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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일곱별

2010.10.17 10:09

乾天HaNeuL 조회 수:868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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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 드래곤의 권능


 


  “여. 빨리도 왔네.”
  듣기 싫은 목소리가 베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베리는 인상을 잔뜩 쓰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뺨에 새겨진 십자 모양의 흉터, 미간 사이에 길게 그어진 흉터, 매서운 벽옥의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재수 없는 자식.”
  “아아. 그거 참 듣기 좋은 칭찬이군.”
  쇠가 긁히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제스퍼가 말하였다.
  “토리아는 어디에 있지?”
  “아. 그 계집 말인가? 아쉽게도 여전히 살아있지.”
  제스퍼가 고갯짓을 하며 뒤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제스퍼의 뒤에 있는 토리아로 향했다. 그녀는 후두를 뒤집어 쓴 푸파에게 잡혀 있었다. 손은 뒤로 묶여 있고, 입은 흰 천으로 틀어 막혀있었지만, 그 외는 괜찮아 보였다.
  “네 녀석들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손도 못 댔잖아. 어제 손을 대려다가 저 망할 철가면이 막아서고 말이야. 지금쯤이면 더럽혀진 모습으로 울고 있어야 하는데. 게다가 네 놈들 눈 앞에서 사지를 찢어 버려야 분이 풀리는데 말이야!”
  제스퍼가 소리를 질렀다. 어제 오스카에게 당한 원한이 남은 모양이었다.
  “아, 뭐 좋아. 여기서 네 놈들을 먼저 처리하고. 저 년을 갈가리 찢어버린 다음, 마을에 남은 녀석들도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되는 거야. 킥킥킥.”
  제스퍼는 손을 얼굴에 댄 채 웃기 시작했다. 상당히 듣기 싫은 웃음 소리였기에 베리와 다른 일행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제논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입니까? 당신도 인간인데 왜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뺏느냔 말입니다!”
  “아, 나는 저런 설교를 제일 싫어하는데.”
  “민족이 다르다고 나라가 다르다고 죽여도 된단 말입니까?”
  제논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분노 어린 목소리에 다른 일행들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면 제스퍼는 짜증이 나는 얼굴로 귀를 손가락으로 후볐다.
  “흥. 짜증나는 놈이네. 이게 어디서 설교를 늘어놓는 거야?”
  제스퍼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어느새 그의 모습은 제논의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쳇. 이런 허약하고 짜증나는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드네. 퉷.”
  “…….”
  제스퍼는 땅에다 침을 내뱉으며 뒤돌아섰다. 그가 손가락을 퉁기자 복면을 쓴 사내 사십 명 가량이 갑자기 나타나 베리 일행을 포위했다. 퇴로인 문마저도 굳게 닫혀버려서 도망칠 공간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었네. 저거 보여?”
  베리 일행은 제스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머리는 소, 몸과 다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석상이었다. 크기는 대략 성인 남자의 다섯 배 이상 정도였고, 양 손에는 거대한 도끼와 창을 들고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제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소머리를 한 거인,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몬스터였다.
  “저 석상 밑에 쓰인 문구가 보이나? 데우스의 유산 미노타우르스, 여기에 봉인되다. 이렇게 써져 있지. 킥킥, 그 잘난 데우스라고. 자신들을 신이라 여기는 날개 달린 놈들이 만든 놈이야. 이 놈이 풀려나면 파탈리아는 어떻게 될까? 드래곤도 죽이지 못한 채 간신히 봉인한 녀석인 것 같은데.”
  “망할.”
  베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베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제논이 입을 열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데우스가 드래곤들을 멸하기 위해 만든 존재. 데우스의 힘을 사용하며 6서클 이하의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킨 지성을 지닌 존재.”
  “오. 너 대단한 놈이군. 이 세계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그런 오래된 이야기까지 알고 있으니. 크하하하. 이거 걸작이야, 걸작!”
  제스퍼가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어떻게 하긴? 이렇게 할 생각이지.”
  제논의 물음에 제스퍼는 품 안에서 커다란 열쇠를 꺼내들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것으로 단순해 보이는 열쇠였다.
  “그, 그건!”
  “이건 해방의 열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물건이다. 네 놈도 아는 물건일 거다. 안 그래?”
  베리가 손가락으로 열쇠를 가리키자, 제스퍼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걸로 과연 나는 무엇을 할까?”
  “…….”
  제스퍼가 열쇠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들기며 말했다. 베리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다른 셋은 제스퍼가 지닌 열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베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네 녀석! 미노타우르스의 왕을 부활시킬 생각이냐?”
  베리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제스퍼는 음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리며 열쇠를 품 안에 도로 넣었다.
  “그냥 풀어버리면 재미가 없으니, 게임을 하지. 네 녀석들이 이기면 우리는 그냥 물러나는 거고, 우리가 이기면 이 년을 죽이고, 마을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저 자식을 데리고 가는 거다. 어때?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 같지 않아?”
  “…….”
  제스퍼의 말에 베리 일행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게임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다.
  베리와 니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포티스는 대형 전투 도끼의 자루를 굳게 움켜잡고 주위를 노려보았다. 제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먼저 너희들 몸부터 푸는 것이 좋겠지?”
  제스퍼가 능글맞게 웃으며 뒤로 크게 점프하였다. 그는 푸파와 토리아가 있는 곳까지 물러난 다음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와 함께 복면을 쓴 자들이 검을 뽑아 들며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포티스 왼쪽! 니나가 오른쪽! 제논, 너는 내 뒤에 붙어 있어!”
  베리가 빠르게 외쳤다. 포티스가 급히 도끼를 휘두르며 오른쪽으로 달려들었고, 니나도 초반부터 푸른 검기를 사용하며 적들을 날려버렸다.
  “제논! 뭐하는 거야? 내 뒤에 붙어 있으라니까!”
  베리는 뒤를 돌아보며 제논을 불렀지만, 제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제논의 모습을 찾았고, 시렌트 애시의 복면을 쓴 자들 가운데 둘러싸인 그를 발견하였다.
  “젠장. 저 녀석 사람 말을 뭐로 들은…….”
  신경질을 내려다가 중간에 말이 끊겼다. 다른 누가 끼어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논의 화려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하루 전에 성에서 병사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이미 봤지만, 지금 제논의 모습은 그때를 더 상회하는 것 같았다.
  “뭐야. 저 녀석…….”
  키시스로서의 힘이 작용을 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예 날아다니고 있는 제논의 모습은, 베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제논은 맨손으로 싸웠다. 어차피 상대는 자신을 잡는 것이 목표라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 제논은 바로 그 약간의 틈을 노려 공격을 피하고 도리어 자신의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원래 세계에서보다 몸이 더 가벼워진 느낌도 들었다.
  “하압!”
  기합을 넣으며 상대의 명치를 주먹으로 쳤다. 그 자는 순간 호흡을 할 수 없었다. 제논은 곧바로 돌려차기로 목을 강타했다.
  “크억!”
  한 녀석이 쓰러지자 곧 다른 녀석이 공격해 왔다. 검은 옷 안으로 봉긋 솟아 오른 가슴으로 보건대 여자인 듯싶었다. 제논은 속으로 ‘미안’이라고 중얼거리며 상대의 뒤로 돌아 들어가 오금을 발로 쳤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한쪽으로 주저앉자, 이번에는 반대편의 아킬레스건을 강하게 타격했다. 그리고 양쪽 팔을 붙잡고 관절을 확 꺾어 버렸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그 자는 비명을 내질렀고, 제논이 손을 놓자 앞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베리는 니나의 외침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적들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창을 날린 것이었다. 베리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자빠졌다. 덕분에 창은 베리의 몸을 비켜나갔지만, 다른 녀석들이 몸을 날리며 베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멍청한 녀석!”
  포티스가 베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단 한 번 도끼를 강하게 휘두르자 녀석들은 검을 놓치며 뒤로 날아갔다. 워낙 강한 힘인지라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고, 그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싸우지도 못하는 녀석이 어디서 정신을 파는 겐가?”
  “쳇.”
  포티스가 손을 뻗자, 베리는 포티스의 손목을 붙잡고 일어섰다.
  “뭐 대충 다 정리된 것 같네.”
  “괴물이 셋이나 있으니 당연하잖아.”
  “저 녀석 생각보다 훨씬 세군. 아니 키시스라서 당연한 건가?”
  상황은 거의 다 정리되었다. 복면을 쓴 적들은 하나둘 땅바닥에 쓰러졌다. 어떤 이는 탈구가 되어 전투불능이었고, 다른 이들은 기절하였다. 니나와 포티스와 싸운 자들은 갈빗대가 한두 개 정도씩 나가거나 다른 쪽의 뼈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너희들 웃긴 놈들이네.”
  제스퍼가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스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부하들 중 하나에게로 다가갔다. 땅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부하의 목을 찔렀다.
  “무슨!”
  제논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제스퍼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옆에 쓰러진 자의 팔 다리를 베어버리고 목을 그었다. 또 옆으로 가서, 관절이 빠진 여자―제논이 상대한 자에게로 다가가서 심장을 꿰뚫었다.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서서히 피 냄새가 방 안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논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네 녀석은 아무래도 이 맛있는 냄새가 싫은가 보네. 킥킥킥. 이 얼마나 좋은 향인데. 비릿하면서도 짜릿한 맛.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크윽.”
  제논은 서서히 흐려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쓰러질 뻔했지만, 베리가 급히 그를 부축해 주었다.
  “제논. 괜찮아?”
  “별로 괜찮지 않아요.”
  “장난 칠 기운은 남았나 보네.”
  “하하.”
  제논은 힘없이 웃었다.
  “후우. 하여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까. 큭큭큭.”
  제스퍼가 또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품 안에 있는 단검을 몇 개 꺼내들었다. 쓰러져서 몸을 비틀고 있는 자에게 다가가더니 단검을 하나씩 던졌다. 왼쪽 팔, 오른쪽 팔, 왼쪽 손, 오른쪽 다리. 그렇게 죽이지는 않고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지막 단검으로 그 자의 숨통을 끊었다.
  “킥킥킥. 이런 재미있는 놀이는 세상에 없을 거야. 킥.”
  제스퍼는 피가 묻은 칼을 혀로 핥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키득거렸다. 미친 듯이 한참을 웃어댔다.
  “아… 너무 웃었더니 턱이 다 아프네. 하하.”
  그는 웃음을 멈추었다. 몸을 똑바로 피고 섰다. 그러자 바닥에서 괴로워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자결하였다.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 편안히 가는 것을 택한 것이었다.
  “아. 재미없어라.”
  “미친 녀석!”
  제스퍼의 중얼거림에 포티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 그래 나 미쳤어. 그거에 보태준 거라도 있나, 영감탱이?”
  “누구처럼 버르장머리도 없군.”
  포티스는 도끼 자루를 움켜잡고 으르렁거렸다. 제스퍼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천천히 포티스를 향해 다가왔다. 제스퍼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고 눈을 내리깔아 포티스를 응시했다.
  “버르장머리라. 그런 건 개 줬는데, 어떻게 하나?”
  “완전 머리가 돌아도 한참을 돌았군.”
  “머리가 돌아? 아, 그런 머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사람 죽이는 것만을 익혀온 살인 기계에 불과한 나한테 머리가 어디에 있겠어? 안 그래 영감!”
  제스퍼가 크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포티스는 도끼날로 제스퍼의 검을 막아낸 다음 뒤로 크게 물러섰다. 니나가 그 틈을 파고들어왔다. 하지만 제스퍼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니나는 깜짝 놀라며 급히 몸을 뒤로 돌렸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검을 움직여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제스퍼의 검을 튕겨냈다.
  “큭!”
  순간 균형을 잃으며 뒤로 쓰러졌다. 제스퍼가 눈을 크게 뜨며 검을 아래로 내려찍으려 하자, 급히 베리가 달려들어 자신의 검으로 간신히 제스퍼의 검을 막아냈다. 니나는 급히 자세를 바로잡고 살짝 뒤로 물러섰다. 베리 역시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좀 더 재미있게 해 봐. 특히 계집 너. 어젯밤 실컷 사용했던 힘 있잖아? 그거 다시 해보지 그래?”
  제스퍼가 손을 흔들며 니나를 도발했다. 니나는 무표정하면서도 차가운 눈길로 제스퍼를 노려보았다.
  “하압!”
  니나가 기합을 넣었다. 그녀의 온몸이 푸른빛으로 휘감겼고, 검도 마찬가지였다. 니나는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제스퍼는 아주 여유롭게 니나의 검을 피했다. 그것도 아주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옷깃하나 스치지 않고 모조리 피했다.
  “이거야, 이거야. 하나도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제스퍼는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니나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검을 앞으로 강하게 내질렀다. 푸른빛의 검기가 제스퍼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제스퍼는 옆으로 가볍게 피했다.
  “그렇게 힘을 낭비하면 어제의 반복밖에 안 되잖아. 그러면 재미없어. 킥킥킥.”
  “누가 어제의 반복이라는 거야!”
  니나가 피씩 웃으며 외쳤다. 제스퍼는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깜짝 놀라며 급히 앞으로 굴렀다. 그가 서있던 곳에 방금 자신이 피했던 푸른빛이 떨어져 구멍이 생겼다. 제스퍼는 휘파람을 내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미있네.”
  “이얍!”
  니나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제스퍼의 몸을 분명히 베어버렸지만, 안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스르르 사라지기만 할뿐이었다.
  “니나! 뒤!”
  베리의 외침에 니나는 반자동적으로 뒤로 회전했다. 니나는 본능적으로 제스퍼의 검을 막아낸 다음 한참 뒤로 물러섰다. 그 간격을 포티스가 파고들었다. 포티스는 강한 완력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어이쿠.”
  제스퍼는 아주 가볍게 포티스의 도끼날을 막아냈다. 포티스의 팔과 목의 근육과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강한 힘으로 밀어붙였지만, 제스퍼는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막아서고 있었다.
  “포티스 비켜요!”
  니나의 외침을 듣자마자 포티스가 몸을 숙이며 옆으로 비켰다. 니나의 강한 일격이 제스퍼를 향해 떨어졌다. 제스퍼는 검을 들고 있지 않는 왼손으로 니나의 검을 잡아냈다. 그리고 씩 웃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니나는 간신히 몸을 비틀며 제스퍼의 검을 피했지만, 살갗이 칼에 스치며 피가 흘러내렸다.
  니나는 왼손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왼손으로 부여잡고 뒤로 크게 물러섰다. 베리가 급히 니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하지만 저 녀석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게다가…….”
  니나는 눈길을 살짝 돌렸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토리아만 붙잡고 있는 푸파를 쳐다보았다.
  “저 녀석은 저 망할 자식보다 더 강해. 그런데 우리는 저 자식 하나 상대하는 것도 벅차.”
  니나가 분함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또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무는 바람에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아아. 이제 끝이야?”
  제스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흥미가 없어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여유를 부렸다. 한쪽 다리를 떨며 있는 대로 빈틈을 보여주었지만,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니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쳇. 재미없는 놈들.”
  제스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니나, 포티스, 베리는 잔뜩 긴장하며 제스퍼를 노려보았다. 또 다시 제스퍼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억!”
  베리가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튕겨나갔다. 벽에 내동댕이쳐져 앞으로 툭 쓰러졌다. 간신히 손으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는데, 흉갑이 둘로 갈라지며 떨어졌다. 갑옷뿐만이 아니었다. 상의도 살짝 찢어졌고, 피가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나, 영감?”
  포티스의 등 뒤에 나타난 제스퍼가 그의 귀에 입을 댄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포티스는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서려 했지만, 제스퍼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제스퍼가 포티스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포티스는 간신히 머리로 떨어지는 검을 도끼 자루로 막아냈지만, 자루가 갈라지고 말았다. 제스퍼가 눈을 크게 뜨며 검을 더 내려쳤고, 그것이 포티스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졌다. 제스퍼의 검이 어깨 보호구를 박살냈다. 만약 포티스가 몸을 틀지 않았다면 어깨가 잘려나갈 뻔했다.
  “크악!”
  포티스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부여잡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결국 균형을 잃으며 쓰러졌다. 제스퍼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포티스에게 걸어갔다.
  “포티스!”
  니나가 급히 달려와 제스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제스퍼의 모습이 그곳에 없었다.
  “여. 어딜 보고 있어?”
  “…….”
  뒤에서 제스퍼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제스퍼가 움직이는 것을 또 다시 보지 못했다.
  “도대체 그 큰 검을 들고 휘두르면 뭐해. 맞지도 않고 아무런 소용도 없잖아.”
  “젠장!”
  니나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스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도 아니야.”
  제스퍼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니나는 슬며시 눈을 치켜들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제스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스퍼는 여전히 불쾌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운 상태였다.
  “검성의 반열에 오른 녀석이라 어느 정도 기대를 했는데, 이거 너무하잖아. 이러면 게임이 벌써 종반이 되거든.”
  제스퍼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가볍게 착지하며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살기 어린 눈길로 니나를 노려보다가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상체를 살짝 숙이며 자세를 잡았다.
  “어서 와봐.”
  갈라지는 목소리로 제스퍼가 말했다. 니나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 소리를 지르며 맹렬하게 돌격했다. 그녀는 제스퍼를 향해 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제스퍼는 가볍게 뒤로 물러섰고, 니나의 검은 땅에 떨어졌다. 그 순간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와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잠시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오. 이번 건 꽤 재미있었어. 하지만 그것뿐.”
  제스퍼의 목소리가 니나의 등 뒤에서 들렸다. 그것도 귀 가까이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너도 끝.”
  제스퍼의 말이 끝나자마자 니나는 등 뒤에서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제스퍼의 검이 니나의 등을 베고 지나갔고, 니나는 눈에 초점을 잃으며 앞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니나!”
  베리가 소리를 지르며 니나에게 다가갔다. 제스퍼가 짜증을 내며 베리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하지만 베리는 쓰러졌어도 기어서라도 니나에게 다가갔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니나의 등을 자신의 몸으로 막으며 계속해서 니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베리의 부르짖음이 피 냄새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제논의 의식을 깨웠다.
  “이…건 말도 안 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제논이 중얼거렸다. 막강한 힘 앞에 제대로 반항도 못하며 쓰러진 세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제논이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네. 잡종 키시스. 네 녀석은 나한테 무슨 재미를 선보일 거야?”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제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말도 안 들리는데?”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제논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제스퍼를 노려보았다. 제스퍼는 재미있다는 듯 피씩 웃으며 제논을 응시했다.
  “아아. 저 녀석들? 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도 했나, 잡종?”
  제스퍼가 비아냥거리자 제논은 무작정 제스퍼를 향해 뛰쳐나갔다. 그는 자신의 작은 주먹을 휘둘렀다. 제스퍼는 왼손을 들어 올려 제논의 주먹을 가볍게 막아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제논을 향해 찔러 넣었다. 죽여서는 안 되었기에 칼날은 제논의 왼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논의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물씬 풍겨 나오는 피비린내에 제논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거리며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제스퍼는 제논의 그런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드렸다.
  “이 녀석 정말 가관이야. 자신의 피 냄새에 기절을 하려고 하니!”
  제스퍼가 손을 뻗어 제논의 목덜미를 잡아서 들어올렸다. 제논은 강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망할 놈은 당장이라도 찢어 죽여야 하는데. 쳇.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 생긴 건 잡종 같고, 하는 짓은 멍청하기 짝이 없고. 네 어미와 아비도 그렇게 웃긴 녀석들이겠네.”
  “무…슨 소…리를 하는…겁니…까?”
  제논은 흐려져 가는 의식을 최대한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목이 제스퍼에게 붙잡힌 상태라 말을 꺼내기도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재수 없는 자식. 아직도 그런 표정에 그런 말. 짜증나 죽겠다고!”
  제스퍼가 제논을 던지며 발로 그의 배를 찼다. 제논은 강한 충격에 나가떨어졌고,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아. 짜증나.”
  제스퍼는 칼을 옆으로 내던지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푸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 년이 아직 남아 있었네.”
  “웁! 웁!”
  토리아를 살기 어린 매서운 눈동자로 바라보다가, 제스퍼는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비릿하면서도 음흉한 미소에 토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려 했다. 푸파는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토리아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찌며 쓰러졌다. 그럼에도 계속 뒤로 물러섰다.
  “네 녀석! 그녀는 아무 잘못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야!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베리가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제스퍼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제스퍼는 방향을 바꿔 거대한 석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품속에 가지고 있던 열쇠를 꺼내들더니 그것을 천천히 석상에 가져다댔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베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미 해방의 열쇠는 석상에 닿은 뒤였다.
  “푸파. 네가 저 녀석을 데리고 와. 나는 저 짜증나는 녀석한테 더는 손도 대기 싫으니까.”
  “…….”
  푸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제논에게 다가갔다. 푸파는 기절해 쓰러져 있는 제논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와 함께 서서히 지면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푸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발걸음을 옮겨 제스퍼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그 다음 검은 문을 허공에 생성시켰다.
  제스퍼는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비릿한 웃음을 베리에게 남겼다. 푸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검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
  베리는 니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포티스는 피가 흘러나오는 어깨를 손으로 움켜잡은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애송이. 니나는?”
  “다행히 살아있어. 지금 치유중이야.”
  베리의 손에서 여린 흰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니나의 상처를 서서히 아물게 했다. 흘러나오는 피가 점점 줄어들었고, 가쁜 호흡도 점차 안정되었다. 니나의 상처를 다 치료한 베리는 포티스에게 손을 얹어 그의 어깨에 난 상처도 치료해주었다.
  “포티스. 나는 니나를 보고 있을 테니, 토리아를.”
  “알겠네.”
  포티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토리아에게 다가갔다. 토리아에 입의 천을 풀어주고, 손을 묶은 끈을 잘라냈다.
  “고맙습니다.”
  토리아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포티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에는 일러.”
  “예?”
  포티스는 말없이 옆에 있는 석상을 가리켰다. 토리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미노타우르스 석상에 서서히 금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단 베리와 니나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왔다.
  “애송이. 좋은 생각은 없나?”
  “니나가 깨어나야 뭘 해도 할 거야.”
  “충격을 심하게 받았으니 쉽게 깨어나지 못할 것 같네만.”
  베리가 포티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깨어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여기는 마법 방어 결계까지 쳐진 곳이라고. 포티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해.”
  “니나가 깨어나도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겉으로는 다 아문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녹한 것 같지 않네.”
  “아니. 뼈에 살짝 충격이 전해진 것뿐이야. 이 녀석 검성이기도 하니까, 자체 치유력도 있고. 곧 깨어나서 펄펄 날아다닐 거야. 분명 그렇게 될 거야.”
  베리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표정과 말이 대치되어 주변 사람을 더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저나 제논 청년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게이트를 열고 갔잖아. 무슨 수로 쫓아. 벌써 케이롄에 도착해도 한참 전에 도착했을 거라고.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단지 제논 녀석이 잘 지내기를 기원할 수밖에. 언젠가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지만. 하하.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건가 봐, 포티스.”
  포티스가 베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나 보군.”
  “그러게.”
  미노타우르스의 몸을 얽매고 있던 돌의 봉인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발부터 시작된 금이 어느새 정수리까지 이르렀고, 돌가루들이 휘날렸다. 마침내 돌덩어리들이 떨어지면 적갈색의 피부가 겉으로 드러났다.
  팔다리와 몸통의 돌이 떨어져 나갔다. 손이 자유롭게 되자 녀석은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다음은 머리에 돌이 둘로 갈라지며 땅으로 떨어졌고, 녀석의 붉은 안광이 빛을 뿜어냈다. 미노타우르스는 천장을 우러러 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상황 종료군.”
  포티스가 으르렁거리며 자루가 부러진 도끼를 주어 들었다. 토리아는 겁을 먹고 포티스의 뒤로 숨어들었고, 베리는 멍한 눈동자로 미노타우르스를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묵직한 음성이었다. 미노타우르스는 거만한 눈초리로 베리 일행을 노려보며 물었다. 베리 일행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너희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누군지 알아서 뭐하게 소대가리.”
  베리가 짜증을 한껏 내며 말하였다. 포티스와 토리아는 깜짝 놀라며 베리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이미 베리의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지 오래였다.
  “이 멍청한 놈! 저 녀석은 보통 미노타우르스와는 차원이 다르네. 그런데 저 녀석의 성격을 긁어서 어쩌자는 건가!”
  포티스가 베리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말하였다. 베리는 멍한 표정으로 포티스를 바라보다가 포티스의 손을 치워냈다.
  “소대가리처럼 생긴 녀석을 소대가리라고 부르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거야!”
  “이, 이 놈이!”
  포티스가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 미노타우르스의 울부짖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니 녀석의 입에 붉은 빛이 모여들었다.
  “망할. 저건 완전 드래곤 브레스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피해!”
  포티스는 토리아를 들쳐 맸고, 베리는 쓰러져 있는 니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죽어라. 어리석은 인간 녀석들아!」
  붉은 빛이 미노타우르스의 입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포티스와 베리는 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고, 거대한 빛은 그들을 살짝 빗나가 벽을 관통했다. 토리아를 안고 바닥을 구른 포티스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네 녀석! 또 쓸데없는 짓을 생각했군.”
  “뭐. 구멍이 생겼으니 이제 도망 갈 곳이 있는 거잖아! 빨리 가자고!”
  베리는 이미 구멍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포티스는 이를 갈며 그를 쫓았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미노타우르스의 큰 음성이 그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덕분에 기절해 있던 니나가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잠시 멀뚱멀뚱 허공만 바라보다가 자신을 안고 있는 베리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이…….”
  “그런 건 신경 꺼! 지금은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니까!”
  한참을 달리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공간도 협소하여 방금과 같은 공격을 받게 된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했다.
  “젠장!”
  베리는 소리를 지르며 벽을 발로 찼다. 미노타우르스가 쿵쾅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송이. 이번에도 녀석을 도발시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지금 그딴 짓을 했다가는 완전 잿더미가 될 텐데.”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금 뒤는 가로 막혔고,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네.”
  “애당초 이 공간은 저 놈을 봉인하기 위한 곳이었으니 처음부터 도망갈 곳은 없었던 거야. 위로 올라가야 도망갈 길이 생기는데…….”
  베리는 말을 하다가 니나가 자신의 팔을 잡고 흔드는 것을 느껴 아래를 내려 보았다.
  “왜?”
  “내려 줘.”
  “…….”
  베리는 말없이 니나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베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 검은?”
  “놓고 왔지. 그런 걸 어떻게 신경 써!”
  “…멍청한 놈.”
  니나는 주먹으로 베리의 머리에 꿀밤을 놓은 다음 그의 검을 대신 뽑아 들었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몸 안에 잠재된 모든 힘을 끌어냈다. 때마침 나타난 붉은 안광을 향해 푸른 섬광을 날렸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레어의 천장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아무 소용도 없잖아.”
  니나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외쳤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였고, 사라졌던 푸른 오라가 다시 몸을 휘감았다. 이번에 니나는 벽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곳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본래 서있던 곳은 미노타우르스가 쏘아낸 붉은 빛에 휘감겨버렸다.
  “니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직은 괜찮아.”
  베리가 묻자 니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것이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몸의 균형도 유지하기 힘든 것인지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나한테 업혀, 니나.”
  “됐어.”
  “하지만…….”
  뒤에서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미노타우르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도 들렸다.
  “내 걱정 하지 말고 달리기나 해!”
  니나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베리는 슬쩍 뒤를 돌아본 뒤 니나를 쫓아 달렸고, 포티스는 토리아를 들쳐맨 뒤 그들을 뒤따라갔다.
  다행히 니나가 구멍을 뚫은 곳은 막힌 벽이 아니라 통로였다. 그들은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또 다시 앞이 막힌 곳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포티스가 강력한 괴력으로 벽을 뚫었다.
  “여기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공간에 도착했다. 삼각기둥 형태의 방으로 그들이 지나쳐왔던 장소였다. 베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미노타우르스가 봉인된 방의 문 위치를 찾아내며 중얼거렸다. 
  “저쪽 방이 미노타우르스 녀석이 있었던 방이야. 검도 거기에 있을 거야.”
  베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벽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여러 차례 반복하여 벽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아무런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뭐야. 제논 녀석이 했을 때는 그냥 열리더니. 혹시 마법이 해제…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제논? 그러고 보니 제논은 지금 어디에 있어?”
  니나는 마침내 제논이 없는 것을 깨달으며 물었다. 그녀는 베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자, 포티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포티스는 들쳐 맸던 토리아를 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제논 청년은 녀석들에게 잡혀갔네.”
  “예? 잡혀갔다고요?”
  니나가 깜작 놀라며 되물었다. 포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티스와 베리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망할.”
  베리가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안광이 그들을 발견했다.
  “피해!”
  베리는 급히 외치며 옆으로 뛰어들었다. 포티스와 니나는 토리아를 몸으로 감싸며 옆으로 굴렀고, 그들이 서있던 장소로 붉은 광선이 지나갔다. 바닥에 엄청난 구멍이 생겼고, 강한 열기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말아먹을. 드래곤이 따로 없군.”
  “드래곤이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적어도 녀석들은 창하고 도끼는 안 들고 다니잖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할 여유는 있나 보군.”
  포티스가 피씩 웃으며 베리를 쳐다보았다. 베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니나 역시 베리와 보조를 맞춰 뒤로 물러섰다. 포티스는 실신한 토리아를 안아들고 그들을 따라 뒷걸음질 쳤다.
  붉은 안광의 미노타우르스가 연기를 해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만한 모습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마치 자신이 왕이나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행동하는 것 같았다.
  “어이 소대가리. 이런 재미없는 건 그만 두고, 천장이나 좀 부셔주면 고맙겠는데!”
  「어리석은 것. 여전히 이 몸을 가리켜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더냐.」
  “소대가리를 소대가리라고 하지 그러면 뭐라고 하는데!”
  「네 방자한 말을 더는 들어줄 수 없다!」
  미노타우르스가 괴성을 질러댔다. 두 개의 거대한 뿔 위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구형 물체가 생성되었다.
  “망할…….”
  광선을 유도해 내어 옆방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던 베리는, 미노타우르스 위에 생성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에 할 말을 잃었다.
  “뒤로 더 피해!”
  미노타우르스의 위에 생성된 빛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베리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한쪽 팔로는 비틀 거리는 니나를 부축하며 최대한 빨리 달렸다. 토리아를 안아 든 포티스 역시 짧은 다리로 믿기지 않은 속도로 뛰었다.
  붉은 빛 덩어리가 바닥에 닿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들의 몸은 앞으로 튕겨나가며 벽에 내동댕이쳐졌고, 벽은 폭발로 인한 영향을 금이 가며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돌들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일단 살아 있기는 한 것 같군.”
  “그러게.”
  “니나는 어떤가?”
  “정신을 잃었어. 워낙 오늘 무리했잖아.”
  베리는 니나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런 다음 천천히 일어서며 땅에 침을 뱉었다. 피가 잔뜩 섞여 나왔다. 입안 가득히 피비린내도 풍겨 나왔다.
  “미치겠군. 또 저거야. 이번에는 광대역 스킬이라도 사용하는 것 같네.”
  “하하하. 이제 끝인지 뭔지. 아 미쳐버리겠네.”
  베리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주어 들었다. 포티스 역시 토리아를 조심스레 땅에 눕히며, 도끼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미노타우르스의 강력한 마법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들고 있는 도끼나 창을 쓸 것이지. 저 망할 빛 덩이는 계속 만들어대는 건지.”
  “죽어도 네 녀석 입은 살아남을 거네.”
  “아마도 그렇겠지.”
  시선을 위로 들어올려, 천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빛 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 이상의 붉은 빛 덩어리들은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어리석은 것들. 죽어서 죄를 뉘우쳐라.」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음성이 땅을 진동시켰다. 그와 함께 천장을 가득 메운 빛 덩어리들이 화살처럼 변해 그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베리와 포티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엄청난 폭발음이 연이어 들렸다. 하지만 몸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베리와 포티스는 조심스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먼지와 연기로 시야가 완전히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 힘은……!”
  “말도 안 돼.”
  마력과 같은 힘에 둔감한 포티스마저도 느낄 수 있는 강렬한 힘이 그들의 몸을 억눌렀다. 엄청난 힘에 그들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애송이. 도대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뭔가?”
  포티스가 시선을 바로 앞에 고정시키며 베리에게 물었지만, 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 발생한 일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짙은 흑발이 휘날렸다. 문신이라도 한 것처럼 몸 전체에 이상한 검은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베리와 포티스 둘 다 잘 알고 있는 옷이었다. 그것은 바로 제논이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제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눈동자, 칠흑보다도 더 어둡고, 밤보다도 더 깊어 보이는 눈이었다. 평소의 제논과 전혀 달랐으며, 왠지 모를 압박감을 가져다주는 눈빛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베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제논에게로 걸어가고 싶었지만, 엄청난 힘의 압력에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익숙한 음성이 그들의 귀를 간질였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쇠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먼지가 서서히 거치며 목소리의 주인인 제스퍼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스퍼는 완전 걸레짝이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자 옆에는 은빛 갑옷을 두른 푸파가 서있었다.
  “물러난다.”
  “젠장! 이거 놓으라고! 저 망할 녀석을 내버려두고 물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도대체 저건 뭐냐고. 뭐냔 말이야!”
  제스퍼가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그들 뒤에 서있던 미노타우르스가 제스퍼와 푸파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놈들은 누구냐?」
  “뭐?”
  미노타우르스의 묵직한 음성에 제스퍼가 뒤를 돌아다 봤다. 육중한 체구를 지닌 미노타우르스가 도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젠장. 푸파!”
  여기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제스퍼가 푸파를 응시하자, 푸파가 급히 검은 통로를 만들어냈다. 푸파는 제스퍼를 부축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도끼가 공간을 찢어버렸다.
  「놓쳤군.」
  검은 문과 공간을 찢기는 했으나, 베는 느낌이 없었다. 미노타우르스는 도끼에서 손을 놓으며 다시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것은 붉은 안광으로 새로이 나타난 존재를 쳐다봤다.
  「네놈은 또 누구인가?」
  미노타우르스의 말을 듣고 제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는 검은 눈동자로 미노타우르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재미있는 힘을 지닌 인간이군. 네 놈은 키시스인가?」
  “키시스? 아, 그렇지. 여기서 나와 같은 이세계인을 키시스라고 불렀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불쾌하면서도 거북한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오는 어조였다.
  「재미있겠다. 허나, 네 녀석은 결코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거다!」
  미노타우르스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활짝 폈다. 가슴 앞으로 거대한 빛줄기가 생겼고, 그것이 팔을 앞으로 내뻗자 제논을 향해 무한정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논은 움직이지도 않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 위에는 검은빛의 구슬과도 같은 것이 있었다.
  제논이 들고 있는 검은 구슬로 빛이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 안으로 사라졌다.
  「네 녀석이 어떻게 그런 힘을!」
  “실로 재미있는 힘이야.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이 움직여. 게다가 내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힘이지.”
  제논이 눈을 크게 뜨며 씩 웃었다. 미노타우르스는 그의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두려움을 부정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도끼를 다시 집어 들어 내려찍었다. 그 다음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창을 땅에 수직으로 꽂아 넣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제논은 손가락 하나를 위로 들어 올린 채 서있었다. 무색투명한 결계가 도끼와 창을 모조리 막아냈다. 그것을 막아낸 제논은 힘든 기색이 하나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너의 모든 힘을 사용해도, 너의 모든 능력을 사용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건방진 소리를!」
  미노타우르스의 입에 거대한 붉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논은 그것을 보자 오른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의 주먹 앞으로 검은 빛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붉은 빛과 검은 빛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내뿜어졌고, 그것은 중간에 충돌하였다.
  「인간 주제에 내 힘을 튕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미노타우르스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 힘을 올렸다. 붉은 광선이 더욱 두터워지며 제논의 검은 광선을 뒤로 밀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제논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지.”
  제논이 피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내가 가진 힘을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더군.”
  말을 하는 도중, 제논은 왼 주먹을 내뻗었다. 이번에도 검은 빛이 그의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드래곤의 권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이제껏 다크 드래곤의 권능을 지닌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노타우르스가 큰 소리로 외치며 말했다. 그것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목에는 핏대가 돋았다. 붉은 안광에서는 더욱 강렬한 빛도 뿜어져 나왔다.
  “정답! 상으로 네게 죽음을 안겨주마!”
  제논이 크게 외쳤고, 그와 함께 왼 주먹에 모여든 검은 빛이 뿜어졌다. 그것은 본래 있던 힘과 합쳐져 미노타우르스의 붉은 광선을 한 번에 뒤로 밀어냈다.
  「말도 안 되는……!」
  마지막 단말마였다. 검은 광선에 휩싸인 미노타우르스는 형체도 남지 않고 완전히 소멸했다. 그 빛은 천장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미노타우르스가 사라지자 제논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베리와 포티스는 믿기지 않은 현실에 부들부들 떨었다.
  “제…논?”
  베리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논은 차가운 눈길로 베리를 쳐다보다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제논의 긴 흑발을 하늘 높이 치솟듯 휘날렸다. 온몸에는 검은 문양이 새겨져있었고, 주먹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옷과 얼굴에 이르기까지 피가 튀지 않은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제논 맞는 거지?”
  베리가 재차 물었다. 제논은 아무런 대답 없이 베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들어 올렸다.
  “크윽…….”
  “어이, 자네! 무슨 짓을 하는 겐가?”
  포티스가 베리의 팔을 잡아 내리려고 했지만, 그의 완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포티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제논의 눈을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야?”
  베리가 고통스런 얼굴로 물었다.
  “알 필요 없다. 죽어라.”
  제논은 팔을 들어 올렸다. 넓게 펼쳐진 그의 손에 검은 빛이 칼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제논의 머리를 찌르려던 찰나,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안 돼!”
  니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제논의 차가운 시선은 니나를 향해 옮겨갔고, 그녀를 한참 동안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논. 그만 해.”
  “…나….”
  제논의 눈빛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와 함께 길어진 흑발이 짧아지기 시작했고, 온몸에 새겨진 검은 문양도 서서히 사라졌다. 오른손의 검은 칼날은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베리를 놓으며 무너지듯 앞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제논!”
  베리가 급히 제논의 몸을 받아냈다. 제논은 희미해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여린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우며 말했다.
  “다행이다. 이번엔 아무도 안 다쳤다…….”
  그 말을 끝으로 제논은 의식을 잃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윈스톤이 베리 일행에게 머리 숙이며 인사했다. 그들은 모두 경직된 얼굴로 윈스톤 가족을 쳐다보았다. 특히 제논은 매우 침울한 모습이었다.
  “저 때문에 괜히 이런 일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국경 지대에 인접한 곳이라 늘 이런 위협에 시달려 왔었으니까요.”
  제논의 말에 윈스톤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오.”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일행은 하일린 영성으로 길을 떠났다. 숲으로 접어들자 우울한 표정의 제논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셔서. 게다가 제가 저에 대해 제대로 설명도 안 해서 일이 더…….”
  “상관없어.”
  베리가 말했다.
  “어차피 네게도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을 거니까.”
  “네 녀석 속사정 같은 건 어차피 몰라도 되네.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하하하하.”
  포티스도 베리를 거들며 말했다.
  “하지만!”
  “아아. 그런 건 신경 끄라니까. 나는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뭔데요?”
  베리는 제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왜 니나를 보고 멈춘 거야?”
  “예?”
  “니나의 이름을 부르며 제 정신 차렸잖아. 그게 난 영 궁금해서 어젯밤 잠도 안 왔다고.”
  베리는 눈 밑의 짙은 다크 서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논은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을 회피하려 했지만, 초롱초롱한 베리의 눈동자가 매우 부담되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응? 응? 말해 보라니까. 정말 궁금해 죽겠으니까.”
  “저기 그게…….”
  제논은 슬쩍 니나를 쳐다보았다. 니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으려 했다.
  “혹시 너 니나한테 흑심을 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녜요, 그런 거! 전 연하는 관심 밖 대상입니다!”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라고 했는데. 좀 더 자세히 물어야겠어.”
  베리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포티스도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영성까지 길도 머니까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자고. 나 말하는 거 참 좋아하거든.”
  “제발 좀 봐주세요!”
  제논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베리는 급히 그를 뒤쫓으며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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