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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단편] 고민苦悶 agony

2010.10.23 05:03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25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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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나는 여러가지의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 정말이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심하게 무난한 그런 고민들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이란 내가 원한 바가 절대 아니었기에, 난 늘 가슴 졸이는, 마치 영화 주인공 같은 삶을 동경해왔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여성 히어로는 여간해서는 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난 늘 남자가 되고 싶었다.


 


"존 맥클레인 같은 삶을 원했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관객에 불과했다. 내 고민은 늘 초라했다. 어떻게 하면 지구를 악당의 손아귀에서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클락에 비해서도, 고담 시를 악당들에게서 수호하려는 브루스 웨인에 비해서도 난 작고 형편없었다. 그러기에 난 너무나도 무능력 했다.


 


난 내 고민들에 대해 말하기가 두렵다. 어떤 원대한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듣는다면 날 비웃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난 지구나 고담 시, 뉴욕 또는 LA를 지켜야 한다는 고민 대신, 욕실에 수도가 고장나 물이 새고, 남자 친구와 헤어졌으며, 덕분에 두통이 생겨 아스피린을 먹어야 한다는 사소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정말 창피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너도 그랬지?"


 


그래서 나는 어떤 원대한 목적을 가진 누군가와 만나지 않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리사를 만났다. 그 당시, 우리는 정말 친하게 지냈었다. 늘 같이 다니고, 도시락을 같이 먹고, 화장실을 갈 때도 꼭 같이 갔던 그런 친구.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중요한 관계였다.


 


"응. 나도 그랬었어. 늘 그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잖아."


 


리사는 그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검은 색의 머리칼은 여전히 길고 탐스러웠고, 긴 속눈썹이 돋보이는 눈동자는 아직도 소녀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가 같이 꿈을 말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난 피터 파커처럼 되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래, 리사. 하지만 거미줄이 끈적거려서 싫다며 결국엔 포기했었어. 맞지?"


 


"응. 잘 기억하고 있구나?"


 


리사는 어린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때의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연습장에 그려댔던 이상형의 얼굴들, 서로 동경하는 인물을 자랑하던 그 설렘들을. 그리고 또 하나,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더 남아 내 자존심과 신경을 자꾸만 건드려댔다.


 


"리사. 그런데……. 왜 전화했어?"


 


학창 시절, 우리가 알고 지낸지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리사는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건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기였다. 난 아직도 그 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연습장을 보여주었더니, 리사는 그걸 잡아 확 찢어버리면서 '유치해. 더 이상은 못 놀아주겠어.' 라고 차갑게 말했던 것이다.


 


"그냥."


 


어전히 생글생글 웃으면서 리사가 대답했다. 그날도, 리사는 저렇게 웃었었다. 정말 귀여운 미소를 띠고, 날 경멸했다. 지금까지 나와 어울려 준 건 다 동정에 불과했다고. 그건 아주 웃기는 말이었다. 첫날,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리사를 동정한 건 바로 나였으니까. 난 리사에게 꿈을 말해주었으니, 아주 대단한 것을 준 셈이었다. 그래, 난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때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리사가 말했다.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케티를 만났어. 네 얘기를 하더라.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지저분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야."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남자친구와 헤어진다는 것도 맞고, 지저분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왜 그런 말을 타인에게서 들어야 하는 걸까?


 


"케티는 널 불쌍하다고 말했어. 물론 나, 리사에 비해서. 정말, 청소 좀 하고 살지 그러니?"


 


전화가 와서 받아보았더니, 리사였다. 그녀는 내게 우리집에 꼭 놀러오고 싶다며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걸 받아들인 것이 실수였다는 걸, 나는 지금에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리사는 집안 이곳저곳을 흘겨보며 험담을 늘어놓았다.


 


"아직까지 그 영웅이니 뭔지에 빠져 있나 보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그러니까 애인한테도 차이지. 날 봐. 이것 좀 보라구."


 


그렇게 말하며, 리사는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보였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고급스런 다이아 반지가 걸려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지간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한마디로 나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반지였다.


 


"내 남편이 사준거야. 나 결혼했거든."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넌 이런 거 꿈에도 그릴 수 없지? 아까 욕실에 가봤더니 물이 새서 엉망이더라. 어때, 내가 사람을 불러서 수리해줄 수도 있어. 네가 정 그럴만한 비용이 없다면."


 


뭐랄까. 그 시절에 느꼈던 그 충격들이 다시 한번 날 찾아왔다. 날 찢고, 때리고, 흔들고,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 앞이 희미해지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고민에 빠져들 수 있었다. 용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아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그건 정말 끝내주는 일이었다. 항상 악에 맞서 싸우면서도 겸허한 마음가짐을 지녔던 그 영웅들. 나도 그렇게 되려는 것일까?


 


갑자기 홍수처럼 밀려온 수많은 생각들에 의해, 나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지금까지 내가 품어왔던 적지 않은 고민들의 백 배, 아니 천 배가 넘는 고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것이 내가 원하던 거였나? 이렇게나 골치 아프고, 짜증이 나는 고민들이 바로 영웅적인 거라고?


 


내가 혼란에 젖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지금, 리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날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 본 뒤, 도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야. 너와 난 다르니까. 잘 살길 바래. 그리고, 집 청소 좀 하고 살아. 가정부라도 보내줄까?"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나는 여러가지의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 정말이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심하게 무난한 그런 고민들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이란 내가 원한 바가 절대 아니었기에, 난 늘 가슴 졸이는, 마치 영화 주인공 같은 삶을 동경해왔다.


 


그리고 지금의 난 단 한 가지 고민만을 안고 있다. 이제, 리사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다시 별 볼일 없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L양을 위해서.


 


이 글의 소재를 제공해 준 L양은,


 


당당하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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