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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4 02:38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223 추천:1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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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레스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사슬갑옷에 얽히지 않고 부드럽게 끌려왔다. 그녀는 빌을 내려다보았다. 빌은 셀레스테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완고한 자세로 잠들었다. 셀레스테는 양초가 너무 짧아져 빛이 가물가물해진 초롱을 들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권총을 손에 쥔 부중대장이었다. 셀레스테는 그를 힐끗 보곤 실종자에 대해 질문했다.
 “사냥꾼은?”
 “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시론이 간단히 대답하자 셀레스테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녀는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키체커의 위치를 파악했다. 아성의 종탑 꼭대기를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시론은 감탄했다.
 “이 밤에 저기서 날 맞춘다고?”
 거리는 적게 잡아도 50야드. 평범한 화승총을 든 사수는 대낮에도 절대 셀레스테를 맞출 수 없다. 그러나 빌과 그 부하들은 키체커의 능력을 믿었다.
 “내 머리 위에 얹은 사과라도 잘만 맞출걸.”
 셀레스테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말을 불신하여 시론을 공격하진 않았다. 그녀는 총에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도도한 발놀림으로 몸을 홱 돌렸다.
 “대장이 약한 소리 하는 것은 처음 봤다.”
 시론이 입을 연 순간 셀레스테는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곤 그를 돌아보았다. 시론은 그녀를 계속 노려보았다. 셀레스테는 얼굴에 드러난 당황함을 지우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질문했다.
 “흠. 왜 그럴까?”
 “글쎄. 일단 내가 아는 한, 넌 대장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여자 중 하나야.”
 셀레스테는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녀 혼삿길 막지 마.”
 시론은 기어이 웃어버렸다. 셀레스테는 마주 웃고는 말했다.
 “흠. 외로웠다는 거야?”
 “모르지. 난 분명 최고참이지만, 대장을 따라다닌 지 8년 밖에 안 됐어.”
 “8년이나 따라다니고도 모르겠단 거야?”
 “대장은 비밀이 많지.”
 “원수가 가장 좋은 친구란 말이야?”
 시론은 대답을 망설였다. 셀레스테는 그것이 자신의 짓궂은 질문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론이 꺼낸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만 여기서 화해할 생각 없나?”
 “화해라고?”
 셀레스테는 코웃음을 쳤다. 빌이라면 여기서 포기했겠지만 시론은 굴하지 않았다.
 “키체커만이 아니다. 지금 이 마을의 장벽엔 여러 초병들이 있어. 네가 우리 배에 탈 재주가 있다면 모를까, 앞으로도 언제 어디에서든 상황은 비슷하겠지.”
 셀레스테는 반박하지 않았다. 배에 타더라도 빌을 죽이긴 어렵다. 빌이 미치지 않는 이상 셀레스테는 그와 같은 배를 타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 용케 타더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배가 가라앉을 것이 분명하다. 기적이 일어나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땐 빌의 부하들이 그녀를 살려두지 않는다.
 “넌 대장을 못 죽인다. 싸우면 둘 다 크게 다칠 거야. 최악의 상황엔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셀레스테는 별 수 없이 긍정했다.
 “그렇겠지.”
 시론은 셀레스테의 대답에 담긴 의미를 파헤쳐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생각하곤 계속 설득의 말을 꺼내놓았다.
 “하지만 화해한다면, 만두도 많이 얻을 거다.”
 “그리고?”
 “마누크는 내 좋은 체스 친구야. 하지만 술친구는 되어줄 수 없어. 주량을 중대원 누구도 못 따라가니까.”
 만두라는 말에 이미 웃을 준비를 끝냈던 셀레스테는 깔깔 웃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박빙의 주량대결을 벌이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론의 요청을 가볍게 묵살했다.
 “쓸데없는 가필이야.”
 “가필이라고?”
 “난입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까? 이건 나와 빌의 문제야. 끼어들지 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시론은 이에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빌은 내게 거짓말을 했어.”
 시론은 자신이 불쌍해졌다고 생각했다. 권총을 떨어뜨릴 뻔했던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셀레스테를 바라보았다.
 “대장의 이야기? 어디가?”
 “몰라.”
 “뭐?”
 “아귀가 안 맞아.”
 셀레스테의 얼굴에 처음으로 자신 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시론에게서 표정을 감추려는 듯 몸을 돌려 등만 보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무시당한 시론이 여러 가지 질문 중 무엇을 반복하려 할지 결정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왜일까?”


*
 “쓸데없는 짓을 했군.”
 희미해지는 어둠 속에서 빌이 세숫대야에 우물물을 부으며 말했다. 뱃속을 비운 뒤 까마득한 우물 속으로 다시 던져지는 양동이를 보며 시론은 다중적인 의미를 담아 웃었다. 빌은 뭔가 계획이 있어서 그를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빌이 쓸데없다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쓸데없을 뿐이다. 시론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 것 같아.”
 양동이는 곧 다시 끌려나왔다. 빌은 세숫대야를 마저 채운 뒤 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셀레스테는 귀신늑대다.”
 시론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병사들도 개척민들도 깨어 있질 못했다. 과음이 동반하는 나쁜 친구의 괴롭힘에 뒤척거리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우물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이 대화를 들을 염려는 없다. 빌은 말을 이었다.
 “인간의 모습과 말을 따라하지만, 그녀는 내가 음식을 사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이 있어서 먹었다고 말하겠지. 양이 있어서 사냥했다는 말처럼. 시론, 늑대는 개가 될 수 없어. 둘은 닮았지만, 아주 다른 동물이다.”
 “음식으로 길들이겠단 생각보단, 거래를 해보겠단 생각이었어.”
 “거래? 더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녀는 지성이 있잖아. 일말의 희망을 품은 거야.”
 “늑대의 왕후귀족이라 해도 그 본질은 늑대다. 인간의 왕후귀족도 결국 인간인 것처럼.”
 “난 동물도 대소는 안다고 생각했어.”
 “기준이 인간과 같진 않을 테지.”
 빌은 세숫물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르게 올라와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허리를 숙이고 침수된 배와 같은 손바닥을 얼굴로 가져간 그는 물이 자신의 얼굴을 때릴 때 눈을 감았다. 물이 눈썹과 주름, 콧등을 타고 흘러내릴 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모습으로 했던 말을 다시 말했다.
 “늑대는 개가 아니다.”
 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은 다시 세숫대야로 손을 넣었다.
 “신령하단 평이 아깝지 않은 귀신늑대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그건 사냥과 복수에 한해서다.”
 “신령하긴 하더군.”
 빌은 손을 들어 올리다 말고 시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대장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은 시론은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대장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랬어.”
 “거짓말이라고?”
 “대장의 과거지사. 좀 멍청한 질문이란 건 아는데, 혹시 셀레스테를 감동시켜볼 생각이었어?”
 이번엔 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거짓말이라.”
 빌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세숫대야로 고개를 돌리곤 물을 푸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시론은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빌의 손이 올라갔다. 노병의 얼굴과 물보라가 부딪히는 소리가 대화의 틈새를 잠식했다. 그때 시론은 다시 대화를 꺼낼 순간을 잡지 못했다. 대신 빌이 잡았다.
 “한 청년이 있었다. 황금이 피신했고, 그는 고향을 떠났다. 모두 진실이다. 내가 운 것도.”
 셀레스테는 아귀가 안 맞는다고 했다. 그럼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시론은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좀 무서웠어. 기이하게 들리기도 했고.”
 “그런가?”
 “대장이 과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잖아. 누구도 묻진 않았고. 근데 그걸 울면서 이야기했으니까.”
 “들려주고 싶진 않았는데.”
 “셀레스테에겐 들려줘도 되고?”
 장난스러운 질문에 빌은 웃으며 대답했다.
 “노인이 개나 나무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이다.”
 시론은 빌이 셀레스테를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셀레스테도 그럴까. 시론은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묻기는 너무 어려운 문제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야 할까? 그렇다면 빌에게 질문을 속삭이며 그의 고해를 듣던 그녀의 모습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혼잣말이라.”
 “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상?”
 “1년이나 쫓아왔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왜 내가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지는 알려줘야지. 개도 고됨 끝엔 뼈다귀를 얻어야 하는 법 아닌가.”
 느닷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기억에 시론은 입 안이 깔깔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원수가 가장 좋은 친구란 말이야?’
 1년 동안 무리를 떠나 피복수권자만 쫓아다녀야 했던 여자. 가장 질기고 상대하기 힘든 복수권자를 만들어버린 용병 지휘관. 이보다 더 지독한 복수권을 마주한 적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 언젠가 끝날 테지만 매순간이 우스운 상황.
 “재밌는 이야기군.”
 빌은 사고를 입 밖으로 꺼내는 절차를 생략한 시론의 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희미하게 웃음이 떠오른 표정 그대로 말했다.
 “전부 말해준 것은 아니지만.”
 “수수께끼라. 역시 대장은 비밀이 많아.”
 “불만인가?”
 “전혀.”
 “여하튼 함구령을 내리지. 대원들에겐 말하지 마라. 특히 마누크는. 내가 울었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그 친구는 당장 날 대장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말할 거다.”
 시론의 입아귀가 절로 올라갔다.
 “말이 그렇지. 진심은 아닐 거야.”
 시론과 마누크의 상관은 돈벌이를 시켜주는 좋은 대장이다. 마누크는 항상 투덜거리긴 하지만 충실한 병사다. 시론은 마누크가 빌의 뜻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꼴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화상자국에 걸고. 빌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유쾌한 웃음이었다. 탈영과 질병과 도둑질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빌의 동료들은 월급과 동료와 왕이 있는 한 중대를 쉽게 배신 못하는 녀석들이다. 형편없는 수적 떼로 보여도 엄연히 젊은 왕의 군대다.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물론. 마누크는 좋은 녀석이야. 체스 친구가 장담한다고.”
 “그 혜안을 이번에도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빌의 말이 아니었다. 시론은 고개를 돌려보자 사냥총을 멘 채 걸어오는 키체커를 볼 수 있었다. 사냥꾼의 위치를 사냥감에게 알려주는 얼간이가 어디 있냐고 조금 전까지 그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은 터라 시론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말이야?”
 언제나 그렇듯, 키체커는 요점만 정확히 말했다.
 “누군가 말을 타고 오고 있어. 곧 도착할 거야. 누군지 난 대충 짐작이 가던데.”
 그 순간 빌과 시론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너무 일찍 왔어! 아직 셀레스테가 있는데! 시론이 먼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창병중대!”
 빌은 장갑을 끼는 것도 잊은 채 장벽 위로 뛰어갔다. 시론이 황급히 뒤따랐다. 둘은 당황하는 초병들을 밀치고 총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슴푸레한 남쪽 길을 따라 세 기수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시론은 그들을 보곤 불안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새벽부터?”
 기수들은 곧 정문 앞에 멈췄다. 그들 중 판금흉갑을 입은 검은 머리의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서는 것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굳게 닫힌 정문 앞에서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난 수호자 브롬 장로님을 돕기 위해 온 왕국장교다!”
 미리 들은 바가 없는 초병들은 혼란에 빠져 빌을 바라보았다. 빌은 장교의 말과 옷차림을 세세히 관찰해보곤 결론을 내렸다.
 “문을 열어라.”
 초병들은 황급히 빗장을 내리고 정문을 열었다. 곧 세 기수는 개척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론이 중얼거렸다.
 “너무 일러.”
 셀레스테가 아직 안에 있는데. 벌써 창병들이 도착하면 큰일이다. 그녀가 다 알게 되니까. 익인들과의 싸움. 그것에 귀신늑대가 끼어든다면? 시론은 셀레스테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움직임이 없다. 깨지 않은 건가? 아니면 잠든 척한 건가? 시론은 공황에 빠졌다.
 빌은 셀레스테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곧 시론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했던 농담 말인데.”
 “응?”
 “죽은 자의 왕이 주례로 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그가 왜 안 왔는지 알 것 같다.”
 시론은 입을 벌렸다. 그는 대장이 무슨 이야길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 나온 빌의 한탄을 듣고서야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그가 내 시체를 원하는 모양이다.”
 빌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시론은 그 뒤를 따르면서 투덜거렸다.
 “정말 재수 없단 뜻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