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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Seven stars

2010.08.30 05:30

乾天HaNeuL 조회 수:305 추천:3

extra_vars1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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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의 비밀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베리는 촌장의 집 밖에 나와서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괜찮을까…….”




  스페란자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상처 부위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아물었고, 단지 약간의 흉터만이 남은 상태였다. 덕분에 붕대도 감을 필요 없이 단지 옷만 가라 입히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침대에 누워 떨어진 기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 동안 쌓이고 쌓인 피로가 상당한 것 같았다.




  “하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진정되지 않은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베리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심히 후회하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그 일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게다가 그런 위험한 곳에서 장난까지 쳐서 스페란자는 사선을 넘나들게 만들었고, 또 다른 세 명 역시 죽음의 장소에 놓고 오고 말았다.




  “미치겠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설마 아직까지 싸우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얼핏 봐도 서른 마리 가까이 되었지만, 아무르의 실력이라면 녀석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을 터였다. 만약 녀석들을 다 쓰러뜨리기 전에 검이 망가진다고 해도 포티스가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늦는다는 점에, 베리는 뭔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그런 나쁜 생각만 자꾸 들었다.


  고요한 적막감이 흘렀다. 아까 전부터 사람의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덕분에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응……?”




  무슨 소리가 들렸다. 베리는 귀를 쫑긋 세우면서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인 것 같기도 했고, 뭔가 질질 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한 사람, 아니 두세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어둠을 뚫고 익숙한 얼굴들이 마침내 눈에 들어오자, 이제까지 내내 굳어 있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베리는 급히 그들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들 모두를 끌어안았다.




  “모두들 무사했어!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야야야, 아프니까 그렇게 세게 끌어안지 마.”




  아무르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베리를 살짝 밀어냈다. 그는 그제야 아무르가 상처 입었음을 깨닫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디 다친 거야, 누나?”


  “그냥 찰과상이야. 이런 건 다친 것도 아니지.”


  “포티스 씨하고 기수 형은?”


  “나는 괜찮은데, 오늘 포티스 씨가 워낙 무리를 해서. 뭐 무리를 한 것은 아무르도 마찬 가지지만.”




  기수가 힘없이 대답하였다. 아무래도 그 자신도 체력을 많이 소진한 듯 보였다.




  “일단 다들 안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기수 형.”


  “응?”


  “기수 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나를? 누가?”




  기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묻자, 베리는 씩 웃으면서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면서, 그를 촌장의 집 안으로 밀어 보냈다.




  “…….”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기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눈앞에 보이는 한 여성이 그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성은 탁자에 쓰러져 곤히 자고 있었다.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된 옷,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 등, 그녀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루리 누나…….」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루리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자신의 손에 부드러운 살이 만져졌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에 그는 기쁨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 눈물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턱에 이르렀고, 마침내 톡 떨어져 루리의 눈가를 적시었다. 덕분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면서 일어섰다. 곤히 자다가 깨어났기 때문에 상황 판단이 잘 안 되었지만, 곧 자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를 깨달았다.




  「기수야? 기수 맞는 거지?」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기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한없이 먼 곳에 떨어져,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이제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감동적인 해후가 끝난 뒤에 루리는 말없이 기수에게 웃옷을 하나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누나.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사는 사람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닐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네 응급처치가 훌륭해서 다행이었어.」


  「누나가 여기 있어서 더 다행이죠, 뭐. 그렇지 않았더라면 생명에 지장이 있었을 테니.」




  기수는 약간 회색빛이 띠는 옷을 입으며 말하였다. 다 입고 나니 조금 헐렁한 것이 자신하고는 전혀 맞지 않았고, 또 전체적으로 위화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충 납득하였다.




  「네가 늘 가지고 다니는 그 반지는……?」


  「요리조리 피해 다닐 때 떨어질까 봐, 소중히 주머니에 간직해 두었죠.」




  빙긋 웃으면서 바지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반지가 매달린 목걸이를 꺼내들고는 다시 원래 위치, 즉 목에다가 걸었다.


  그런 화기애애한 모습을 살짝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무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봐?”


  “에, 뭐 그런 것 같더라고. 같은 곳에서 왔는데 서로 떨어졌나 봐.”


  “흥, 애송이 녀석아. 보고를 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포티스가 도끼를 대충 집어 던지며 거친 음성으로 말하였다. 베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빙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괜찮대요. 저 분이 준 약을 마시고 지금 쉬고 있어요. 그리고… 뭔가 희한한 치료법을 하던데, 아무튼 그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 것 같더군요. 문외한인 제가 봐도 마나의 흐름이 뒤틀린 것 같던데, 얇고 가느다란 물건으로 몸 이곳저곳을 찌르더니 금세 가라앉더라고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되게 신기했어요.”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군. 그래도 이런 시골 마을에 뛰어난 의사가 한 명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마을에 왔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거야.”




  포티스는 지쳤는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몸의 보호구의 무게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쳤기 때문에, 하나씩 벗어서 집어 던지기 시작하였다.




  “촌장 영감은 어디 갔나?”


  “마을 회관에 있는 사람들을 보러 가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녀석들이 마을로 곧장 오지 못하게 빙글빙글 돌다 와서 그렇지. 가뜩이나 검이 산산조각 나서 싸우지도 못하는 마당에 오는 길에 소머리 괴물만 열 마리를 만났지 뭐야. 덕분에 대충 나뭇가지로 싸우다가 한 녀석 주먹에 얻어 마져서 갈비뼈가 나갔고. 포티스 씨는 애지중지하던 도끼가 완전히 날이 빠졌다니까.”




  아무르 역시 몸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러워진 옷마저 벗어버렸다. 덕분에 속살이 확연이 드러났는데, 다행이도 가슴만큼은 붕대로 칭칭 감아 둔 상태였다.




  “누, 누나 지금 어디서 옷을 다 벗는 거야?”


  “왜? 겨울인데도 땀이 많이 나서 다 젖었다고. 기분 나빠서 더 못 입겠단 말이야.”


  “그러면 다른 옷이라도 빨리 입어. 여기에 남자가 무려 셋이나 더 있다고!”


  “응?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여성 특유의 반응이 없는 아무르였다. 베리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기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린 상태였고, 그 옆에 있는 루리라는 사람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처음 보는 여성을 보고 있었다.




  “포티스 씨도 뭐라고 한 마디 해주세요. 이런 건…….”


  “그건 중요치 않다, 애송이 녀석.”




  걸걸한 목소리의 포티스가 베리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들어왔다. 게다가 중요치 않다는 말에 베리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떡 벌린 채 포티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냐, 애송아?”




  약간 노기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베리는 그가 왜 화가 났는지, 그리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제일 중요한 지도를 미궁 한복판에다가 던져 놓고 왔단 말이다, 이 멍청한 말미잘 같은 놈아!”


  “아!”




  이제야 지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베리였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온몸을 뒤져 보았지만, 그렇게 큰 지도가 품안 어디에 들어갈 일도 없었고, 또 미궁 안에다가 놓고 온 것이 분명한 지도가 여기에 있을 리도 없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베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얼굴을 처박고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도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예?”




  돌연 기수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베리는 벌떡 일어서며 기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아니 보기 민망할 정도의 열렬한 시선을 보내면서 쳐다보았다. 기수는 그 시선이 살짝 무서웠는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시선은 좀 너무, 뭐라고 할까나. 아무튼 뜨거우니까 사양 좀 해줘.”


  “예? 아아아, 예.”




  기수의 말을 듣고 제 정신이 든 베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이 기수 친구. 지도가 없으면 그 미궁 탐사도 못하고 중요한 대형 보스 녀석도 못 잡을 건데, 왜 중요하지 않은지 설명 좀 해주게.”


  “다 기억하고 있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지금 뭐라고 했나?”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내뱉는 기수였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복잡한데다가 각종 함정까지 설치된 미궁의 지도를 인간이 정확하게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자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자네가 용족이 아닌 이상 그 지도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무리네. 어디서 그런 이상한 농담 꺼내지도 말게.”




  포티스는 손을 내저으면서 농담 취급했다. 하지만 기수는 여전히 얼굴 가득히 미소를 떠올린 채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저기 기수 형. 혹시 나를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이라면 고맙게 생각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래. 저 바보팅이는 그냥 구박만 해주면 되는 거야.”


  “거짓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보통 인간이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느 언어를 단 팔 일만에 이러게 유창하게 말하겠어? 물론 아직 바름이나 단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언어의 천재라고 할지라도 이런 빠른 시간 내에 다른 언어를 습득할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러면… 정말 그 복잡한 지도를 몽땅 외웠다는 거야?”


  “거기에 쓰여 있는 용족어까지 전부?”


  “음, 용족어는 읽을 수는 없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모양만이라면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지. 흠……. 아직도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뭐하면 보여줄까?”




  베리와 아무르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포티스 역시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기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수는 벽 옆에 놓인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그 위에는 종이 비슷한 것과 또 잉크를 묻혀서 사용하는 필기구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집어 가지고 도로 탁자로 걸어와 그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용족어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문자를 쓰고 있었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도의 일부분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미궁의 입구와 자신들이 지나갔던 첫 번째 함정, 그리고 일곱 개의 통로와, 세 번째 통로 끝부분에 위치한 탁 트인 공간 모두를 완벽하게 재연해 냈다.




  “거짓말.”


  “말도 안 돼. 이건 완전 인간의 기억 능력을 훨씬 뛰어넘은 거야! 정말 어떻게 저런 세세한 점까지 모두 다 기억할 수 있지?”




  기수는 종이가 부족한 관계로 중간까지만 그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놀라고 있는 베리와 아무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여전히 기억력이 좋구나. 하긴 그 절대 암기 능력이 어디 가겠니.」




  뒤에서 말없이 서있던 루리도 한 마디 하였다. 물론 이 세계의 공통어가 아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한국어로 말이다.




  「너 혹시 내 짐 뒤져 보진 않았겠지?」


  「뒤지긴요.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어요. 하하하, 그거 열었다가 저는 누나한테 죽은 목숨이잖아요.」


  「당연하지. 너라면 거기 안에 든 내 속옷의 종류와 생김새까지 모조리 암기할 테니까. 그런 면에서라면 저 여자 아이는 성급한 짓을 한 거야.」




  루리가 손가락으로, 여전히 놀라고 있는 아무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붕대 하나로 상체의 중요 부위를 가린, 한 마디로 야시시한 모습이었는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아이 몸매… 평생토록 네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잖아. BWH까지 포함해서.」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누나!」




  루리의 장난기 어린 발언에 기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였다.




  “에? 형, 무슨 말을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 거야? 그리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무슨 이야기야?”


  “응? 아 모, 몰라도 돼. 들어봤자 우리의 생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야. 괜히 너만 피해 입으니까 신경 꺼.”


  “에?”




  강하게 손을 내저으면서 강하게 만류하는 기수의 모습에, 베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반문하였다.




  “아무튼! 지도 없이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응? 아, 알았어. 뭐… 이걸로 된 거죠, 포티스 영감님?”


  “네 놈 실수를 갓 동료가 된 기수 녀석이 메운 것에 불과해. 이런 건 그저 운이 좋은 거라고. 실력을 더 키우지 않으면, 네 놈은 평생 거기 진창에서 나뒹굴 거다.”


  “반성하겠습니다. 포티스 씨.”




  포티스의 말에, 베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였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길을 안내해 줄 최적의 사람이 있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싸울 무기가 없다네. 아무르의 검은 박살이 났지, 내 도끼는 날이 다 빠져서 더는 못 써먹어. 이제 남은 건 스페란자의 단검과 네 놈의 그 쓸모없는 검뿐이야. 그딴 걸로는 미궁의 왕이란 작자를 때려잡기 전에 소머리 괴물 자식들한테 다 부셔질 거야.”


  “예, 뭐 그렇지요.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서 들어가야 하지는 않을지, 뭐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 거 가지고 과연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베리는 포티스의 지적에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이제까지는 그들 걱정에, 미궁의 왕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면 좋을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저기 나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에, 정말? 그게 뭐야?”




  이번에도 기수가 희망 찬 소식을 전해주었다. 덕분에 베리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사탕을 바라는 아이의 모습처럼 기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부담이 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들이대면 내가 말을 못하자나. 너무 가까워.”


  “아, 미안, 미안. 흥분해서 말이야. 하하하.”




  멋쩍게 웃으면서 제 자리에 도로 앉는 베리의 모습을 본 뒤에 기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 생각에는 미궁의 입구부터 제일 첫 번째 함정이 있는 곳 사이에 위치한 벽들…, 그게 중요한 것 가타.”


  “벽이요?”


  “정확하게는 벽화지.”




  아무런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으로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진 것에 불과한 그림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는 그림들을 해석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벽화에 의미가 있다고 치세. 그걸 또 우리가 어떻게 해독을 할 수 있다고도 치세.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가 최우선으로 쳐야 하는 것은 그 괴물 대장 녀석을 처리하는 걸세. 지금쯤이면 녀석이 미궁의 지도를 손에 얻었겠지. 바로 저 망할 애송이 녀석 덕택에 말이야. 그렇다면 그 놈은 미궁 밖을 빠져 나올 수 있겠지. 그 장치인지 뭔지 하는 것을 찾아내어 부셔버린 다음에 말이야. 그 지도에는 장치의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다고 촌장 영감이 말하지 않았나?”


  “일리 있는 말슴이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도 기수 형 말에 동의해요, 포티스 씨.”




  기수와 베리 둘 다 포티스의 말에 부정적인 답변을 꺼냈다. 특히 베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꺼냈는데,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아하니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뭐 때문에 그렇게 호언장담하는 겐가?”


  “녀석은 신마 전쟁 후, 여섯 동맹이 신족과 마족을 다른 공간에 가둔 뒤에 미궁에 갇히게 되었죠?”


  “그렇지. 그건 세 살 먹은 어린 녀석도 아는 거야.”


  “그 때 이후로 지금 몇 년이나 흘렀을까요?”


  “천 년도 넘게 흘렀지. 그럼 네 말은, 아무리 미궁이라고 해도 그 시간이 흘렀다면 충분히 봉인 장치의 위치를 찾아내어 파괴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뭐 이건가?”




  포티스의 질문에 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에 기수가 보충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있지만,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그 미궁은 뭔가 특별하다는 거죠.”


  “특별? 당연히 특별하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미로를 만든 놈이 누군지 참. 웃긴 녀석이거나 변태 같은 성격일 게야.”




  기수의 말에 포티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하였다. 그는 황당무계한 각종 함정 장치들을, 지도 없이는 들어가지도 못할 미궁에 설치해 놓은 뒤에 휘황찬란한 그림을 벽에 그린 놈은 분명 사이코임에 분명하다고, 이미 단정 지은 지 오래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첫 번째로 무수한 독화살이 튀어나도록 되어 있는 함정에 인간의 유골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죠. 물론 멀리서 봤으니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더 확실한 것은 첫 번째 함정에서도 그런 해골이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음… 그건 확실히 그렇군.”


  “두 번째로 우리가 일곱 갈림길을 모두 밖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그 중 우리가 지나간 길은 웬만한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길이었고, 다른 길들도 상황은 비슷한 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길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소 괴물 녀석은 절대로 못 지나갈 거다 이건가?”




  중간에 말을 끊으면서 포티스가 말하였다. 그러자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포티스는 수염을 매만지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그 놈들이 우리를 뒤쫓아 나오고, 동굴을 자유자재로 드나든 거지?”


  “그 미궁은 아마 보통 미궁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그 안은 차원이라고 할까, 공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게 분명해요.”


  “공간이 섞여? 그건 무슨 뜻인가?”


  “에,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스페란자가 거실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상의는 속옷 하나만 입고  있는 아주 야시시한 상태였는데, 정신이 멍한 상태라서 자신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자, 잠깐만!”




  루리가 급히 얇지만 색이 짙은 천을 가져다가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살려주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루리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은혜, 잊지 않겠다.”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감사의 뜻만큼은 확실하게 표현되는 말투였다. 아니 이제까지 냉랭하고 차가운 말만 해온 그녀였기에, 지금의 그 말은 가장 따뜻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스페란자 씨, 아직 쉬셔야. 좀 더 들어가셔서…….”


  “괜찮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그녀는 손을 가볍게 저은 다음에 근처에 있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아직 왼쪽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지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상태였다.




  “그의 말대로 그곳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면서 느낄 수 있었지. 뭔가 특별해.”




  스페란자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지만, 포티스나 아무르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이해 못한 상태였다. 어리둥절한 그들의 표정을 보고 기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종이를 가져다가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그 미궁은 이런 구조일 겁니다. 여기가 입구, 그리고 첫 번째 함정까지 우리가 갔던 길이 이런 식으로 아주 무난하게 되어 있죠. 하지만 미노타우르스는 이 길을 지나다니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똑같은 입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 놈들은 어디를 지나다닌다는 건가?”




  포티스가 묻자 기수는 종이에다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입구는 똑같은 위치에다가 그렸고, 첫 번째 함정, 그러니까 창이 튀어나오는 곳까지도 동일하게 그렸다. 그 다음으로는 넓은 함정 지대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들도 아마 이 함정들을 지나칠 겁니다. 이 함정들은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접점 지대가 되겠죠.”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구먼. 도대체 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응, 나도 뭔 말인지 모르겠어. 베리 넌 알겠어?”


  “어느 정도는.”




  여전히 이해를 못한 두 사람이었다. 기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설명을 시작하였다.




  “만약 이런 식으로 다른 길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시죠. 첫 번째 함정과 두 번째 함정을 잇는 다른 길이 존재하고, 또 첫 번째 함정에서 입구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길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면 어떻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겐가? 나는 그 지도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거기엔 그런 길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네. 외길이었다고!”


  “그렇다면 미노타우르스들이 동굴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뒤에서 쫓아와야 할 녀석들이 우리보다 먼저 입구를 통과해 밖에서 대기할 수도 없지요. 아마도 녀석들이 우리보다 더 짧은 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왔을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그 길을 보지 못하였나?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환술 마법 같은 것이 걸려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 만약 그런 마법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면, 그런 것에 예민한 검은 요정 양반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었겠지.”




  포티스가 손가락으로 스페란자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 지적에 스페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것은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환술인지 뭔가 하는 거슨 걸려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저 그들이 지나다니는 공간과 우리가 지나다니는 공간이 다를 뿐입니다.”


  “도통 이해를 못해 먹겠군. 아무튼 그래서 결론이 뭔가? 결론만 들어봄세.”


  “용족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미궁 안에 녀석을 밀어 넣은 다음에 모종의 장치를 다른 공간에 설치했겠지요. 뭐 그 외에도 다른 것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그 벽화를 해석해 봐야 알 거 가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미노타우르스의 왕이라는 존재는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그 봉인 장치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인 듯싶었다. 나름대로 납득한 포티스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등을 의자 등받이에 가져다 댔다. 어쨌든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기수 형, 그 벽화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거야?”


  “벽화에서 미노타우르스의 왕을 묘사한 것을 봤으니까.”


  “…….”




  기수의 말에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도 입을 열지 못한 채, 기수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리만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서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볼 따름이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그 벽화는 멋있으라고 그린 것도 아니고, 재미가 있으라고 그린 것도 아니고, 또 변태적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장난치려고 그린 거도 아닐 겁니다. 아마도 그건 일종의 예언 문구일 거예요. 그러지 않고서야 오랜 옛날에 만들어져 새겨진 벽화에 최근 이야기가 기록될 리가 없잖아요.”


  “아니, 아니 잠깐! 그 그림을 용족이 녀석을 가두고 난 다음에 그렸을 수도 있는데, 왜 그런 황당무계한 결론에 이른 건가?”


  “동감.”


  “맞아, 그게 가장 합당한 것 같아.”


  “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다들 비현실적인 설명에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기수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가설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




  “아름다운 그림과 위험한 함정 모순적이죠.”




  기수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다들 이해하실 겁니다. 벽에 뭔가 메시지를 뜻하는 그림을 그려놓고서 그 뒤에는 사람을 죽일 법한 함정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가글 할 수 있어요. 함정은 미노타우르스와 같은 몬스터들을 없애기 위한 장치이고, 그림은 그곳에 들어온 어떤 존재를 위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함정에 우리 중 한 사람이 당하지 않았나. 그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그 전에는 그 누구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미궁은 선택받은 누군가가 아니고서야 제대로 활보할 수도 없다는 거겠죠. 그리고 그 선택받은 존재들 중에는 지도를 만든 용족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 존재가 모든 공간을 오가면서 지도를 만들었을 테고, 그리고 그림을 보며 해석하려고 벽에 글도 남겼을 겁니다. 아마도 용족이라는 게 티가 나지 않도록 고대에 사라진 문자 중 하나로 말입니다.”




  어느 정도 타당한 설명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특히 포티스는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기수의 설명이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듯 보였다.




  “아무튼 제 결론은, 그 그림에 미궁의 왕을 죽일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차피 녀석이 봉인 장치를 찾아내어 파괴하지 못하는 지금, 녀석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봉인 장치가 저절로 망가지는 거겠죠. 아마도 지금 그렇게 되가는 것 같은데, 하루 이틀 사이에 그렇게 되겠어요?”


  “알겠네, 알았어! 그럼 기수 친구, 자네는 원하는 해독이나 실컷 해보게. 그 동안 우리는 체력이나 회복하며 싸울 준비를 할 테니.”




  더는 설명도 듣고 싶지 않았던 포티스는, 두 손을 내저으면서 거칠게 말하였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일어나 손님방에 들어가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워낙 피곤했는지, 그는 누운 지 1분도 안 되어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기수 형이 그걸 해석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결전을 하려 해도 내일 해야 할 테니. 그리고 지금 스페란자 씨도 그다지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이래저래 휴식을 취해야할 것 같아. 나도 오늘은 그만 씻고 자야겠어. 아무르 누나는?”


  “나도 피곤해. 잘래.”




  아무르가 하품을 하며 일어섰다. 그녀는 여전히 부엌에서 일만 하고 있는 토리아를 찾아낸 다음, 욕탕의 위치를 물었다. 그리고 필요한 목욕 도구를 챙겨가지고 목욕탕으로 향하는 와중, 스페란자를 뒤에서부터 꼭 끌어안았다. 스페란자는 말없이 살짝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려 주었고, 그녀는 목욕탕으로 향하였다.




  「너 진짜 대단하더라.」


  「뭐가요?」


  「고작 일주일 남짓 하는데, 이 어려운 언어를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습득하니 말이야. 넌 역시 외우는 것에 한한 괴물이야, 괴물.」




  루리의 칭찬 아닌 칭찬에 멋쩍어진 기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수학은 영 꽝인데요. 특히 응용문제가 나오고 난 뒤부터는 하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간단한 사칙연산은 하겠는데. 쩝쩝. 아무튼 그것 때문에 루리 누나한테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


  「그 미궁의 벽화를 보던 도중에 무슨 특별한 도형 같은 것을 봤거든요. 기형학적 그림인 것 같은데, 뭔가 규칙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누나가 내일 그곳에 같이 가줬으면 해요. 물론 든든한 전사들과 함께 말이죠. 그럼 안전할 거예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탁을 하는 기수의 모습은, 과히 귀엽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런 상대방을 앞에 두고서 차마 거절을 할 수 없는 것이 여심이었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겠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리고 후회막심. 하지만 그는 어느새 촐랑촐랑 그 자리를 빠져 나간 상태였고,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섣부른 대답을 한탄하였다.




  「뭐, 이제 위급한 환자들은 없는 것 같고. 안전하다니 그렇겠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피로가 쌓인 탓인지 살짝 열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스페란자를 바라보았다. 계속 잠이 든 상태로 있다가, 이렇게 깨어나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새롭게 느껴졌다. 인간이 아닌 다크 엘프, 그 단어는 얼핏 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미이…인이시….”




  미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래도 뜻은 전해졌는데, 스페란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의사 전달을 해주었다.




  ‘그나저나 뭔가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네.’




  표정 변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스페란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실로 어려웠다. 게다가 그녀는 스페란자와 초면인 상태였다. 덕분에 그녀는 더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며―또 할 줄 아는 말도 없었기에, 입을 다문 채 계속 먼 산만 바라보았다.




  “이름이 뭔가?”


  “예? 예? 아, 이름. 루리.”




  갑작스럽게 스페란자가 입을 열어 이름을 묻자,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정도 단어는 자신도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의 이름은 스페란자. 너는 기수의 친구인 것 같으니 나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따라서 너는 나의 영혼의 친구다.”


  “예?”




  몇몇 단어 외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때 옆에 기수가 있어서 통역을 해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너는 나의 친구.”


  “치…친구?”




  그 단어는 왠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들어보기도 했고, 뭔가 친밀감이 느껴지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스페란자의 말을 낯설어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스페란자는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들고는, 정말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너는 나의 친구. 그러므로 너에게는 허락하겠다. 스펠이라는 나의 애칭을…….”


  “스…펠?”


  “그래, 스펠. 루리, 나를 그렇게 불러라.”




  만약 상대가 남자였다면, 꼭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로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루리는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마음을 다 열고 다가와준 사람이 몇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되었다고요? 그거 참 되게 신기하네.」


  「뭐가?」


  「아니 그렇잖아요. 저기 다른 사람들은 저 분이랑 말을 하기는 하지만 개인적 이야기는 거의 하지도 않는다고요. 다가가기도 힘들고 말수도 적으시고. 뭐, 여러 가지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해서 그런가?」


  「뭐가 비슷하다고?」


  「아 죄송.」




  언뜻 화를 내면서 몰아세우자, 기수는 곧바로 백기를 들면서 움츠러들었다. 두 손을 맞대면서, 마치 손을 빌며 용서를 구하는 시늉을 하였다.




  「아마도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 것 같아. 나는 그저 아무 것도 못하면서 의사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야. 훗.」




  루리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처음 보는 복잡한 미소에 기수는 뭐라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당황하였다.




  「이럴 때는 가름 형이 있으면 좋겠는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가름 형이라면 누나를 잘 위로해줬을 거 아니에요. 둘이 연인사이이기도 하고.」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아이하고는 단지 미팅에서 만난 악연이라고 몇 번을 설명해야 알아듣겠니?」




  그렇게 부정을 하고 있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덕분에,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헤에, 그러세요. 뭐 나중에 만나면 직접 이야기하세요. 아마 그 형이라면 지옥에 떨어져도 살아올 테니까.」


  「그렇겠지. 그 아이라면 맨손으로 지옥의 사자들도 두들겨 패고 탈출할 거야.」




  여전히 뺨이 빨갛게 물든 상태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름이라는 사람에 대한 친애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뭐 그건 가름이 형도 마찬가지니까, 에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남의 사랑에 내가 그렇게 간섭할 입장도 못 되고.’




  기수는 걸음을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말없이 걷고 있는 다른 일행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멀뚱멀뚱 기수와 루리를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왠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초리들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다들?”


  “에, 그게. 왠지 좀 신기해서.”




  아무르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을 하였다. 매우 부담이 가는 시선을 마주한 기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였다.




  “뭐, 뭐가?”


  “스페란자 언니와 그렇게 친해진 사람을 처음 봐서.”


  “…….”




  기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부정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루리 옆에 딱 붙어서 가고 있는 스페란자를 보면, 뭔가가 확실히 재미있다고 할까나, 신기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것도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붙어 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거야 서로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언니한테 애칭이 있는 지도 몰랐단 말이야.”


  “왠지 질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르 누나.”


  “뭐, 뭐야?”




  옆에 있던 베리가 괜히 끼어들었다가 머리만 한 대 얻어맞고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는 혹이 살짝 튀어 나온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의미 불명의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포티스 씨.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계세요?”


  “뭐, 불만 있나? 나는 이런 벌레 씹은 표정 지으면 안 된단 말인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예상외의 반응에 기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벌레 씹은 표정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발걸음도 묵직한 것이 공룡이 쿵쿵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원인은 그의 손에 들린 도끼에 있는 것 같았다.




  “에잇. 이딴 도끼로는 토끼도 못 죽이겠네.”




  신경질적으로 손에 들고 있는 도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무를 베는 데나 사용할 법한 작은 도끼를 내려다보는 포티스였다.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전투 도끼의 크기에 반도 안 되는, 정말 작은 도끼였다.




  “그거라도 감지덕지잖아요, 포티스 씨. 이 검 좀 보세요. 너무 가벼워서 날려 버릴 것만 같다고요.”




  아무르도 마을에서 받아온 새로운 무기에 영 불만이었다. 그녀가 받은 것은 얇고도 긴 검이었는데, 굳이 형식을 따지자면 찌르기 전용 무기인 레이피어와 상당히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그녀의 취향과는 아주 동떨어진 무기였다.




  “그 무기를 쓰지 않으면 좋겠네요. 하아, 그리고 뭐… 다행이도 녀석들은 입구 주변에 없는 것 같고. 그나저나 그 많던 통구이들을 다 먹어 치웠네. 뼈도 안 남았어.”




  기수는 어제 아무르가 만든 커다란 구덩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하였다. 그 안에는 스무 마리 이상의 미노타우르스들이 번개 구이가 된 채 죽어 있었는데, 지금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뼈조차도 모조리 부셔 먹은 것 같았다.




  “그럼 다들 들어가시죠.”


  “밖에서 기다려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우리까지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저 안이 더 안전할 거야, 아무르 누나.”




  아무르는 미궁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베리는 그런 그녀의 등을 밀면서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베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길목에 미노타우르스가 나타날 일은 없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 장소가 가장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제 들어왔던 바로 그 길로 다시 들어섰다. 여전히 양쪽 벽에는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희한하게 생긴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다.




  “Light.”




  스페란자가 가볍게 주문을 외워서 어두컴컴한 그곳을 밝혔다. 이번에는 아주 밝은 빛이라서 단 하나의 빛의 공으로도 그 주변이 완전히 환하게 비추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제 나한테 물어보고 싶다는 게 뭐였어?」


  「저것들이요. 저 도형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어디 보자.」




  루리는 기수가 가리키는 곳에 새겨진 도형들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어떤 것은 삼각형이었고, 또 어떤 것은 원형이었고, 어떤 것은 더 복잡한 도형이었고, 뭐 그런 식으로 아무 의미 없이 그려진 도형들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확실히 법칙이 존재했다.




  「저거 프랙탈이네.」


  「예? 프랙탈?」


  「그래 프랙탈. 그러니 네가 모르는 거구나. 수학 책을 중학교 이후로는 펴보지도 않았다고 했던가?」


  「예. 초등학교 이후로는 수학을 포기해버려서 아예 보지도 않았죠. 하하하.」




  멋쩍은지 기수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루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다음에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기 가장 간단해 보이는 걸로 설명을 해보자. 저기 삼각형 하나 보이지?」


  「예. 삼각형 안에 다른 삼각형이 또 들어가 있네요.」


  「그래. 그런 자기 유사성을 가진 게 프랙탈이야. 저것보다 더 많이 표현된 것은 여기 이쪽에 있네.」




  그들은 시선을 한참 옆으로 옮겼다. 거기에도 삼각형이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 그 안에 삼각형이 하나 더 그려져 있었고, 네 개의 삼각형 안에 또 다른 삼각형이, 그리고 그 작은 삼각형들 안에 또 다른 삼각형들이, 그런 방식으로 여러 번 더 반복된 그림이었다.




  「그렇다면 저것들은 기호가 아니겠네요. 도형이라……. 그런데 뭘 표현하기 위해서 저런 걸 그려놨지? 그것도 이런 도형이 아닌, 뭐랄까 인물화나 풍경화 같은 그림들 위에다가.」


  「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마 무슨 표시 같은 거 아닐까. 뭐라고 할까나, 번호를 매기듯 그 위에다가 도형들을 그렸는지도.」


  「번호?」


  「어,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루리의 말을 듣자 기수는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입구서부터 첫 번째 함정이 있는 곳까지 그려진 모든 도형들과 그 밑의 그림들을 보고 기억한 다음에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이 아주 의기양양한 것이 뭔가를 알아낸 듯 보였다.




  「뭔가 알아냈어?」


  「예. 저 도형들은 말 그대로 번호였어요.」


  「에? 어째서?」


  「프랙탈의 반복 회수가 곧 번호라는 뜻이죠. 여기 이 삼각형은 안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죠. 그러니까 이건 1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여기에 있는 도형에는 그 안에 동일한 도형이 하나 더 그려져 있어요. 그래서 이건 두 번째를 가리킬 거예요.」


  「에? 그래도 똑같은 반복 패턴을…….」


  「단언하는데 똑같은 반복 패턴을 지닌 도형 그림은 존재하지 않아요. 다 유일무이한 것들뿐이에요.」




  기수가 힘을 주어 말하였다. 확신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말을 루리도 믿을 수 있었다. 그의 비정상적인 기억력과 빠른 연산 처리, 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손재주 등, 기수가 예전에 보여 준 빼어난 능력을 생각한다면 프랙탈의 반복 횟수를 세고 비교하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할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불공평해.」


  「예?」


  「나는 시험 볼 때마다 암기하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쑤실 정도였는데, 너는 보자마자 다 암기해 버리잖아. 게다가 컴퓨터 저리 가라할 정도로 완벽한 연산 처리 능력까지 있고. 거기에 또 본 것을 그대로 만들 줄 아는 손재주도 있고. 신은 참 불공평한 것 같아.」


  「그러지 마세요. 저는 수학을 못하잖아요.」




  기수가 겸손을 떨며 말을 하자, 루리는 가느다란 눈초리를 그를 한 번 노려본 다음에, 살짝 토라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수학만 못하는 거잖아.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으면서.」


  「아하하. 그랬다면 제가 수학을 포기할 리가 없잖아요.」


  「애당초 응용문제 같은 것에서 포기를 하는 네가 이상한 거야. 왜 그런 쉬운 걸 못한다는 거야? 내 생각에는 너의 절대 암기 능력과 연산 능력만 있다면 식은 죽 먹기 같은데. 뭔가 그 부분만 고장 난 건가?」




  그녀는 손가락으로 기수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 보며 말하였다. 기수는 그저 쓴웃음만 지으며, ‘하하’하며 무미건조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이런 거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때론 잊을 수 있는 게 행복이니까.」


  「…….」




  그 말에 루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는 쓸쓸한 미소에 그녀는 할 말을 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 미소의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슬픈 일이 쌓이고 쌓여도 잊을 수 없으니까.’




  그의 기분이 어떨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수 형. 뭔가 자꾸 모르는 이야기로만 하지 말고 설명을 해줘 봐. 뭔가 알아냈어?”


  “응? 아…, 뭐 대충 알 것 같기도 해. 그림의 순서는 찾아냈으니까. 이제 그거를 올바른 방법으로 해석만 하면 되겠지.”




  베리가 따분한 어조로 말을 꺼내자, 기수는 다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그는 일단 그들을 제일 첫 번째 그림으로 안내하였다. 뭐 안내라고 해봤자, 그들 가까이에 놓인 그림이라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되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게 첫 번째.”


  “인간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그리고 계속 순서대로 보자면, 이건 용족일 테고, 이건 드워프, 이건 엘프, 그리고 이쪽에 그려진 것은 다크 엘프. 그 다음이 뭔지 모르겠는데.”




  여섯 번째 그림은 누굴 형상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같은데, 온 몸이 살짝 투명하게 그려진 것 같은데다가 몸 주변에서 연한 빛이 나는 것을 그린 것 같기도 했고, 아무튼 기수 입장에서는 본적이 없는 생명체였다.




  “아, 그건 정령족 같네. 그렇다면 앞의 여섯 그림은 여섯 종족의 동맹체를 가리킨 걸 거야.”




  베리가 그림을 가리키며 그 정체를 알려주었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곱 번째로 향하였는데, 거기에 그려진 것은 두 개의 칼이 서로 부딪히는 그림이었다.




  “이건 싸움을 의미하겠지. 그 다음 두 개의 그림은 내 생각에는…….”




  기수가 다시 그들을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그림으로 안내하였다. 그 중 하나는 아름답고 환하게 빛나며 천사처럼 하얀 날개를 지닌 존재가 그려져 있었고, 아홉 번째는 시커멓고 어두컴컴한 존재가 그려져 있었다.




  “신족과 마족이네. 그러니까 여섯 동맹체와 신마족 간의 전쟁을 이야기 하는 건가?”


  “응? 그렇겠네.”




  베리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린 아이의 그것과 같아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주의를 집중하면서 그림을 지켜보기 시작하였다.


  기수는 그 다음 그림으로 옮겨갔다. 다들 그를 따라 왔는데, 그 다음 그림은 좀 큰 편이었다. 신족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 소머리를 한 괴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신족이 미노타우르스를 만들었다는 건가?”


  “그 다음 그림을 보면 이 정체가 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 다음 그림은 수많은 미노타우르스들이, 그 한 마리의 미노타우르스에게 절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곧 이 미궁에 살고 있다는 그 무시무시한 왕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그 왕이라는 놈을 표현한 것 같구먼. 하지만 이 그림은 녀석이 만들어진 다음에 그려진 것일 수도 있지 않나.”




  포티스가 자신의 생각을 또다시 피력하였다. 하지만 기수는 용족이 벽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미궁을 만든 존재가 그린 것이라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며 믿고 있었다.




  “뭐 그림을 다 보게 되면 알 수 있겠죠. 그 다음 그림들을 계속 해석해 나가다 보면…….”




  신족이 만든 미노타우르스의 왕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대항하여 용족과 함께 싸우는 장면이 그려졌고, 그 이후에는 촌장에게 들은 그대로 포악한 미노타우르스의 모습과 더불어 용족이 그를 멸하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 미궁으로 데리고 와서 미궁의 중심부에 위치한 넓은 장소에 가두고, 봉인의 장치를 만들어 그가 영원히 나오지 못하도록 한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이네요. 그러나 아직 그림은 반도 해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 것 같은데.”




  재빨리 그 다음 그림이 그려진 장소로 옮겨갔다.




  “여기서부터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 같네요. 뭐라고 할까 이건, 몬스터들을 그린 거겠죠?”


  “오크, 오우거, 소머리 괴물…….”


  “그리고 이쪽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야 그림의 해석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입구 근처까지 와서 햇빛이 비치는 곳에 앉아 잠시 휴식의 시간을 취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이 일을 시작하였는데, 벌써 해가 중천을 넘어간 상태였다.




  “뭐 도시락을 싸주시기에 들고 온 것이 다행이었네.”




  베리를 비롯한 그들 모두는 마을 촌장님이 싸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집에 살고 있는 토리아라는 여인이 싸준 도시락을 마음껏 먹고 있었다. 그새 그들의 식성을 알았는지, 각 도시락들에는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들이 담겨 있었다.


  배가 고픈데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문제는 제대로 소화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그나저나 완전 소름이 돋는 것 같더라고. 어떻게 그런 세부점까지 모조리 다 그릴 수가 있는 거야.”




  밥을 먹으며 베리가 중얼거렸다. 이미 스테이크를 집어 삼키는 것에 열중한 상태의 아무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할 말을 잊은 상태였으며, 기수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라 반응이 없었다.




  ‘쳇, 재미없게.’




  어쩔 수 없이 밥만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조용한 식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리는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밥을 있는 대로 떠서 입 속에 억지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체해. 그러면…….”


  “예? 아, 예.”




  루리가 그 모습을 보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만류하였다. 그는 잠시 미묘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린 다음에,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밥을 다 먹고 난 뒤에 그들은 잠시 소화시킬 시간을 가졌다. 지금 싸우러 가는 짓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데다가, 뭔가 미묘하게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에 당장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수 형. 여기가 세 개의 공간이 병렬적으로 구성된 것과 우리가 모든 공간을 잇는 제 3번째 공간에 있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용족이 그 왕을 가둔 중앙 지역으로 가는 길목을 막았다는 거지?”


  “그 그림을 해석해 보자면 그런 것 같아.”


  “그렇다면 괴물이 있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봉인 장치를 파괴해야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림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그들이 먼저 가야할 곳은 봉인 장치가 있는 제 2 중심부였다.


  그림을 해석한 결과, 그들은 몬스터들이 활보하며 엄청난 함정이 설치된 제 1 구역, 함정도 없고 아무런 위험 요소도 없이 단지 들어온 인간을 몇 시간 동안 헤매게 한 후 입구로 돌려보내게 만드는 제 2 구역, 마지막으로 뜻을 간직한 벽화가 새겨진 곳과 몇몇 구역들과 더불어 1, 2 구역까지 모두 혼합된 제 3 구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 3 구역은 선택받은 자들만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으로,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바로 제 3 구역이었다. 그 공간에는 세 개의 중심부가 존재했는데, 첫 번째 중심지역에는 미노타우르스의 왕이 있는 곳이었고, 두 번째 중심지역에는 그 왕을 봉인하는 장치가 있는 곳이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 구역은 특수한 구역으로, 그곳이야말로 이 미궁의 중심부였다.


  지금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왕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두 번째 중심부로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봉인 장치를 파괴해야한다는 점이었다.




  “괴물을 잡겠다고 그 괴물을 얽매고 있는 봉인을 푼다? 그것 참, 지나가던 개가 웃으며 환장할 노릇이군. 녀석이 미궁의 첫 번째 중심부인지 뭔지 하는 곳 외에는 절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아주 귀중한 정보를 얻었는데,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가면 되지 않겠나?”




  포티스가 거친 음성으로 말하였다. 옆에 있던 아무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들 중에는 그들이 해치워야 할 대상의 막강한 위력 역시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짝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림에는 봉인 장치가 서서히 약해지는 것을 묘사한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녀석은 언젠가 그것을 이겨내고 미궁을 빠져 나가 다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할 거예요. 그것도 식욕으로 인간을 잡아먹는 보통의 미노타우르스들과는 달리, 단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기수의 대답에 포티스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기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베리타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이 애송이. 네 놈은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애당초 이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도 그요, 또한 그들 모두를 설득한 것도 그였다. 따라서 베리타스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결심한 포티스는 그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우리는 녀석을 없애야 합니다. 아니 그 전에 녀석을 만나야겠죠.”


  “만나? 만나서 신나게 담소라도 즐기며 술잔이라도 기울이겠다는 생각인가?”


  “훗,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소를 흘리는 베리의 모습에, 포티스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 한 구석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봉인 장치가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거겠죠. 그 다음 다시 길을 돌아서 녀석을 만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음, 그 다음부터는 봉인을 파괴한 다음에 생각해볼까 합니다. 아직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거든요.”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이 뭔가 의심스러웠다. 포티스는 더 캐묻고 싶은 마음에 목청을 드높여 질문세례를 퍼부으려 했지만, 갑자기 스페란자가 손을 뻗어 그를 만류하였다.




  “어떻게 갈 생각?”


  “스페란자 씨와 루리 씨는 전력 외라고 생각 중입니다. 그러므로 그만 마을로 돌아가서 쉬시는 것을 권하고 싶네요.”


  “나는 괜찮다. 하지만…….”




  그녀는 옆에 있는 루리를 바라보았다. 루리는 완벽한 비전투요원, 따라서 그녀가 미궁 밖으로 나서는 순간 크나큰 위험에 직면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군가가 그녀를 바래다준다거나, 혹은 그들 모두가 마을로 돌아갔다가 루리만 그곳에 남겨두고 다시 미궁으로 오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렇다면 일단 마을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죠. 그리고 스페란자 씨도 너무 무리하시지 마세요.”




  베리는 천천히 일어서며, 마을로 돌아가자고 말하였다. 그 말을 기수를 통해 전해들은 루리가 벌떡 일어서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지금 저희랑 함께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가 물었고, 중간에 기수가 그것을 통역해 주었다. 그러자 루리는 강하게 고개를 세로로 끄덕였다.




  “…….”




  절대적 비전투요원을 데리고 미궁을 탐사하고 위험한 미노타우르스의 왕이 있는 곳까지 간다? 그것은 베리의 입장에서는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고 허락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기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하지만 마을로 돌아가 있는 편이 더 안전해.」


  「싫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왠지 너 혼자만 위험스런 상황에 빠뜨리는 거잖아. 애당초 너도 싸움 같은 건 못하면서 왜 가려는 건데?」


  「그건 내가 유일하게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너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 너는 그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만난 아이란 말이야.」




  루리의 고집이 이렇게 셀 줄은 몰랐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좋게 말하면 순종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의지가 별로 없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녀가 반드시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기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수가 다시 말을 꺼내서 설득하려 하였다. 그때 스페란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루리의 손목을 손으로 가볍게 잡으며 말하였다.




  “내가 지킨다.”


  “예?”


  “지킨다고 말했다.”


  “아, 예.”




  스페란자까지 거드는 바람에 기수는 백기를 내걸고 말았다. 베리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지끈지끈 쑤시는 머리를 부여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스페란자 언니도 참 대단하네. 만약 언니가 남자라면 완전 반할만한 대사라니까?”


  “하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기야 마을이나 여기나 똑같이 위험하기는 하니까 상관없을 지도.”




  지금 그들이 미궁 속에 있는 동안, 마을에 미노타우르스가 침범했을 가망성도 있었다. 그런 걸로 따지자면 여기나 거기나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이쪽이 더 위험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잠깐만요.”


  “왜 그래, 기수 형?”




  제일 선두에 서서 그들을 안내하고 있던 기수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이미 첫 번째 함정 지대에 도착했는데, 스위치를 살펴보고 있는 기수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뭔 문제라도 있나, 기수 친구?”


  “무슨 일이야?”




  한참 동안이나 함정 장치 해제 스위치를 보던 기수가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그들 중 한명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스페란자였다. 그 시선을 받은 그녀는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서 스위치를 관찰하였다.




  “누군가 이곳을 지나갔다. 그리고 망가뜨렸다.”


  “뭐?”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보였지만, 그 스위치는 분명히 고장 난 상태였다. 그녀는 그것이 무슨 힘에 의해 망가진 것인지 알아내려고 손을 가까이 가져댄 후에 눈을 감아 정신을 집중하였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감을 철저하게 숨기는 자가 미궁 안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왔다. ‘누가 이런 짓을? 그리고 왜?’라는 질문들이 그들의 머리를 가득 메웠지만, 그 어떠한 것도 알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저 길은 이런 식으로…….”




  포티스가 말을 하며 돌은 던졌다. 그러자 함정에 장착된 창이 한쪽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창이 나오니 말이야.”


  “흠……. 그러면 다른 길로 가죠.”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여기에 다른 길이 어디에…….”




  그가 따지는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기수는 바로 몸을 틀었다. 그 바로 앞에는 벽이 있었기 때문에 길이 아닌 듯 보였다.




  “여기 그림 보이시죠?”


  “그래 그건 아주 잘 보이네.”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도형도 그려지지 않았지요. 한 마디로 이 그림은 여분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지도에 따르면…….”




  기수는 손을 곧장 뻗었다. 벽에 막힐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손은 그대로 벽을 뚫고 통과해 버렸다. 아니 애당초 벽이라고 생각된 그곳은 사실상 통로였고, 겉에 보이는 것은 철저한 위장이었다.




  “아무런 마력도 감지되지 않는다.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길이 우리 바로 옆에 있었다니. 이 무슨!”




  스페란자까지도 그 사실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력에 예민한 다크 엘프이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생각에는 이건 마법 같은 힘으로 만든 게 아닐 것 같네요. 그림에 따르면…, 이 미궁을 만든 존재는 뭔가 과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겁니다.”


  “과학은 뭔가?”


  “…음, 기술과 관련 깊다고만 알아두세요. 지금은 제 2 중심부로 가는 것부터 서두르죠.”




  기수가 제일 먼저 그 벽처럼 보이는 곳을 통과하였다. 그 안은 가히 더 복잡한 미로였지만, 이미 길을 빠삭하게 외우고 있는 기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길은 두 번째 구역에 포함된 곳인지라, 함정도 없고 몬스터들도 없는 아주 편한 곳이었다.




  “여기는 잘못 빠지는 순간 입구로 돌아가 버리니 조심하세요. 저를 아주 제대로 따라 오셔야 해요. 그리고 아무르.”


  “응?”


  “벽에 손대면 안 돼.”




  가볍게 미소를 날려 주면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무르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벽을 향해 뻗어가던 자신의 손을 도로 뺐다.


  이리저리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또다시 벽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건 벽이 아니라 입구였고, 기수가 그걸 지나치자 그 뒤를 다른 일행이 따랐다.


  그들은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섰다. 지난번에 왔던 공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곳이었다. 정말 똑같은 점은 딱 하나 있었는데, 엄청난 몬스터들의 뼈들이 그 장소에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도 그런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거야? 밟으면 화살이 막 튀어나오는.”


  “흠…, 차라리 그게 더 귀엽고 쉬울 것 같아.”


  “에?”




  기수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그 넓은 공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바닥에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피해 다니기만 하면 문제가 없었기에 더 쉬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엔 함정 해제 장치가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안 좋은 점은…….”


  “안 좋은 점은?”




  베리가 채 묻기도 전에, 기수가 갑자기 중심부를 향해 돌진하였다. 아무도 그를 말릴 수가 없었고, 또 뒤쫓아 갈 수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기수가 그 안으로 발을 옮기자마자 함정장치가 가동되어 무수히 많은 화살, 창, 칼들이 공중을 날아 다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때때로 지면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오른다거나, 화염이 치솟는다거나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장치들도 가동되었다.




  “기, 기수 형!”


  “기수야!”




  위험천만한 지역에 단신으로, 그것도 아무런 무장도 없이 뛰어들다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기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무서운 무기들이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있었으나, 중심부로 향하는 길만큼은 확실히 존재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모조리 머리에서 정리하여 빠르게 안전한 길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이 있다면, 중심부까지 다가가는 것은 무리가 아닐 터였다.




  ‘왼쪽, 오른쪽으로 두 걸음, 다시 왼쪽.’




  시시각각 그 위치가 변하는 모든 무기들의 위치를 그는 파악하고 있었다. 지면에 장착된 함정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그의 절대 암기 능력과 슈퍼컴퓨터 저리 가라할 정도의 연산 능력, 그리고 유연하면서도 빠른 몸만 있다면 돌파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스페란자 씨!”




  거기에 더해 스페란자의 조력이 더해진다면, 중심부로 돌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한 일일 터. 기수가 큰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페란자는 가벼운 보호 마법을 그 공간의 중심부에 걸었다.


  그 마법은 마치 둥근 방패처럼 생겼는데, 지면에서 약 1m 정도 떨어진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기수는 맹렬하게 달리다가 가볍게 점프하여, 그것 위에 올라섰다. 그의 무게로 인하여 마법의 방패는 지면으로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화염 줄기가 그곳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만약 마법이 아니었다면 기수는 통구이가 되었을 터였다.


  마치 용암이 분출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투명한 마법의 방패는 기수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고, 용암은 바로 그 방패를 천장 위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천장에 거의 다다르자, 기수는 손을 뻗어서 그곳에 위치한 함정 해제 장치를 가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화염 기둥은 서서히 사그라졌고,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모든 무기들도 그 자취를 순식간에 감추었다.




  “안 좋은 점은 함정 해제 장치가 천장에 붙어 있다는 사실 정도?




  위험한 사선을 넘나든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유 만만한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사실상 그의 옷깃하나 상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너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네가 체조부에 있었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죄송해요, 누나. 하지만 이거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루리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를 한껏 째려보며, 이마에 꿀밤을 한 대 놔주었고,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에게 사과하였다.




  “저기 형. 지도에 이런 식으로 함정 해제하라고 되어 있었어?”


  “설마. 거기에 글은 많이 써져 있었는데, 우리는 아무도 그걸 해석하지 못했잖아?”


  “그, 그러면 어떻게 위험천만한 곳으로 뛰어들 생각을 한 거야?”


  “뭐라고 할까나. 함정 위치하고 무기가 튀어나오는 장소는 모두 다 표시되어 있었고, 거기다가 해제 장치의 위치까지 표현되어 있었으니까. 애당초 그런 식으로 해제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을까?”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모습에 다들 할 말을 잊었다. 어쨌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들은 안전하게 그 공간을 지나쳐서 마침내 원하는 장소, 즉 제 2 중심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건. 이런 건 도대체 무슨 수로 만든 거야? 솜씨 좋은 드워프라고 해도 이런 장치는 만들 수 없네!”




  기술과 장인의 종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드워프 일족의 한 명인 포티스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말하였다. 그의 눈앞에 놓인 봉인 장치는 용족이 만들었다고도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장치였다.




  “이거 용족이 만든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림에 그걸 용족이 만들었다고 표현한 부분은 없었으니 그럴 지도. 단지 용족이 이 장치를 이용한 것뿐인 듯싶네.”




  기수가 천천히 장치에 다가갔다.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 전체 장치의 크기를 보자면 대략 성인 인간의 두 배 정도 밖에 안 되는 물건이었는데, 금속제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형상학적으로 보자면 아주 예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흐린 빛을 뿜어내는 불투명한 공 형태의 에너지 덩어리가 존재했다.




  “아마도 저것이 핵심 장치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수 친구, 옆으로 비키게!”




  성질 급한 포티스가, 손바닥에 침을 한번 퉤 하고 뱉은 뒤에, 나무나 베는 도끼를 움켜잡더니 그대로 던질 태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기수가 간신히 옆으로 피하자마자 포티스의 손을 떠난 도끼가 그 장치의 중심부에 위치한 에너지 덩어리에 작렬하였다.




  “다, 다들 튀어요!”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삼천리였다. 기수의 외침을 듣자마자 그들은 급히 뛰어, 최대한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잠시 후 불안정해진 에너지 덩어리가 폭주하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폭발과 함께 완전히 소멸하였다.




  “저기 포티스 씨. 이런 건 좀 다들 안전한 곳에 간 다음에 하면 되잖아요!”


  “네 놈처럼 무모한 짓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고 하는 겐가? 하하하하.”


  “저기요.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르거든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면서 그들은 벽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전에 봉인 장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제 녀석은 자유로워진 것이다.




  “베리베리. 이제 어쩔 거야?”


  “베리베리라고 부르지 말라고, 누나!”




  아무르의 말에 베리가 버럭 화를 내었다.




  “뭐 호칭이야 어쨌든 좋잖아.”


  “좋지 않아! 쳇.”




  삐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렇게 잠시 일 분 동안 침묵을 지킨 다음,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들 모두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그 방법대로 하실래요?”




  엄숙하지만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는 그들에게 입을 열어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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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다음이 이제 이번 이야기의 마지막 결말 파트입니다.


 


그런데 개강이네. 이제.... 연재 주기가 더 늘어질 듯.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