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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1 - 도래(到來)

2010.08.19 06:58

비벗 조회 수:355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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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휴식시간동안 다른 동물의 기척이 전혀 없던 게 좋은 징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출발을 알린다. 내가 선두에, 데니스를 필
두로 학자들이 가운데 서고 후위에 일드가 섰다. 방금 전까지 우스갯소리를 나
누며 떠들고 있었지만 학자들도 완연히 긴장한 눈치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는 모험가다.


 


굴은 밖에서 본 대로 퍽 좁았다. 그 점은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적어도
포위당하거나, 돌파당할 염려는 없다- 나 혼자서도 정면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발에 닿는 암반 역시 단단해서, 땅에 숨는 마물들도 이런 암반
속에서 튀어나오진 못할 것이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조금씩 발을 옮긴다. 구불구불한 굴은 미세하지만 분
명 오르막길이었다. 지상으로 연결된다면 좋으련만…….


 


굴은 여전히 좁다. 마치 사람이 파 낸 것 마냥 막히는 일도, 넓은 공동이 나
오는 일도 없이 그저 그런 바위길이 이어졌다.


 


하나 좋은 징조라면, 달빛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굴이 한 번씩
꺾일 때마다 빛은 조금 더 밝아졌고, 아홉 번째 굽이를 돌아 나온 직후엔 이제
발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걷는 데 무리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내가 그 거대한 위화감을 느낀 것은.


 


말없이 걸음을 멈춘다. 두어 걸음쯤 거리를 두고 따르던 데니스도 멈춰서야
했다.


 


“루포리……? 무슨 일이야?”


 


“잠시만요. 어이, 일드. 다들 무사하시냐?”


 


방금 한 굽이를 돌아 왔기에 내게는 뒤쪽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이내 일드
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예, 다 무사하신데요?”


 


난 데니스를 보았다.


 


“닥터 컨프턴,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그는 약간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아홉 굽이를 돌며 굴을 걸었습니다. 혹시, 한 번이라도 빛이 드는
구멍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잠깐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도 말을 잃었다.


 


“어…… 잠깐만, 이상한데, 이건, 그럴 순 없잖아? 아니, 난 분명히 하나도
못 봤지만 분명히 어딘가 빛이 들어왔기에 이렇게…… 밝은 게 아니겠어
……?”


 


말을 하며 내 뒤를 보던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보던 것을 그 역시 보
았을 것이다. 그는 굴의 다음 굽이를 보고 있다.


 


열 길(10m)쯤 떨어진 곳에서 굴은 다시 꺾인다. 그리고 그 굽이로 얼핏 보
이는 다음 통로는, 달빛이 직접 닿는 지상인 것처럼 밝았다. 그러나 그 암반으
로 둘러싸인 둥그런 통로가 지상일 리는 없다. 그 곳은 ‘밝은 굴’이었다.


 


거의 직각에 가깝게 꺾이는 아홉 개의 굽이 길을 반사만으로 밝히는 이 빛.
이 빛의 원천이, 아마도 저 굽이 뒤나, 그 다음 굽이 뒤에 있을 것이다.


 


그 원천이 무엇일까, 따위 불가지(不可知)의 고민을 접어둔 채 나는 다시 걸
음을 옮겼다. 그렇다. 그게 무엇이건 관계없다. 빛이 어디서 나오건, 우리가 처
한 상황이 더 안전해지거나 더 위험해지는 일은 없다.


 


애초에 우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점점 밝아지는 동굴에 놀라는 아가씨들의 탄성을 뒤로하고 난 계속 걸었다.


 


무엇이 있나? 이 뒤엔 무엇이 있나?


 


이미 굴이라고 볼 수 없는 밝은 빛 속에서 열두 번째 굽이를 돌았을 때, 나
는 그것을 마주했다.


 


빛으로 가득한 공동이었다. 거기엔 단 한 줌의 그림자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충만한 빛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눈은 부시지 않다. 세상을 은은히
비추는 달빛처럼, 그 빛은 공동을 지배하지 않고 그저 이 공간에 기대어 있었
다. 그리고 빛이 가장 많이 기대어 있는 공동의 정 중앙에 내 눈은 못 박혔다.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새하얀 여성이 그 곳에 서 있었다.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무어라 설명해야 옳을까?


 


빛으로 가득한 하얀 공동에서, 은발과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그녀는 이 세상
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가죽 부츠가 분명 땅에 닿아 있었으나, 그녀는 땅
의 중력에 조금도 구속되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보면 ‘떠’ 있었다!


 


현실감각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꼭 감은 채 떠
있는 여성……. 냉정하게 보면 분명 여성 치고도 작은 키임에 틀림없으나, 그
녀가 나보다 키가 작다고 누가 말한다면 못 믿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결코 자
그마한 요정이 아니니까. 그녀는 이 공동 모든 곳에 있었으며, 빛이었으며, 모
든 것을 내려다보는 기사였다.


 


단언컨대, 그녀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하며 공동 안에 한 발을 내딛었다.


 


터벅.


 


내 발소리에 내가 놀란다.


 


그래서였을까- 나처럼 내 발소리에 놀란 것 마냥- 공동의 주인이던 그 밝고
도 은은한 빛이, 그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갑작스런 어둠은 내 시야를 한 순간 제한했다. 그러나 이내 완전한 어둠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공동은 뚫린 천장으로 달빛을 듬뿍 받고 있었다.


 


시야는 금세 회복된다. 그리고 은빛의 기사가 움직였다.


 


한 순간,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 침입에 격분
해 다가오는 거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했다.


 


다음 순간, 나는 몸을 튕겼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던 것이 아니었다.


 


“어, 어어, 루포리?!”


 


뒤에서 데니스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작정 몸을 날려 하얀 기사
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거, 뒤에서 보면 이상한 그림이겠지?


 


진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쓰러지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분명히 그랬
다. 그랬기에, 난 몸을 날려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도중까지
내 생각대로 스르르 무너지던 기사는, 한 순간 갑자기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세웠다. 그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그녀를 돕겠다는 순수한 사명감으로 마구
달리던 나는, 갑자기 자세를 회복한 그녀의 하얀 이마에 턱을 박기 일보직전이
되어 있었다.


 


간신히 발은 멈췄지만, 관성으로 몸이 넘어가려 했다. 난 팔을 펼치고 가슴
으로 그녀를 껴안아, 충돌로 그녀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했다. 바람직한 행동이
었다.


 


…… 근데, 논리적으로는 참 합당한 일인데도, 이거 이상한 그림이겠지?


 


“루포리, 이게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아, 답할 말이 없습니다, 데니스.


 


이제라도 몸을 빼내고 데니스와 이 기사에게 해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물
론 든다. 그러나 나는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은빛의 플레이트 메일로 둘러싸
인 가는 팔이, 내가 그러고 있듯이, 다정한 연인을 안듯 나를 껴안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강하게, 꼬옥!


 


왜? 대체 왜?!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위기감에 덜덜 떨고 있을 때, 품속에서 간지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녀가
내 가슴에 닿은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포리, 그것이 너의 이름이더냐?”


 


달의 목소리……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는 모호하다. 맑은 목소리라면 구슬
같다고, 밝은 목소리라면 물소리 같다고 생각하련만, 난 왜 맑고도 밝은 그녀
의 목소리가 달빛처럼 느껴지는 걸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단 이 손 좀…… 어흑!”


 


그녀가 팔을 더 세게 조여, 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를 몰라 벌벌 떠는 내게 그녀는, 왠지, 아마 아니겠지만,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더 이렇게 있자꾸나. 네 냄새가 맡고 싶다.”


 


너무나 당황스런 답변에, 순간 머리가 비어버렸다.


 


잠시 후, 내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 거지, 하고 생각한 나는, 그러나 그 순간
내 냄새가 아니라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은발에서는
과일 향기가 났다.


 


발소리가 난다. 학자들이 공동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학자들의 경악성
이 들린다. 페넬로페는 아가씨들을 대표해 데니스에게 묻고 있다.


 


“데, 데니스, 지금 이게……?”


 


“아아,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아 주라. 빛 속에 저 여성분이 있었는데, 왜인
지 루포리랑 서로 껴안고 있어. 그저 그것뿐이야.”


 


“그것뿐일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황당한 상황에 데니스 역시 넋이 나간 듯했다.


 


그들의 토론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한다.


 


달의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투명했으며, 허망할 정도로 깊었다. 어느 곳에나
닿지만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목소리다. 그 점이, 달을 닮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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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등장했습니다.


-음... 그거 말곤 내용이 없군요.


-지난번에 길었으니, 이번엔 짧습니다. 완급 조절이죠,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