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일곱별

2010.10.17 10:07

乾天HaNeuL 조회 수:871 추천:1

extra_vars1 New World 
extra_vars2 03 
extra_vars3 141582-1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quawld 
extra_vars8  

CHAPTER 03 엄습해 오는 위험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 설명을 해주겠나?”
  포티스는 대형 도끼를 땅에다가 박아 넣은 채 말하였다. 시선은 베리의 얼굴에 고정된 상태였는데, 베리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성에서 듣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까지일 줄은 상상도 못했네. 어이 애송이. 도대체 정보 수집은 한 건가, 안 한 건가?”
  “포티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만한 상황은 아닌데.”
  “입 다물게나. 그래서 자네가 애송이라는 걸세. 도대체가 전투를 하려면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데, 고작 고블린 따위라고 생각해서 안일하게 대처를 하니까 이런 곤경에 처한 거 아닌가!”
  포티스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손가락으로는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 막고 있는 수많은 고블린들을 향해 있었다.
  양 옆으로 나무들이 있는 넓은 도로가 눈앞에 있었다. 사람들이 열 명 정도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큰 길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큰 도로를 고블린들이 점령하였다.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였다. 도로에만 고블린들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쪽 숲에 번쩍이는 붉은 눈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느새 그들 뒤로도 고블린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퇴로까지 막혔다.
  “고블린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몇 백 마리 단위로 뭉쳐있는 것은 살아생전 처음 보는군. 백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주 귀한 장면이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애송이?”
  “…….”
  베리는 포티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포티스. 지금은 싸우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알고 있네, 니나. 자네는 어느 정도로 가능할 것 같은가?”
  “…죽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겠죠. 원래대로라면 오십 마리 정도가 한계이지만, 지금은 힘 조절을 할 때가 아닌 것 가아요.”
  니나의 말에 포티스는 피씩 웃었다.
  “저기… 지금 상황이 매우 불리한 것 아닌가요? 사실 제가 몬스터랑 싸우는 것은 처음이라서 전혀 도움이 안 될 텐데요. 베리처럼 고대의 유물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젊은 친구.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네. 어차피 지금 애송이 녀석은 유물 자체를 사용하지 못할 테니까. 그랬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죽네.”
  “예?”
  포티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제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자네는 저 망할 애송이처럼 걸림돌만 안 되면 그만이라는 말일세!”
  포티스는 특유의 굵고 높은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땅바닥에 내려놓은 대형 전투 도끼의 자루를 집어 들었고, 고블린들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고블린들은 돌진해오는 포티스를 향해 창과 화살을 날렸다. 포티스는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휘둘러서 그것들 모두를 쳐냈다. 도끼로 처낸 것이 아니라 풍압으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성인 남자 걸음으로 이십 보 가량 떨어져 있었던 고블린 간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포티스의 대형 도끼가 햇빛을 받아 번뜩이자, 서너 마리의 고블린들이 초록색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자 제논은 또다시 안색이 안 좋아졌다.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린 다음에 최대한 피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는 땅에 주저앉아 최대한 몸을 숙였다.
  “…빨리 끝내야겠어.”
  아직 전투를 시작하지 않았던 니나가 제논의 상태를 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니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등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을 스르르 뽑아 들었다.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니나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잡념을 모두 떨쳐버리고, 오직 한 가지 것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니나가 눈을 번쩍 뜨자 그녀의 몸 주변으로 푸른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서서히 검으로 옮겨갔고, 거대한 칼날을 모조리 덮어버렸다.
  “소드… 마스터?”
  제논은 니나의 모습을 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예전에 친구한테서 빌려 본 책에 그러한 단어가 있었던 것 같았다.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대단한 검사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았다.
  “소드 마스터? 무슨 뜻이야 그건 또.”
  “예?”
  어느새 땅바닥에 잔뜩 쭈그리고 앉은 베리가 제논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소드 마스터라고 했잖아. 그 희한한 말은 뭐야?”
  “여기에는 그런 단어가 없나요?”
  “처음 듣는 단어다.”
  제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은 니나를 향해 있었는데,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고블린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한 번 검을 휘두르면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가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을 학살했고,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면 또 수십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
  “제가 읽었던 소설책에서는 저런 힘을 사용하는 검사들을 소드 마스터라고 칭했거든요.”
  “아하, 저거. 저 힘을 지닌 자를 우리는 검성이라고 부르지.”
  “검성…….”
  “참고로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저건 비밀이야. 길드 내에서 아는 사람은 나하고 마스터뿐이고. 그리고 이제 네가 알게 되었네. 뭐 포티스 영감도 원래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하는 도중 전투가 끝나 버렸다. 사방 곳곳에 고블린들이 날린 화살과 창이 박혔다. 고블린들의 시체와 피도 땅을 더럽혔다. 나머지 고블린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니나와 무식할 정도의 괴력을 뽐낸 포티스에 겁을 먹고 도주했다.
  베리와 제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논은 최대한 시야를 위로 들어 올려서 시체들과 피를 보지 않으려 했고, 반대로 베리는 시체들을 둘러보며 수를 대략적으로 세기 시작했다.
  “두 명이서 도합 삼백 마리를 처치했네. 하하하, 이런 괴물 같은 인간들 같으니.”
  “나는 인간이 아닐세, 애송이. 드워프. 알겠나?”
  포티스가 주먹으로 베리의 등을 쳐가며 말하였다.
  “후우, 오랜만에 운동을 했더니 몸이 다 뻐근하군. 그나저나 니나의 실력은 더욱 일취월장하는 것 같구먼 그래. 지난번보다 더 강해졌어.”
  “고맙습니다, 포티스. 포티스의 실력도 전혀 녹슬지 않았어요. 백 마리 이상을 베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이 힘이 아니면 불가능해요. 단순 검술로는 오십 마리 정도가 한계입니다.”
  “허허허. 그런가? 하하하하! 그것 참 쑥스럽군.”
  포티스는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베리는 배알이 꼴렸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런데 길이 좀 더러워져서 문제군. 저 놈들의 초록색 피는 볼 때마다 영 마음에 안 들어. 쯧쯧.”
  “저도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네요.”
  니나가 두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또다시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했다. 정신을 집중한 뒤 다시 눈을 뜨자, 방금 전처럼 푸른 오라가 몸과 검을 완전히 휘감았다. 니나는 검기가 가득 담긴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휘둘렀고, 마치 초승달 모양의 푸른빛이 뿜어져나갔다. 그 빛은 고블린들의 시체를 분쇄시키며 나아갔다. 그들이 있던 땅도 뒤엎어 버렸는데, 덕분에 피로 뒤범벅 된 대지가 말끔히 청소되었다.
  “허허, 이제는 그런 방법으로 응용할 수 있게 되었나? 그것 참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포티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단 한 번의 참격으로 길 전체가 완전히 깨끗해졌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니나는 검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제논의 얼굴을 보니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다만 아직 등 뒤로 널브러져있는 고블린들의 시체 때문에 그렇게까지 좋아진 편은 아니었다.
  “길도 정리 되었겠다 빨리 펜도르로 가자고. 여기에 계속 있어봤자 괜히 다른 몬스터만 만날 것 같으니. 그러면 귀찮으니까.”
  베리가 뒷머리에 양손을 가져다 대고 손깍지를 끼며 말하였다. 말을 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행히 더 이상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 펜도르로 향하는 길목에는 고블린들만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녀석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이었다.
  대략 반나절 정도를 걸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이제는 서서히 서편으로 향했는데, 가장 더운 시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오솔길을 걷던 베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생긴 건 힘 꽤나 쓰게 생긴 놈이 저렇게 비실대서야. 남자 구실 하기는 글렀군. 글렀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포티스 영감아!”
  “흥. 나이 먹은 사람 예우도 못하는 애송이 자식이 뭔 소리를 질러대는 건가? 귀가 다 멍멍하네.”
  “포티스도 마찬가지거든?”
  둘은 티격태격하며 싸웠다. 하지만 체력의 고갈과 더불어 갈증을 느낀 베리가 백기를 내걸며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이런! 아직도 더 가야잖아.”
  베리는 지도를 펴 보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에 신경질을 내며 지도를 확 꾸겨버렸다.
  “뭐가 멀다는 건가? 벌써 눈에 보이지 않는가.”
  “예?”
  포티스의 지적에 베리는 고개를 쭉 빼들었다. 저 멀리 흐릿하게 마을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베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지도로 다시 시선이 향했다.
  “이상하네.”
  “뭐가 말인가.”
  “지도에 따르면 앞으로 일 오론은 더 가야 마을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지도가 틀린 거겠지. 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겐가?”
  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니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니나는 어떻게 생각해?”
  “걔도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정보를 잘못 가지고 왔다던가.”
  니나는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루시아가 이제까지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는데.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드네.”
  “별걸 가지고 신경 쓰는 네가 이상한 거야.”
  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욱 고민을 하자, 니나는 손날로 베리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 갈겼다.
  “아프다니까!”
  “잡생각은 그만두고 제대로 걷기나 해. 제논도 안 지친 것 같은데.”
  니나는 눈짓으로 자신의 옆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제논을 가리켰다. 베리는 제논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래요.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저는 허약한 놈입니다.”라고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걸었다.
  “저기 니나 씨.”
  “니나라고 불러.”
  “아, 예. 니나. 저 지도를 혹시 루시아라는 분이 만든 건가요?”
  제논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답했다.
  “그 분… 엄청난 길치시던데, 무슨 수로 지도를…….”
  “그래서 신기한 거야.”
  “맞아, 맞아. 그 녀석이 저택 내에서도 길을 잃어버리는 초특급 방향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지도 만드는 능력 하나는 탁월하다고. 그래서 메이드 일을 하면서 동시에 길드원이고. 생각만 해도 신기하다니까. 도대체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도 길을 못 찾는 얘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온 정보들을 취합해서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아. 흠…….”
  앞에서 걷고 있던 베리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하였다. 턱을 매만지면서 곰곰이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결국 나무 뿌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끄아악!”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저런 못난 녀석.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구먼. 몸은 다 큰 주제에. 쯧쯧.”
  포티스가 혀를 치며 말했다.
  산길에서 떨어진 베리는 어느새 마을 입구까지 이르렀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사이, 마을에서 한 젊은이가 급히 뛰쳐나왔다.
  “이봐! 괜찮은가?”
  “에고고, 여기가 어디야?”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베리는 제대로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마을 청년이 베리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괜찮은가? 정신이 좀 드는가?”
  청년이 베리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 다른 일행들도 마을 입구에 이르렀다.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청년은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그와 비례하여 얼굴에 기쁜 빛이 감돌았다.
  “바깥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그렇다네.”
  “고블린들은 다 처리된 건가요?”
  “흥. 그 망할 잡것들 때문에 애 좀 먹었지만 모조리 쓸어버렸지. 하하하!”
  포티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청년은 베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급히 마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덕분에 베리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끄억.”
  “…….”
  천천히 베리에게 다가간 니나는 그의 가슴팍에 발길질을 가했다. 베리는 괴성을 질러대며 나뒹굴었다.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이 괴력녀야!”
  “시끄러.”
  정신을 되찾은 베리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지르자, 니나는 주먹을 내질러 정확하게 입술을 때렸다. 베리는 자신의 입을 부여잡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뒤에서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고 있던 제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딱히 말릴 수가 없어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을 안에서 나이가 지긋이 든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와 수염 모두가 허옇게 새버린 노인이었다. 하지만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고, 푸른색의 두 눈에서는 여전히 총기가 흘렀다. 키도 크고 체구도 좋으며 강단이 있는 것이, 과거에 뭔가 큰일을 했었던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어서들 오게나.”
  묵직하면서도 낮게 깔린 음성이 귀에 들렸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여전히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만나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구먼. 자네들이 고블린들을 해치웠다면서? 참으로 고맙네. 하일린 백작은 겁쟁이라서 고작 고블린 부대에 겁을 먹고 성에 꽁꽁 틀어 박혀 있었다네.”
  “예. 뭐, 그 백작 녀석이 겁쟁이인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근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십니다.”
  베리가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물었다.
  “나는 자네를 오늘 처음보네. 자네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마을에 와서 살았으니, 자네는 나를 본적이 없을 걸세.”
  “흠…….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나저나 무슨 일로 펜도르에 왔는가?”
  “이 근처에 오래된 드래곤 레어가 있다고 해서 조사하러 왔습니다.”
  베리의 말에 촌장과 마을 청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특히 촌장의 얼굴이 급속도록 어두워지면서 표정이 굳었다.
  “일단 내 집으로 가세.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구먼.”
  “예. 그러죠.”
  그들은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촌장의 집은 마을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다른 집들과는 달리 규모도 좀 더 컸고, 목재로 만들어진 이층으로 된 소박한 집이었다. 정원도 잘 꾸며놓고, 나름대로 섬세하게 가꾸어놓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목재로 된 여러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에도 많은 나무들이 있었는데, 집 안에도 수많은 분재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 제철이 되어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꽃들이 집안 분위기를 화려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무들을 잘 가꾸시네요.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제논이 말하였다. 촌장은 껄껄 웃으면서 거실에 놓인 탁자로 향했다. 마을 청년이 의자를 빼주자, 촌장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저는 그러면 가서 도시로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맙네. 수고 좀 해주게나.”
  “예, 촌장님.”
  청년은 촌장에게 인사를 하고, 베리 일행에게도 고개를 숙인 뒤 재빠르게 집 밖으로 나갔다.
  “어서들 앉게나. 토리아야. 손님들에게 차를 내어 오거라.”
  “예, 할아버지.”
  주방에서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는가? 어서들 앉게나.”
  “예.”
  촌장이 또다시 권유하자 그들은 의자에 앉았다.
  “그나저나 보기 힘든 조합이군. 드워프가 포함되어 있는 일행을 본적이 거의 없는데. 게다가 이 청년은 생김새가 다른 나라 사람인 것 같구먼. 아니면 조상 중에 다크 엘프라도 있는 겐가?”
  “아닙니다. 그저 좀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그렇군. 하긴 변방을 제외한 영지들에서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편이지.”
  대화를 하는 도중, 대략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가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소녀는 사람들 앞에 찻잔을 하나씩 놓은 다음, 거기다가 아주 고소한 향이 나는 차를 따라주었다.
  “이보게 드워프 양반. 자네는 올해 몇이신가?”
  “162요. 촌장 양반께서는 나보다 더 오래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왕년에 힘 좀 쓰셨나 보오?”
  “허허허. 이 늙은 노인네가 무슨 힘을 썼겠나. 쓸데없이 나이만 많이 먹은 노인네일세. 올해로 176이니, 이제 갈 날만 잡은 늙은이이지.”
  촌장의 말에 다들 자못 놀랐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베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촌장은 얼굴에 여린 미소를 띠우며 입을 열었다.
  “오스카라네.”
  “…….”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제논도 마찬가지였다.
  제논이 밤과 새벽에 읽었던 책들 중에는 파탈리아의 역사를 다룬 책들도 있었다. 특히 오랜 세월 간 이어진 케이롄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한 장군의 이름이 많이 언급되었었다. 그의 이름은 오스카 제스 빅토르, 전장의 영웅이라 불린 자였다.
  “전장의 영웅 빅토르…….”
  제논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오스카는 껄껄 웃으며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는 향기롭고 고소한 차의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허허, 다들 분위기가 왜 그러는가? 이 늙은이의 공은 벌써 몇 십 년도 더 된 것이라네. 전장의 영웅은 과분한 칭호지. 자자, 그러지 말고 어서 차를 들게나. 차가 다 식겠네.”
  “파탈리아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셨던 전장의 영웅께서 이런 외진 마을에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베리가 말했다.
  “허허. 이미 다 과거의 일이네.”
  “소문으로만 들었던 전장의 영웅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실로 놀랍네 그려.”
  포티스도 거들자, 오스카 촌장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차를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차를 다시 마시고 나자, 오스카는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스카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드래곤 레어에 가려는 건가?”
  “조사차 가는 겁니다. 아까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요.”
  베리가 껄렁껄렁 대답했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네. 그곳은 너무도 위험한 곳이야.”
  “사전 조사를 다 하고 왔으니 안전합니다. 별로 위험한 것도 없고, 드래곤도 몇 백 년 전부터 살지 않는 빈 둥지잖습니까.”
  “사전 조사라. 허허허. 꽤나 자신만만하구먼. 하지만 문헌으로도 얻지 못하는 정보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오스카가 물었다. 베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사실들이 있다네. 그런 것은 자신이 직접 알아내려 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법이지.”
  “무슨 뜻입니까?”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눈으로 베리가 물었다. 오스카는 수염을 매만지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들은 펜도르에 어떻게 찾아왔나?”
  “당연히 지도를 보고 왔죠. 지도 없이 찾아오기 힘들 정도로 험하고 복잡한 길이던데요.”
  “그거 참 신기하군. 만약 자네들이 지도를 보고 왔다면 십중팔구 길을 잃었어야 하네.”
  오스카의 지적에 베리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자네가 가진 지도를 좀 줘보겠나?”
  “네, 여기.”
  베리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루마리 지도를 오스카에게 건네주었다. 오스카는 두루마리를 확 펴서 놓은 다음 열심히 바라보았다. 오스카의 얼굴에 여린 미소가 떠올랐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지도를 누가 제작했나? 실로 놀랍군.”
  “길드 내에 지도를 잘 만드는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아이가 만들었죠.”
  “아이? 지금 이 지도를 아이가 만들었다고 했나?”
  베리의 대답에 오스카는 실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리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촌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자네 지도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오스카가 도리어 물었다. 베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답했다.
  “틀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마을까지의 거리가 잘못 표시되어 있더라고요. 이제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지도는 아주 정확했다고 말할 수 있다네. 실로 놀랍군. 자네 길드의 정보력도 그렇고, 지도를 만드는 사람의 감각도 그렇고. 아주 훌륭해.”
  오스카는 자신의 긴 수염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시는지?”
  “애당초 펜도르 지역에는 제대로 된 지도가 하나밖에 없다네. 그리고 지형을 조사하고 심형을 기울여 지도를 만든다 해도 틀리기 십상이지. 지도대로 따라가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네. 왜 그렇게 되는지 짐작이 가는가?”
  오스카가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일행은 질문의 대답이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드래곤 레어가 관련되어 있나요?”
  “그렇다네, 청년.”
  제논이 반문하자 오스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답했다. 깊고도 깊은 심연의 푸른 눈동자가 제논 자신을 바라보자, 제논은 부담을 느끼며 슬며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기에 있는 레어는 과거 신룡족의 드래곤이 살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네.”
  “룩스 드래곤(Lux Dragon)이요? 그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나오는 드래곤이 여기 레어에 살고 있었다고요?”
  베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네. 지금은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 룩스 드래곤의 레어라네. 과거 드래곤 로드의 자리를 차지했던 존재들답게, 강력한 영향력을 레어 주변에 끼쳤네. 심지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영향이 남아 있다네.”
  “무슨 영향인가요?”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한 배척이라네. 일단 내가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네.”
  오스카가 답했다. 목이 말랐는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토리아를 불러, 다시 차를 한 잔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했지만, 베리 일행은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지 거절했다.
  “설마 그 배척하는 힘 때문에 지도가 무조건 틀리게 만들어진다는 겁니까?”
  베리가 물었다. 오스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그 지도로는 마을까지 오는 것이 최선이었네. 하지만 레어를 가려면, 그 지도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세. 지도를 보며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군.”
  오스카가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껄껄 웃었다. 베리 일행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기 그러면 어떻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제논이 물었다. 오스카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에 있는 서랍장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커다란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들었다.
  “방법이야 있네.”
  오스카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서, 일행이 가지고 있던 지도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커다란 종이에 쏠렸는데, 그것은 매우 오래된 물건인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어떤 마법이라도 걸린 것인지, 보관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이건 지도가 아닙니까? 그리고…….”
  베리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가지고 온 지도와 꽤 비슷한 지도였다. 군데군데 다른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 지도는 펜도르 마을과 드래곤 레어 일대를 표시한 지도임에 틀림없었다.
  “이게 유일하게 정확한 지도일세. 보면 알겠지만 드래곤이 만든 지도일세.”
  오스카의 말처럼 지도 곳곳에 용족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들 중에서 드래곤의 문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읽지 못했지만 말이다.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지도로 레어가 있는 곳까지 갈 수는 있을 걸세. 다만 지도를 보고도 길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네. 실제로 이 지도를 보고 레어까지 갔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네.”
  “예?”
  오스카의 말에 베리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오스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베리 일행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말을 계속 이었다.
  “만약 자네들에게 레어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자네들은 길을 잃다가 숲 속에서 영영 방황하게 될 수도 있다네. 알겠는가?”
  “…….”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 외로 위험한 조사가 될 것 같았다.
  “어이 영감. 너무 사람 겁주는 거 아닌가? 이거 보물 좀 찾으러 왔다가 고생을 꽤나 하게 생겼어. 끌끌.”
  “허허, 드워프 양반. 나는 겁을 주는 게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이네.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나. 이틀이 지나도 되돌아오지 않으면 내 친히 찾으러 가줄테니.”
  포티스의 말에 오스카는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저기 빅토르 씨.”
  “무슨 일인가, 청년. 아아……. 내 정신 좀 보게. 귀한 손님들의 이름도 묻지 않고 있었군. 미안하지만 자네들 이름부터 알려주게나.”
  제논이 입을 열어 오스카를 부르자, 오스카는 까먹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여기 계신 분은 포티스 씨라고 해요. 그리고 저쪽이 베리타스, 옆이 니나이고요. 저는 제논이라고 합니다.”
  제논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오스카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다시 한 번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스카의 시선은 제논의 얼굴에 머물렀다.
  오스카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제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논은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해 눈길을 허공에 두었다.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오스카가 다시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제논.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논은 고개를 돌려 오스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레어에 관해 더 아시는 것이 있는지 해서요.”
  “나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네. 딱 한 번 가봤을 때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네.”
  “엥?”
  오스카의 말에 베리가 깜짝 놀랐다.
  “문이 잠겨 있다니. 뭔 말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내가 아직 힘을 쓸 수 있을 때에 딱 한 번 가봤었는데, 그때 내 힘으로도 열리지 않았다네. 물론 부상으로 기력이 많이 쇠해진 상태였지만 말이네.”
  “하아…….”
  베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첩첩산중이라고 문제가 계속 쌓였다.
  “간신히 몬스터들을 뚫고 왔다고 생각했더니 미치고 환장하겠네. 망할 마스터. 우리에게 이런 엿 같은 임무를 주고. 돌아가면 제대로 따져야겠다. 아! 짜증나!”
  “시끄러.”
  니나가 매서운 시선을 베리에게 보내자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니나에게 맞은 입술이 빨갛게 부은 상태라서, 더 이상 얻어맞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들은 기억이 나는군. 내 죽은 아내가 펜도르 출신이라네. 사실 이 지도도 아내의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져 온 것이라고 했네. 그래서 아내에게 이것저것 물었더니, 딱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네.”
  “그게 뭔가요?”
  제논이 물었다.
  “저 레어는 사실 무엇인가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하더군.”
  “봉인이요?”
  “그래. 딱 그것만 알려주었다네.”
  제논은 오스카의 말을 듣고 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베리는 따분하고 귀찮았는지 귀를 후비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베리,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어떻게 하긴. 짜증나도 마스터가 내린 명령이니 가봐야지. 문이 안 열리면 이거라도 사용해보고 오는 거야.”
  베리가 자신의 오른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게다가 너도 가봐야 할 거 아니야.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배척하는 강한 힘에다가 문은 닫혀있고. 또 뭔가가 봉인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렇기는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베리의 모습에서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뭔가를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인지, 매우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무튼 촌장님. 이것저것 이야기도 해주고 지도까지 주시고 고맙네요. 그렇다면 저희들은 빨리 일을 처리해야하는 관계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베리가 촌장이 건네준 지도를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오스카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마을에서 레어까지는 한 나절이 넘게 걸린다네. 그리고 만약 길이라도 헤매는 날이면 금방 밤이 될 걸세.”
  “그래도 딱히 지낼 곳도 없고, 일은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내 집에서 쉬게나. 여기에는 손님방도 있고, 자네들 네 사람 정도는 충분히 쉴 공간이 있다네. 그리고 아직 점심도 먹지 못했지 않나?”
  때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니나에게로 향했고, 니나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면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이죠.”
  베리가 머쓱해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오스카는 부엌에서 일을 하는 토리아를 불렀고,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에 토리아는 “이미 준비가 끝났어요.”라고 답했다. 사실 아까 전부터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집 전체에 퍼졌었다.
  그들은 부엌에 있는 식탁으로 향했다. 여덟 명이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식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냐?”
  “차 밭에서 일하고 계세요.”
  토리아가 말을 하는 도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내 소개하지. 내 손자인 윈스톤과 손자며느리인 제니아라네. 그리고 이 아이는 내 증손녀인 토리아일세.”
  오스카는 곧바로 손자 내외에게 베리 일행을 소개시켜주었다. 이미 마을에 돌아오며 소문을 들었던 윈스톤 내외는 베리 일행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차례 했다.
  이윽고 윈스톤 내외는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다양한 음식들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제논은 이리저리 식탁을 둘러보더니, 빵을 집어 들었다.
  “너는 고기 안 먹어?”
  “저는 느끼한 음식은 못 먹어요. 특히 비릿하고 피 냄새가 나는 건 좀.”
  “그래? 그러면 좀 괜찮겠네.”
  “네?”
  제논이 반문하자 베리는 고갯짓으로 옆에 앉아 있는 니나를 가리켰다. 제논은 시선을 니나에게로 옮겼고, 들고 있던 포크를 뚝 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 접시에 스테이크를 하나 가져다 놓고, 칼질을 한 다음 포크로 먹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를 가져다 놓고, 칼질을 하고 포크로 집어 먹었다. 니나는 그렇게 계속 먹어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고기들이 니나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저기 저렇게 먹는데도 살이 안 찌나요?”
  제논이 베리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며 물었다. 베리는 피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요. 보통 저렇게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도 남을 텐데요.”
  “쟤만 그런 게 아니야. 마스터도 저 정도는 먹는다고. 그리고 둘 다 신기하게 살은 안 찌지. 왜 그러는지 아냐?”
  베리가 묻자 제논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베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가득 띠운 채 귓속말로 대답해 주었다.
  “먹는 게 다 가슴으로 가서 그래.”
  “…….”
  왠지 이치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대답이었다. 제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갑자기 베리가 머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왜 때려?”
  “다 들렸어.”
  니나의 오른손에는 포크가 하나 들려 있어야 했는데, 그 포크가 베리의 머리에 꽂혀 있었다. 깊숙이 박힌 것은 아니었는지 이윽고 바닥에 떨어졌다.
  “왜 그러세요?”
  니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스카의 가족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는데, 그들은 모두 “당찬 여자네.”라고 생각했다.
  “니나. 아직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군. 허허허, 그 성격 평생 가겠네. 그러다가 시집을 못 가면 어떻게 할 텐가?”
  “…….”
  포티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니나는 말없이 다른 포크를 받아 들고는 계속 먹어댔다.
  식사는 대략 삼십분 정도 지속되었다.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베리와 니나의 여행담이나, 오스카의 전쟁 경험담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제논은 그 동안 말없이 듣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답답한 마음이 든 제논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쐤다. 뜨거운 햇살이 대지를 비추었지만,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런지 별로 덥지는 않았다.
  제논은 가슴팍에 있는 어머니의 유품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여느 때보다 더 푸른 하늘이 제논의 시야에 들어왔다.
  “쉬는 중인가?”
  등 뒤에서 낮고 굵직하면서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논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오스카가 그곳에 서있었다.
  “쉬는 중에 방해해서 미안하네. 그냥 앉게나.”
  “예.”
  오스카가 먼저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 옆으로 제논이 앉았다.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여기서 상당히 먼 곳에서 왔습니다. 너무 멀어서 돌아가기도 힘든 곳에서요.”
  제논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쓸쓸한 게로군.”
  “예…….”
  “나도 고향을 떠나 파탈리아에 정착했네. 지금도 간혹 고향 생각이 나지.”
  제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파탈리아 남쪽에 있는 리헬 제국 출신이라는 것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나야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았네. 자네는 어떠한가? 돌아가고 싶은가?”
  “예. 찾아야할 분들을 찾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꼭 그러고 싶고요.”
  “고향에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있나 보군.”
  오스카의 말에 제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게 소중한 사람들은 지금 아마도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분들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래서 그분들을 찾고 난 뒤, 그분들과 함께 되돌아갈 생각입니다.”
  쓸쓸한 말투였다. 오스카는 말없이 제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머뭇거리면서 물을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 혹시 혼혈인건가?”
  “…….”
  제논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 쿼터는 아닌 것 같네만.”
  “제 부모님은 다 인간이셨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달랐고 민족이 달랐죠.”
  “그런가. 그렇다면 남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나 보군.”
  오스카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사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느꼈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말일세. 하지만 왕께서는 내게 작위까지 주시며 전쟁에 나가게 해주셨네. 나는 그 보답으로 열심히 싸웠고. 만약 왕께서 내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면, 나도 자네처럼 마음속에 많은 것들을 쌓아두었을지 모르네.”
  오스카가 손가락으로 제논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논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오스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쌓고 있네. 그런 것은 빨리 잊는 것이 좋아.”
  근엄하고 진지한 말투였다. 오스카의 눈 역시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맑고 깊으며 곧은 눈동자였다.
  제논은 그런 오스카의 눈이 너무나도 부담되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이 모두 읽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제논은 오스카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읽혀버린 상황에서 피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잊지 않는다면 자네만 고통스러워진다네.”
  “알고 있습니다.”
  제논은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답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리 쌓아두고 있는 건가?”
  “알고 있지만, 버려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스카는 제논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려고 했지만, 제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만 해주셨으면 해요.”
  “알겠네.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겠지. 그래도 딱 한 마디만 더 해주겠네.”
  제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오스카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멈추어 섰다. 고개를 내려 오스카의 얼굴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너무 마음의 벽을 만들지는 말게나. 자네가 이제까지 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상처를 입은 것은 짐작할 수 있네.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마음의 벽을 만들고, 말과 행동으로 방어하고 싶은 것은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너무 그러면, 자네는 마음의 안식처를 얻지 못할 거네.”
  오스카는 얼굴에 여린 미소를 띠운 채 말하였다. 제논은 묵묵히 오스카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오스카처럼 여린 미소를 얼굴에 띠우면서 입을 열어 답했다.
  “고맙습니다.”



  밤이 도래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완전히 삼켜버렸고,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잠이 들었다. 마을의 안전을 위해 몇몇의 젊은이들이 불침번을 서며 마을 주변을 순찰할 뿐이었다.
  “이봐. 뭔 소리가 나지 않았나?”
  2인 1조로 움직이던 한 순찰조의 청년이 무슨 소리를 듣고는 멈춰 섰다. 앞에 나가던 다른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이상하다. 풀숲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토끼라도 있었나 보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답했다. 그들은 발걸음을 옮겨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들렸지?”
  “뭐야 이건…….”
  마을 청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횃불로 소리가 난 곳을 비추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청년이 짧은 비명 소리를 지르며 툭 하고 쓰러졌다. 다른 청년은 깜짝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청년의 등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컥!”
  정확하게 뒤에서부터 심장이 꿰뚫렸다. 검이 빠지자 피가 뿜어져 나왔고, 청년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마침 환한 달빛이 마을 청년을 죽인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 사이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어진 흉터가 있었고, 왼쪽 뺨에도 십자 형태의 흉터가 있었다. 키는 190이 넘어 보였고,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근육질의 체형이 여실히 드러났다. 붉은빛의 머리칼은 이리저리 뻗쳐있었고, 벽옥의 눈동자를 지녔다.
  “제스퍼 대장. 다 처리했습니다.”
  “그래?”
  제스퍼의 뒤에 복면을 한 사내가 갑자기 나타났다. 제스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쇳소리처럼 갈라지는 특유의 음성으로 답했다.
  “이제 남은 놈들은 다 자고 있는 놈들이겠군. 안 그래, 푸파?”
  제스퍼는 피씩 웃으면서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180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후드가 달린 옷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얼굴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어이, 철가면.”
  “…….”
  “쳇, 재수 없는 자식.”
  여전히 답이 없자, 제스퍼는 바닥에 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갑자기 뿔 나팔 소리와 더불어 시끄러운 종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이. 다 처리했다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
  사내는 말을 다 이을 수 없었다. 제스퍼가 검으로 사내의 목을 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비명도 못 지른 채 숨을 거두었다.
  “쓸모없는 것들. 고작 이런 시시한 임무에 실수를 해?”
  제스퍼는 신경질을 부리며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땅에다가 내던졌다. 옆에 서있던 푸파가 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어둠이 만들어져 그들의 몸을 완전히 감추었다.
  이윽고 집들 곳곳에 불이 들어왔고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왔다. 몇몇은 검을 들고 자신의 가족을 호위하고 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빨리 피난처로 움직여! 빨리! 헤렌. 자네는 빨리 촌장님을 모시게.”
  “알겠어.”
  마을 청년 헤렌은 급히 오스카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여러 차례 두들기자, 촌장을 비롯한 가족 전원과 손님으로 묵고 있던 베리 일행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베리는 상의를 벗은 상태였고, 니나는 가슴에 압박붕대를 두른 팬티 바람이었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무슨 일인가?”
  “누군가가 마을에 침입했습니다. 순찰을 돌던 젊은이 몇이 그들에게 살해당했어요!”
  오스카의 질문에 헤렌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어서 피난처로 피신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적이 몇이나 되는데 피난처로 가야 한단 말인가?”
  오스카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헤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르겠다고 답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어서 이쪽… 커억!”
  “자네 왜 그러는가?”
  헤렌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오스카가 급히 헤렌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숨이 끊어진 뒤였다.
  “뭐야?”
  주변이 갑자기 암흑으로 뒤덮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쇳소리처럼 갈라지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아아.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어차피 나중에 천천히 다 죽여줄 거지만, 일단 대어부터 낚아야하지 않겠어?”
  서서히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변은 암흑 천지였지만, 신기하게도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스터의 뒤를 이어 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대략 열 명 정도의 사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시렌트… 애시.”
  베리가 그들의 모습을 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소리는 제스터의 귀에도 들렸고, 제스터는 비릿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우며 입을 열었다.
  “우리를 알아보는 녀석이 있네. 호,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이 파탈리아의 충실한 개구나.”
  제스터는 손가락으로 베리의 왼쪽 가슴팍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동그라미 안 정삼각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란디스 비르라. 옆에 몸매 좋게 생긴 여자 녀석도, 그 옆에 잡종처럼 생긴 녀석도 그랑비르겠네.”
  제스터는 손가락으로 니나와 제논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들의 오른쪽 손등에도 그란디스 비르의 마크가 새겨져있었다.
  “시렌트 애시가 여기에 무슨 일로 왔냐?”
  베리가 큰 음성으로 물었다. 제스터는 피씩 웃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연히 저 잡종 놈을 잡으러 왔지. 그리고 이왕이면 전장의 영웅과 좀 놀아보려고. 거기에 더해서 마을 놈들 모두 죽여주러 왔다. 이제 됐냐?”
  “뭐야?”
  베리가 화를 내며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니나가 팔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다른 손으로는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꽤나 큰 검을 사용하네.”
  “잡종을 잡으러 간다니 무슨 말이지?”
  니나가 물었다. 제스터는 어깨를 으쓱한 뒤 손가락으로 제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갈색 피부를 지닌 놈 말이다.”
  “어째서?”
  “당연한 걸 다시 묻는 네 년은 머리가 나쁜 거냐? 키시스가 나타났으니 윗대가리들이 혈안이 되었잖아.”
  키시스라는 말에 오스카와 그 가족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제논을 응시했고, 제논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나둘 것 같아?”
  니나가 말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제스터가 피씩 웃더니, 그의 몸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니나는 눈을 크게 뜨며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제스터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윽!”
  등 뒤에서 오스카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제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니나의 옆을 지나 오스카를 향해 검을 휘두른 제스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오스카는 제스터의 오른팔을 자신의 양손으로 간신히 잡아내, 제스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어이, 영감. 아직도 제대로 싸울 수 있나 봐? 그런데 이걸 어쩌나. 오른팔이 그렇게 떨려서야.”
  제스터가 피씩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오스카의 오른쪽 팔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아, 실망이네.”
  제스터가 팔을 거두며 느긋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획 돌아서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니나는 제스터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도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멍하니 서서 제스터가 움직이는 것만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제스터가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자, 니나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좋아, 좋아. 이렇게 된 김에 재미있는 오락이라도 즐기는 것이 어때?”
  제스터는 쭈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얼굴 가득 역겹고 비릿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너희 중 단 한 명이라도 내 얼굴에 상처를 낸다면 물러나주지. 어때?”
  “…무슨 짓인가?”
  옆에 있던 푸파가 제스터의 말을 듣고는 그의 어깨에 은빛 건틀릿을 낀 손을 얹으며 말했다. 특유의 남성과 여성의 중첩된 목소리에 제스터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베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왜? 너도 싸우려고?”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명령을 수행해라.”
  “아아. 어차피 네가 만든 이 공간은 네가 사라지게 하지 않는 한 계속 되는 거잖아? 아니면 네가 약해빠져서 얼마 못가서 사라지기라도 하나? 아, 그것도 괜찮지. 그래도 나는 상관없어. 다만 구경꾼이 좀 더 많아지는 것뿐이잖아.”
  제스터가 키득거리며 말하였다.
  “네가 싸울 거 아니라면 뒤로 가서 찌그러져 있어. 나는 네 놈이 참 싫거든.”
  “…….”
  제스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푸파보다 10cm 가량 더 큰 제스터는 위에서 아래로 푸파의 후두 밑으로 살짝 비치는 얼굴―정확하게 말하면 은빛 가면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푸파는 묵묵하게 서있더니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아주 좋아. 그러면 누구부터 덤벼볼 생각인가? 아아, 그래. 다 같이 덤벼도 상관없어. 싸울 수 없는 여자 둘과 죽기 직전의 할아범 하나는 어차피 방해만 될 테니 물러나 있어도 괜찮아. 어때? 내가 오늘 아주 인심을 크게 쓰는 건데. 크하하하!”
  불쾌한 웃음소리였다.
  “내가 목표면 나만 잡아가면 되잖습니까.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죽이고, 또 죽이려 하시는 건가요?”
  부르르 떨고 있던 제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분노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재미있으니까. 킥킥.”
  “뭐라고요?”
  제논이 반문했다. 킥킥 웃고 있던 제스터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고, 대신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왜? 불만이라도 있어?”
  특유의 비릿한 음성이 허공에 울리자, 뒤에 있던 베리가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입으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 밖으로 시동어를 내뱉자, 베리의 오른손 위로 빛나는 공이 하나 생성되었다.
  베리는 바로 오른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팔에 어느새 차고 있었던 팔찌가 그 빛을 모조리 흡수하여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귀 막아, 니나!”
  베리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니나는 검을 땅에 꽂으며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푸른 번개!”
  니나가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팔찌의 시동어를 외쳤다. 하늘에 먹구름이 뭉쳐들더니 푸른빛의 번개가 제스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번개는 제스터의 몸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아아, 그건 하늘의 심판이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게는 그딴 거 하나도 안 통하는데.”
  제스퍼는 품속에서 특이한 문양이 겉표지에 새겨진 책을 꺼내들었다. 제스퍼가 꺼내든 책을 보자 베리와 니나의 눈에 크게 뜨였다.
  “그것은 허무의 서!”
  예전에 누군가에 도둑맞은 고대의 유물이었다. 허무의 서는 6서클 이하의 모든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푸른 번개는 4서클의 마법과 맞먹는 힘을 지녔으니, 어림 반 푼어치도 안 되는 거지. 큭큭. 자, 그 다음에는 또 뭘 선보일 거지? 좀 더 나를 즐겁게 해줘 봐. 손에 들고 있는 검이라도 좀 뽑아서 사용해 보지 그래. 그렇게 멀뚱하게 서있으면 내 몸에 상처 하나 낼 수 없지 않나.”
  제스퍼가 킥킥 웃어대며 말하였지만, 베리에게는 제스퍼를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대신 니나가 검을 뽑아 들고 제스퍼에게 달려들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파고들면서 검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제스퍼는 가벼운 도움닫기로 공중으로 붕 떠올라 검을 피했고, 이윽고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니나는 제스퍼의 검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강력한 힘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자세를 잡으며 제스퍼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렇다면 이건 어때!”
  니나의 몸에서 푸른빛의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이내 검으로 흘러들어갔고, 얇은 푸른빛의 검기가 검을 완전히 휘감았다.
  “검성?”
  “이거나 먹어라!”
  니나가 검을 휘두르자, 푸른빛의 검기가 초승달 형태로 뿜어져나갔다. 제스퍼는 강렬한 검기를 여유롭게 피했다. 니나는 그가 피하는 곳으로 접근한 뒤,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제스퍼는 검으로 막지 않고 뒤로 가볍게 뛰어 피했다.
  “흐아압!”
  제스퍼의 등 뒤에 어느새 대형 전투 도끼를 휘두르는 포티스가 있었다. 하지만 제스퍼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아니 오히려 씩 웃으면서 한쪽 발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품 안에서 다섯 개 정도의 단검이 포티스를 향해 날아갔고, 포티스는 깜짝 놀라며 도끼날로 그것들을 막아냈다. 그리고 잠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제스퍼에게 고정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제스퍼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눈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소리도 나지 않았고, 기척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니나!”
  니나의 뒤에서 제스퍼를 발견한 베리가 소리를 질렀다. 니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앞으로 굴렸고, 간발의 차이로 제스퍼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검에 오른팔이 살짝 긁혀 피가 났다.
  “좀 더 달려 들어봐. 이거 재미가 없잖아.”
  제스퍼는 검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던져가며 여유롭게 말하였다. 니나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옆으로 포티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저 놈. 만만치 않아. 다른 힘은 없는 것 같지만 기척을 감추는 능력은 발군이네. 게다가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스피드까지. 어떻게 할 텐가?”
  “방법이 없다면 만들어야죠!”
  니나가 소리를 지르며 땅에다 검을 꽂아 넣었다. 몸을 휘감고 있던 모든 오라가 검을 타고 땅 밑으로 스며들어갔다. 이윽고 제스퍼가 서있는 곳에서 푸른빛의 기둥이 하나씩 솟아올랐다.
  “검기를 이런 식으로도 응용하다니. 꽤 괜찮은 실력인데?”
  푸른 기둥이 나올 곳을 예측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제스퍼는 아주 여유롭게 피했다.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단검을 하나씩 던지기까지 했다.
  “젠장!”
  포티스가 니나의 앞에 뛰어 들어 그것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하하하! 좀 더 해봐. 겨우 이 정도로 나를 잡을 수 있겠어?”
  “크윽.”
  니나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붕대도 땀으로 다 젖었다. 니나의 몸을 휘감던 푸른빛의 오라는 서서히 사라져갔고, 마침내 니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검에서 손을 뗐다. 니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내몰아 쉬었다.
  “니나 괜찮은 건가?”
  “지쳤을 뿐입니다. 하아…….”
  안색이 파랗게 질린 것이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쯧.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송이였네.”
  제스퍼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끝장을 내버릴 심산인 듯 보였다. 천천히 포티스와 니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려던 찰나, 엄청난 폭발음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시선을 돌려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흰빛이 제스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이윽고 긴 장검을 든 오스카의 모습이 보였다. 제스퍼의 부하 중 하나를 공격해 빼앗은 모양이었다.
  “뭐야. 이런 재미있는 능력을 여전히 감추고 있었다니, 약간 화가 나는데?”
  제스퍼가 실실 웃어대며 중얼거렸다. 반면 오스카는 말없이 니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제스퍼의 앞에 섰다. 기백이 여전히 살아있는 눈동자로 제스퍼를 노려보는 오스카의 모습은, 확실히 과거에 수많은 병사들을 지휘한 대장다운 모습이었다.
  “자네의 행동은 실로 보기에 안타깝구먼.”
  “아아. 뭐가 안타까운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는데. 나는 지금 매우 즐겁거든.”
  “…도저히 봐줄 수 없겠군.”
  “아아, 봐주지 마. 어차피 오른팔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잖아?”
  제스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스카는 들고 있던 검을 오른팔로 강하게 휘둘렀다. 제스퍼는 비릿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우며 가볍게 검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스퍼의 판단 착오였다.
  “윽!”
  엄청난 힘이 검을 통해 팔과 몸으로 전해졌다. 제스퍼는 재빨리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은 오스카의 검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오른팔이 어쨌다는 겐가?”
  “젠장, 망할 노인네가!”
  오스카의 낮고 굵은 음성에 제스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스퍼는 재빨리 부하가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아 오스카에게 달려들었다. 제스퍼가 검을 강하게 앞으로 내질렀다. 오스카는 몸을 한쪽으로 비키며 검을 피했고, 곧바로 주먹을 뻗어 제스퍼의 턱을 날려버렸다.
  “크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제스퍼는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내뱉고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젠장! 젠장!”
  “자네 열을 좀 식히는 것이 좋겠어.”
  제스퍼의 시야에서 오스카가 사라졌다. 어느새 제스퍼의 뒤로 이동한 오스카가 그의 뒷목을 손날로 쳤다. 제스퍼는 억 소리를 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대…단해.”
  오스카의 강력한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제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오스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다른 부하들도 가볍게 날려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후두를 뒤집어 쓴 푸파 하나뿐이었다.
  “자네는 뭔가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네. 어떤가. 그만 물러나 주지 않겠나?”
  “…….”
  오스카는 푸파에게 말을 건넸지만, 푸파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주변을 둘러보며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는 복면을 쓴 사내들과 기절해 있는 제스퍼를 쳐다보았다.
  “그만 물러나 준다면 고맙겠네.”
  “당신의 그 힘.”
  푸파가 말을 꺼냈다. 남자와 여자의 음성이 중첩된 특이한 목소리가 오스카와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
  “얼마 못 가서 사라질 겁니다.”
  “…예리하군.”
  오스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니라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네.”
  “…….”
  큰 음성으로 외치며 오스카가 푸파를 겨냥해 검을 휘둘렀다. 커다란 섬광이 검을 통해 푸파에게 뿜어져 나갔다. 푸파는 손을 앞으로 뻗어 강력한 방어벽을 생성시켰고, 하얀 섬광은 방어벽과 부딪혀 소멸되었다. 오스카는 그 순간을 노려 푸파의 뒤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푸파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왼팔을 들어 올려 검을 막아냈다.
  “……!”
  외투의 팔 부분이 흘러내리며 팔 부위 갑옷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 겉으로 드러났다.
  오스카는 칼날을 보자마자 뒤로 급히 물러났다. 그 순간 푸파의 오른팔이 그의 목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갗을 스친 것도 아니었지만,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오스카는 자신의 목을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푸파를 응시했다.
  “나이든 노인네를 너무 힘들게 하는군.”
  오스카의 몸을 휘감고 있던 흰 빛이 서서히 옅어져 갔다. 호흡도 많이 거칠어진 것 같았고, 오른팔의 떨림도 다시 시작된 것 같았다.
  “정말 이제 시간이 얼마 없군.”
  오스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검을 양손으로 굳게 잡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흐려져 사라져 가던 흰빛이 모두 검으로 집중되었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압!”
  기합을 넣으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지만, 푸파의 기척을 느끼며 정확하게 그를 향해 달려갔다.
  오스카는 푸파를 향해 빛을 뿜어내는 검을 휘둘렀다. 푸파는 몸을 옆으로 비키면서 검을 피했는데, 어느새 오스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푸파는 급히 뒤로 돌아서며 팔을 교차시키며 오스카의 검을 간신히 막아냈다.
  “상당히 단단한 갑옷이군.”
  강렬한 검기에도 손상조차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가!”
  오스카는 발을 내질렀다. 그냥 발길질이 아니었다. 검을 휘감던 강렬한 빛이 어느새 그의 오른발로 옮겨갔고, 오스카는 그것으로 푸파를 강하게 쳤다. 불의의 일격에 푸파는 뒤로 날아갔고, 그 순간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검은 결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뒤로 날아가던 푸파는, 때마침 결계가 풀려버리는 바람에, 오스카의 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강한 충격 탓에 벽이 뚫리며, 푸파는 집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크윽……!”
  오스카는 검으로 땅을 짚으며 간신히 버티고 섰다. 뒤에서 지켜보던 손자 가족들과 베리 일행이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토리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오스카는 괜찮다며 미소를 얼굴에 띠웠지만, 사색이 된 얼굴과 거칠어진 호흡으로 보건대,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이 오스카를 부축하는 동안 횃불 여러 개가 어둠 속을 비추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사라진 촌장을 찾고 있었던 마을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벽이 뚫리며 난 소리를 듣고 급히 오스카의 집으로 달려왔다.
  “촌장님!”
  드디어 촌장을 발견한 마을 청년들 중 하나가 급히 촌장 곁으로 다가왔다. 촌장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쳐주었지만, 그 청년은 오스카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사람들을 불러댔다.
  그때 부셔진 벽에서 멀쩡한 모습의 푸파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쓰러져 있던 복면의 사내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첩첩산중이네.”
  “그러게요.”
  포티스와 니나가 무기를 잡고 주변을 노려보았다. 다른 마을 청년들도 들고 있던 무기들을 고쳐 잡으며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긴장감이 흐르던 와중, 쇠가 긁히는 듯한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망해 먹을 노인네.”
  제스퍼가 짜증을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포위된 것을 깨달았다.
  “뭐야 이거. 덜떨어진 것들이 우르르 몰려왔잖아.”
  자리에서 일어서 몸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낸 다음,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을 주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푸파를 슬쩍 쳐다보았다. 푸파의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건 또 뭐야.”
  “레어로 가는 지도다.”
  “호오? 그 인간이 그런 명령도 내렸나?”
  제스퍼의 질문에 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스퍼는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피씩 웃었다.
  “아아. 영감.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네?”
  제스퍼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하였다. 그의 시선은 오스카를 향해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니나가 제스퍼의 앞을 막았다. 포티스도 역시 이를 갈며 도끼 자루를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스퍼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니나가 검으로 제스퍼를 베려고 하자, 제스퍼의 한쪽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
  또다시 제스퍼의 모습이 사라지자 니나는 깜작 놀라며 모든 신경을 동원해 제스퍼의 위치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찾기도 전에 명치 부위에서 강한 타격감을 느끼며 쓰러졌다.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게다가 포티스마저도 제스퍼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너희 둘에게는 재미있는 게임을 선사해 주지. 그러니 아직은 죽이지 않아. 아직은.”
  침을 뱉으며 제스퍼가 말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오스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베리가 검을 들고 그의 앞을 가로 막으려 했지만, 제스퍼는 유유히 그 옆을 지나쳤다.
  “어이 영감. 원래 같으면 이 마을 놈들을 다 죽이려고 했지. 그런데 네 녀석 때문에 그러기는 그른 것 같아. 저 바보 같은 놈들이 팔 다리 하나씩 부러진 거 같거든. 쓸모없는 놈들.”
  제스퍼는 손가락으로 복면을 쓴 사내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뼈가 부러진 상태라 제대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말이야. 게임을 할까 해. 네 녀석을 그 게임이 초대하고 싶지만 죽기 직전이라 뭘 어떻게 할 수 없네.”
  “크윽, 무슨 속셈인가?”
  오스카가 숨을 내몰아 쉬며 물었다.
  “별 거 아니야. 우리는 내일 드래곤 레어에 들어가 볼까 해. 저 망할 철가면의 실력이라면 무슨 함정이 있더라도 별로 시간 들이지 않고 돌파하는 것이 가능하지. 그리고 네 놈들은 내일 아침 일찍 레어를 찾아오는 거야. 정오가 넘기 전까지.”
  “무슨 뜻이지?”
  베리가 물었다.
  “그랑비르의 썩을 놈들만 찾아와라. 저 난쟁이 녀석도 포함해서. 만약 정오가 되어도 오지 않는다면…….”
  제스퍼가 말끝을 흐리며 씩 웃었다. 그의 매서운 눈길이 오스카의 가족 중 하나인 토리아를 향했다. 제스퍼는 어느새 토리아의 뒤로 자리를 옮겼고, 날카로운 칼날을 목에 들이댔다.
  “토리아!”
  “엄마! 아빠!”
  토리아가 소리를 질렀고, 그녀를 붙잡고 있는 제스퍼는 음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웠다.
  “이 년을 아주 귀여워 해주지. 차례대로 말이야. 그리고 사지를 잘라 고통스럽게 죽여줄 거다. 영감탱이 대신에. 키킥킥.”
  제스퍼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 푸파!”
  “…….”
  푸파가 제스퍼의 옆으로 이동했다. 복면을 쓴 사내들도 그들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가 한 곳에 모이자 푸파는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고, 땅에서 검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살려주세요!”
  토리아의 다급한 외침이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마을 청년들이 급히 그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검은 빛이 적들을 온전히 휘감았고,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사람들은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젠장!”
  베리가 주먹으로 땅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할아버지!”
  아직 비극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윈스톤과 제니아의 울부짖는 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마을 청년들 모두가 촌장 곁으로 모여들었고, 제논 역시도 오스카의 바로 옆에 다가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오스카는 생명의 끈을 놓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운 상태였다. 자신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본 뒤, 토리아가 서있던 장소에 시선을 옮겼다. 쓸쓸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눈길을 제논에게로 옮겼다.
  “이보게, 제논.”
  오스카는 손을 들어 올렸다. 제논이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 증손녀를 구해주게나. 내 이미 힘이 다해 그 아이를 구할 수도 없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꼭 할 겁니다.”
  제논이 울먹이며 답했다. 오스카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키시스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 걸세. 그래도 너무 마음에 아픔만을 담아 두지는 말게나. 세상에 안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니.”
  오스카는 제논에게 말을 끝내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마지막 안부를 전했다. 토리아가 잡혀갔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다른 마을 청년들에게도 앞으로 마을을 잘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하아……. 토리아가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싶었지만, 이제 그 아이를 더는 못 보겠구나.”
  오스카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호흡은 완전히 정지했다. 윈스톤과 제니아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촌장님을 흔들어 깨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오스카는 여린 미소만을 남긴 채 눈을 감은 뒤였다.
  제논은 오스카가 죽은 것을 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의 죽음과 바닥에 흩뿌려진 피들로부터 나오는 비릿한 냄새가 그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일제히 떠올라 그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제논은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러다가 옆으로 쓰러질 뻔했다. 베리가 급히 제논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이. 괜찮아?”
  베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제논은 얼굴을 숙인 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베리가 걱정스런 마음에 그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재차 물었다.
  “괜찮아?”
  “…시…끄러…….”
  여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중성적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어조였고, 말투도 사뭇 달랐다.
  “어이… 너 괜찮은 거 맞는 거냐?”
  “…….”
  베리가 다시 물었지만,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에 제논의 몸은 급격히 앞으로 무너지듯 기울어졌다. 베리는 깜짝 놀라며 그의 몸을 붙잡았다.
  “제논! 정신 좀 차려 봐! 제논!”
  베리가 다급한 음성으로 제논을 깨우려 했지만, 제논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제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722 나스루딘의 모험 [6] 다르칸 2010.10.18 442
7721 일곱별 [6] 乾天HaNeuL 2010.10.17 868
7720 일곱별 乾天HaNeuL 2010.10.17 850
» 일곱별 乾天HaNeuL 2010.10.17 871
7718 일곱별 乾天HaNeuL 2010.10.17 122
7717 일곱별 [3] 乾天HaNeuL 2010.10.17 1010
7716 일곱별 [4] 乾天HaNeuL 2010.10.17 230
7715 단군호녀 3화 [3] ♀미니♂ban 2010.10.17 357
7714 단군호녀 2화(표현부분 대사 수정) [2] ♀미니♂ban 2010.10.17 369
7713 단군호녀 1화(이름 수정본) [2] ♀미니♂ban 2010.10.17 394
7712 당신이 잠든 사이 [4] 윤주[尹主] 2010.10.15 317
7711 [게임판타지] Demi-God [3] 울투 2010.10.15 131
7710 당신이 잠든 사이 [2] 윤주[尹主] 2010.10.14 280
7709 [단편]성인식 [2] 악마성루갈백작 2010.10.13 279
7708 사라진 별 [4] 민희양 2010.10.13 257
7707 당신이 잠든 사이 [2] 윤주[尹主] 2010.10.13 198
7706 당신이 잠든 사이 [2] 윤주[尹主] 2010.10.12 238
7705 [순수/단편] Sunday morning [1] 핑거프 2010.10.11 271
7704 당신이 잠든 사이 [1] 윤주[尹主] 2010.10.11 205
7703 당신이 잠든 사이 [1] 윤주[尹主] 2010.10.10 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