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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Hotel Epitar

2010.11.20 02:19

윤주[尹主] 조회 수:1138 추천:2

extra_vars1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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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떠벌리진 않겠다. 어차피 필설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조금만 털어놓자면, 그녀는 정말 최고였다! 미안한 얘기지만, 아니 사실 이제는 미안한 얘기도 아니지. 그 망할 마누라보다 좋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상냥했고, 성실했고, 배려심도 깊었다. 다시 말하는 거지만, 내가 생각하던 이상형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외모, 성격, 태도며 습관까지도.



 하룻밤을 진탕 그녀와 뒹굴고 즐기는 와중에, 무슨 생각에선지 이런 질문을 던진 기억이 난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현실에선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체험을 실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서, 자꾸 이게 진짜인지 알고 싶었던 걸까?



 "근데 당신들, 왜 지구까지 왔지? 이런 환상을 교류하는 거라면, 굳이 지구까지 올 필요 있을까?"



 질문을 받은 여자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우리 문명이 번영기를 맞은 지 벌써 수백 년이 흘렀어요. 지구상 어떤 문명도 그렇게 번영해본 적은 없을 거예요. 우리에게도 처음 있는 경험이었거든요.
 다만 그렇게 오랜 기간 밖으로 나갈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우리끼리만 갇혀서 지내온 결과, 어느 순간부터 점점 성장이 정체되어가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꾸는 꿈은 갈수록 단조로워졌죠. 이 사람의 꿈과 저 사람의 꿈이 거의 비슷하고, 이 사람의 어제 꿈과 오늘 꿈도 별 차이가 없어졌죠. 무리도 아니에요. 수백 년간 우리밖에 모르고 살았으니까, 이렇다 할 자극 없이 지내다보니 더 이상 새롭다할 게 없어진 거죠. 게다가 매일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공유하기까지 하잖아요. 날이 가면 갈수록 서로가 더 비슷해질 수밖에요.
 그래서 지구에 온 거랍니다. 아직 단 한 번도 우리가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라면, 그곳 사람들의 꿈과 환상은 분명 우리와 완전히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죠. 지구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보고에요.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죠."



 그녀 말을 들으니 어쩐지 이 짓을 하고 그 비싼 돈을 받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다시 한 번 그녀 품에 파고들었다. 누군가 우리 하는 그 짓을 다 보고 있단 것, 뿐만 아니라 그 짓 하면서 우리가 하는 생각들까지 다 읽고 있단 게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뭐 별건가. 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걸.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서야 나는 눈을 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이상형 그녀부터 찾았다. 바로 곁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여자를 보고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었어. 믿기지 않지만, 이 모든 게 다 현실인 거다. 돈, 쾌락, 사랑.



 조금 씻고 싶어서 욕실로 들어갔다. 성인 네 사람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거품 목욕기가 거기 있었다. 적당히 뜨끈한 온수를 받아놓고 안에 몸을 뉘었다. 몸에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엔 최고의 대접을 받으실 거예요. 전날 밤 그녀가 말한 것이다. 그녀 말대로, 나는 생전 해보지 못한 온갖 호강을 누리고 있다. 이 거품 욕조는 그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여기 누운 채로 나는, 단지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 눈앞에 보이는 TV를 통해 전국 수백 채널 케이블 방송을 완전 무료로 실컷 관람할 수 있다. 오른편 벽을 두드리면, 수천 달러짜리 캐비아건, 빈티지 와인이건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마치 오성 호텔 스위트룸을 본뜬 듯 보이는 이 방에서, 옷장엔 아르마니니 뭐니 하는 옷들이 정장, 예복, 평상복 빠짐없이 종류별로 걸려있는데다, 이 '에피타르 호텔' 밖을 나갈 때에도 TV로나 봤을 법한 리무진 한 대를 내 전속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니 누군들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겠나. 소문은 사실이었다. 어찌나 멋진 곳이던지 들어가는 사람은 있어도,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게.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한인가? 팔을 보니 양쪽 모두 소름이 쫙 돋아 있었다.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왜? 방금 전 뭔가 걸리는 거라도 떠올렸던 건가? 어디 보자, 완전 무료 케이블 TV, 호사스런 음식, 기막힌 옷들, 리무진. 그리고 그렇지. 어찌나 멋진 곳이던지…….'들어가는 사람은 있어도, 나오는 사람은 없다더라.'



 또다시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기에, 나는 서둘러 욕조에서 나와 대충 몸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침대엔 아무도 없었다. 애당초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기까지 했다. 욕조에 앉아 있던 시간이 한 30여분 가량 되려나?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펼쳐진 새하얀 시트가 이상하게 눈에 거슬렸다.



 옷을 입으면서 나는 상황을 정리해봤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것들은 빠짐없이 짚어 보았다. 누가 아무 이용가치 없는 백수에게 무한정 돈을 쏟겠는가 하는 문제는 일단 집어 치우자. 제길, 그런 건 이제 문제라고 할 것도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이해 안 되는 문제도 있지 않던가. 이를테면, 왜 하필 그녀냐, 는 것과 같이.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지구상에, 하필 외계인 호텔에 온 그 날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안내원이 완전히 자기 이상형이더라 하는 일은.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될까? 벼락 맞을 확률? 로또 당첨될 확률? 애당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있기나 한 걸까?



 언제부터냐! 빈 방에서, 나는 대뜸 천장을 향해 호령했다. 언제부터 나를 감시한 거지? 언제부터 내 은밀한 환상을 엿보고 있던 거지? 그 년은 이 방에 들어서면서부터라고 말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치면 도무지 설명이 안 되잖아.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 방 밖에서 내가 여자 생각을 하고 있단 걸 알았냔 말이다!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한시 빨리 이 호텔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바지를 입고, 와이셔츠를 입고, 재킷은 대충 걸친 채 나는 방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이상한 일이다. 지난 밤 여자와 왔을 때는 그렇게나 쉽게 찾아왔던 방인데, 돌아서 나가려니 건물 구조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자와 걸어왔던 방향이 분명 이 쪽인데, 하고 뛰어나가면 한참을 달려도 도무지 밖으로 향한 통로나 계단이 보이질 않았다. 또 다른 방향인가, 싶어 역시 한참을 달려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십 수 분이 흘렀다. 나는 복도 한가운데 서서 숨을 고르며, 복도 양쪽 끝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내내 한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었는데도, 나는 출구는커녕 복도 끝조차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건물이 엄청나게 넓은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납득 가능한 일이겠지. 그럼 남은 거리가 반대쪽 끝과의 거리와 마찬가지처럼 보이는 것도 내 착각인 건가? 벌써 십 수 분 째 같은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는 건데도?



 "여긴 손님을 받기만 하는 곳이랍니다."



 환청처럼 귓속에 낯선 목소리가 윙윙대기 시작했다. 그 여자 목소리다. 물론 이어폰 같은 건 귀에 꽂지 않은 상태다.



 여자 목소리 뒤로, 배경음처럼 재잘대는 소리가 깔려 있었다. 여자 목소리보다 그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신경 쓰여 자세히 귀를 기울였다. '진정해.'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정해.'



 "당신은 언제든지 원하면 호텔을 나갈 수는 있어요. 저 리무진을 타고요."
 "근데 왜 망할 놈의 출구는 보이지 않느냐고!"



 지난밤과 달리 여자 목소리는 사무적이었고 차가웠다. 그 이질감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출구는 어디 있냐고! 여자는 답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건, 당신이 여길 아주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결코 여길 떠날 수는 없어요."



 무슨 뜻이냐고 묻기 전에 극심한 절망감이 피로처럼 몰려들어왔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주위를 살폈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나 홀로 복도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이상도 하지. 왜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을까?
 이런 얘기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난다. 나는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현실이 아니고 컴퓨터가 만들어준 가상이었다는 얘기. 가상공간 속에서 나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이게 현실인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이것도 꽤 옛날 영화인데. 아마 '수열'하고 비슷한 제목이었던. 거기서처럼, 나도 사실은 머리에 전극이 잔뜩 꽂아진 채 누워 있을 뿐인데 지금 이게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아니다. 더 어울리는 얘기가 하나 있었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혹은 그 윗대 할아버지가 불렀을 지독히 낡은 노래 한 곡이. 호텔이 나오고, 고기를 썰고, 와인을 시키고…….그래, 그래. '언제든지 원하면 호텔을 나갈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떠날 순 없지. 노래 가사와 음을 떠듬떠듬 떠올려냈지만 시작하는 부분만큼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고민하면 알 것도 같은데, 조금만 더…….


 


 그리곤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이 풀린 몸이 털썩 쓰러지는 느낌이 미약하게 들었을 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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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이 뒤를 좀 더 넣어볼까 했는데, 그러면 또 너무 뻔한 할리우드 영화가 될 거 같아서;;


 


 쓰게 된 계기는 <호텔 캘리포니아>입니다. 오랜만에 들었더니 문득 따라쓰고 싶어졌어요...암튼, 다음엔 또 다른 이야기로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