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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Fortune teller/추적

2005.05.18 00:58

kalay 조회 수: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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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춘 텔러(Fortune Teller)다.
나는 예지자(預知者)다.
나는 선견자(先見者)다.
나는 읊조렸다.
그렇다.
나는 포춘 텔러. 행운을 입 밖에 내는 자.
하지만 항상 행운만을 말하지는 않는 예지자.
왜냐 하면, 인간의 삶에 행운만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이 진리이니까.
하지만 행운만을 바라는 인간들은 나를 포춘 텔러라 이름붙였다.
이제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모두들 나를 포춘 텔러라 부르니까.
나는 정성껏 몸을 씻은 뒤 준비된 옷으로 갈아 입었다.
내가 집에 있었을 때는 더러운 소파에 누워 자고 있을 때에도 미래는 눈 앞에 펼쳐지곤 했었다.
그러나 현 정부는, 나라는 도구를 가져다 쓰는 정부는 나에게 깨끗한 몸과 예복, 지루한 명상을 요구했다.
대외 이미지를 위해서. 그것들이 전혀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금, 나는 명상 없이는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능력도 정부에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마치 나처럼.
나는 길다랗게 늘어진 옷자락을 바닥에 끌며 명상실로 들어섰다.
천장의 높이만 해도 웬만한 어른 키의 대여섯 배나 되는 넓은 명상실에 들어서자 갑자기 복부에 무언가 굵은 막대기 같은 것이 찌르는 듯한 둔탁한 통증이 극심히 느껴졌다.
배를 움켜지고 쓰러지려 하는데, 고통은 그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괜시리 무안해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넓다란 방의 한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는 명상의 자리에 앉으며, 나는 쓰게 웃었다.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
나만 제외하고는.
나는 자리에 자세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과 구역감을 이기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



죽음.
사람들이 울고 있다.
죽음이란 것은 슬프기만 한 것인가?
다섯 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다섯 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녀.
그녀는 울지 않는다.
죽음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관 위의 글씨
십자가가 덮이기 전, 간신히 본 이름.
아아. 그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이지만, 그의 죽음은 마음 속을 저며온다.
예정된 것. 피해갈 수 없는 것.
그 때에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명, 또다른 미래
살아있는 것.
존재하는 것.
살아있게 되는 것.
존재하게 되는 것.
탄생.
새로운 생명의 탄생.
탄생은 언제나 기쁘기만 한가
우리 나라.
빈민가.
또 하나의 탄생에 모두가 눈물짓는다.
아이도, 어른도.
그러나 한 명만은 울지 않는다.
한 여자가 울음 대신 침묵을 삼키고 있다.
그 얼굴은 왠지 익숙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런 정보는 정부에 올릴 가치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에도.
진군, 긴장된 얼굴.
앳된 얼굴에 흐르는 피.
전쟁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전차. 사람이 사용하는 것.
총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
창문가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청년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총탄.
무기. 사람이 사람을 파괴하는 것.
적어 둔다.
이런 건 정부가 좋아하니까.
사랑. 덧없음.
연인, 손찌검까지 해 가며 싸우고 있다.
얼마 전에 그들을 보았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다시 한 번 죽음.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 죽음은 두려움의 집약인가.
남자는 도망친다.
숨어 보지만 결국 잡히고 만다.
내가 보고 있으니.
정치. 폭동
-자유를 사수하라.
-예언 따윈 필요없다.
-미래는 신의 것이다.
경찰의 진압
어렴풋이 익숙한 얼굴이 보인 듯도 하다.
또다시 죽음
나다. 나 때문이다.
시위대 중 한 명이 경찰을 향해 엽총을 쏘았고, 둘러싸고 있던 경찰 역시 발포하였다.
피.
붉은 피.
생명의 용해액.
바닥을 흐르는 피는 적 병사의 것.
다시 전쟁.
도망치는 적 병사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보고 있으니.
포격. 날아오르는 몸의 파편.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고깃덩어리.
그것은 총탄에 죽어간 인간도 마찬가지.
죽음. 모든 것에 연결된 죽음.
삶.
빈민가 출신이라는 불리한 요건을 딛고 일어선 소녀.
사랑. 언젠가 보았던 장면.
소녀는 남자친구에게 소리지른다.
귀결. 방향은 죽음으로.
감옥. 합법적인 제액과 구속.
남자는 자원 입대서에 도장을 찍는다.
앳된 얼굴.
전쟁.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장면.
그의 여동생.
네 살.
죽음에 대한 관망.
모든 것의 귀결은
죽음
죽음
죽음
죽음. 가장 마음아픈 죽음.
친구의, 가족의 그것보다 가슴아픈 죽음.
붉은 피.
화려한 금빛 바닥장식 위에 흐르는 피.

가슴
어깨
얼굴
익숙한 것.
동시에 낯선 것.
스스로의 것.
가장 가깝지만 지각하기 어려운 것.
얼굴



전체.
나라고 지각될 수 있는 것.
정부측에 올려야 할 정보.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나의 것.
고통.
다시, 그리고 같이 찾아온 복통과 두통.



무언가가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듯한 끔찍한 느낌에 나는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분명히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두렵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수없이 예견한 나의 눈은 지금 나 하나의 가녀린 몸뚱이를 수십번씩 확인하듯 훑고 있다.
죽는 것은 싫다.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열 두시 삼십분.
한 시가 되면 정부의 사람이 예언을 받으러 올 것이다.
극심한 공포에 근육이 미친 듯 경련을 일으킨다.
이가 부딪친다.
듣기 싫은 소리. 그러나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에게 있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발소리만큼 듣기 싫은 소리가 또 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
나는 좀 더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심호흡을 계속하자, 몸의 떨림도 어느 정도는 잦아들었다.
몸도 스스로에게 닥친 위험을 느낀 것이리라.
많이 진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조금씩 아직도 조금씩 떨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나는 생각했다.
생각해 놓고 나니 우스웠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몸뚱이도 나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웃을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웃어 보려 했으나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 있는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나는 몸이 내 생각을 거부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십 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남은 이십분동안 나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도망쳐 버리는 것과 거짓 예지를 알리는 것.
물론 진짜 예언을 한 후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죽는 건 싫으니까.
'죽는다' 라는 생각에 온 몸이 다시 한 번 경련을 일으켰다.
두 방법 모두에 위험성은 따른다.
첫번째 방법을 택하면, 나는 정부에 대항한 죄로 수배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고도의 정보화 시대에, 아무데서나 발휘하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 능력 따위는 나의 도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한 채 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런 건 싫다.
나는 생각했다.
두 번째 방법 역시 위험하다.
예지자는 예지를 대중에 알릴 때 꼭 최고 성능의 거짓말 탐지기를 몸에 연결하도록 되어 있다.
거짓 예언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분명 거짓말 탐지기이지만, 또한 정부의 필터링 기계이기도 하다.
즉, 내가 정부의 뜻과 반대되는 예언을 하면, 비밀리에 거짓말 탐지기를 조작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초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내 능력을 믿으면서도 이성과 과학의 산물인 거짓말 탐지기의 말을 더 듣는다.
일단 거짓말 탐지기가 빨간 경광등을 켜기만 하면, 나는 변명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나는 정부에 의해 고문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경광등은 그들이 켠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는 버려지겠지. 다리를 잃은 사냥개처럼.
다리를 잃은 사냥개는,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처참히 죽어간다.
그런 것도 싫다.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곳은 도시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한적한 곳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시게는 벌써 열 두시 오십 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 거짓말 탐지기를 속일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극도의 긴장 때문인지 몸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시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뚜벅
뚜벅
조금씩 가까워지던 구둣발 소리는 예언실의 커다란 철문 앞에서 멈추었고, 나는 태연히 보이기 위해 내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활짝 열리고
둔탁한, 그리고 익숙한 통증이 나의 복부를 울려 왔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군용 소총을 들고 있는 아직 앳된 얼굴의 청년.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의 뒤로 사냥용 엽총을 든 피투성이의 사람이 들어 온다. 나는 그도 알고 있다.
익숙한 얼굴들.
나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 그것을 힘겹게 들어 청년을 겨누고 말했다.
빵.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단지 한 모금의 피거품 뿐이었다.
살아있기에는 너무나 심한 고통 가운데, 나는 울었다.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잘도 흐른다.
내 의지, 내 노력과는 상관 없이 잘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두렵다.
그리고 아프다.
얼음과도 같은 차가움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바닥과 부딪치는 고통 따윈 느껴지지도 않는다.
점점 엷어져 가는 내 의식 속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매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인간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그가 내게 입맞추었을 때,
나는 희열에 겨워 몸을 떨었다.



목표는 제거했다.
경찰의 총탄을 어깨에 맞은, 엽총을 쏘던 사나이는 출혈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렸다.
이제는 계획한 대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넘긴 채 나는 도망치면 된다.
목표가 이렇게 어린 애였을 줄은 몰랐다.
미리 알았더라도 나는 충분히 방아쇠를 당겼을 테지만.
기껏해야 열 여섯 내지 열 여덟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는 최후의 고통스런 경련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의 시체는 성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지금은 죽어버린, 고로 존재하지 않는 사나이가 머리며 복부며 가릴 것 없이 엽총으로 쏴댔으니까.
겨우 남아있는 아이의 눈에는 눈물로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맺혀 있다.
어쩌면 가장 불쌍한 건 이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머릿속 한 가운데에는 아이가 나에게 한 행동이 깊숙히 박혀 있다.
그 때 녀석은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에게 가면서도, 나는 쉽사리 아이의 행동을 머릿속에서 떨치지 못했다.
예언의 방을 나서면서, 나는 이마에 약간의 고통을 느끼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이것도 예언인가.
실없는 농담을 던져 보아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벌써 열 두시 오십 오 분인데 남자친구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가 버릴 처지의 내가 결코 아니다.
우리 집, 새로 태어날 내 조카를 위해서 그같은 돈 많고 단순한 남자가 필요하다.
물론 몇 달 뒤면 사실을 말하고 헤어지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가 꼭 필요하다.
콜록
콜록
무슨 일인지 갑자기 숨이 턱 막혀, 나는 심한 기침을 내뱉었다.
혹시 폐렴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하지만 기침은 곧 멎었다.
시계가 한 시를 막 가리키는 시점이었다.



펜을 놀리다가, 나는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힌다.
두렵다.
그러나 고통은 잠깐으로 그쳤다.
어쩐 일인지 시계는
한 시에 멎어 있다.



글을 읽다가, 나는 어딘가에 고통을 받았다.
지금이 몇 시지?
나는 생각했다.
다행히 한 시는 아니다.
그러나 두렵다.
너무나 두렵다.
왜냐하면 이 곳 어딘가에는
늘상 한 시에 멎어 있는 시계가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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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지쳐 있다.
푸르게 빛나는 소년의 살결만이 미세하게 반짝이며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빛은 그저 소년의 머리 위에서 가만히 그를 비추고 있지만, 소년의 살결은 계속 반짝인다.
칙칙한 파란 색의 레인코트에 자신의 몸을 맡긴 채, 소년은 떨고 있다.
아무도 그를 감싸주지 않는다.
소년은 외로움이나 두려움보다는 추위를 느낀다.
확실히, 그의 옷차림으로 버텨 내기에 이 겨울은 너무나 춥다.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이 겨울은.
이미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무릎을 애써 더욱 끌어당기며 소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주위를 한 번 휘저어 본다.
떨어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아 오히려 더 아름다운 눈송이가 그의 손에 하나 둘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 눈송이는 소년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 금새 녹아 사라져 버린다.
녹아 버린 눈송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소년은 고개를 휘휘 돌려 주변을 바라본다.
누군가 봐 주고 있으리라는 기대 따윈 애초에 포기한 듯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너른 평원, 소년은 눈 덮이 평원 한 가운데에 살며시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다.
하이얀 눈밭 위에 앉아 있는 너무나도 청명한 파란색 옷의 한 사람. 소년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너무나 아름답다.
흰 눈밭 속의 한 송이 꽃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소년은 생각한다.
그는 나를 안아 줄 수 있을 거야.
이것은 생각보다는 느낌, 직감에 더 가깝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그렇기 떄문에 오히려 더 확실할지 모른다고.
그런 생각들을 하자, 소년은 얼마간인가 흐르지 않던 눈물이 다시 흐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잔혹한 외로움에 지쳐, 슬픔으로는 더 이상 흐르지 않던 눈물이다.
앞 뒤 볼 것 없이, 소년은 환희의 눈물을 눈밭에 뿌리며 저 먼 곳에 피어 있는 꽃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년이 한 발짝을 내디디자 꽃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 소년에게는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채이다.
소년이 그를 향해 달리자, 그 사람은 잠시 주저하다가 도망치듯이 멀어진다.
자꾸만 도망치는 그 사람을 좇으며, 소년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을 흩날린다.
어째서 도망치는 거죠?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세요. 저를 보살펴 주세요. 저를 배려해 주세요. 저를 이해해 주세요.
소년은 외쳐 보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의 앞을 걷는 그 사람은 듣지 못한 듯 계속 걷는다.
너무 지쳐 포기하려다가 문득, 소년은 등을 보인 그 사람과 자신의 거리가 조금이나마 좁혀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아직 그 사람은 소년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매정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소년을 은근히 부르는 듯하기도 하다.
날 기다려주고 있다. 날 이해하려 하고 있다. 날 배려해 주고 있다.
소년은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기쁨을 억누르며 부르짖는다.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에 휩싸여, 소년은 홀린 듯 계속 달린다.
그리고 그 사람은 걷는다.
그 사람은 꽤나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지만, 소년은 오히려 웃는다.
난 알고 있어요. 나에게서 도망치는 듯 보이지만, 당신은 날 생각해 주고 있죠?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다다르면, 그래서 가쁜 숨으로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으면, 수고했다고 말하며 날 껴안아 줄 거잖아요.
소년은 중얼거리며 계속 달린다.
태어나 처음으로 맛보는 희열에 취해, 터질 듯한 가슴을 끝어안은 채이다.
무릎까지 잠기는 눈밭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소년에겐 분명히 힘든 일이지만, 소년은 넘어져도 이를 악물며 다시 일어선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소년이 눈 속에 감춰진 돌부리에 치여 넘어졌다 일어서서 다시 달리면, 그 사람은 제 자리에 멈춰 서서 소년을 기다렸다.
몇 번을 쓰러지고 몇 번을 구르는 사이 소년과 그 사람과의 거리는 두 발짝 정도까지 좁혀졌다.
넘어지고 굴러서 레인코트는 다 찢어졌고 몸 곳곳에 수많은 생채기도 생겼지만 소년은 그 사람에게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기뻐 웃는다.
팔을 쭉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소년이 웃으며 팔을 뻗자 그 사람은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다.
소년이 놀란 마음에 멈춰 서 있는 사이, 그 사람은 놀라운 속도로 달려 소년에게서 한참이나 멀어졌다.
어째서...
소년의 눈에 촉촉히 물기가 맺힌다.
울고 있는 소년을 뒤에 두고, 그 사람은 저만치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놀린 건가요. 내 마음을 가지고 장난친 건가요. 당신 역시. 다른 모두처럼.
소년은 읊조리며 슬픈 눈으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저 슬플 뿐, 원망하거나 화내진 못한다.
오히려 버려진 것이 더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소년은 조금씩 잦아드는 눈물을 훔치며 그 사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아아...당신이라면...당신이라면 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느꼈는데...어째서..어째서 난....
누구에 대한 원망인지 알 수 없는 소년의 흐느낌을 들으며, 그 사람은 가만히 서 있다.
또다시 소년을 기다리듯이.
흐르던 눈물은 또다시 멎었다.
그리고 소년은 가녀린 팔다리를 움직여 다시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하고도 한창이나 서 있던 그 사람은 소년과 자신의 거리가 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에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따라, 소년은 깊은 구릉을 건넌다.
헉헉거리며 간신히 구릉에서 빠져나온 소년은 그 사람이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 쉰다.
그러나 그 한숨은 조금의 어둠도 실리지 않은, 즐거운 한숨이다.
그 사람이 기다려 주고 있으니까. 힘들지 않아.
소년은 생각한다.
그 사람을 좇은 지 몇 시간 째. 지금 그 사람은 소년에게서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걷고 있다.
그 자신 역시, 처음과는 다른 경쾌한 걸음으로.
두 사람은 마치 춤을 추듯 경쾌한 걸음으로 언덕을 오른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 그 사람을 붙잡지 못하고 있다.
손을 뻗으면 또 도망쳐버릴 건가요?
이제는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들릴 거리임에도, 그 사람은 대꾸하지 않는다.
응? 또 도망쳐 버릴 거냐구요?
그 사람은 대답이 없다.
소년은 겁이 났다. 대답하지 않는 것은 또 도망치겠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대답해 줘요!
소년의 외침이 눈 덮인 어둠 속으로 퍼져나감과 동시에 그 사람은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년이 놀라고 있는 사이, 그 사람은 쏜살같이 달려서 언덕의 정상을 넘어 버렸다.
그가 언덕 너머로 내려가 보이지 않게 되자, 소년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다시 버려지고 싶지는 않아.
사실 그는 처음부터 그저 버려진 상태였다. 그 사람을 따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은 소년에게 등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봐 주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소년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소년은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의 놀라운 속도로 언덕의 정상을 향해 달린다.
필생의 힘을 받고 있는 그의 팔다리는 너무나 가늘어서, 꼭 부러질 것만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상에 다다른 소년은 언덕 한 가운데의 분지를 내려다보고는 너무나도 놀란 마음에 주저앉고 만다.
녹색.
온통 녹색 뿐인 분지.
흰 눈으로 뒤덮인 언덕 한 중간에 패여 있는 분지는 주위 환경 따위는 아랑곳 않는 듯 너무나 푸르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소년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추스리며 조심스럽게 분지로 내려선다.
얼어붙은 발바닥에 촉촉하게 휘감기는 푸른 잔디의 싱그러운 촉감도 그에게는 낯설디 낯선 것일 뿐이다.
분지 안에 들어선 소년은 자신이 더 이상 껄도 있지 않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린다.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따스함을 느낀다.
몸이 따뜻한 기운에 감싸여 있으니, 두려움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멋대로 찢어져 거치적거리는 레인코트를 벗어놓고, 소년은 분지 한 가운데에 있는 숲으로 들어선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촉촉한 물기가 한껏 뿜어져 나오는, 살아있는 나무의 냄새가 소년을 기분좋게 한다.
자신의 뺨을 스치는 나뭇잎의 부드러움에 취해 있던 소년은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간다.
그는 가만히 서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소년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그 사람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려 소년을 향해 선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소년은 깜짝 놀랐다.
안녕.
그 사람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소년은 무의식적인 인사로 답했다.
그리고 둘은 말이 없다.
한참 뒤에,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소년 쪽이다.
너...너라면 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너라면 날 생각해 줄 거라고...
그 사람은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 사람은 팔을 들어 소년을 껴안는다.
따뜻하다.
라고 소년은 느꼈다.
그래. 네가 맞아. 네가 맞았어. 나는 널 이해해 줄 수도, 아껴줄 수도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다리에 힘이 풀리는 따스함. 그리고 기쁨.
그래.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이해해 주고 있다. 내가 찾아다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나를 아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니까.
머리가 몽롱해지는 따스함 속에서, 소년은 생각한다.
잠시동안 멍한 얼굴로 그 사람의 포옹을 받고만 있던 소년은 자신의 뺨이 어느 새 투명한 눈물로 젖어들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를 껴안고 있는 그 사람, 소년 역시 울고 있다.
소년에게 꽉 끌어안긴 채.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눈물이 따스하다고 느끼며, 팔을 들어 소년을 끌어안는다.
소년은 울고 있다.
그리고 소년은 울고 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 똑같은 이름, 똑같이 깨어진 마음을 가진 소년을 끌어안고 소년은 너무나도 따뜻하게 울고 있다.
그 사람은 소년, 그 자신이었다.
소년은 그 사람, 바로 그였다.
그 사람은 소년을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네가 날 이해하듯이. 나도 널 이해할 수 있어.
소년은 중얼거린다.
그래.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에 답해서 소년은 중얼거렸다.
눈물은 어느새 멎고, 소년들은 잠시동안 미소를 짓는다.
서로 껴안은 채로 소년들은 말한다.
사랑해. 너만을.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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