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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공포 배틀로얄

2008.01.29 03:55

베넘 조회 수:293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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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10시 30분경.


-끼룩

희미하게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에 니얼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불안감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한 탓이리라.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니얼은 앉은 채 어깨에 두르고 있던 낡은 담요를 옆으로 치워놓았다. 찬 공기에 갑자기 노출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다시 담요를 뒤집어쓰고 싶은 기분이 절실하게 들었으나, 그는 이대로 완전히 잠을 깨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니얼은 느린 걸음으로 창문을 향해 다가가 슬며시 커튼을 들치고 밖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바다, 수평선, 그리고 절벽 뿐.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섬의 서쪽 끝, 정확히는 F-1 지점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다.

-딸칵

밖에서 문득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군가 집의 문손잡이를 쥐는 소리였다. 니얼은 바짝 긴장하며 들고 있던 권총을 제대로 거머쥐고, 언제라도 쏠 수 있도록 왼손을 슬라이드부에 슬며시 얹었다. 이어서 손잡이를 쥔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똑- 똑- 똑-

리듬감 있게 울리는 노크소리. 어제 네모와 대충 정해 둔 암호였다. 조금 안심한 듯, 니얼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밖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모냐?"

이어서 귀에 익은,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갑니다―"

"어딜 갔다 왔냐? 없어져서 놀랐잖아."

니얼은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들이미는 소년에게 핀잔하듯 물었다. 짤막한 커트머리의 전체적으로 단정한 차림을 한 그 소년은 낡은 문을 여닫고 지나올 때 그의 숱진 검은 머리 위로 떨어진 희뿌연 부스러기들을 열심히 털어내며 대답했다.

"그냥 근처 돌아다녔어요. 주택가라 그런지 쓸 만한 게 많던데요?"

소년은 쥐고 있던 양초와 성냥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대수롭잖은 일에도 쓸데없이 축 쳐져 있는 것을 우울증이라 한다면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조차 저렇게 낙천적인 것도 일종의 병인 걸까... 도대체가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은 하고 있는 거야? 이 '네모상자'라는 아이디랑 다르게 성격 둥글둥글한 녀석은.
그나저나 말로는 쓸 만한 게 많다고 하면서 고작 양초 2개랑 성냥 한 갑 보여주는 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아침부터 안 보였으니, 분명 몇 시간씩이나 돌아다녔을 텐데 찾은 게 저것뿐인가? 빈말로라도 '많다'고는 못해주겠는데, 저건...

"그래서, 그 목숨 걸고 가져온 가치 있는 전리품이란 게 겨우 성냥이랑 양초?"

"겨우가 아니죠. 불을 켤 수 있다고요."

네모가 반색을 하며 대꾸했다. 그러나 니얼의 반응이 시큰둥한 것에 기분이 상하거나 하진 않은 듯 보였다. 반면 니얼은 이번엔 노골적으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불은 왜 켜? 나 여기 있으니 잡으러 오슈- 하자고?"

"어제 산에서 딴 버섯을 구울 수 있게 됐잖아요. 게다가 뭔가 소독하는 데도 쓸 수 있고... 불은 편리한 거예요."

"버섯?"

그렇게 뇌까리던 니얼의 얼굴에 이윽고 경악의 표정이 스쳤다. 어제 네모상자가 보여준 갈색과 희멀건 색이 기분 나쁘게 얽힌 작은 버섯뭉치를 떠올린 것이다.

"먹을.... 작정이었냐, 그거?"

"글쎄, 그냥 밤버섯이라니까요. 먹을 수 있는 거 확실하니 한 번 믿어보슈."

이것아, 한 번 믿어보는 건 좋다만 틀리면 그대로 저승행일 거 아냐... 안 그래도 죽을 요소가 여기저기 깔리고 넘친 곳에서 굳이 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머저리 같은 사유로 죽기는 싫단 말이다.
그러나 그런 니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모의 표정은 여전히 어디서 생긴 건지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나고 자란 곳이 산골 깡촌이라, 이래봬도 야생 버섯은 제법 알아요."

"...탄광촌이라고 하지 않았었냐?"

"맞아요. 탄광..."

'탄광촌은 산골이 아니냐?'는 의문을 담은 눈빛을 니얼에게 보내며 네모상자가 고개를 갸웃 기울여 보였다. 니얼은 탄광이 있는 곳에서 자라는 버섯은 혹시 시커먼 탄재가 덮여있지 않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입 속으로 말을 삼켜버렸다. 아무래도 너무 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데이팩을 뒤적이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배틀이 끝나는 것은 언제쯤일까...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벌써 열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이런 속도라면 그리 오래지 않아 생존자는 10인 이하로 줄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 1인이 남기까지는 최소 사흘은 걸릴 테지. 이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고 계속 버틴다면 필히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데이 팩 속의, 벌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빵을 보고 있노라니 니얼은 암담함이 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이 빵 하나로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버티고 나면 내일부터는 먹을 게 없다. 그 상태로 배고픔이 극에 달해 버린다면 정말 저 버섯이 먹을 수 있는 거든 없는 거든 일단 씹어 삼키고 보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은 오히려 네모의 말을 한 번 믿어본다고 손해가 날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빵인 걸까요?"

가져온 양초와 성냥을 짐 옆에 나란히 놓으며 네모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라니?"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밥 아닌가?"

갑자기 저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황당해진 니얼이 네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도시락으로 김밥 말고 빵을 주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니까요? 언제부터 우리가 빵 먹고 살았다고, 별로 몸에도 좋지 않은 걸.. 하여튼 요즘은 너도 나도 양키 물이 들어서는..."

"밥은 빨리 상하니까. 그게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저도 모르게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던 니얼은 네모의 약간 당황한 표정을 보고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볼 요량으로 꺼낸 농담이었을 것인데, 나도 그냥 농담으로 받아쳤더라면 좋았을 걸...

"듣고 보니 그러네. 그 생각은 또 못했네요.."

헤헤 웃으며 그렇게 대꾸한 후, 네모는 조금 전까지 니얼이 서 있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후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실 네모와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서로 잘 안다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평소에 잘 떠들어대던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지니 확실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무뚝뚝한 니얼의 태도에 저 성격 좋은 녀석도 조금은 화가 나 버린 건지도 모른다.

'뭔가 말이라도 걸어 볼까?'
니얼은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한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네모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거는 데에는 영 익숙하지도 않고 또 말주변도 없는 그였기에, 그냥 말없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창가에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네모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정오를 향해갈 무렵이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앞으로 어떡할지."

앉은 채로 하마터면 다시 깜빡 잠이 들 뻔 했던 니얼이 네모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졸음으로 다소 멍멍한 정신을 추스르며, 그가 물었다.

"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나 대답하는 대신, 네모는 뜬금없는 질문을 내뱉었다.

"만약에.. 형이 이 게임 최후의 두 사람 중 하나가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니얼은 네모의 질문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답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목적 쪽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야?"

"만약에 제가 먼저 죽고, 형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최후로 살아남았다고 가정하면 말예요. 형은 어쩌시겠어요?"

녀석과 나, 둘만 살아남을 경우를 묻는 것이 아니었구나.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순간적으로 자신이 떠올린 것을 그가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네모는 니얼의 눈치를 살피거나 하고 있진 않았다. 곧 네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나머지 한 사람은 아마 제이슨이나 스크림 같은 유형의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렇겠지. 그야..."

니얼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앞으로의 일은 물론 어찌될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은 더 냉정하고 더 강한, 그리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식량과 좋은 무기를 확보한 녀석이 오래 살아남게 되겠지.

"그리고 그 남은 한 사람을 이긴다는 건 정말 기대하기 힘든 일일 테고."

니얼은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암울하지만 그러네."

"그렇지만 도망 다니기만 한다면..."

"...뭐?"

니얼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네모를 쳐다보았다.

"여긴 좁은 섬이긴 하지만, 숲도 있고 건물도 많고 장애물도 많아요. 딱 24시간, 녀석을 피해 다닐 수 있는 확률은 적어도 싸워서 이길 확률보다는 확실히 높을 거예요."

"야, 그게 말이 되? 그렇게 하면 결국에..."

"결국엔 둘 다 죽겠죠."

역시 제대로 알고 있잖아? 그럼 저런 멍청한 소릴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조금 벙 찐 얼굴로 니얼은 네모상자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어리석은 행동일까요?"

어리석냐고? 당연히 어리석다. 이 녀석아.. 살 확률이 1%라도 있다면 일단은 싸우고 보는 거지. 무슨 헛소리야?
니얼은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네모가 설명을 계속했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어조였다.

"규칙상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무사히 섬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었죠. 그렇다면... 그렇다면 결국에 돌아가는 건....."

겨우 니얼은 네모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살인귀를 멀쩡히 한국 땅에 올려놓느니, 그냥 여기서 같이 죽는 게 낫다 그런 말이니?"

네모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점점 기가 막히네... 이놈이 진짜 어디서 버섯을 잘못 주워 먹기라도 했나? 저가 무슨 논개야? 갑자기 웬 되도 않게 숭고한 척이야?
기어이 화가 난 니얼이 소리쳤다.

"멍청한 소리 꺼내지도 마! 여기서 살인마 하나가 없어진다고 대한민국이 평화로워 지기라도 할 것 같아?"

"……."

"그 마지막 사람이 살인귀가 아니면 또 어쩔 건데? 미안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꽤 될 걸? 창조도시 정모가 무슨 범죄자 계모임도 아니고 말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네모를 향해, 니얼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24시간 동안 도망 다닌다는 거 말인데, 의외로 쉽진 않을 거다. 뭐라 해도 금지 구역이란 게 있으니까."

네모가 다시 빙긋 웃었다.
이래도 싱글, 저래도 싱글, 저 웃음의 의미는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건 형 말이 맞아요. 실은 그건 그냥 말해 본 거고, 다행히 진짜 계획 중이던 일은 다른 거예요."

진짜 계획 중인 일이라니?
갑자기 불안감이 한층 가중되는 기분을 느끼며 니얼이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히히 웃고 있는 네모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다행은 무슨 놈의 다행? 엉뚱한 얘기로 말 돌리지 말고, 한 번에 확실하게 말 해. 너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녀석들을 죽일 거예요."

"...뭐?"

“저 분교에 있는 녀석들을 죽일 생각이에요.”

그의 요구대로 한 번에 확실하게 밝힌 네모의 계획이란 것은, 니얼에게 약 5초간의 유체이탈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겨우 혼이 제 자리를 찾아오자, 니얼이 당연히 따라올 의문을 제기했다.

"무슨... 수로?"

"아침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LP 가스통을 찾았어요. 3개나. 그리고 트럭도 한 대... 그걸로  아까 장치를 좀 해 놓고 왔죠."

슬슬 네모상자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떠올린 것이 정말로 네모가 생각한 계획인지, 쉽게 믿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저 마냥 사람 좋고 태평한 범생이가 생각한 것 치곤 심하게 과격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분교를 폭파시키겠다고?"
"맞아요."
"정확히 어떤 장치를 하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너, 그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처음으로, 네모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솔직히 확신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그의 눈이 바닥에 놓여 있는 지도를 향했다. 정확히는 지도의 어느 지점을.
처음 그들이 눈을 떴던 곳. 이 배틀을 관리하는 자들이 있는 곳. 바로 그 지점을 노려보며 네모가 말을 이었다.

"저 분교에 있는 놈들의 게임 속 말이 되는 건 죽어도 싫습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니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긴 싫다는 네모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계획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무모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무모한 계획이다.

"안됐지만 가스통 3개로 분교를 날려버리는 건 무리야. 터뜨리는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타격도 크게 안 간다고. 보아하니 차를 밀어 넣어서 터뜨리려는 것 같으니, 조준이 정확할 리 없고... 겨우 담벼락 정도 날려먹고 벽에 흠집이나 내는 정도로 끝날걸? 거기 있는 녀석들은 그저 '뭐가 물었나?' 하는 정도로 여기겠지."

"그래서 기름통을 같이 달아서 보낼 생각이에요. 근처에서부터 뚜껑을 열고 달리면 제대로 도화선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폭발과 동시에 불이 크게 붙을 테고, 쉽게는 못 끌걸요?"

니얼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역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느새 평소의 해실거리는 얼굴로 돌아온 네모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생각하면 형이 더 좋은 계획 짜 주실 건가요?"

"그딴 무모한 계획 자체를 집어 치우란 얘기다. 생각 좀 해 봐. 놈들이 여기에 가스통이나 자동차, 기름 같은 위험물질을 고스란히 놔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이걸로 분교를 덮칠 가능성을 놈들이 고려하지 않았을 거라고 봐? 뭔지는 몰라도 확실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그야 그렇지만, 뭐.. 실패 한다고 해도, 하다못해 불이 나서 저쪽에 약간의 피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족하긴 뭐가 족해, 인마? 실패하면 녀석들이 바로 널 죽일 거 아냐? 그러니 괜한 짓 하다 죽지 말라고 계속 말려주고 있는 건데, 이건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니얼은 이번엔 그렇게 윽박지르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조금 다른 생각이 스치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어차피 죽기는 죽겠구나..'

네모의 생각은 의외로 틀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살아날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다시 말해 그는 조금 빨리 죽느냐, 조금 늦게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더 내키는 쪽을 택했을 뿐인 것이다. 싸워서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도 희박하지만, 또 그렇게 살아남으려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니얼, 자신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도 해야 한다. 그런 게 싫었던 것일 테지. 어쩌면 네모의 성격상 이 선택은 애초부터 고민하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니얼이 이윽고 네모를 향해 말했다.

"기어이 해 볼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겠어. 상황이 상황이니까. 하지만..."

다음 말을 꺼내기가 힘든 듯 니얼이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곧 단호한 얼굴로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이기적인 소릴 해서 정말 미안하다만, 난 네 계획에 동참할 생각은 없어."

네모상자는 언제나처럼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그렇지 않을 거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왠지 방금 전의 저 미소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여서 니얼은 조금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려도 들을 생각 없습니다. 어차피 트럭도 한 대 뿐이라, 둘이 가는 건 인건낭비예요."

아무래도 그는 지금 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인 모양이었다. 문 앞까지 걸어가서, 네모는 인사 하듯 왼 손을 어깨 위로 들어 보이며 마지막으로 밝게 웃었다.

"성공을 빌어주세요-"

마치 분교에 테러를 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수원에 수박 서리라도 하러 가는 듯 개구진 표정이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에도, 니얼은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말로 갔다. 정말로...
어제 분교에서 배틀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처럼, 뭔가 순식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기분. 현실 같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우울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마도 실패할 거야. 그리고...’
어차피 네모상자와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채팅방에서 서너 번 만났고, 오프라인에서 본 건 어제가 처음. 겨우 얼굴만 알고 있을 뿐인 사이.. 지켜야 할 우정도 의리도 그 무엇도 없다. 저대로 네모가 죽는다면 물론 기분은 찜찜하고 안 좋겠지만, 슬픔의 눈물이 나온다던가 하진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네모가 두고 간 빵을 챙길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길 지도 몰라. 계획이 실패할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네모를 끝까지 말리지 않았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니얼의 양미간이 심하게 찌푸려들었다. 그는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내가 이렇게까지 비굴해져야 하는 거지?’

흔히 말하는 죽음의 위기 앞에 드러나는 인간의 추한 본성이란 건 바로 이런 걸 말하는가.
자신은 네모가 해 놓았다는 장치에 대한 것조차 묻지 않았다. 같이 가주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장비를 만드는 것은 도와줄 수 있었을 터다. 내가 도와준다면 그가 만든 장치를 좀 더 효과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네모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나까지 죽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어찌되든 상관없었던 거다. 그의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성공한다면 살아날 희망이 생기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네모가 가진 식량은 내가 챙길 수 있을 테고, 어느 쪽이든 내게는 좀 더 이득이 될 테니까.

'정말... 최악이로구나. 나란 인간은.'

처음 말했던 살인귀와 둘만 남았을 때의 이야기.. 아마도 네모는 슬쩍 떠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니얼에게 자신을 도와줄 마음이 있을지 없을 지를... 그리고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도울 인간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대로 혼자서 가버린 거다.
니얼은 우울한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인간일 거라는 자기비하의 감정이 계속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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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려온 희미한 파공음에, 네모상자는 트럭으로 향하던 걸음을 일순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누군가 폭탄이라도 터뜨렸나? 산 쪽에서 난 것 같은데...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던 네모는 왼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만간 방송이 나올 시간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 알게 되겠지...’

그는 줄곧 지급받은 시계가 아닌, 약을 갈 때가 되었는지 조금씩 늦게 가는 자신의 시계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1년 전, 그가 학업을 위해 독립해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동생이 2년간이나 모아오던 저금통을 털어서 선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모가 기억하는 그의 여동생과의 기억 중 몇 안 되는 긍정적인 추억이었다.
솔직히 귀엽지는 않은 여동생이었다. 시스터 콤플렉스 따위가 생길 레야 생길 수도 없었다. 버릇없고 말도 지지리도 안 들으면서 늘 요구하는 것만 많았고, 어쩌다 노크 없이 방문을 열기라도 하는 날엔 곧바로 냉전에 돌입해 버리는 히스테릭한 성격. 게다가 어지간한 일은 화 안내고 웃어넘기는 네모상자에게 주기적으로 언성을 높이도록 만들었던 실로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일 많이 떠오르는 것이 부모님도, 친우들도 아닌 늘 싸우기만 했던 여동생일 줄이야.

‘그나저나 이 섬은 한국의 어디쯤일까...’

분명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지만, 현재는 텅 빈 유령 섬. 어쩌면 이 게임의 1회 참가자들은 이 섬의 주민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섬에서 40번 이상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기는 힘든 면도 많았다. 건물도 대게는 멀쩡하고 저렇게 가스나 트럭도 아직 남아있는 걸 보면. 그렇다면 다른 장소가 몇 군데 더 있는 걸까?
‘이번이 43회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려 42회. 매번 비슷한 인원을 데려온다고 하면 적어도 1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같은 게임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다는 말이다. 그 1600여명이 모두 창조도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매 정모 때마다 모인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사이트 자체가 유지되지 않을 테니까. 더 큰 배후가 분명 있다. 군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정하고 싶긴 하지만 그 배후는 어쩌면 정부일는지 모른다.
모두 비슷한 방법으로 데려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루트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참가자는 의외로 넓은 범위에서 끌어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네모는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다음에 끌려오는 사람 중엔 자신의 친구들이나 혹은 여동생이 끼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가만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무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네모의 등을 마구 떠밀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여기서 설쳐댄다고 해서 뭔가 해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솔직히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얌전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100% 개죽음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네모는 트럭이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갔다. 화물칸에는 비닐, 푸대 등을 대충 덮어 놓은 가스통 3개와 줄을 달아 트럭과 연결시켜 놓은 기름통 두 개가 실려 있었다. 분교 근처까진 완전히 세팅을 하지 않고 이대로 가져갈 생각이다. 네모는 가스통 쪽에서부터 길게 드리워진 심지를 적당히 안으로 던져놓고, 주머니에서 여분 탄창을 꺼내어 화물칸 바닥에 총알을 깔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허접해 보이는 장치긴 하지만 아마 제대로 터지긴 할 거다. 폭발력이 피해를 못준다 하더라도 적어도 화재는 낼 수 있겠지.

화물칸의 확인을 마치고, 이번엔 트럭의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조수석에는 클러치와 액셀러레이터를 고정시킬 두 개의 긴 나무 막대와, 핸들을 고정할 때 쓸 밧줄이 실려 있었다. 아까 오전에 시험해 봤을 때는 문제없이 고정이 되었는데 실전에서도 원하는 대로 잘 될지는 약간 불안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예전 아버지에게 운전을 조금 배운 적이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네모는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쥐었다. 옆구리에 ‘CZ75’라는 글자가 새겨진 검은빛의 총이었다. 그는 슬라이드를 찰칵 소리 나게 당겨 총알을 장전했다.
어쩌면 이것으로 사람을 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건 싫지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의 공포감. 저 분교에 있는 머저리 같은 녀석들은 스스로 그것을 경험하고 느껴봐야 한다.

‘그렇지만 쏠 수 있을까, 정말로..?’
갑자기 아까보다 수배는 무겁게 느껴지는 권총을 쳐다보며 네모는 잠시 망설였다.

- 29일 12시 현재 네 번째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근처 스피커에서 삐익-거리는 잡음과 함께 정오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 D-6, C-6, E-7, F-6, D-4, G-2, B-3, H-5, D-5, D-7, E-6가 현재 금지 에어리어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29일 14시 금지 에어리어는 G-3, 네 시간 후 29일 16시 금지 에어리어는 F-2, 여섯 시간 후 29일 18시 금지 에어리어는 B-4입니다.
이번에는 사망자 명단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네모는 스피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어라, 그런데...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사망자 수가 갑자기 많아진 기분이다. 설마...

-참고로 F-5 지역에서만 4분 만에 4명이나 몰살당했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에게! 활발한 활동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조금 전 산에서 들려온 바로 그 소리가 분명하다. 네모는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4분 만에 한사람에게 네 명이 당하다니, 어떻게 된 거지? 대체 이 안에 어떤 괴물이 있단 말인가.
방송에 나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지 즐거워 보였고, 그것이 더욱 네모의 신경을 긁어댔다. 보급 에어리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재밌으면 네놈이나 참가해서 이딴 게임 실컷 즐겨 보란 말이다!

스피커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네모는 문득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한 번 더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며 몸을 틀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순간, 그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스쳤다.

“...참고하시길 바라며.. 당연한 상식이지만, 보급 헬기를 공격하시면 목걸이가 바로 폭발하니 얌전히 보급품이나 챙겨서 게임에나 열중하시길.”

분교에서 본 양복의 남자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네모를 향해 권총을 겨눠 쥐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거기에 방송 내용을 읊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광(狂)나는 하루되시길. 이상!"

그 말을 끝으로, 양복의 남자는 쥐고 있던 휴대폰을 접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네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 네모상자군. 안녕하신가―?"

예상 밖의 상황, 그리고 예상 밖의 인물의 등장으로 네모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이번 방송 때문에 좀 늦었군. 미안하게 됐네. 아니지, 죽는 시간이 조금 늦춰진 거니 미안할 거 없겠군. ‘축하하네.’라고 해야 하나?”

“어..어떻게...”

간신히 네모가 더듬거리며 입을 뗐다. 그러나 왜인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네모가 하려던 말이 뭔지 제대로 이해한 양복의 사내가 조금 전 휴대폰을 들고 있던 왼손으로 말없이 목을 가리켰다.

목..? 아.. 목걸이! 그럼...
그 제서야 네모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도청장치다. 목걸이에 도청장치를 해 놓은 거였어. 바보 같으니, 어째서 그런 간단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거지?
그러나 후회해봤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네모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양복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13번 군이 거창하게 뭔가 작업하고 있다기에 요 아래 금지구역으로 감시반을 보냈는데, 과연 바람직하게도 제법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더군. 그렇지만 별로 똑똑하진 않았어. 유감이군.”

그는 정말로 유감이라는 듯 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친절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원래는 목걸이만 터뜨리고 끝내는 게 원칙이긴 한데.. 심심해서 그냥 직접 와봤지. 가만 앉아서 방송만 하고 있자니 솔직히 따분해 돌아가실 지경이거든.”

당했다. 완벽하게. 그리고 죽을 거다. 계획은 시도도 해 보지 못하고..
네모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쪽도 권총을 들고 있긴 하지만, 저쪽은 이미 겨누고 있다. 총을 겨누려고 움직인다면 그대로 발포해 버리겠지. 피하려고 움직여도 쏠 것이다. 어떻게 하든 동작이 한 템포 늦게 된다. 이래저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네모는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얻은 결론은 암울했다.
남자가 겨누는 총의 총구를 쳐다보는 네모의 다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지만, 저 양복의 앞에서 겁을 먹은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는 오기가 겨우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43회라고 했던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네모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눠준 설명서에 적혀 있는데?”

“이런 짓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양복 사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번 이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죽는 걸 언제까지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는 거야? 설마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납득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태까지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것도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이제 이쯤에서 끝내는 게 너희들의 신상에도 이롭지 않을까?”

방금까지 입이 얼어서 말도 잘 못하던 녀석이 갑자기 술술 잘도 떠드는 군. 어이가 없다는 듯 네모를 쳐다보던 남자가 곧 입을 열고 대꾸했다.

"아아, 그래. 충고해줘서 고맙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째선지 웃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까지만 하도록 하겠어.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이제 입이 아파지려고 하니까 그만 죽어라, 꼬마야.
그러나 순간, 방아쇠를 당기려던 남자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네모가 권총을 들고 있는 손. 그 손목이 슬며시 뒤로 젖혀지고 있었다. 어느새 총구의 방향이 그의 뒤쪽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복 사내는 급히 조준 위치를 네모의 머리로 옮기고, 서둘러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두 발의 총성이 동시에 울렸다. 양복 사내의 총이 네모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은 것과 거의 동시에, 네모가 들고 있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가스통을 비스듬히 뚫고 들어갔다.

콰아앙-!!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의 땅이 우르릉대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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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갑작스런 총성과 폭음.
니얼은 소리가 난 방향의 벽으로 달려갔다. 그 방향으로 난 창문이 없어서 사태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차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는 선 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문득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니얼은 긴장된 표정으로 조용히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똑- 똑똑- 똑- 똑-

정해진 박자의 노크 소리. 암호였다. 네모가 돌아왔나? 조금 긴장을 풀고 대꾸하려던 니얼은 갑자기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잠깐, 지금 그 애가 돌아온 다는 건 뭔가 이상하잖아? 게다가 노크하는 소리도 조금 다른 느낌이고, 좀 전의 발자국도 분명 구두 소리...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니얼은 총을 문 쪽으로 겨누고, 소리를 죽여 문이 있는 곳으로 몇 발자국 움직였다.
잠시 후, 밖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네모의 목소리가 아닌, 뜻밖의 목소리였다.

“..흥, 제법 신중한데 그래? 뭐, 그게 현명한 거다. 칭찬해 주지.”

니얼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분교에서 규칙을 설명하던, 이후로는 방송을 통해 들었던 그 목소리.

“하지만 죽이러 온 게 아니니 걱정마라. 충고를 해 주러 왔다.”

예상이 적중했다. 녀석들이 눈치를 챈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들린 소리는...
니얼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밖에서 또 한 번 그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서 불이 났으니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연기 마시기 싫으면."

다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니얼은 멍청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빨리 대피해야 한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할까 라던가 그런 것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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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힘이 든 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G-2의 금지구역으로 향하는 양복 사내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좀 전까지 깨끗하던 그의 양복은 먼지와 흙이 뒤덮여 엉망이 되어버렸고, 단정하게 빗질이 되어있던 머리도 지금은 먼지를 쓰고 정전기로 흐트러져 지저분해진 모습이었다.
폭발 때 뭔가의 파편이 치고 지나간 어깨가 사정없이 욱신거린다.

‘꼴사납군...’

손을 들어 아픈 어깨를 감싸 쥐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선 멍청하게 이게 무슨 꼴인가. 총에 맞은 가스통이 굴러 떨어지면서 약간의 시간차가 생긴 덕에 도망갈 수 있었기 망정이지, 조금만 더 가까이 갔더라도 정말로 위험할 뻔 했다.
그는 발을 멈추고 폭발이 일어난 장소를 쳐다보았다. 트럭이 있던 곳 주변은 여전히 거센 불길이 휘감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하늘로 솟아 대기에 녹아들어갔다.

‘꼬맹이 주재에 재수 없는 짓이나 하고...’

속으로 또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위치 탐지기를 꺼내어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발을 옮겼다.



【 남은 인원 : 2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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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웡... 뭔가 스리슬쩍 막장이다. T_T
11화 정오방송 이후의 방송 내용이 아직 소설 중에 나온 적 없다는 핑계로 고 사이에 사망자 한 명 더 넣었습니다.

참고로 캐스팅은 기브님이 주신 표에서 성격부분만 보고 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사심없이 공정하게 되고 있습니다. ^_^

언제나 배틀로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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