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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14 22:08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246 추천:3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서막 
extra_vars2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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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이 쓰러진 나무 위에 앉았다.
 백발수염이 무성한 그는 중무장한 전사였다. 뾰족한 투구를 썼고 납작한 고리를 엮은 사슬갑옷을 입었으며 흙처럼 새카만 개가죽을 어깨 위에 걸쳤다. 허리엔 검을 찼고 손과 발의 맨살도 검은 가죽용품으로 감췄다. 가죽에 가느다란 철판을 박아 팔목을 보호하던 방어구는 몽땅 박살이 나서 대롱거렸으며, 녹색과 노란색의 세로줄무늬 바지는 왼쪽 가랑이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피로 물들었다.
 부상을 입은 노인은 자루까지 쇠로 만들어진 괴상한 도끼를 지팡이 삼아 그 끝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회백색의 액체가 수염을 타고 조금 흘러내렸다.
 “어이, 대장.”
 익숙한 목소리에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몇 년째 자신을 따라다니는 충실한 붉은 머리 부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전투도끼를 들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마개가 전부 열린 채 벨트에 주렁주렁 매달린 화약통들, 옆에 놓인 화승총이 조금 전까지 그가 전투를 벌였음을 증언했다.
 “괜찮은 거야?”
 부하의 질문에 노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부하는 안심했다는 듯 씩 웃으며 노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맛이 간 줄 알았잖아. 하긴, 괴물늑대는 보통 늑대가 아니지. 축하해, 대장.”
 부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뒤로 돌아섰다. 그의 오십 걸음 앞에는 거대한 회색 늑대가 죽어나자빠져 있었고, 그 주변엔 병사들이 와글와글 모였다. 평범한 늑대와 달리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괴물늑대의 시체는 완전히 피투성이였는데 총탄구멍만 수십 개가 넘었다. 몸에 박힌 창촉과 도끼 자국의 숫자는 셀 수도 없었다. 찌그러졌다는 말이 더 어울릴 몰골이었다.
 한 노인에게 덤볐다가 도리어 그 부하들에게 포위당한 늑대의 최후는 화약과 쇠 냄새가 진동했다.
 “내가 잡았다고?”
 겨우 입을 연 노인의 말에 부하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그는 양팔을 활짝 벌리는 과장된 포즈로 선언했다. 
 “혼자서 저놈 턱주가리를 쪼개놓을 사람은 북부가 아니라 대륙을 통틀어도 대장 밖에 없어.”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 덕이지. 그리고 나 혼자선 절대 못 이긴다.”
 부하는 웃으면서 팔을 내렸다.
 “알면 혼자 다니지 마. 놀라서 심장 멈추는 줄 알았어.”
 노인은 오른손을 도끼에서 놓고, 긴 줄을 달아 왼쪽 어깨에 대각선으로 멘 여러 개의 작은 수통들 중 하나를 집었다. 뚜껑이 안 닫힌 그 수통의 입구에는 그의 입가에 묻은 것과 같은 회백색의 액체가 조금 묻었다. 그 수통 안을 들여다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다 흘렸군. 뚜껑을 닫을 겨를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장로님들한테 또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당장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노인은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다음, 내용물을 그 안으로 탈탈 털어 넣었다. 몇 방울의 회백색 액체가 바로 흘러나왔다. 수통이 완전히 비었음을 확인한 뒤에야 노인은 수통의 뚜껑을 닫았다. 부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대장에게 부탁의 말을 꺼냈다.
 “기왕 약 마신 것, 늑대 가죽 좀 벗겨줘.”
 노인은 그 말에 늑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동안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결론을 내렸다.
 “태워라.”
 “뭐?”
 “발톱 하나 뽑지 말고 태워라.”
 “어, 왜? 엉망이지만 나름 쓸모 있을 텐데?”
 “모피는 죽여서 벗기는 게 아니다. 저 따위여서야 가치가 없어. 게다가 시간이 없다. 늦으면 지점장 녀석이 개처럼 짖겠지.”
 “그렇다 해도 시체를 태우면 죽은 자의 왕이 싫어할걸. 가치가 없어도 기념은 되지 않겠어?”
 “기념 따위엔 관심 없다. 그리고 저건 푸줏간의 돼지와 같아. 내가 죽인 것을 처분할 뿐, 그의 권리를 침범하진 않지. 다시 일어서기 전에 태워라.”
 “분명 왕이 시시콜콜 따지진 않겠지. 하지만 아까운데.”
 부하가 미련을 못 버리자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북부가 아니라 자유도시의 세력권이다. 시체가 멋대로 돌아다니면 곤란하지. 죽은 자와 결탁한 북부 놈들이란 소릴 듣고 싶나?”
 북부의 아킬레스건이 지목 받자 부하의 안색이 당장 변했다. 거래처의 영역에서 안 좋은 소문이 따라다니면 장사는 물론이고 목숨의 보전에도 치명적이다. 그렇잖아도 북부인은 살아있는 주제에 죽은 자의 왕과 동맹관계라 시선이 좋지 않다.
 “그걸 미처 생각 못했군. 당장 태우지.”
 부하는 잽싸게 늑대 시체를 향해 뛰어갔다. 잠시 뒤 병사들 사이에서 약간 불만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노인과 부하의 대화와 같은 과정을 밟더니, 잠시 뒤 발톱이나 이빨을 뽑던 병사 몇 명이 물러났다. 곧 화장 준비가 끝났다. 화약과 기름을 약간 부은 뒤 화승을 던져 불을 붙이자 당장 불길이 치솟았다. 병사들은 그 위에다 잔가지와 나무토막 몇 개를 던져 넣어 불길이 더 잘 살아나게 했다.
 괴물늑대의 시체는 한번 꿈틀거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타들어갔다. 그 광경을 주시하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등 뒤의 누군가를 향해서.
 “늑대는 현명하다지.”
 대답은 없었다. 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현명한 늑대는 지금 이를 드러내지 않아.”
 서늘한 숲 속에 도사린 입김이 목덜미로 느껴졌다. 노인은 도끼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넌 덤비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