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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기묘한 이야기-Repetition(반복)

2010.10.04 04:05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24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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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비축분의 끝입니다. 오마주가 있습니다.

#3─그와 그녀



"무서워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당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결국 당신이 내게 마음을 허락하고 말 것을,
그리고 언젠가 당신을 배신하게 되리란 것까지…
예전 누군가가 그랬듯이, 당신의 마음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줄 것이기에."

- 룬 언그알레이,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 中




바로 옆에서 파리라도 날아다니는 것처럼 귓속이 윙윙 울렸다. 뿌옇고 흐릿한 시야 속에 하얀 막대기 같은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눈의 초점이 맞았다. 하얀 막대기의 정체가 천장에 붙어 있는 형광등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안경을 낀 남자였다. 그 얼굴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번에는 몇 개의 얼굴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모두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차렸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고개를 움직이려다 심한 두통을 느꼈다. 머리로 흐르는 혈류와 함께 지끈, 지끈, 지끈. 통증이 리듬을 새겼다.

잠든 내내 악몽을 꾸다 깨어난 것처럼 기분이 찝찝했다. 물론 그 꿈의 한 조각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나를 들여다보던 얼굴 하나가 물었다. 얼굴이 갸름한 중년 남자였다. 난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아팠다. 미간을 찡그리며 이번에는 내 쪽에서 물었다.

"이곳은…?"
"병원입니다."
"병원이요?"
"아직은 말씀을 안 하는 편이 좋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제야 나는 상대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간호사 차림이었다. 그 후 한동안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 몽롱하게 시간을 보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오락가락한 기억은 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기억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실려 온 기억도 없거니와 치료를 받은 기억도 없다. 다만, 팔에 링거 주사가 꽂혀 있고 머리에 붕대가 감긴 것으로 보아 자신이 크게 다치거나 병을 앓고 있는 듯하다는 것만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병실이란 한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곳이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애정과 쌓아왔다고 확신했던 인간관계가 그저 거짓과 무관심과 착각과 기대로 만들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절망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다. 물론 나라고 해서 예외는 될 수 없다.

"시현 씨, 이시현 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는 무거운 눈을 떴다.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의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조금 아프군요."
"다른 증상은요? 속이 울렁거린다든지……."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뭐라고 귀띔을 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기억이 전혀 안 납니까?"
"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의사가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표정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를 만도 하다고 얘기하는 듯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듯하더군요."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제삼자의 말투였다.

"자세한 얘기는 가족에게 듣는 편이 나을 겁니다."
"가족?"

가족이라고는 ○○시에 사는 어머니와 여동생뿐이다. 설마 그들이 이 도시에 왔다는 뜻일까. 어머니는 도시 밖을 나가실 수 없으실 텐데….

"아내분 말입니다."
"아내라니…."

물론 나한테 그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의사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간이 떨어질 것 같은 농담을 들었다. 눈앞의 이 사람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혹시, 그녀가 왔습니까?"
"사흘 전부터 여기에 있었습니다. 시현 씨가 깨어나기를요."

내가 사흘씩이나 병원에 있었다니…. 자신이 상황인식을 안이하게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의사가 눈짓하자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다. 잠시 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의사가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좀 전에 나갔던 간호사를 따라 그녀가 들어왔다.

"………."

그녀는 잠시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내 상태가 심했던 걸까?

"정말 괜찮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시현 씨는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간호사가 말했다.

"그런가요…."

그녀는 나를 보면서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나와 그녀를 배려하는 것인지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갔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 안 돼요."

문을 닫기 전에 간호사가 못을 박았다. 그렇지 않아도 몸을 혹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둘이 남자, 그녀는 새삼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이 바람에 물결 치는 수면처럼 젖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슬픈 듯한 얼굴을 하는 걸까. 우리는 거기까지 깊은 사이가 아니었을 텐데….

"이만한 게 천만다행이군요."

그녀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입술이었다. 그 때문인지 얼굴색이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계속 병원에 있었다고 의사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갑자기 그 손을 잡고 싶어졌다. 내 손이 떨리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하는 사죄의 말이 제멋대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이마에 손을 대는 그녀가 아주 뭉클하게 다가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원래부터 그렇게 알고 있던 사람처럼, 정말로 가족같이 느껴졌다. 걱정이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 안타까워서 울상이 된 얼굴. 이마에 느껴지는 차가운 손가락.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난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문제의 관점은 바뀌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반년, 자그마치 반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같은 나이대의 여성과 함께했던 나날들. 혼자 있을 때보다는 분위기가 확실하게 변해 있었다. 좀 더 유유자적해졌다고 할까, 텅 빈 곳이 채워진 것 같다고 할까. 처음에는 같이 있는 것조차 낯설었건만, 이제는 자신의 곁에 그녀가 있다는 것이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불현듯 귓가에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혼잣말처럼 말을 흘려도 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싫지 않았다.

그녀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함에 둘러싸인 여성이었지만, 얼어붙는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법은 없어도 소박한 화제로 말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일상. 평화로운 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웃고 싶어진다. 평범하다는 그것이야말로 애태워 찾아 헤매던 것이다. 그래서 그게 부서지는 게 더욱 무섭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변해간다. 그 모든 것을 나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백번을 생각해도, 감당할 깜냥이 내겐 없어 보인다. 언젠가 과선배가 했던 말처럼 더 진행되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닐까? 「그 사람」에겐 더 이상의 미련 따윈 가질 필요가 없어졌고, 겨우 마음에 들어온 그녀마저 내쳐버리면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야 할까. 난 비교적 체념이 빠른 편이다. 역경이 너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나와 그녀 사이엔 존재했다. 상처를 덜 입히는 방법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녀를 보내야 하겠지만…. 알고는 있었으나 이 정도로 자신이 나약했는지를 깨닫고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군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당신."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핥고서 다시 말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동시에 뒷덜미가 욱신거렸다.

"사흘 전에,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던 건 기억하죠?"
"그건 어렴풋이 나는군요."

흐릿한 영상이 뇌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 영상은 좀처럼 또렷해지지 않았다.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낀 것처럼 답답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30분만 더 늦었다면 뇌출혈로 이어졌을 거라고."
"아까부터 뒤통수가 욱신거리던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주 딱딱한 것으로 맞은 것 같더군요. 두개골 이외에도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상태였죠. …대체 그 지경으로 어떻게 집까지 온 건가요?"

나는 그 광경을 상상했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에 아무런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딱딱한 것으로 맞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막연하나마 기억의 단편 같은 것이 있었다. 검은 장갑이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그래, 내가 ‘그 남자’에게 당했던 거로군. 그러나 그 행동은 미친 짓이었다. 미친 짓이라는 표현을 빼고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남자는 왜 나를 살려둔 걸까? 그 정도면 내버려둬도 죽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물론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살인마와 태연하게 대화까지 나눈다는 건 정상적인 사람의 이성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겠지만. 앞머리를 넘기며 천정을 보며 한숨을 쉬자 옆에서 내밀어 진 실크손수건이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무래도 땀, 그것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모양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 남자를 만나러 갔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당신답지 않군요."

땀을 닦은 손을 이마에까지 내밀며 나무라는 말투로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런데 잠깐만. 뭔가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지 않았나? 그녀에겐 누굴 만나러 가는지 이름은 말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당신 방에서 그 액자 하나만 발견했을 것 같아요? 컴퓨터에서 찾아낸 게 뭐일 거라 생각하나요?"

역시나, 기어이 그 파일들을 보고 말았군.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건만.

"나한테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할 일 따위, 때려치우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기까지 참견할 사이는 아니군요."

그녀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원래가 서투르다, 고 넘어가기엔 핑계가 너무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른 남자들처럼 살며시 보다듬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강하지 못한 것 같다. 늘 차가운 표정으로 그렇게, 언제나 멀리 떨어진 사람처럼 대할 뿐이다.

시선이 마주친다. 손을 뻗는다면 그녀는 마주 잡아줄까? 어깨를 껴안는다면 그녀는 그걸 거부하지 않을까? 몸을 요구해 보면 어떨까. 과연 어떻게 될까? 나는 정말로 그런 걸 바라고 있는 건가? 옆에서 보면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요구하는 걸로 보이겠지.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뺨을 붉히고 있었다.

"…왜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거죠?"
"아뇨, 아무것도. 문득 당신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엷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그녀는 사랑스럽고 가련한 입술을 삐친 것처럼 한데 모았다.

"이제 와서 아부하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그런데 시현 씨는 어째서 평소대로인가요?"

코웃음으로 돌려주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왜 자신이 그런 식으로 생각되는지 궁금했지만, 답은 곧바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쓰러지고 나서 오늘에서야 겨우 일어난 직후였다.

"혹시 그겁니까? 지금 무섭고, 떨리니까 꼭 껴안아 주세요, 라고?"

적당히 얼버무릴 생각이었는데 묘하게 진지한 시선으로 그녀는 소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대꾸한 뒤 우물우물하고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랄까, 왠지 후회스럽다.

왜 후회했을까? 하지만, 곧 기억해냈다. 요즘 들어, 자꾸 옛날 일을 생각해내는 횟수가 증가한 것 같다. 「그 사람」의 꿈을 꿔서 그런가? 「그 사람」의 꿈을 꾼 뒤부터 나는 과거의 상흔에서 멀어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빨아도 지워지지 않을 얼룩. 그 말이 갑작스럽게 생각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미안하지만, 제가 입원해 있을 동안 나온 신문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이상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아마 그게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시현’이라는 사람을 깊이 알면 알수록, 분명히 환멸을 느낄 테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좀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는 것이다. 예전 「그 사람」에게 했던 실수를 다시 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남녀 관계는 없다. 그러니 그녀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게 좀처럼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군.

"여기요."
"이런 일까지 시켜서 미안해요."
"별말씀을."

그녀에게서 신문을 받아들고는 어떤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렵지 않게 그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쇄 살인범 한진성. □□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다.】 역시나, 라고 해야 할까. 내 짐작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이 해결된 것을 보니 지금에 와선 어떤 감정을 품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목격자가 없고, 흉기 역시 주변에서 보이지 않았기에 범인을 특징짓기 힘들어졌다는 점이겠지만. 물론 경찰 측에선 한진성에게 원한을 품은, 유족 중 누군가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흐응, 찾던 게 이건가 보죠?"
"이 일에 전혀 무관한 건 아니니까요."

그녀는 뭔가, 있을 수 없는 걸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헌데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만한 소리였나?

"제가 사흘 전에 만난 사람은 한진성이 맞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겠지요."

살인범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일을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말하는 자신이 이질적으로 비쳤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해선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가끔 그녀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당혹스러워진다.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할법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도 심리 상담을 여러 번 해봤지만, 그녀는 분명히 특수한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속을 파헤치다가 되려 내 쪽이 분석 당한다고 해야 할까.

"의외로군요. 당신이라면 좀 더 물어볼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일반적인 상식선에선 다들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하지만, 의뢰인의 프라이버시가 걸린 만큼, 어느 정도 선까지 설명해야 할지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긴, 어차피 전부 다 말해주는 건 무리겠지만.

"내가 물으면 거짓말 안 하고,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이쪽에선 유감스럽게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정말로 믿음을 주고 싶은 사람을 속이는 것은 기분이 몹시 나쁜 일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연루돼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 하기엔, 그녀의 말처럼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운 점에서 이미 실격일 터.

"말하기 어렵다면 안 해도 괜찮아요. 당신은 예전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감추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보다 더한 기만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충분히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경우에 따라 등뒤에서 사람을 찌르는 배덕자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거다. 하지만, 난데없이 내 뺨을 간질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못된 생각을 하는 얼굴이군요. …싫은 표정이네요."

손가락으로 뺨을 찌르는 마치, 애들을 달래는 것 같은 행동에 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서 그 감정을 속였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계속 예전의 일만 생각납니다. 좋았던 일만 있던 건 아니지만, 묘하게 향수병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싫은 일은 그냥 술로 속이라고 예전에 누가 말한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옛날 일이군.

"괜찮아요. 내가 들어줄게요. 시간 때우기로도 될 테니까."

그 말은 너무나 상냥하고 상냥하며 또 상냥해서, 간단하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침범할 것 같았다. 안 된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이 사람에게는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전부 털어버릴 것 같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올 듯한 초조함을 애써 숨긴 채, 나는 그녀를 직시했다.

"당신은 과거에 대한 건 제대로 말하지 않잖아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이 사람도 역시, 눈치가 상당히 빠르다. 아니, 단순히 내가 알기 쉬운 성격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면, 알아주길 바라는 걸까…. 이대로 계속 이야기한다면 분명히, 나는 그릇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건 좋지 않다. 동시에, 그게 왜 나쁜 거냐는 사고가 계속해서 마음속을 맴도며 어지럽힌다. 그래서, 그걸 속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말,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군요."
"네, 훨씬 예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겐 그것조차도 과거. 지금 나하고 하는 이야기도 언젠가 당신에게는 그저 과거의 일로 되어버리겠죠."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당신은 내 곁에 없을 테니까. 그녀의 군소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동요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늘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특별히 그 사실에 자부심을 품고 있던 것도 아니며, 반대로 성가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자신이 천재라는 생각 역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면서.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는 일은 능숙한 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웃거나, 울거나, 화를 내는 표정이 어색해진 것만 제외하면.

고등학생 시절에도, 그전의 중학생 시절에도, 그녀는 혼자 있는 일이 많은 소녀였다. 사람이 싫다, 는 건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붙임성은 좋은 편이었다. 누구와도 사이좋게 될 수 있다. 그 대신, 곧 소원하게 되어 버린다. 사시사철 함께 있다, 언제나 같이 행동한다는 걸 할 수 없었다. 인간관계에 집착이 얇기 때문이라고, 그녀 자신은 그렇게 분석하고 있다.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고 있던 친구에게는 냉정하다고 들었다.

그녀에겐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사람들과 불화 없이 지내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친해질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휴대전화에 등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면, 열 명 이상은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 터.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은 그중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그 사실에 대해 별로 불편하다던가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겐 그런 것조차 없어 보였으니까. 그녀가 지켜보는 한에서는 연락한 적도, 연락이 온 적도 거의 없었다. 그가 입원해있는 동안, 가족에게서 안부를 묻는 전화조차도 걸려오지 않았으니, 그의 주변 인물관계가 파탄에 가깝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눈으로 보기 전까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이라면 믿지 못할 지도 모른다. 물론 시현이 가족이나, 자신의 과거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섞어 말하기를 꺼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자신의 손목을 본다. 얇지만, 하얀 천으로 감긴 붕대. 스스로 낸 상흔의 증거. 이 상처가 없었다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겠지. 그녀는 그 점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정에 불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다. 기억을 회상했다. 자기 방에서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는 딸을 본 어머니의 놀란 표정,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아버지, 그리고 금방 달려와 사색이 된 남동생까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가족이 그녀를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대했던 것은.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알 것도 같았다. 아마도 알고 싶었던 것이리라. 손목을 긋는 사람들의 심정을. 지금도 그을 때의 아픔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는 부모님에게 단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설령 말한다고 한들,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후에 대학 카운슬링에서 만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의 10의 9 정도는 '아름답게 죽기' 위해서 그 방법을 선택한다. (뛰어내린 시체와 목 매달린 시체를 생각해 보라) 손목을 긋는 여성들의 심리는 일종의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한 나르시시스트가 많다. 본인이 처한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손목을 긋는다는 것은 죽는 순간, 그리고 죽어가는 그 과정까지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손목을 긋는 그녀들의 목적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니까 의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으니…. 타인을 의심하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저,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고 그를 속이고 있을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 타인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와 주길 바라는 사람. 이런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2년 전에 그를 처음 봤을 때는,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타인을 단순히 풍경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내면은 과연 어떨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처음 만난 시기가 사적으로 하는 카운슬링에서라고 생각하겠지만. 반년 동안 같이 있었지만, 그 사람의 전부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아마 지금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겠지.

"…예를 들어, 정말로 뭔가가 있다면 어떻게 할겁니까?"

고개를 털어 가슴속 무언가를 떨쳐내고, 시현은 그냥 속 편한 심정으로 물었다.

"나는… 아, 그래요. 뭔가 있다면 들어줄게요."

그녀의 대답은 그보다도 더 속 편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했으니 망설이지 않는다. 시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희미한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억누른 채 차분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좋습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단조로웠고, 그 말에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려는 어떤 기교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귓속에 쾅쾅 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현은 갑자기 과거를 바라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시간의 무게가 덧씌워졌고, 그녀는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부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란 믿을 수 없는 족속이며, 진정한 믿음과 이해는 있을 수 없다. 불과 수년 전까지 저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상과 가치관은 아버지를 제외한 혈족 모두에게 한결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는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친가에 맡긴 저를 어떻게든 빼내오려 부단히 애를 썼지요. 그때의 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조부께서 하신 말씀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서네 번 정도 생각해 본 후에야 그녀는 그가 자신의 친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시현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사랑할 수 없을까?"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시현은 계속 말했다.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왜 믿을 수 없는 걸까? 견해를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매번 누군가를 의심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나의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동반자가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그들’은 나의 또 다른 형제이며 혈육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시현은 자신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갑자기 시현의 눈빛이 극도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서운 추억을 바라보는 자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아버지께선 열차에 치여 돌아가셨습니다.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서란 명분이었지요.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던 겁니다. 그러나 영안실에서 시신을 보았어도 저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울고 있었지만, 저만 혼자 멀리 떨어진 세계에 갇힌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친족들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형제였음에도, 아들인데도 너무나 싸늘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습니다. '나와 이 사람들이 다를 게 있을까?' 예, 저도 어느새 그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어버린 것입니다."

불현듯 그의 얼굴에 분노와도 닮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의 손은 떨림을 멈춘 채 서서히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움직임을 약간의 불안 속에서 바라보았다. 고통스러운 추억에 이르른 시현은 빠르게 말했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뉴스의 한 대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목숨 바쳐 구한 그 취객이 결국 열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지요. '어차피 그런 식으로 죽을 사람이었다면, 아버지는 대체 왜 희생되었어야 했나?' 어느새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죽어도 좋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 저는 취객의 장례식장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자의 가족들은 제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의 눈을 빠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인에 대한 예를 올리고는 장례식장을 빠져나왔습니다."

고통스러운 추억에 대한 회상을 끝낸 시현은, 굳어진 얼굴을 조금 풀고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가 그렇게 일부러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성실한 자는 고독한 법이며, 동시에 말이 없는 자도 고독하다. 따라서 말없이 성실한 사람이 얼마나 고독할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더군다나 그의 가족은 그의 고독을 덜어주기는커녕 안타까움만을 더해 줄 뿐이며, 일말의 쉼터조차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제게 한 여성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감히 그를 다그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현의 침묵은 건드릴 수 없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받을 것 같은 비탄을 담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입이 열렸다.

"「그 사람」의 말은 정말 친절하게 들렸습니다. 제가 이제껏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난 너를 이해해.' 정말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게 호의와 신뢰를 보내는 사람조차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어딘가 한구석에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오히려 멀리 떨어진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만을 생각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그 사람」을 완전히 밀어내게 되는 어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덤덤하게,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넋이 나갈 것처럼, 무언가를 억지로 견뎌내는 듯한 표정으로 시현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 같은 사람을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이해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제 안에서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거대한 돌덩어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백이 되어버린 「그 사람」의 부재가 초래한 공허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부재를 홀로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실의 창문을 통해 미풍이 불어왔다. 나부끼는 얇은 커튼 자락은 병실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들로 물결 쳤다. 커튼을 간질이던 미풍은 그대로 둘에게 다가섰다.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머릿결이 살짝 떠올랐다.

시현과 그녀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늘어진 머릿결 사이로 그늘진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반대로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새벽녘에 빛나는 신성처럼 보였다. 시현은 이마와 콧날, 그리고 봉긋한 입술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에서 멈췄다. 그 눈동자는 안개에 둘러싸인 호수처럼 깊고 고요했다.

"시현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거, 대부분의 남자가 여성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일 겁니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요? 나는 비뚤어진 아이야, 라고 주장하는 소년처럼."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내가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이군요?"

그녀는 시현의 손을 자신의 볼로 가져갔다. 그는 움찔했지만, 그녀는 그 손을 꼭 쥔 채 그 손등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할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네."

그가 뭔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릴 때,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면, 거짓말쟁이라고 해주길 원했어요?"

그녀의 미소는 서서히 냉소에 가까워졌다. 그 순간, 공허하기만 했던 시현의 눈빛이 예리함을 띄었다. 그 눈을 마주 보며, 마치 상처입은 짐승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나요? 당신은 아직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어요. 얼핏 보면 조리 있게 말을 한 것 같지만,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죠. 군데군데 미세한 틈 같은 게 보여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시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는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듯이, 반쯤 체념에 가까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를 지켜보며, 어머니에게 꾸중 듣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녀는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조부께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던 지라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 지라든가, 「그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던 지라든가, 혹은 3일 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지라든가….

"그것을 힐난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이 말만은 해두고 싶군요."

어깨 위에서부터 나지막하게 울려오는 그녀의 듣기좋은 미성에 시현은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녀는 시현과 맞잡은 손을 잠시 꼼지락거리더니 팔꿈치를 시현의 무릎 위로 세워들어 팔을 천천히 흔들었다.

2년 전, 거리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마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지금의 자신에게도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시현 씨가 잘못한 건… 사양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바보였다는 거에요."
"……의미를 잘 모르겠군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강했습니다. 혼자서 이거저거 가릴 것 없이 잘 헤쳐나갈 수 있었기에, 완벽함에 대한 이상(理想)이 너무나도 지나쳤어요."

그녀는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를 올려가 보듯이 응시하는 시선은 그저 올곧다. 이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히 섬세한 사람이다.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고, 타인을 상처입히지 않으려 애쓴다. 설령 그가 남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보려고 했나요?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로 생각한 건가요? 아니면, 그 일을 자신이 해결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품었던 건가요?"

내팽개치듯 자아내는 한마디, 그 한마디에 그는 어떤 말로도 반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연실색한 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

"의지해 주세요."
"………."
"내가 아니더라도 좋아요.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이 있잖아요?"

시현의 뇌리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이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떠올랐다 사라지고, 떠올랐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해나가며 그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한마디였다. 단 한마디, 그 한마디만 했으면 되었던 거다.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으면 그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 줬을 게 아닌가요?"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시현의 몸을 작은 몸으로 감싸듯이 그녀가 꼭 껴안아 주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등에 팔을 감았다. 그녀는 그 손을 밀쳐내지 않고,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따름이었다.

"시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자신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마요. 괜히 반항아인 척하지 말아요. 당신은 남에게 자신을 나누어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침대에 몸을 기댄 채로 청년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이 들었다기보다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그다지 편안한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고른 숨을 내쉬다가도 갑자기 미간을 고통스러이 찡그렸고, 그때마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검집에서 뽑혀 나오려는 검처럼 보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놀려 시현의 앞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만약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이 다가온다면 그는 날카롭게 눈을 뜨며 사납게 노려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시현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뒤에서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녀의 품에 안긴 그는 차가운 피부의 감촉에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속눈썹이 슬픈 듯이 떨렸다. 곧이어 시현이 꿈결에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잡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애달프게 느껴지는 온기를 품에 안은 그녀는 시현의 숨결을 받으면서 검은 머리카락에 뺨을 묻었다.

“나”는 당신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걷게 할 힘은 없다. “나”는 당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마음조차 지켜내는 건 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로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슬아슬한 영역까지 당신을 따라 함께하고 발을 내디뎌 버텨나가는 것뿐. 살며시 잠에 빠져 있는 시현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조용히 맹세했다.

"사랑하기 때문에도,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만감의 염원을 담아.

"행복해져 주세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긍정하며 또한 부정하자. “나”라는 존재가 쐐기가 되어 당신을 지탱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당신을 얽매고 괴로워하자. 행복해져 주기만 한다면…….


『같이 있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다. 저주하듯 계속 생각하지.
그저 그것만이 존재 이유. 세계가 멸망해도 둘만 있으면 돼.
바보 같은 당신, 차가운 당신. 미칠 듯이 사랑하는 당신.
그걸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너무나도 치졸하고 순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