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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4 02:40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266 추천:2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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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장교의 이름은 깅 홀더. 보병대위로 창병중대의 지휘관이다. 원래 락토 개척촌에서 좀 떨어진 소도시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국왕의 명령을 받고 브롬 장로의 새 사업을 도우러 왔다. 하루 빨리 해결하란 명령 때문에 중대는 놔두고 일부 간부들과 함께 말을 달려 먼저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브롬 장로가 아침잠이 없는 노인이라 망정이지, 하마터면 결례를 저지를 뻔했다며 웃었다.
 빌은 그 사실이 굉장히 우울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셀레스테의 모습은 광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피 뭉치와 술병을 끌어안은 채 잠든 것이었다. 잠에서 깬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빌은 그녀가 홀더 대위의 외침을 들었으리라 생각했다. 설령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조금 있으면 소란스러워진 마을 분위기에서 무엇이든 알아챌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급히 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홀더 대위를 아성으로 안내하던 빌의 말은 조금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홀더 대위는 코웃음을 쳤다.
 “괜찮네. 오늘 당장 싸우러 나갈 생각은 아니니까. 만취한 총병보다 위험한 것이 흔하겠나?”
 빌은 그가 귀신늑대의 꼬리를 밟았노라고 말하진 않았다. 대신 아성 안에 마련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북쪽으로 큰 나무창문이 하나 나고 한가운데 커다란 떡갈나무 원탁이 있을 뿐, 을씨년스럽다는 상투적인 말이 어울리는 회의실이었다. 빌은 원탁 위에 초롱을 올려두어 실내 특유의 어둠을 밝혔다. 창문을 열어도 되겠지만,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데다 북쪽으로 난 창문은 채광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해볼까?”
 홀더 대위는 창문 앞자리를 차지해 앉았고, 그의 옆에는 그의 보좌관이 앉았다. 그 뒤에 시종이 섰다. 빌은 간부 역할을 해줄 사람들이 마누크처럼 쓰러져 자거나 게드 장로처럼 작전회의에 관심이 없다는 암울한 현실 때문에 부중대장인 시론, 신입 틸리와 동석했다. 키체커는 간부대우지만 진짜 간부는 아닌 탓에, 그의 조수 코마를 깨워서는 회의실의 정문을 지켰다. 그들이 셀레스테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다.
 “빌 보병대위, 귀관의 중대 구성은 어느 정도인가?”
 “간부 포함 총원 백 명으로 장창병 10명, 미늘창병 10명, 총병 65명, 석궁병 10명, 경포병 3명에 종군 장로 1명입니다.”
 홀더 대위는 실망한 기색이 적잖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좀 적군. 난 총병 백 명이라고 들었는데.”
 “총병이 갑옷을 입고 도끼를 들어도 창병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10명 정도는 더 총으로 무장시킬 수 있습니다.”
 빌의 중대는 상황에 따라 병사가 드는 무기가 바뀌는 편이다. 총병은 도끼나 망치 따위로 무장하고 있지만 창도 어느 정도 쓸 수 있다. 반대로 창병 또한 총을 쏠 줄 알아야 한다. 겨우 백 명이서 적지나 다름없는 땅을 가로지를 땐 기동력과 유연성이 중요한 법이다.
 “그런가. 내 중대는 157명이다. 간부 11명, 장창병 50명, 도끼창병과 미늘창병이 80명, 총병 16명. 이틀이나 사흘 뒤엔 도착하겠지.”
 왕의 중대 치곤 벽지에서 조금 오래 머문 모양이었다. 왕과 가까운 부대가 아니면 200명 정원을 다 채우는 중대는 드물다. 아마 그 정도가 평균이자 한계일 것이다. 그래도 도합 257명. 총병은 그 중 81명. 익인 토벌에는 나쁘지 않은 숫자다.
 “익인 숫자는 얼마나 되나?”
 “모릅니다만, 남녀노소 다 합쳐도 백 명을 넘길 것 같진 않습니다.”
 그 어떤 익인 공동체도 거대하진 않다. 1개 공동체가 50명에서 100명이면 많은 편이다. 홀더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판 놀아볼만하겠군. 예상되는 공격 수단은?”
 “투창, 활, 투석 정도입니다. 수총이나 화승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놈들이 우리 공격을 예상했다면 화염병이나 화약주머니 따위도 의심해볼 수 있겠지만, 브롬 장로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번 일을 비밀로 해두었으니 알아채진 못했을 겁니다.”
 “좋아. 빌 대위, 먼저 말해보게. 어떻게 싸워야겠나?”
 빌은 홀더 대위의 심중을 알아챘다. 빌이 뭔가 대답을 내놓으면 홀더 대위는 일단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략수적 따위보다 잘났다는 걸 꼭 증명해야겠다 이 말이지? 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만을 억지로 삼켰다. 불만이란 끈적끈적한 가래와 같다. 빌은 불쾌감을 느끼며 대답을 내놓았다.
 “보병전투는 밀집대형이 최고입니다. 익인을 상대로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병중대 좌우에 총병중대를 배치해 전투를 벌이는 것이 좋습니다.”
 총의 단점인 낮은 명중률을 만회하려면, 총병들은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 밀집해서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익인들이 장창 방진에 돌격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좋다.
 “흠. 하지만 화염병 따위가 나온다면 밀집 방진은 부담이 좀 되는데. 익인 따위에 왕의 군대가 크게 데었다는 소문은 꽤 곤란하다고. 게다가 하늘을 나는 익인들을 잡기엔 81명이 만들 화망이 좀 좁은 편이잖나.”
 예상대로 홀더 대위는 빌의 작전을 부정했다. 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자네가 총병 30명을 직접 골라 지휘하게. 자네들은 매복조야.”
 “매복?”
 “하늘에서 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곳도 있지. 숲 가까이에 1열 횡대로 붙어 있게.”
 “나머진 어디에 배치합니까?”
 “자네들보다 뒤에서 1열 횡대 산개대형으로 배치할 거다. 화력을 집중시키긴 어려워도 화망은 넓어지겠지. 산개대형이라도 돌격해오는 익인 몇 명 정도는 창병으로 견제 가능할 테니까 문제없다. 매복조는 2회 화력 투사 후 본대에 합류해 계속 사격한다.”
 익인들이 본대를 공격하려 할 때 매복조가 화력을 집중 투사한다. 본대는 계속 사격을 거듭한다. 허를 찌르겠단 뜻이다. 빌은 그 작전에 다시 반대했다.
 “1열 횡대는 익인들이 본대 바로 앞으로 날아올 때나 가능한 작전입니다.”
 “날아오게 할 거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석궁병들이 있잖나.”
 “도발입니까?”
 “그래. 석궁병들이 유인하고 총병이 최대한의 타격을 입힌다. 놈들이 후퇴하면 우린 숲으로 들어가 전투를 재개한다. 다 때려 부수는 거야.”
 석궁병들로 익인들을 유인한다는 생각은 빌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숲으로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숲은 익인과 늑대의 영역이다. 잘못하면 혈전을 각오해야 한다. 홀더 대위와 약간 다른 운용법을 내놓았다.
 “숲으로 들어가는 건 좋지 않습니다. 석궁병들을 다시 보내 유인해야 합니다.”
 “또 속을 리가 없잖나.”
 은근슬쩍 매복 작전을 공고히 한다. 빌은 기어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예. 매복에 걸리면 익인은 그 피해가 적든 크든 다시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매복을 하지 말고 견고한 밀집대형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숲으로 들어가선 안 됩니다.”
 “어느 쪽에 한계가 먼저 오는지 시험해보잔 말 아닌가? 무의미하고 무식한 방법이야. 놈들이 아군을 과대평가하거나 겁에 질려서 딱 한 번 싸우고는 도망칠지도 몰라. 그러면 초기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해. 숲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익인들을 토벌한단 말인가?”
 “몇 번이고 끌어낸 다음, 충분히 약해질 때 들어가면 충분합니다. 익인은 도망치기 더 바쁠 겁니다.”
 만약 빌의 작전이 채택된다면 석궁병이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틸리는 신음을 흘렸다. 홀더 대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익인들이 끝내 기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땐 겨우 10명의 석궁병들이 익인 전부를 상대하라고? 너무 힘든 요구야. 난 그들만으로 익인들을 마저 토벌할 수 있다곤 생각 안 해. 첫 일격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히고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간단해.”
 시론이 틸리를 쏘아보았다. 틸리는 약간 벌어진 입을 황급히 닫으며 고개를 숙였다. 빌은 한숨을 내쉬곤 해답을 내놓았다.
 “도발에 반응하지 않는 족속은 없습니다. 끝내 나오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투입하면 적은 약해집니다. 부족하거나 손실이 생긴다면 총병이나 사냥꾼을 투입해도 됩니다.”
 “그건 꼭 사냥 같군.”
 “맞습니다.”
 숨어서 쏘고 달아난다. 홀더 대위는 그것이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오래 걸려. 며칠을 날려먹을 수 있다고.”
 “하늘 나는 것들을 잡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못할 것이 어디 있나?”
 빌은 입을 다물었다. 매복조라는 계책을 떠올리고 하루 안에 익인들을 축출한다면 홀더 대위로서는 훌륭한 성과다. 왕의 군대에서도 그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빌의 오래 걸리는 작전은 홀더 대위에게 도움이 안 된다. 빨리 해결하고 빨리 복귀하는 것보다 미덕은 없으니까. 빌은 다시 적지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섣불리 들어갈 순 없습니다. 숲은 익인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터전이지. 돼지우리나 창고 따윌 박살내놓는다면 그 효과는 커. 익인은 당장 여길 떠날 수밖에 없지. 겨울이 오기 전에 다른 땅에서 허드렛일이라도 찾아야 할 테니까.”
 “울타리를 부수거나 창고에 불을 놓는 것 정도는 석궁병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 미친 빌의 명성에 금 가는 소리 좀 그만 하게. 부하들만 내세우려고 하다니, 겁쟁이란 소릴 듣고 싶나?”
 빌은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겁쟁이란 소리가 듣기 싫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반박하려는 순간, 들릴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누군가 나무를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 시론은 소리가 들려온 곳과 정반대 방향, 즉 키체커가 지키고 있는 정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문을 두들긴 거야?”
 틸리의 결론은 시론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그는 떡갈나무 탁자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탁자를 아래에서 두들긴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홀더 대위, 처음부터 홀더 대위가 있던 방향을 볼 수 있던 빌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결론을 내렸다.
 “어, 빌 대위. 이 창 밖에 사람이 설 수 있나?”
 “발 딛을 곳은 없습니다.”
 허공을 걸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 따윈 존재할 수 없다. 고명한 마법사나 수호자 브롬 장로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런 마법사가 여기 올 일은 없고 브롬 장로가 계단을 내버려둔 채 날아올 것 같지도 않다. 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쇠도끼를 양손으로 쥐었고, 홀더 대위와 그 부하는 검을 뽑았다. 시론과 틸리도 당황하더니 곧 각자 권총과 검을 뽑고 창문을 노려보았다.
 “들어가도 될까요?”
 창 밖에서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틸리는 비명을 질렀다.
 “요정이냐!”
 “아니, 익인이다.”
 빌이 말하는 순간,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창문을 안쪽으로 열었다. 그러자 창틀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부드러운 빛과 함께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날개를 움직이기 위해 큰 천에 끈만 몇 개 엮어놓은 펑퍼짐한 옷을 입은 전형적인 익인이다. 흰 피부에 긴 은발, 파란색 눈동자. 호리호리한 미인으로, 무기는커녕 뾰족한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보좌관은 홀더 대위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위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검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용건을 물어보고 싶은데.”
 여자는 반갑다는 의미가 다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락토 숲의 익인 대표인 엘이에요. 빌 대장님과 협상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빌은 연거푸 놀라야 한다는 현실이 슬펐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질문했다.
 “협상?”
 “저희는 브롬 장로가 무력을 써서라도 목재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그 시기는 분명 빌 대장께서 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가 되겠죠. 저희가 잘못 생각했나요?”
 회의실 안 사람들은 다 함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엘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슬프게도 정답인 모양이군요. 저는 그 사안에 대해서 다시 논의를 하고자 찾아왔답니다. 빌 대장님, 브롬 장로가 원하는 양의 목재를 전부 벌채하는 것을 막아주셨으면 해요. 저희는 그가 요구한 목재의 최소 3할은 포기하길 원하고 있답니다.”
 엘의 말이 길어질수록 혼란 또한 길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빌은 엘이 숨을 고르는 사이에 그녀의 생각 중 여러 잘못을 엄숙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이번 일의 지휘권자는 내가 아니라 홀더 대위님이다. 그리고 우린 협상 대상이 될 수 없어. 브롬 장로님께 직접 가지 그랬나?”
 “무력의 소유자에게 직접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빌은 정치 감각이 별로 없는 익인 여자에게 왕국 행정에 관해 강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딱딱하고 어색한 말투로 선생 노릇을 하는 대신 회의실을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홀더 대위님, 브롬 장로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다시 주도권을 넘겨받자 홀더 대위는 이에 만족해야 할지 불만족해야 할지 갈등에 빠졌다. 그러나 갈등은 길지 못했다. 엘은 대답을 요구했고, 빌은 몸을 돌려버렸기 때문이었다. 홀더 대위가 전전긍긍하는 사이 빌은 시론과 틸리를 데리고 회의실 정문을 열었다.
 “회의 끝났나?”
 복도 끝 계단에서 소년 코마와 함께 앉아있던 키체커의 질문에 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은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셀레스테는?”
 “아직 자고 있어.”
 “별 다른 일은 없나? 가령 익인이 마을 위를 난다던가.”
 “없는데. 무슨 일이야?”
 “왔다.”
 “뭐?”
 “익인이 왔다. 재협상하자고.”
 키체커는 회의실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곧 한숨을 내쉬곤, 빌을 동정하고 락토 개척촌을 저주했다.
 “락토가 기연이 붙는 마을이 됐군.”
 “브롬 장로님을 모셔와야겠다. 이건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재협상인가?”
 “글쎄. 별로 가능성은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장로님을 모시긴 해야지.”
 빌은 키체커의 눈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냥꾼의 눈은 대화를 겨냥하지 않았다. 그는 자꾸만 총안을 힐끗거렸다. 그 의미는 쉽게 파악되었다. 키체커는 익인 토벌이 셀레스테가 개입하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 예측에는 빌도 이견이 없었다. 작전회의에서 밀집대형을 완고히 주장한 것도 셀레스테와 익인을 동시에 상대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키체커의 속내를 들여다 본 빌은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재협상이 성공하면 좋을 텐데.”
 익인 토벌이 없으면 셀레스테의 기회도 없다. 셀레스테가 등장하기 전까진 익인을 남김없이 축출하느니 무슨 일이 있어도 토벌이 성공해야 한다느니 말했던 사람들이 이젠 재협상과 대타협을 바란다. 웃기는 일이었다. 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이 끼어들어도 이보단 덜 혼란스럽겠어.”
 “더 이상 농담하지 마라. 꺼내는 농담마다 현실이 되니 웃음도 안 나온다. 코마, 브롬 장로님을 모셔 와라.”
 소년은 즉각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회의실에서 아성 뒤쪽의 토굴까진 얼마 걸리지 않는다. 다들 침묵하는 가운데 곧 브롬 장로가 코마와 함께 올라왔다. 이미 홀더 대위의 방문을 겪은 그는 꽤 멀쩡한 외관을 갖추었다. 하지만 누가 보기에도 불쾌한 기색이 적잖았다.
 “익인이 왔다고?”
 “엘이라고 합니다.”
 “그 여자로군. 제길, 지난번 협상이 깨진 것도 그 여자 탓인데.”
 “예?”
 “나도 바보는 아니야. 무조건 떠나라고 한 적 없어. 조건을 제시했지. 하지만 그 여자가 거절했어. 이곳 익인들의 수장이라 발언권도 막강해. 그녀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지.”
 “그녀는 목재의 3할은 포기해달라고 제시했습니다.”
 그 순간 브롬 장로는 장로회에서 들었다간 당장 수호자 칭호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욕설들만 골라 읊었다. 연륜과 고서적과 교양을 차례대로 무색케 한 다음, 브롬 장로는 오른손에서 세 손가락을 세웠다.
 “3할, 3할, 3할! 계속 그 소리야! 왕이 요구하는 목재인데, 무슨 재주로 수량을 3할이나 줄이란 말이야?”
 “곤란하시겠군요.”
 “빌.”
 “예.”
 “엘을 죽여.”
 빌과 시론, 키체커는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지만 틸리와 코마는 입을 크게 벌렸다. 비명을 지르려다 가까스로 참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틸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협상하러 온 여자를 죽이란 말입니까?”
 브롬 장로는 틸리를 힐끗 살펴봤다. 그는 오래 전엔 틸리가 빌의 선대에 없었음을 기억해냈다.
 “신참이지?”
 “예. 1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럼 잘 배워둬. 사안이 민감해지면 사절이 죽는 법이야.”
 나쁜 소식을 가져간 사절, 혹은 적진으로 들어간 사절이 죽어 나온다는 것은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틸리는 겨우 이 정도 사안에 사절을 죽이느니 마느니 해야 하는지 의심해보았다. 빌은 틸리를 향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왕께서 요구하는 목재다. 충분히 민감하겠지. 저 여자의 고집이 없으면 협상이 더 쉬워질 수도 있고.”
 “재협상은 없다. 빌, 벌써 늙었나?”
 브롬 장로는 빌의 말을 부정했다. 이빨이 빠졌냐는 말에 빌은 대답하지 못했다. 셀레스테가 귀신늑대라는 것을 털어놓을까? 익인과 함께 공격해온다면 곤란하다고 말할까? 어렵다. 마을 안에 귀신늑대가 들어온 것을 알면 브롬 장로는 크게 화를 낼 것이고, 좋은 월동지역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상비군 장교에게 저주 받았냐고 추궁당할 수도 있다. 빌은 도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키체커가 그 손의 움직임을 감지하곤 입을 열었다.
 “그냥 쫓아낼 생각은 없으십니까?”
 “사냥꾼이 새를 놓아주겠다고?”
 “때론 놔줄 필요도 있습니다. 성의를 보이는 사절을 죽이는 건 무력충돌보다 더 자극적입니다. 원한을 사는 건 쉽지만 화해를 사는 건 어렵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재협상할 기회가 오거나, 나중에 익인에게서 협력을 구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쩌시렵니까?”
 “그럴 일은 없어. 수호자가 익인의 힘을 빌린다니, 웃기는 이야기지.”
 “브롬 장로님의 힘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마을은 그렇지 않단 겁니다.”
 “무슨 소리냐?”
 “장로님은 왕의 상비군과 함께 이 마을을 떠나실 겁니다. 우리도 봄이 되면 떠나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익인과 계속 마찰을 겪는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롬 장로는 사냥꾼의 날카로운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답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확실하게 끝내야죠. 깡그리 몰살시키거나, 내쫓거나, 확약을 맺어야 합니다.”
 “그럼 몰살시켜! 내가 왜 자네들을 고용했는지 모르겠나? 할 일을 해!”
 그 대답에 키체커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 처음 이 토벌 의뢰를 받았을 땐 빌도 익인들을 몰살시킨다는 방안을 어느 정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을 이제 와서 뒤엎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키체커는 자신답지 않게 말을 많이 꺼내놔야 하는 설득이란 행위에 심한 저항감을 느꼈다. 다행히 빌이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브롬 장로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틸리는 장로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찝찝하군요. 장로님이 직접 그 여자를 죽이든가 쫓아내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잖습니까?”
 “능력은 둘째 치고, 브롬 장로님이 말했듯 그건 우리 일이지. 찝찝하다는 말엔 동의한다.”
 빌은 지금이 위기라는 사실까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도끼를 들어올렸다.
 “어쩌지?”
 시론이 질문을 꺼냈다. 틸리와 코마 앞에서 귀신늑대니 셀레스테니 하는 말을 꺼낼 순 없었기에 질문은 상당히 축약되었다. 하지만 빌과 키체커는 무리 없이 이해했다. 빌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죽이려면 당장 문을 열고 총을 쏘는 것이 좋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안의 장교님들이 맞지 않을까요?”
 소년 코마가 문제를 제기하자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마는 동의를 확인하자마자 해답을 내놓았다.
 “대장께서 그녀를 밖으로 쫓아낸다면, 사부와 제가 종탑에서 그녀를 쏘겠습니다.”
 셀레스테는 당장 눈을 뜨겠지. 하지만 방법이 없다. 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길 바라야지. 다들 아직 자고 있나?”
 “자고 있어. 자고 있는 척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키체커가 확인해주자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몸을 돌려 회의실로 걸어갔다. 키체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더니 곧 종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틸리와 시론은 서로를 바라본 다음 의미가 다른 한숨을 내쉬곤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빌은 나무 문짝 앞에 섰다. 귀를 기울여보니, 그 너머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엘의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확인한 빌은 셀레스테가 총성에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있기를 기도했다. 덧없는 짓이지만.
 군홧발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