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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시나리오 계하의 기억 #37 ~ #50 (조금 수정 1)

2007.11.15 11:36

Evangelista 조회 수:1923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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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읍내 술집. 아직 해가 넘어가기 전.


분명히 민속주점은 아닌데도 인테리어가 목제로 이루어져서 그런 것인지 낡아빠져서 그런 것인지 민속주점인 양 보인다. 테이블은 네 개로 의자가 네 개씩 놓여 있다. 카운터 안쪽에 주인은 있지만 손님은 아무도 없다. 아니, 한 팀 있다. 성달의 부하인 건달 정, 무, 기 세 명이다. 그들은 구석 자리에 앉아서 벌써 소주 세 병을 비우는 참이다.




건달정 내사 마 쪼매 꼬라지가 나가 안있나.


건달기 와 그라십니꺼?


건달정 아까 본 긴데 재발이 시끼 저택 안에서 담배 꼬나물고 놀드만.


건달무 저택에서요? 어린 놈의 시끼가 미친 기 아인교?


건달기 도령인데 그칼 수도 있지예.


건달정 (기에게) 아, 니는 마 재발이를 몰라서 그칸다. 금마 그거 대학 가드만 아가 개념을 거따 두고 왔다 이기다. 옛날에는 안 그랬데이. 하는 꼬라지만 보믄 지가 완전 큰행님이라.


건달무 맞심더. 삼사 년 전만 해도 금마랑 우리랑 친구였다 아입니꺼. 내 아즉도 기억허는디, 지 학교 가다가 내 보고 행님 안녕하신교 그랬지예. 지금은 우짭니꺼? (기에게) 니 말해 봐라.


건달기 인사, 지는 원래 이라는 기 맞는 줄 알았지예.


건달정 아이다. 잘 들으래이. 달거리파가 무신 마피아도 아이고 원래 우리는 협객인기라. 그르니께 충효예지신이 윽수로 중요하다 이기제. 근데 재발이 눔의 시끼가 내한테 그라믄 안 되는기라. 우째 내 보고 잘 지냈나, 이칼 수가 있나 말이다.


건달무 아니, 행님한테도 그랬다고예? 미칬구만. 내는 또 내한테만 그라는 줄 알았제.


건달정 아무래도 안 되긋다. 큰행님한테 말씀드리가 무신 특단의 조치를 내리든가 해야 안하겠나?


건달무 그른데, 그 재발이가 차기 보스란 말입니더. 쪼까 그른디예.


건달정 모른다! 사나이가 칼이 무습나?


건달무 솔직히 무서우니께 그라지예. (기에게) 안 글나?


건달기 예? (둘의 눈치를 살핀다) 잘 모르겠는데예.


건달정 불알 띠뿌라 마. 젠다가?






#38. 세영의 방. 저녁.


옷도 벗지 않고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잡든 세영. 갑자기 눈을 뜨고 잠시 후 벌떡 일어난다. 손으로 자기 볼을 만져 본다. 땀이 흐른다. 긴 한숨. 그 때 문이 아주 살며시 열리며 아현이 들어온다.




이아현 오빠.


주세영 (돌아본다) 아.


이아현 (천진하게 빙긋) 그만 자고 빨리 오래.




세영, 그대로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먼저 몸을 돌리는 아현을 따라간다.






#39. 장중 주택의 안방.


병풍까지 놓은 ’20년대 지주 안방 풍의 방이다. 문갑, 장롱도 모두 옛 것이다. TV도 없고 가운데에 상을 갖다 놓느라 옆에 치워 놓은 작은 탁자 위에는 시경 한역본이 놓여 있다.


상석에 장중이, 좌측에 원영, 명애는 제 남편의 뒤쪽에 앉아 있다. 명애는 사뭇 진지해 보인다. 미닫이문을 열고 아현이 뒤따라오는 세영을 대동하고 들어와 우측 뒤쪽에 살며시 앉는다. 세영은 잠시 원영을 봤다가 아현의 앞, 즉 상의 우측에 앉는다.




주장중 원영이랑 세영이한테 할 얘기가 있다. 원영이는 알겠지만, 내가 몇 달 전에 저 아래쪽 땅 판 거 있지?


주원영 예.


주장중 그거 최성달이한테 팔았다.




아현을 제외한 모두가 장중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주세영 최성달이면, 그 조폭 아닙니까?


주원영 맞다. 달거리파 대빵이다.


주장중 이건 너희 애비들도 모른다.


하명애 할아버님. 왜 하필이면?


주장중 내가 성달이 애비를 안다. 그놈이 보육원을 짓고 싶다길래 판 거다.


주세영 그걸 믿으셨어요?


주원영 맞십니더. 조폭 두목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걸 짓십니꺼? 낚인깁니데이.


주장중 지지난 주에 준공 들어갔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냐. 다 믿을 만 하니까 믿은 거다. 여하튼 그래서 오복이파가 날 좀 싫어한다.


주세영 그 놈들은 또 왜…….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아현을 돌아본다. 아현은 방긋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얼른 다시 시선을 장중에게 맞춘다.




주장중 원래 양오복이가 성달이랑 사이가 나쁘지 않냐. 그걸 내가 도와줬으니 나도 싫겠지. 그리고 양오복이 성격에 건달이 착한 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게다. 애저녁에 그런 놈이거든. 참견 잘하고.


주원영 할배요, 우째 그리 잘 아십니꺼? 모르는 사람이 보믄 꼭 그 바닥에 있었던 줄 알겄십니더.


주장중 이놈아, 내가 그러고 다닐 사람이냐?


하명애 (남편에게) 가만히 좀 있어요.


주원영 아, 말이 그르타 이기제.


주장중 듣자하니, 계룡이가 제 칼에 찔려 죽었다고는 하지만 자살은 아닌 게 칼 박는 솜씨가 제법이라더라. 너희들도 특히 조심해라. 원영이 넌 일찍일찍 다니고, 어차피 서점까지 큰길이지 않냐. 걸어다니지 말고 버스 타라. 세영이는 어지간하면 내일쯤은 올라가고.


주세영 (힐끔 아현을 본다) 예.


주장중 그럼 저녁 먹자. (명애에게) 얘야, 밥 다 됐냐.


하명애 예. 가지고 올게요. (일어나며 원영에게) 빨리 상 들고 따라 와요. (나간다)


주원영 아니, 나 지금 퇴근했어. 이놈의 마누라 엔간히 부려묵네 기냥.


하명애 빨리 안 와요?




명애를 따라 원영, 부엌으로 간다.




주장중 말하는 꼬락서니 보면 네 형이 그 다음으로 죽겠다.


주세영 그런 소리는 마세요. 농담으로라도.


주장중 아현이 너도 당분간 나돌아다니지 말거라. 여자는 특히 더 위험하다.


이아현 (계속 빙글빙글 웃으며) 네.






#40. 세영의 방. 식사 후.


세영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바닥엔 16절 스케치북을 펴고 자신이 이따금씩 연필로 스케치한 것을 넘겨 본다. 휴게소에 주차된 차들, 정체된 도로의 모습, 좁은 골목에 일렬로 주차된 수 대의 차 등, 전부 멈춰 있는 자동차를 그린 것들이다.


문 열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는 세영 앞에 흰 다리가 보인다. 원피스를 입은 아현이다. 세영은 절대 눈을 들지 않는다.




이아현 오빠가 그린 거야?


주세영 어, 그래. 무슨 일 있어?


이아현 오빠, 아까 나 의심했지? 계룡 오빠 일 말야.


주세영 안 했어. (사이) 안 했다니까.


이아현 나도 이게 맞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는데, 있잖아.




아현이 쪼그려 앉는다. 눈높이가 거의 맞았다. 원피스 치마를 모으지 않았기 때문에 안쪽이 보일 듯 하는 바람에 세영은 급히 시선을 옆으로 치운다.




이아현 아마 오복이는 아무 것도 안 했을 거야.


주세영 글쎄, 난 모르겠다.




아현,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대고 몸을 내밀어 세영의 얼굴을 따라간다. 세영은 더 이상 시선을 피하는 것을 포기한다.




이아현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주세영 (간신히 얼굴은 보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아니. 별로.


이아현 어제 나랑 같이 있었던 사람, 누군지 안 궁금해?


주세영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아현 (울컥해서 양손으로 세영의 머리를 딱 붙잡는다) 정말 안 궁금해?


주세영 그만 좀 해! (뿌리치고, 잠시 사이) 뭐가 문제야. 왜 이러는 거야?


이아현 (당황) 어……. 화났어?


주세영 내가 뭘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걸 말해. 솔직히 지금 너, 무서워.


이아현 오빠는,


주세영 그래. 내가 뭐?


이아현 (심호흡, 직후 선언하듯) 오빠는 날 좋아해야 돼.


주세영 싫어. 너 지금 정상이 아니야. 정신 차려!


이아현 착각하지 마. 나 안 미쳤어. 그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봐. 그렇다고 해서 죽이려 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오빠 똑바로 들어야 돼. 오빠는 날 좋아해야 되는 이유가 있단 말야.


주세영 거기서 이미 스톱이야. 그런 이유는 없어.


이아현 내가 다리 아래에서 위로, 뭘 본 것 같아?




세영이 이를 꽉 깨문다. 이 때 아현도 무언가를 참듯 몸을 약하게 떤다. 잠시 그 침묵이 계속된다. 어느 순간 아현이 한 손으로 요 깔린 바닥을 탁 내리친다.




이아현 아무 것도 못 봤어.


주세영 뭐?


이아현 아무 것도 안 보인단 말야.


주세영 (조금 불쌍하다) 기억 잃고 너무 오래 방치해서 그럴 거야. 떠올리려고 하지 마.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이아현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 나한테는 그게 좋은 일일 수도 있으니까.


주세영 안 돼. 절대 기억해내지 마.


이아현 걱정돼?


주세영 (사이) 그래.


이아현 그럼 올라가지 마. 알았지?


주세영 조폭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텐데. 다치기 전에 가야…….


이아현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며) 가지 마.




질려 버린 세영의 얼굴.






#41. ‘비지니스 클럽’ 대형 방.


테이블 위에는 양주병이 죽 늘어서 있다. 싸이키 조명이 천천히 돌아간다. 문가에 재훈과 일규가 서 있고 아가씨 하나가 마지막으로 그의 옆을 지나쳐 나간다.


안쪽 소파에 뒤룩뒤룩 살찐 오복이 있고 그 옆에 코에 사마귀가 난 건달 을이 앉았다.




양오복 아이고, 최재훈 씨 아닌교.


김일규 (재훈에게만 들리게 살짝) 저기 사마귀 난 놈 있잖습니꺼. 저 쫓아댕기든 놈들 중 하납니더.


최재훈 좀 앉겠습니다.


양오복 하모. 앉으소.




오복이 낄낄대는 소리를 들으며 재훈이 소파에 앉고 일규가 그 옆에 자리한다.




양오복 무신 일인교?


최재훈 (한 손으로 일규의 어깨를 짚으며) 이 녀석이 어려서 실례를 좀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양오복 거, 무신 말인지 모르갔네.


최재훈 (일규에게) 죄송하다고 해라.


김일규 (고개를 숙이며) 오복이파 나와바리에서 깝치가 증말루 죄송합니더.


최재훈 저를 봐서 용서해 주십시오.


양오복 (또 낄낄댄다) 내가 최재훈 씨를 봐서는 도저히 용서할 껀덕지가 안 나오요. 모르요?


최재훈 (쓴웃음) 그건 그렇지요.


양오복 마, 알겠소. 앞으론 꼬붕 관리 잘 허시오. 그란 것 때문에 부러 오신기라, 최성달이 아들내미치고는 예의가 바르구마.


최재훈 다른 것도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양오복 하이고, 무얼 가지고 쑈부치러 오셨소? 별로 좋은 대답 읎을낀데.


최재훈 여기서 놀아봤자 뭐 하겠습니까? 슬슬 우리도 도시로 나가 봐야지 않겠습니까?


양오복 무신 얘긴지 알겄소. 그르니께 싸우지 말구 연합해서 나가자 이기요?


최재훈 예.


양오복 (콧방귀) 춘향이 스트립하는 소리허구 자빠짔구만. 시방만 해도 내 최재훈 씨 조져뿔고 싶은 거 억지로 참고 있는 기요.


최재훈 육 대 사 어떻습니까?


양오복 육 대 사? 어디가 육?


최재훈 당연히 그 쪽이 육이지요.


양오복 칠 대 삼은 해 주셔야겠소.


최재훈 그건 좀 무리입니다. 육 대 사가 한곕니다.


양오복 마, 생각해 보겠소.


최재훈 그럼 그 때까지만이라도 충돌은 없었으면 합니다.


양오복 그라제.


최재훈 그리고 이건 아버지가 모르십니다. 양오복 씨와 옆에 저 분까지 두 분만 알고 계십시오. 아버지는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얘기가 통해서 다행입니다.


양오복 (크게 웃는다) 내가 쪼까 관대하오. 시방 보니 최재훈 씨는 평화주의자구만.


최재훈 결정이 되면 불러 주십시오. (일규에게) 가자.


양오복 잠깐만. 그 있잖소. 생선장수 골로 가삐가 지금 마 시끄럽지요?


최재훈 (일어서서, 잠시 침묵) 예.


양오복 일단 약속은 지키겠소. 조심해 들어가시오.




재훈과 일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간다.




양오복 내 아들내미도 저래 커 줬으믄 좋겠다. 안 글나?




옆의 건달 을은 말이 없다.




양오복 아덜 들어오라캐라. 놀자.






#42. 읍내 거리. 비 오는 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재훈과 일규.




김일규 꼭 이래야 됩니꺼?


최재훈 이게 제일 나아.


김일규 양오복이한테 고개 숙이는디 위장에 두드러기가 돋대요.


최재훈 좀 참아.


김일규 우리도 도시로 진출하는깁니꺼?


최재훈 아버지한텐 기회를 봐서 말씀드리고. 일단 양오복이 어떻게 대답하는지만 남았다. 기다려.


김일규 흐음. (사이) 우산 사 가지요?


최재훈 괜찮아.


김일규 (웃는다) 행님, 무신 영화 주인공같소.


최재훈 장난할 기분 아니다.


김일규 그 뭐라더라, 대사도 기가 막히고 안 있는교. 니가 가라?


최재훈 그만 해라.


김일규 (혼자 기분 좋아서) 많이 묵었다?


최재훈 (멈춰 선다) 그건 아니지 돌대가리야.


김일규 돌대가리는 좀 안 좋소.


최재훈 (피식) 가자.






#43. 마을 입구. 4년 전 여름. 낮.


누군가의 시선. 나무가 베이지 않은 채이다. 그 외의 모습은 똑같다.


반소매 티셔츠와 얇은 면바지를 입은 아현이 만화책을 보며 나무 그늘 아래 쪼그려 앉아 있다. 엔진 소리에 아현이 돌아보니 버스가 와서 선다. 큰 가방과 화구를 멘 세영이 내린다. 아현은 일어서서 달려간다. 둘이 무엇인가 이야기하지만 들리지는 않는다. 다만 표정이 밝은 것은 눈에 보인다.


시선이 마을 안쪽으로 돌아가니 원영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오고 있다. 원영과 세영, 아현은 입구 안쪽에서 만난다. 시선은 조용히 가 버리는 척 하다가 나무 뒤쪽으로 가 훔쳐본다.




주세영 형, 졸업 안 해?


주원영 니는 군대 안 가나?


주세영 겨울.


이아현 가지 마라.


주세영 (웃으며) 휴가 때 놀러 올게.


주원영 자빠진다. 훈련소도 못 뗀 놈이 무신 휴가 운운해쌌노?


주세영 아, 좀. 할아버지 계셔?


주원영 아침부터 나가시뿠다. 어데를 그래 댕기시는지.


주세영 오시겠지. (아현에게) 학교 잘 다니니?


이아현 몰라. 방학 때도 나오라 그러고 짜증나 죽겠어. 촌동네에서 무슨 대학을 그렇게 보내고 싶다는 건지, 우리 담탱이도 쓸데없는 데에 열을 퍼붓고 말야.


주세영 가 놓으면 나중에 편해, 대학은. 공부해서 후회할 일은 없을 걸. (원영에게) 명애 누나는?


주원영 에또, 명애 말이제.


이아현 어제 또 싸우고 지금 분위기 엄청 안 좋다.


주원영 아, 시끄럽다 임마.


이아현 사실이잖아요.


주세영 형, 또 얘한테 시비 걸었지? 너구리 화나게 하면 안 돼.


이아현 너구리라고 그만 좀 해. 맨날 보기만 하면.




시선, 돌아서서 가 버린다.






#44. 세영의 방.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밤.


세영은 열이 나기 시작해 누워 있다. 문을 열고 명애가 물주전자와 컵, 알약을 가지고 들어온다.




하명애 비도 안 맞았는데 웬 감기예요?


주세영 미안해요, 형수.


하명애 오늘 아침부터 쭉 피곤해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주세영 (잠시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형수.


하명애 누워 있어요.


주세영 괜찮아요. 그보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너구리……. 아현이 이상해요.


하명애 걔 이상한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요. 귀여우니까 봐 줘요.


주세영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마치, 뭐에 씐 것 같다고요. 형수가 형이랑 사귀기 시작했을 즈음 아현이 기억하시죠? 한참 할아버지하고 결혼 하니 마니 싸울 때 그 때까지 아현이랑 지금 아현이랑 같아요?


하명애 그 때 높은 데서 떨어지는 바람에……. 조금 다친 거겠죠.


주세영 아니에요. 전혀 문제가 없어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지독하리만큼 냉정해졌어요. 나랑 형은 의사한테 확실히 들었어요. 가벼운 뇌진탕이고 아무 지장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봐요. 정확히 발로 착지해서 발목이 부러진 녀석이 머리를 크게 다칠 이유가 없잖아요!




갑자기 아현, 뛰어들어온다.




이아현 (천진하게 웃는다) 언니, 놀아요. 재밌는 거 가져왔어.


하명애 (조금 당황하며) 응. 그래. 그럼 도련님, 푹 쉬어요.




명애, 나간다. 아현이 따라 나가면서 문을 닫다가 문틈으로,




이아현 내가 정확히 발로 떨어진 건 어떻게 알았어?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문이 닫힌다.






#45. 장중 주택의 대문 밖. 해가 뜨려 하는 새벽녘.


흐트러진 차림의 세영이 아직 열이 있는 듯 무거운 움직임으로 세워 놓은 자기 차에 키를 꽂는다. 그 때 비며 이슬에 흠뻑 젖어 골목 쪽에서 나타나는 일규.




김일규 어디 가십니꺼?


주세영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가 안도하며) 아, 예. 저, 이 집 할아버지 손자입니다. 이제 올라가려고요.


김일규 가믄 안 될낀데.




세영,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얼른 차에 오르려 하는데 일규가 뛰어와 그를 붙잡는다.




주세영 놔요!


김일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며) 우리 행님이 보내지 말라캤십니더. 내는 그거 때매 잠도 못 자고 밤 새도록 기다맀다 아잉교. (상대가 전화를 받자) 아, 누님예. 주세영이 잡았심더. 예. 행님한테 연락하고 내려오시소.


주세영 그거 뭐야?


김일규 심계룡이 죽은 거 아시지요? 만일 소리지르믄 가족이 다 다칩니더. 조용히 하이소.


주세영 조폭이구나.


김일규 협객이오, 협객. 오복이파 협객입니더.


주세영 계룡이는 왜 죽여?


김일규 계속 반말 찌끄리시네. (사이, 당황하는 세영을 보고 키득대고 웃으며) 아니, 농담입니더. 그쪽이 내보다 행님인데 내한테 존댓말 쓰믄 안 되지예. 하든 대로 계속 하이소.


주세영 안 갈테니까 놔. (사이) 요.




일규 계속 키득거리며 세영을 놓아 준다.




김일규 그 키는 이리 주이소. (세영이 망설이자) 아따, 안 팔아묵소. 우리 행님이 그렌자 끌고 댕기는데 이딴 차 눈에 차지도 안하오. (사이) 에쿠스던가?




일규가 세영에게서 차 키를 넘겨 받는데 안에서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친 아현이 나온다.




주세영 (놀란다) 들어가! 나오지 말라 그러고 신고해!


이아현 무슨 신고?


주세영 조폭! 깡패라고!


이아현 응. 알아.


김일규 이 분이 누님이오.




세영의 눈이 커진다.






#46. 주택 안. 마루.


전날 아침과 같이 가족들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있다. 다만 세영은 없다.




주장중 세영이 올라갔냐?


하명애 속이 안 좋다네요.


주원영 젊은 놈이 어데가 그래 아픈 데가 많노?


하명애 아침부터 바람 쐰다고 하더니 도졌나 보죠. 어제부터 안 좋았잖아요.


주장중 내버려 둬라.


주원영 할배는 세영이만 억수로 이뻐하지예. 내는 무신 일이 있어도 밥 묵으라 카시더만.


주장중 이놈아. 너는 부려먹어야 되니까 그래. 빨리 돈 벌어서 집 사서 나가란 말이다.


주원영 그기 맘대로 됩니꺼? 그냥 엄마 아부지 내려오시믄 모시고 살랍니더.


주장중 니가 괜찮지. 내 손주며느리는 아무래도 귀찮을 거다.


하명애 (웃으며) 안 그래요.


주장중 때가 어느 땐데. 억지로 시부모 모실 필요 없다. 네 시아버지도 아직 돈 나올 데는 많아. 그것들한테 나나 데리고 살라 해야겠다.


주원영 마음대로 하소. 내는 어제 그 소리 들었두만 출근하기가 싫어집니더.


주장중 가. 괜시리 돌아다니다가 시비만 걸리지 마라. 계룡이 때문에 경찰들 신경이 곤두섰으니까 함부로 건들진 못할 거다.


하명애 괜찮을까요?


주장중 괜찮다니까.


이아현 저기, 할아버지.


주장중 응. 왜 그러냐.


이아현 그럼 저도 낮에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주장중 해 떨어지기 전에 들어와라.


이아현 네.


주장중 이건 세영이가 묻던 건데, 나도 모르겠구나. 너 나가면 뭐 하고 다니는 거냐?


이아현 그냥 친구들 만나서 돌아다니다 와요. 옆 동네도 갔다가.


주원영 아따, 가시내들 시간이 썩어나나보네. 가들은 일 안하나?


주장중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어서 먹고 나가 봐.


주원영 여보야. 할배는 내를 싫어하는갑다.


하명애 빨리 나가서 돈 벌어와요.


주원영 이놈의 집구석은 우째 할매 살아있을 때부터 메느리랑 사이가 그래 좋은지 몰라.


주장중 아현이 너, 놀 땐 놀더라도 너무 촐랑대고 다니면 안 된다. 알겠지?


이아현 네에.






#47. 세영의 방 → #45 이후


땀에 푹 젖은 세영이 이불도 덮지 않고 아침에 나가려던 때의 차림으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


장면이 급히 바뀌어 #45의 뒷장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영이 아현을 바라보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린다.




김일규 받으소.




세영,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눈치를 살피며 받는다.




주세영 예, 형수. (사이, 일규를 흘낏) 아뇨.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 (사이) 예. 같이 있어요.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전화 끊어 주머니에 다시 넣는다)


김일규 들어가시야겠네요. 들어가소.


이아현 고생했어.


김일규 괘않십니더. (세영에게) 내, 오복이파 김 아무개라는 놈인데예. 그쪽 허락 안 받고 올라가뿌믄 이 집 디비뿔낍니더. 알겠지예?


주세영 (고개만 끄덕)


김일규 내는 가 보겠십니더. 고생하이소.




일규, 몸을 돌려 나타났던 골목 쪽으로 사라진다.




이아현 (정말 해맑게 웃는다. 세영의 팔을 부여잡고는) 춥지? 들어가자.


주세영 (움직이지도 않는다) 야, 너구리.


이아현 응?


주세영 저거 뭐야?


이아현 나 도와주는 사람 있어.


주세영 누님은 뭐야? 대체.


이아현 내가 한 살 많거든.


주세영 계룡이 죽은 것도 넌 먼저 알고 있었겠네.


이아현 아니. 전혀 몰랐어. 사실은 누가 죽였는지도 몰라.


주세영 그럼 누가 죽였는지 알아 와.




세영, 뿌리치고는 몸을 돌려 들어가려 한다. 아현이 그 등에다 대고,




이아현 이러면 재미없어. 그 다리 위에 누가 있었는지…….


주세영 아아, 그래. (들어간다)


이아현 진짜야!






#48. 폐공장. 아침.


아현이 앉던 의자에서 얇은 천을 덮은 채 재훈이 자고 있다. 일규가 들어온다. 인기척에 재훈이 깨어난다.




김일규 주무싰는교? 더 주무시지.


최재훈 아냐. 잘 만큼 잤어.


김일규 연락은 받으셨십니꺼?


최재훈 응. 너도 못 자고 어떡하냐.


김일규 괘않십니더. 모기 쫓다가 잠 다 깨뿠지예.


최재훈 그래. 수고했다.


김일규 이런 건 저 맡기 놓고 집에 들어가 주무시소. 큰행님 걱정하십니더.


최재훈 걱정 하루이틀 하시나. 때 되면 기어들어가니까 문제 없어.


김일규 근데, 행님. 요전부터 나오던 얘기 말인데예. 누님 다리 위에서 떨어질 때 무신 일 있었십니꺼?


최재훈 (사이) 왜?


김일규 아니, 아까도 올라카는데 무신 얘기 하나 그래서 슬쩍 들어보니까 또 그 얘기 나오대요. 그라니 제가 좀 궁금쩍어서.


최재훈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소문 좀 돌았는데 못 들었어?


김일규 저 그때 잠깐 이사갔었다 아입니꺼.


최재훈 이아현 씨가 병원에서, 기억은 안 나지만 누가 다리 위에 있었던 것 같다고 했더래.


김일규 금마가 민 깁니꺼?


최재훈 모르지. 하지만 밀었으면 머리부터 떨어졌을 거야. 이아현 씨는 다리로 착지하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머리를 찧은 거지.


김일규 그라믄, 쫓기다가 뛰어내린 기 아입니꺼?


최재훈 글쎄. 봤다는 사람도 없고.




재훈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꺼내어 받는다.




최재훈 예. (사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웬만하면 집에 계세요. 아니, 잠깐만요. 이아현 씨? 여보세요? (전화 집어넣는다)


김일규 누님인교?


최재훈 이따가 놀러온대.


김일규 아따 참, 체력이 남아도나. 우째 그래 빨빨대면서 돌아댕기싸요?


최재훈 좀 급한 것 같은데.


김일규 그라믄 나 그 때까지 자겠심더. 저기 매트리스 써도 됩니꺼?


최재훈 그래라.




재훈이 고개를 든다. 재훈의 시선. 회색의 높은 천장이 보인다.




최재훈 (여전히 천장이 보인다) 일규야.


김일규 예?


최재훈 심계룡은 오복이네가 죽인 거다. 그렇지?


김일규 하모요.






#49. 성달의 ‘저택’. 아침.


성달이 호스를 들고 정원에 물을 뿌리고 있다. 생각 없이 그냥 여기저기 뿌리면 되는 줄 아는 것 같다. 코로는 흘러간 트롯트를 흥얼거린다. 건달 정이 다가와 90도로 인사한다.




최성달 어, 그래그래. 무슨 일이냐?


건달정 죄송하지만서두 말입니더. 도련님 땜시로 말씀 몇 마디 드려도 괜찮겠습니꺼?


최성달 뭔데? (호스를 내려놓고 물을 잠근다)


건달정 그기 말입니더. 쪼까 안 좋은 얘기라서 이거 말씀을 드려도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게 있는 기라서예. 큰행님 들으시고 안 좋아하실지도 모르고 해서 마 좀 그렇십니더.


최성달 어, 괜찮아. 말해. 상관없어. 아들놈에 대해 제삼자가 말하는 건 들어야 된다. 그래야지!


건달정 제가 보기에는 도련님이 쪼까 막나가는 기 아닌가 싶십니더.


최성달 그건 뭔 소리야?


건달정 저희를 막 하인 부리듯 하고 말입니더. 어떨 때는 자기가 큰행님 된 것처럼 행동도 하고 말입니더. 이거는 쪼까 그렇지 않십니꺼?


최성달 그렇단 말이야? 이상하다. 왜 그러지? 재훈이 똑바른 놈인데.


건달정 어제는 말입니더. 몰래 오복이한테 쫒아가서 싸우지 말고 쩌그 도시로 나가자. 이런 소릴 했다캅니다.


최성달 뭐야? 허, 그놈 참.


건달정 큰행님 있으신디 너무하는 기 아입니꺼?


최성달 (사이) 아냐. 그거 괜찮을 수도 있어. 역시 대학 보내 놓으니까 생각이 트이는구만. 그래. 역시 내 아들이다. 나한테 먼저 말하면 반대할 지도 모르니까 자기가 가서 그런 거야. 그렇게 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


건달정 (당황) 어? 그렇십니꺼?


최성달 그렇잖나. 여기 좁은 촌바닥에서 백날 둘이 굴러봐야 뭐 해? 시내만 접수하면 떨어지는 게 얼마나 많은데.


건달정 그란디……. 그기 육 대 사라든디예.


최성달 거기까지 교섭했단 말이야? 정말 대단하다. 아들 진짜 잘 키웠다. (껄껄 웃는다)


건달정 그기 아니라, 즈희가 삽니더. 오복이네가 육입니더.


최성달 (웃다가 뚝) 진짜야?


건달정 확실합니더.


최성달 이 새끼가 이게……. 재훈이 찾으믄 일루 오라고 해. 빨리 찾아 봐. 직접 들어봐야겠다.


건달정 (히죽) 알겠십니더.






#50. 폐공장.


매트리스 위에 대충 누워 자던 일규가 제 핸드폰 소리에 눈을 뜬다. 의자에 앉은 재훈은 자지 않고 벨소리가 울린 후로는 일규를 바라본다.




김일규 (잠이 덜 깨서) 어, 씨벌. 박마담 벳깄는데 어떤 니미 존만한 씨방탱이가 전화질허고 자빠짔노?


최재훈 아줌마 취향이냐?


김일규 (깜짝) 엇! 아이고, 그 박마담이 아니라예, 저쪽에 다른 박마담 있십니더. 서른 둘짜리. 쥑이지예?


최재훈 너 임마, 오복이파 나와바리 돌아댕기는구나. 그러니까 빠따로 맞지.


김일규 (부끄럽게 웃는다) 하도 들락날락했두만 금마들도 인자 봐 줍니더.


최재훈 시끄러워 죽겠다. 전화나 받아. (그 다음 일규가 대사 할 때 조용히, “아줌마 맞네.”)


김일규 아, 맞다. 어뜬 새끼고? 번호도 안 뜨네. 마 전화선 타고가서 머리 가슴 배를 삼단분리해뿌야제. (전화 받고) 김일귭니다아. 옛! 아이고, 행님. 예. (사이) 찾으신다꼬예. 알겠십니더. 말씀드리겠십니더. 수고하이소.


최재훈 뭐야. 아버지가 찾으셔?


김일규 그렇다는데예. 쪼까 이상합니더. 화나싰다는디예.


최재훈 담배 피우다 양탄자에 구멍 낸 거 걸렸나 보지. 피곤할텐데 미안하다. 가자. 큰일난 거 아니면 이제 그만 부르셨으면 좋겠다. (웃음)


김일규 (따라 웃는다) 마, 방에서 담배 고마 태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