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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색연필

2010.08.16 12:45

웅담(熊膽) 조회 수:479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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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젤 앞에 선다.


오늘도 그림을 그리려고 연필을 쥔다.


연필은, 검은색이다.


이젤에 스케치북이 올라와 얌전히 앉아있다. 그리고 연필을 쥐었다. 연필은 검은색이다. 검은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스케치북은 이젤을 잡아먹었다. 스케치북은 이젤이 지루했던지 앞으로 툭 떨어진다. 바람이 불었던가. 뚜벅뚜벅 걸어가 창문을 닫는다. 드르륵, 탁!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 그림은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림이다.


검은색 그림이다.


연필을 놓았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오늘의 그림은 그림이 되었던 것 같다.


 


하나의 장난그림을 그리고 나왔더니 배가 고파온다. 오늘의 그림은 대실패인가. 아니면 대성공인가. 무엇을 원하는지, 사람들은 그것을 보겠지.


냉장고를 열어 대충 허기를 때울 것을 찾아본다.


가난한 예술가의 집이라, 먹을게 없는건가.


아니다, 혼자 사니까 먹을게 없는거지.


 


멀지 않은 중국집에 전화해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킨다. 새까만 전화기가 왠지 오늘은 눈에 거슬린다. 뒤뚱뒤뚱 의자에 앉았다.


혼자 사는데, 쓸데없이 큰 집이 싫어 조그만 곳으로 왔지만 변함이 없다.


여기도 쓸데없이 작다. 거실, 그리고 작업실, 화장실 겸 욕실. 달랑 방이 세 개다. 창문도 세 개다. 큰 창문, 작은 창문, 조그만 창문. 빛이 잘 들어와 좋을때도 있지만, 중요한게 있다. 창문이 크고 작고 조그만게 있어서 이 창문의 평균을 내어 빛을 쬐어보면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다.


쓸데없이 작은 집이라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의 끝에 짜장면과 탕수육이 도착했다. 아니, 자장면인가. 사소한 오자는 넘어가는게 좋은 생각이다.


“얼마요?”


“만 오천원이요.”


젊고 튼실하게 생긴, 사실 연필을 들고 그려보면 비리비리해서 그다지 모양새가 안나올법한 아이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 아이는 중국집 배달부라서 문제가 되지 않을꺼다. 그림의 모델이 아니니까.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2만원을 건네주고 잔돈을 받았다.


싯누런 오천원권 화폐는 참 요긴하게도 만들었다. 만원짜리와 천원짜리만 있으면 돈 거슬러주기 얼마나 귀찮을까. 색깔도 누리끼리한게 참 잘 만들었다.


중국집 젓가락은 구룡성이라고 멋들어지게 찍힌 종이로 포장되어 있다. 죽죽 찢어내어 속살이 드러난 젓가락을 잡고 쪼갠다. 이 젓가락 쪼개기는 사실 보통 고수가 아니면 쉽게 쪼개낼수 없다. 한번에 확 쪼개면 앞쪽이 부러지고, 천천히 쪼개면 한쪽으로 힘이 쏠려 끄트머리가 이상하게 잘린다.


적당한 힘과 적당한 속도를 찾아 유지하며 쪼개는 것이 바로 기술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무어랴. 그냥 자장면 먹는 도구라는 것은 매한가진데.


근데 말이다. 이노무 구룡성 자장면은 색깔이 시꺼머니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름 오징어먹물로 웰빙을 추구한다는 자장면집이긴 한데, 자장면이 거기서 거기지 말이야. 어차피 자장면은 자장면인데.


연필이 아무리 고급이래봐야 연필인 것처럼 말이지.


뭐, 느낌이 다르긴 하겠지만.


배고픔을 가시기 위해 시킨 자장면과 탕수육인데, 생각보다 좀 많이 줬네.


아, 까무잡잡한 이 자장면을 보시라. 맛나게 휘어지는 이 면발을 보시라.


거 참. 배고픈데 왜 감탄이야.


일단 먹고보자.


 


후르륵, 쩝쩝.


 


배가 좀 부르니까 슬금슬금 졸음이 몰려오려나.


파리 몇 마리가 귀찮게 들러붙는데, 이놈들은 어디 먹을것이 없어 여기서 앵앵거리고 있어. 휘휘 팔을 휘둘러 쫓아내고서 기지개를 쭈욱 펴는데,


뚜드드득!?


어이쿠, 허리 다 부러지겠다. 거 참 소리가 예술이구먼. 예술가다운 소리긴 하지만 이건 좀 미래를 위해서 자제해야 하는데 말이지.


 


따르르르르르르르르르- 전화받어라.


 


시꺼먼 전화기가 울리긴 하는데, 저녀석을 받을까 말까 갑자기 고민이 된다. 아마 이 시간즈음이면 그림 사겠다는 복덕방 이씨 아줌마일텐데. 거참 미술 재테크인지 뭔지에 맛들여서는 쓸데없이 이상한 그림이나 사가고 말이야.


가난한 예술가한테는 축복같은 소리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찝찝하단 말이야.


“여보세요.”


“어이구, 총각. 전화 안받길래 무슨 큰일 났나 했어~.”


이 아줌마가 기차 화통을 삶아드셨나. 귀아프게스리.


“어이구, 총각에게 큰일이 나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서 떡하니 좋은 처자 얻어서 맛난것좀 얻어먹고 살어야 하는데.”


“흐흐흐, 총각, 걱정 말어. 내 나중에 중매 하나 서줄테니께. 그나저나 이번에 그린다던 거시기 그림 하나 잘 그려놨어? 퍼뜩 하나 그려달라니깐. 총각 그림 때문에 사람들이 줄 섰어야~.”


“에이, 아줌마. 그림이 뭐 찰떡이유? 퍼떡 메치기 하면 하나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니라니깐~.”


음... 잠깐 생각해보자. 근데 왜 내 그림 때문에 사람들이 줄을 섰어. 잘 그리는건 아니고, 일단 색칠도 하는것도 아닌데. 뭐시기야. 연필로 끄적끄적하고 마는데 왜 그리 사람들이 줄을 서대야. 판다고 팔릴 것도 같지 않은데. 뭐, 가난한 예술가는 헝그리정신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긴 하지만. 아, 그나저나 돈이 얼마나 남았으려나.


“호호, 총각은 말도 잘하셔. 그러지 말고~ 내가 총각 집에 가서 그림 가져갈게. 이미 다 그린거 있지?”


음, 뭐 엄연히 말하면 다 그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 뭐시기, 조금전에 그리던건 있긴 한데.”


“어이구, 고마워 총각. 내 얼른 가서 그림 한번 볼랑께. 어디 나가지말고 기다려잉~.”


아줌마가 쳐들어올 기세다. 뭐, 지금 가져간다면 나야 좋지만.


“알았소~, 어여 오시어. 나 마저 그리고 있을께요.”


뚝 하고 끊어진다.


아함. 배도 부르고 해서 잠이나 한판 늘어지게 잘라고 했더니. 쩝.


하긴, 어차피 지갑에 돈도 얼마 없는거 같던데. 이번에 이거 팔리면 또 두둑히 채워지겠지?


 


이젤 앞에 스케치북. 스케치북 앞에 연필. 연필 앞에 그림쟁이.


그림쟁이의 오른손, 움직인다.


연필의 끄트머리, 움직인다.


스케치북은 멈춘다.


슥-


조금씩 윤곽이 잡히며 그림이 나온다


그림인가, 낙서인가.


마음이 가는대로, 마음이 따르는대로.


누군가가 그러더라. 자동서기와 비슷한 거라고.


뭐, 귀신이 그려주는 것인가. 아무렴 어떠랴. 날 먹여주고 재워주는 기교인데.


슥슥-


중앙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중앙으로.


그림이 슬금슬금 모습이 나타난다.


연필 한자루가 다 되어 뚝 하고 부러진다.


그림도 다 되어 뚝 하고 이젤도 부러진다.


스케치북만 멀쩡히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부욱 찢어 칼로 끝을 잘라내었다.


날카로운 칼로 연필을 찍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너의 혼은 잘 썻으니 다음에 보자꾸나.


연필은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겠지.


 


마무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줌마가 왔다. 복덕방 이씨 아줌마. 호화롭게 차려입진 않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부자요 하는 태가 철철 흘러넘친다.


“총각~, 그림 다 되었어?”


“여기 있지요.”


그림을 슥 들어 보인다. 연필로 휙휙 그려낸 그림이다.


색깔도 없고, 의미도 없고, 모든게 다 있는 그림이다.


아줌마는 말한다.


“오호호호, 총각. 이번에도 대단한 작품을 그렸나봐? 이것봐~ 여기저기서 철학의 향기가 뚝뚝 떨어져 흘러내리네.”


“그만하시구, 이거 얼마에 해주실꺼요?”


“에고고, 내 정신 좀 봐. 이 그림이라면 큰거 다섯장도 되겠네. 호호호, 내가 총각 생각해서 좀 더 넣어줘야겠어~.”


그러면서 가방을 뒤적뒤적해서 지갑을 꺼낸다. 흰 종이를 꺼낸다.


약정된 양식에 맞춰진 종이를 건네준다.


여섯장이다.


“어이쿠, 이렇게나 많이.”


“호호, 내가 총각 생각해서 좀 더 넣었어. 다음번 작품도 잘 부탁해~. 다음달이면 되겠지?”


음, 글쎄 다음달이라. 모르겠다.


“뭐, 걱정마세요. 아시면서 뭘 물어보고 그려요.”


“그래그래, 내가 잘 알지.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할게~.”


뭐, 이걸로 한동안 생활비는 걱정없겠다.


 


아, 졸려.


잘래.


 


 


서랍 안을 살펴본다.


지우개, 지우개, 고장난 샤프, 볼펜 서너자루. 자, 물감 조금. 지저분한 딱지가 앉은 포스터물감. 색연필 한세트, 부러진 몽당연필, 쓸데없는 잡다한 것들.


곰곰이 생각해본다. 연필이, 그게 마지막이었던가.


연필, 구하러 가봐야겠다. 그런데 나가기가 싫다. 밖으로. 나가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


집 밖은, 위험하다.


 


어차피 연필인데, 같은 연필인데 차이가 있겠나 싶어 색연필을 꺼내온다.


근데- 차이가 있다.


연필이긴 연필인데, 깍아서 써야하는것도 연필인 것과 같고, 길이도 연필과 비슷한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런데. 다 좋은데, 색깔이 12개나 된다. 12색의 연필이다.


화사한 연필이다.


 


이젤을 꺼내 스케치북을 세운다.


그림을 그린다.


무슨색을 꺼내 쓸까. 처음은 붉은색. 겉을 덧칠하고


다음은 무슨색을 꺼내 써볼까. 노란색, 속을 뒤집어놓고


그리고 어떤 색을 해볼까. 녹색은 바닥을 채워놓고


파란색은 편하게, 갈색은 불타는 듯이, 검은색은 새까맣게.


온통 색을 뒤섞어놓은 이런 느낌.


 


뒤뚱뒤뚱 의자에 털썩. 하늘이 뒤집어진다. 천장에 누워있는건가.


슬슬 졸린다. 점점 미쳐가나보다.


 


돈이 또 궁해질쯔음 아줌마가 찾아왔다.


이번엔 색연필로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보고싶은 것을 보겠지.


 


“이봐, 총각. 이번 그림~ 좀 아니다. 이거 색감이 안되겠는데?”


 


라고 하면서 조금 던져주고 가버린다.


 


왜그런가. 색감이 안좋다니. 다시 그려본다. 뒤적뒤적 거려보다가. 나는 그냥 뒤적뒤적 그림을 그린다.


저번에 연필로 그려간 것과 비슷한 그림이다.


 


이번에도 아줌마는 못쓰겠다는 말을 한다.


그림이 뭔가.


연필이 아니면 안되나?


이것도 연필인데.


색연필.


 


뒤적뒤적 다시 색연필을 꺼내서 그림을 그린다.


 


자꾸 이렇게 그리면 그림을 사줄수 없다고 아줌마가 협박한다.


뭐야. 연필로 그린거랑 똑같이 그렸는데.


뭐가 문제인거야.


연필도 연필인데, 색연필일 뿐인데.


 


뭐가 다른걸까.


 


 


결국, 아줌마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찾아오고서 연락이 끊어졌다.


 


색연필은 안되는건가.


 


 


먹고살기 참 힘드네.


 


다시 연필을 들어야겠다.


아, 근데 나 돈이 없는데.


연필은 어떻게 사지?


 


배고프다.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해봐야겠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