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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6 02:21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161 추천:1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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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안개비가 북부의 흙을 때린다. 대장간엔 불이 켜졌다. 거푸집이 깨지자 나온 청동 주물. 마누크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이 만들어졌음을 확신했다.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청동 주물은 땜질 따위를 해야 하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다. 커다란 술잔 같이 생긴 청동 덩어리에 호두알도 들어갈 것 같은 깊은 구멍. 주물의 뒤에는 나무 자루를 끼울 구멍도 같이 뚫려 있다. 성공이다.
 “총보단 대포라는 말이 어울리는군요.”
 옆에서 구경하던 틸리가 말했다. 마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런 걸 만들 생각이었어.”
 대형 수총. 무겁고 불편하지만 총보다는 강하다. 마누크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급조한 재료들과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것 치고는 괜찮다.
 “전쟁의 분위기가 느껴지냐?”
 마누크가 질문했다. 틸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장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락토 개척촌은 전장이 되었다. 총성이 울리는 건 아니었지만, 전운에 가득 뒤덮였다. 갖가지 장대무기로 무장한 창병중대가 도착한 탓이었다. 그들은 락토 개척촌 안팎에 천막을 세우고 휴식을 취했는데, 워낙 살기가 등등해 억센 개척민들도 그들을 어려워했다.
 병졸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분위기를 풍긴다.
 “누추하고, 지루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고. 완벽한 전장입니다. 북부나 남부나 다를 건 없군요.”
 “출셋길이 다 그렇지.”
 마누크의 말에 틸리는 웃었다.


*
 틸리는 대장간을 나섰다. 북부의 안개비는 싸늘했다. 부드럽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남쪽의 안개비와는 그 온도가 너무 달랐다. 틸리는 미리 준비해둔 방수천을 황급히 뒤집어썼다. 빗방울 사이로 키체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떤 명사수도 놀라 자빠질 사격비술을 알려주지. 화약을 탄환 무게의 2할 넣어.”
 키체커 씨,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작아도 전쟁인데. 틸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좀 더 복잡해야 한다. 구려야 한다.
 전언취소.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전쟁비약 냄새다. 치즈와 계란과 바닷물을 섞어 썩히면 이런 냄새가 날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그 냄새에 키체커는 얼굴을 찌푸렸다. 게드 장로가 약통을 브롬 장로의 토굴에서 마을 한복판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대강 만들어진 천막들 아래의 커다란 통. 그곳이 악취의 근원이었다. 장로는 그 통에다 비약과 빗물을 넣고 장대로 휘저었다. 틸리는 코를 막곤 그 곁으로 다가갔다.
 “뭐하시는 겁니까?”
 “희석.”
 게드 장로가 냉큼 대답했다. 틸리는 아깝다는 표정을 짓고는 질문했다.
 “왜요? 그냥 쓰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못할 건 없지만 부담이 심한 편이지. 내일은커녕 당일에도 못 일어나. 무엇보다도, 비약의 양은 너무 적어. 희석하지 않으면 250명이나 되는 녀석들에게 나눠줄 수가 없다고.”
 “효력이 떨어질 텐데요.”
 “비상사태가 아니면 강한 효력이 필요하지도 않아.”
 “비상사태?”
 빌이 대답해줬다.
 “총알 같이 도망쳐야 할 때.”
 틸리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대장과 부대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둘 다 이 정도 안개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소와 똑같은 복장을 했다. 빌은 수염과 개가죽 위의 빗방울을 터는 시늉만 하더니, 곧 말을 이었다.
 “아니면 추격과 기습.”
 틸리의 시선은 빌의 허리춤에 매달린 통들에게로 돌아갔다. 원액일까? 빌은 그 눈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필요한 명령을 내렸다.
 “매복조는 내가 지휘한다. 본대보다 먼저, 곧바로 출발할 테니 석궁병들은 시위를 잘 관리하도록.”
 “결국 그 작전으로 가는 겁니까?”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익인들이 눈치를 챘으니까. 화염병 정도는 적잖이 준비해놨을 거다.”
 밀집대형에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화염병 세례는 치명적이다. 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전을 포기하고, 홀더 대위의 작전을 받아들였다. 포가를 개조한 경포병 3명, 빌과 마누크, 총병 30명. 석궁병 10명.
 “화염병뿐이랴? 익인을 얕보지 마.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면 걔들도 꺼낼 수 있는 무기가 꽤 될 거다. 석회가루를 뿌려대기만 해도 다들 장님이 되겠지. 물을 뿌려대면 화승이 젖을 테고.”
 게드 장로가 강의를 읊었다. 장로 특유의 긴 말이다. 남들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장로가 하는 말은 대개 옳다고 생각하는 북부인의 사고방식 덕에 반론이나 끼어들기 자체가 드물지만. 빌 역시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북부식보단 남부식이 익숙한 틸리는 노인의 말을 잠자코 듣는 드문 젊은이가 되어줄 수 없었다. 특히 그 말이 고리타분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라면.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 치고는 좀 꼬이는군요.”
 장로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빌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틸리와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를 기억했다.
 “그러니 두근두근한 모험 아닌가. 도시공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틸리도 웃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다시 대장에게 들려줬다.
 “전형적인 젊은이로서 말하건대, 미친 빌은 절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이깟 일쯤이야 고난이라 생각지도 않겠습니다. 미리 준비해두지요.”
 대화가 끝났다. 틸리는 즉각 천막을 벗어나 패거리들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장로가 뭐라고 탓할 타이밍은 완전히 빗나갔다. 게드는 몇 마디 투덜거리고는 남은 약을 가져오기 위해 토굴로 돌아갔다. 그제야 시론이 입을 열었다.
 “틸리는 다 좋은데 조금 건방진 면이 있어.”
 “자넨 좀 순박한 면이 있지. 마누크는 필요할 때 그 필요 이상으로 냉혹해지고. 개성이야. 그리고 젊은이의 특권이지.”
 빌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시론은 그 웃음에 그리움이 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대장은 다소 감상적인 상태다.
 시론은 그 분위기를 정면으로 깨부수긴 싫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셀레스테는?”
 분위기가 식었다. 빌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셀레스테는 달아났다. 키체커와 그의 똘똘한 제자가 익인의 대표에게 총을 쏘는 순간, 그녀는 마을에서 사라졌다. 시론은 그녀가 총성을 듣고 놀라 달아났다고 생각했다. 빌도 이견은 없었다. 그녀의 실종은 총을 쏘기로 결정한 순간 예상한 결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그녀가 앞으로 취할 행동이다.
 “어떻게 움직일까?”
 시론이 다시 말했다.
 “글쎄.”
 빌은 대답을 망설였다. 최악의 경우는 익인과 셀레스테가 힘을 합칠 때다. 빌은 그것이 가능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최선의 경우는? 익인들이 우왕좌왕하고 셀레스테는 끼어들지 않는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보다 가능성은 더 낮다.
 시론이 먼저 가정을 시작했다.
 “미리 예상 좀 해보자고.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냐.”
 “그래.”
 “좋아, 엘은 살아서 도망쳤겠지?”
 익인 대표, 엘은 키체커의 총탄에 맞고도 살았다. 그녀는 튼튼한 날개를 이용해 동족들에게로 날아갔다.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셀레스테와 접촉할 수 있다면 둘은 당장 손을 잡을 것이다. 엘은 판을 깨버린 인간들에게 분노하고, 셀레스테는 빌을 죽이려 하니까.
 “그렇다면 셀레스테와 엘은 둘 다 사람을 피해 숲에 있을 가능성이 커.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모를 것 같진 않아. 익인과 귀신늑대잖아.”
 “가능성이 높을 뿐이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 못해. 익인도 꽤 똑똑하지. 마을에서 기어 나온 귀신늑대를 믿어줄지 의문이다.”
 그것도 그렇군. 시론은 머리를 싸맸다. 만약 빌의 말대로 된다면? 익인과 귀신늑대가 싸우는 것도 가능할까? 난데없이 삼파전?
 “일단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그게 현명하겠지.”
 빌이 시론을 구원했다. 시론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셀레스테가 익인과 연합하고 우릴 칠 때 말이군. 정면에서 덤비진 않겠지?”
 “그녀가 미친다면 2개 중대의 정면으로 덤비겠지.”
 “어디서 어떻게 덤빌까? 행군 중?”
 “그때는 아니야. 우리가 언제 출발할지도 모르니까. 익인이 우리의 전쟁의도를 알았으니, 두 가지 배치를 생각하겠지. 하나는 자신들의 아래, 다른 하나는 본대의 뒤.”
 “아래의 경우엔 어떻게 되지?”
 “매복이 들킨다. 셀레스테가 우릴 보겠지. 홀더 대위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익인들이 공격을 할 때쯤 셀레스테는 매복조를 치겠지. 괴물늑대를 잡는데 80명이 덤벼야 했다. 30명의 총병이라면 상대적으로 쉽겠지.”
 “셀레스테가 본대 뒤에 놓이면?”
 “본대가 위험하다. 밀집대형이나 포위대형이 아니면 셀레스테를 감당할 수 없어. 그런데 본대가 이번에 취할 대형은 산개대형이고, 정면만 바라보지. 셀레스테에겐 이런 호기가 또 없을 거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네. 시론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비가 오는데 입술이 마르다니.
 “어떻게 해결하지?”
 “이미 손을 썼다.”
 “뭐?”
 시론이 놀라 반문했다. 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매복조를 지휘하면 셀레스테는 본대를 공격하지 않을 거다. 나만 죽이면 되니까. 내가 매복조에 있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리든, 나중에 본대를 보고 알아차리든 그녀는 매복조로 올 거다.”
 시론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확신할 수 있어?”
 “확신할 순 없지. 그러니까 네가 본대에서 남은 총병들을 지휘하는 거다. 키체커를 붙여 줄 테니 뒤를 조심해라.”
 “어, 그런 거군. 매복조에도 계책이 있어?”
 “계책이랄 건 없다.”
 “그럼?”
 “게드 장로와 마누크는 나 못지않게 거칠다. 경포도 매복조에 배치했지. 총병은 전부 고참병이다.”
 “이해했어. 화력으로 승부하겠단 거군. 경포 1문이면 산탄을 장전해서 쏴도 귀신늑대에겐 엄청난 위협일 테니. 속사도 가능하고.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면?”
 “매복조를 최대한 빨리 본대로 합류시키겠다.”
 그 과정에 다소 피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시론은 납득했다. 부하들을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는 것은 빌에게 어울리는 역할이다. 역시 대장은 똑똑해. 시론은 이미 가능한 모든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대장이 다 알아서 했군. 내가 괜한 이야길 한 것 같아.”
 “아니다.”
 “아냐?”
 “그녀는 현명하진 못할지언정 멍청하진 않다.”
 시론은 입을 열지 못했다. 셀레스테는 상상 외의 길을 밟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귀신늑대다. 영악하다. 진심으로 빌을 죽이려고 덤빈다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때도 이 결정이 현명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겨우 입을 연 시론은 넋두리만 꺼냈다.
 “점쟁이라도 불러야 하나.”
 장로라면 점술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겠지만,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빌은 다시 웃었다.
 “출발하자.”


*
 젖은 공기 속에서 긴 검은머리가 찰랑거린다. 소녀는 창병중대까지 떠나고 빈 터만 남은 전장을 가로질렀다. 쓰레기를 치우던 양치기 반트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셀레스테 양? 어딜 갔다 왔나요?”
 셀레스테는 다소곳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흉흉해지기에 이웃 마을로 잠깐 피해 있었죠.”
 “군대는 다 그렇죠.”
 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이나 용병은 행패를 부리기 일쑤다.
 “빌의 병대도?”
 셀레스테의 질문에 반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이 여기서 첫 겨울을 난 것이 11년 전이에요. 최고참인 시론 부대장이 합류하기도 전부터죠. 그런 곳에서 부하들이 어떻게 난동을 부려요?”
 “미친 빌도 아는 사람들 앞에선 얌전하단 건가요?”
 반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불분명한 대답을 줬다.
 “매사에 무관심하단 말이죠.”
 “이해가 어렵군요.”
 명쾌하지 못한 말을 셀레스테는 뚱한 표정으로 평가했다. 빌의 어디가 무관심이란 말에 어울릴까? 아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단 뜻인가? 말이 되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질문들을 짐작한 반트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좀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눈이 먼 거예요.”
 “더 알아듣기 힘들어졌어요.”
 “목표만 본단 말이죠. 대장은 자신의 관심사 외엔 아무래도 좋은 거예요. 매 순간 최대한 노력을 해서 위기를 넘기고 부하들을 이끌지만, 만약 일기나 서한집, 자서전을 쓰라고 하면 그런 이야긴 한마디도 적지 않을 겁니다. 대신 자신의 목표에 관한 이야기만 적겠죠. 오늘은 어디까지 왔는데 아직 숙원을 이룰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뭐 이렇게 말입니다.”
 셀레스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의 숙원이 뭐죠?”
 “몰라요.”
 “네?”
 “반가운 소식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마 락토에서는 브롬 장로님과 죽은 자의 왕만 아실 겁니다. 그분들은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요.”
 셀레스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은 자의 왕이라니, 절대 피해야 할 상대다. 빌에게 직접 묻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은 하나. 셀레스테가 마을로 돌아온 목적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녀는 그제야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브롬 장로님께 여쭤봐야겠군요. 혹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장로님을?”
 반트는 자기도 모르게 셀레스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슬쩍 훑어보았다. 수호자가 평범한 차림새의 평범한 여자를 만나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여자는 빌과 아는 사이다. 게다가 빌의 이야길 캐묻고 있다. 평범하진 않을걸. 반트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내해드리죠.”
 반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셀레스테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빌은 당신에게도 무관심할까요?”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그렇겠죠.”


*
 춥다. 비가 그치고 해가 떴건만 매복조는 추위에 떨어야했다. 안개비를 쫄딱 맞으면서 밤을 샜으니 당연하다. 어두컴컴한 숲을 등지고 차가운 진흙 위에 선 그들은 일각이 짧다는 듯 한숨만 내쉬었다. 양손도끼에 기대어 졸던 병사는 자세를 잃고 무너지는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다.
 마찬가지로 졸고 있던 빌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무거운 몸을 끌고 허리를 폈다.
 “때가 됐다.”
 빌의 목소리가 모두를 흔들었다. 그들은 계명성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본대의 행진이 들어왔다. 빌은 다시 말했다.
 “총병은 불을 준비하라.”
 여기저기서 성냥 긋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수천으로 보호한 화승 끝에 불꽃이 머물다 사라졌다. 한 성냥에 대여섯 화승. 총병들은 여름철 모기 쫓듯 손을 흔들어 연기를 흩었다. 연기는 나무 꼭대기를 벗어나기도 전에 잎과 바람에 흩어질 테지만, 혹여 매복을 들키면 안 되니까.
 “완벽하군요.”
 틸리가 웃으며 말했다. 빌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직은 아니야.”
 분위기가 무겁다. 게드 장로가 전투를 앞두고 분위기를 약간 바꿀 필요를 느꼈다. 빌에겐 무리지.
 “뭐, 여기까지 별 일이 없으면 다 잘 될 거야. 자, 다들 편지는 쓰고 왔냐? 잊은 놈은 가락지나 말 한마디라도 내게 넘겨라. 죽은 장로는 본 적 없지?”
 짓궂은 웃음소리가 매복조에서 낮게 새어나왔다.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전적인 우스갯소리다. 장로는 오래 산다. 아무도 죽은 장로를 본 적 없다. 그러니까 나도 안 죽어.
 몇몇 병사가 대답했다.
 “바스코다. 발카 개척촌의 재봉사네 둘째 아가씨. 아직 결혼 안 했다면, 미안.”
 “세브랄. 東파롤의 수도에 계신 모친께. 전 재산.”
 “케텔. 내 비석에. 잘 놀다 감.”
 “타향까지 나온 놈이 비석을 바라냐? 호화판 인생이구나.”
 게드는 비문 이야기를 꺼낸 병사에게 농을 건넨 다음 킬킬 웃고는 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빌은 당황했다.
 “알고 있을 텐데.”
 “그거 말고. 내 멋대로 덤 좀 쥐어줬노라.”
 “뭐냐?”
 “네가 반트에게 중매해준 여자.”
 그걸 중매라고 부를 수 있다면. 빌은 게드 장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드 장로는 친절히 설명해줬다.
 “주석거울 큰 것 1개, 작은 것 1개, 주머니 하나. 내 비용으로 네 이름 달아 결혼 예물 삼아 줬다. 몰랐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장난꾸러기의 미소. 빌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으로?”
 “그래.”
 “이것 참.”
 빌은 고개를 저었다. 미친 빌이 신부의 후견인? 병사들 사이에서 계속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들은 생각했다. 아, 폭소 좀 했으면.
 “쓸데없는 짓을 했군. 유쾌하지만 말이야.”
 빌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가감 없이 정말로 쓸데없는 짓. 게드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짓이라도 안 하면 네놈이 여자에게 좋게 기억될 사례가 얼마나 되겠느뇨.”
 사람 살려. 병사들은 익인들이 모두 귀머거리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장로님. 어떤 농담이 나와도 웃어줄 수 있는 분위기에 대장 갖고 농담하면 어쩌잔 겁니까. 침 뿜어가며 웃음을 참던 틸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하나 있긴 있습니다.”
 “누구?”
 “셀레스테.”
 빌의 얼굴이 굳었다. 틸리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누구누구는 서로 좋아한데요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꺼냈다. 이 나이에 이 놀이를 재밌어한다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남자란 다 유치한 법이다.
 “그 여자 누굽니까? 설마 숨겨둔 애첩입니까?”
 “내 금욕 맹세를 모르나?”
 “압니다. 술, 여자, 아편.”
 “그럼 더 물을 필요 없을 텐데.”
 애첩은 아니고 딸이라기엔 너무 안 닮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한 틸리는 조금 우회적인 질문을 꺼냈다.
 “그 맹세는 왜 한 겁니까? 재미없게.”
 “사람 눈을 멀게 하니까.”
 “좋은 대답입니다. 근데 성인처럼 눈을 떠서 뭘 합니까?”
 “찾아야 하니까.”
 “무엇을?”
 빌은 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틸리는 빌의 눈이 언제나 보던 것과 똑같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사람을 고깃덩이 보듯 하는 그 눈이다. 빌은 말했다.
 “내가 그 여자의 약혼자를 죽였지.”
 누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틸리는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마녀라고 했으면 안 놀랐을 것이다. 요정이라고 했으면 농담이라도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빌의 입에서 나온 것은 피비린내뿐이다. 빌이 다시 말했다.
 “틸리.”
 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빌은 명령했다.
 “숲으로 들어가라.”


*
 “불쌍한 빌.”
 브롬 장로의 넋두리였다. 장로회의 수호자는 자신의 토굴 안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는 짧은 나무막대기에 주먹 크기의 철구가 가죽 끈으로 묶인 철퇴를 오른손에 들었는데,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아무런 장식도 없는 철구를 자꾸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의 앞에는 셀레스테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장로와 달리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보였다. 커다란 굴에 들어온 늑대라면 비유가 맞을까. 그녀는 브롬 장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왜 빌을 죽이려 하는지도 말했다. 그리고 경고했다. 끼어들지 마. 이에 장로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귀신늑대다. 지금 그는 귀신늑대와 단 둘이 있는 것이다. 브롬 장로는 긴장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을 슬퍼한다. 그리고 내가 너보다 영리하다는데 감사를 느낀다. 난 네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셀레스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브롬 장로는 당장 답을 던져주진 않았다. 네가 정체를 까발리면 내가 빌에게 월동지역을 제공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 오산이었어. 다만 빌은 죽어나겠군. 귀신늑대의 함정에 빠진데다, 살아남아도 내가 잔소리를 할 테니.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익인들도 정말 머리를 많이 굴렸군.”
 “내 생각이야.”
 귀신늑대는 마을의 방어를 책임진 브롬 장로를 견제한다. 수호자를 마을 방어란 역할에만 묶겠단 뜻이다. 익인들은 토벌대를 상대한다. 꽤 괜찮다. 브롬 장로는 웃으며 말했다.
 “남부 제국에 재밌는 새가 있지. 그 녀석은 늪지괴물의 이빨에 낀 고기조각을 쫀다더군. 괴물은 그 새를 먹지 않고. 상조란 그런 거야. 너 혼자만이 떠올려선 소용없지.”
 “장로들의 선문답이라면 그만둬. 머리 아파.”
 “해봤나?”
 대답하면 대화가 딴 곳으로 샌다. 그러나 셀레스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른들이 가르쳐줬어. 까마득한 옛날엔, 선조들이 장로들과 그 놀이를 하기도 했다지.”
 “어느 시대인지 짐작도 안 가는데.”
 “붉은 대장로의 시대였대.”
 “신화시대에서도 초기의 이야기군. 지금은 검은색이니까.”
 “검은색? 공석이라고 들었는데. 이 시대에 대장로가 있어?”
 “입조심해라. 그가 온다.”
 셀레스테의 머릿속에서 번개 같이 한 칭호가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약간 질린 표정을 짓더니, 입을 꽉 다물곤 좌우로 눈을 굴렸다. 일부러 취한 모습이다. 브롬 장로는 웃어버렸다.
 “추대는 했지만, 아직 발표는 안 했지. 때가 아니니까. 누군지 짐작 가나?”
 “응.”
 경고가 곧 실마리다. 셀레스테는 광견병 걸린 개를 보는 눈빛으로 브롬 장로를 바라봤다.
 “댁들은 미쳤어.”
 “장로회의 합당한 결정이었어. 그는 모든 비밀의 수호자니까. 그리고 붉은색이나 검은색이나 차이는 없을 거야. 흙바닥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은 더욱 아니다. 신화시대에도 사람은 늑대를 두려워했어. 기회가 되면 사냥하려고 했지.”
 셀레스테는 간신히 대화를 하고 싶은 이야기로 돌릴 줄기를 찾았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어도 그 시대에 빌 같은 놈은 없었을 거야.”
 브롬 장로의 한쪽 입아귀가 올라갔다.
 “빌이 어쨌는데?”
 “혼자서 괴물늑대를 잡았지.”
 “수호자도 할 수 있어. 태양궁에는 그런 재주 가진 놈이 더 많을 거다.”
 “그는 수호자가 아니야. 중부 마법사도 아니고. 그가 가진 것은 도끼와 약간의 비약뿐이었어.”
 “결정타는 총이었다고 들었다.”
 “그런가? 빌이 쐈겠지. 어쨌든 그 셋은 누구나 쓸 수 있어.”
 “중요한 문제냐?”
 “어른들이 화를 낼 만큼.”
 상상하기 싫다. 브롬 장로는 철구를 세게 쥐었다. 애석하게도 가끔 상상은 의지에 반한다.
 시대가 달라졌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홀로 괴물늑대를 죽였다. 이에 경악한 귀신늑대들이 복수권자를 보냈다. 이해할만한 이야기다. 기사들은 총을 싫어한다. 신화시대의 잔재들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문득 브롬 장로는 의문을 떠올렸다.
 “넌 싸우기 싫었나?”
 셀레스테는 조소했다.


*
 숲은 고요했다. 날이 냉습한 덕택에 독충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진흙 밟는 소리만 약하게 들려올 뿐이다. 생각이 방해 받지 않는다.
 현실적이다. 석궁의 지렛대를 만지작거리며 틸리는 생각했다. 마녀와 요정은 보기 드물지. 하지만 정인을 잃은 여자는 흔한 이야기다. 틸리도 그런 여자를 만든 적이 있다. 빌은 훨씬 흔히 경험했으리라. 빌의 명성에 비하면 참 보잘 것 없고,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현실적인 이야기.
 전설은 다 그런 법인가. 틸리는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따라왔어.”
 동료들은 틸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틸리를 바라보았다. 틸리는 그 눈빛에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
 한참 걸은 끝에 기괴한 조형물이 나타났다. 돌무더기 한가운데 솟은 장대 끝에 사람의 두개골이 꽂힌 것이었다. 장대 중간에는 기울어진 십자가가 매어져 있는데, 창자로 만들어진 낡은 끈이 두개골의 소유였던 모든 뼈들을 거기다 묶어놓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가 질리겠지만, 북부인의 후예인 석궁병들은 이 조형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틸리가 태평스럽게 말했다.
 “죽은 자의 왕이군. 진짜 뼈로 만든 건 처음 보는데.”
 엄밀히 말하면 왕의 숭배자들이 만든 우상이다. 그것은 왕이 일어선 직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흔하다. 이런 것은. 부랑자들이 왕을 두려워하며 자비와 가호를 구하기 위해 바친 제물이다. 때로는 그저 죽은 시체를 썼을 뿐이지만, 애꿎은 동료를 죽여 만들기도 했다고 들었다. 저 창자는 사람의 창자일까, 동물의 창자일까.
 광기와 고통의 시대가 낳은 묘비다.
 틸리는 그 묘비의 주변을 잘 살펴보았다. 곧 그는 돌무더기 뒤에서 사슴의 머리를 발견했다. 잘 도려낸 허벅지살 위에 올라간 그 머리는 반쯤 썩어 구더기가 끓고 있는데, 입술이 자꾸 실룩이고 있었다. 구더기일까. 아니면 왕의 권능일까. 어쨌든 바쳐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익인들이 나무 아래에서 일꾼으로 부리는 부랑배들이 여전히 제물을 바치는 모양이다.
 즉, 적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는 미리 준비한 무기를 꺼냈다. 송진을 바른 종이로 싸매고 도화선을 꽂은 화약 덩어리. 비가 왔었으니 화재는 잘 안 날 것이다. 설령 나더라도 익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고. 하지만 소리는 요란하며 불씨도 사방으로 튈 테니 도발하기엔 제격이다.
 염소 발처럼 생긴 지렛대를 석궁의 양 옆에 붙은 돌기에 건다. 지렛대에 연결된 부속품에는 시위를 건다. 석궁의 발판에는 발을 건다. 당긴다. 시위가 팽팽해지자 그 위에 화약뭉치를 올렸다. 준비완료. 10명의 석궁병들은 거의 같은 과정을 거친 다음, 성냥을 꺼냈다.
 틸리는 숲 속을 겨누며 말했다.
 “여기서 쏘고 튀자.”
 틸리의 말에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틸리는 간단히 설명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익인들 가까이 갈 필욘 없잖아. 도발할 뿐인데.”
 동료들은 수긍했다. 그들은 성냥을 하나씩 꺼냈다. 화승에 느긋하게 불을 붙이고 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마자 쏘고 튀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수하면 죽는다. 자폭하는 꼴이 되거나, 익인에게 공격당하거나.
 10개의 석궁이 사방으로 겨누어졌다.


*
 “뭐랄까. 생각보다 시시한 이야기로군.”
 마누크의 감상이었다. 전에 갖고 있던 화승총은 어느 미늘창병에게 팔아버리고 새 무기를 든 그는 전투망치를 받침대 삼아 그것을 올려둔 채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계집애의 정체를 말하지 않은 것뿐인가?”
 빌은 반응하지 않았다. 시론이 봤다면 적잖이 불안해했겠군. 게드 장로는 혀를 차더니 끼어들었다.
 “사실이라면 그 계집애는 굉장히 대담한 거야. 설마 중부의 귀족은 아니겠지?”
 빌은 망설인 끝에 겨우 대답했다.
 “마법사가 아니다.”
 “그럼?”
 게드 장로가 아니라 마누크가 질문했다. 그는 대답에 따라선 빌을 씹어 먹어버리겠다는 심정을 눈빛 한 구석에 놔두었다. 빌은 그 뜻을 이해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은 아니었으면 좋겠단다.
 빌은 도끼 자루로 땅을 한차례 때렸다.
 “너희 중 누구도 대장을 추궁할 권리는 없다.”
 마누크와 게드 장로는 동시에 혀를 찼다. 빌은 그들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을 보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누크가 넋두리처럼 말했다.
 “성의 있는 대답을 못 듣는다니까. 대장은 자기 이야기가 너무 없어.”
 빌은 더 이상 침묵하기 힘들었다. 저 망할 놈, 아니 친구. 빌은 자백 같이 말했다.
 “난 젊었을 때 선왕의 군대에 있었다.”
 게드 장로는 눈을 부릅뜨곤 빌을 돌아보았다. 마누크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 외의 모두의 시선 또한 집중되었다. 빌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30년 전 이야기지. 화약이 나오기 전이다.”
 장로의 시선이 마누크의 수총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꽉 쥐었다.
 “선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였지. 인기가 많았다. 최초로 장로회의 지지를 받았을 정도니까. 그는 죽은 자의 왕과 함께 말을 달릴 수도 있었어. 그의 정예병들은 거인처럼 성벽을 깨고 말보다 빨리 광야를 달렸다. 선왕이 말했지.”
 빌은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병사들은 애가 타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그의 입이 열렸다.
 “우리들에겐 왕국의 절반을 줘도 아깝지 않노라고.”
 “전설 속의 그 정예병!”
 한 병사가 기어이 비명처럼 말했다.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왕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가 갑작스럽게 죽지만 않았다면. 결말은 북부인 모두가 잘 안다. 실망한 장로회는 지지를 철회했고, 정예병들은 흩어졌다. 죽은 자의 왕은 자신의 일에 바빴다. 중부의 귀족들이 왕을 독살했단 소문이 퍼졌지만 진상은 시체 썩은 물을 따라 흙바닥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우리가 그와 어깨를 함께하고 싸웠던 것을. 그 무엇도 우리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화시대의 잔재는커녕, 저 가증스런 태양궁의 군대조차도.”
 빌은 병사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도 그렇다.”
 누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시선을 빌에게서 떼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를 끝냈다.
 “그 무엇도 내겐 문제가 될 수 없다.”
 셀레스테든 익인이든. 빌은 엄중하게 선포한 후, 다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물었다.
 “좀 성의 있는 이야기 같은가?”
 마누크는 실망했다. 결국 대답은 아니잖아.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애 같은 놈들.
 “약간은. 재밌었어.”
 마누크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는 대장을 흘겨보더니 본대 쪽으로 몸을 돌리곤 항복 선언을 내뱉었다.
 “그 여자는 대장이 알아서 처리하슈.”
 빌은 웃었다.


*
 셀레스테는 브롬 장로 앞에 앉아 끓는 냄비만 바라보았다. 장로는 석상 같이 셀레스테만 응시했다. 셀레스테가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늦게 토굴로 들어온 약사 노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장로와 그녀를 곁눈질했다. 쓰레기를 마저 정리하고 약사 노인과 비슷한 시기에 돌아온 반트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신부에게 튄지 오래다. 약사의 손에 쥐어진 숟가락이 애꿎은 냄비만 때렸다. 그만 저어도 되는데.
 “고약한 냄새야.”
 셀레스테가 말했다.
 “이런 오수를 뭐가 좋다고 들이키는지.”
 약사 노인은 전쟁비약에 내려진 혹평에 당황했다. 분명 전쟁비약의 냄새는 지독하다. 처음 마셔보는 사람은 구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북부를 지킨 힘이자 장로회의 창조물이다. 장로회와 북부를 대놓고 모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브롬 장로를 돌아본 약사는 그가 여전히 굳어 있음을 확인했다. 브롬 장로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셀레스테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궁금하다는 뜻이 아니라 확신하느냔 뜻이 담긴 질문을 던졌다.
 “살아 돌아올 것 같아?”
 브롬 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낸들 아나.”


*
 폭음이 들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틸리와 그의 동료들은 총알 같이 달려왔다. 그들은 빌의 매복조를 그냥 통과해, 본대까지 질주했다. 빌은 그걸 기다렸다.
 “총원 대기하라.”
 석궁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빌이 명령했다. 이제 곧 익인들이 분노해 달려들 것이다. 도끼 위에 화승총을 올려놓은 총병들은 긴장하여 머리 위와 본대를 힐끗힐끗 번갈아 보았다. 익인들이 본대의 머리 위로 오면 쏜다. 간단하지만 실수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엉뚱한데 총탄을 낭비하면 매복은 실패다. 특히 중대 화력의 최고봉인 대포를 담당한 포병들은 더욱 긴장했다. 그들은 사격 후 곧바로 대포 꽁무니에서 빈 자포를 빼고 새 자포를 넣을 때만 노렸다. 빨리 장전해야 빨리 쏜다. 연속사격을 먹여야 적의 전력이 급감하리라.
 그래서 그들은 빌이 숲 속으로 시선을 돌리자 크게 당황했다.
 “어, 대장?”
 포병들이 하늘이 아닌 엉뚱한 곳을 보는 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빌은 놀랐다. 무엇에? 그를 제외한 병사들 중 마누크가 먼저 이상을 알아챘다. 그는 빌과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랑자 놈들이라도 끼어든 거야? 설령 그렇다 해도 익인들이 매복에 걸리기만 하면 부랑자 따위는 무시해도…….”
 “부랑자가 아니야.”
 신음 같은 빌의 답변. 곧 게드 장로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는 눈을 비비고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 익인들의 날갯소리가 가까이 접근했다. 참다못한 총병들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빌이 외쳤다.
 “총원, 조준!”
 고참병들은 어딜 조준해야 할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들은 일제히 방향을 돌려 숲을 겨누었다.
 “쏴!”
 30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자욱한 화약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조각난 나뭇잎들이 하늘을 날았다. 포병들은 고각으로 올려놓은 포가를 내려놓느라 그 사격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들은 당장 숲으로 포구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빌은 그들의 어깨를 툭 치곤 전력을 다해 달렸다. 본대 방향으로.
 “뛰어!”
 당황한 포병들은 즉각 대포를 들고는 그 뒤를 따랐다. 게드 장로, 마누크, 다른 총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들은 본대에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론 부중대장의 외침이 명확하게 들렸다.
 “왕관 대형! 왕관 대형!”
 일렬횡대로 넓게 늘어서 있던 보병대가 빠르게 한 점으로 집결했다. 그제야 총병들은 본대를 위협하는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넓은 광야에선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웅변하듯, 거대한 괴물늑대들이 본대의 뒤에서 쏜살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길고 긴 늑대 울음소리. 총병들은 자신들의 등 뒤에 있는 것 또한 무엇인지 직감했다. 몇몇 창병들의 비명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늑대들이다!”
 숲에서, 그리고 숲 밖에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괴물늑대들과 훨씬 작은 늑대들이 무리지어 본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정작 가장 주의하던 익인들은 아직 숲 위를 날면서 그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완전히 당했다.
 게드 장로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마구 휘저었다. 마누크는 고래고래 괴성을 질러댔다. 시론과 키체커는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틸리와 코마는 상식을 벗어나는 광경에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장창의 숲 근처에서 빌은 돌아섰다. 그는 마지막 총병을 자신의 어깨 너머로 통과시킨 다음, 그들을 쫓아오는 한 무리의 늑대 중 선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무리의 다른 놈들에 비해 유달리 빠른 젊은 놈이었다. 놈이 도약했다. 그 순간 빌은 손을 뻗기로 결정했다.
 “한갓 개새끼가!”
 크게 벌어진 아가리 속으로 검은 장갑이 처박혔다. 늑대는 당황했다. 혀를 잡혔다! 늑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장갑을 깨무는 등 발악을 해봤지만 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가죽 장갑은 기대 이상으로 튼튼했다. 이런 놈은 최대한 잔혹하게 처리해야 한다. 빌은 그대로 늑대를 아래위로 휘둘렀다. 과장 없이, 풍차처럼.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즉사다. 선두를 뒤따라오던 늑대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애초에 늑대는 인간에게 잘 덤비지 않는다. 성인남자, 그것도 완전무장 했다면 특히 그렇다. 가장 빌에게 근접했던 무리는 본능이 경고하는 위협 때문에 일단 물러났다. 보병대에서 환성이 터졌다. 피해 없이 매복조를 본대에 합류시킨 빌은 그제야 늑대 아가리에서 손을 빼곤 몸을 돌렸다. 부중대장 시론이 환호하는 동료들을 헤치고 황급히 다가왔다.
 “대장! 안 다쳤어?”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 범벅인 왼손을 들어보였다.
 “전혀 문제없다. 홀더 대위는?”
 “개구리가 옷 속에 들어간 여자애 같아.”
 무리도 아니다. 빌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온갖 저주를 떠올렸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셀레스테, 이 빌어먹을 계집애! 이런 것이 기다릴 줄은 빌도, 시론도, 키체커도 예상하지 못했다. 빌은 본대 주변을 맴도는 괴물늑대들 중에 셀레스테가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너도 왕족이라 이거지?
 빌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대오를 유지하라.”
 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집한 보병대는 굳건한 요새와 같다. 총병들은 자신의 정면에 도끼를 놓고 그 머리 위에 총을 올렸다. 시론이 큰 소리로 외쳤다.
 “총병, 반대행진!”
 제일 앞 열의 총병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흰 연기가 사방에서 치솟았다. 총탄 세례다. 늑대들 중 일부가 픽픽 쓰러졌다. 빈총을 든 병사는 뒤로 가고, 그 다음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도끼를 놓고 그 머리 위에 총을 올린다. 방아쇠를 당긴다. 다시 보병대의 사방으로 총탄이 빗발쳤다. 총병의 숫자가 80명이다. 사격전이라면 꽤 할만하다.
 하지만 3번째 사격까지 나설 기회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단 2번만 쐈을 뿐이지만, 늑대들의 전력질주는 거리를 짧은 시간 안에 극복했다. 이젠 창병들이 나서야 했다. 지휘관이 당황해도 그들은 할 일을 명확히 알았다. 괜히 왕의 상비군이 아니다. 위협이 다가오자 총병들은 황급히 대형 안이나 그 뒤로 물러났다.
 늑대들이 미친 듯이 돌격해오는 가운데, 창병들이 그들을 겨누었다. 병사들은 견고한 장창 벽에서 배틀크라이를 외쳤다.
 “나의 왕이여!”
 두 집단이 격돌하며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