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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삼인삼색

2010.11.12 21:17

윤주[尹主] 조회 수:411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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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는 이제 조금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마녀는 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던 차였다.
 평소엔 들여다보지도 않는 부엌에 몸을 들이밀어 보았다. 부엌은 항상 정령의 공간이었고, 때때로 진연이 도와주러 들락거리긴 했지만 정작 이 집에 함께 사는 마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었다. 부엌 한쪽 벽을 따라 조리대며 수납장 따위가 줄지어 있었고, 그 끝에 가스레인지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맞은편 벽엔 아궁이 구멍 두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엔 심지어 커다란 무쇠 솥이 걸려 있기까지 했다. 솥 가까이에 손등을 대어 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마녀는 커다란 솥뚜껑을 살짝 젖혀 안을 보았다.



 "어, 고구마다."



 먹을 것을 발견하자 마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솥 안에서 꺼냈다. 열댓 게 되어 보이는 밤고구마들은 전부 이미 쪄진 채였다. 마녀는 고구마 껍질을 대충 벗겨서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자신을 위해 이 같은 준비를 해줄만한 사람을 떠올렸다. 후보가 하나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 낯선 세계에서 마녀에게 유일한 아군은 오직 그녀의 반려, 정령 아가씨뿐이었으니까.
 모두가 마녀를 비난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불순물이었다. 그녀 자신은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마녀야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따지고 들었다. 저 '아이슬란드 신부'에 대해서도 그렇고.



 "아, 목 메일 거 같아."



 마실 것을 찾아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녀는 포기하고 개수대로 다가가 수돗물을 틀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 '신부'란 녀석만 생각하면 마냥 답답하기만 하다. 온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이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마저 저주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마주치는 것마다 부수고, 태우고, 엉망으로 만드는 '신부'의 소식을 어쩌다 들으면 마녀는 애써 모른 척 넘기면서도 속으론 왜인지 기분이 상했다.
 마녀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신부'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마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겨우 그런 이유로 자신을 저 말괄량이 '신부'의 어머니로 부르는 건 못마땅하기만 했다. 난 아직 애 딸린 여자 되기 싫다고! 주변에서 자신을 신부의 어머니로 부를 때면, 마녀는 반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이 마녀의 삶이다. 편안히 잠들지도 못하고 영원히 깨어 있으면서,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여기 낯선 세계에 얽매여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 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성내고 울부짖으며 야단법석을 부렸을지 모른다.
 마녀는 하지만, 그저 이 모든 게 마냥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다.


 


  *  *  *


 


 "아가씨, 그럼 그 얘는 언제 만난 거예요?"



 다시 자리를 옮겨 한 액세서리점에 들어온 뒤, 정령이 구경하는 양을 곁에서 지켜보던 진연이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얘요?"
 "있잖아요. 집 지키고 있는 걔."



 진연이 말하는 게 마녀라는 걸 알고선 정령은 배시시 웃었다.



 "신랑이요,"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까진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때까지 진연은 잠자코 정령 곁에 서서, 대체 이 아가씨가 언제나 말을 할지 기다려야 했다.



 "진연 씨, 전 신랑에게 한 번 구원받은 몸이에요."
 "구원받았다고요?"



 정령이 쓴 표현은 진연에게 어색하게 들렸다. 구원이라니. 진연에겐 너무나 낯설고 또 고색창연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심장을 잃고 떠도는 저를 신랑이 발견하고 거두어 주었지요. 신랑은 제가 다시 이전처럼 심장을 되찾을 수 있게 힘써 줬어요. 그림자 속에 사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받아 제 심장을 절반쯤 나누어 주기도 했었구요. 나중에 제 심장을 되찾은 후에 돌려받긴 했지만요."
 "그 마녀가 그랬다고요? 믿겨지지 않는걸요."



 진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그 마녀가, 누군가를 위해 제 심장까지 나누어 줄 정도로 헌신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마녀는 정말 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걸까? 아니면, 혹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진연이 의심에 가득 찬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는 곁에서, 마녀를 두둔하는 정령은 지나치게 순진해 보였다.



 "지금 제 생명은 신랑이 준 거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생각한 거예요.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지만, 항상 곁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요.
 한편으로 이건 속죄이기도 해요. 신들을 실망시키고, 숲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 그거 아세요? 신랑을 위해 뭔가를 할 때면 꼭, 제 지저분한 몸이 조금씩 깨끗해지는 것 같아요. 짊어지고 있던 죄가 조금씩 덜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말을 마치고 나서 정령은, 마치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인가를 더 덧붙였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이와."
 "……."



 정령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도 진연은 한참 동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사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정령 아가씨의 말, 그리고 얘기를 끝마친 후, 그녀가 지은 야릇한 미소에 소름이 쫙 끼쳤던 것이다.
 비로소 진연은 마녀와 정령이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 생각엔, 두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사랑 비슷한 것조차 하고 있지 않아 보였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했지. 과거에 지나치게 억눌린 정령과, 지나치게 체념한 나머지 세상 모든 게 지루하기만 할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마녀 사이에 사랑이 다 무어람! 스스로를 혐오한 나머지 이 순진한 정령 아가씨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상대인 마녀에게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고 있을 뿐이다. 마녀, 그저 재미에나 안달하는 그딴 녀석이 정령의 헌신에 감동했을 리는 없었다. 틀림없이 자기는 별 반응도 해주지 않는데 끈질기게 달라붙어 귀찮을 정도로 자신을 챙겨주는 정령이 신기해 보인 거겠지.
 서로 상처내지 않는 사랑은 위태로울 뿐이라고 마녀는 말한다. 진연 생각에도 마녀와 정령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흥미를 잃으면 마녀는 언제든지 정령 아가씨를 떠날 테니까. 오로지 마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만 아는 정령이 마녀를 떠나겠다고 생각할 리는 없지 않는가. 결국 끝에 가서 불쌍해지는 건 순진한 정령뿐이다. 물론 아무리 봐도 둘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진연은 진심으로 둘의 관계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착한 정령 아가씨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다른 데 가요."



 갑자기 진연이 정령의 소매를 붙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정령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연을 바라보았다.



 "이런 거 말고 더 좋은 걸로 사요. 기왕 줄 선물인데, 그렇죠?"



 대략적인 선물은 진연이 미리 머릿속에 정해 두고 있었다. 선물을 받은 마녀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진연은 몹시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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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로 끝장 내버릴 예정;;


 저녁 쯤에 마지막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