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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6 02:23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769 추천:1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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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레스테는 짜증부터 내고 싶었다. 술통의 크기는 셀레스테에 비하면 작다. 하지만 하나라도 맞을 땐 적잖은 고통을 겪는다. 빌과 그녀 사이의 일척지간에 떨어지는 것 또한 그녀를 놀라게 하거나 크게 다치게 만들 수 있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술과 파편을 털어냈다. 이 와중에도 빌이 덤비지 않을까 겁이 난 그녀는 재빨리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하지만 막상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쓰러진 빌이 아니라 게드 장로였다.
 “에비!”
 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침에 마누크는 고꾸라져 웃을 뻔했다. 게드 장로가 닭 뼈를 셀레스테에게 던져대는 꼴 또한 충분히 익살스러웠다. 뼈들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 시론만이 웃지 않았다. 게드 장로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읊어 셀레스테와 마누크를 기겁하게 했다.
 “죽은 자의 왕이여!”
 셀레스테는 사자 만난 강아지처럼 후다닥 수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북부의 장로가 죽은 자의 왕을 부른다면,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든 도망치는 것이 현명하니까. 게드 장로는 씩 웃으며 남은 말을 마저 꺼냈다.
 “장로회의 이름으로!”
 땅에 흩어진 뼈들로부터 벌레 떼가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순간 늑대들은 기겁했다. 단순한 벌레가 아니다. 죽은 자의 왕이 가진 권능이다. 그는 허공에서 피고름을 쏟아내며 미친 파리 떼를 조종한다. 송장벌레로도 무슨 짓을 벌이지 못하리란 법이 있는가? 벌레들이 사방으로 움직이자 늑대들은 뒤늦게 셀레스테를 따랐다.
 게드 장로는 폭소하곤 나무를 미끄러져 내려와 빌에게로 뛰어갔다. 사실 저 선언에는 몇 마디가 덧붙어야 했다. 부디 제 공갈을 묵인하시길! 왕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위험한 짓거리를 해치운 장로에게 마누크는 욕설을 퍼부었다. 장로는 낄낄 웃으며 그 칭찬 아닌 칭찬을 무시했다. 그는 빌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켜 앉혔다. 빌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장로는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외쳤다.
 “빌, 일어나라, 빌! 빌 사이커! 용맹한 빌 사이커!”
 그제야 마누크와 시론도 황급히 경애하는 대장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은 대장이 지휘가 불가능한 상태라는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마냥 굳어 있을 순 없는 노릇. 셋은 황급히 빌을 부축하며 포대로 뛰어갔다. 그을음을 저주하는 총병과 포병들이 내뿜는 필사적인 음울함을 밀쳐내고, 그들은 빌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 게드 장로는 정체불명의 장로만 알아볼 조치를 시작했고, 마누크는 빌의 뺨을 때렸고, 시론은 계속 빌 대장을 불러댔다.
 빌은 깨어나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니다. 불행 중 다행이지만 솔직히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 상황에서 시간낭비는 죄악이다. 마누크는 기어이 대장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원수 같은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야, 이 개자식아!”


*
 “부르는데.”
 죽은 자의 왕이 웃으며 말했다. 빌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했다. 산 자만이 죽은 자를 부른다. 그런데 누가? 죽은 자의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어서게. 일어서.”
 유쾌한 목소리. 빌은 굽힌 무릎을 폈다. 눈앞에 황금가면이 나타났다. 빌도 모르는 사이에 왕도 일어섰다. 빌은 이 꿈이 어서 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다 끝났습니다.”
 “그래?”
 죽은 자의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빌은 말없이 자신의 도끼를 내밀었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빌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죽음이 갖는 위압감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왕이여, 당신께.”
 “이해를 못했군.”
 왕은 웃으며 말했다.
 “가끔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분명 드문 기회지.”
 빌은 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는 무력했다. 그저 정해진 대로 말했다.
 “갈망하던 바를 이루진 못했으나…….”
 “그만해라. 재밌긴 하지만.”
 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입을 열 때마다 멍청해진다고 느낀 그는 듣기만 하기로 결정했다. 죽은 자의 왕은 빌이 조용해지자 말했다.
 “요즘 세상은 살만한가?”
 지옥의 창조자 앞에서 세상을 평가하는 위기에 처했다. 빌은 죽은 자의 왕이 바라는 세상이 지옥임을 믿어 의심치는 않았지만, 그의 덕을 가장 많이 보는 북부 사람이 그걸 왕 앞에서 인정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죽은 자의 왕이 혼자 답했다.
 “살만하겠지. 그럴 거야. 나는 신의 세계에서 너희를 동정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자만을 거느리게 된 마법사의 말이다. 이해할 필요 없다. 북부의 병졸, 옛 영광의 종, 모성의 나균.”
 왕은 빌의 어깨에 왼손을 얹었다.
 “오른손잡이.”
 빌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의 손길을 따라 무릎 꿇었다. 왕이 말했다.
 “네 맹세는 유효하다.”
 빌의 턱이 와들와들 떨렸다. 굳건한 남자는 그 안에 없었다. 왕의 손이 개가죽 망토 위를 훑더니 빌의 팔을 붙들었다.
 “갈망하는 자, 원하는 대로. 찾고 싶나? 찾아라. 막는 것이 있나? 불행한 일이지. 그 계집애에게 내 대답을 들려줘라. 수호자가 요청했다. 왕이 행차하리니.”
 죽은 자의 왕이 명령했다.
 “잡아먹고 와라.”


*
 시체가 일어섰다.
 빌의 꼴이 딱 그랬다. 그는 젊은이로 돌아간 것처럼 입에 담기 힘든 욕들을 연달아 내뱉었다. 덕택에 정면에서 빌의 욕을 경청할 수 있던 마누크는 이제야 깨어난 대장의 머리를 망치로 깨버리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부대장 시론은 당황해서 대장을 불렀다.
 “어, 대장? 괜찮아?”
 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에서 게드 장로는 약효를 확인했다. 빌은 혈관을 뒤흔드는 약효에 진저리를 쳤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약통을 찾았다. 쏟아졌지만 아직 남았다. 빌은 과한 악력에 약통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는 약을 마저 입에 들이부었다. 급작스러운 빌의 기상에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장로는 약물 오남용에 대한 준엄한 질책을 뒤늦게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또 그 짓거리냐!”
 시론과 마누크는 장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멀쩡하네. 빌은 말했다.
 “죽은 자의 왕을 봤다.”
 “아, 그렇겠지. 귀신늑대 앞에서 졸도했으니.”
 마누크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장로는 숨을 삼켰고, 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빌이 아무런 짜증도 내지 않자 마누크는 설마 하며 질문했다.
 “진짜 왔어?”
 빌은 대답을 주지 않았다. 밀알이 황동그릇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게드 장로의 봇짐으로 향했다. 게드 장로는 황급히 짐 속에서 황동그릇을 꺼냈다. 시끄러운 그릇은 딱 하나. 수호자 브롬 장로의 것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일동은 사색이 되었다.
 “명령한다.”
 빌은 장갑 낀 손을 꽉 쥐었다. 약효는 충분한가? 그는 옆에 있던 전나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이해하기 힘든 괴성과 함께 전나무가 부러졌다. 주변의 병사들이 입을 쩍 벌리는 가운데, 빌은 말했다.
 “총원, 퇴각하라!”


*
 셀레스테는 자신의 지도력이 바닥을 드러냈음을 겸허히 인정했다.
 시체들이 일어섰다.
 늑대들은 모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 부랑자의 죽음에 익숙한 익인들조차도 자취를 감췄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체들이 북쪽으로 달리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셀레스테는 모든 전력을 상실했다.
 ‘잡아먹힐 거야!’
 전신에 화상을 입은 총병의 시체가 걸었다. 위턱이 사라진 늑대가 걸었다. 가슴팍이 뭉개진 창병이 걸었다. 목이 부러진 익인이 걸었다.
 죽은 자의 왕이 왔다.
 “장로들, 북부의 장로들! 이 저주 받을 늙은이들아!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거냐!”
 셀레스테는 비명처럼 외쳤다. 장로회가 죽은 자의 왕과 돈독한 관계라 한들 이런 짓은 극도로 위험하다. 왕이 북부인에게는 친절하다지만, 그는 시체를 가리는 편이 아니다. 죽은 자의 군대가 덩치가 커진다면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 말란 법이 없다. 왕은 죽음 그 자체에 가까운 존재다. 북부의 동맹자, 행운과 재물의 신이라는 입장보다.
 빌은 도망쳤을 것이다. 셀레스테는 고민에 빠졌다. 왕이 그의 군대만이 가진 최고의 장점, 병력의 재생산을 실행하기 전에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빌을 쫓아갈까? 가장 현명한 길은 전자다.
 빌도 그 사실을 알았다.
 셀레스테는 경악했다.
 빌이 죽은 자의 군대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
 “저래서 미친 빌이었군요.”
 신나게 발을 놀리던 틸리는 마지막으로 본 빌 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틸리는 이제까지 빌이 미쳤다는 소릴 듣는 이유가 도시 하나를 상대로 하는 등 무모한 행위 때문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빌에게 갖는 오해 중 하나였다. 틸리도 지난 1년 간, 그리고 이번 소동에서 깨달았다. 빌은 승산이 없으면 안 싸우는 사람이다. 빌은 순전히 다른 문제 때문에 미쳤다는 소릴 들었다.
 눈을 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며 전신을 경련하는 사람은 미쳤다는 소릴 듣기엔 충분하리라.
 “약물 과다 복용은 위험한 거야. 암, 그렇고말고!”
 전력 질주 때문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게드 장로는 혹여나 빌을 따라할 놈이 있을까 싶어 약물 부작용의 폐해를 널리 알렸다. 30년 전, 선왕의 정예병. 정예병의 최소요구조건은 간단하고도 드문 특성이었다. 북부 전쟁 비약의 부작용을 견뎌내는 놈만 선왕을 따랐다.
 “그래도 확실히 강해지는 모양입니다?”
 “내일 빌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봐라. 100살 먹은 병자도 그보다는 정정할 거다!”
 틸리가 금단의 영역을 넘보자 장로가 얼른 제지했다. 이에 틸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작용이 그 정도라면, 대장은 도망칠 수 있는 겁니까?”
 장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고참인 시론과 마누크도 말이 없었다. 키체커가 한숨을 토하곤 선언하듯 말했다.
 “운이 좋다면.”


*
 비척거리는 시체가 빌의 뒤로 다가왔다. 흥분한 광전사처럼 발을 구르고 양팔을 휘두르던 빌은 그 재수 없는 놈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시체가 빌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손은 빌에게 닿지 못했다. 빌은 시체를 던졌다.
 셀레스테는 포탄처럼 날아오는 시체에 기겁했다. 시체는 그대로 우람한 떡갈나무에 직격했다. 셀레스테는 사방으로 날아오르는 핏방울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빌은 승산이 없으면 안 싸워. 죽은 자의 왕이 왔지. 살아있다면 도망쳐야 해. 그런데 왜? 셀레스테는 불붙은 전나무를 뿌리 뽑는 빌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의문도 동시에 떠올렸다.
 ‘저런 것과 싸워서 이기라고?’
 셀레스테의 짝은 귀신늑대보다 격이 떨어질지언정 그 힘만은 정녕 위대했다. 북부의 광전사와 싸웠으니까. 셀레스테는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마! 이건 당신답지 않잖아!”
 빌은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전나무를 한번 휘둘러 주변의 시체들을 모조리 쓰러뜨려버렸다. 그 다음 목표는 누가 봐도 셀레스테였다. 빌이 전나무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예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전나무가 날았다.
 셀레스테는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사상 최대의 불화살이 셀레스테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불똥이 거세게 흩날렸다. 셀레스테가 그 뜨거움을 피하려는 사이, 빌은 쇠도끼를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셀레스테는 몸을 돌려 나무 사이로 달아났다. 잠깐의 술래잡기 동안 셀레스테는 빌의 발놀림을 파악했다. 광전사보다는 귀신늑대가 더 빠르다. 셀레스테는 다시 고민했다. 저 미친놈을 버려두고 도망칠까?
 “도망치지 마라!”
 빌의 고함이 셀레스테의 귓등을 때렸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빌을 돌아보았다. 빌은 어눌한 발음으로, 더듬거리면서 다시 외쳤다.
 “너는 나를 죽인다!”
 아까 들었던 말이다.
 “나는 너를 죽인다!”
 셀레스테는 이를 드러냈다. 빌, 안 변했나? 그 고약한 비약에 혼을 팔지 않았나? 안 변했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확신이 필요했다. 셀레스테가 마주 소리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빌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울었다. 그는 웃었다. 알아듣지 못했다. 광기 섞인 웃음과 울음, 그리고 고함.
 “갈망하는 자, 원하는 대로! 찾고 싶나? 찾아라! 막는 것이 있나? 불행한 일이지!”
 빌의 말이지만, 빌의 대답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준 대답이다. 셀레스테는 알아차렸다. 시체들이 다시 일어선다. 그가 접근한다.
 막는 것이 있나? 불행한 일이지!
 “아, 그랬어?”
 셀레스테는 씩 웃었다. 살려면 죽여라. 그녀는 빌에게로 뛰어가며 외쳤다.
 “죽은 자의 왕! 네 뜻대로!”
 미친 빌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왔다. 셀레스테의 앞발이 빌을 후려쳤다. 조금 전에 부상을 입은 그 발이다. 빌이 날아갔다. 셀레스테는 빌이 쓰러지는 순간 재빨리 방향을 꺾어 달아났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꺾었다. 그녀는 다시 빌에게로 뛰어갔다. 이번엔 콧등으로 아랫배부터 들이받았다. 빌이 또 날아갔다. 그는 시체들 틈바구니로 던져졌다. 시체들은 살아있는 것을 찾아 빌에게로 손을 뻗었다. 빌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 들려왔다.
 시체들이 당장 광전사를 어떻게 처리해줄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과연 시체들이 어린아이가 쥔 조약돌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셀레스테는 다시 갈지자로 나무 사이를 달렸다. 귀신늑대의 발은 빠르다. 셀레스테는 빌을 이대로 계속 괴롭히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게 그녀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여차하면 몸을 뺄 수 있는 최고의 전술이었다. 죽은 자의 왕이 본격적으로 역병과 저주를 휘두르면 이 숲에 남아나는 생명은 거의 없다. 그 전에 결판을 내던가, 아니면 빌을 지옥 한복판에 던져두고 도망쳐야 한다.
 셀레스테는 세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그녀는 익인 시체의 양다리를 붙잡아 세로로 잡아 찢던 빌의 뒤로 돌아갔다.
 빌은 도끼날로 그 발바닥을 후려쳤다. 중량의 차이를 어쩔 수 없던 빌의 쇠도끼가 뒤로 날아갔다. 셀레스테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빌은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잡아 셀레스테에게 던지곤, 뼈다귀 쫓는 개처럼 쇠도끼를 향해 뛰어갔다. 몇 년을 썩은 낙엽더미 속에서 도끼를 찾은 그의 얼굴은 낙엽부스러기가 가득 묻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다시 셀레스테에게 달려왔다.
 셀레스테는 도끼를 높이 들고 달려오는 빌을 보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을 벌렸다. 그 망할 도끼까지 함께 씹어주지. 그녀는 빌을 조준했다. 거대한 압착기가 번개 같이 날았다. 귀신늑대의 이빨이 쇠도끼와 부딪혔다. 지독한 치통이 느껴졌지만 씹히는 살은 없다. 빌은 셀레스테의 아랫니 사이에 도끼날을 끼운 채 오른발로 윗니 사이를 딛고 있었다. 셀레스테는 입을 확 닫아버리려고 했지만 광전사의 괴력은 녹록치 않았다. 고개를 마구 흔들었지만 빌은 떨어지지 않았다. 셀레스테가 자세를 바로 하자 빌은 거꾸로 선 채 셀레스테의 입 안에 선 꼴이 되었다.
 순수한 힘겨루기.
 셀레스테는 계속해서 힘을 주었다. 이빨이 빌의 투구에 닿았다. 입김이 사슬갑옷을 흔들었다. 개가죽 망토에 침방울이 날렸다. 미치광이의 줄무늬 바지는 침에 젖었다. 셀레스테는 귀신늑대의 힘이 더 우월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끝낼 때다. 그녀는 분노와 짜증과 기대를 담았다. 빌, 너는 뭘 담지?
 빌은 떨리는 손으로 도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자루를 더듬었다. 잠시 뒤 그는 필요한 것을 찾았다. 도끼날이 조금씩 이빨 사이에서 빠졌다. 날이 잇몸을 긁으면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셀레스테의 깨무는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이 상태에서 끝장을 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혓바닥이 도끼머리를 밀치면서 날을 옆 방향으로 밀어내버렸다. 찌를 수도 벨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빌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끝난다.
 “네 짝을…….”
 빌이 입을 열었다. 셀레스테는 뒷부분을 잘 듣지 못했다. 듣기도 전에 그녀는 입천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납덩이가 번개 같이 날았다.


*
 “뭐하는 꼬마냐.”
 침대에 누운 늙은 전사의 말이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의 옆에는 열다섯 살이 되었음직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꼬마라는 말에 발끈했다.
 “꼬마 아닙니다.”
 전사는 코웃음을 치다 격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청년이 즉각 말을 걸었다.
 “약을?”
 “아니. 필요 없다. 돈 낭비야. 게드 장로의 성의는 고맙지만.”
 청년은 방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로와 그의 아버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나?”
 노인의 말에 청년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왔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전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너무 단순했지. 병사로선 제격이지만 전사로선 실격이었어. 하지만 그 용명만큼은 그 어떤 전사도 따라잡기 힘들었다.”
 전사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왕의 정예병.”
 청년이 침을 꿀꺽 삼키며 전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사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처럼 죽고 싶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에서 기어 나와, 우연히 들른 친구의 집에서 죽는 것이?”
 “전사의 죽음입니다.”
 “네 아버지도 그렇게 죽을 수 있었지. 지금은 양이나 치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 내가 그에게 명령했다. 다시는 전장에 나오지 말라고. 그는 용명에 비해 너무 평범했으니까. 그 용명을 끝까지 끌어안았다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 같나?”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사가 화제를 돌렸다.
 “네 아비의 검은 어떻게 되었나?”
 “베개 밑에 항상 넣어두십니다. 전 건드려보지도 못했어요.”
 “아깝군. 상당히 멋진 검인데.”
 전사가 혀를 차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청년이 두 번째로 등 뒤를 돌아볼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검을 가져가라.”
 청년은 깜짝 놀라 전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천천히 침대 아래로 향했다. 가슴팍이 깊게 베이긴 했지만 다른 부분은 멀쩡한 사슬갑옷과 아직 날이 죽지 않은 강철 검 한 자루.
 “도둑처럼 무덤에서 훔쳐 가느니 내 허락을 받고 가져가라. 네 아버지는 짜증부터 내겠지만, 내가 불허한 건 네 아비의 출정뿐이다. 네 손에 잡히는 것을 모두 쥐고 황금과 함께 가라.”
 “왜 제겐 출정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전사는 웃어버렸다.


*
 “그만.”
 엘의 말이었다. 도끼 대신 검을 뽑은 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뭇가지 위의 파란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안 도망갔나.”
 “제정신을 찾은 것 같군요.”
 엘은 빌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빌은 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귀신늑대가 있다. 도끼를 입에 문 채 쓰러진. 빌이 질문했다.
 “방해할 건가?”
 “당연히.”
 엘은 결연히 답했다. 빌은 코웃음을 쳤다.
 “전쟁이 즐거웠나 보군.”
 엘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난생 처음 겪는 전쟁에서 그녀의 동족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죽은 자의 왕이 그 권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유쾌할 리가 있겠는가. 피눈물을 흘려도 부족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엘을 바라보던 빌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멍청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숲 밖으로 재산을 빼냈겠지. 나라도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지금쯤 개척민들이 네 양들을 찾아냈을 거다.”
 엘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빌은 검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허리춤에서 신호탄을 꺼내들었다.
 “택하라. 귀신늑대냐, 아니면 일족의 미래냐? 시간이 없다. 잠시 뒤엔 살아 걷지 못할 테니까.”
 엘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셀레스테에게 지켜야 할 의리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이끄는 늑대들과의 협력도 익인들에겐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손발이 맞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엘은 선뜻 셀레스테를 버린다는 선택지를 취하지 못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빌은 그녀에게 도끼를 휘두른 불한당이다. 셀레스테는 그녀를 도왔다. 어쨌든 빌의 뜻대로 하긴 싫었다. 커다란 날개가 양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시간이 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 같군요. 해봐요. 그깟 폭죽 따윈 기꺼이 막아드리죠.”
 빌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를 딱 부딪쳤다. 엘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빌도 시간이 없다. 앞에는 셀레스테, 뒤에는 죽은 자의 왕이다. 셀레스테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린다면 빌은 난감한 지경에 빠진다. 있는대로 허세를 떨지만, 실은 거세게 뿜어지는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에 털이 쭈뼛 서는 판이다. 엘이 셀레스테를 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혹감이 더했다. 빌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깟 것도 인연이라고…….”
 셀레스테의 목구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콧물, 침 범벅이 된 노인의 얼굴이다. 그 노인은 입술만 움직여 뭔가를 읊고 있었다. 셀레스테는 아래턱과 몸 곳곳의 격통 속에서 그 움직임을 읽어보았다.
 죽은 자의 왕이여.
 내 몸뚱이의 왕이여.
 내가 죽인 이들의 왕이여.
 빌은 셀레스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아들의 왕이여.
 빌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
 빌은 살아 돌아왔다.
 거지처럼 비척비척 걸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도끼도 잃어버렸지만, 그 좋은 보검을 지팡이처럼 썼지만 살았다. 죽은 자의 왕이 미친 듯이 후려치는 공간에서. 그 순간 락토 개척촌에선 하늘을 찌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총병도, 창병도, 개척민도 모두 환호했다. 그것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이를 맞는 원시적인 기쁨이었다. 애꿎은 하늘을 향해 총탄이 펑펑 날아다녔고, 창과 깃발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빌은 그 환성에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게드 장로와 몇몇 고참병들만이 그의 몸 상태를 알아채곤 성문을 박차고 황급히 달려갔다. 뒤이어 병사들과 개척민들이 달렸다.
 빌은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