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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17 05:41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249 추천:2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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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고향은 어디야?”
 “그 동네는 이름 없어.”
 “개척민 출신이야?”
 “아니다.”
 “정말 구석진 동네인가 보네. 북쪽 끝에서 여기까지 오가는 거야?”
 “북쪽 끝? 연옥 입구까진 안 가.”
 “뭘 싣고 오는데?”
 “작아도 좋은 것.”
 “상세하게 말하면?”
 “길어져.”
 “그 사슬갑옷의 고리, 왜 허리 아래부턴 다르게 생겼지?”
 “가격이 달라서.”
 “뭐가 더 비싸?”
 “위.”
 “납작해서 비싼 거야?”
 “튼튼해서 비싼 거다.”
 완전무장한 건장한 체구의 북부 노인이 훨씬 작은 체구의 예쁘장한 여성에게 끌려 다니는 건 희귀한 볼거리다. 그 북부 노인이 악명 높은 용병 미친 빌임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희귀한 볼거리다.
 일정은 다 헝클어졌다. 빌은 어느 사이엔가 말을 놓은 소녀의 거침없는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면서 힘없이 끌려 다녔다. 처음엔 긴장해서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기 그지없었지만, 길고 긴 문답과 도시 구경 속에서는 탈진할 수밖에 없었다.
 “바쁘다고 그랬는데, 무슨 일 있어?”
 ‘이제 물어보냐?’
 빌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개인적인 일이다.”
 “급해?”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지. 아주 급하지.
 “흠. 무슨 일인데?”
 “별로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일까?”
 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에 소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거절이야? 난 궁금한데. 미친 빌이 명성에 안 어울리게 쫓아다니는 일이라니.”
 “악명과 본질은 다른 법이지.”
 “그 악명을 이용하기 위해 줄무늬를 상징으로 삼은 사람이 할 말일까?”
 빌은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빌이 더 이상 말을 꺼내려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를 풀지 않고 역으로 이용하다 보면 결국 발목을 잡히는 법이야. 냉철하고 교활한 제독님.”
 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럼 할 수 없네. 계속 걸을 수밖에.”
 그냥 놔주진 않는다. 언젠가 부하 하나가 “쇼핑하는 여성의 에스코트가 모든 고역의 으뜸”이라고 했던 말을 실감한 빌은 세상 모든 노점에 저주를 내렸다. 어찌하여 그놈의 법칙은 틀리는 법이 없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배고픈데.”
 “아까부터 계속 먹고 있잖나.”
 사람이 모이는 곳엔 먹을거리가 많다. 다양한 간식거리는 물론이고 식사거리도 존재했다. 소녀는 빌의 돈으로 이것저것을 사먹었다. 하지만 세 끼 식사는 될 분량을 단 한 시간 만에 해치우고도 그녀는 네 끼 째의 식사를 요구했다. 빌은 그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나 유예가 주어졌다. 그걸 일부러 끝장내는 바보짓을 왜 하겠는가.
 “이번엔 저기.”
 발걸음을 멈춘 소녀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파스타를 판매하는 음식점이 보였다. 닭고기와 야채를 삶은 수프와 곱게 간 치즈, 소스를 미리 익혀둔 굵고 긴 면에 끼얹어서 파는 형식이었다.
 “이 다음엔 과일 몇 개 더 먹으러 갈래.”
 “여기서는 별미로 취급할 뿐이지만,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파스타는 풍요의 상징이라더군.”
 “그런데?”
 “풍요의 상징을 먹고도 또 먹을 거란 말이냐?”
 빌이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소녀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하고 구경해야지. 이런 기회는 흔치 않거든.”
 “이 도시의 파스타 값은 빵 값보다 비싸다.”
 “흠. 그래도 먹어야겠어.”
 “내 돈을 다 거덜 낼 작정이군.”
 “숲에 파묻을 돈은 많으면서 여자 입에 쓸 돈은 아까운 거야?”
 그 순간 빌은 입을 다물었다. 부하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숲 같은 곳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말하고 싶지도 않다. 
 쇠도끼가 운다. 검이 떼를 쓴다. 하지만 함부로 휘두를 상황이 아니다. 여자가 북부인의 손에 죽으면 도시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여자가 대중 앞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문제의 북부인은 도시에 저주를 몰고 온 셈이 된다.
 ‘이 계집아이, 대체 어디까지 알며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
 소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채 빌의 허리띠에 매달린 돈지갑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댔다.
 “이 정도로 보상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겠지?”
 “보상이라.”
 빌은 잠깐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남을 크게 해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기억에 남을만한 보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향을 나선 후로는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안 죽은 녀석은 몸값을 요구하거나 노예로 팔아치웠다. 역시 보상을 해본 기억은 드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 정도로 야만적이었군.’
 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노예 말이 맞아.”
 소녀가 혼자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신은 남의 소중한 것을 사라지게 하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거야.”
 결국 빌은 지갑을 열어야 했다. 빌이 먼저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그 뒤를 바싹 따라오며 말했다.
 “그래도 목숨 값치곤 싸지?”
 “네 생각도 그런가?”
 “응. 그러니 죽어도 사과하지 마.”
 빌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럴 생각 없다.”
 “그럼 됐어.”
 소스를 끼얹은 면발이 가득한 나무그릇, 그리고 전용포크가 없는 자들을 위한 싸구려 나무포크를 요리사에게서 각각 받아든 둘은 빈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마주 앉았다. 소녀는 아까보다 더 밝고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처음 보는 음식이야. 삶는 것과 굽는 것은 봤는데.”
 “죽과 빵?”
 “응. 이 포크도 본 적 있지만, 이렇게 흔한 건 아니었어.”
 “이 도시는 좀 많이 쓰는 편이다.”
 “그래?”
 “파스타 먹을 때는 그래.”
 “흠. 포크는 파스타 전용 도구란 건가?”
 그녀의 말에 빌은 약간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파스타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다. 빵처럼 반죽하지만 죽처럼 삶기 때문에 손으로 먹기엔 뜨겁고 미끄럽다. 이 때문에 곧 포크라는 놈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들었다. 물론 포크가 다른 음식을 먹는데 안 쓰이는 건 아니지만.
 빌은 먼저 포크를 이용해 면을 감아올렸다. 소녀는 빌이 면을 먹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포크에 면을 둘둘 감으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재미있는데.”
 처음 보는 언행일치의 표본에 빌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고, 동조할 필요도 없었다. 소녀의 감상과 달리 그로서는 파스타가 메뉴인 식사가 꽤 익숙했다. 노상에서 부순 건빵을 시든 양배추, 새카매진 고기조각과 함께 끓여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 속에서 식사할 뿐이다.
 소녀는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
 “난 시끄러워.”
 “당신 입이 조용하단 이야기야.”
 빌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할 말 없다.”
 “그럴 리가.”
 소녀는 빌의 말을 부정했다.
 “일을 방해 받으니 짜증나지 않아?”
 분명 짜증나긴 하지만 상대가 비범하니 드러낼 수가 없다. 빌은 대답하지 않고 얼굴만 찌푸렸다. 소녀는 다시 포크로 면을 감아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역시 대단해. 비명도 안 나오다니, 의외야.”
 “비명?”
 “전에 압착기에 팔이 낀 사람의 비명을 들은 적이 있어.”
 빌은 쉽게 그 장면을 상상했다. 포도주나 올리브유의 압착기 따위에 팔이 낀 사람을. 그에 대입된 자신조차.
 “꽤 시끄러웠지. 당신이라고 예외가 되진 않을 텐데.”
 “내 비명을 듣고 싶나?”
 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소녀는 빌의 도끼를 힐끗 보곤 대답했다.
 “내가 작정했으면 사냥감은 비명을 지르지 못해. 그리고 지금 듣고 싶지도 않아. 그냥, 당신이 왜 비명을 지르지 않는지가 궁금했지.”
 사람을 습격하는 늑대는 대개 어린아이, 여자, 노인을 노린다. 저항할 힘이 없는 상대를 노려 목을 문다. 그러니 비명이 들릴 리가 없다. 빌은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긴장한 탓이 분명하다.
 “그럼 뭘 듣고 싶나?”
 빌이 반문하자 소녀는 성의 없어 보이는 대답을 꺼냈다.
 “아무거나.”
 성의 없는 대답에는 성의 없는 대답만이 쓸모 있을 뿐이다. 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막막하군.”
 “그렇지만도 않아. 모르는 세계란 아는 세계보다 넓은 법이거든.”
 미친 빌에겐 자길 죽이러 온 귀신늑대가 뭘 듣고 싶어 할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는 목이 졸린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해야만 했다.
 “예를 하나 들어주겠나?”
 “오늘은 북부 교회의 예배일이 아니야. 중부 태양교회의 예배일도, 남부 제국교회의 예배일도 아니지. 근데 왜 당신은 갑옷을 입은 걸까? 검을 풀거나 투구를 벗기는커녕 도끼도 손에서 먼 곳에 놓지 않았잖아?”
 소녀는 빌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질문을 내놓았다. 빌은 예상 외의 질문에 잠깐 당황했지만 곧 그 질문을 이해했다.
 아무 위협도 없는데 갑옷을 입기도 한다. 교회의 예배일이 좋은 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옷을 입는다. 비쌀 수밖에 없는 갑옷도 좋은 옷이란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오늘은 예배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니다. 소녀는 그걸 묻는다. 사실 빌을 포함한 일부 북부인은 그 경우가 좀 달랐다.
 빌은 테이블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자신의 양손 도끼를 힐끗 보곤 대답했다.
 “원수가 좀 많거든.”
 간결하지만 정확한 대답이었다. 거짓말이나 농담이 아님은 둔감한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렇게 많아?”
 소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이렇게 두꺼운 성벽과 많은 인간들이 있는 곳에서 어떤 원수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성벽과 대중이 나와 너 사이에 있지는 못하더군.”
 “어라, 그러네?”
 소녀는 깜빡했다는 듯 포크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다. 연극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이었다. 빌은 여전히 도끼를 곁눈질하며 파스타를 삼켰다.
 만약 때마침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안 들려왔다면 빌은 접시까지 씹어 먹는 경지에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많은 개와 늑대들이 갇힌 수레가 보였다. 빌은 수레가 어디로 가는 지 안다. 소녀도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 빌은 슬쩍 고개를 들어보았다.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네. 당신 등에 걸친 개가죽 망토 같은.”
 빌이 고개 들자마자 소녀가 말했다. 그 순간 빌은 면발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분간을 못할 만큼 당황했다. 어느 사이엔가 웃음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빌은 다시 마차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렇군. 안 구하나?”
 혈족일까, 짝일까, 아니면 친구일까. 여하튼 그 원수를 쫓아 인간의 도시까지 들어온 소녀를 향해 상식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소녀는 빌의 생각과 달리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틀렸잖아. 저대로 데려가서 거꾸로 매단 다음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겠지. 그런 장소에 내가 끼어들 곳은 없고.”
 “위험을 피하겠단 소리군.”
 “생판 남이거든. 그리고 왕족이 백성을 위해 일일이 싸우진 않아. 당신들도 분명 그럴 텐데?”
 안다. 어째서 그런지도 안다. 무시당한 사람들의 비극도 안다. 빌의 도끼에 죽은 희생자들 중 적잖은 숫자가 그랬기에.
 빌은 결국 죽은 자에 대한 질문을 꺼냈다.
 “내게 죽은 놈은 뭐냐?”
 “내 짝. 좋은 녀석이었지. 다만 멍청했어. 당신을 상대로 싸울 정도로.”
 대답은 시원스럽게 나왔다. 최악이다. 빌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크로 그릇 속 면발을 휘저었다. 범인이 죽으면 재판이 열리지만 왕족이 죽으면 전쟁이 터진다. 늑대가 전쟁을 일으킬 리야 없겠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다.
 “왕족의 짝이라.”
 소녀는 저 죽음의 행렬에서 동족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복수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역으로 말하자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다.
 “앞으로 두 발 뻗고 자긴 글렀군.”
 빌의 작은 투덜거림에 소녀는 상상 외의 답변을 주었다.
 “적어도 하나는 감사하고 있어.”
 “뭐?”
 “시체, 태웠잖아.”
 빌은 무슨 말인지 즉석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야 그는 소녀의 표정에서 한 감정을 읽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판결을 들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간신히 말했다.
 “늑대에게도 시체에 대한 감정이 있나 보군.”
 “이미 죽은 새끼의 시체를 콧등으로 밀쳐보는 어미를 본 적 없어? 다 똑같아. 당신들이나 우리나.”
 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죽은 자의 왕을 위해 풍장을 하는 북부인이지만 시체에 대한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눈앞의 소녀가 그러한 감정을 품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새끼가 벌떡 일어설 때, 불가능을 알면서도 어미는 일말의 희망을 품지. 하지만 새끼가 어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북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면 다시 좌절해.”
 죽은 자의 왕.
 위대하고 경이로운 군주. 북부의 기회, 대륙의 악몽, 모든 시체의 소유자.
 숱한 젊은이들과 빌의 등을 떠민 자.
 소녀의 웃음이 쓰디쓴 것으로 바뀌었다.
 “난 그런 꼴을 안 당해서 다행이야.”
 “그 답례가 이 유예인가?”
 “글쎄.”
 소녀는 처음으로 애매한 대답을 꺼냈다.
 “그보단 어떤 녀석인지 알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적전정찰인가.”
 “과연 군인. 괜찮은 말이네.”
 소녀는 웃어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웃음이었고, 포크에 감기는 파스타를 볼 때 외엔 항상 짓고 있던 웃음이었다. 빌은 표정을 구겼다. 그는 커다란 포크에 찍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건더기만 남은 파스타 국물을 마저 마셔버리곤 말했다.
 “웃지 마라.”
 “뭐?”
 “거북하다. 거짓으로 웃지 마라.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잖나.”
 계속 안 좋은 대화가 지나간 참이다. 빌은 계속 걸리던 문제를 이번에 해결해야겠다는 투로 말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든 내 맘이야.”
 “소름 끼친다.”
 이번엔 빌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속내를 들춰 보여줬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노골적인 불쾌감을 무시해버렸다. 순전히 그녀의 마음대로다. 빌은 휘둘릴 뿐이다. 재판장의 피고인이 이런 심정일까. 자신보다 높이 올라선 피해자의 추궁. 빌은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다. 빌이 다음 말을 고심하여 고를 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홱 돌리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짓 했잖아?”
 빌은 다시 한 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시론은 빌 대장이 지시한대로 행동했다. 그는 노예들을 북부재단 제2회관에 던지다시피 몰아넣고는 먼저 와서 쉬고 있던 몇몇 병사들에게 그녀들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 다음부터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남는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했다. 그는 갑옷을 벗고 장갑을 벗어던진 다음, 짐짝에서 나무판을 꺼내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곤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체스하자!”
 “그 말을 기다렸다, 부대장!”
 “걸어, 걸어! 부중대장이 이기는데 투키 금화 하나!”
 곧바로 호응이 뒤따랐다. 오른쪽 이마의 화상흉터가 인상적인 대장장이 마누크가 일어나 시론의 상대를 자처한 직후 그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일주일 봉급을 내기에 걸었다.
 시론은 간만에 체스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도저히 체스를 둘 수 없다. 게다가 흔들리는 선상에서의 주사위놀이가 시빗거리가 되는 꼴을 본 빌은 ‘선상도박 적발 시 판돈 몰수 및 3개월 감봉’이라는 무시무시한 규율을 만들었다. 체스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지만 빌 대장의 성격이라면 체스까지 주사위놀이와 동급 취급할지도 모른다.
 즉, 시론에게 있어 육지만큼 체스 두기 좋은 곳은 없는 셈이다.
 순식간에 상대까지 정해지자 시론은 즐겁게 말들을 꺼냈다. 언젠가 약탈한 중부 태양교회의 대리석기둥 파편을 그가 직접 깎아 만든 흑색과 녹색의 인형들이 즉각 전투태세를 갖췄다. 제2회관이 도박판으로 변신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체스를 시작으로 온갖 잡다한 도박과 게임과 내기가 회관 바닥을 휩쓸었다.
 시론은 왕후귀족이 즐기며 부중대장 직위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이 지적인 게임을 주사위놀이와 동급취급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만까지 이번 기회에 해소할 생각이었다. 그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누크는 좋은 체스 친구였고 오랜 적수이지만 시론의 날카로움은 그를 고전시켰다.
 “아, 부중대장. 여기 있었군.”
 시론과 마누크는 회관 입구에서 들려온 갑작스런 호출에 둘 다 짜증을 느꼈다. 그러나 시론을 호출한 사람은 모리 지점장이었다. 함부로 짜증을 낼 상대는 아니다. 시론은 고개만 슬쩍 돌려보았다.
 “웬일이슈?”
 “쉬는 중에 미안하지만 빌 대장에게 제안할 사업이 하나 생겼네. 모험대차교역 건이야.”
 “항로는 잘 모르겠는데, 그거 이 시기엔 좀 위험하지 않나? 제국 출신 해적들이 극성이라고 들었는데?”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이야. 처음 하는 사업도 아니잖나.”
 돈 많은 상인이 돈 없는 젊은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어 시작하는 사업. 대개는 해상교역을 말하며, 일회성의 모험이다. 많은 자본을 댈수록 많은 이익을 얻는다. 시론은 누가 모험가이고 누가 자본가일지 저울질해보았다. 빌과 그 동료들은 언제나 모험가 쪽에 가깝다.
 “대장에게 시키려고?”
 “아니. 빌 대장이 내 지점과 함께 자본을 댔으면 하네.”
 “어, 대장이?”
 “빌 대장과 투키 지점, 그리고 날 포함해서 한 20명쯤 자본을 댔으면 하네.”
 “지점장 나리까지 사비로? 그거 꽤 거창한 모양이네?”
 “남부제국에서 비단을 대량으로 입수해올 예정이지. 배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큰 이익이 날 거야.”
 실패하면 큰 손해를 본다. 하지만 교역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산적과 해적과 도적기사의 위협 따윈 일상이다.
 일단 이건 빌이 결정할 사안이다. 자신은 전달만 하면 된다. 상선대의 최고결정권자는 누가 뭐래도 빌이니까. 시론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이 오면 전달하지요.”
 “빠를수록 좋네. 흥미 있으면 내일까지 지점으로 다시 좀 와 달라 전하게.”
 지점장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리더니 성큼성큼 돌아갔다. 심부름꾼을 시키지 않고 직접 오다니 정말 큰돈이 오가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시론은 체스보드를 내버려둔 채 잠깐 고민하더니 주변 부하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대장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알 리가 있나. 자유 시간엔 언제나 혼자 돌아다니잖아. 뭐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마누크만이 홀로 대꾸하곤 불리한 게임만 주시했다. 그는 빌이 찾는 반가운 소식의 정체를 몰랐다. 시론도 대장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만 알 뿐이다. 몇몇 병사들이 이에 해석을 달기 시작했다.
 “대장에게 반가운 소식이라. 게드 장로님이나 모리 지점장님은 아는 모양인데.”
 “하지만 안 말해주잖아.”
 “들은 이야기론 대장이 사람을 찾아  다닌다던데.”
 “어떤 놈인지 몰라도 정말 불쌍하군. 미친 빌이 쫓고 있단 뜻 아냐?”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장의 철천지원수란 이야기도 들었어.”
 “내가 듣기론 외뿔악마랬어.”
 “악마를 왜 쫓아?”
 “대장이 태양교도의 저주에 걸렸는데, 그 악마의 뿔이 특효약이래.”
 “무슨 저주?”
 “낸들 알아?”
 쓸데없는 유언비어의 난무 속에 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애하는 대장에 대한 이런 중상모략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전체에 이롭지 않다. 그것이 과묵한 빌에게 붙는 경외감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그는 단호한 자세로 선언했다.
 “야, 그럼 우리가 저주 걸린 배에 타고 있단 말이야? 재수 없는 소리 집어치워. 그리고 주둥아리 함부로 놀려서 사기 떨어뜨리는 놈은 좀 아프게 된다.”
 마지막에 중대규율이 언급되자 유언비어는 즉각 잦아들고 다시 도박판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책임회피를 위한 시도였다. 시론은 한번 웃어 보인 다음 다시 체스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은근히 생각할 시간을 더 원하던 마누크만이 양손으로 머리를 싸맬 뿐이었다.
 “보진 못 했습니다만.”
 “뭐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시론이 다시 고개를 돌리면서 마누크를 약간 기쁘게 했다. 시론의 눈에 신입 석궁수가 들어왔다. 어느 사이엔가 들어온 그는 석궁을 회관 한 구석에 내려놓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같이 어울리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시론은 눈을 껌뻑이더니 질문했다.
 “어, 틸리라고 했던가? 뭘 봐?”
 “빌 대장 말입니다. 누군가 시내에서 봤다더군요. 여자랑 같이 있다던데.”
 고심 끝에 체스 말을 옮기려던 마누크는 굳어버렸다. 회관에 모여 있던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틸리에게 쏜살같이 박혔다. 심지어 도박판에 끼지 않고 졸던 병사들조차 악몽을 꾸다 깬 표정으로 틸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경악과 의문, 공포가 떠올랐다.
 “무슨 소리야? 대장이 여자를 끼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니?”
 시론이 먼저 어이없다는 말투로 반문했다. 단단히 굳어버렸던 마누크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론의 말을 긍정했다.
 “잘못 봤겠지. 미친 빌이 여자를 찾는다면 그건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단 거야.”
 곧 마누크는 자신이 나이트를 어디로 옮기려 했는지 까먹어버렸다는 사실에 소리 없이 절규했지만 틸리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도 들었을 뿐이긴 합니다만.”
 틸리가 항변하려했지만 병사들은 전부 그를 무시했다. 도박판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확고한 믿음을 격파하기엔 역시 확고한 믿음이 필요했다. 신입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하나 더 꺼내놓았다.
 “자루까지 쇠로 만들어진 도끼를 들고 다니는 북부 노인이 대장 빼고 또 있습니까?”
 도박판이 다시 얼음호수 같은 정적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빌의 부하들은 세계관이 통째로 붕괴되는 감각을 맛보았다. 하지만 시론은 간신히 부정하는데 성공했다.
 “어이, 신입. 대장은 절대로 여자를 안지 않아.”
 “왜요? 혹시 고자입니까?”
 폭발적인 웃음이 도박판들 위를 휩쓸었다. 지나치게 경직되었던 분위기 속에서 예고 없이 터져 나온 웃음이었기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가장 크게 웃은 사람은 마누크였기에, 시론은 그의 웃음 때문에 체스보드가 뒤집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설명해주었다.
 “그건 아냐. 소원을 비는 대신 신에게 맹세했다더군.”
 “그런 맹세는 언제든 깨지지 말란 법이 없죠. 오늘이 그날 아닐까요? 아니면 여자가 대단한 마녀라던가.”
 둘 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시론은 다시 고개를 젓더니 체스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은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고, 중독성은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다른 도박판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미친 듯이 웃고 난 뒤였기에 병사들은 다소 긴장을 풀고 원래 하던 일에 복귀했다. 돌 같이 굳어 있던 마누크가 특히 그러했다.
 “마녀라. 웃기는 말이군. 잘못 봤거나 오해일 거야. 미친 빌을 쥐고 흔들 마녀는 이 세상에 없어. 오늘이 대장 죽는 날이 아니라면.”
 체스보드로 시선을 내린 마누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론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내 생각도 그래. 게다가 이 대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원수 진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렇겠지?”
 마누크가 답례로 긍정해주었다.
 하지만 체스보드의 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도박판들도 움직임이 멈췄다. 다들 잡아먹을 것처럼 자신들의 게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간신히 카드를 집어 그걸 섞기 시작한 병사는 자신의 손놀림을 배신하고 자꾸만 떨어지는 카드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주사위는 흔들리는 컵 속에서 그만 꺼내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주사위놀이패는 그 요청을 당연하다는 듯이 묵살했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나타났다면, 무슨 중대한 문제가 생겼단 이야기가 아닐까?
 병사들은 게임이란 게임을 전부 뒤엎어버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무기를 챙겨들었다.
 “총원, 전투준비! 아무래도 이건 예삿일이 아니야! 당장 대장을 찾아!”
 허겁지겁 갑옷과 장갑을 찾아 착용하던 시론의 외침에 놀란 틸리가 황급히 내려놓은 석궁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마누크가 갑옷도 입지 않고 전투망치만 든 채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신속히 입을 수 있는 사슬갑옷의 특징에 감사하며 시론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다시 외쳤다.
 “보라색 신호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