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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Seven Stars

2010.08.23 20:56

乾天HaNeuL 조회 수:123 추천:2

extra_vars1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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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뢰


 


 


  상당히 넓은 도로로 평소에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한 길이 있었다. 군데군데에 오래된 핏자국과 새로 생긴 핏자국들이, 이 도로에서 발생한 일을 묵묵하게 증언해주었다.




  “흐음…….”




  베리는 잠시 쭈그리고 앉아서 그 핏자국들을 관찰해 보았다. 시체들이 놓여 있었을 법한 장소를 추측해 보았고, 그들이 어떠한 식으로 싸움을 하였으며, 또 결국에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상상해 보았다.




  “오크 무리한테 습격을 받은 것 같네요.”




  그의 추론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리더인 베리를 바라보았다. 다들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포티스가 자신의 희고도 긴 수염을 매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요새 몬스터 습격이 너무 잦아지는 거 같단 말이야. 이거 이러다가 우리도 중간에 습격을 당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태산이구먼.”


  “하하하, 영감님도 뭔 걱정이 그리 많습니까? 우리에게는 일당백의 사람이 무려 셋이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무능력자도 하나 껴있지“




  베리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 아무르였다. 그녀의 핀잔에 베리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내가 이 파티의 리더인데.’라며 중얼거렸다.




  “물론 이번에 우리와 함께 다니게 된 새로운 일행님께서는 누구 씨하고는 다르게 자기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해주는데 말이야. 하여간 너는 어른처럼 생겼고, 어른 같이 행동하려고 하는데, 아직 열네 살 밖에 안 된 애란 말이야.”


  “저기요, 누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 둘의 말싸움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을 보던 기수는 말없이 웃기만 할뿐이었다. 사실 그 둘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잘 아는 두 사람이 생각났다. 그들도 이 사람들처럼 매일같이 티격티격 댔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 요새 들어서는 사랑스런 눈길을 주고받는 것 같기도 했었다. 다만 자신의 친구들과 새롭게 알게 된 이 두 사람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싸움의 승자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르 누나의 결정적인 비밀 몇 가지를 내 이 세상에 공개하고 말겠어!”


  “야, 야! 그건 좀 봐줘라!”




  그가 아는 사람들의 경우, 승자는 언제나 여자 쪽이었지만, 이 사람들 경우에는 승자가 언제나 남자 쪽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약점을 제대로 잡힌 것 같았다.




  “저기, 그마하고 갈 기를 가는 것도 괘차을 거 가튼데.”




  대충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기수가 나섰다. 아직 말이 서툴지만,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회화를 할 수 있는 그였다. 아니 사실 만난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고, 또 해당 언어를 접한 지 역시 고작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그가, 이 정도의 언어 소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알겠어, 형.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렇게 해야겠지.”


  “뭐, 나도 알겠어.”


  “하하.”




  일주일 사이에 그들 간의 관계도 상당히 발전했다. 베리와 아무르하고는 말까지 놓을 수 있었고, 또 베리타스는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아무르는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좀 부끄러운 지, 호칭은 언제나 생략한 채였다.




  “그런데 베리베리.”


  “영감님! 전 베리타스지, 베리베리가 아니라니까요!”


  “나도 영감이 아니네!”


  “가끔가다가 그런 영감님 같은 말투를 사용하니까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생긴 것도 꼭 영감처럼 생겼잖아요.”


  “자네 지금, 위대한 드워프 종족을 우습게 보는 건가? 우리들은 생긴 게 원래 이렇다고! 게다가 나는 아직 한창 때의 나이야. 네 놈 나이랑 비슷한 연령이란 말이네! 그리고 아직 장가도 안 간 나한테, 무슨 손자 내미가 있다고 항상 영감탱이 취급하는 거야!”




  이번에는 싸움의 상대가 바뀌고 말았다. 도대체 이 파티는 왜 이리 말싸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기수가 그들과 같이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알 수가 있었다. 먼저 자신이 있는 지역이 카스티안 대륙의 파탈리아 왕국이라는 곳이라는 점과, 이들이 하는 일이 마을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서 그것을 처리하는 일종의 해결사라는 점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가끔 했던 MMORPG의 퀘스트와 비슷한 개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이 파티에는 가장 큰 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들에게는 돈을 모은다는 개념이 전무했다는 사실이었다.


  팀의 리더 격인 베리는, 열넷밖에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리더로서의 자질을 잘 보여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전투 능력은 제로, 게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숫자에 약해서, 종종 셈이 틀리곤 하여 큰 곤욕을 치룬 적이 많았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일주일 사이에, 여관에 한 번 머물렀던 일이 있었는데, 셈이 틀려서 돈을 더 주고 나와 버리는 일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그걸 하루 뒤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서나 알게 되었었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은 바로 자신보다 바로 한 살 아래인 아무르였다. 그녀 역시 돈에 무관심할 정도의 사람이었다. 간혹 자금 문제를 챙기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먹성이 워낙 좋아서, 그녀의 식비가 엄청나게 지출되는 바람에, 일행은 늘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사람은 바로 포티스였다. 대장장이 일족이라고 불리는 드워프 종족의 일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애용하는 도끼 하나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는 젬병인데다가, 보석 세공 및 모으기가 취미인 자였다. 덕분에 포티스의 허리춤에 매달린 자루 주머니에는 그들이 몇 십 년 간 일 안하고도 먹고 살 정도의 보석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노숙을 하고, 사냥을 해서 밥을 먹는 상태였다.




  “하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기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바로 뒤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스페란자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베리, 아무르, 포티스가 툭하면 말싸움을 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지만, 그녀는 입 밖으로 말을 거의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말을 한다고 쳐도, 필요한 말을 문장도 제대로 구성하지 않은 채 단어 형태로 툭툭 던지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었었다. 성격도 굉장히 차갑고 이성적인 것 같았다.




  ‘흐음, 그러고 보니 왠지 모르게 루리 누나가 생각나네. 좀 비슷한 분위기인 것 같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페란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스페란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아, 아무 거도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하고 비스탄 부위기이 거 가타서.”


  “그래.”




  그걸로 회화가 끝났다.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하고는 친해지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아무튼 난 네 놈이 싫다 이거다! 에잇 성질 머리 하고는. 어른을 존경할 줄 몰라, 이 애송이 녀석아!”


  “아니 존경을 받으려면 존경을 받을만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여간 어른이라고 무조건 존경을 받아야한다는 식의 행동과 생각 패턴은 이미 구시대의 것이에요! 전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




  이야기가 어느새 어른 공경의 문제로까지 넘어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처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지는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지워버린 채, 혈압을 있는 대로 올려가며 설전을 나누는 것에만 몰두한 상태였다.




  “아 맞다.”




  문득 한 가지 것이 생각난 기수가 손뼉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마침 한가하게 강 건너 불구경하던 아무르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꼭 묻고 시픈 게 있어는데, 여기서는 태어나서 바로 한 살이야, 아니면 생일이 지나야 한 살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쿠나.”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자신의 나이는 그대로 열아홉이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시골 동네인데, 여기가 무슨 대륙인지, 또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거야? 게다가 나이세는 기준도 다른 거 같고.”


  “좀 많이 머언 고시라서 그래. 여기하고 와전히 차다된 지역이거든. 그래도 내가 사랐던 고슨 나이 기준이 여기와 가타. 대시인 다른 마으레서는 태어난 지 일 년은 되어야 한 살이라고 해.”


  “흐음, 뭐 나도 못 가본 곳이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다른 마을인가 하는 곳은 참 이상하네. 뱃속에서 일 년 가까이 지내는데 그건 왜 안 쳐 주는 거야? 뱃속의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흠……”




  기수는 그녀의 의혹에 대충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충 납득을 하기는 했는데, 나이 문제에 관해서는 납득이 안 가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이상하다.’라며 혼잣말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물론 그녀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라는 것을 설명해주면, 모든 일이 마무리 될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건너 왔다는 것을 설명해주지 않았었다. 설명을 해주어도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또 괜히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옷도 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입는 옷이야? 어떻게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옷이 다 그렇게 생겼어?”


  “편한 것이 좋아서 그렇지 뭐.”




  기수는 자신의 반팔 티셔츠를 손으로 대충 매만지면서 말하였다. 한 겨울에 반팔인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옷은 바닷가에서 입을 반팔뿐이었다. 다행히 바지는 교복 바지와 여분의 바지가 둘 다 긴 바지였지만 말이다.




  “뭐 나중에 다른 것을 사서 입으면 되겠지. 물론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사야겠지만. 호호호.”




  사실 옷을 사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다만 문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본다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기는 춥지 않아서 다해이야. 반팔밖에 없어서, 추우면 큰일이거든.”


  “여긴 사계절 내내 따뜻한 편이거든.”


  “그럼 눈도 안 내려?”


  “눈? 그 하늘에서 얼음조각이 떨어지는 거?”




  기수의 말에, 갑자기 아무르가 초롱초롱해진 푸른빛의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그 눈동자 안에서 동심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비스해.”


  “그거 본적 있어?”


  “음, 사실 내가 사알던 지여게서는 겨울마다 눈이 펑펑 쏟아져서 이래저래 문제가 많아서.”


  “엄청 북쪽 지역에 살았나 보네. 아무튼 좋겠다. 나는 남쪽 지역 출신이라서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본적이 없거든. 뭐 거기는 겨울 자체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동네였지만 말이야. 그리고 여기 파탈리아도 사계절이 항상 따뜻해서 겨울이 되어도 눈 한 번 안 내리고 말이야.”




  그녀의 말에, 문득 자신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한국으로 건너와서 처음 눈을 보았다고 자신에게 말해 주었었다. 그분의 고향 역시 눈이 전혀 오지 않는, 게다가 겨울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마을로 갑시다!”




  그 둘의 대화를 끊어 놓은 것은, 베리의 격양된 말투였다.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서 씩씩거리며 가쁜 숨을 내몰아 쉬고 있는 그였다. 그는 다른 것은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채 듣기도 전에, 우스꽝스런 걸음으로 앞장서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풉.”




  그것을 본 기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생긴 것은 다 큰 어른이, 변성기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화를 내고, 또 거기다가 어린애처럼 걸어가니 영 이상했던 것이었다.




  “하여간 쟤도 아직 멀었다니까.”




  옆에 있던 아무르도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는 속으로 ‘아직도 챙겨줘야 할 게 많아.’라고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역시 사이가 좋아.”


  “응? 뭐라고 했어?”


  “아무거도.”




  기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바로 앞에서 그 말을 들은 아무르가 뒤를 돌아보면서 다시 물었지만, 기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 내밀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산골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방금 전에 그들이 지나왔던 대로와 근접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상당히 많은 발전을 해온 곳이었지만, 오늘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흠. 역시 몬스터들의 잦은 출몰 때문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구만. 있는 녀석들도 외부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기분 나쁜 놈들뿐이고.”




  포티스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기분 나쁘다는 듯, 한 마디를 했다. 확실히 그가 표현한 대로 마을의 분위기가 형 흉흉했다. 그리고 과거에 왔을 때보다 사람들의 수도 엄청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 민심이 안 좋아질수록 저희 같은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겁니다. 하하하.”




  어느새 기분이 풀린 베리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야기했다. 포티스도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무슨 일로 저희 마을에 오셨습니까?”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자가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데다가, 꽤 좋은 옷을 차려 입을 것을 봐서는 이 마을의 촌장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촌장님! 저희들 기억 안 나세요? 1년 전 쯤에 이곳에 들렸었잖아요.”


  “아, 아하! 베리베리 파티인가 뭔가 하는 해결사 집단 양반들이구만.”




  촌장을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베리였다, 그 촌장 역시도 베리와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났는지, 손가락을 튕기면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저기, 베리베리 파티는 아닌데요. 저희는 그냥 이름이 없는 파티인데…….”


  “풉, 이름이 없긴. 베리베리 파티가 맞잖아. 쿡쿡.”




  뒤에서 듣고 있던 아무르가 웃음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배꼽을 움켜잡고 웃기 시작했다. 베리타스는 그녀를 힐끔 노려 본 다음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튼 자네들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쁘네. 이거 참, 내가 오래 살다 보니 기억력이 안 좋아져서 1년 전에 만난 사람도 기억 못하고 말이야. 아아, 맞아 이런 곳에서 자네들을 대접하면 안 되겠군. 어쨌든 자네들은 우리 마을의 은인이니 말일세. 자, 내 집으로 가세.”


  “고맙습니다, 촌장님.”




  그들은 촌장이 안내해 주는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촌장이 사는 집이었는데, 1년 전과는 달리 꽤 허름해진, 아니 무엇인가의 공격으로 인해서 곳곳이 파이고 망가진 상태였다. 그 집은 큰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2층짜리 가옥이었는데, 지붕까지도 망가진 것을 봐서는 대형 괴물이 습격한 것 같았다.




  “어서들 앉게. 토리아야, 어서 손님들을 위해 차를 내오렴.”


  “예, 할아버님.”




  촌장의 자제, 아니면 며느리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인이 잠시 후 그들을 위해 차를 내놓았다.




  “어서들 들게.”




  그의 말에 따라 그들은 찻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기수도 향기로운 향을 마음껏 뿜어내는 차가 담긴 잔에 손을 내밀어 들었다. 그것은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데다가 은빛의 세공이 가해진 아주 품격이 있는 찻잔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찻물도 연한 푸른빛을 띠는 지라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흐음…….”




  일단 달콤하면서도 매혹적인 향을 음미한 다음, 한 모금 입안으로 넘겨보았다. 담백하면서도 달콤하며 약간의 신맛이 나는 그런 차였다.




  “그런데 지난번에 왔을 때는 네 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거 처음 보는 사람이 있군 그래. 새로운 동료인가 보네?”


  “예, 며칠 전에 새로 만난 기수라는 분입니다.”


  “자네도 강한가?”




  베리의 설명을 들은 촌장이, 이번에는 기수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일종의 해결사, 더 알기 쉽게 말하면 돈으로 움직이는 병사인 용병과 다름없는 집단과 함께하는 지라, 강함의 여부부터 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글쎄요. 별로 그렇게 강하지는 않습니다. 야간의 체술을 익혔을 뿐입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어눌한 말로 대답하면 뭔가 의구심을 살 것 같았기 때문에, 최대한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중간에 실수를 하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터였다.




  “그나저나 머리와 눈 색이 원래 그런가?”


  “예. 다 원래 거믄색입니다. 피부도 원래 갈색이구요.”




  “흠, 그래? 하긴 뭐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내가 수 백 년 정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사람은 거의 본적이 없어서 말이네. 최근에 한 사람을 또 보기는 했으니, 뭐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




  촌장의 말 중, 수 백 년이라는 단어가 그의 정신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저기 시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세를 무러봐도 괜찮겠습니까?”


  “음? 내 나이 말인가?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의 나이는 알아서 무엇 하게. 뭐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올해 내 나이가…….”




  그는 기수의 질문에 자신의 나이를 세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에 숫자를 까먹어서, 결국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여인을 불러서 자신의 나이가 몇인지 물었다. 그 여인도 한참 동안이나 나이를 센 뒤 촌장에게 알려 주었다.




  “하하하, 오늘 보니 내가 정말 오래 살긴 살았나 보네. 올해로 562세가 넘었으니 말일세. 이런, 이런. 이렇게 늙은 몸은 빨리 가줘야 여러모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데 말이네. 껄껄껄.”


  “…….”




  인간이 오백세도 넘게 살았다는 말에 기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겉으로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기 위해서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뭐 사는 곳이 다르니까, 그렇게 오래 살 수도 있겠지.’




  기수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니 촌장 양반. 어떻게 그리 나이를 많이 먹었수? 생긴 것은 나보다 더 젊어 보이는데. 이거 참 비결이 뭐요?”


  “자네는 이백도 안 되었다고 작년에 그랬던 것 같은데. 하긴 드워프들의 나이도 고작 오백에서 육백이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런데 나도 왕년에는 꽤 날라 다니던 사람이었네. 만약 계속 열심히 수련을 했다면 이렇게 늙어서 못 쓰는 몸도 안 되었을 테고, 저런 망할 놈의 괴물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을 테지.”




  촌장의 말이 점점 격양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최근에 있었던 일로 넘어가 있었는데, 몬스터의 습격에 관한 일이었다.




  “저기 대로에 있었던 핏자국들은 오면서 봤겠군.”


  “예, 촌장님. 최근에 몬스터 습격 사건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들도 요새 의뢰들은 다 몬스터 퇴치뿐입니다. 지난번에는 고블린 이백 마리를 처치하는 의뢰도 있었고, 어제만 해도 오크족 퇴치 일도 있었고요."




  베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옛 의뢰들을 촌장에게 들려주었다. 촌장도 상당히 굳은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찻잔을 도로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오크니 고블린이니 하는 잡것들은 우리 마을에서도 자체적으로 퇴치할 수 있네. 우리 마을이 워낙 상권이 발달한데다가, 이 차는 우리 지역에서만 나는 특산물이니, 왕궁에서도 수비대를 파견하여 지켜줄 정도였으니 말일세. 그리고 자체적으로 수비대를 조직하여서 도둑이나 강도, 그리고 산적 떼를 토벌하기도 했었고, 그 망할 몬스터들도 자체 수비대로도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었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녀석들의 출몰 수가 많아지더니 왕궁에서 파견된 군사들이 수도로 돌아갔네.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했지. 그러더니 이틀 전에 그 망할 소머리를 한 놈들이 나타난 걸세.”


  “…….”




  촌장의 말이 잠시 멈추자 고요함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려고 하지를 않자,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그들 모두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위협이 되는 사실이라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저기 촌장님. 소머리를 한 놈들이라 하시면, 혹시 그 소머리를 한 놈들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머리는 소처럼 생겼고,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나머지는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키는 꼭 이 집 크기 정도 되는…….”


  “그 놈일세.”


  “…….”




  반신반의하면서 물어보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고야 말았다. 순간 현기증이 난 베리가 자신의 이마를 움켜잡으면서, 조금 식은 차를 한숨에 들이켰다. 마침 부엌에서 나오던 여인이 그것을 보고는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저기 그렇다면 미노타우르스를 이야기 하시는 건가요? 미궁에 산다는…….”




  베리의 설명을 들은 기수가 입을 열어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미노타우르스라는 괴수의 이름이 튀어 나오자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다.




  “기수 자네는 겁도 없구만 그래. 소머리를 달은 놈을 이름으로 불러주니 말이네! 하하하, 뭐 사내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생긴 것만 계집처럼 생기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야. 사실, 네 놈이랑 저 애송이랑은 생김새부터가 정 반대가 된 것 같아서 참 안타깝다네. 하하하.”




  포티스가 웃으면서 순간 침울해진 분위기를 다시 살렸다.




  “포악한 그 놈을 부르면 갑자기 나타나서 살을 뜯어먹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다 미신일세. 그 놈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은 거의 다가 잡설에 불과하니 말이야.”




  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름이 잡힌 얼굴은 침울함과 걱정이 산적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차를 향해 있는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기 혹시 저희들에게 그 놈의 처치를 의뢰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지난번 촌장님 의뢰도 너무 힘들었어요. 덕분에 마을까지 밀려서 괜히 마을만 쑥대밭이 되었잖아요. 오우거 처리에 이어서 이번에는 미노, 아니 그 소머리 처리라니,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베리에 이어서 아무르도 입을 내밀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설마 아무리 촌장님이라도 우리에게 그런 의뢰를 하시지는 않겠지요. 하하하. 그 소머리를 한 놈들이 얼마나 강한데요. 그 놈은 소드 마스터의 검도 튕겨내고, 5써클의 마법도 박살내는 괴물 중의 괴물인데요.”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노타우르스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는 괴물이었다. 어떤 유명한 검사나 법사가 당하고 나면, 소문은 더욱 과대 포장이 되어서 퍼지게 되었고, 덕분에 이제는 그 이름조차 언급하기를 꺼려하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베리타스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마치 사시나무 떨 듯 떠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녀석에 대한 공포심으로 억눌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네 안색이 매우 창백하군.”


  “예?”




  촌장님의 말에 베리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면서 아무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길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렸을 때, 그 놈한테 좀 당한 기억이 있어서,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그건 좀 곤란하네만. 나는 자네들에게 그 놈의 퇴치를 의뢰하고 싶거든.”


  “…….”




  예상이 어느 정도 빗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김없이 빗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베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른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무르는 고개를 내저었고, 포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다만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은 스페란자와 기수뿐이었다.




  “스페란자 씨는 이해가 되는데, 기수 형은 어째 괜찮은가 봐? 아까 전에 막 이름도 부르는 걸 보니.”


  “아니, 별로 만나본 적이 없어서. 사실 소문만 무성할 뿐이지, 실제적으로 도우미 되는 내용은 하나도 없짢아. 결국 미노타우르스를 퇴치하는 의뢰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용한 저보를 더 습득한 다으메 결정해도 될 것 같아.”




  기수는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말해 주었다. 그가 중간에 녀석의 이름을 또다시 언급하는 바람에, 베리의 안색이 더욱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지만, 내용의 취지를 이해한 베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느 정도 납득은 하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결의에 가득 찬 느낌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대신에 이걸 어떻게 하면 피해갈 수 있을 지를 고민하는 것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흐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의뢰를 받아들일 수 없을…….”




  그는 마침내 고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촌장이 중간에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꺼냈다.




  “이번 의뢰비는 금화 500개일세.”


  “하겠습니다!”




  하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베리는 순식간에 의견을 바꾸어 하겠다고 말하였다. 단지 금화 100개에 눈이 멀어서 말이다.




  “저기 촌장님 진짜세요? 금화 500개라니요?”


  “어이어이, 이보쇼. 그건 정말 엄청난 액수잖아. 이 마을에 그 정도까지 지불 능력이 있었단 말이오?”




  아무르와 포티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하였다.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는 사람은 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스페란자와 이 세계의 금전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기수뿐이었다.




  “금화 500개면…….”




  기수는 그것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며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금화 500개면 도시의 귀족들의 평균 한 달 수입의 반절 정도이지 않나요? 그건 일반 사람들이 평생을 걸려야 간신히 만져볼 수 있을까 말까할 정도의 액수잖아요. 그리고 용병을 고용한다고 해도, 100명 이상은 모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인원인데…….”




  아무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의뢰비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고, 심장은 마구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최근에 처리했던 일들 중 가장 높은 의뢰비를 받은 것이 고블린 퇴치였다. 당시 열 마리 퇴치에 금화 10개라는 말도 안 되는 의뢰비 책정에 두말 할 것 없이 승낙했다가, 스무 배도 넘는 고블린들을 퇴치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사실 그것이 고작 일주일 전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이번에도 뭔가 구린내가 나는 의뢰였다. 미노타우르스가 아무리 강한 괴물이었고, 또 어떻게 처리를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인 것만큼은 확실했지만, 금화 500개라는 말도 안 되는 의뢰비를 내밀 정도의 의뢰는 아니었다.




  “사실 더욱 많은 금액을 책정해주고 싶지만, 우리 마을에서 현재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정도가 한계일세. 아니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놈들 때문에 피해를 더 입어서 지불 능력이 더욱더 떨어지고 말겠지.”


  “아니 그것보다, 차라리 인원을 많이 투입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저희는 고작 다섯 명이고, 그 중에서 제대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에요.”


  “저 새로운 친구가 약간의 체술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전혀 싸움을 못하는 겐가?”


  “예? 아니 그건…….”




  촌장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힌 아무르는 기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싸움에 나선 것도 단 한 번, 고블린 하나가 돌진하며 베리를 향해 도끼를 날렸던 바로 그 순간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무거운 짐들만 계속 들고 다닐 뿐, 싸움에 전혀 나서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럴 만한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기수라고 했던가? 자네의 실력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나 되는 겐가?”


  “…….”




  아무르가 대답하지 못하자, 촌장은 직접 기수에게 물었다. 기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면서 망설였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낯선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엄청난 술 냄새를 풍기면서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의 오른손에는 커다란 맥주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에우로테! 뭐하는 짓인 게냐! 손님이 있는데, 냉큼 여기서 나가거라!”




  촌장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를 쫓아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가기는커녕,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안으로 비틀 거리면서 들어왔다. 눈도 반쯤 돌아가 있었고, 표정도 풀린 상태에다가,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봐서는 상당히 많이 취한 듯 보였다.




  “하라부지가 뭔데 마을 재사안 다 터러다가 이딴 외부 놈들에게 준단 말입니까? 딸꾹.”




  전형적인 술 취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일부 발음 불명확하였고,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도 불만이 가득 담긴 시비조였다.




  “게에다가! 이런 덜 떨어지게 계에집처럼 생긴 녀석이 포함된 용벼영 따위 써서 뭐에 쓰게요? 그냥! 그 돈 가지고 도시로 떠나면 마음 편하알 거 아뉩니까. 큭큭큭. 하여간 하라부지도, 이런 보자알 것 없는 마을 따위에 뭐에 그리 신경을 쓰시는지.”


  “네 이 놈! 네 녀석이 보자보자 하니까 할 말 못할 말 가리지를 못하는 게로구나. 내가 네 녀석을 잘못 키웠구나. 허허, 이거 무덤에서 잠들어 있는 네 놈 아비와 어미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겠다!”




  에우로테라는 남자의 말에 촌장은 혀를 내차면서 말하였다. 대충 분위기를 봐서는 가족인 것 같았고, 아무래도 손자뻘이나 증손자 정도로 되어 보이는 사내인 듯싶었다.




  “그러엄 뭐합니까. 다 둑지 않습니까. 어제는 옆집의 벤 녀석이 죽구, 그제는 하레멜이 죽구, 또 그 전에는, 그 전에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슬픔이 전해졌다. 그는 흐느끼면서 더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분노와 슬픔,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책감이 섞여 나오면서, 뜨거운 눈물이 그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언데! 왜 이딴 놈들에게 피땀이 묻은 도온을 주가면서 우리가 여기에 있어야 하느냐 이겁니다. 차라리 다 잊구 수도로 가자구요!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왕궁의 써근 놈들이 돈이나 뜯으러 오고, 또 괴물 놈들이 오면 재앱싸게 튈 거 아닙니까? 다른 마을 놈들도 입맛만 다시면서 또 뜰거구여. 세상이 다 이 모양 이 꼴인데, 왜 하라부지만, 그렇게 여기를 고집하시냐 이겁니다. 다른 어르신들도 왜 그리 괴상망칙한 이 썩어 문드러질 마을에 집착하시냐구요. 이해를 못하겠어. 정말. 으아아! 정말!”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쳤다. 손을 보호하는 건틀릿까지 착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무로 만들어진 식탁에는 흠집이 생기고 말았다.




  “쯧쯧, 아직도 네가 철이 덜 들었구나. 조상들이 묻어 잠든 이 땅을, 조상들이 우리를 위해 보호해준 이 땅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느냐?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피땀을 흘려가면서 지키던 땅을, 후손인 우리가 과연 버릴 수가 있느냐 그거다! 우리가 이 땅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천하의 불효막심한 자손이 된다는 거다. 네 놈이 어찌 그걸 아직도 모르는게냐!”




  에우로테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원칙, 즉 땅을 버릴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저버릴 수 없었단 촌장은, 피가 맺힌 음성으로 그를 타일렀다.




  “그러믄 하다모테, 이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있는 파아티인지 용병나부랭인지 한테는 맡기지 마라고요!”




  어느새 핏대가 잔뜩 돋은 눈으로 기수를 바라보고 있는 에우로테였다. 그는 한참 동안 기수를 노려보았는데, 기수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자신을 응시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그대로 기수에게 돌진했다.




  “어, 어이!”


  “위험하네!”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와 함께 엄청난 소리가 터졌다. 그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기수가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는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기수는 다행히도 무사하였다. 에우로테가 자신을 덮치기 직전에 식탁 위로 뛰어 올라서 봉변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네에 놈!”




  넘어진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는 에우로테는, 이미 이성의 끈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마치 한 마리의 야수를 연상시켰다.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고, 불끈 움켜 준 두 주먹은, 연약한 여성을 연상시키는 기수를 금방이라도 박살낼 것처럼 보였다.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로 싸우고 싶지는 않네요.”


  “뭐어야?”




  기수의 침착한 음성이 오히려 그를 자극한 것 같았다. 그 남자는 포티스의 제지를 뿌리치고는―사실 포티스의 완력은 일행이 인정할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에, 그것을 뿌리친 에우로테의 말도 안 되는 괴력에 일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기수를 향해 커다란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비틀거려서야 어디 쓰게 습니까?




  기수는 가볍게 주먹을 피하면서 공중에서 그대로 뒤로 한 바퀴 돌아 에우로테의 등 뒤로 사뿐하게 착지하였다.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아…….”


  “저, 저 녀석.”




  다들―물론 스페란자는 제외하고―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아무르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수의 날렵한 모습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하였다.




  “그리고 뒤가 비었네요.”




  땅에 착지하자마자 몸을 살짝 틀더니, 바로 옆에 있는 벽에 왼발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무릎이 굽혀짐과 동시에 그대로 강하게 내차면서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어느새 머리까지 올라온 오른발을 망설임 없이 아래로 휘둘러, 정확하게 뒷목을 강타하였다.




  “컥!”




  둔탁한 소리와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그 남자는 쓰러졌다. 그의 입에는 거품이 물려 있었는데, 가뜩이나 돌아간 눈이, 이제는 흰자만 보일 정도로 더 돌아갔다.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숨은 쉬는 것을 봐서는 기절한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혹시 신발에 뭔가 장치라도 되어 있는 거 아니야?”


  “거구를 한 방에 기절시키다니, 녀석 역시 만만히 볼 놈은 아니었군.”


  “형, 도대체 이게…….”




  주방에서 기웃거리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토리아라는 여성이 급히 뛰어 나와서 에우로테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사이,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기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사자인 기수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마음이 붕 떠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어 있었다.




  “무기 같은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에우로테를 단 한 방에 기절시키다니, 자네의 실력을 알만하이. 자네, 사람들의 급소를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군. 게다가 방금 전 공중에서의 발놀림, 체중이 적게 나가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빠른 회전력을 사용했어. 허허, 여전히 그런 체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니 가히 놀랍구먼.”


  “에? 촌장님 그게 보이셨어요? 그건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못하는 것들인데. 사실, 이 녀석은 그런 초보적인 것도 못 봤을 거예요.”




  아무르는 옆에 앉아 있는 베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베리타스는 “난 또 왜 끄집어 대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툴툴 거렸지만, 그녀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 말하지 않았나. 나도 한 때는 꽤 잘 나갔던 사람이었다고. 괜히 부상을 입어서 마을에 계속 눌러 있으면서 지내지 않았다면, 여전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어쩌겠나? 이것도 다 사람이 사는 인생행로 중에 일어나는 것을. 끌끌. 그런데 기수 군, 자네는 어디서 그런 체술을 배웠나? 내가 알기로 요새 젊은 녀석들은 젊음을 유지하는 것에만 정신이 급급해서, 단지 기 수련만을 하려고 아등바등 거리거나, 아니면 힘에만 의존해서 저 멍청한 것 마냥 괜히 근육만 키우는데 말이야.”




  촌장은 주름지고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기절해 있는 에우로테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마치 중세의 프랑스 기사들처럼 판갑옷으로 중무장한 상태의 에우로테였기에, 실제로 근육질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전의 가격과 더불어서 대략적인 체구로 봤을 때는 촌장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촌장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이유 자체도 없었다. 일단 그 사람들은 한 마을에 같이 사니까.




  “전 그다지 체수를 배운 것이 아닙니다. 유연성을 좀 더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후련을 했을 뿐이죠. 그리고 나머지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서 늘은 것들뿐입니다.”




  기수는 망가진 의자 대신, 다른 의자에 앉으면서 말하였다. 그의 바로 옆에는 탁자에 엎어져 기절해 있는 에우로테가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토리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별달리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많이 풀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허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많이 있나 보군. 하긴 독특한 방식으로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그 방법에 관해서 비밀을 지키는 경우가 많이 있네만. 그리고 사실 지금 그런 것은 별달리 중요하지 않네.”




  촌장님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네들이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니 말일세. 일단 저 바보 같은 녀석도 자네들의 강함을 알았을 것이니 더는 말썽을 부리지 않을 거네. 흠……. 그래, 자네들에게는 서로가 의논을 나누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그러면 일단 손님방에 짐을 풀어 놓고 상의들 하게나. 토리아야, 저 분들을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거라.”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행은 일제히 일어나서, 토리아가 안내해주는 방으로 향했다.


  그 방은 1층 로비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는데, 집에 있는 방들 중에서 가장 큰 방인 것 같았다. 일단 침대가 두 개나 있었고, 바닥에도 여럿이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여섯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탁자도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안내해준 토리아가 인사를 하면서 문을 닫자, 일행은 각자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금화 500개에요. 아무르 누나가 말한 것처럼 웬만한 귀족들의 평균 한 달 수입의 반이에요, 반! 이 정도면 우리가 1년 동안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라고요! 이런 기회를 우리가 또 언제 얻을 수 있겠어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일행의 리더인 베리였다. 처음에는 위험성 때문에 거절하려던 그가, 돈에 완전히 환장한 사람처럼―실제로 환장했지만―돈으로 일행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송이. 지금 미노타우르스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겠나? 너는 전혀 싸우지 못하니 전력 외이고, 그렇다고 이제 만난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사람에게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하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아니 애당초, 우리는 여행을 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지 이렇게 목숨 거는 일을 처리하려고 만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냥 이 마을은 안 되었지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주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네.”


  “나도 동감이야. 포티스 씨의 말마따나 우리가 목숨 걸고 돈을 벌 이유는 없잖아? 우리는 단지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의뢰를 해결하는 것뿐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혹시 너 일부러 우리들을 꽤서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누나의 식비 덕택에 항상 돈이 모자란 거 알잖아.”




  그녀의 말에 베리가 일침을 놓았다. 그러자 아무르는 찍 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물론 말만 더 하지 않는 것이지, 속으로는 ‘두고 보자. 두들겨 패주겠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포티스 씨. 포티스 씨의 완력이라면 미노타우르스도 제압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사실 포티스 씨의 괴력은 정말 엄청나잖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무게의 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또 아무르 누나도 엄청난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고, 그것만으로 안 된다면 검기를 개방해버리면 그만이잖아요. 물론 돈이 엄청 많이 깨질 게 분명하지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미노타우르스와 그렇게도 싸우러 가고 싶은 것인지, 확실히 그는 지금 돈에 미쳐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가뜩이나 타오르는 붉은 눈빛이, 더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보게 기수 친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아무래도 돈에 정신 나간 저 망할 애송이 녀석의 이야기를 더 들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저는 단지 미노타우르스가 미궁에 사는 소머리를 한 거인이라는 사실과 평소에는 인간의 무기를 사용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그 뿔을 사용한다는 것 외에는 모릅니다.”


  “자네 정말 녀석에 대해 들어본 것이 거의 없나 보군. 그렇게 이름을 계속 불러대니 말이야. 그런데 그 놈의 이름을 들어도, 트라우마인지 뭔지 모르는 것에 걸렸다고 하는 저 애송이 자식은 그냥 여전히 들뜬 상태로 돈, 돈, 돈 해대고 있으니. 완전 정신이 나갔어, 완전히 갔어, 가.”




  포티스는 혀를 내두르면서 베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제까지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은 스페란자를 설득 중인 것 같았다. 연신 팔을 휘둘러가면서 설명을 하고는 있었지만, 스페란자는 다크 엘프, 즉 돈으로 유혹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토라진 상태로 한쪽으로 몸을 돌려버린 아무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에 일말의 변화도 없자, 베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엉성한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학을 하는구먼. 쯧쯧, 겉은 다 큰 놈 같은데, 속은 어린 애니. 하긴 이제 열 넷의 젖비린내 풀풀 풍기는 애송이에 불과하다만. 아무튼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이 말도 안 되는 의뢰, 받아들일 텐가?”




  그의 질문에 기수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지 일주일, 이들과 함께 다니는 이유는 이 세계에 관해서 배우기 위해서였고, 또한 잘 되면 자신의 일행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다. 꽤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한 여행을 하면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따라서 그의 머리에는 ‘죽을 확률이 높은 의뢰를 받아들일 이유가 뭐지? 게다가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혹시, 미노타우르스에 대해 제가 더 알아야할 저보라도 있나요?”


  “정보? 그런 건 나도 몰라. 나도 이제까지 그 소머리를 한 괴물 녀석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물론 간혹 광산을 개발하다 보면, 괴물 자식이 튀어나온다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우리 동료들이 그냥 처리했다고는 하더군. 어쨌든 그 녀석은 오우거처럼 재생력이 좋은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포티스의 말에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총 동원해 가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는데,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가장 필요한 정보는, 왜 이 세계에서 미노타우르스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두려움을 자아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촌장이 단지 지어낸 이야기들의 전승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 정도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제가 살았던 곳에서는 미노타우르스는 그렇게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지역은 비저상적으로 생가될 저도로 두려워하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드워프들은 녀석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거든. 물론 나야 만난 적도 없고,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데다가, 이렇게 인간들의 마을을 여행하고 있으니 이름 자체를 아예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말이네. 아무튼 인간들은 놈을 너무 두려워하고 있어. 마치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 마냥. 녀석이 드래곤만큼 강하지는 않을 텐데.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그들의 대화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난입한 베리 때문에 끊기고 말았다. 그녀들을 설득하는데 진절머리가 난 베리가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제가 파티의 리더이니까, 제가 결정할 겁니다. 이번 의뢰 받아들일 겁니다. 더는 두말 하지 마세요.”


  “애송이 녀석이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너는 싸우지도 않을 거잖아. 단지 매번 전략회의를 주재한답시고, 말만 있는 대로 늘어놓지 실상 도움이 되지 않잖아. 애당초 몬스터 한 마리와 싸우는데 전략이 필요하기나 한 거냐?”




  포티스는 목과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그를 힐책했다. 하지만 베리는 전혀 물러서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번에 제가 뭔 일을 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한다면 멀리 떨어져서 구경이나 하겠죠.”


  “그렇게까지 그 놈의 돈을 벌고 싶냐?”


  “포티스 영감님도 보석 모으는 말도 안 되는 취미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원석을 모아서 보석을 세공하는 취미를 가진 것이지, 보석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게 아니다. 그리고 그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지만, 애송이 네 녀석의 지금 발언은 우리 일행 모두의 목숨을 위협하는 거라고. 그리고 보라고! 기수, 저 친구는 우리와 함께 다닌 지 고작 일주일 밖에 안 된, 한 마디로 우리 일행이지만, 우리 파티는 아니라 이거야.”




  겉보기에는 달리 포티스는 논리정연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포티스가 살아올 세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약간 무모할 정도로 괴력만 앞세우는 경향이 있는 그였기만, 이 파티에서 가장 연령이 높은 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네 놈이 과연 우리 모두를 이끌고 놈과 상대할 수 있을까? 드워프인 나, 검은 요정 양반인 스페란자, 이 나라 사람도 아닌 아무르,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기수. 네 놈이 우리들의 목숨을 과연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걸게 만들 수 있나?”




  확실히 합당한 질문이었다. 스페란자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티스의 말에 동의를 표하였다. 그러자 베리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포티스 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드워프 족이 광산을 개발하면서 녀석과 조우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지요? 그리고 녀석을 그들의 힘만으로 해치웠다고 하셨지요? 또 녀석이 드래곤만큼이나 경외의 대상이 된 것이 이상하다고도 말씀하셨지요?”




  포티스는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였다. 굳게 다문 입과 무서우리만치 커진 두 눈동자, 그리고 미간에 깊게 파여진 주름 등이 그의 현재 기분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훗, 그런데 드래곤도 때려잡는 괴력을 지니신 포티스 영감님께서 고작 그딴 놈 하나 잡는데 이리 겁을 먹어서야 어디다 쓰게 습니까? 광산에서 망치질 하는 드워프들이 다 웃겠습니다.”


  “…….”




  여전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가 도발에 이미 넘어갔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풉!”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티스를 설득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보였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자네 왜 웃는 겐가?”


  “이거 결국 우리는 미노타우르스와 싸워야 할 것 같네요.”


  “무, 무슨 소리를! 나는 절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포티스는 입을 다물었다. 기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겁쟁이 포티스 영감!”이라고 흥얼거리는 베리 때문이었다.




  “애송이 자식이! 내가 겁쟁이가 아님을, 녀석을 때려눕히고 증명해주마! 그때 네 놈은 내 손에 으깨질 줄 알아라.”


  “예, 예, 알겠습니다, 포티스 영! 감! 님! 물론 녀석을 죽인 다음에 그렇게 하지요. 하하하.”




  하나의 장벽을 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스페란자와 아무르였는데, 기수 생각에는 아무르는 이미 싸우는 쪽으로 결정이 났을 것 같았다. 토라진 상태로 베리는 쳐다보지도 않는 그녀였지만, 베리가 미노타우르스와 싸우러 가는 순간, 할 수 없다는 듯 검을 잡고 따라 나설 것이 뻔했다.


  문제는 스페란자였다. 이제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멍한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은 살짝 풀려 있는 그녀, 그녀는 아무래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일주일 전부터 말이다.




  “저기 스페란자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일단 이번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


  “알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페란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자신도 그 일에 나서겠다고 동의하였다. 그녀는 품안에서 검은 단검을 꺼내 들어서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




  왠지 묘한 분위기에 베리는 더 말도 못 붙이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촌장에게 의뢰에 나서겠다고 말을 하러 간 듯 보였다.




  “어이 검은 요정 양반. 자네도 이 일에 나설 이유가 별로 없지 않나? 뭐 내 입장에서야 자네가 나서준다면 편하기는 하겠나만.”




  포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 봤자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고, 또 듣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언니. 요새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별로. 아무 것도.”




  베리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아무르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질문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별달리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대답을 해주고는 바로 질문을 회피해버렸다. 결국 아무르는 입맛만 다시면서 도로 뒤로 물러섰다.




  “에잇. 아무튼 저 애송이 녀석의 장단에 또 놀아났구먼. 저 놈이 어른을 가지고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하하하, 내가 그래서 저 애송이 녀석과 함께 다니는 것이지.”




  도발에 놀아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포티스였지만,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호탕하게 웃는 것이, 기분이 완전히 풀린 상태인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지금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도끼 자루를 손으로 더듬어 만지면서 전의를 가다듬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촌장에게 말을 전한 베리가 돌아왔다. 그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토리아가 여러 진귀한 음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촌장님이 오늘은 잘 먹고 쉰 다음에, 내일 녀석을 퇴치하러 가라시네요. 하하하, 이거 오랜만에 먹는 진수성찬이에요. 그리고 오늘은 고급 스테이크도 많다고 하니, 아무르 누나도 많이 먹고.”


  “뭐? 스, 스테이크?”  그의 말대로 토리아의 손에는 잘 익혀진 스테이크가 놓인 접시가 있었다. 그것도 한 조각도 아니라 여러 조각이 담긴 접시였다.


  “이,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스테이크야?”




  아무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 음식을 보고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탁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뺏어 먹기라도 할까봐, 급히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는 무서운 속도로 먹어치우기 시작하였다.




  “누나, 갑옷은 벗고 먹어야지!”


  “우걱우걱, 그런 거 상관없잖아! 먹는 거 방해하지 마.”


  “그래도 갑옷이 먹는 데 방해 되잖아. 그러다가 거치적거려서 다른 사람한테 고기 뺏긴다?”


  “그러면 안 되지!”




  그녀는 순식간에 갑옷을 벗어 한쪽에다가 던져두고는 계속 먹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그녀의 체형이 제대로 드러났는데, 기수는 그들을 만난 뒤 처음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그는 슬쩍 그녀의 몸매를 관찰한 뒤에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자신도 포크를 들어서 음식을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먹는 게 다 가슴으로 가나 봐. 하하하.’




  그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가는 맞아 죽을 터였다. 그는 속으로만 생각하였다.


  확실히 그의 생각대로, 그녀는 몸에 필수적인 지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군살이 없는 몸매였다. 그것만큼은 갑옷을 입은 상태로도 충분히 판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을 보호하는 장비를 벗고 나니, 가려져 있던 가슴둘레가 그대로 드러났고, 그 크기가 상당하다는 것을 순식간에 판별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나저나 형은 고기를 안 먹나 봐?”


  “응? 아 고기. 먹을 수는 있는데, 느끼한 건 좀 질색이라서 잘 안 먹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사실 언젠가 말한 것 같기도 한데, 우리 파티의 가장 큰 비용지출은 아무르 누나의 식비 때문이야. 그것도 스테이크만 찾는다고.”




  베리는 최대한 말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뭐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한다고 해도 스테이크를 앞에 둔 상태, 즉 무아지경에 빠진 그녀의 귀에 들릴 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먹어도 살이 안 찌는 걸 보니, 역시 먹는 게 다 가슴으…….”




  이번에도 모기 소리로 말하였지만,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간 포크 때문이었다. 포크는 정확하게 그의 코를 스치고 날아가서 벽에 꽂혔다.




  “죽을래?”


  “아니요.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기수는, ‘역시 속으로만 생각한 게 다행이었네.’라고 머릿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계속 식사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따뜻한 온기를 친히 선사해주는 햇빛을 맞이하며, 그들은 촌장이 알려준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처음에는 세네 사람이 한꺼번에는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큰 도로를 걸었지만, 이윽고 한 사람밖에 지나가지 못하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헥헥, 녀석들이 이런 산에 숨어 지낸다는 거야? 이거 완전히 죽겠네.”


  “생긴 것하고 다르게 체력이 영 꽝이네.”


  “헥헥, 나는 산 오르는 게 싫거든. 체력이 안 좋은 건 아니라고. 헥, 그런데 형은 보기와는 달리 산을 잘 오른다?”


  “뭐, 나야 취미 생활로 가끔 산을 올랐거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취미 생활이 될 수 있어? 다시 내려가야 할 산을 왜 오르는 거야? 나는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숨을 헐떡이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베리의 모습을 보면서, 기수는 피씩 웃고 말았다. 생긴 건 자신보다 겉늙어 보이는 녀석이, 속은 여전히 아이였구나,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오랜 만에 오르는 산의 깨끗함, 그것도 자신이 살았던 원래 세계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특별한 상쾌함을 만끽하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점점 쾌활해지는 것이 곧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나무들에도 생기가 점점 돋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이 입은 옷은 확실히 이런 곳을 오르는 데에는 편할 것 같다. 그 특이한 신발도 그렇고. 혹시 무슨 특별한 방어구야?”


  “방어구? 하하하. 이런 게 방어나 할 수 있겠니. 이건 단검에도 그냥 찢어지는 거야. 단지 편안함을 최우선 모표로 만든 것일 뿐이지.”


  “편안하게 보이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역시 뭔가 이상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힐끔힐끔 쳐다보니까. 제정신이 박힌 사람들 중에서 그런 옷을 입을 법한 사람은 아마 형밖에 없을 거야.”




  그 말에 기수는 피씩 웃고만 말았다. 옷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저쪽 세계에 있었을 때에는 그것보다 더 괴로움을 주는 다른 이유로 시선을 끌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 세계에 지내는 것이 그런 차별을 당하지 않아 더 좋았다. 다만 뿔뿔이 흩어진 다른 사람들이 걱정될 따름일 뿐.




  “옷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


  “뭔데?”


  “여기 사람들은 그 옷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 여기도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텐데 말이야. 뭐라고 할까.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뭐 그런 느낌이 좀 들었어.”


  “여기가 외부인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라서 그러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몬스터의 난동 때무네 그런 거세는 신경을 슬 여유가 없다거나.”




  기수의 말에 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잡담을 나누면서 험한 산을 오르자 마침내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지만, 산 위에 축구장 넓이만한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웠다.




  “스페란자 씨. 녀석들의 기척은 느껴지나요?”


  “전혀. 아마도 숨어 있는 듯.”


  “후우, 그러면 어떻게 하지.”




  기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관찰했다. 보이는 것은 공터 주변을 완전하게 감싸 안은 빽빽한 침엽수들뿐이었고, 그 외에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녀석들을 찾으려면 저 나무들부터 베어 넘겨야 할 것 같군. 흠, 그렇다면 여기서는 내가!”


  “저기 포티스 씨. 그건 언니가 제일 싫어하는 건데요.”


  “알게 뭐야? 저 년이 하얀 요정처럼 숲을 보호하는 존재도 아니잖아. 저 녀석들이 사는 곳은 우리랑 비슷하게 어두컴컴한 동굴 속이지. 물론 나는 그 칙칙한 곳에 한 번도 간적이 없지만. 하하하.”




  포티스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도끼를 잡았다. 그리고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은 다음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그쪽에 있는 나무들을 한꺼번에 베어버릴 생각으로 도끼를 강하게 휘두르려고 하였다.




  “응?”




  도끼를 휘두르려던 찰나, 갑자기 나뭇가지들이 있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신이 도끼질을 하기도 전에 그런 소리가 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시선을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천히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망할. 녀석이군.”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곳에 있어봤자 괜히 커다란 나무에 깔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녀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승대로 그 녀석은 소머리를 하고 있는 거인이었다. 키는 대략 베리의 두 배, 그러니까 거의 4m에 이르는 것 같았고, 체구도 워낙 튼튼해 보였다. 사실 녀석의 근육이 얼마나 탄탄해 보이던지, 검도 부러뜨릴 것 같은 위용이었다.




  “우오오오!”




  녀석은 괴성을 한 번 지른 다음에 오른 손에 들고 있고는 거대한 도끼―포티스가 들고 있는 것의 근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를 향해 휘둘렀다. 포티스는 그 짧은 다리로 급히 도망쳐서 위협 범위에서 벗어났는데, 그가 있었던 자리는 녀석의 도끼질 한 번에 엄청난 구덩이가 패이고 말았다.




  “망할 괴력이잖아 이거.”




  포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 거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자신의 키의 네 배 이상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높이에, 또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을 지닌 녀석이었다. 지금 미노타우르스는 붉은 두 눈을 번뜩이고,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신과 또 그 뒤에 있는 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우레스 넨 폴터 리브, 라 레 노리아 베넷 호롬, 라인 폴터시리안 테네 오리아 세네레식. 카세시스!(태고의 계약에 따라, 나는 그대를 지금 이곳에 소환하나니, 나와의 계약에 순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길. 카세시스!)”




  스페란자의 맑은 음성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공간에 울려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도마뱀의 형상을 한 불의 정령이 소환되었다. 카세시스라는 이름을 지닌 그 정령은 곧바로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에게 날아가서 엄청난 화염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




  일행은 침묵을 지킨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애석하게도 이번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미노타우르스는 불 속에서도 건재하였으며, 오히려 왼손을 불끈 쥐고, 그것으로 정령을 그대로 공격했다.


  정령족이 그런 물리적 충격에 당할 리는 없었지만, 물리적 충격 뒤에 찾아온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 그것에 엄청난 상처를 입혔다. 결국 치료를 위해서 카세시스는 자신의 원래 세계로 스르르 사라지듯 돌아갔다.




  “뭐야, 저 녀석 정령족한테도 피해를 입힐 수 있잖아?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력이라니…….”


  “그러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하지 말자고 했잖아!”




  베리의 중얼거림을 바로 옆에서 들은 아무르가 툴툴 거리면서, 그녀 자신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면서 먹잇감을 노리듯이 그녀의 손에서 춤을 췄다.


  그녀는 그 무겁고도 큰 검을 휘두르면서 미노타우르스에게 돌진하였다. 일단 자신의 다리 근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높이 뛰어 올랐는데, 그 높이는 그녀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대략 2m 가량은 되어 보였다.




  “죽어라, 이 망할 괴물 녀석아!”




  소리를 내지르면서 검을 휘둘렀지만, 미노타우르스는 가볍게 도끼날로 그녀를 쳐냈다. 마치 사람이 파리를 내쫓는 것 같았는데, 그녀 역시 사람의 손바닥에 맞은 파리 마냥 튕겨져 날아갔다.




  “꺅!”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날아갔지만, 그녀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지면에 착지할 수 있었다.




  “전혀 안 통하잖아, 이게 뭐야?”


  “흥, 너도 어차피 여자 아이다. 그러니 힘쓰는 일이라면 내가 맡겨라!”




  이번에는 포티스가 나섰다. 그는 도끼 자루를 잡고 으르렁 거리면서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와라, 멍청한 소대가리야.”


  “크르르…….”




  그 도발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미노타우르스가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들고 있는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챙하고 울려 퍼졌다. 포티스가 녀석의 무기를 자신의 무기로 막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녀석의 강한 괴력이 맞서서 버티고 있었는데, 얼마나 그 힘이 강대했는지, 포티스가 서있는 지면이 서서히 아래로 꺼지고 있었다.




  “검은 요정! 지금이야!”


  “Broken arrow!”




  그녀의 오른손가락에 검은 빛의 화살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미노타우르스의 오른손을 뚫고 지나갔다. 녀석의 오른손에서는 붉은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고, 충격의 여파로 들고 있던 도끼를 놓치고 말았다.




  “바로 그거야!”




  포티스는 크게 외치면서 바로 옆에 있던 나무를 향해 돌진하였다. 바로 앞에 적을 놔두고 옆으로 달리는 그의 모습은 이상해 보였지만, 사실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는 강력한 다리 근육의 힘을 이용하여 나무를 향해 뛰어 올랐다. 처음에는 나무 기둥, 그 다음에는 나뭇가지, 그리고 나뭇가지에서 바로 강한 힘으로 도약을 하였는데, 그 힘에 성인 남자의 머리 둘레 정도 되어 보이던 가지가 우직끈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소대가리, 네 목을 내놔라!”




  포티스는 공중을 날고 있었다. 물론 중력의 힘으로 아래로 서서히 떨어지고는 있었지만, 방금 전의 도약은 그의 위치를 미노타우르스의 머리 위까지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의 큰 도끼가 미노타우르스의 뿔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엄청난 완력으로 녀석의 두개골을 그대로 으깨버렸다. 덕분에 피와 함께 뇌수가 흘러 나왔다.




  “구어어어!”




  하지만 녀석은 아직 죽지 않았다. 단지 뒤로 쓰러졌을 뿐이었고, 아직도 사지를 움직여 대고 있었다.




  “마무리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포티스는 도끼를 녀석의 두개골에서 뽑아내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쳤다. 그것의 목이 몸과 분리되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녀석은 1분여 동안 간질 환자가 발작을 하듯 부르르 떨다가 마침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죽은 것이었다.




  “흥, 별것도 아니군.”




  그는 자신의 도끼날에 묻은 피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강하게 한 번 도끼를 휘두른 다음에, 뒤로 돌아서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 포티스 씨, 역시 굉장해요! 정말로 드래곤과도 싸울 수 있는 괴력이에요!”


  “하하하하, 나의 실력을 이제 알았나, 애송아? 하하하하!”




  베리는 박수를 쳐 가면서 포티스를 붕붕 띄워주었고, 포티스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자화자찬하기 시작하였다.




  ‘저 녀석, 살기 위해 아부까지 하는 구나. 하하하.’




  물론 그 속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기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울창한 숲속에서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났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베리를 비롯한 모든 일행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예민한 귀를 지닌 스페란자는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위험. 여기서 떠나야 해.”


  “예?”


  “어서!”




  그녀의 다급함 외침과 함께, 그들은 급히 왔던 길을 따라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도망을 가면서 기수는 슬쩍 뒤를 바라보았는데, 스페란자의 경고가 정확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방금 자신들이 있었던 그 공터로 미노타우르스 대여섯 마리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동료의 시체를 미친 듯이 뜯어먹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그들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니라 촌장의 집이었다. 베리는 문을 발로 빵 차면서 열려고 하였는데, 사실 그 집의 현관문은 당겨서 여는 것인데다가, 나무만이 아니라 철을 댄 것이었기 때문에, 괜히 발만 아플 따름이었다.




  “으갸갹!”




  그는 자신의 발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아무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서들 오게나.”




  촌장은 거실에 있는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돌아올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듯 보였다. 아니 애당초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 녀석을 한 마리 정도는 해치웠나 보군 그래. 그것의 울부짖음이 이곳까지 들렸다네. 하하하. 자네들 정말 대단하군.”


  “하하하, 뭘요.”




  촌장의 칭찬에 베리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하였다. 하지만 이윽고 그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두 눈과 입에서 불을 뿜어내며 말을 꺼냈다.




  “라고 말할 줄 아셨습니까? 도대체 뭡니까? 그 망할 것이 한 마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한 마리? 자네는 그 한 마리를 퇴치하기 위해서 어느 용병들에게 금화를 500개씩이나 줄 거라고 생각했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녀석이 한 마리만 있었다면 왕궁에서 파견 나온 그 탐욕스런 녀석들이라도 해치울 수 있었을 걸세.


  “…….”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러하였다. 미노타우르스가 두려움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왕궁의 고위 기사들 몇 명만 있다면 가볍게 처리한 뒤에, 이 마을을 더욱 지배하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었다.




  “녀석들은 그 소머리 괴물들이 십여 마리 이상 나타난 것에다가, 그것들을 따라 나타난 수많은 몬스터들을 보고 겁에 질려 도주하였네. 개중에는 오줌을 지리면서 튄 녀석도 있더군. 아무튼 녀석들은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것들이었네.”




  촌장은 침착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 왠지 모를 엄숙한 분위기에 그들은 딴죽을 걸지도 못한 채, 주섬주섬 의자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계속 경청하였다.




  “일단 자네들도 차를 들면서 마음을 다스리게. 이 다음에 들려주는 진실은, 자네들의 이성과 감정을 완전히 흔들어 놓을 터이니 말일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리아가 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찻잔을 놓은 다음 향기로운 차를 따라주었다. 하지만 다들 선뜻 그것을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뭐하나? 어서들 들게. 이 차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네.”




  그 말에, 기수와 스페란자가 제일 먼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향을 맡은 다음, 감미로운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마셨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찻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들 모두가 차를 마신 것을 확인한 촌장은 그 입을 다시 열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것들이 왜 그리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인지 의구심이 들 거네. 확실히 자네들의 힘이라면 한 마리나, 아니 두 마리 정도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걸세. 드워프의 강력한 괴력과 다크 엘프의 뛰어난 능력이 녀석을 압도하고도 남을 테니. 그리고 저 아가씨도 수련만 더 한다면 혼자서도 그것을 처리할 수 있을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미노타우르스, 그것을 두려워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할 거네.”




  촌장은 미노타우르스라는 금기어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녀석이 몇 천 마리 있다 하더라도 싸울 수 있을 걸세. 일단 놈들은 포악하기 그지없고, 배가 고프면 동료도 서슴지 않고 잡아먹기 때문이네. 괜찮은 지휘관이 있다면, 그것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서 서로가 서로를 치게 만들어 모두 전멸시킬 걸세.”




  기수는 그 말을 듣고, 방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동료의 시체에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 치우던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문제는 그런 잡것들이 아니라, 단 한 마리에 있다네.”


  “한 마리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촌장님?”




  베리가 입을 열어 물었다. 촌장은 그 질문을 듣고 천천히 일어나서 뒤에 있던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오래되어 보이는 두루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두루마리를 묶고 있던 실을 풀고, 그것을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어찌나 오래 된 물건이었는지, 먼지가 풀풀 날려서, 일행은 손사래를 치면서 기침을 연신 해댔다.




  “미안하네.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서. 이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의 물건이라서 말이네. 이제까지 우리 집안의 가보로 전해지는 것이지.”




  활짝 펼쳐진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지도였다. 단지 문제는 해당 지형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이게 어디 지도인가요? 이런 지형을 가진 동네는 본적이 없는데.”


  “나도 광산 관련 지도는 많이 보았는데, 이런 지형의 동굴은 하나도 없었어. 이건 어디를 그린 건가?”




  베리와 포티스가 동시에 질문하였다. 촌장은 잠시 깊은 숨을 들이마신 다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궁의 지도일세.”


  “미궁이요?”


  “그래 미궁. 자네들이 방금 올라간 산에는 동굴이 하나가 있네. 하지만 그것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궁이네. 만들어진지 벌써 몇 천 년은 더 된 그런 곳이지.”




  촌장은 거기까지 설명한 다음 잠시 말을 멈추고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나올 것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촌장은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네. 그 미궁의 정확한 존재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네. 다만 하나의 목적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그 소머리를 한 것들의 왕을 봉인시키기 위해서네. 따라서 그곳은 지금 미…노타우르스의 왕이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예?”




  그 말에 깜짝 놀란 베리가 반문하였다. 옆에 앉아서 조용히 경청하던 아무르도 깜짝 놀라면서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찻잔은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에? 아, 아 죄송해요. 이거 비싼 거 아닌가요?”


  “음? 비싼 거기는 하지. 금화 10개 정도는 하니까. 하지만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싼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촌장이었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찻잔이 깨지는 바람에 중단되었던 대화는, 토리아가 나타나 그것을 모두 정리한 다음, 아무르를 위해 새로운 잔을 준비하며 차를 따라준 뒤에 계속 이어졌다.




  “미궁의 주인은 아주 포악한 성미에 드래곤과도 맞먹는 힘을 지녔다고 하네. 그리고 인간과 비슷할 정도의 지성을 지녔다고도 하지. 그것을 두렵게 여기던 드래곤들이 녀석을 오래 전에 만들어진 미궁 안에 몰아넣은 다음, 그것이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한 가지 장치를 그곳에 해두었다고 하더군.”


  “저기 한 가지 질문이요.”




  기수가 손을 들었다. 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닿자마자 기수는 입을 열었다.




  “왜 드래곤들이 그 왕이라는 자를 없애지 않고 가둔 건가요?”


  “그래.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지. 나도 어렸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그것에 대해 물어봤었지. 그랬더니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해주시더군.”




  말을 이어나가는 촌장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갔다. 안색도 파랗게 질린 데다가, 숨도 가쁘게 몰아 내쉬는 것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걱정을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가빠진 숨을 고른 다음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녀…석은, 녀석은 신족의 유산이라 하더군.”


  “…….”




  기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신족? 판타지 소설에서는 읽어본 적이 있었다. 보통 신족이라 하면 마족과 대립되는 존재로, 인간의 편에 서서 그들과 싸운다, 뭐 이런 식의 내용이 많았었다. 그런데 그런 포악한 존재가 신족의 유산이라니, 그의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 보았다. 아무르의 표정은 별달리 변화가 없었지만, 다른 세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특히 가장 표정의 변화가 심한 사람은 베리였는데,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 얼굴에서는 불길이 치소는 것 마냥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만들어진 이유는 용족과 싸움을 붙이기 위해서라고 들었네. 한 마디로 자신들에게 반역을 한 용족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족이 그것을 만들어서 대항하게 한 거야.”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이 세계에 건너온 지 어느덧 팔 일째, 말을 배우는 것은 그에게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 놈에게 지성을 준 것이 그들의 실수였지. 그것은 용족과 싸우더니 이윽고 신족을 향해서도 칼을 들이댔네. 그리고 그 결과 신족은 패퇴하였고 오늘날에 이르렀네. 용족 입장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동료라고 할 수 있었을 테지.”


  “그래도 용족이라면 녀석의 포악함 때문이라도 소멸시키려고 했을 것 같은데요.”




  베리가 질문하였다. 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말에 동의를 하였지만,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소멸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고 하더군. 하지만 실패했네.”


  “예? 신족이나 마족과도 싸울 수 있는 용족이 실패를 해요?”


  “그래, 실패했네. 왜냐하면 용족의 힘은 그것을 죽일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신족이 애당초 그렇게 만든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공기가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침묵 속에서 기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뒷배경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은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촌장님.”


  “왜 그러는가, 기수 군.”


  “용족들이 그것을 죽일 수 없어서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미궁 속에 가두고, 또 봉인의 장치를 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것이 위협이 되는 겁니까?”




  그 질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촌장을 향해 쏠렸다.


  촌장은 잠시 긴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었는데, 차의 향이 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는지, 표정과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그는 다시 찻잔을 식탁에 내려놓은 다음에 그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그 봉인이 약해지면서, 미궁에 갇혀 있던 녀석의 힘이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거네. 그 힘은 자신들의 수족을 불러들였고, 그 수족들의 힘은 다른 몬스터들을 불러들었지.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는 작용으로 왕국 곳곳이 망할 괴물들로 피해를 입고 있네.”


  “그렇다면 저희들에게 하실 진짜 의뢰는…….”


  “미궁의 왕을 죽여주길 바라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베리타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촌장의 눈을 쳐다보았는데, 그 눈에서는 강인한 의지만이 담겨 있을 뿐, 농담이나 장난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용족도 죽일 수 없는 놈을 무슨 수로 저희가. 게다가 그곳은 미궁이지 않습니까? 보통 그런 곳은 미로로 만들어져서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하잖아요.”




  어린애가 투정을 부리듯 말하였다. 그의 말은 너무도 당연하였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 촌장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였다.




  “용족은 확실히 녀석을 죽일 수 없지. 녀석의 힘은 용족의 모든 힘을 확실하게 분쇄하고, 아니 오히려 흡수한다고 하니까. 한 마디로 용족이 녀석과 싸우면 싸울수록 오히려 녀석에게 힘을 줘버리는 꼴이 되니, 녀석을 미궁에 가둔 거겠지. 하지만 용족이 아닌 다른 존재는 녀석을 죽일 수 있네. 그것이 설령 인간이라 할지라도.”




  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식탁 위에 놓인 지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려서, 그 미궁의 입구, 그러니까 동굴의 입구를 가리켰다.




  “이곳이 입구네. 그리고 녀석이 갇혀 있는 미궁의 중심부까지의 길이 이 지도에 표시되어 지. 이 지도를 가져가게. 그러면 길을 잃고 헤맬 이유도 없으니까.”


  “아니 저희들은 그 의뢰를 받아들인다고 말한 적이…….”




  베리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였지만, 촌장은 그 말을 그냥 싹뚝 자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 지도는 단 한 장뿐이니 잃어버려서는 안 되네. 그리고 녀석의 손에 넘어가서도 안 되지. 왜냐하면 이 지도에는 녀석이 미궁 밖으로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 장치의 위치도 알려주고 있으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마을 사람들 중 하나로 보이는 자가 들어왔다. 그는 공손하게 촌장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저기 촌장님.”


  “자네 무슨 일인가?”


  “아가씨의 전언입니다. 아무래도 글로티가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고…….”


  “그래……. 녀석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는 게로구나. 끌끌, 이 늙은이만 끈질기게 목숨을 연명해 나가고, 불쌍한 젊은 것들만 죽는구나.”




  촌장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그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것 같았다.




  “아, 중요한 말을 해주지 않았네 그려. 그 미궁에는 진귀한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지. 덕분에 수많은 도굴꾼들이 겁도 없이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다네. 하지만 자네들은 걱정할 것 없네. 그 지도는 용족이 만든 것인지라, 친절하게 함정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으니 말이네. 그럼 나는 그 불효막심한 녀석을 보러 갈 터이니, 그 괴물을 처단해주길 바라네.”




  그는 마지막 말을 마친 다음에 천천히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베리가 급히 촌장을 가로 막았다.




  “저희들은 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소머리를 한 괴물 녀석을 잡는다고 했지, 그것의 왕을 처단한다고는 한 적이 없어요! 그건 금화를 몇 천 개를 준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 미궁 안에는 다른 놈들도 수두룩하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자네 말대로 자네들은 이 일에 나서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네. 하지만 자네라면 할 거네.”


  “예?”


  “뭔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게 되었는데, 왜 그 길로 도망가지 않고 이곳에 돌아왔나?”




  그 질문에 베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타오르는 붉은 두 눈동자로 촌장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게다가 내 생각에는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자네는 혼자서라도 미궁으로 들어갈 것 같네만.”


  “…무슨 뜻입니까?”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베리타스는 굳고도 단호한 음성으로, 아주 나지막하게 물었다.




  “괜히 내가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허허허허.”




  촌장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베리타스는 더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리고 등 뒤에서 들리는 촌장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천천히 생각해 보게나. 아직 시간은 있으니…….”




  말끝은 점점 흐려지면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그 말을 들은 베리타스는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일행은 말없이 지켜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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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역시 스크롤의 압박을 선사해 드리겠나이다.


 


그것도 지난 화보다 조금 더 긴...


 


ㅡ,.ㅡ


 


이번에는 A4 25장 가량의 분량인지라.


 


아하하하... ㅡ.ㅡ


 


각 화별로 평균 20~30장 안팎이 됩니다.


 


............


 


스크롤의 압박은 어쩔 수 없어요~


 


ㅇ_ㅇ/


 


 


 


 


 


 


 


 


 


 


 


 


 


 


 


그리고 설정상 베리타스도 원래 호리호리한 체구였는데


 


시작부터..... 건장한 체구로 바뀌었다는.. ㅡ,.ㅡ


 


설정을 정해놓고 글을 쓰다보면 이렇게 바뀝니다.


 


그건..... 변소 가기 전과 가고 난 뒤의 생각이 다른 것과 비슷한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