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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삼인삼색

2010.11.11 16:51

윤주[尹主] 조회 수:406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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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우리가 전혀 낯선 세계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조선 시대 한복판에 떨어뜨리어지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 박물관에서나 보았을 법한 답답한 옷을 입은 사람들, 신분이며 자질구레한 허례허식들, 요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낡은 생각들, 신앙들. 그런 것들을 직접 대하면 우리는 곧장 참을 수 없어할 것이다. 반면 그 시대 사람들은 정작 우리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 생각엔 당연한 사실들을 우리는 자꾸 꼬치꼬치 캐묻고 말이 안 된다고 떠들어댈 테니까. 바로 마녀가 그랬다. 자신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깊이 잠드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자 유일한 행동이던 세계에서 억지로 깨워져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낯선 세계에 끌려 들어왔다. 당연히 마녀가 보기에 이 세상은 답답하고 끔찍하게 지루할 뿐이었다.
 마녀에게 이 모든 것들보다 끔찍하게 느껴진 건 따로 있었다. 억지로 눈뜨고 이 세상으로 끌려온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이상을 깨달았다. 사실을 깨달은 마녀는 지독한 절망감 때문에 절규하며 거의 혼절할 뻔했다. 안식에서 깨어난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잠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 그녀가 곧, 자신을 깨우고 이 세계에 유폐시킨 장본인을 죽이고 싶어 하게 된 건 당연한 일 아닐까?


 


  *  *  *


 


 "저기, 아가씨. 괜찮으면 옛날 얘기 좀 해줘요."



 국밥 집에 들어와 주문을 해 놓고, 진연은 대뜸 정령에게 과거 얘기를 물었다. 의외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정령 아가씨에게 진연은 대충 핑계를 둘러대었다.



 "그냥, 이제 슬슬 들어도 되지 않나 싶어서요. 저 이제껏 아가씨 얘기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잖아요? 어땠어요, 어릴 적 아가씬? 분명 귀여웠을 거야, 틀림없이."
 "글쎄, 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걸요."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정령 아가씨 얼굴에 얕은 주름이 한두 가닥 패였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은 전혀 없어요. 워낙 이런저런 일들 많이 겪었고, 어떤 일은 지금도 눈 감으면 떠오르는 것들이지만 어릴 때 제 모습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럴 수도 있죠. 솔직히 저도 어떨 때는 가물가물해요. 어릴 때 동생 얼굴이 어땠더라, 혹은 초등학교 때 동창 별명이 뭐였더라, 이런 것들이요."



 진연은 생글생글 웃었지만 정령은 엷은 미소만 띄울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진연이 화제를 조금 돌려 물었다.



 "그럼 생각나는 중에 가장 오래된 기억은 뭐에요?"
 "그건 아마도……."



 정령이 인상을 약간 더 일그러뜨렸다. 그때 아주머니가 두 사람이 주문한 국밥을 들고 왔기 때문에 이야기가 잠시 끊어졌다.
 아주머니가 가고, 진연이 정령에게 공기 밥을 건네곤 뚜껑을 열다 살짝 손을 데어 귓불을 잡았을 때 정령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일전에 얘기한 적 있던가요? 저는 싸움에 져서 죽은 기사였다고."



 진연은 아, 하고 단발마의 신음을 내었다.



 "죄송해요, 정말. 그런 기억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닌데."
 "아녜요. 진연 씨 말이 맞아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정령의 얼굴은 진연이 보기에도 힘이 없어 보였다. 진연은 안쓰러워했지만 잠자코 정령이 말하는 양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풀기에 앞서 정령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슬슬 얘기해야 될 거 같아서요, 진연 씨에게도."



 그렇다면야, 진연은 일단 정령이 하는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옛 신들의 전쟁 때 일이에요. 그때 전, 저와 제 사랑하는 친구들은 모두 이 전쟁을 위해 준비된 신의 전사들이었죠."



 발키리라고도 불리는 고대 전사들, 오로지 최후의 전쟁을 위해 만들어져 다듬어진 무리 가운데 정령 아가씨도 있었다. 그녀는 신들의 척후대로서 그 마지막 전쟁에 나섰다고 했다. 그 때 그녀가 본 건, 그녀로서는 감히 어쩌지도 못할 무지막지한 폭력이었다.



 "눈에 전부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자들, 한 번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수십 기를 떨쳐 버릴 수 있는 무리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았을 때, 부끄럽지만 두려움을 느꼈어요.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자매들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흩어지고 짓뭉개지는 걸 그저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일방적인 전쟁터에 비로소 신들이 도착했을 때, 그건 우리들에게 힘이 되었다기보다 도리어 더 큰 지옥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거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어요. 신들과 거인들 사이에 끼여서, 우리는 누구 공격을 받는지도 모르고 처참하게 죽어갔어요.
 그런 신들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달려들 필요는 없었어. 그 자리서 제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다만 내 형제자매를 어떻게든 그 틈바구니서 구해내는 것뿐."



 억눌러왔던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일까. 정령이 이야기 도중 말투를 조금 바꾸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었을 뿐, 정령은 금세 다시 본래 말투를 되찾았다. 이야기를 듣던 진연은 눈치 채지도 못했을 만큼.



 "어떻게 추락하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마술사 왕이 그 자리에 있었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팍을 꿰뚫고 지나갔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지.
 명예로운 전사라고? 그건 이야기책 속에서나 하는 말이죠. 그건 그냥 개싸움이었고, 전 거기서 져서 완전히 죽지도, 그렇다고 살지도 못하고 추락한 패장에 불과한걸요."



 그러니까 이 아가씬 그 날 한 번 죽었단 얘기지. 정령을 보면서 진연은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얘기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정령의 옛날 얘기는 간혹 단편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 주어 듣긴 했지만 사실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지금도 마음 한 구석으론 사실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길 망설이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진연도 인정할 수 있었다. 이야기하는 정령의 말씨나 태도가 진정 어린 것이란 사실에 대해선.
 그 사이 정령은 남은 이야기를 이어 해나갔다. 사실 오랜 옛 싸움에서 진 건 그녀가 겪은 첫 굴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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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길지 않는데 번갈아 진행하다 보니 한번에 많이 올리질 못하겠네요;; 매끈하게 장면이 전환되지를 못해서...


 


 대신 이번엔 좀 빨리빨리 올려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