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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상자 속 그 고양이는 울고 있었을까

2010.09.08 16:23

윤주[尹主] 조회 수:312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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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나와 소녀의 첫 만남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한다면, 당신 또한 알겠지.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그 꼬맹인 애초부터 사람을 만만히 보고 있었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놨더니 봇짐 내놓으란다고, 불쌍해 보여 가게로 들여 놓고 지극정성 몸을 말리고선 흑심 한 점 섞이지 않은 오로지 순수한 선의에서 발언권을 줬더니 순식간에 내 주도권 플러스 자주권까지 강탈해 버리지 않았나. 과장해 말하면 폭거요, 강제합방인데 인심 좋은 집주인이 참아주고 있는 꼴이다. 참고로 집주인이란 바로 나고.



 본디 남한테 성 못내는 성격인데다, 간밤 잠을 설치는 바람에 이 낯선 침입자를 몰아낼 기력도 없다. 잠을 설친 건 모두 그놈의 악몽 때문이다. 커다란 상자. 상자 속 고양이. 상자를 비집고 들어오는, 검고 붉은 메스. 험상궂은 날붙이가 가른 그 얇은 틈새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과연 고양이는 죽어 있을까, 살아 있을까. 질문은 내게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꿈에서 나는 단지 고양이었을 뿐이다. 상자 속에 웅크린 채 앉아, 잠자코 바깥 누군가의 판정을 기다리던 작고 연약한 고양이. 고양이에게 있어, 그 메스는 날카로웠고 또 너무 깊이 들어왔다.



 "뭐에요,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사람 같은 얼굴 하고서."



 하긴 간밤 꾼 악몽가지고 고민할 때는 아니지. 당장 눈앞에 닥친 고민거리가 없지 않은데.



 눈앞에 닥친 고민거리, 소녀는 내가 정말 궁금해 하는 게 '자신이 누구인가'랬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걔가 누군지 알게 되면 걔네 가족이 누군지, 어떤 사람들인지, 어디에 사는지도 알 수 있으니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을 테니까. 한편으론 그 꼬맹이 집이 어딘가 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멋대로 떠벌릴 이야기 대다수는 내게 있어 쓸데없는 가십에 지나지 않는다. '탤런트 T씨, 충격고백'이나 '가수 M씨가 말하는 연예 뒷담화'같은 싸구려 여성지 타이틀 따위에선 일찍부터 관심을 끈 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딴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겠나?



 대충 몸을 닦긴 했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무래도 보기도 안 좋고 불편한데다 건강에도 염려되었다.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사람 같은 얼굴'을 보며 웃던 아이는 갑자기 잔기침을 해댔고, 그 바람에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다.



 소녀는 이제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었다.



 어째선지 소녀는 가게 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아는 듯했다. 대뜸 스텝실 몇 번째 선반 위 어느 어느 곳을 찾아보래서 손을 넣어보니, 커다란 샤워 타월이 나왔다. 이런 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소녀는 돌연 스텝 실에서 나를 쫓아내곤 문을 걸어 잠갔다. 문 너머에서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금 후, 소녀는 그 커다란 샤워 타월 한 장만 몸에 단단히 두르고 나왔다.



 '단단히'라고 말했던가? '당당히'라고 할 걸 잘못 말했군.



 스텝 실에 들어가 보니 바닥엔 물기가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어 건조까지 맞춰 돌려두고 나왔다.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가 쪽 테이블로 이동해 앉아 있었다. 그 때 내 감상이 어떠했느냐고? 순간 소름이 쫙 끼치면서 오들오들 떨었다. 어쩌다 길을 지나가던 누군가 이 꼬락서니를 본다면 무슨 사단이 있을 지 예상할 수 없기에.



 애당초 장사는 그른 날이었다. 가게 문을 일찌감치 닫고 창문마다 블라인드를 쳤다. 순식간에 가게 안은 어두침침해졌지만 불을 켜두니 오히려 블라인드를 치기 전보다 환했다. 먹구름 때문에 햇빛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던 날이니 당연한 결과였을까.



 문단속을 마치고 소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타월 한 장 걸친 여자애가 카페에 앉아있는 모습은 어색하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 겨우 초등학교 2, 3학년밖에 되지 않았을 꼬맹이 때문에 얼굴 붉힐 일이 생긴다면 그거야말로 정상은 아닐 테니까. 거기 당신, 미심쩍단 눈으로 자꾸 보지 마란 말이야!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볼까요?"
 "그 전에, 넌 대체 누구지?"



 까르르르, 하고 소녀는 웃었다.



 "아이 참, 기억 안 나세요? 제가 말하려던 게 바로 그거라고요. 왜, 아저씨가 물어본 거 아녜요?"



 아 참, 그랬던가. 일말 의심도 없이 남 말을 믿어 버리는 나쁜 성격이 거기서 다시 도졌다.



 그 사이 소녀는 제 앞에 놓인 머그컵을 들었다. 남은 핫초코를 할짝대며 한 모금인가 마시곤, 그녀는 비로소 마각을 드러내놓았다. 내가 물었다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소개할게요. 저는 '인간의 왕'입니다."



…….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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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로 수건도 없는 가게에 왠 샤워타월, 하고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의 왕'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그 다음 회가 될지, 그 다음다음 회일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