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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상자 속 그 고양이는 울고 있었을까

2010.09.12 17:13

윤주[尹主] 조회 수:29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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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결국 처음으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십여 페이지 가량을 낭비하게 되었다. 당신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우리는 낭비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걸. 식재료의 '폐기율', 내연 기관의 낮은 효율성, 세계에서 네 번째로 넓다던 내륙 해나 세계 최대의 우림에서와 같이.



 여기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버림받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른 하나는 세상을 구할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쓸데없이 과장된 것처럼 들렸고, 가끔은 - 기괴하게 현실적인 비유 탓이리라 - 농담처럼 들리기도 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소녀의 사연일까? 버려진 찌꺼기로부터 이어지는 고통의 계보? 아니면 몸을 살라 세상을 만든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구원의 계보?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가운데 나는 어느 미약한 환각마저 보았다. 잠시 동안이지만 갸날픈 소녀 어깨 위로 시커먼 무언가가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피곤한 탓일까, 눈을 비비고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 그 검은 무언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소녀 정체에 대한 선택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둘 다 그녀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지.



 "솔직히 네 말을 굳이 믿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왜 제가 거짓말하겠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반문한다. 그럴듯한 이유라면 얼마든지 있다.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 가 가장 적당하다. 그럼 왜 이 꼬마는 내게 동정심을 사려는 걸까? 이유는 또, 생각하기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도 나올 수 있다.



 그 수만 가지 이유를 모두 대기보다 나는 훨씬 효율적이고 간단한 방법을 썼다.



 "왜 네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겠어?"



 내 반문을 듣고서 소녀는 눈초리를 치켜 올린다. 이런 식으로 반격해 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눈앞에 있는 꼬마가 보기보다 영악하다는 것은 앞서 몇 번이고 체험해보지 않았던가.



 잠시 후, 소녀는 치켜뜬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 눈은 한스러움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실려 있다.



 "좋아요, 그럼.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 보시죠?"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안 그러면 대화가 성립이 안 되니까요!"



 아아, 이젠 어거지로 때워 넘길 셈인가보다. 속으론 울컥 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거기에 응해 주고 만다.



 솔직히 어린아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맥락 없이 꺅꺅대고, 하이 톤으로 재잘재잘 떠들고, 걸핏하면 떼를 쓰거나 울어 버리니까. 다만 나는 그런 불평을 해대며 내 평생에 아이란 없는 셈 고개를 돌려버리기보단 참고 또 참으며 어색한 웃음으로 응대하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택해 버렸다. 그 편이 훨씬 어른스러운 태도니까. 아이들이 맘에 안 든다고 같이 화내고 떼를 쓰면 솔직히 그 애들과 다를 게 무어냐 이거지.



 그러다보니 애들에겐 자연스레 져주는 게 상례처럼 되어 버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믿어 주라고 떼쓰는 소녀와 못 이기는 척 받아주는 어른, 퍽 자연스런 그림이 아닌가?



 한 가지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이 세상엔 어른보다 영악한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 믿는다고 치자. 그럼 어느 게 진짜인데? 첫 번째 이야기? 아님 두 번째 이야기?”
 “어쩌면 그 사이 어디쯤일지도 모르죠.”



 이게 정말……. 화를 내려다가 웃는 낯짝을 보고 겨우 참는다. 일단 생각해보기나 하자. 일단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뭐지?



 현실성이 없다, 주요 인물이 모두 부모 - 자식 - 손자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한 이야기는 철저히 암울하기만 한 내용인 반면, 다른 한 이야기는 나름 숭고하다. 어찌됐건 이 인간 세상 구원하려 제 한 몸 불살라 희생한다지 않는가?



 한 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번득인다. 이건 전부 지독하게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의 망상 내지 공상인 거다. 틀림없이 자기 할머니, 엄마까지 모두 가난에 찌들어 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 빗속을 헤매고 다닌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쯧쯧, 불쌍하게도.



 “뭐예요, 갑자기? 꼭 관광 와서 유람선 타다가, 대야 타고 달려들어 구걸하는 애들 보는 눈초리로?”



 너무 빤히 쳐다봤던 걸까. 소녀가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몇 년 전 자원봉사로 갔던 보육시설이 지금도 거기 있을까?



 듣지도 않고 소녀는 구상중인 내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했다.



 “눈치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네요. 땡. 아쉽지만 그건 틀렸어요. 다른 답을 내놔 보세요. 또 바보 같은 생각하면 가만 안 있어요?”
 “문제가 너무 어려운데?”



 소심하게 반발해 본다. 소녀는 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바보처럼 어리둥절한 나를 보고 소녀는, 이번엔 어찌할 수 없단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당연하죠. 이건 제 프라이버시인걸요? 쉽게 풀면 곤란하잖아요.”
 “어쨌거나 풀라고 내놓은 문제 아냐? 굳이 이런 식으로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 던져주고 답은 요령껏, 하고 떠넘겨야 되겠어? 다른 방법도 많잖아. 스무 고개 넘기라던가, 시간 지날 때마다 힌트를 더 주는 수수께끼라거나.”
 “그럴 순 없어요.”
 “어째서?”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말하고 나서 알아차리고 만다. 다만 그다음 일어난 사태까진 예견하지 못했다.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있다. 쑥떡같이 말해도 콩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도 있다. 소녀에게 묻고 싶다. 이토록 선조들이 남긴 좋은 용례들을 재껴두고 왜 굳이 그랬어야 했는지. 어째서 어리석은 질문에 바보 같은 답을, 쑥떡 같은 말에 굳이 쑥떡 같은 호응을 했어야 했느냐고.



 “소녀의 프라이버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단 말예요! 현대물리학에서의 양자역학이나 등산 계에서의 14좌 등정 사실 여부 검증보다 훨씬!”



 나는 곧장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었다. 망할 그놈의 양자 역학! 망할 그놈의 고양이! 주변에 상자만 있으면 당장 14좌 꼭대기에 올려놓고 아래를 향해 펑 차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가 정상에 오를지 못 오를지 문제는 잠시 제쳐 두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사람들이!



 그 상자에 고양이 외에 다른 것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단 사실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양자 역학이라던가, 프라이버시라던가, 프라이버시라던가.



 어째선지 나 자신은 영원히 이 소녀에 대해 알 수 없을 것만 같다.



 "정말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죠."



 근데 이 년이! 울컥 하는 와중에도 뭔지 모를 위화감이 자꾸 든다.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어째선지 마음이 전부 읽히고 있단 더러운 기분이 드는데.



 그 와중에 소녀는 다시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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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많이 진행되었네요;;


 


 비가 많이 와서 큰일입니다. 다음 주부턴 맑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그 바람에 좀 험한 꼴 봤네요;;


 


 암튼 내일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