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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전쟁 「Prisoner Princess」

2006.08.24 10:03

갈가마스터 조회 수:1533 추천:2

extra_vars1 르브낭(revenant), 죽음에서 돌아온 자, 망령(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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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비스의 회수는 일단 포기한다.”

  비상전원이 깜빡거리는 함장실. 전투가 끝난 직후 한권우를 위시해 우루루 몰려든 사람들 면전에서 마리아 함장은 그렇게 단언했다. 특유의 무표정과 반박의 기운조차 빼앗는 허무한 일갈. 마리아 슈나이더 함장은 아버지의 생사도 알 수 없어 초조해 하고 있는 한권우를 앞에 두고도 언뜻 책임감이 없게 느껴지는 말을 툭 내뱉었다.

  쿵!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권우의 주먹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마리아 함장이 턱을 괴고 있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AT를 착함시키자마자 달려온 것인지 아직도 붉은색 파일럿 슈트를 입고 있는 한권우의 얼굴이 시시각각 울그락불그락 변해가며 그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평소 그가 자랑으로 여기던 뻔뻔함도 그 특유의 여유만만함도 지금에 와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턱까지 내려오는 반 곱슬의 머리카락이 경련을 일으키듯 파르르 떨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알고 있는 사실을 꼭 반복 해줘야하나?”

  물론 한권우도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만신창이가 된 팬텀 블랙이 적함을 쫓는다든가 할 여력이 없다는 것쯤은 명백했으니까. AT의 수송을 그 임무로 하는 강습함이 그 탑재기 대부분을 잃어 전투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게다가 기습을 당해 좌우현 오로라코트 발사관의 케이스 커버(Case cover) 거의 대부분이 파손, 오로라 코트의 전개가 불가능해 유일한 방어수단까지 잃었다.
  게다가 어비스(Abyss)함이 격침됐는지 아닌지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었지만 사무엘이 감청한 적의 통신을 분석해본 결과 어비스 함이 항해능력을 잃고 적함에 의해 인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지금 쫓는다한들 이들이 가진 전력으론 스텔스함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고 있어도 지금 상황은 ‘아, 그렇군요.’하고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권우는 물러날 수 없었고, 그는 언성을 높여 마리아 함장에게 말했다.

  “지금 그 놈들을 놓치면 아버지의 행방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행방을 알 수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먼저 첫 번째, 적함이 그 존재와 소속을 알 수 없는 스텔스 함대라는 것에 있다. 일단 이미 고인이 된 에드워드가 마치 삼류 영화에 나오는 악당처럼 막판에 가서 자신의 정체 및 목적 등등을 술술 불 듯 지껄인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그 함대가 바이에른, 혹은 쥘 나이트 사 소속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지도, 아니 드러나서도 안 되는 유령 함대가 바로 그들이었기에 이대로 적함이 사라져버리면 영영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스텔스 함은 그 기밀과 보안의 수준이 애초부터 타함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두 번째, 항공기업 쥘 나이트 사가 처한 입장이다. 중립을 표명한 그들의 입장으로선 이번 사건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은폐되어야 할 정도로 민감한 사안인 것이다. 네오 제네시스 사와 직접 대적할 의사가 없는 질 나이트 사로서는 반드시 이 사건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 것이고, 그 멍청한 에드워드가 소속된 ‘에어 가드’라는 집단도 원래 존재하지 않는 유령 부대니만큼 언급한다고 해도 중상모략 어쩌구하면서 역습을 걸어올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에드워드란 놈과 자신들은 무관하다고 박박 우길지도 모른다. 결국 2050년도에 중립국 스위스에서 용병들끼리 체결한 ‘베른 조약’에서 명시한 정전 후 포로 교환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 사건에 관련도 없는 그들이 포로가 있을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세 번째, 여러 기업들과 제휴를 맺고 막대한 투자를 겸행하는 네오 제네시스 사의 입장에서도 아무리 어스워드가 자신들의 충직한 개라해도 고작 함선 하나 격침당했다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즉 쥘 나이트 사와 거래를 끊을 의리까진 없었다. 쥘 나이트 사가 보유한 갖가지 항공기술, 노하우, 이익 등등 그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할 정도로 어스워드의 입지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쥘 나이트 사와 모종의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라이벌 회사인 바이에른이 엮여있다면 다르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현재 네오 제네시스 사에선 바이에른을 딱히 라이벌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들로선 바이에른은 고작 유럽 쪽 시장 확대를 방해하는 귀찮은 날파리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냥개의 꼬랑지를 물어뜯은 날파리를 모조리 박멸해야 하는가?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런 희생을 감내할 의리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번 폭격을 감행하면서 바이에른의 비밀공장들을 모조리 요단강 너머로 날려버린 그들이 뭐라 불만할 처지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바이에른 사에게 입힌 손해에 비한다면 어비스를 잃은 건, 네오 제네시스 사가 한 척 더 진수해주면 해결될 사소한 문제였다.
  이 모든 이유를 종합해보면 결국 이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권태 함장을 비롯한 어비스 함 승무원 전체의 행방이 묘연해질 것이다. 물론 어스워드의 고급용병인 한권태 함장은 정보를 얻기 위해 살려두겠지만 나머지는 입막음을 위해서 전부 죽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엔 한권태 함장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기서 저들을 놓치면 방도가 아예 없어진다. 이렇게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한권우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누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며 붉은 슈트와 더불어 그는 꼭 활화산 같았다.

  “어쨌든 우리는 팬텀 블랙 및 부서진 AT들의 보수를 위해서 헝가리로 향한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한권태 함장이 말하지 않았나?”
  “크윽….”

  마리아 함장은 피곤한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곧 가슴 쪽 호주머니에서 납작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그녀는 케이스를 열고 담배를 하나 꺼내 필터를 물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지포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챙.

  맑은 금속음과 함께 은도금된 라이터 뚜껑이 열렸다. 그러나 마리아 함장은 차마 불을 붙이긴 뭐했던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담배를 이용해 스트레스를 푸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

  그녀는 담배 생각을 잊어보려는 듯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건드리며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한권우에게 말했다.

  “한권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어. 그렇게까지 걱정된다면 방에 돌아가 기도나 해.”

  포기를 억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한권우는 짜증스럽게 테이블에서 손을 떼며 마리아를 내려다봤다. 무서운 얼굴, 꼭 무슨 짓이라도 벌일 듯 그의 갈색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좋습니다. 좋다구요! 그렇다면 저는 여기에서 내리겠습니다! 개인행동을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함․장․님?”
  “이봐!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마!”

  한권우를 말리기 위해 나선 건 다름 아닌 길버트였다. 입고 있는 갈색 조끼가 터질듯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길버트는 회색 캡(cab) 아래에서 우악스런 얼굴을 구기며 한권우에게 말했다.

  “네 녀석 답지 않게 왜 그래? 평소의 활달함과 여유는 쓰레기통에 처넣어나 보지? 이럴 때 일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거라구!”
  “냉정해져? 냉정해지라구?”

  그러나 애초에 단세포인 한권우가 길버트의 권고를 들을 리 없었다. 어비스 함이 포위되어 있을 때만 해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던 녀석이 한번 뚜껑이 열리니 기가 막힐 정도로 거셌다.

  한권우는 길버트의 코앞까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길버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봐 길. 시간은 지금도 가고 있어! 아버지가 죽을게 뻔한데 두 눈 뜨고 구경만 하라고?”
  “네가 간다고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아. 멍청아.”
  “아아, 그래 잘났수다! 비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느꼈는지 한권우는 길버트의 왼쪽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고집불통같으니!”

  뒤에서 길버트가 뭐라고 지껄이든 개의치 않고 그는 궁금해서 몰려든 군중들을 거칠게 헤집고 함장실을 뛰쳐나갔다. 지금 당장 스트라이더를 타고 어비스 함과 적함을 뒤쫓을 생각이었다. 반파된 어비스 함을 인양해서 가는 이상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을 터.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었다.
   서둘러 격납고로 향하는데 맞은편 복도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와 백골이 그려진 검은 티셔츠, 하지만 불량스러운 옷이 무색하게 실실 웃고 있는 갈색 고수머리의 청년 하나와 괜스레 무게를 잡고 서있는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한권우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친숙한 이들이었다. 아니 어스워드 용병단에 몸담고 있는 라이더라면 누구라도 이들을 몰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불량한 옷에 사람이 다소 가벼워 보이는 녀석이 하빈이었고 우울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 쪽은 바로 퀸이었다. 하빈은 심심한 건지 반응도 없는 퀸에게 쉴 새 없이 말을 붙이고 있었다.

  “…….”

  평균적인 키임에도 불구하고 장신인 하빈 때문에 다소 왜소해 보이는 퀸은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한권우를 발견하고 말없이 눈을 흘겼다. 혼자 잡담을 하던 중 그의 눈짓을 보고 그제야 눈치챈건지 하빈은 몸을 돌리며 살갑게 인사했다.

  “아, Mr 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여전히 실실 웃기나 하는 하빈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걸까? 한권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곧 무시하며 지나치려했다. 그러나 그 때 하빈이 그의 어깨를 막아서며 말했다.

  “어때요? 한 잔 하실래요?”

  위로라도 해주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폼이 은근히 거슬렸지만, 한권우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스트라이더를 타고 적을 쫒을 생각 밖에 없었고 여전히 감정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아버지의 모습까지 상상이 되자 더더욱 초조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목소리를 억누르며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됐어, 술 마실 기분 아냐.”

  당연하게 거절의 말이 나왔건만, 하빈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의외군요. 대뜸 따라오실 줄 알았는데.”

  한권우는 의문을 표하는 하빈의 미묘한 어조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이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괜히 여기서 시간을 죽치고 있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기를 살살 건드리는 저 실없는 표정은 한껏 참고 있는 한권우를 폭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뜸이고 뭐고 지금 기분 최악이거든? 괜히 건들지 말고 비켜.”
  “그럼 유쾌하게 만들어 드릴까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하빈의 동문서답에 한권우는 드디어 폭발하기 일보직전까지 짜증이 솟구쳤다. 아버지가 잡혀간 이 마당에 이 녀석은 대체 뭔가? 말장난을 주고받을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운데 조금 전부터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면서 한정된 시간을 좀 먹는다니? 당연히 한권우는 한껏 분노를 담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장난하냐?”

  그러나 하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여전히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입니다. 속는 셈 치고 따라오세요. 마침 대장도 옆에 있고 말이죠.”

  190cm를 조금 넘는 장신의 청년이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퀸을 가리키자, 한권우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분명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하빈의 눈동자에서 진지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혈질인 그의 성격상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모르겠는데 말야. 용건이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좀 확실하게 말하지 그래? 나처럼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면 주먹부터 날아간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 하빈이 짐짓 잊고 있었다는 듯 과장스럽게 놀라며 말했다.

  “이런이런, 제가 Mr. 한의 급한 성격을 깜빡 했군요.”
  “죽을래? 용건이나 간단히 해.”

  한권우의 위협조에 하빈은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퀸은 그 옆에서 세상 다산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제 용건은 아시다시피 어비스 함의 행방에 대한 겁니다.”

  한권우의 표정이 순간 경직되었다. 예상하고 있던 말이 나왔지만 머리가 일순간에 차가워지며 하빈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하빈, 정말로 뭘 말하고 싶은 거야. 헛소리하면 진짜 죽는 수가 있어.”

  하빈이 특유의 조용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글쎄요. 유령 찾기 게임이라면야….”
  “빌어먹을! 이건 게임이 아니야!”

  드디어 참지 못하고 한권우가 분기어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혼자 열낸 것이 무색하게 여전히 마이페이스인 하빈의 차분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뭐, 그러지 말고 따라오세요. 다 길이 있으니까. 뭐, 그래도 혼자 가시겠다고 하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저번 일도 그렇고 나서기 좋아하는 우리 퀸 대장이 어떻게 나올지 저도 알 수 없군요.”

  한권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명 개죽음을 당할 거다’라는 듯 눈을 흘기는 퀸의 잿빛 눈동자를 대하며 한권우는 어비스함을 구원하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들을 습격한 정체불명의 스텔스 AT 편대. 확실히 그들의 실력은 굉장했다. 전투기를 방불케 하는 아음속의 기동력과 빛과 전자파를 굴절시켜 육안으로도 레이더로도 파악할 수 없는 최신식 카모플라쥬 스텔스 시스템(camouflage stealth system)을 장착한 최신식 AT에다가 밤의 어둠을 이용해 협공을 가하는 그 일사분란한 전술까지 더해져 그들은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퀸을 비롯한 팬텀 블랙의 AT 편대는 그 신출귀몰하면서도 거센 유령 편대 때문에 큰 곤혹을 치렀다. 솔직히 이들이 만약 평범한 AT 라이더였다면 그 자리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이대로 있다간 아버지는….”

  한권우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떨었다. 이성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초조함에서 비롯된 분노가 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나가자니 죽을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피하자니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하빈의 답은 명쾌했다.

  “글쎄요. 문득 ‘네 아버지라면 며칠은 버티고도 남아’라고 말씀하신 마리아 함장님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그 분에 대해선 저보다 Mr 한께서 더 잘 알 것 같은데, 안그런가요?”

  하빈이 어설프게 마리아 함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하자, 퀸이 어이없다는 듯 눈썹 끝을 꿈틀거렸다. 정말이지 작금의 상황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데다가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로 명쾌한 해답까지 내려주다니 이제 와서 생각난 거지만 이 하빈이란 동물은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한권우의 우유부단함에 쐐기라도 박겠다는 듯 하빈은 딱 잘라 물었다.

  “마시러 가실 겁니까? 아니면?”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곧 한권우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을 터져나왔다. 갑자기 술이 고팠다. 그와 함께 복잡했던 머리가 확 풀리는 것이, 극도로 긴장된 피부가 순식간에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하빈은 미소를 지은 채 서있었고 아직도 퀸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권우는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좋아, 이번만 속아주지. 안내해.”

  항복이라도 하듯 양 팔을 반쯤 들고 말하는 한권우의 모습을 보면서 하빈은 맡겨만 달라는 듯 말했다. 여전히 웃는 낯짝이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안도한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도 분명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저만 따라오세요. 마침 잘 가는 곳이 한 군데 있으니까.”

  



「Prisoner Princes」
Wish to the Star
제 8 화. 르브낭(revenant)





  이튿날 새벽, 팬텀블랙은 가까스로 헝가리에 위치한 네오 제네시스 사 비행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초의 예정대로라면 카르파티아 산맥을 타고 루마니아의 어스워드 본진으로 향했어야 옳지만,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인해 팬텀 블랙이 만신창이가 된지라 급히 기수를 돌려 가까운 이곳으로 향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루마니아가 네오 제네시스 사, 어스워드의 제공권 아래에 있다고 해도 이대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타고 가다간 자칫 유령 함대의 기습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광활한 헝가리 분지에 자랑스럽게 떡하니 놓여 있는 기지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 기지였다. 제법 큰 규모를 가진 이곳은 네오 제네시스 사의 108항공여단이 주둔하는 곳답게 평평하게 닦아 놓은 활주로와 격납고 곳곳에서 새벽 공기를 맞아가며 정비하고 있는 비행형 AT와 전투기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로 촘촘하게 쳐진 철조망과 100m 마다 세워져 있는 감시탑, 벙커, 중기관총 진지가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며 그 위협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

  정비사들을 비롯해 활주로에 있는 모든 병사들이 잿빛 하늘을 뚫고 팬텀 블랙이 나타나자 연신 손가락질하며 입을 쩍 벌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기저기 피탄 당한 흔적이 역력한 팬텀 블랙이 검은 연기를 풀풀 날리며 기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이어 사이렌소리와 함께 활주로 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방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게 만재배수량 1만 톤이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강습함이 시꺼먼 연기를 질질 이끌고 오는데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저 덩치라면 추락할 경우 활주로와 기지에 막대한 손상을 입할 수 있었기에 관제탑에선 팬텀블랙을 육안으로 확인하자마자 지레 겁먹고 부랴부랴 소방요원들을 활주로 위에 급파한 것이다.

  “여기는 어스워드 소속 3번함 EWS-003 팬텀 블랙이다. 네오 제네시스 부다페스트 기지 관제탑 들리나? 긴급 착륙을 요청한다.”

  팬텀 블랙의 함교에서 부관 노엘이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잡으며 피곤한 듯 핏발선 눈으로 말했다. 마리아 함장은 5시간 전 피곤하다면서 지휘권을 노엘에게 넘긴 뒤 함장실로 가버렸고 지금은 노엘이 이함의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다 왔다고 호출을 몇 번 했는데 마리아 함장은 깊은 잠에 빠진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함흥차사였다.

  “…. 여기는 어스워드 소속 3번함 팬텀 블랙이다. 관제탑 나와라. 오버.”

  답신이 없자, 노엘이 한 번 더 착륙을 요청했고 곧바로 관제탑으로부터 당황한 듯 우왕좌왕한 회신이 들려왔다.

「여기는 부다페스트 관제소! 자, 잠시만 기다려라. 상부에 연락해보겠다. 어이! 거기 멍하니 있지만 말고 사령관님한테 연락 좀 해봐! 긴급 상황 카테고리 B라고! 어스워드의 함선 팬텀 블랙이 엉망이 되서 돌아왔다고 전해! 전함 착륙용 활주로도 당장 비워두고! 그래 1만 톤급이다! 보통 활주로로는 착륙이 불가능해! 어이! 팬텀 블랙 들리나? 급하지 않으면 5천 피트 상공에서 대기하라! 곧 비콘(Beacon)을 내보내겠다!」

  “엉망까지는 아닌데…. 하여간에 겁들은 많아가지고.”

  통신기너머로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음들이 들려오자 통신관 사무엘 레드가 헤드셋을 벗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큼. 큼.”
  
  사무엘이 불만스럽게 토로하자, 항해장 알렉세이 그란코로비치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사무엘도 짐짓 무섭다는 듯 후다닥거리며 귀지를 후 날려 보내곤 헤드셋을 다시 머리에 썼다. 그러나 흑인 특유의 두터운 입술을 쭉 찢고 하품을 늘어지게 내뱉는 폼이 아무래도 무서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렉세이의 헛기침에 놀라 움찔거린 건 일명 ‘금발의 애송이’ 헨리 D 미터마이어였다. 소설 은하영웅전설에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금발의 애송이’라고 불렸었다지만, 헨리의 경우 안 어울리는 금발과 어수룩함을 함께 아울러 놀리기 딱 좋은 별명이었다. 어쨌든 지레 놀란 그가 창백한 얼굴로 조종간을 더욱 움켜쥐자, 팬텀 블랙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럴 때면 응당 핀잔을 주기 마련이건만 알렉세이 항해장도 긴 항해 시간동안 지쳤는지 마땅히 태클을 걸어오지 않았다. 헨리는 그에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사람들이 대체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왜 이리 늦어?”

  함장석의 노엘이 그녀답지 않게 짜증을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늦어지는 것이, 베를린 습격 이후 이틀 밤 아니 이제 거의 삼일이 넘는 긴 시간동안 제대로 잠도 못잔 그녀로선 참기 어려운 고문이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저기 저 활주로에 팬텀 블랙을 처박아놓고 푹신한 침대를 찾아 사정없이 파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으으으~이~!”
「아아! 팬텀 블랙 들리나? 이쪽은 부다페스트 기지 사령관 맥과이어 소장이다 오버.」

  노엘이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참에 갑자기 통신기 너머로 자신을 사령관으로 밝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엘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레 억누르며 가능한 최대로 공손하게 톤을 낮춰 말했다.

  “잘 들립니다.”

  물론 아무리 그녀가 공손하게 하고 싶어도 듣는 사람 입장에선 짜증 섞인 말투로 밖에 안 들린다. 하지만 이 부다페스트 기지의 사령관은 그렇게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은 아닌 듯 노엘의 말투에 대해 딱히 트집을 잡고 늘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허허허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할 정도로 맥과이어 소장은 호인(好人)이었다.

「지금 비콘을 내보냈다. 우리 측의 유도에 따라 함을 이동시켜주게. 그러나저러나 착륙은 할 수 있겠나? 손상이 꽤 심해 보이는데.」
  “사령관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만한 부상은 아닙니다. 그쪽의 유도를 따를 테니 착륙지점을 안전하게 확보해주십시오.”
「허허허, 그건 걱정하지 말고 착륙에나 집중하게.」
  “야볼(Jabohl).”

  삑.

  “흐아아아아아!”

  통신이 끊기자, 함교 요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하품을 섞어 기지개를 폈다. 정말이지 이제야 지옥 같던 상황이 종결된 것이다. 베를린 습격에 이어 그린 살라만더스 용병단의 포위를 뚫고, 숨을 좀 돌리는가 싶더니 다음엔 유령 함대에 의한 기습 공격까지 받았다. 어비스 함은 적함에게 끌려가고, 이쪽은 만신창이가 되고… 정말이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노심초사를 했던지 다들 노이로제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후우, 이제서야 끝난 건가?”

  노엘은 함장석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정말이지 매일 같이 이런 긴장만 연속되면 미치기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전장을 누벼온 용병으로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노엘은 용병이 된지 몇 년 되지 않았으니 이런 경험이 적었기에 나온 불만이었다.

  ‘어쨌든 재빨리 보고도 해야 되고 이래저래 바쁘겠네. 흐아암……. 안돼. 자면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돼.’

  긴장이 풀리니 먼저 잠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처음엔 잠에 저항하며 눈을 뜨려했으나 노엘은 함장석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댄 채 곧 눈을 감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 시간 동안 관제탑의 마커 비콘(Maker beacon)을 따라 팬텀 블랙의 육중한 함체가 착륙지점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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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우우웅.

  군용 지프차가 초원 위에 쭉 뻗은 아스팔트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언제나 우울한 회색 하늘을 자랑하는 헝가리답지 않게 오늘의 하늘은 맑고 바람은 봄바람을 타고 시원했다.
  시원하게 늘어진 도로를 시속 100 킬로로 밟으며 달리면 응당 기분 좋아 휘파람이라도 불어야 정상이건만 조수석에 앉아 벌판만 바라보는 16세 남짓한 소년은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상한 듯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자신의 세월과 신세를 한탄하는 노친내처럼 축 늘어져 썩은 내를 풀풀 내는 동태 눈깔로 창밖만 바라보는 그 놈은 바로 도미니크 쉘이었다.
  잘 익은 감귤처럼 짙은 주황색의 머릿결이 날카로운 바람을 받아 사정없이 흩날린다. 평상복도 없어서 어스워드의 제복차림인 도미니크는 한참동안 창 밖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한숨을 푸욱 내쉬며 호박석 같은 눈동자를 굴려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자를 바라보았다. 운전자는 다름 아닌 니나였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여자와 데이트하는 건데 어째서 이놈은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그건 다름 아닌 뒷좌석에 앉아있는 작은 요물들 때문이었다.

  “에잇! 이 도미성인 외계인 죽어라!”

  갑자기 뒷좌석으로부터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네 개정도 튀어나오더니 도미니크의 볼을 마치 고무장갑을 잡아당기듯 쭈욱 잡아당겼다. 이젠 반항할 기운도 없는지 도미니크는 ‘아아아’하는 괴상한 신음소리만 예의상 내주며 꼬마아이들의 꼬집기 공격에 몸을 내맡겼다.

  “와아~ 멋지다~ 치카~ 저기 비행기~ 비행기~”
  “헤에, 정말~”

  밖에 나오는 것이 오랜만인 듯 상기된 얼굴로 들판을 바라보는 5~6세 정도의 건강한 커피색 피부의 남자아이 하나와 그 옆에서 추임새처럼 감탄사를 내뱉는 포니테일의 여자 아이 하나. 흑인의 피부와 백인의 이목구비, 양인종의 특징을 골고루 가지고 있는 혼혈 남자애는 이름이 아마 가브리엘이었고, 블론드 포니테일의 여자애는 분명 치카라는 이름을 가진 비교적 얌전한 애들이었다.

  “에잇! 정의의 주먹을 받아라! 외계인 침략자야!”
  “와~ 피부가 엿처럼 늘어나네~ 역시 외계인이야.”

  문제는 자신의 볼을 잡아당기며 소악마처럼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요 장난꾸러기 쌍둥이 형제들이었다. 이름이 존과 제임스였던가? 성경에서 등장하는 요한과 야곱 형제의 이름을 딴 것처럼 이 녀석들은 그야말로 보아너게(우뢰의 자식들) 같았다. 약간 푸르스름한 검은색 머리카락과 고양이처럼 청색, 녹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꼬마아이들. 가만히 있으면 귀여울 것 같은데 괴롭힘 당하는 도미니크 입장으로선 악마 그 자체였다.

  “얘들아, 그럼 못써. 달리는 차 안에서 장난치면 안돼.”
  “네에~ 엄마~”

  니나가 핸들을 잡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달래자, 도미니크를 괴롭히는 꼬마 악마들의 손이 거짓말처럼 뒤로 쏙 빠져나갔다. 그러면 뭐하나 1분 뒤에 다시 넘어올 것이 분명한데. 그만하라고 한 것이 벌써 10번도 더 됐다.
  도미니크는 앞으로의 일이 훤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아, 왜 이렇게 됐을까.’

  분명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 적혀 있는 것 좀 밖에서 사와’라고 시키미 누님의 부탁을 빙자한 ‘명령’에 떠밀려 니나와 단독 드라이브를 나왔는데… 두근거리는 것도 잠시. 이 악마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따라온 것이다.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중간정도쯤 갔는데 갑자기 뒷좌석에서 천을 뒤집어쓰고 숨어있던 쪼그만 녀석들이 불쑥 튀어나오다니… 도미니크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덤으로 평소 표정이 별로 없던 니나가 놀란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엄하게 꾸짖은 것 때문에 그는 더 놀랐다).

  “하아.”

  도미니크는 한숨을 또 내뱉으며 딴 생각을 할 겸 시키미가 부탁한 종이를 꺼내들었다. 뭔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는데 도미니크로서는 생소한 것들도 많이 보였다. 이것들이 죄다 부품명이라는 것은 정비소에서 뼈 빠지게 일하면서 습득했기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별게 다 있네. 다들 시중에 나오는 흔한 부품들인데 이걸로 뭘 하려는 거지? 하지만 전부 신제품들이잖아? 이 정도면 꽤나 비쌀텐데… 흐음? 뭐, 누님께서 돈이 많으신가보지. 돈 많은 누님. 캬아~ 꿈 같은 설정이로구나! …성격만 좀 더 온화하면 최고일 텐데.’

  도미니크는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이 부품들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을 생각해 보았지만 중간부터 쓸데없는 생각만 하며 조용히 상의 호주머니에 메모지를 구겨 넣었다. ‘알아서 하겠지’라는 다소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니나랑 바람을 쐬러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저절로 도미니크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올라갔다.

  “앗, 이 괴물이 웃는다!”
  “우웩, 징그러워.”

  오드아이의 보아너게 쌍둥이 형제(소악마 놈들)가 비웃고,

  “우아앙 무서워. 꼭 변태같아!”

  치카는 울고,

  “윽, 나도 크면 저런 어른이 되는 건가? 정말 싫다.”

  가브리엘은 혓바닥을 길게 내밀며 헛구역질을 한다.

  “…….”

  이놈의 소악마들만 없다면 더 기분이 좋았을텐데…. 도미니크는 순간 울고 싶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어린놈들에게 유린당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다고나 할까? 하지만 반면에 고향에 남아 있을 동생들이 그리워졌다.

  ‘밥이나 잘 먹고 있을까? 뭐, 믿음직한 큰 녀석에게 맡겨뒀으니 괜찮을 성도 싶지만. 아아, 얼른 월급 받아서 애들에게 맛있는 거 사줘야 하는데. 후훗, 에밀리야 기다려라 이 오빠가 첫 월급 받으면 그렇게 입고 싶어 하던 드레스 정도는 사줄 테니까.’

  쥐꼬리만한 월급은 생각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도미니크는 그 때만큼은 행복한 상상으로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애들이 신기한 동물을 건드리듯 볼을 잡아당기고 눈꺼풀을 까뒤집어도 도미니크는 실실거릴 뿐 미동도 없었다. 애들도 이제야 도미니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엄마, 이 형 이상해.”
  “으히히히히.”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차는 시원하게 아스팔트 위를 날아가듯 달려갔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드넓은 밀밭이 쌩쌩거리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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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다페스트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주점. 언뜻 보기에도 술 취한 주정뱅이 외엔 얼씬도 하지 않을 듯한 그곳에 도저히 친구 사이로는 보이지 않는 3명이 들어섰다. 먼저 들어온 것은 실실 웃는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불량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는 하빈이었고 그 뒤를 따라서 한권우와 퀸이 들어왔다. 퀸은 들어오는 순간 매캐한 담배연기와 퀴퀴한 술내음을 맡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안그래도 우울한 얼굴인데 인상까지 구기니 꼭 자살하기 전 고뇌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오, 제법 괜찮잖아.”

  폭신폭신한 양털이 소매와 목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가죽 자켓 차림의 한권우는 허름하지만 오래되어 운치가 있어 보이는 주점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휘파람을 불어 감상을 밝혔다.

  “여기 정말 오랜만이군요.”

  어울리지 않게 추억에 잠겨 있는 하빈을 바라보며 한권우가 놀라 물었다.

  “뭐야, 여기서 여자에게 바람이라도 맞았나보지?”
  “여자와는 관계가 없지만 뭐. 약간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고 해두죠.”

  한권우는 불만스럽다는 듯 툴툴거렸지만 별말 없이 카운터로 향하는 하빈의 뒤를 따랐다.

  “여어~ 마스터.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하빈은 싱글싱글 웃으며 술집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예의바른 말투의 인사를 바텐더에게 건넸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고 손만 까딱거리는 폼이 여간 건방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바텐더가 아는 사람이기에 살갑게 인사한 거겠지만, 만약 초면인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면 무시당하거나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싱글싱글 웃는 낯짝으로 사람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는 것이 하빈의 특기라면 특기랄 수 있었다.

  “흥.”

  역시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듯 가운데 머리가 시원하게 까진 바텐더는 맥주잔을 닦는 자세 그대로 하빈을 흘낏거리며 무성의하게 답했다. 왼쪽 눈썹의 흉터가 인상적인 그는 근육질에, 검은 콧수염을 굵직하게 다듬은 꽤나 다부진 인상의 남자였다.

  “칫, 아직도 죽지 않은 거냐? 빌어먹을….”
  “뭐 제가 워낙 악운에 강하잖아요. 그나저나 이마가 좀 더 훤해 지셨네요? 보기 좋습니다.”

  하빈이 싱긋 웃으며 농을 걸어오자, 바텐더의 두터운 눈썹이 실룩거리며 파르르 떨렸다. 분명 머리카락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는 듯 참을 인자를 여러 번 새기며 실룩거리는 그의 얼굴이 다소 희극적이었다. 하빈이 이렇듯 위험한 발언을 하는 동안 퀸과 한권우는 하빈의 옆에 일렬로 앉아 조마조마하게 바텐더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텐더도 우락부락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렇게 다혈질적인 사람은 아닌 듯 곧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맥주가 가득 담겨 있는 잔을 하빈의 앞에 내려놓고 물었다.

  “뜸하게 면상 들이대는 걸 보니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러온 건 아닐 테고. 보나마나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겠지?”
  “오, 빠른 진행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하빈은 실실거리며 500cc 정도의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한권우는 의외로 화끈하게 잔을 비우는 하빈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그도 목이 말라왔는지 바텐더에게 맥주 한잔을 부탁했다. 곧 두 잔의 맥주가 한권우와 퀸의 앞에 대령했다. 퀸은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나온 맥주잔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텐더의 무시 속에서 그만 포기하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때 하빈이 시원하게 소리치며 잔을 내려놓았다.

  “크! 정말 좋군요. 여기 맥주는!”
  “그래, 네 놈을 위해 오줌을 살짝 섞어놨지. 어때? 맛있지?”
  “풉!”

  한창 맥주잔을 비우고 있던 한권우의 입에선 맥주가 역류했건만, 당사자인 하빈은 ‘하하하, 그 죠크 실력은 여전하시군요.’라는 등 여전히 웃는 낯짝을 유지했다.

  “아,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몇 초간 실실거리며 웃던 그는 곧 잊었던 것이 생각났는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지폐 뭉치와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맥주잔 밑에 껴서 바텐더의 앞으로 밀었다. 술값치곤 지나치게 높은 100유로짜리 지폐 다섯 장, 이건 정보를 전달하는 중개인에게 주는 일종의 팁이었다. 진정한 목적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종이쪽지에는 어비스 함의 행보에 대해 정보를 부탁하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뭐 의미는 아시죠? 메일로 부탁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말이죠.”
  “흥, 알았으니까 빨리 꺼져버려.”

  손을 휘휘 저으며 빨리 사라지라고 하는 주인장의 모습에 하빈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 주인이 손님을 내쫓아도 돼요? 여기 술집이잖아요.”
  “손님은 얼어죽을….”

  바텐더는 툴툴거리면서도 여전하다는 듯 슬쩍 웃으며 지폐와 잔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바텐더가 카운터를 비운 사이 한권우는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해 하빈에게 말했다.

  “뭐야 끝난 거야? 뭐가 이리 간단해?”
  “끝났습니다. 아, 대장 그거 안 드실거죠? 그럼 제가 마실게요.”

  하빈이 맥주잔과 눈싸움만 하고 있는 퀸에게 말하자, 그는 술과 담배 냄새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련 없이 잔을 하빈에게 밀어 건넸다. 하빈은 잔을 받자마자 또 단숨에 비워버리며 시원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이 너무 쉽게 흘러가는 것 같아 불안했던 한권우였기에 괜히 잔만 휘적거려 거품을 제거하며 미심쩍은 얼굴로 하빈에게 물었다.

  “정말 이걸로 끝난 거지?”
  “예, 이제 돌아가서 정보가 오길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참고로 퀸은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탐해서 뺏어 먹는 게 절대 아니에요.”
  “그러냐. 뭐 아무렴 어때.”

  한권우는 그제야 단숨에 맥주를 삼켜버렸다. 꿀꺽꿀꺽 잘도 넘어가는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한편 하빈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비어버린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론 몰랐는데 그는 한권우 못지않은 대단한 애주가였고 한권우는 신선한 기분을 한껏 느끼며 바텐더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는 문득 오늘은 완전히 취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술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에 몸서리를 치는 퀸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담배 냄새는 물론 한권우 자신도 싫어했지만(이건 꼴초인 길버트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남자가 되서 술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안한다니 그가 생각하기에 퀸이 안쓰러워 보여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좋은 걸 왜 안한단 말인가? 골치 아픈 것도 다 잊어버릴 수 있는데. 물론 과하면 보기 흉하겠지만 저렇게 몸서리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되기도 했다.
  그 때 문득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떠올랐는지 한권우는 잔에 묻어 있는 거품들을 손가락으로 휘적거리며 지나가는 어투로 하빈에게 물었다.

  “어이, 정말 확실한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1급 기업 기밀에 해당하는 걸 텐데 그렇게 쉬울까?”
  “에이 별 걱정을 다…. 어이! 여기 흑맥주 한 잔 더요!”

  하빈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피식 실소하며 손을 흔들어 주방으로 들어간 바텐더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잠시 후 우락부락한 바텐더 대신 귀엽게 생긴 웨이트리스가 나오자 한권우와 하빈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휘 내뱉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퀸은 마치 멀미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누르고 있었다.
  하빈은 새롭게 채워진 잔을 바라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곤 이어 말했다.

  “뭐, 믿어도 좋습니다. 스텔스 함만이라면 몰라도 어비스함을 같이 끌고 간 이상, ‘주시자(Beholder)’의 정보망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늦어도 일주일 뒤면 원하는 결과를 떡하니 가져올 겁니다. 문제는 위험도에 따라 정보료가 천정부지로 뛴다는 거지만 말이죠.”
  “윽!”

  돈 얘기가 나오자 한권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자린고비 기질이 다분한 볼케인 프라이아 단장에게 요금을 청구할 수도 없고 결국 사비를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음,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그 때 녀석들을 뒤쫓았어야했는데.”

  한권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새로 채워진 맥주잔을 입에 가져왔다. 그 와중에 하빈이 벌써 다섯 번째 잔을 훌쩍 비우면서 말했다. 점점 들어가는 술의 양이 늘고 있었는데 하빈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기는커녕 몸도 달아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뭐 이런 것도 스릴이겠지요. 흠흠 이제 슬슬 나가볼까요?”
  “그래.”

  한권우가 안쓰러운 얼굴로 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출구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 한권우가 일어섰고, 하빈은 여전히 아쉬워하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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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다페스트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도심의 중앙을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 강과 시대의 고풍스러움을 자랑하는 건축물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에 하나라는 부다페스트는 말 그대로 ‘도나우 강의 진주’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부드럽게 빛나는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강물결과 근처 카페에서 한가로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지금 유럽 대륙은 모두 기업들 간의 다툼으로 아귀의 소굴같이 변해 버린 지 오래건만 이 아름다운 도시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용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네오 제네시스 사의 108 항공여단이 근처에 주둔하고 있으면 응당 한번쯤은 공격 받을 법도 한데, 공격자들도 차마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을 불태우고 싶진 않았는지 이곳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도쿄에 원폭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랄까.
  뭐 경관이야 어찌되었든 도미니크와 니나 일행은 시키미가 시킨 일을 마치고 도나우 강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근처 야외 카페에서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물건은 알아서 운반해준다고 했으니까 돌아가는 짐은 가벼웠고 시간도 여유로웠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막간의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초코 파르페를 신나게 퍼먹은 뒤 도나우 강변을 내려다보며 와와 떠들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맥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아아, 한가롭구만.”

  정말이지 긴장이라곤 하나도 없는 풍경이었다. 이렇다보니 며칠 전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긴, 내 고향에서도 이렇게 한가하지는 않았지.’

  도미니크는 턱을 괸 채 빨대로 오렌지주스를 빨아들이며 고향을 떠올렸다. 새벽에는 신문배달, 아침부터 점심까진 아르바이트, 저녁엔 정비소, 늦은 밤엔 어썰트 트루퍼(AT)에 관련된 공부. 아무리 생각해도 여유라고는 없는 생활이었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 소속의 군인들이 폭격을 감행하는 베를린. 그곳은 재와 폭염이 하루 일상이었던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니나와 만난 날도 실상 어스워드의 공습이 있었던 날 아닌가.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편안함이야말로 백일몽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도미니크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문득 고개를 돌려 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자애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릿결을 귀 뒤로 넘기며 자수정같은 연보랏빛 눈동자로 아이들을 쫓는다. 그 모습과 분위기가 흡사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느껴져 도미니크는 순간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헤에, 그렇게 웃는구나.”
  “응?”

  순간 니나와 눈을 마주치자 도미니크는 시뻘개진 얼굴로 화급히 주스를 쭉 빨아들였다.

  “도미니크 무슨 말 했어?”
  “아아아아아 아냐아냐, 못 들었으면 그걸로 끝~ 잊어버려잊어버려~”
  “흐음….”

  니나는 괜히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도미니크를 이상하다는 듯 흘겨봤지만, 곧 신경을 끄고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상하게 오늘 따라 니나의 표정이 다양해서 적지 않게 당황이 된다. 웃고 화내고 지금처럼 이상하다고 흘겨보기도 하고. 하긴 애초에 도미니크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기 때문에 차가웠던 첫인상과 다른 니나의 이면에 위화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그린 살라만더스의 정찰병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격한 일도 있었으니 이런 다양한 표정들이 매치가 잘 안 되는 건지도.
  하지만 어째서일까?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 표정들이 왠지 억지로 만들고 있는 듯했다. 어째 로봇에게 강제로 프로그램을 주입한 것 같다고나 할까? 미묘한 위화감. 그렇다, 시키미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짓던 반갑다는 표정도 이렇게 위화감이 들었었다. 뭔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반가움이 아닌 지정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고 할까?

  ‘윽, 이런 바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니나는 로봇이 아니라고.’

  도미니크는 순간적으로 실례되는 생각을 한 자신을 질책하며 고개를 크게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고 실소하며 도미니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시키미에 대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니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괜찮아. 도미니크가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대답해줄게.”

  아이들을 바라보며 강바람으로 엉망이 된 청록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다. 햇살을 측면에서 받는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져 도미니크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앗, 이, 이러면 안되지.’
  
  도미니크는 괜히 빨대를 휘적대며 본제로 넘어갔다.

  “시키미 누님, 아, 아니 선생님이라고 그랬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선생님은 11년 전에 날 돌봐주시던 분이야. 자세한 건 기억에 없지만….”
  “흐음. 그랬구나.”

  “어라?” 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켜는데 문득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도미니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11년 전? 지금 니나가 몇 살인데?”
  “응? 열여섯.”
  “으잉? 그럼 니나는 5살 때고… 그 시키미 누님은 17살이라고 하셨으니까. 당시엔 6살이었다는 말인데, 어째서 선생님이라고 불러? 언니라고 하면 모를까.”

  아뿔싸, 순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이 대답을 들어선 안 된다. 아니 질문도 해선 안 된다. 알아선 안 되는 것이 분명 이 세상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다급히 니나의 말을 막으려고 입을 여는데 그녀의 입으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은 지금 39세셔. 도미니크도 참 이상한 걸 물어보네?”

  콰르릉! 귓가를 때리는 천둥소리.
  순간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도미니크는 잠시 후 말없이 도나우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반에 이른 고승이 해탈한 듯 세상만사 부질없구나 하는 등 쓸데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주스를 후루룩 빤 도미니크는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면서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뭐-시-라-고-라!”

  도미니크가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게 흡사 한 마리의 수라나찰이 각성하여 아수라장이라도 만들 기세였다. 도미니크는 그 기세 그대로 강가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강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 그 아줌씨! 감히 그 얼굴을 하고 39세?! 뭐야 보르톡스라도 맞은 거야? 주름살 제거 수술에 온갖 성형수술은 다 받았나? 어쩐지 돈도 많이 보이더니!”

  한참을 그렇게 소리치던 그는 다음순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질질 짜기 시작했다.

  “으어어엉, 억울해! 왜 내가 만나는 여자들은 다 이 모양이야. 엉엉엉. 어머니! 역시 세상은 썩었어요!”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모조리 질질 짜는 도미니크와 니나에게로 향했다. 니나는 주변의 눈총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대다가 아이들이 도미니크를 쿡쿡 찌르자 그제야 그에게로 다가가 걱정스러운 듯 그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그 순간 갑자기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니나가 도미니크를 발로 걷어차 반대쪽으로 날려버리곤 깜짝 놀란 가브리엘과 치카를 끌어안고 그녀 자신도 도미니크의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핑!

  다음 순간 도미니크가 있던 지점으로 낌새도 없이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뭐, 뭐, 뭐야!”

  도미니크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총알이 박힌 보도블록을 바라보았다. 니나와 도미니크를 일직선상으로 노린 각도. 만약 니나가 그를 밀치지 않고 피했다면 필경 도미니크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꺄아아악!”
  “으아아아!”

  그걸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튀기 시작했다.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아저씨와 하이힐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뛰는 여자까지 순식간에 강변 카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미니크! 애들을!”
  “아! 그, 그래!”

  도미니크가 앙앙 울어대는 보아너게 형제를 양 옆구리에 끼고 저격을 피해 카페 쪽으로 달리자 니나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때 두 번째 총알이 날아왔다.

  피잉!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알은 니나와 사선상에 있는 파라솔에 맞아 빗나갔고 그들은 안전하게 카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재즈 바를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카페 안은 소란과 더불어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상태였다.

  “뒷문으로!”

  도미니크는 니나를 따라 지프를 세워놓은 뒷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뒷문을 5m 정도 남겨뒀을 때 갑자기 니나가 발을 멈췄다. 그녀가 멈춰선 채 조심스럽게 애들을 내려놓자 도미니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니나를 바라보았다.

  철컥!

  니나가 양손을 휘두르자 소매에서 자동권총 두 정이 마술처럼 튀어나왔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고 평소라면 박수라도 치며 감탄사를 연발했을 도미니크였지만 은색 총신으로부터 서늘함이 베어 나오자 더럭 겁부터 났다.

  “도미니크, 아이들을 부탁해!”

  니나는 탄창을 빼서 약실의 장탄수를 유심히 살피더니 탄창을 집어넣고 슬라이더를 당겨 초탄을 장전하며 말했다. 날카롭게 치켜뜬 그녀의 눈동자는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 니나!”

  도미니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근처에서 굴러다니던 의자를 잡고 뒷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의자가 굉음을 내며 문을 열고 튀어나가자 준비라도 한 듯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며 그것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었다.
  소총수들이 의자의 존재를 눈치 채고 멈칫하는 바로 그 순간, 니나가 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니나를 향해 총구를 돌렸지만 니나의 쌍권총이 더 빠른 속도로 불을 뿜었다.

  탕탕탕탕!

  왼쪽 건물에 셋, 오른쪽 건물에 둘. 소총수들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니나의 은색 권총, 글록(Glock-18c)이 불꽃을 토할 때마다 양측 건물에 매복하고 있던 소총수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오른쪽 건물 2층에서 AK-74를 쏘던 복면인이 이마에 9mm 파라블럼 총알을 맞고 쓰러졌으며, 그 옆방에 있던 자도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왼쪽 건물 옥상에서 총을 쏘던 자는 가슴팍에 총알을 맞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세 명의 병사들을 쓰러뜨린 후 저격의 사각지대를 찾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굉음을 내던 총성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그들은 니나를 쫓아 이동한 걸까? 아이들을 끌어안고 카운터 뒤에 숨어 있던 도미니크는 총성이 멎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문 밖을 살펴보았다. 총알을 맞아 형체를 알 수 없게 너덜너덜해진 의자와 총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면을 바라보며 도미니크는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으아아아앙! 엄마!”
  “아, 얘, 얘들아 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래그래. 울지 말고 기다리자.”

  도미니크는 우는 애들을 달래며 한편으론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정보가 없다. 적의 규모도, 정체도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지원을 요청해볼까? 문득 지프차의 무전기를 생각한 도미니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프를 찾아 뒷문으로 나갈 걸 예상한 용의주도한 놈들이다. 무전기쯤은 걸레로 만들어 놨을 테고 하는 짓으로 보아 폭탄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근처 전화선쯤은 모조리 차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산대 옆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들었지만 역시나 신호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도미니크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휴대폰 하나쯤은 주지. 위치가 노출된다고 내 휴대폰까지 압수할 건 또 뭐람.’

  도미니크는 팬텀 블랙에 승선했을 때 압수당한 휴대폰을 생각하며 때늦은 불평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곧 한탄하는 것을 관두고 우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빠져나갈 길을 모색했다. 니나가 걱정되긴 했지만 자신이 나서봤자 방해만 될 것이 뻔했기에 그는 애들을 안전하게 이동시킬 방책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투타타타탕!

  비교적 가까이서 총성이 아련하게 들려오나 싶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제길!”

  자연스레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들의 목표가 니나인 이상, 자칫 잘못하다간 도미니크나 아이들이 인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례가 바로 조금 전 저격이다. 도미니크와 니나를 사선상에 놓고 니나가 피하면 도미니크가 맞게끔 위치를 잡은 것만 봐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상대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었다.

  “자, 얘들아 그만 울고 일어나자.”
  “훌쩍훌쩍.”

  재빨리 도망치기로 결정한 그는 애들을 인솔하여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 밖에 보니 소형 자가용 하나가 혼란 속에 떡하니 남아 있었고 왕년의 실력(?)을 발휘하여 저 차를 빌려(?) 타고 한시라도 빨리 통화가 되는 곳을 찾아 이동할 생각이었다.

  철컥.

  그러나 세상만사 모두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문 밖에 나오자마자 일자로 눈 부분만 뚫은 검은 복면의 병사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소총을 들고 도미니크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Freeze(꼼짝 마).”
  “하, 하하. 하하하.”

  도미니크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험상궂은 그들을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이들이 매달려 있는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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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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