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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2 03:58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237 추천:1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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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늑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양치기와 사냥꾼이다.
 민머리에 검은 콧수염을 짧게 기른 키체커는 대륙 서부 해안가 출신 사냥꾼이다. 옛날에 북부를 떠나 정착한 조상을 둔 그는 서양 신대륙 사람들과도 교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상한 구조의 뇌관식 사냥총을 3자루나 가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모두 서양 사람들이 만들어준 총으로, 가보처럼 소중히 다룬다고 한다. 빌과 그 동료들은 키체커의 사냥총이 무려 160야드 거리의 표적을 맞추는 것을 보고 그 말을 믿게 되었다. 또, 운이 허락한다면 200야드 밖의 표적도 어렵잖게 맞출 수 있다는 키체커의 장담은 빌이 그에게 중대간부급 대우를 약속하게 했다.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키체커는 숫자광이다. 그는 모든 것을 수량화하여 기록한다. 그는 빌의 병대에서 가장 많은 종이를 쓰는 사람 중 하나였고, 거기다 빌만큼 과묵했다.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꼈다. 하지만 이질감이야 어쨌든 키체커는 그러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키체커의 고집이 신대륙의 앞선 지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 빌은 종이 값을 대신 내주기도 했다.
 “연습하긴 좋군. 익인 놈들이 보이질 않아서 다행이야.”
 그날 해가 빠지기 전, 숲 외곽의 풀밭에서 빌은 키체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키체커는 들판에 앉은 채 숲을 바라보며 온갖 사물의 위치와 거리를 종이 위에 써넣기 시작했다. 풍속조차 5단계로 나눠 구분하는 그에게 위치와 거리 정도는 기본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속했다.
 “대장, 그 여자는 뭐야?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마녀야? 아니면 요정인가?”
 빠른 속도로 주변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가운데 키체커가 질문했다. 셀레스테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양치기 반트의 결혼식에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다.
 “귀신늑대.”
 빌은 키체커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키체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치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것 같은 태도였다. 빌은 키체커가 셀레스테에게서 늑대 냄새라도 맡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키체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질문을 꺼냈다.
 “1년 전의 복수야?”
 이해가 빠르다. 빌은 키체커를 중대간부급으로 대우하는 것이 틀린 선택이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하고는 답변해주었다.
 “아마도. 돈 뜯는 걸로 끝날 복수는 아냐. 피가 흘러야 해.”
 놀랍게도 셀레스테는 빌의 항로를 모두 꿰어보았다. 그녀는 빌이 바다를 건너 제국총독의 용병으로서 세리 겸 채권추심대행자 노릇을 한 뒤, 이디아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교역을 반복하면서 북상하는 동안 그 모든 것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거나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언젠가 빌의 패거리가 겁 없는 방랑학생 하나와 어울려 무인도에서 술판을 벌인 사실까지 알았다.
 늑대가 본래 떠도는 동물이라지만, 그 어떤 육로여행수단보다 빠른 배를 대륙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1년 넘게 쫓아왔다. 대단한 집념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그런가. 하지만 지금 죽일 순 없겠군.”
 “생각 없이 쳐들어온 것이 아닐 테니까. 그녀는 왕족이다. 지혜롭진 못할지언정 멍청하진 않아.”
 “우리가 움직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획은 세워놨겠지. 그건 우리에게 달가운 계획이 전혀 아닐 테고. 단순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싸우려 들기만 해도 골치 아파질 거야.”
 “1년 전 투키에서도 그랬지. 그때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투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대장은 저승 문턱 밟았다 온 셈이군. 앞으론 말 좀 해줘. 여하튼 그년은 이번에 우리가 맡은 의뢰에 대해 알고 있을까?”
 “브롬 장로님이 계획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창병중대가 도착하면 누구나 다 알게 될 거다.”
 “위험해. 늑대는 끈질기게 기회를 기다려서 공격한다.”
 사냥꾼 출신 키체커의 경고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동물과 관련된 적잖은 정보와 미신에 대해 알고 있어서, 서양 학자들도 그에게 한 수 배우고 갔다고 한다. 무시할 수 없는 경고다. 전투는 셀레스테에게 절호의 기회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는다. 전투전후 언제든 셀레스테의 난입은 빌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빌은 긴장으로 뻣뻣이 굳은 목덜미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그 전에 쫓아낼 생각이다.”
 “확실히 해줘. 괴물늑대도 아니고 귀신늑대를 상대로 정면으로 싸운다면 이긴다고 장담 못해. 뒤를 맞는다면 말할 것도 없지.”
 키체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종이뭉치를 정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빌은 들고 온 초롱에 성냥불을 갖다 대 어둠을 밝혔다.
 “전력을 다 하겠다.”
 마을 쪽에서 총성이 몇 발 터져 나왔다. 셀레스테가 바보 같이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거나 병사들이 오발한 것은 아니다. 음악과 웃음소리가 끊어지질 않는 것을 보니 축포 소리였다.
 “소란스럽군.”
 키체커가 말하자 빌은 시선을 숲에서 거두고 몸을 천천히 마을 쪽으로 돌렸다. 그는 마을을 향해 걸으면서 키체커의 말에 대꾸했다.
 “앞으로 더 소란스러워질 거다.”
 키체커와 빌은 초롱불에 의지해 어둠 속을 걸어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은 지나치게 밝았다. 반트가 지목한 노예는 생각보다 순순해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이뤄졌고, 이에 여러 가지 가을축제를 한꺼번에 해치우려고 작정한 브롬 장로가 돈을 좀 내놓았다. 덕택에 마을 광장에는 높게 쌓인 땔감이 커다란 불길을 토해냈다. 모두가 유쾌했다. 소수만 빼고. 빌을 발견한 초병은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다는 의미가 강한 말을 꺼냈다.
 “대장, 어딜 갔다 온 거야? 마누크랑 그 아가씨가 또 시작했어!”
 “둘 다 미쳤군.”
 초병의 유쾌한 목소리에 빌은 간단하고 무시무시한 감상평만 내놓았다. 초병은 어떻게 하면 미친 빌에게 미쳤다는 소릴 들을 수 있는지를 깨닫곤 게드 장로나 브롬 장로 못지않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스테는 장작더미에 지지 않을 만큼 쌓인 만두더미 옆에서 마누크와 마주 선 채로 거품 가득한 맥주를 들이마셨다. 셀레스테는 맥주의 거품이 옷 위로 쏟아져 목과 가슴의 곡선을 타고 옷을 적시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집어먹고 맥주를 들이키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키체커는 그 인상적인 모습에 대한 분석을 금방 끝냈다.
 “만두가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인데. 만두소가 양고기인 걸까?”
 “글쎄. 어쨌든 이래서야 손님이 주최자보다 튀는군. 반트는 뭐하나?”
 “신부 끼고 술 마시는데.”
 “끌어내서 춤추라고 해.”
 “춤?”
 “정신없이 취하게 해. 자네는 깨어 있고.”
 생략된 주어는 신랑이 아니라 셀레스테였다. 축제를 즐기지 말란 명령까지 전부 이해한 키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 쓸모가 있는 명령은 아니었다. 키체커는 귀신늑대는커녕 병색이 의심스러운 개 하나가 마을 안에 들어와 있더라도 안심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신랑에게로 걸어가 빌의 말을 전한 다음, 곧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신랑신부가 약간 비틀거리면서 광장 한복판으로 나왔다. 병사들도, 개척민들도, 셀레스테도 모두 환호를 지르는 순간 그 둘은 유쾌하고 경박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경건한 수도사나 교회 장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녀가 달라붙어 사슴처럼 껑충껑충 뛰는 춤. 북부엔 신랑신부의 춤을 구경만 하는 풍습은 없다. 곧 병사, 개척민 할 것 없이 모두 뛰쳐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빌은 마누크와 셀레스테가 꺽다리와 난쟁이 같은 구도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후, 그의 잠자리로 지정된 창고 건물로 걸어갔다.
 건물은 잠자리에 한정해서 이야기 할 때, 깔끔했다. 사방팔방으로 구겨 넣은 잡동사니들 틈바구니에서 빌은 딱딱한 나무침대를 발견했다. 북부의 삭풍은 아직 맹위를 떨치기엔 약했고, 창고 벽에는 빈틈이 없다. 불을 피우진 않아도 될 것이다. 침대에 미리 준비된 자신의 잠자리를 확인한 빌은 입은 옷 그대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사슬갑옷이 몸을 짓누르고 장화 속의 발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는 임전태세 그대로 초롱불을 끄곤 잠이 들었다.
 빌은 눈을 떴다.
 무엇인지 모를 꿈이 눈앞을 스쳐지나갈 때, 그는 꿈에도 시각적 메아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한 소녀가 왼손에 초롱을 들고, 오른손은 허리 뒤로 돌린 채 빌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불빛이 매혹적인 소녀를 비추는 이 장면 앞에선 꿈의 메아리도 그저 정신과 시각의 혼란에 불과하다. 급작스런 기상에 발작하는 근육과 돌처럼 굳은 팔다리 때문에 우울해진 빌은 무겁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셀레스테.”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웃어보였다. 빌은 셀레스테의 오른팔을 힐끗 살펴보았다. 상황만 보자면, 가느다란 허리 뒤에 숨겨진 오른손에 단검이 들렸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연인의 복수를 위해 단검 하나 들고 원수의 침실로 숨어든 소녀. 얼마나 멋진 구도인가. 하지만 빌은 그녀가 단검을 들고 있을 것이란 상상을 가까스로 물리쳤다. 늑대에겐 이빨이 더 어울린다. 그럼 저 오른손에는 무엇이 쥐어져 있을까? 빌은 알 수 없었다.
 “창부 취급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덕택에 무난하게 넘어갔어.”
 셀레스테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외부 여자가 마을축제에 끼어든다면 그건 십중팔구 창부다. 셀레스테가 창부 취급을 받으며 병사들에게 끌려가지 않은 것은 순전히 빌과 아는 사이라는 이유 덕이었다. 빌과 친한 척하는 여자에겐 뭔가 있다. 방어막으론 그것이면 충분하다. 빌은 쓰게 웃었다.
 “아마 마녀라고 알고 있을 거다.”
 “어라? 그것도 재밌겠네?”
 빌이 듣기엔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옷은 어디서 구했나?”
 “간단해. 인간으로 둔갑한 다음 여자들에게 다가가는 거야. 그리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소녀의 목소리로 말을 걸지. 그러면 바로 옷을 들고 뛰어오더라고.”
 “옷만 입고 튀었나?”
 “귀찮아질 것 같으면 본모습으로 돌아가기도 해. 그러면 혼비백산해서 옷은 두고 가거든.”
 좋은 해법이다. 빌은 웃어버렸다. 그러나 이 웃음에 셀레스테는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빌을 당황하게 했다.
 “그나저나,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혼자 숨어서 자다니 너무한 것 아냐?”
 그게 문제였군. 빌은 앓는 소릴 냈다. 그는 셀레스테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자신이 숨으려고 노력했는지 회상해보았다.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녀의 말은 축제에 끼어들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교회 장로 앞에서 고해하듯 자백했다.
 “서약해서.”
 “서약?”
 “내 소원을 이루기 전까지 술, 여자, 아편 따위에 취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이해하기 힘든 짓이네. 무슨 소원이기에?”
 빌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극소수만 안다. 상선대 안에서는 이웃마을 친구였던 게드 장로만이 안다. 시론도 모른다. 빌은 대답하기보단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축제는 끝났나?”
 다행히 소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응. 신랑신부의 초야까지 훔쳐보고 끝냈어.”
 다른 청년처녀들과 함께 소리 죽여 웃으면서 바늘구멍으로 신방을 엿보는 셀레스테. 그 광경을 상상해버린 빌은 급하게 기침을 내뿜었다. 애석하게도 평온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양치기의 결혼을 축하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초야까지 훔쳐보는 늑대라니.
 “재미있었나?”
 “응.”
 “늑대들도 그게 볼거리인가?”
 “비밀은 개나 늑대나 유쾌한 볼거리야. 흘레붙은 개새끼들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짓을 하잖아? 아무데서나 한다고는 말하지 마. 뒤늦게 나온 인간이 그걸 보곤 물을 끼얹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니까.”
 직설적이고 효과적인 이야기다. 빌은 개들에게 물을 뿌리는 과부를 상상했다.
 “알 것 같군. 좋아. 인간 남녀의 초야정사가 너한테도 재미있었다고 해두지.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는데, 왜 왔나?”
 “왜 이 마을에 왔냐고 묻는 거야?”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왜 여기에 있냐고 묻는 거다.”
 “왜일 것 같아?”
 셀레스테가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왔다. 술 냄새가 급속도로 다가왔다. 맥주는 물론 온갖 술의 냄새가 고기 냄새와 함께 뒤섞여 있다. 빌은 그녀가 단지 술김에 겁이 없어진 것인가 의심해보았지만, 그녀의 오른손은 여전히 허리 뒤에 있었다. 문득 그녀가 투키에서 포크를 사용한 적이 있음을 떠올린 빌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론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거기까지. 더 움직이면 쏜다.”
 빌은 셀레스테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익숙한 얼굴이 둘 있다. 시론은 작년에 투키에서 구입한 권총 둘을, 키체커는 자신의 사냥총을 들었다. 총구는 이미 겨누어졌고, 뇌관을 때릴 공이도 뒤로 젖혀졌다. 빌은 스스로가 약하고 쓸모없다고 평가했던 권총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다음엔 더 많은 양을 구입하겠다고 맹세했다. 키체커에 관해서는 역시 그에게 중대간부급 대우를 해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뒤를 돌아본 셀레스테는 인간 둘과 총 세 자루를 확인하자마자 이 상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이야긴 안 했다며?”
 “키체커는 스스로 판단했다. 사냥꾼 출신이거든.”
 “동부 사냥꾼?”
 “서부 해안가 출신이다. 실력은 동부 놈들에게 안 밀리지만.”
 이 정도의 거짓말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후자는 진실이다. 다행히도 세레스테는 속아 넘어갔다. 사냥꾼을 흘겨보는 그녀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지만 키체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냥꾼의 눈을 본 순간 소녀는 다시 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라고 명령해.”
 “그랬다간 널 쏠 텐데.”
 “남녀가 밀어를 속삭이는데 방해물은 필요 없어.”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빌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소녀의 화를 북돋울 것임을 눈치 챘다. 어떻게 할까? 빌은 키체커와 시선을 교환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사과하지. 시론, 키체커. 물러서라.”
 “대장!”
 시론은 소리쳤지만 키체커는 총구를 내렸다. 당황한 시론은 어떻게 물러설 수 있냐는 표정으로 키체커를 노려보았다. 이에 키체커는 말이 아니라 입술의 움직임으로 부중대장을 설득했다. 죽이려 했으면 벌써 덤볐다. 적어도 오늘밤엔 그녀에게 기회가 없다.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시론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창고 밖에 있겠어.”
 “엿보지 마.”
 셀레스테의 말에 시론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러나 시론은 빌과 키체커의 무표정, 그리고 셀레스테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하자마자 셀레스테가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을 더욱 우습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체커와 같이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셀레스테는 가냘픈 몸을 크게 휘청거리더니 곧 잡동사니들에 기대었다.
 “아, 놀래라.”
 빌이 듣기엔 진담 같지 않은 말이었다. 행동도 과장이 심하다. 빌은 셀레스테의 오른손에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확인할 수 있었다. 시험 당했다.
 “줄타기 좋아하나?”
 “늑대가 줄타기?”
 “항상 그렇더군. 아슬아슬할 때까지 남들을 시험하고 있어.”
 셀레스테는 웃었다. 이제까지 그녀가 보여준 웃음이 흔해서, 빌은 하마터면 이번 웃음의 뜻을 놓칠 뻔했다. 그것은 다음 줄을 발견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녀는 초롱을 내려놓고 빌에게로 걸어왔다. 침대 바로 옆에 선 그녀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이고 팔을 내밀었다.
 “줄타기, 계속해볼까?”
 좁지는 않은 침대 위로 이미 한쪽 무릎이 올라온 상태였다. 빌은 거부하는 것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귀신늑대를 품는다고? 요정에게 홀렸다는 이야기와 동급이다.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무뚝뚝한 빌의 성격 또한 굳건하다.
 “거절할 말이 마땅찮군.”
 소녀는 탐탁찮은 어투의 대답을 듣고도 웃었다. 그녀는 빌의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그러나 똑바로 누운 빌과 달리 그녀는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누워서 반쯤 열린 침낭 속에 있는 빌의 사슬갑옷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빌은 긴 머리카락이 사슬에 얽혀버리는 것을 걱정했지만 소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뜨거운 체열이 사슬을 달구었다.
 이게 인간 여자의 유혹이었다면 최고급 창부도 울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셀레스테는 인간도 아니고,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빌은 그게 더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다.
 “왜 피 냄새가 나는 거지?”
 갑작스런 셀레스테의 질문에 빌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번에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빌에게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왜 신부와 당신에게서 똑같은 피 냄새가 나냐고.”
 “이해했다.”
 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무덤까지 들고 가리라 다짐해놨던 비밀을 엄숙히 풀어놓았다.
 “작은 새알을 준비한다. 작은 구멍을 뚫는다. 내용물을 뺀다. 신선한 동물의 피를 넣는다. 구멍을 납으로 막는다. 신부에게 쥐어준다. 신부는 기회를 봐서 새알을 터뜨린다.”
 셀레스테는 그만 깔깔 웃어버렸다.
 “뭐야, 그거?”
 “처녀성을 날조하려는 고전적인 거짓말이지.”
 “잘 모르겠어.”
 소녀의 표정을 살펴본 빌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신랑이 내일 아침에 이부자리에서 처녀성의 상실을 증명하는 핏자국을 봐야 하는 거다.”
 “흠. 처녀 아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북부 총병들이 우글거리는 배에서 노예계집애들이 처녀성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 인간은 만년발정동물이다. 셀레스테는 고개를 끄덕였고, 빌은 설명을 이어갔다.
 “수작을 좀 부린 것뿐이다. 어쩌면 신랑이나 다른 사람들도 몇 명은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평화를 위해 그 정도는 넘어가겠지.”
 “흠. 신기하네.”
 “무슨 말이냐?”
 “목로주점에서 했던 말을 다시 들려주지. 놀랐어. 인연을 잇는 일에도 꽤 재주가 있잖아?”
 이번엔 별도의 회고 과정 없이, 빌은 목로주점에서 셀레스테에게 무슨 소릴 들었는지를 기억해냈다. 빌은 그 순간 입 속에 모래가 한 움큼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렵게 혀를 움직여 소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다.”
 “뭐?”
 “난 그런 쪽으론 재주 없는 놈이다.”
 “상인은 인연을 잇는 자라고 들었어. 인간의 상도는 잘 모르지만, 오늘의 당신은 훌륭한 상인이야. 그렇게 부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
 셀레스테가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 많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알았다. 빌은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여자는 노예일 뿐이고, 빌 자신은 신부의 후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것부터? 결국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난 인연을 죽인다.”
 죽인다는 말에 셀레스테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다.”
 “절연이나 절교를 말하는 거야?”
 “그건 도시민끼리의 정중한 통고에 속하는 편이지. 내 방식은 다르다.”
 빌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읽은 셀레스테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말 그대로 인연을 죽인다. 삼자로서 난입해 도끼로 찍고 검으로 찌르지. 그게 내 전문이다. 누구나 다 하는 일 같지만, 난 더 직접적이지. 인연을 잇는다고? 그 분야에서 나는 비전문가다. 이번 일은 그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임기응변을 부린 것에 불과해. 협잡질이지. 셀레스테, 떠올려라. 내가 무슨 평가를 받는지를. 날 1년이나 쫓아다녔다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미친 빌. 백 명의 수적을 이끄는 제독이고, 젊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망나니 장교이며, 한 도시에 도전한 정신병자다. 상인, 뚜쟁이, 음유시인이란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살해당한 원수들 속에 인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답지 않게 자학에 가까운 말을 길게 읊는 노인이 익살광대와 미치광이를 상징하는 줄무늬 바지를 입고 전장을 호령한다는 사실은 셀레스테의 머릿속에 혼란을 일으켰다. 빌이 금주기간이 길었던 탓에 술 냄새만 맡고도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떠올랐다. 그녀는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고향을 떠났어?”
 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자학했다.
 “30년 전, 죽은 자의 왕이 가늠키 어려운 증오를 갖고 일어났다.”
 “알아.”
 “왕의 군대가 일어나면서 한 나라가 멸망했다.”
 “응.”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어투는 책을 읽는 것 같이 담담해졌다. 당연했다. 그것은 역사였다.
 “성의 사람들은 보화를 끌어안고 죽었다. 아무도 그곳에 접근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수중에 쥐어진 것만 들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남겨진 것은 모두 북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부를 거머쥐고 더 큰 부가 기다리는 남쪽으로 달려갔다. 황금이 피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산골 속의 젊은이들조차 놀라게 했다.”
 잠시 말을 멈춘 빌은 부하들이 보면 경악하다 못해 신화시대의 종말론적 공포를 느낄만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20년 전, 한 젊은이가 황금의 피신에 편승했다.”
 셀레스테는 잠든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 눈물은 참는 것보다 흘리는 것을 멈추는 것이 어렵다.
 “그는 부모가 양을 판 대금을 훔치고, 빛바랜 결혼예물도 훔쳤다. 그는 남쪽으로 갔다. 동료를 모으고 적들과 싸웠다. 소원은 오직 하나, 출세였다. 모친이 죽고 부친이 아내의 유언을 전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들이 다 몰락해도 자신만은 성공하리라 믿는, 낙관적이며 전형적인 젊은 망나니의 이야기. 셀레스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빌은 터무니없이 급작스럽고 짧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