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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공포 배틀로얄

2008.01.11 18:56

베넘 조회 수:262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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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9:37


"...영 기분 나쁘네, 이거~"

데이 팩에서 꺼낸 빵 하나의 포장을 뜯으며 이노가 중얼거렸다.

"뭐가?"

셀레스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반 건성의 말투였다. 이노가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까딱까딱 움직여 보였다.

"디자인도 영 맘에 안 들고, 무엇보다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 어떻게 떼버리는 수는 없나?"

"...힘껏 잡아 뜯어봐. 말리지 않을 테니."

"흐응-"

이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셀레스트를 쳐다보았다.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가 그녀의 입가를 감돌았다.

"나가 죽으라, 이 말이네?"

"정답."

"하하하하! 요 맹랑한 꼬맹이가-"

이노는 고개를 젖히며 신나게 웃어제꼈다.

"그래, 뭐 땜에 삐쳐 있는 건데?"

맹랑한 꼬맹이...?
셀레스트는 순간 울컥 했으나,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이런 일로 지금 이노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좋지 않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꼬맹이 취급 받은 것에 화를 내는 대신, 매섭게 이노를 노려보며 다소 높아진 언성으로 대꾸했다.

"지금 몰라서 물어, 그걸?"

셀레스트는 자신과 이노의 데이 팩을 번갈아 가리켰다.

"왜 내가 5개고 넌 2갠데? 내가 네 짐꾼이냐?"

물병의 개수 얘기였다. 오는 도중 버린 하나를 제외하면 그들이 가진 생수병의 개수는 총 7개. 이노는 추가로 얻은 물병 4개를 셀레스트의 가방에 냅다 집어넣어 버리는 것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짐 문제를 해결해 버렸던 것이다.
이노는 '남자가 쪼잔하게-'란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보이며 말했다.

"겨우 그것 땜에 삐친 거야? 대신 내가 구해온 식량이지만 절반 나눠 주겠다고 했잖아-"

"쳇, 내가 왜? 내 식량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필요 없어. 그보다 물병은 왜 그렇게 바리바리 챙겨온 건데? 수돗물 마셔. 그럼 되잖아!"

"싫어. 이런 수상한 곳에서 나오는 수돗물을 어떻게 믿으라고?"

"허, 아주 팔자가 늘어지셨네. 캠핑 오셨구만, 캠핑 오셨어.."

느긋한 얼굴로 빵을 씹고 있는 이노를 향해, 셀레스트는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무겁다 싶으면 죄다 버리고 갈 테니까, 알아서 해."

사실 셀레스트의 불만의 근원은 단순한 짐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 이노가 누군가를 죽이고 무기와 짐을 빼앗아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셀레스트에게 단 한마디의 언질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그녀는 자신을 조금도 믿고 있지 않다.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신의 모습을 이렇게 노골적인 행동으로 보게 되자, 새삼스레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이노는 그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셀레스트-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분교에서 이노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을 때, 그리고 당분간 함께 행동하자고 제의했을 때 그는 내심 안도했었다. 든든한 동료가 있다면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훨씬 높아진다. 종류를 불문하고 싸움이라면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이 게임에 참가한 녀석들 중 자신보다 센 인간이 있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실제로 분교 안에서 주위를 관찰해 본 바로는 평범한 웹 사이트의 오프라인 모임에 룰루랄라 참석한 놈들 치고는 어딘지 살벌해 보이는 인상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물론 그런 점에선 저 이노도 별 다를 바 없긴 하나, 이노는 원래 그 곳, 창조도시의 음악 게시판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리던 녀석이고 또 상당한 기분파이기도 했으니 납득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듬직한 동행이 생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뿐, 셀레스트는 곧 그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노를 동료로 삼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양날의 검을 쥐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노는 셀레스트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반면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요소 또한 그녀, 이노였다.
만약 최후까지 살아남아 이노와 그 둘만 남았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기껏해야 50% 아니, 확률로 생각하면 그것도 너무 많다. 그녀는 매사 철저한 성격인데다, 자신보다 나이도 더 많고 머리도 좋다. 몸싸움에서 설사 우위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전략에서 밀린다면 거의 진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결국, 그녀를 이길 자신이 없다면 되도록 빨리 그녀를 처리하는 쪽이 오히려 그가 마지막 1인이 될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란 결론이 내려졌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이노에게 자신을 구워삶을 전략을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기 전에, 다시 말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맨 처음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자신의 무기가 이노가 가진 것보다 살상력이 높은 총이라는, 일종의 우월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노가 잠깐 주변을 살핀다며 숲으로 들어간 사이 무슨 짓을 한 건지 피 묻은 곤봉과 함께 들고 온 무기를 보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가 가져온 무기는 총, 그것도 SMG(서브머신건). 살상력으로 친다면 권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 무기였다. 그가 권총을 하나 더 얻어 양손에 쥐고 쏜대봤자, 저걸 연발로 갈겨댄다면 정면으로 맞설 대책이 없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무기에 대한 우위마저 한순간에 사라진 셈이다.
안일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너무도 안일했었다는 자책감이 셀레스트를 괴롭게 했다.
처음부터 이노는 그의 생각 패턴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함부로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총기류를 손에 넣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려왔던 거다.

아니,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월감을 가졌다는 사실부터가 바보 같았다. 이노와 알고 지낸 지도 꽤 되었고, 그녀의 성격도 웬만큼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이 짧았다니.

약 1년쯤 전인가, 이노는 길에서 시비가 붙어 싸우던 사람을 찔러 죽인 적이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정당방위란 이유로 그녀는 무혐의 처리가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먼저 칼을 쥐고 찌른 것은 상대방이었고, 그녀가 한 것이라곤 옆구리를 찔린 상태에서 이성을 잃은 척 하며 상대의 팔을 비틀어 자기가 자기 목을 찌르도록 만들었을 뿐이니까.
결국, 이노는 단지 정당방위를 주장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칼을 맞아준 셈이다.
바로 그런 면이 이노의 무서운 점이였다.
설령 이노가 아직 총을 가지지 못했고, 셀레스트가 그녀에게 총을 쏜다고 해도, 단발에 숨을 끊어놓을 정도의 치명상이 아니라면 그녀는 분명 총상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덤벼들 것이다. 결국 노려야 하는 곳은 머리 쪽. 그것도 첫 발이 빗나간다면 어쩔 수 없이 한바탕 치열한 혈투가 벌어질 테고, 이긴다 해도 가벼운 상처로 끝나길 기대하기 힘들 테지.
더욱이 지금 이노가 머신 건을 손에 넣은 이상, 셀레스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었다. 이젠 막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그녀를 해치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솔직히 지금까지 눈에 불을 켜고 사냥감이 될 만한 놈을 물색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여잔 정말 운도 좋지...'

셀레스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뜯고 있는 이노를 흘긋흘긋 뜯어보았다.
현재 이노가 가진 무기는 총 3가지. 그 중, 벨트의 오른쪽에 둥글게 말린 채 매달려 있는 휴대용 와이어 톱은 그 자체를 무기로 쓰기에는 많이 아쉬워 보이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목 같은데 들이대고 긁어버릴 수 있는 나름 유용한 무기였다. 그리고 본래 그녀의 무기인 제압 봉이 일전의 피를 깨끗이 닦은 상태로 왼쪽 허리에 채워져 있었다. 사정거리가 짧긴 해도 접근전이라면 저것도 상당히 위협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주의해야할 그녀의 주력 무기는 역시 어깨에 두르고 있는 서브머신건, 잉그램이다.
거기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은 겨우 권총 한 자루. 서로가 가진 무기의 차가 너무 크다. 하다못해 그녀가 조금만 더 덜렁거리는 성격이었어도 어떻게든 빈틈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셀레스트는 새삼 막막함의 덩어리가 뇌리를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뭘 그렇게 힐끔거려? 나한테 반했으면 그렇다고 말로 해. [소심쟁이] 놀이 중이냐?"

무슨 놀이야, 그건?
셀레스트는 방금까지 뇌리를 짓누르던 막막함의 덩어리가, 순식간에 기가 막힘의 덩어리로 바뀌어 버리는 신기한 기분을 체험했다.

"얼씨구. 웃기지도 않은 패션센스의 노출과다증 아줌마가 신기해서 쳐다보는 거다, 병신."

"오호~? 무려 네 입에서 패션 운운 하는 말이 다 나오는 걸 보니,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구나?"

철컥.
잉그램의 총구를 셀레스트의 머리 쪽으로 향하며 이노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바람구멍 한 번 뚫어봐 줘?"

"...총 치워. 이런 미친...."

저 가벼운 말투와 태도. 장난임이 분명한 행동이었으나, 언젠가 그녀가 실제로 이렇게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오싹- 하는 한기가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되도록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데도 눈이 좀처럼 총구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간신히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얼굴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미안~ 농담이야. 설마 놀란 건 아니지?"

이노는 금세 총을 치우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셀레스트는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등가를 찬바람이 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느낌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놀라긴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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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막연히 묵을만한 곳이 나올 때까지 걷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라서인지 졸리지는 않았다.
조금 전 방송이 나왔을 때 이노가 발광하며 스피커를 향해 발길질을 해댄 것 빼곤 지금까지 별 특별한 일은 없었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심하게 화를 냈으면서도 이노가 스피커에 총질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는데, 그 때 조차 그녀가 완전히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이지 빈틈을 보이지 않는군...
셀레스트는 속으로 감탄을 했다. 만일 이 게임이 한 사람만 살아남는 서바이벌이 아니었다면 이노는 실로 더없이 듬직한 그의 동료가 되어주었을 지도 모른다.

"학교라... G-3 의 이 건물이군."

약 100여 미터 전방에 보이는 낡은 3층 건물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셀레스트가 중얼거렸다.

"여긴 한동안 금지구역이 될 일 없었지?"

셀레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이노를 돌아보았다. 그의 질문은 '오늘은 저기서 묵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흠..."

학교라... 확실히 나쁘지 않다. 숙소로 치면 주택가보다 못하긴 하지만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낮고, 위층으로 올라간다면 다른 녀석들의 습격에 대비하기도 훨씬 쉬워질 테지. 만약 한발 먼저 자리 잡고 있는 잔챙이들이 있다면 쓸어버리면 그만일 테고. 그런데...
이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기분이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지?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아니면 셀레스트 녀석이 흉계를 꾸미는 낌새를 놓치기라도 했나? 왜 이렇게 찜찜하지? 이건 꼭...'

달빛에 희미한 빛을 내는 구름에 싸여,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학교 건물을 바라보며 이노는 생각했다.

'꼭 독사가 들어있는 궤짝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 같은 기분이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학교 건물만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녀를 셀레스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더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이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긴 좋지 않아. 조금 더 걸어서 주택가가 있는 곳까지 가자."

"주택가? 어어이, 미쳤어? 거긴 두 시간 후에 금지 구역이 된다고!"

"누가 거기 말해? 그 위쪽으로 가는 게 당연하잖아! 어쨌든 난 저기로는 안 갈 테니 넌 알아서 해."

"...대체 뭐가 문제인데? 이유나 좀 들어보고 생각하자."

셀레스트는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가 버릴 기세인 이노의 팔을 붙잡고 설명을 요구했다. 이런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그로써도 사양이었다. 역시 뭔가 설명의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잠시 셀레스트를 쳐다보던 이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긴 왠지 느낌이 안 좋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싫어."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아?
셀레스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이가 없군. 그러니까 유령이 나올까 무섭다, 이거야?'

"너.. 그렇게 예민한 성격이였냐?"

"...닥쳐."

평소라면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칠 만도 한데.. 지금의 그녀는 확실히 저기압인 모양이었다.
사실 방금 셀레스트가 농담조로 한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평소의 이노는 결코 민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확실히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타고난 동물적 감 같은 것은 오히려 셀레스트 쪽이 위였다. '안 될 것 같아도 되게 하는 것'이 그녀의 사상이었고, 한 번 하겠다고 결심한 일은 무리해서라도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어찌 보면 무식하게 보이기도 하는 행동 패턴의 소유자. 그런 이노에게 지금의 이 행동들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파앙-!

묵직한 총격음이 두 사람의 귀를 울렸다. 곧이어 뭔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학교 건물의 위쪽. 거기서 누군가가 한바탕 거칠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감탄했다는 어조로 셀레스트가 중얼거렸다.

"헤... 대단한걸. 확실히 뭔가 나오긴 하나보네."

파앙-

연이어 총성이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소리의 근원지를 탐색하던 셀레스트의 팔을, 이노가 잡아끌었다.

"..빨리 여길 뜨자."

"어째서? 저 자식들을 처리하러 가는 게 아니고?"

"멍청아, 저게 누구고,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지금 위쪽에 있어. 우리보다 월등히 유리한 위치란 말이다!"

이번 그녀의 설명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상대가 높은 곳에, 그것도 건물 안에 있으며, 지금은 그런 상대를 겨냥할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한밤중이란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셀레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해당 지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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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5분 전-.


"럭키-"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교실. 커튼과 창문 사이에 몸을 숨긴 채 휴대용 야시경을 손에 쥐고 창밖을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라고는 호박 아니면 애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있었잖아? 괜찮은 여자가. 대체 어디 숨어 있었기에 내가 저런 걸 못 봤지?"

이노를 발견한 것이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남자의 입에서 시시거리는 웃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흠... 하지만 이걸로 쐈다간 저 예쁜 몸이 너덜너덜해 지려나?"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창턱에 걸쳐놓은 스파스 12의 긴 총신을 한 번 스윽-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무기 치곤 꽤 좋은 걸 받았다만... 이럴 바엔 차라리 권총이 나을 뻔 했어. 맘에 드는 곳에만 신나게 구멍을 뚫어줄 수 있었을 텐데.. 그 편이 손맛도 좋고 말야... 키키킥."

분명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은 아님에 틀림없었다. 입으로 '방~방~' 소리를 내며 이노가 서 있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으로 몇 번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해 보이고, 그는 다시 눈을 렌즈에 대고 이노를 관찰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큭큭... 역시 난 운이 좋은 놈이라니깐."

운이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지도 모른다.
'뱀신의교주'라는 아이디로 동계 정모에 참여했지만, 그는 애초에 창조도시라는 사이트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인간이었다.
그는 전과자였고, 얼마 전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뒤를 밟히는 바람에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는 신세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얼마 전, 한통의 이상한 메일이 날아왔다.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당신에게. 창조도시의 동계 정모에 참가하면 재밌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해당사이트의 링크가 걸려 있었다.
회원을 많이 끌어 모으려는 홍보용 스팸 메일? 아니면 경찰의 짓인가?
그는 처음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놓고 생각해 보았으나, 우선 경찰의 짓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봐도 경찰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메일의 내용에는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 '살인을 한'이라고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떠보기 같은 성질의 것도 아니다. 해당 사이트는 그냥 평범한 포털사이트였고, 정말로 동계 오프라인 모임에 참가할 회원을 모집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살인혐의'란 말이 걸렸다.
수상하다는 생각 이상의 궁금증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고, 결국 ‘마침 경찰의 수색을 피해 집을 비우기 딱 좋은 핑계거리’란 이유를 들어, 그는 속는 셈 치고 참가신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나절 전의 분교 안에서, 그는 한 가지 묘한 사실을 눈치 챘다.
여기에 모인 참가자들은 물론 대부분이 순진한 회원들이겠지만, 자신을 포함해 살인마, 킬러의 자질을 가진 자,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벌레만치도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이 일을 계획한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배틀이 조금 더 재미있게 굴러가도록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끌어 모은 인원이 몇몇 더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게임의 배후나 목적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딴 건 사실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뱀신의교주가 흥미를 두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여자. 정확히 말하면 '예쁜 여자를 죽이는 일'에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까지 맘에 드는 스타일의 여자를 찾지 못해 다소 침울해 있던 그가 이노를 발견한 사실은 마치 삶의 이유를 모두 잃고 자살을 결심하던 사람이 죽음 직전에 한 가닥의 희망을 찾은 것에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 히히... 그래. 조금 더 와라. 좀 더 가까이..."

스파스 12의 총구를 조금 열린 창문 틈에 끼워 넣고 야시경으로 계속 이노의 행동을 관찰하며 뱀신의교주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조금씩 이노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어째 영 불안했다. 이미 그녀는 충분히 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고, 신중을 기울여 쏜다면 맞출 자신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완전히 안정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리였고, 무엇보다 총탄이 얼굴로 튀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기껏 찾은 예쁜 얼굴인데, 뭉개져 버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름 절실함이 담긴 목소리로 '좀 더 가까이'를 중얼거리는 교주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노는 그 즈음에서 아예 발걸음을 멈추어 버렸다.
'...뭐지? 설마 눈치 챈 건 아니겠지?'

뭔가 심각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이노의 모습에, 그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발견해 버린 것인가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이 밤중에 불 꺼진 교실에 숨어있는 교주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윽고 일행으로 보이는 소년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그 상태로 무언가 이야기가 오고가는 모습이 보이자, 뱀신의교주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그렇군. 일행이랑 실랑이가 붙었나.."

-저벅.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교주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망원경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이노에게 너무 집중했던 탓에 주위의 상황에 완전히 신경이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제서야 스파스 12를 제대로 거머쥐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런,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사방에 살인마들이 우글우글한 곳에서 정신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니, 내가 미쳤지.. 아직 저 여자를 죽이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내가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이 무슨 코메디 같은 일이냐.
그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앉아있던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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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뭐야, 저 사람. 설마 진짜 쏘겠다는 심산인가?'

당황한 것은 뱀신의교주가 있던 교실로 다가온 사내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엑스트라라는 아이디를 쓰고 있는 그는 배틀이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발견한 이 건물에 몸을 숨겼고, 다행히도 이곳이 여태껏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덕에 비교적 안전하게 숨어있을 수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 되어 아마 대부분은 잠들었거나 아니면 잠잘 곳을 찾아 이동했으리라 여기고 슬슬 주위를 살피기 위해 움직이던 그는 건물의 3층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곳에 그 말고도 숨어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굴까. 얌전한 사람이라면 말을 걸어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엑스트라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나직한 그 목소리는 아무리해도 잘 들리지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그는 교주가 있는 교실로 다가갔다. 벽에 등을 밀착시키고 유리창 쪽으로 슬쩍슬쩍 고개를 돌려가며 엑스트라는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누군가 창가에 앉아서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도 몸을 숨기기 위해 이곳에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저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한 걸음 옮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고 생각한 순간, 기척을 눈치 챈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 시점에서 교주의 경계하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들어가서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며 고민하던 엑스트라는 그러나 다음 이어진 교주의 반응에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이미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던 교주는 쉽게 창밖에 서 있는 엑스트라의 모습을 찾아냈다. 창밖의 사람이 전혀 공격 의사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대로 엑스트라가 있는 곳을 향해 총을 들었던 것이다.

파앙-!!
챙그랑-

엑스트라가 서 있던 자리의 유리창이 마치 폭발하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덕에 맞지는 않았으나, 그는 거의 패닉상태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정말로 쐈다...!? 이런 제길..'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를 애초부터 가지는 게 아니었다. 난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뒤를 주시하며 복도를 달려가던 엑스트라는 총을 든 사내의 얼굴이 교실 밖으로 비죽 보이는 순간, 재빨리 가까운 교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파아앙-!!

두 번째의 총격음이 그의 등 바로 뒤를 울렸다.
깨어진 유리와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들이 교실 안쪽으로 사정없이 날아 들어왔다.

'산탄총?!'

엑스트라는 겨우 자신을 노리고 있는 무기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소름이 끼쳐왔다. 이건 빗맞으면 다행이고 말고 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무기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어서 교주가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머리끝이 곤두선다.'는 느낌을 체험했다.
대책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 망설일 여유 따윈 더더욱 없다. 과감하게 엑스트라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극적인 상황에서 사람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은 사실인 걸까,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는 바닥에 닿는 순간 가볍게 땅을 짚으며 몸을 둥글게 굴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떨어질 때 붙은 가속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운동장 끝까지 굴러가 벽에 처박혔다. 다행히 우려할 만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온 몸이 미칠 듯이 저려왔다.

간신히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자신이 떨어진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는 남자의 모습이 잡혔다.

파아앙-

"크아악-!!"

재빠르게 몸을 굴렸다고 생각했지만 튀어나온 산탄 몇 개가 그의 팔에 박혔다.

'얼굴을 노렸다. 그것도 망설임 없이..'

저 총을 든 남자는 분명한 살인마다. 그것도 매우 악질적인.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방금 입은 상처에 약간이라도 신경을 썼다간 다음엔 머리통이 벌집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는 근처의 숲을 향해 비틀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악다문 입술 사이로 끅끅거리는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연이어 남자가 쏜 총의 탄환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마치 불로 목을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지만, 그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엑스트라가 움직인 방향을 쫓아 다른 창문으로 위치를 옮기려던 뱀신의교주는 문득 잠깐의 소동으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 '아차' 싶었다. 다시 원래 있던 교실로 돌아가 야시경을 들고 이노가 있던 곳을 살폈지만 이미 그녀 일행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는데, 아직 부근에서 어물쩡거리고 있다면 그건 얼간이겠지.

"쳇...!"

번거롭게 만들어 주는 군.
바닥에 놓인 데이 팩을 집어 들고, 뱀신의교주는 서둘러 학교 건물을 내려왔다.
그 여자를 찾아야 한다. 그 여자를 찾아야 한다.
어느덧 다시 그의 머릿속은 이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남은 인원 : 3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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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영 기대에 부합을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OTL

이번에도 역시 엄청난 스크롤의 압박과 눈의 피로, 사설만 길어서 지치고, 정작 내용은 별로 없어서 지리한 한 화가 되어버렸네요. ㅜㅜ

뱀신의 교주님, 너무 이상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려서 넘넘 죄송해용~~ '')a
그래도 뱀신의 교주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어서 일단 등장은 시켜봤는데... 이노양을 오래 살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조금 끌었습니다. 아하하... (<- 그럴거면 아예 쓰지를 말것이지)


그밖에, 베넘은 나란히 보낸다더니 왜 안보냈냐면... 가늘고 길게 살고싶- 이 아니라, 더 쓸 자리가 없어서...
러크님을 커플로 만든다더니 왜 안했냐면... 염장- 이 아니라, 더 쓸 자리가 없어서...
이번에도 사망자는 왜 없냐면... 전 평화를 사랑- 이 아니라, 더 쓸 자리가 없.... (<-고마햇!!)


헤유... 암튼 마지막으로.....

죄에송합니다아~~~!!!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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