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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18 08:53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194 추천:2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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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하늘로 치솟는 보라색 불꽃을 본 시민들은 모두 의아함이 섞인 탄성을 질렀다. 대낮에 불꽃이 터지는 광경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불꽃은 계속해서 하늘로 솟아올랐지만, 당연히 그 뜻을 알아볼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저 불꽃은 뭐야?”
 빌과 함께 나무그릇을 반납하고 식당을 나서던 소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빌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그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비상, 소집? 누가? 시론? 게드 장로? 대체 왜?’
 “뭐냐니까?”
 소녀가 다시 질문했다. 빌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믿는 투였다. 빌은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지 않게 주의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소녀는 그 망설임을 파악함으로써 빌의 심중을 알아챘다.
 “거짓말은 하지 마.”
 빌은 곱게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그는 소녀가 저 불꽃의 의미를 처음부터 알아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중대만의 신호다. 의미는 긴급소집.”
 “왜?”
 “모르겠다. 어쩌면 장로가 널 봤는지도 모르지.”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아닐걸. 북부 장로라 해도 날 눈치 챌 순 없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은 사람의 머릿속이지. 그래서 눈구멍이 뚫렸으니까. 사람의 눈썰미를 속단하진 마라.”
 “겉은 무식한 전사 같은데 그럴 듯한 말도 꽤 하네?”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빌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손녀와 말장난하는 노인처럼 보일 웃음이었다.
 “그 말장난, 만날 하거든.”
 “선문답 좋아하는 장로가 곁에 붙어 있으니까? 뭐, 조심해서 나쁘진 않겠지. 그만 갈까?”
 겉보기와 달리 빌에겐 소녀의 말 하나하나가 교수대로 가잔 이야기처럼 들렸다.
 “어디로?”
 “당신 부하들이 찾기 힘들게 계속 움직여야지. 벌써 끝내고 싶진 않거든.”
 “힘들걸. 내 부하들은 우수해.”
 빌의 말은 거짓이었다. 투키는 인구가 20만에 달하는 이디아 대륙 최대의 도시 중 하나다. 이곳을 겨우 백 명의 병사로 헤집어봤자 누군가를 찾긴 힘들다.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가리 숫자의 문제다.
 “안 힘들걸. 눈썰미는 어떨지 몰라도 인간의 오감은 나보다 현저하게 떨어져.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작자들의 소음 따윈 너무 잘 들리지. 자, 이리로.”
 소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빌의 팔을 꽉 껴안았다. 빌은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늑대의 이빨 같다고 느꼈다. 그때 그는 압착기에 팔이 낀 사람이란 소녀의 말을 이해했다. 이건 빠져나갈 수 없는 훌륭한 압착기다. 찍어 누르는 사람의 뜻에 따라서 언제든지 피해자의 몸까지 삼켜버릴 수 있는.
 빌이 앓는 소리를 내자 소녀는 깔깔 웃어버렸다. 그 둘은 곧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빌의 걱정은 정확했다. 100명의 병사들은 빌을 쉽게 찾지 못했다. 도시는 거대했고 혼잡했다. 병사들은 소리 높여 빌을 부르며 뛰어다녔지만 아무도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빌은 그들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릴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의 외침은 오히려 소녀가 쉽게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도 당신, 꽤 눈에 띄는 모양이야. 제법 바짝 추격해오는데?”
 인파가 아무리 혼잡하고 대중이 개인에게 관심이 없다 한들, 줄무늬 바지 입고 이상한 도끼 든 노인장 못 봤냐고 물으면 답변해줄 사람이 하나쯤은 분명 있을 테니까. 빌은 그 이유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여유가 점점 없어지는군. 조금 긴장되는데.”
 소녀의 말에 빌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소녀는 약간 걱정된다는 말투로 빌에게 질문했다.
 “북부인은 정말 화약을 하루에 1통씩 먹어?”
 그 순간 빌은 미끄러질 뻔했다. 지저분한 도로 때문이 아니었다. 빌은 소녀가 풍문 속에서나 존재하는 괴물 같은 북부 병사들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그는 자칫 부하들이 자신을 따라잡기라도 하면 소녀가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먹으면 죽는다.”
 빌은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풍문 속의 괴물군대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럼 불을 뱉지 않아?”
 “사람이 어떻게 불을 뱉나. 장로회의 수호자라면 모르겠다만.”
 “납을 뱉는 사람은 있다는데?”
 “그건 총탄이다.”
 “뱃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는 거야?”
 “그냥 입에 문 거다.”
 “연기를 팔에 휘감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그건 화승이고.”
 “북부인의 도끼는 밤마다 비명을 지른다는데.”
 “대체 뭘 듣고 다닌 거냐.”
 생물학의 범주만이 아니라 상식의 범주까지 건드리는 소녀의 질문에 빌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자 소녀는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재미없게.”
 “재미?”
 “긴박감이 없잖아.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나면 재밌을지도.”
 “참아다오.”
 “알아. 나로서도 달가운 이야긴 아니니까. 그냥, 그런 놈들이면 더 스릴 있지 않겠냐는 뜻이야.”
 진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제일 무섭다. 빌이 그 의중을 좀 더 파악해보려 하기도 전에 소녀는 방향을 홱 꺾었다.
 “음. 이쪽으로.”
 “길은 알고 있나?”
 “몰라. 일단 피하고 보는 거야. 적어도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에서 막다른 길 따윈 없겠지.”
 “생각보다 미흡한 대책이로군.”
 “이런 건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하는 거야.”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데 감이 뛰어난 것이 아닐까. 빌은 그렇게 생각했다.
 둘은 다층건물들 사이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소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추격이 생각보다 빠르다. 청과상이 보일 때 빌은 소녀가 과일을 사고 싶다고 말한 사실을 떠올렸지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곳을 지나쳐버렸다.
 “가깝나?”
 “응.”
 “그냥 멈추면 안 되겠나? 어차피 유예를 줄 생각이라면 내 부하들 앞에서 정체만 숨기고 있으면 될 일 아닌가?”
 빌은 부하들에게 어떻게든 해명만 한다면 이 유예를 더 안전하게, 더 길게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혼자서 소녀에게 끌려 다니느니 부하 몇 명이 같이 있는 편이 의지가 되니까. 어쩌면 기가 죽은 소녀가 그만 떨어져줄지도 모를 일이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유예는 내 마음대로 정하는 거야. 그리고 당신 부하들과 얽히면 귀찮아지겠지. 지금 그놈들은 살기가 등등하다고.”
 안 넘어오는군. 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의 정체를 눈치 챘는지, 아니면 그저 빌이 평소엔 절대 하지 않는 일을 하며 자신들을 피해 다닌다는 사실에 경악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부하들은 꽤나 약이 올랐다.
 그때 빌은 자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잠깐. 이쪽이 어딘지는 아나?”
 “알아. 하지만 길이 이쪽밖에 없는걸. 뭐, 각오하곤 있어.”
 하지만 빌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빌은 그 광경을 처음 본 사람들의 보편타당한 반응을 안다.
 “냄새가 지독한데.”
 “안 보는 것이 좋은…….”
 충고가 늦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모퉁이를 돌아버렸고, 도축업자들과 피혁상들의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딱 굳었다. 그 모습에 빌은 자신이 여자 하나 말리지 못했다는 자괴감부터 느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장면을 그냥 무시할 만큼 대담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오판이었다.
 늑대, 개, 소, 돼지는 물론 온갖 다양한 동물들이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다. 거꾸로 매달린 몇 백 마리의 동물들은 다리부터 난도질당했고, 이 엄청난 고통과 공포에 저절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몸부림치면 칠수록 가죽은 벗기기가 더욱 수월해져갔다. 산 채로 동물을 매다는 이유다.
 각오보다 월등한 지옥도를 본 소녀는 바짝 얼었다. 분노가 아니라 공포와 혼란 때문이었다. 숱한 사냥을 해왔을 그녀도 이런 광경은 보지 못했을 테니까. 동족의 가죽이라면, 더욱 더. 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뜬소문을 걱정하던 여자다. 이런 광경을 보고 발작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다. 빌은 갈등 끝에 모험을 시도했다.
 “어이.”
 빌이 팔꿈치로 소녀를 툭툭 치자 소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한번 떨었다. 그 직후 빌은 그녀가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채 자신에게 고개를 돌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더 이상 빌을 오싹하게 만들던 여자가 아니었다.
 “모, 못 걷겠어.”
 소녀의 울먹임 섞인 고백에 빌은 아무 말도 못했다.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부하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빌은 소녀를 부축하듯 붙들고는 지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화와 작은 구두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걸어라.”
 소녀는 침묵했다. 빌은 도로만 바라보았다.
 “나는 걷겠다.”
 서로 다른 신발이 동시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둘은 수백 장이 넘는 모피가 내걸리고 기름 섞인 핏물이 흐르는 도로를 따라 말없이 빠른 걸음을 내딛었다.
 피혁업자들이 가죽 안쪽에 달라붙은 지방을 긁어내거나 염색업자들과 목소리 높여 싸우던 광경이, 그리고 빌의 코 아래를 맴돌던 피비린내가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빌과 소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얕은 깊이의 수로 위로 놓인 석조다리였다. 피혁업자들의 작업장에서 흘러나오는 오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류로 왔군.”
 빌이 말을 꺼내자마자 소녀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숨을 참았던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물속에 들어갔다 온 사람처럼 공기를 폭식하고서야 안정을 찾았다.
 “응. 물이나 피나 아래로 흐르긴 매한가지니까.”
 겨우 입을 연 소녀는 지친다는 표정으로 난간에 기대었다. 활기차게 빌을 끌고 다닐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제력을 잃을 뻔했어.”
 “그런가.”
 “위험했지.”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응. 당신 부하들도 따돌렸고.”
 부하들은 따라오지 못했다. 빌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진다. 다리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빌은 약간 초조해졌다. 이대로 괜찮은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공증서에 쓰이지 않는 유예는 그 어떤 종류든 변덕스럽다. 미친 달의 연심만큼.
 소녀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많던데, 그곳의 가죽들은 전부 겨울을 나기 위한 거야?”
 뜻밖의 질문이었다. 빌은 조금 늦게 대답했다.
 “대부분은.”
 “대부분은?”
 빌은 좋은 사례를 금방 찾아냈다.
 “은회색 다람쥐 모피를 봤나?”
 “몰라. 있었어?”
 “있었다.”
 소녀는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으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질문했다.
 “그게 왜?”
 “그건 사치품이다. 추위를 막기엔 별로 좋지 않지. 아름답고 귀하다는 이유만으로 귀족과 여인들이 찾는다.”
 소녀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과시용?”
 “그래. 그런 모피는 여름에도 벗지 않아. 햇빛이 들지 않는 침침한 성 안에서 계속 입지.”
 얼마나 많은 먹이를 숨겨두었는지 과시하기 위해 털갈이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웃기는 짐승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소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쓴웃음을 짓곤 고개를 저었다. 빌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소녀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단 부하들이 오는지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빌.”
 그러나 뒤이은 호출에 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짝은 당신을 잡아가려 했어.”
 “그랬지.”
 “그래서 당신은 그를 죽였고.”
 “그랬지.”
 “그리고 난 당신에게 복수하려고 여기 있고.”
 “그래.”
 “왜 안 묻지?”
 “뭘?”
 “내 짝이 당신을 공격한 이유 말이야.”
 “관심 없다.”
 “억울하지 않아?”
 빌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 질문이 난해한 탓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모피 이야기를 곱씹은 그는 곧 소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지금 다리 위에는 빌을 힐난하던 소녀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소녀가 있을 뿐이다. 이걸 이용할까? 하지만 빌은 그 생각이 별로 현실성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상에 대한 문제는 몰라도 복수권의 속성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거짓말과 회유는 의미가 없다. 그는 솔직히 말했다.
 “피란 원래 그런 거다. 이유야 어쨌든 죽음은 복수를 요구하는 법이지.”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역시 전사네.”
 빌은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사는 자의로 싸우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전사가 아닌 자는 무기를 들지 않는 자다. 빌은 어느 쪽도 아니다.
 “난 그런 칭호가 어울릴 사람은 아니다.”
 “내 짝이 왜 당신을 공격했게?”
 무시당했다. 빌은 약간 불쾌해졌다. 그러나 그런 심정을 꽉 눌러두고 소녀가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모르겠다.”
 “간단해.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야. 북부의 전사를 물어다 줄 만한 먹잇감으로 착각한 거지.”
 어느 정도는 예상대로다.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이 될 뻔했단 건가.”
 “시시한 이유지?”
 “글쎄.”
 “피혁업자와 귀족들만큼 시시한 이유야.”
 소녀와 달리 빌은 다람쥐 사냥보단 쓸모 있는 수렵행위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도끼날 아래에 머리를 들이미는 취미는 없으며, 그건 소녀가 원하는 대답도 아니기 때문이다.
 “미안.”
 소녀의 말에 빌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지만 죽여야겠다는 뜻 외엔 무엇으로도 해석이 되질 않았다. 빌은 목구멍이 간지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소녀의 기분이 좀 쓸데없는 상념임을 지적한다던가, 자신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고 강변하진 않았다. 이건 논리 문제가 아니다. 감성적인 문제이며, 싸구려 죄책감과 피비린내 나는 복수에 논리는 없다.
 “사과할 필요 없다. 싸움의 원인은 인연으로 삼기엔 다 시시한 법이지.”
 목구멍의 간지러움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소녀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대답했다.
 “내 기분 문제야.”
 이해하고 예상했던 질문.
 “그런가.”
 일일이 시비를 거는 짓은 유치하다. 빌에겐 더 이상 기분 문제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도끼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슬슬 끊자. 날 방해하면 죽는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
 빌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시간을 확인했다.
 “유예는 끝났나?”
 “아니. 오늘은 인연이 끝날 때가 아닌가봐. 당신 부하가 왔거든.”
 빌은 예상 밖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사슬갑옷을 입고 화승총과 도끼, 검으로 완전무장한 병사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곧 빌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 시론을 알아보았다.
 “대장!”
 그는 빌과 소녀를 보곤 졸도 직전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극도로 지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빌은 약간의 혼란을 느끼며 소녀에게 질문했다.
 “부하들이라 했는데 혼자뿐이잖나?”
 “응. 마지막에 흩어졌어. 저 사람 주도인가 본데, 마무리가 좀 엉성하네.”
 “그에겐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다.”
 “그럴까? 나라면 저 사람에게 마무리를 맡기진 않겠어.”
 처음 보는 여자가 뭐든지 다 안다는 말투로 경애하는 대장과 함께 자신의 지휘능력을 평가하는 모습을 본 시론은 대혼란에 빠졌다. 가까스로 제정신을 찾은 그는 빌의 옆까지 걸어와 소녀를 가리켰다.
 “어, 대장. 이 여자…….”
 소녀는 시론의 질문을 끝까지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제 난간 위에 올라앉았다.
 “작별이네.”
 “그렇군. 네 이름은 뭐냐?”
 “이름 없는 마을이 고향이라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물어?”
 “하나뿐이라면 모를까, 둘이 있으면 이름이 있어야지.”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셀레스테야.”
 “알았다. 다음에 볼 때까지 기억해두지.”
 “응. 다음에. 그땐 꼭 죽일 거야.”
 시론의 입이 쩍 벌어진 이유는 순전히 소녀의 언행뿐이다. 그녀는 뒤로 홱 몸을 날려 다리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빌과 시론은 황급히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지만, 그곳엔 갈기갈기 찢어진 검은 드레스 조각만이 나풀거렸다. 빌과 시론은 동시에 중얼거렸다.
 “어디 갔지?”
 “괴물늑대다!”
 등 뒤에서 들려온 비명은 빌과 시론이 아니다. 빌과 시론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다!
 둘은 번개처럼 반대편 난간으로 뛰었다. 떨어질까 의심될 정도로 상체를 난간 밖으로 내민 둘은 이미 수로를 따라 저 멀리까지 달려가는 검은색의 늑대를 볼 수 있었다.
 “그 여자! 귀신늑대였어?”
 그저 거대한 괴물늑대라 생각하고 혼비백산한 시민들과 달리, 여자를 본 시론은 정확한 결론을 끌어냈다. 풍문으로만 듣던 둔갑을 목격한 시론은 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벌림으로써 경악을 표현했다. 시론의 목이 졸린 목소리를 들으며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저런 목소리를 냈던가. 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저런 것과 함께 있었군. 대단히 빠른데.”
 “대장, 부탁인데 그렇게 느긋하게 말하지 말아줘. 현실이 붕괴되는 느낌을 받고 있거든.”
 “미안하게 됐군.”
 빌은 여전히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시론은 한참을 갈등한 끝에야 그를 쫓아가며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된 거야?”
 “여심의 변덕이었어. 단지 그뿐이다. 부중대장, 다음 항로를 정했다.”
 “뭐?”
 “남부 제국으로 간다. 바다 건너까진 쉽게 못 쫓아오겠지.”
 시론은 빌이 귀신늑대로부터 달아날 생각임을 깨달았다. 하긴 재앙의 표적이 되면 누구라도 발 뻗고 자긴 글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전설 하나 만들겠군. 귀신늑대에게 쫓기는 미친 빌이라고.”
 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싸움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어렵게 긍정한 후, 시론은 자신이 왜 빌을 찾아 뛰쳐나왔는지 상세히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빌은 무엇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사업은 피곤하고 오늘은 이미 어두워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휴식을 요하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