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상자 속 그 고양이는 울고 있었을까

2010.09.11 17:49

윤주[尹主] 조회 수:251 추천:1

extra_vars1
extra_vars2 1491-1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지나치게 길고 장대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듣던 중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으니까. 한편으로 그것은 희한하게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는 이야기기도 했으니, 왜였을까?



 소녀가 이야기를 마친 후 그것을 듣던 내 표정은, 소녀의 시점에서 완전히 얼빠진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를 보더니 그녀는 대뜸,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가며 내게 말했다.



 "어이없단 얼굴로 보지 마세요. 어딘지 부족해보이니까."



 특히 머리 쪽이. 끝에 와서는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로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단 듯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고 소녀를 노려보듯 빤히 쳐다보았다. 나로선 소녀의 독설도, 뒤이은 비웃음도 참기 힘든 것이라고 말없는 경고를 주는 셈인데,



 소녀는 내 의도를 조금 비슷하게라도 맞추지 못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괜찮으니까 다녀오세요. 전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어딜 다녀오라고?"
 "화장실은 뒤쪽에 있어요. 아, 자기 가게니까 그쪽이 잘 알지 않나요?"
 "이건 또 무슨 소리……."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끝내 큰소리 내지 않고 버틴 건 말을 마친 소녀의 표정 탓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긴 했지만 흐느끼듯 들썩이는 어깨 때문에 언뜻 엿보이는 그녀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 꼬맹이,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잖아!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믿지 못하시는 모양이네요?"



 잠깐 가게 뒤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꼬맹이를 보니, 어느새 소녀는 표정을 싹 고치고 아무 일 없었단 듯 태연스레 물었다. 나는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응, 못 믿겠는데."
 "그렇군요.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포기가 너무 빠르잖아! 나는 황당해져서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단 듯 시침 떼고 앉아 있었다.



 "왜 그러세요?"
 "누가 네게 이야기 들려주래?"
 "그럼 아녜요?"



 이 꼬맹이가…….



 "아까부터 묻잖아! 네가 누구냐고?"
 "그래서 아까부터 설명하는 거 아녜요. 내가 누군지."



 다시 나는 어리둥절해한다. 소녀는 싱긋 웃었다.



 "방금 전 얘기도, 이제부터 할 얘기도 전부 내가 누군지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그렇다면야.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장단 맞춰주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질 듯했다.



 "하나만 먼저 묻자. 이번엔 좀 믿을 만한 얘기냐?"
 "믿을 만한 얘기는 없어요. 믿는 얘기와 못 믿는 얘기뿐이지."



 잠시 숨을 고른 뒤 소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들어보세요. 이것은 까마득한 이야기, 아득한 이야기.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또 현재로부터 그 너머까지를 잇는 이야기에요. 마치 강처럼, 샘물로부터 시작해 바다에 이르는 그런 이야기에요. 당신은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느낄 지도 모르죠.



 일찍이 거대한 어머니, 있지도 않는 알을 품는 새-인간은 석 달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다 끝내 불이 되었다죠. 그 열기와 재와 남은 뼈 몇 점이 오늘날 세상을 만들었답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알이 어미 새의 열망으로 인해 생겨나버린 거예요.



 세상은 고통이에요. 태어나는 것도, 늙는 것도, 병에 걸리는 것도, 죽는 것도. 심지어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죄를 범하는 게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한 번 내쉬는 숨결은 사람을 살리는 인공호흡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독설로도 변할 수 있는 게 인간이란 존재. 그 같은 죄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어요. 그래서 인간(人間)인거죠. 엄밀히 말해 인간이란 우리 부족한 존재를 말한 다기보단, 우리가 살기 위해 저지르는 우리 몫의 죄를 가리키는 거랍니다.



 뭐 그래서, 죄를 짓는 쪽이 있으면 죄를 입는 쪽도 있어야지 않겠어요? 누군가 자기 것을 덜고자 한다면, 덜어진 그것을 짊어지는 쪽도 있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 자기 자신만이 홀로 존재한다면, 누군가 대신 자기 것을 업어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예요. 만 명의 사람이 있기에 단 한 명의 짐 진 이가 있는 거랍니다. 그래서 왕이에요. 만 명 중에 단 한 명. 수십억 중에 단 한 명. 오로지 홀로 모든 죄악만을 짊어지고 추락하는 인간의 왕이란 게, 우리도 모르는 와중에 존재하는 법이랍니다.



 때로는 그래요, 짊어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테지요. 이 인간의 왕은 어느 날 문득 피곤함을 느꼈어요. 지구를 짊어진 아틀라스 거인처럼, 육십억 무게를 짊어진 그녀가 만성 피로와 근육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거짓말이겠죠? 파스 한 장 붙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무시무시한 무게가 그녀 위에 올라앉은 거니까요. 원래 훨씬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 있는 그녀가, 그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겨우 세상에 존재할 정도 무게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약간이나마 자기 무게를 덜어낼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머지않아 그녀는 자신의 수양딸을 만날 거예요. 자기 친구의 핏줄. 너무나 제멋대로고 왈가닥이라 걱정되는 바 없지 않지만, 그 딸이라면 분명 이 거창한 의무를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생각해보세요. 수십억 인간의 죄를 홀로 떠안고 지상에서 추방당하는 검은 여인의 모습을. 세상은 분명 그로부터 나아질 거예요. 비록 수양딸 자신이 그것을 바랄지, 바라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게 저의 이야기랍니다. 세상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와, 세상을 위해 희생할 딸이 이 작은 몸을 통해서 연결되는 거죠. 등에 보이지 않는 검은 죄악을 온통 짊어진 인간의 왕, 그게 바로 저예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입술을 조금 떼었다가, 또 잠시 고민하느라 십여 분을 허비했다. 이 이상 침묵하는 건 의미가 없단 판단이 들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결국 처음 하려던 말이 가장 적당한 의사표현이란 결론에 다다랐다. 따라서 오랜 시간 침묵을 깨고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누구라고, 꼬마 아가씨?"


 


=====================================================================================================================


 앞선 회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녀의_정체_2.txt에요;;


 


 이전 회에 나왔던 이야기가 '바리' 소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인간의 왕'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꼬마 아가씨는 대체 누구일까요??


 


 다음 회에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