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6 02:24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263 추천:1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종막 
extra_vars2 종막 
extra_vars3 145624-1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죽은 자의 왕은 꼬박 나흘 동안 광기를 휘둘렀다. 사람들은 때 아닌 파리 떼가 하늘을 덮는 광경을 목도하자마자 땅에 엎드려 그의 자비를 빌었다. 왕은 숲에서 더 이상 살아 걷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병사를 거두었다. 시체들이 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 게드 장로는 여러 밀알 주머니와 황동그릇을 꺼내놓고 고심에 빠졌다. 이 사건을 장로회와 왕궁에 뭐라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홀더 대위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는 죽은 자의 왕이 휘두르는 저주를 보자마자 진저리를 치며 락토를 떠났다. 결국 전공은 그의 것이나, 락토는 좋은 기억이 없는 땅이 되었다. 수호자 브롬 장로는 뒷수습 때문에 결국 창병중대와 함께 떠나지 않고 봄에 따로 출발하기로 결정되었다.
 개척촌은 숲을 손에 넣었다.
 익인들은 돌아왔지만, 더 이상 벌목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개척민들이 다가오기만 해도 그들은 슬금슬금 피해버렸다. 의기양양해진 개척민들은 미친 빌을 상징하는 세로 줄무늬 깃발을 만들어 마을 안팎의 여기저기서 휘둘렀다.
 완전무장한 노인이 그들과 걸었다.
 빌은 개척민들의 경의를 받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숲을 살펴보았다. 수호자 브롬 장로는 딱 하나의 양보만을 왕에게서 힘겹게 얻어낸 모양이었다. 벌레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건만 나무들은 멀쩡했다.
 “다행이군요. 나무들까지 다 죽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양치기 반트의 말이었다.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무는 쉽게 죽지 않지. 발 달린 것보다 오래 사니까. 죽은 자의 왕도 나무가 당장은 필요 없었을 테고.”
 “예? 왜요?”
 “그의 군대는 걸어야 하니까.”
 “과연. 이해했습니다. 전쟁은 걷는 자들만 하는 거군요.”
 “멍청한 소리. 난 선문답이 아니라 전술적 견지에서 말했다.”
 핀잔을 들은 반트는 퉁명스레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빌은 작게 웃고는 불특정 다수에게 질문했다.
 “익인들에 관한 다른 이야기 들은 사람 없나?”
 “도시에서 몇 명이 발견된단 이야긴 들어봤습니다.”
 한 개척민이 대답했다. 빌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익인들의 유력자인 엘은 단순할지언정 나약하진 않았다. 신호탄은 날아가지 않았다. 빌은 그녀가 전후처리에서도 활약하는 모양이라 판단했다. 아니라면 이렇게 신속하게 일감을 찾아 도시로 동족을 보내진 않을 테니까.
 “부랑자들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생존자들, 그리고 무법자들. 개척민들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않고, 돌아오는 것이 반갑지도 않다. 빌은 고개를 끄덕이곤 허리춤에서 작은 자루를 꺼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걷겠다.”
 아무도 빌을 말리지 않았다. 빌은 사람들을 뒤에 남겨둔 채 숲 속을 걸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될 때쯤, 그는 자루를 허공으로 냅다 던졌다. 금화가 흐르며 자루가 수풀 속으로 떨어졌다.
 “뭐하는 짓이죠?”
 냉랭한 여자 목소리에 빌은 몸을 움찔거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엘이 굵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모습이 보였다. 빌이 잠깐 신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보고 있었나.”
 “당신이 홀로 걷는단 이야길 듣자마자 왔죠.”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솔했군. 엘은 금화자루를 곁눈질하더니 다시 질문했다.
 “셀레스테 양이 말해주더군요. 당신은 홀로 숲에서 돈을 묻는 짓을 한다고. 하지만 저라면 더 잘 숨길 거예요. 무슨 의식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장로의 술법? 아니면 죽은 자의 왕이 시켰나요?”
 경계심 역력한 질문. 빌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번 돈이며, 내가 쓰지 못할 돈이고, 너희 몫이 아니다. 단지 그뿐이다.”
 “그럼 누구에게 주는 돈이죠?”
 빌은 탄식 같이 말했다.
 “부랑자들.”
 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대체 왜 빌이 부랑자들에게 돈을 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선? 개도 발광하듯 웃을 일이다. 그녀는 온갖 동기를 추측해보았지만 만족할 해답을 찾지 못했다. 빌도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엘에게 명령했다.
 “건드리지 말고 부랑자들에게 넘겨라. 너희도 그들이 없으면 곤란하겠지.”
 “이유를 10가지만 더 대세요.”
 “하나만 주지. 나머지는 알아서 상상하라. 난 신호탄 안 쐈다.”
 반박은 더 이상 없었다. 투덜거림만이 흘러나왔다.
 “봐줘서 안 쏜 건지, 필요 없어서 안 쏜 건지…….”


*
 숲에서 돌아온 날 밤. 불규칙해져버린 수면시간 때문에 새벽에 잠이 깬 빌은 숙소에서 초롱을 들고 어둠 속으로 나왔다. 개척촌의 밤은 평온했다.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빌의 시야 밖에서 절름발이 약사 노인이 걸어왔다. 그는 마침 빌의 상태를 보러 오던 참이었다. 약사 노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몸은 좀 어떤가?”
 초롱불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빌은 왼쪽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문제없소. 한 두 번이 아니니까.”
 “싸움질도 해먹겠나?”
 빌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는 내킬 때만 싸웠겠소?”
 약사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벽 쪽으로 시선을 슬쩍 흘리더니 말을 던졌다.
 “밖에 손님이 있던데.”
 빌의 얼굴이 굳었다. 약사 노인은 피식 웃었다.
 “전의는 없는 것 같소. 게드 장로님도, 브롬 장로님도 다 알더군. 키체커와 시론은 종탑에 갔고.”
 나만 몰랐나. 빌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는 문득 마누크를 떠올렸다. 빌은 그 친구가 끝까지 모르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알았다면 당장 빌의 멱살을 붙잡았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빌은 원수 같은 친구의 성격을 곱씹으며 원수를 향해 걸었다.
 성벽 위에 올라서자마자 한기가 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없다. 진짜 있긴 한가? 빌은 납덩이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는 총탄을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당장 비명소리가 들렸다. 빌은 그만 웃어버렸다.
 “아프잖아!”
 셀레스테의 새침한 목소리. 빌은 대답했다.
 “그러게 왜 숨죽이고 있었나. 날 죽이러 온 것 아닌가 의심되는군.”
 “내가 바보 같아? 혼자서 장로에 사냥꾼까지 상대하게?”
 “내가 바보였군. 그래, 알겠다. 상처는 좀 어떤가?”
 퍽. 도끼가 흙더미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어린 소녀의 의기양양한 대답이 들려왔다.
 “깔끔하게 다 나았어. 영험하단 말이 괜히 붙는 것 아니거든.”
 “지랄 같군.”
 가감 없이 정직한 감상평이었다. 셀레스테는 폭소했다. 빌은 그 웃음을 경청하며 쐐기를 박았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셀레스테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겨우 웃음을 수습했다. 빌은 셀레스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 말인데, 봤어?”
 “그래.”
 “국왕 말고.”
 “알아먹었다.”
 “어떤 작자야? 난 직접 본 적은 없는데.”
 그를 직접 본 사례가 흔하겠는가. 빌은 왕을 어떻게 설명할지 잠깐 고민했다. 검은 옷에 황금 가면과 녹슨 쇠사슬, 젊은 남자.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존재가 아니다. 결국 그는 간단한 해답을 내놨다.
 “서두르지 마라. 때 되면 볼 텐데.”
 “흠. 답변은 받았고?”
 “답변?”
 “당신이 찾는 것 말이야.”
 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셀레스테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줬지. 하지만 난 알아. 그 말은 어딘가 이상했어. 해명해봐.”
 “어디가 이상했는지 모르겠군. 그리고 내게 그럴 의무는 없다.”
 “30년 전 죽은 자의 왕이 거병했지. 황금이 피신했어. 20년 전 한 남자가 고향을 떠났지. 생각해봤는데, 그는 왜 10년이 지난 뒤에 떠났을까? 그는 황금의 피신에 너무 늦게 편승했어. 당신답지 않은 짓이지. 거기다 당신 부하 중 최고참이란 자가 8년째 당신을 따라다닌단 이야기도 들었어.”
 “시론 말이군.”
 “그래. 생각해 봐. 겨우 8년이야. 20년 전에 시작한 여행인데. 전사의 수명이 얼마나 긴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따라다닌 최고참이 하나도 없는 부대가 없을 것 같진 않아. 8년은 너무 짧지. 좀 성급할지도 모르겠지만, 결론은 하나. 그 남자는 당신이 아니야.”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아니지.”
 “그럼 누구야?”
 빌은 한숨을 내쉬곤 대답했다.
 “내 아들이다.”
 셀레스테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질문했다.
 “아들?”
 “그래.”
 “결혼했어?”
 “했지.”
 “용하네.”
 “무슨 뜻이냐?”
 “생각하지 마. 어, 그럼 그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빌이 말허리를 자르며 대답했다.
 “그 얼간이를 쫓아 나선 아버지다. 아내가 원했지. 아들을 응원하고 싶어 했어. 선왕과 전우를 위해 쓰던 내 소중한 검을 그 꼴통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하더군.”
 아들을 거침없이 평가절하 하는 빌의 말에 셀레스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준엄하게 아들에게 뭔 소릴 하느냐고 질책해야 할까? 그녀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빌이 말했다.
 “결국 놈의 일당이 어디선가 크게 패배했단 소식만 들었다.”
 “살았대?”
 “모른다. 다만 전사한 걸 본 사람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용병 짓을 하거나, 어딘가의 부랑자 패거리에 끼어있겠지. 아니면 보는 사람 없는 곳에서 폐사했거나.”
 빌은 쓸쓸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슬픈 일이지.”
 셀레스테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거. 각박한 살인마가 누군가의 극진한 아버지고, 그의 약탈여행이 실은 집 나간 아들 찾기라고?”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범한 아버지다.”
 “시시해.”
 “말했을 텐데. 알고 보면 다 시시한 법이야. 네 짝처럼, 다람쥐 모피처럼.”
 셀레스테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뒤에 다시 총탄 하나를 어둠 속으로 떨어뜨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빌은 발걸음을 돌려 성벽을 내려갔다. 초병들이 그를 보고 성문을 열자, 빌은 혼자서 성 밖으로 나섰다. 그는 셀레스테가 섰던 장소까지 걸어갔다. 쇠도끼가 성벽에 박혀 있었다. 빌은 그것을 잡아 뽑았다. 생각보다 힘없이 뽑혔다. 빌은 그 도끼를 어깨로 메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다.
 가을밤이 끝났다.
 “그래. 나도 가능하면 좀 더 재밌길 원했어.”


*
 새해의 눈이 녹자마자 빌은 키체커를 불렀다.
 그 다음날 키체커는 조수 코마만 대동한 채 성벽을 나섰다. 그는 날래게 움직였다. 그는 금방 단서를 잡았다. 그걸로 사냥은 사실상 끝났다. 상대의 버릇을 완전히 파악한 사냥꾼은 다른 단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번에 그가 잡을 사냥감은 목표를 항상 최단거리로 완주한다. 소굴도 마찬가지다.
 키체커는 이틀 밤낮을 달려, 야산 중턱에서 토굴 하나를 발견했다. 때는 정오였다. 그곳에서부터 사냥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영리했다. 총이 뭔지 안다. 그러나 키체커는 평범한 총의 사정거리를 몇 배나 뛰어넘는 사격술을 가진 인재였다. 그는 상대의 경계영역 밖에서 우회해 몸을 숨기고 총을 겨누었다.
 1주일 뒤, 키체커와 코마는 락토 개척촌으로 복귀했다. 빌이 제일 먼저 그를 맞았다. 전리품은 상당했다. 브롬 장로는 싹둑싹둑 잘려진 늑대 앞발들, 그리고 살아남은 새끼 몇 마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사는 늑대들이 가죽을 벗길 틈도 없이 뛰어다닌 키체커에게 각개격파 당한 것이다. 키체커는 심지어 뱃속의 새끼들까지 꺼내왔다.
 그것은 지독히도 철저한 보복이었다.
 빌의 지시였다.
 새끼들의 처리는 빌에게 맡겨졌다. 빌은 마을 한복판에서 새끼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늑대 토벌이라. 봄이 좋은데.
 봄이 좋지.
 새끼를 낳을 때가 봄이니까.
 “대장.”
 상념에 빠진 빌에게 시론이 속삭였다.
 “셀레스테가 알면 어떻게 나올까?”
 자신을 따라 싸운 늑대들이 몰살당했다. 셀레스테가 화를 낼까? 빌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화를 내든 말든.
 빌은 새끼들 중 한 마리를 쥐었다. 강아지 같은 늑대 새끼들이 동그란 눈을 굴리며 낑낑거렸다. 틸리도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제일 먼저 새끼의 목을 잡았다. 손이 머리와 눈을 가렸다. 그는 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빌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만 끝내고 밥값이나 벌죠.”
 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틸리처럼 새끼 늑대의 목을 쥐었다. 뒤이어 게드 장로, 부대장 시론, 대장장이 마누크, 사냥꾼 키체커가 한 마리씩 주워들었다. 소년 코마가 마지막 새끼 늑대를 들었다.
 “틸리.”
 빌이 입을 열었다. 틸리는 경애하는 대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넌 내 아들놈과 닮았어.”
 틸리는 너무 놀란 끝에 잠시 굳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의도와 달리 선두를 뺏기고 말았다.
 빌은 단번에 새끼의 목을 비틀었다.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