 속에서도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크고 맑은 보랏빛의 눈동자. 그것은 숲의 어둠 속에서도 지나치게 빛을 발하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단지, 심하게 헤진 순백의 드레스와 그녀의 가녀린 목을 둘러싸고 있는 굵직하고 투박한 족쇄가 눈에 밟혔지만, 지금 카폰의 뇌리에 그런 것이 들어올 리 없었다.

  카폰은 사태를 깨닫곤,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왜 저런 아이가 여기에 있는지는 몰라도, 자기 또래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의 그림자에 놀라 기절을 하고, 한술 더 떠 겁쟁이처럼 벌벌 긴 것이 창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에라도 숨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저기, 나는 그러니까.”
  “…….”
  소녀는 말이 없었다. 조금 전에 그의 어깨너머로 말을 건 것으로 비추어보아 벙어리는 아니었고, 지금도 그 수정같은 눈동자를 들어 카폰의 특징적인 검은 눈동자를 직시하는 걸로 보아 숫기가 그렇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소녀가 백치처럼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그제야 카폰은 그녀의 목에 채워진 족쇄를 볼 수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족쇄였다, 죄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끔 발목에 철구와 함께 채워놓는 강철의 고리. 게다가 완전히 헤져서 걸레로도 쓰지 못할만큼 더러운 순백의 드레스까지. 이건 완전 책에서나 보았을법한 노예가 된 공주의 느낌이었다.
  카폰이 아무런 생각없이 그녀의 족쇄에 손을 가져가자, 소녀는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곤 상처입은 동물처럼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카폰을 노려보았다.
  “아, 미안해요. 해를 끼칠 마음은 없었어요.”
  카폰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비친 적개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깊은 숲 속, 거기다가 주변엔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단 둘 밖에 없는 상황. 소녀가 경계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끼눈을 치켜뜨자, 카폰은 곤혹스러운 듯 검지로 볼을 긁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저 행색을 보아, 그녀는 정상적인 인간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떤 인생을 겪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저 모습은 흡사 들고양이—타인의 도움과 손길을 두려워하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들고양이와 같았다. 그렇다면 저것은 이미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아니, 짐승과 인간의 중간정도라고 할까, 본능만 남은 어린아이 같다고 할까. 어쨌든 그녀는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다 판단되자, 카폰은 체념하고 그대로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며 편안히 앉았다. 그가 앉자, 소녀도 따라서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눈높이를 맞춰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임을 카폰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피곤한 듯 한숨을 작게 내쉬며 머리를 나무 등걸에 기댔다.
  그래도 소녀와 함께 있다보니 더 이상 무서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지독한 고독과 공포심이, 지금은 기본적인 회화조차 결여된 상대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래서일까, 카폰은 혼자 버려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냉정히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일행을 찾기 위해 이동하지 않고 이렇게 앉아버린 것도 그답지 않게 여러 가지 생각이 복합적이고 냉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게 앉아 있다 보면 에뮤알씨나 다른 분들이 찾으러 오겠지, 나 혼자 움직였다간 길이 엇갈리거나 길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이곳을 빠져나갈 일말의 길조차 막혀버리겠지,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힘을 아껴서 일행분들이 날 찾을 때까지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야. 게다가…’
  카폰은 생각을 마치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은 적개심으로 날카로웠지만, 카폰의 얼굴은 소녀에 대한 연민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는 소녀를 혼자 두고 움직일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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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트샤인 깊숙이에 자리 잡고 있는 비밀스런 장소 실키클럽. 어두운 밤안개 속, 을씨년스러운 건축물의 짙은 그림자 사이에 숨어 은밀한 핑크빛 네온사인간판을 빛내는 그곳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온갖 쾌락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살아 숨 쉬는 장소였다. 이곳은 성자가 지나갔다는데서 유래된 이 마을을 타락의 성소로 만드는데 일조한 마피아조직 바이퍼 트라이브(Viper Tribe)의 주된 서식지로도 유명했는데, 평소에도 경계가 삼엄하건만 오늘따라 더욱 그러했다. 완전무장한 검은 양복들이 클럽 주위를 서성이고 하나같이 긴장한 투가 역력한 것이, 오늘은 손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 양복들이 지키고 있는 클럽의 뒷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쪽 구석진 곳에 폐쇄된 철문이 하나 있었다. 오랜 세월을 상징하듯 불그스름한 녹이 잔뜩 끼어있는 그 철문은, 실키클럽에서 가장 비밀스럽다고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대개 그 철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지만, 철문과 그 뒤에 존재하는 어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바이퍼 트라이브의 오래된 간부들은 그곳을 들어 ‘지하감옥’이라 부르곤 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래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철골계단이 하나 나온다. 작은 불씨조차 발붙일 곳이 없어 지옥의 심연처럼 깊어 보이는 계단의 끝자락에 이르면, 간부들이 말한 지하감옥이 있었다. 클럽이라는 특징적인 장소에 비추어볼 때, 이런 음침한 곳에 술 저장고도 아닌 감옥이 있다는 사실은 생선요리에 레드와인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어색했지만,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저스티스의 12제인 이완 카타스트로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질 법한 곳이었다. 이곳은 그의 뒤틀린 정신세계나 가학적인 취미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무시무시한 장소였다.
  이 공간의 존재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감금과 고문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샷셀이나 타국의 방첩기관들처럼 정보원을 잡아다놓고 정보를 캐내기 위한 장소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곳은 단지 베놈 로드(Venom lord)라는 아명으로 유명한 카타스트로프의 취미를 위한 장소, 장난으로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내고 기분전환삼아 사람의 눈알을 뽑아버리기도 하는 장소였다. 가위와 절단기를 이용해 전신의 힘줄을 끊어버리고 인두기로 살을 지지며,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희생자를 짓밟으며 비웃기 위한 죽음의 성소(聖召)였다.
  이 좁은 공간에 감금실과 고문실은 고작해야 쇠창살 하나로만 나누어져 있을 뿐이었다. 감금실은 쇠사슬에 두 팔다리가 묶인 희생자로 하여금,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고문장면을 볼 수 있게끔 안배되어 있었으며, 이곳에 일초라도 묶여 있어봤다면 그것들을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구역질나고 끔찍한 일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서로 맞물려 굴러가는 톱니바퀴에 몸뚱아리가 걸레처럼 짓이겨진 뒤에도 고통 속에 살아 꿈틀댄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은 자연스럽게 미쳐버렸다.
  고문실과 감금실이 합쳐진 이 방의 기묘한 구조는 그래서였다. 카타스트로프는 인간이 이성을 잃고 광기에 시달리며 미쳐버리는 것을 즐기는 악마였으니까. 그리하여 이곳은 취조실이나 여타 감옥과는 달리 고문을 위한 비좁고 밀폐된 장소가 따로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였다. 그 옛날, 카타스트로프가 베리도트에게 패하고 진정한 쾌락을 알아버린 지금에 와선 그저 아무도 없는 음습한 공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눅눅한 어둠 속에서 샤이란은 조용히 눈을 떴다. 오랜만에 눈을 떴기 때문일까? 맞은 편 벽면에 매달린 촛불의 은은한 빛조차 망막에 닿자 눈이 부셨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그제야 녹슨 쇠창살 너머로 고문실의 살풍경한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맨 처음 보인 것은 핏자국이 엉겨붙어있는 고문용 나무침대였다. 흐릿한 불빛을 받아 그 괴기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침대는 희생자의 사지를 단단하게 묶기 위해 머리맡과 발치 귀퉁이에 족쇄 네 개가 쇠사슬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심부엔 웅덩이처럼 잔뜩 고인 핏자국이 아교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불그스름한 벽돌로 이루어진 벽면엔 망치에서 드라이버까지 각종 고문기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고, 구석에는 고문에 쓰이는 각종 기구들이 아직도 피를 탐하며 침묵 속에 숨어 흉흉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것들을 보는 즉시 앞으로 겪을 고통의 미래를 상상하며 괴로워했을테지만, 이 신경이 꽁꽁 얼어붙어버린 설원의 마녀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했다.
  “취미 한번 고상하군.”
  도무지 잡혀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냉정한 음성. 샤이란은 창살너머의 고문실을 바라보며 짧게 일축하곤, 가만히 머리위에서 두 손을 결박하고 있는 수갑을 올려다보았다. 혹시나해서 마법을 써보려했지만, 역시나 수갑에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는지 전신에서 마력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샤이란은 ‘흥’하고 콧방귀를 뀐 뒤, 옆에서 똑같은 자세로 결박되어 있는 히로를 돌아보았다. 히로는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마치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잡혀올 당시, 샤이란보다 더 심하게 반항했기 때문인지 그의 전신은 멍과 먼지투성이였다.
  “이제 그만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히로 엘리븐.”
  “……이런, 제 연기가 어설펐나요? 눈치 채고 있었다니.”
  샤이란이 말을 걸자, 그 때만해도 죽은 것처럼 보였던 히로가 피식 조소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시체처럼 창백했던 그의 피부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시체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난 히로가 목을 움직여 뭉쳐있던 근육들을 풀어주자, 우드득하고 근골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이란은 여전히 얼음처럼 싸늘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아니, 네 가사상태(假死狀態)는 완벽했어. 단지 네가 그 정도에 죽을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대단하군요. 그 정도 판단으로 시체에게 말을 걸다니— 조장도 분명 제정신은 아니에요.”
  네크로맨시(Necromancy)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를 응용한 가사상태. 시체에게 거짓 생명을 부여하는 마법을 반대로 응용하여 산 자에게 거짓 죽음을 내리는 특수한 흑마법. 그것이 바로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히로가 자신에게 시현(示現)한 마법이었다. 잘못하면 진짜 죽을 위험이 있는 어려운 마법이었지만, 육체의 일부가 마력수정화(化)된 히로에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이런 위험한 마법을 건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적들의 경계를 허술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히로는 일부러 난동을 부려, 카타스트로프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에게 샤이란보다 그를 더 경계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이번엔 자신을 시체로 만드는 가사마법을 걸어 적들의 경계를 더욱 허술하게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거의 완벽하게 시체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들을 감시하는 저스티스의 하급 요원들은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시체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샤이란은 히로가 난동을 부리는 동안 얌전히 있었기 때문에 경계대상에서 빠진지 오래였다. 하물며 그녀의 마력을 구속하는 수갑이 있는데, 굳이 마법도 쓰지 못하는 여자를 경계할 필욘 없다는 약은 생각도 그들의 주의력을 약화시키는데 크게 한몫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상황이었다. 지금 이들이 갇혀있는 감옥 안엔 아무런 보초도 없었다. 가끔 끼니때마다 오는 바이퍼 트라이브의 조직원 정도가 감시자의 전부였으니 경계가 얼마나 허술해졌는지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 너답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경비가 허술해질 줄이야. 덕분에 내가 움직이기 편해졌어.”
  “훗, 과찬의 말씀을.”
  “하지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내가 그걸 눈치 못 챘다면 어쩔 생각이었어? 만약 내가 널 따라 같이 날뛰었다면 말야.”
  “그럴리가요. 조장이나 나나, 우리 둘 다 이렇게 맥없이 잡혔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그 상황에서는 후에 있을 뭔가를 위해 조장보다 저에게 주의가 쏠리게 만드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설마하니 아무 대책이나 목적도 없이 순순히 오라를 받은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을 경멸할 거예요.”
  ‘후훗’ 샤이란은 나지막이 냉소를 흘렸다.
  “그래, 네 예상처럼 이곳에 잡혀온 것은 다 생각한 것이 있어서야.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을 이루진 못했어.”
  “목적이라면?”
  “녀석들의 본거지를 캐내는 일.”
  “저스티스 녀석들 말씀입니까?”
  “그래, 정확히 말하면 12제 녀석들이 모이는 철탑(Iron tower)이겠지.”
  “철탑이요? 그건 확실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철탑! 샤이란이 언급한 철탑이란, 북쪽에 펼쳐진 유사 지옥 속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일컬어지는 신비한 강철성의 이야기였다. 사막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 이야기는, 지금에 와선 저스티스의 비밀 기지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소문만 무성한 장소였다.
  “조장, 지금 제정신입니까? 확실하지도 않고, 단지 소문에 불과한 것을—.”
  “그래, 네 말마따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은 명백해. 녀석들의 세력에 대한 것은 물론, 카타스트로프나 홀리웨이처럼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녀석들을 빼곤 12제 중에 아는 녀석도 거의 없지. 이것은 샷셀과 저스티스가 벌이고 있는 소리없는 전쟁에 있어서 치명타가 될 정도로 위험한 사항이야. 우린 적을 모르는데, 적은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거든. 철탑이라 호칭한 것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해.”
  “그래서 순순히 적진 속으로 기어들어온 겁니까? 적의 정보를 캐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터무니없군요.”
  “터무니없진 않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작전이었어.”
  “아뇨 터무니없어요. 당신은 저스티스란 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녀석들이 얼마나 잔학하고 얼마나 무서운 녀석들인지.”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히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족이 눈앞에서 무참하게 도륙당하고 그 자신은 전신을 마력수정으로 바꾸는 흑마법의 희생양이 된 일 모두가 떠올라 가슴 속에 품어두었던 분노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녀석들이 우릴 미끼로 쓰려하지 않았다면 우린 잡히자마자 죽었을 겁니다. 녀석들에게 인질은 필요없으니까요. 설마하니 그걸 모두 예상하진 않았을 테죠?”
  “예상?”
  또 다시 샤이란이 냉소를 지었다. 의미모를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이번엔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은팔찌를 집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예상 같은 건 필요없어. 모든 것이 작전대로니까. 네가 말한 모든 일도 작전의 오차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뚝, 그녀는 거리낌 없이 팔찌를 끊었다. 그리곤 그것을 두 개로 나눠, 수갑에서 가장 약한 연결부위에 조심스럽게 돌돌 감았다. 히로는 말없이 그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양쪽 수갑 모두 똑같이 장치한 후, 샤이란은 팔찌에 달려있던 작은 진주하나를 빼들었다. 그리곤 여전히 냉소를 지어보이며, 그대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것을 부숴버렸다.
  콰직!
  그것이 파괴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팔찌와 수갑이 동시에 번쩍이며 수갑이 모래성처럼 가루가 되어 무너져버린 것이다. 수갑의 잔해가 그녀의 하늘빛 풍성한 장발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자, 히로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원소붕괴(Destroy Element)! 설마 이건, 닥터가 발명한 그 물질입니까?”
  샤이란은 정수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대답했다.
  “그래, 평소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단순한 금속에 불과하지만, 일단 발동만 하면 그것과 맞닿은 원소와 혼합하여 물질의 결합을 붕괴시키는 물질이지. 옴니-언스테이블(Omni-Unstable)에서 파생된 실패작이라고 너도 설명은 들었을 거야.”
  “으음, 이런 것이 있었군요. 하긴 그 물건이라면 저스티스 녀석들도 알 리 없죠. 마법적인 것도 아니니, 마력추적으론 찾아낼 수도 없을테고요. 하지만 아직 목적한 바를 이루진 못했잖아요. 벌써 써도 됩니까?”
  샤이란은 한동안 묶여있어 아팠던 손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녀석들의 본거지를 찾는 작전 A는 실패했지만, 작전 B라도 해치워야 하지 않겠어? 마침 ‘녀석들’도 여기에 있고 말야.”
  “녀석들? 설마 조장, 12제 녀석들과 결전이라도 벌일 생각입니까?”
  콰직!
  샤이란은 히로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마법으로 얼려서 부숴버린 뒤, 말을 이었다.
  “몇 명 정도는 머릿수를 줄여놔야지. 녀석들에게 당한 것도 있고 말야.”
  “하지만 어떻게? 저희 둘로는 불가능해요.”
  히로가 손목을 주무르며 묻자, 샤이란은 빙긋 웃으며 입 속에 숨겨두었던 뭔가를 퉤 내뱉었다. 침과 함께 땅에 떨어진 그것은 벌레만큼이나 조그만 회로쪼가리였다. 히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발신기?”
  콰직! 샤이란은 그것을 발로 밟아 부숴버리며, 히로를 향해 말했다.
  “자 이제 사상초유의 작전이 시작될 거야. 실바니아군 최강의 부대 ‘베카[BK, 청동 기사 연대(Bronze Knights Regiment)]’와 샷셀의 최강전력인 ‘헬싱(Hellsing)’ 조의 12제를 잡기 위한 합동 작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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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문득 카폰은 한기가 느껴져 몸을 움츠렸다. 불씨조차 없는 어두운 숲 속. 5월의 따스한 바람도 숲의 그늘 속에서는 날카로운 냉기가 되어 폐부로 파고들었다. 블레어와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듯 홀로 떨어지고 나니 이 추위도 상당한 고통이었다.
  추위를 생각하자 이번엔 소녀가 걱정이었다. 가뜩이나 얇아보이는 드레스차림인데다 그것도 너덜너덜한 드레스의 상태를 생각하자, 자기가 너무 이기적이었단 생각도 들었다. 카폰은 말없이 입고 있던 제복의 상의를 벗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 깜짝 놀란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카폰을 노려보자, 카폰은 예의 순박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거라도 입고 계세요. 조금이라도 몸을 덥히지 않으면 위험하니까요.”
  카폰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조금이지만, 소녀의 얼굴에서 적개심이 사그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눈에 띄게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말없이 카폰이 던진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카폰은 그것이 말할 수도 없이 기뻤고, 그녀가 소매 속으로 팔을 집어넣을 때는 환호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의외로 카폰과 체형이 비슷한 소녀에게 제복 상의는 딱 적당했다. 소녀가 그것을 입고 또 다시 백치처럼 멍한 표정으로 카폰을 바라보자, 그가 얼굴을 붉히며 허겁지겁 대꾸했다.
  “자, 잘 어울리네요.”
  자기가 생각해도 멍청한 대답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소녀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카폰을 바라보았고, 카폰은 오히려 당황해서 추위를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카폰의 행색이 웃겼던 건지, 문득 소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카폰 또한 부끄러움에 뒤통수를 슬슬 긁적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졌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뒤늦게 소녀에게 물었다.
  “저는 카폰 크라이슬러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이것도 인연인데 그쪽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저어, 저는….”
  소녀는 정답게 인사말 나누는 것이 익숙지 않은 듯 연신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이나 작았지만, 역시 벙어리는 아니라는 생각에 카폰은 빙그레 웃으며 느긋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코델리아.”

  그러나 대답을 대신한 것은, 소녀의 목소리도 아닌 그녀의 뒤에서 들려온 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카폰은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고 목소리가 들려온 그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숲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새하얀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그것도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그림자가 수플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숲의 침묵 속에서 파도소리처럼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림자는 이윽고 숲의 어둠을 빠져나와 가지사이로 뻗어나와 잡풀위로 드리워지는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목소리만큼이나 젊디젊은 사내, 한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달빛에 반짝이는 백은색의 곱슬머리와 갸름한 얼굴형이 제법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백색일색인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하얀 넥타이와 셔츠를 비롯하여 골반 아래로 늘씬하게 뻗은 바지와 백구두까지, 모든 것이 일절의 색을 배재하고 하얀색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추운 북부지방 출신인지 피부까지 하얀 것이, 어둠 속에서 하얀 그림자로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만면에 가느다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가식이 느껴지는 위험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나오자마자 마치 유흥을 즐기듯 허리에 손을 얹고 소녀의 작은 등을 가느다란 눈으로 흘겨보며 거리를 유지했다. 그의 눈에 카폰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금 뒤 가늘게 찢어진 입술을 열어 소녀의 이름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걱정했잖아 코델리아, 그렇게 사라져버리다니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고 있어?”
  진짜로 걱정했다는 듯 남자의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의 표정에선 작은 진심도 느낄 수 없었다. 카폰은 소녀의 이름과 이 이상한 남자의 관계에 대해 곱씹으며 생각하다가, 문득 소녀의 반응이 이상한 것을 보고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녀는 떨고 있었다. 그것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양 어깨를 감싸고 덜덜 떨고 있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던 보랏빛의 눈동자도 지금은 초점과 그 광택을 잃고 미친 듯이 확장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육식동물을 눈앞에 둔 작은 산짐승과도 같았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터질듯한 공포에 잠겨 발이 굳어버린 토끼처럼 보였다.
  그제야 카폰은 그녀의 헤진 드레스와 목에 채워진 족쇄가 떠올랐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저 남자는 절대 선인(善人)이 아니란 판단도 들었다. 다음 순간, 카폰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와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음?”
  문득 남자의 표정이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구겨졌다. 그는 잠시 무표정하게 카폰을 살펴보다가 문득 그의 쌍흑(双黑)의 눈동자를 유심히 쳐다보곤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이거 참 우습군! 왠 정의의 기사인가 했더니 차기 마왕이었나? 코델리아, 코델리아, 코델리아—! 고작해야 이런 반 푼이 마왕을 방패로 나에게서 벗어나려 했나? 아니면 기묘한 우연?”
  “아, 아아! 아아아! 안돼!”
  갑자기 소녀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돌아볼 때였다.

  피슉!

  어디선가 나타난 섬광, 그것이 카폰의 복부를 꿰뚫은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폰은 자신의 복부를 옆구리부터 꿰뚫은 빛의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섬광과 플라즈마로 이루어진 백색영롱한 빛의 검광. 카폰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 이건 대체….”
  빛이 사라지자, 선홍빛의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며 카폰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불시에 당한 기습에 피할 틈도 없이 치명타를 맞아버린 것이다. 비록 급소는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추위가 느껴지는 것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혈이 심했다.
  “이런, 살아있나? 예나 지금이나 마왕이란 족속들은 정말 질기군.”
  문득 카폰의 두 눈에 오른손을 위로 치켜든 백색 사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팔 주변으로 카폰의 복부를 뚫어버린 백색 섬광 네 개가 생성되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그는 카폰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사내가 카폰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자, 그의 손을 맴돌던 빛의 검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그 날카로운 검극을 카폰의 심장을 향해 겨냥했다.
  “꺼져.”
  “그만해요! 오스카!”
  그가 막 빛의 검을 날리려는 찰라, 갑자기 카폰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소녀가 끼어들었다. 높고 창명한 목소리. 소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결의에 찬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오스카라 불린 사내는 눈에 띄게 구겨진 인상으로 소녀와 그녀 뒤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카폰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던 그가 웃음기를 잃고 소리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당장 비켜, 코델리아!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비호하다니! 그러면 내가 그를 살려둘 줄 알았나?”
  “그만해요, 오스카. 제발….”
  “닥쳐! 닥쳐! 닥치라고 했지!”
  번쩍!
  갑자기 남자의 왼손잔등이에서 보랏빛의 문양이 번뜩이며 떠오르나 싶더니, 갑자기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족쇄 때문에 목구멍이 갑갑한 듯 연신 막힌 숨을 토해내려 노력하며 강철의 족쇄를 쥐어뜯듯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목에 새겨진 보랏빛의 문양이 얼핏 밖으로 드러났다. 남자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이 생긴 눈동자 문양이 불길한 빛을 발하며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빛이 사그라지고 흰 옷의 사내는 흥분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소녀는 거의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간헐적으로 꿈틀거릴 뿐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관통한 탓이었다.
  “코, 코델리아….”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는 소녀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가슴팍에 보듬어 안고는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코델리아, 많이 아팠지? 하지만 네가, 네가 나빴어. 나를 두고 다른 남자를 감싸니까 이렇게 되어버린 거잖아.”
  그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소녀의 뺨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만 바라보면 돼.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아. 너는 내꺼야, 이 ‘오스카 뒤랑 데 로시앙’의 것이란 말야. 내게 남은 것은 이제 너 뿐이야.”
  ‘로시앙’, 300년 전에 멸망한 로시앙 제국 황가의 성씨. 그가 왜 로시앙이라는 성을 잇고 있는 지 궁금했지만, 카폰은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지금은 마왕의 강대한 마력으로도 상처를 지혈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가.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이룬 것도 없이? 안돼, 절대 그럴 순 없어!’
  카폰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 상처의 수복에 힘썼다. 죽음의 공포나 분노 앞에서 어김없이 표출되던 마왕으로서의 힘도, 이렇게 치명상을 입고서는 발휘되지 않았다. 그 힘이 풀리는 순간, 육체가 파멸할 것은 자명했기 때문에 본능이 그것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흰 옷의 사내가 코델리아를 안아들며 일어섰다. 코델리아를 내려다보는 그의 가느다란 눈에서 광기와 뒤섞인 끝도 모를 집착이 느껴졌다. 그가 무서운 얼굴로 카폰을 노려보았다. 카폰은 가쁜 숨을 들이키며 힘없이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목구멍을 타고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흰 옷의 사내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치명상을 입고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마왕의 목숨을 뺏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단칼에 카폰의 목을 가르지 않았다.

  이윽고 원래의 웃는 낯짝으로 돌아간 그는 카폰에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운이 좋았다, 어린 마왕자. 오늘은 코델리아의 얼굴을 봐서 목숨까지는 앗아가지 않으마.”

  “세바스찬!” 말을 마친 그가 숲의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숲의 공동을 뒤흔들자, 갑자기 어디선가 ‘쩌적’하고 유리창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놀랍게도 공간이 뒤틀리며 내는 소리였다. 마치 구겨진 캔버스마냥 일그러진 숲의 단면이 쩌억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희한할 정도로 긴 손 하나가 획하니 빠져나왔다.
  “혹시 나 부른~ 사아아아아람?”
  “나다, 악몽의 광대(Clown of Nightmare).”
  “아— 아아— 아아아— 너로구나, 너로구나, 너로구나.”
  놀랍게도 손은 그들을 향해 살갑게 인사하며 흔들렸다. 공중에서 손만 인사하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다른 손 하나가 또 불쑥 튀어나왔다. 두 손은 반쯤 찢어진 공간의 단면을 잡고는 그대로 악어의 아가리를 찢듯 공간을 벌렸고, 그 틈으로 긴 코를 가진 화려한 복장의 광대하나가 주섬주섬 튀어나왔다. 긴 코와 구부러진 턱수염장식이 인상적인 고블린 가면. 그가 바로 ‘세바스찬’이었다.
  광대가 나오자 찢어진 공간은 다시금 그 입을 다물며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 야심한 밤, 날 부른 것이 너로구나, 아니면 널 부른 게 나인가— ‘백야(White Night) 오스카’.”
  나오자마자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 광대는 이어서 의미 없이 춤을 추며 주변을 촐싹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흰 옷의 사내—오스카는 피식 웃으며 광대에게 말했다.
  “네 놈이 왜 12제의 일원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어쨌든 일은 끝났다, 결계를 풀어다오.”
  “음음음음? 벌써? 벌써벌써? 그렇게 빨리빨리 살면 건강에 해로워, 세~뇨르~”
  쉬익, 순간적으로 생성된 빛의 검 세 자루가 세바스찬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빛의 섬광은 광대의 지척에 다다르는 순간 궤도가 휘어지며 그를 그대로 스쳐지나갈 뿐이었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그에게 어떠한 상해도 입힐 수 없었다. 그것은 이곳에 펼쳐진 결계의 영향이었으며, 공간과 결계를 다루는 세바스찬의 특수한 능력이었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공격도 어 악몽의 광대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그것이 이 특이한 12제의 웃긴 점이었다.
  “아이쿠~ 무서워라! 이거 잘못하면 엉덩이에 구멍이 두 개 생기겠는 걸? 폭군은 물러가라~”
  광대가 물구나무 선채 발로 박수를 치자, 오스카는 피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열기 싫다면, 내가 억지로 열겠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걸리자, 광대는 그제야 똑바로 몸을 세우며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아이— 알겠습니다, 이 까탈스러운 왕자님아.”
  딱! 세바스찬이 손가락을 튕기자, 갑자기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결계가 그리던 환상,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끼아아악—

  숲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오자,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밤하늘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비룡(Wyvern) 한 마리가 그들이 있는 공간으로 내려앉았다. 투박한 갑옷으로 무장한 비룡의 등엔 놀랍게도 검은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그의 절도 있는 품세와 딱딱해 보이는 인상으로 미루어보아 군인이 틀림없었다.—이 한명 앉아 있었다. 그는 비룡이 오스카의 곁으로 착륙하자마자, 그 자신의 주군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오스카는 턱을 까닥이며 답례를 한 뒤, 코델리아를 품에 안고 비룡의 안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안장 끈을 단단하게 붙든 뒤, 비룡의 기수(騎手)에게 말했다.
  “출발해라, 드레이크 리더(Drake leader).”
  “야 마인 로드(Ja, mein lord).”
  부웅! 그들을 안장 위에 태운 비룡은 자기 몸에 배는 됨직한 큼직한 날개를 움직여 힘차게 홰를 쳤다. 그러자 돌풍이 몰아치며 수풀과 나무를 뒤흔들었고 놀랍게도 1톤이 넘어보이는 거구가 하늘을 향해 둥실 떠올랐다.
  “아, 재미없어. 나는 잘래.”
  스르륵, 누워서 귀를 파고 있던 광대는 그대로 녹아들듯 땅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하늘 높이 날아오른 백야, 오스카는 자신을 노려보는 카폰의 검은 눈동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가늘게 찢어진 그의 눈은 분명히 카폰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 때는 반드시 죽여주마.

  그렇게 그는 하늘을 가르는 비룡의 괴성과 함께 사라졌다. 점점 멀어져가는 소리 속에서 자신을 찾는 블레어와 에뮤알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때 쯤이었다. 카폰은 몽롱한 상태에서 사라진 오스카의 새하얀 잔상을 뒤쫓았다.

  수많은 전투 중에서 이렇게까지 자기가 무력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가 된 그는 이렇게 약했던 것이다. 아무리 마왕의 힘을 가지고 차기 마왕이라고 떠받들려져도 혼자인 그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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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아! 아아아아아!

드뎌 끝났다!!! 퇴고는 없심! 퇴고 따위 안 키워요! 우아아아아아아!!!


설정은 조금 있다가 써야지........ 크어어억

그림은 다 그려놨는데 복합기 고장으로 올릴 수도 없심!



<즐거운 등장인물 코~너>

1. 12제 백야(白夜 White Night) 오스카 뒤랑 데 로시앙(현재 외관상 나이 29세)
: 가이아나 행성에 남아있는 최후의 드래곤 라이더. 과거 최강의 용기사에게만 주어진다는 흑야(黑夜), 백야라는 칭호 중 백야의 칭호를 가진 남자로서, 능력은 드래곤 라이더만이 가지는 빛의 창(극 중에서 검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 크기가 검처럼 작았기 때문)을 구현화하는 것이다. 그 크기와 숫자는 능력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진다고 한다. 그 중에서 백야 오스카가 가진 능력은 최상급이며, 휘하에 클라우드 나이츠(Cloud Knights)라는 소수의 용기사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극중의 오스카가 드레이크 리더라고 부른 이는 이들의 편대장격)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과거 로시앙 제국의 황가 사람으로서 726년 경에 벌어진 종족전쟁 이전엔 로시앙 제국의 제 3 황자 신분이었다. 그러나 로시앙 제국에 친교차 방문한 용족의 공주, 코델리아 데 크롬화이트를 짝사랑하고 납치하게 된 이후엔 황자 신분을 박탈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황제는 오스카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용족의 왕을 설득했으나, 용족은 인간 전체의 잘못을 물어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로시앙 제국은 용족의 발 아래 멸망하고 말았다. 로시앙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 용족은 백방으로 납치된 코델리아 왕녀와 오스카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오스카가 고대의 흑마법의 힘을 빌어 억지로 코델리아의 라이더가 된 뒤였으며, 순혈 중의 순혈이자 최강의 힘을 가진 실버드래곤의 혈족 코델리아와 억지로 드래곤 라이더의 계약을 맺은 오스카는 그렇게 얻게 된 불사의 힘으로 추적자들을 모조리 주살해버린다. 그러나 그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었기에 그는 도망자 생활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렇게 수년이 흐르고, 결국 엘리아름 공국의 바르히두스 1세에서 비롯된 반 용족 동맹은 용족을 몰아내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으며, 그 싸움엔 오스카 뒤랑 데 로시앙의 모습도 있었다. 그 싸움에서 바르히두스 1세로부터 백야의 칭호를 얻은 그였지만, 전쟁이 끝나고 용족이 멸망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백년 후, 그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12제의 일원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2. 12제 악몽의 광대(Clown of Nightmare) 세바스찬
: 큰 코와 꼬부라진 턱수염이 인상적인 고블린 가면을 쓰고 있는 광대. 여기저기 프릴과 줄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복장을 입은 정체불명의 괴한으로서, 그가 싸우는 경우는 이제껏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그가 싸운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백이나 되는 인원이 단 한 순간에 아무런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다.)

  각종 결계와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는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찢어진 공간을 타고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휘하에 아무런 세력이 없는 유일한 12제.

.... 제길 이 녀석 오스카에 비해 너무 빈약한걸? OTL



3. 코델리아 데 크롬화이트
: 오스카와 억지로 드래곤 라이더의 계약을 맺은 용족의 공주. 최후의 용족이자, 지상 최강의 힘을 가진 순혈 실버드래곤이지만, 목덜미에 새겨진 저주의 문양 때문에 오스카에게 반항할 수도 없는 비운의 여자이다(이 저주는 라이더의 계약을 맺을 때, 억지로 그녀의 몸에 오스카가 새긴 것이다. 고대 파멸주들이 사용하던 비급으로서, 종족전쟁 당시 오스카가 어떤 인물(!)에게서 전수 받은 것. 이것이 발동되면 살이 산채로 뜯겨져나가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기억까지 백지화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오스카의 저주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동족과 아버지를 죽이게 된 여자로서 현재 자폐증 비슷한 것을 앓고 있다.



혹시나 해서 덧붙임. -ㅅ-;;

<연표>

기원전 ? 년 경 가이나스 행성 탄생
기원전 6300년 경 대륙이 세 개로 갈라짐 - 노아의 방주
기원전 5500년 경 오딘의 강림, 소돔과 고모라 멸망
기원전 3200년 경 지옥신 로키와 주신 오딘의 싸움으로 남대륙 아이스타스 북부의 두 개의 섬 탄생
기원전 1600년 경 파멸주들이 오딘에게 대항함 - 진왕 전쟁
기원전 1000년 경 진왕, 오딘의 편에서 파멸주의 문명 멸망
기원전 999년 경 진왕 아이스타스 대륙에 진마국을 건국하다.
기원전 600년 경 진마국 3대륙 모두 지배

0년 인간, 요정, 용 족 등장.
26년 인간 최초의 제국 로시앙 건국
419년 요정 연맹국 EU(Elf Union) 탄생
521년 진마국 남대륙까지 세력 위축

612년 신마전쟁 발발
617년 야환국 패망
6??년 모스베라토 형제 실종
621년 신마전쟁 종전 선언, 로시앙 회담 체결

726년 용족의 공주 납치, 종족전쟁 발발
731년 요정, 인간, 마족 연합체 구성, 용족에 대항.
871년 로시앙 제국의 수도 결국 용족에게 함락.
892년 로시앙 제국 멸망.
893년 로시앙 제국 변방 엘리아름 공국, 실바니아 왕국으로 개칭.
건국왕 바르히두스 1세(바르히두스 드 엘리아름) 반 용족 동맹 주도. 반격에 나서다.
902년 종족전쟁 종식, 용족 멸망


956년 실바니아 왕국의 왕녀가 마족에 의해 납치
967년 왕녀의 시체 발견하다. 진마국과의 전쟁 위기.
하지만 진마국에서 범인인 마족들을 실바니아 왕국에 넘기고, 그들을 선동한 아크리치 몬타나 맥스가 대륙 공적이 되면서 가까스레 긴장완화.

1002년 동쪽 대륙 신성제국 카마다스, 주신 오딘의 교단 진마국을 상대로 성전 선언 - 성마전쟁
1121년 실바니아 왕국, 12 건국 가문에 의해 황제가 명예직이 되어버리고 실바니아 공화국으로 개칭하다.
1202년 혈맹성 조약, 카마다쿠스 선언, 성전 종식

1211년 저스티스 탄생
1221년 레이첼 카발리아 샷셀 창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