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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단편] 값싼 여자

2010.10.06 02:19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29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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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햇살이 유난히 화사하게 빛나고 매미 소리가 여름의 뜨거움을 알려주는 어느 이른 아침에, 너는 네가 자주 가는 커피숍에 들어간다. 20평 남짓의 그 커피숍은 네가 꿈꾸는 일상의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다. 은은한 갈색 계열의 대리석 바닥과 적당하게 피부를 적셔주는 안락한 조명, 이국의 미녀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유명한 외국잡지,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복잡한 이름의 커피들. 너는 이곳에서 아련한 오르가슴을 느낀다. 성욕으로서의 그것이 아닌, 아랫배를 조용하게, 그러나 적당히 묵직하게 울리는 어떠한 쾌감을 느끼며 너는 자리에 앉는다. 푹신한 소파가 순식간에 너의 매끈한 등허리를 감싸 안는다.


언제나 즐겨 마시던 커피를 종업원에게 주문하고서, 너는 턱에 팔을 괴고 창밖을 응시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고독에 도취된다.


사실 너는 이곳에 혼자 와본 적이 없다. 아직도 휴대전화 번호를 모르는 몇 명의 친구들, 혹은 네가 스쳐 지나간 좋은 학벌과 말끔한 외모를 갖춘 남자들과 이곳을 찾은 적은 있지만, 혼자 온 것은 처음이다. 너는 스스로 고독을 느끼고자, 이른 아침에 1시간 동안 샤워를 하고, 30분 동안 머리를 말리고, 정확히 52분 43초 동안 옷을 골라 입은 뒤 이곳에 왔다. 너는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며 이곳에 혼자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살포시 미소 짓는다.


너는 네 스스로가 굉장히 고독과 잘 어울리는 여자라 생각한다.


문득 너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핸드백을 뒤적인다. 그리고 최신형의 디지털 카메라를 꺼낸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사준 S사의 기종이다.


그리고 너는 고독과 어울리는 자신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약간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피상적인 너를, 외향으로서의 너를 기록해간다. 단편적인 의미밖에 존재하지 않는 너를, 어떠한 남자들에게 성욕과 욕망의 대상이 될 너의 사진을 촬영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너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사진을 촬영하던 중, 너는 팔꿈치에 무언가가 거치적거림을 느껴 시선을 아래로 흘린다. 그곳에는 오늘자 신문이 놓여 있다. 그걸 본 너는 다시금 오묘한 의식의 나선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너는 고독한 한편 지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너는 신문을 집어 든다. 고등학교 때 입시를 준비하던 이후로 처음 쥐어보는 신문이다.


그리고 너는 이내 눈살을 찌푸린다. 신문의 윗면에 너무도 또렷하게 ‘J일보’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너는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친다. 그리고 네가 ‘배운 여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다. 그리고 이른바 의식적으로 성숙한 여자들은 ‘H신문’을 많이 읽는다는 잡지의 칼럼 한 부분을 순차적으로 떠올린다.


의식적으로 성숙한 경지에 있다고 너는 너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신문을 내팽개친 것이다. 너는 뿌듯함을 느끼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다시금 카메라를 꺼내 스스로를 촬영하기 시작한다.


128mb의 네 논리 속에서 너는 의식의 창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시작한다.




# 2-1


…그리하여 아이는 약 5분간의 걸음 끝에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그러나 이제는 흔치 않은─정겨운 구멍가게다. 낡은 상호 아래 가게는 희미한 빛 가루에 둘러싸여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주인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먼지떨이를 든 채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다.


아이는 거리낌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타박, 하는 가벼운 발소리가 부드럽게 콘크리트 바닥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 기척을 느낀 노인은 아이를 쳐다보고는 살며시 미소를 띤다.


“처음 보는 아이구나. 잘 왔다. 과자를 사러 왔니?”
“네.”


말을 마친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진열대 앞에 선다. 시골이라 그런지, 진열대에는 두 종류의 과자 밖에 없다.


붉은색의 딸기 맛 과자와 푸른색 봉지에 담겨있는 메론 맛 과자가 서로 몸을 붙인 채 나란히 서 있다. 아이는 거리낌 없이 딸기 맛 과자를 집는다. 노인은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치켜뜬다.


“호오… 이 과자를 고르다니. 먹는 아이가 흔치 않은데 말이야.”


노인의 말에 아이는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펴고 이야기한다.


“저는 이것밖에 먹지 않아요.”
“왜 그렇지?”


노인이 묻는다. 그러자 아이는 약간은 성난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순수함은 온데간데없고, 흡사 맹수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빛이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N사에서 나온 메론 맛 과자는 단순히 아이들, 즉 대중들과 영합하기 위해 달콤한 맛만을 살린 비겁한 녀석이에요. 대중의 다양한 맛을 알 권리 따위는 고려도 하지 않는 최악의 제품이죠. 그에 비해 이 딸기 맛 과자는 제법 참신한 맛으로 승부를 걸려 하거든요. 아주 괜찮은 녀석이에요.”


노인은 놀랍다는 듯이 아이를 쳐다본다. 아이는 이전보다 좀 더 넓게 어깨를 편다.


“아주 똑똑한 아이로구나. 그런데 이 메론 맛 과자는 먹어본 적이 있니?”


노인의 대답에 아이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한다.


“당연히 없습니다. 그런 쓰레기를 먹을 만큼 제 혀는 싸구려가 아니거든요.”


말을 마친 아이는 노인을 쳐다본다. 노인은 생각에 잠긴 듯, 약간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는 먼지떨이 대신 아이가 그토록 욕하던 메론 맛 과자가 쥐어져 있다.

“그래? 그것참 아쉽구나. 이 녀석도 참 맛있는데 말이야….”


말을 마친 노인은 멋쩍은 듯 미소 짓는다. 그러나 어쩐지 모멸이 담겨 있는 듯한 묘한 미소다. 아이는 적대감을 느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노인의 손에 쥐어진 과자 봉지 사이에서 달콤한 메론 향이 새어나와, 어느새 가게를 온통 메우고 있었다.




# 2-2


…그리고 아이는, 딸기만을 먹으면 걸린다는 “과다 딸기 섭취 증후군”이란 병에 걸려, 뇌가 완전히 녹아버린 채 죽고 말았답니다.


― 동화, 『편향된 시각은 죽음을 낳는다. 이 쓰레기 종자들아』 끝!




# 3


총 12번 셔터를 누른 너는 그제야 카메라를 핸드백에 집어넣는다. 그 뒤 다시 손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본다. 이른 아침인데도, 수많은 사람이 일상의 저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너는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본다. 이 모습이 굉장히 고독하게 비칠 것이라 너는 생각한다. 너의 의식은 이미 항상 렌즈를 생각하고 있다.


너의 세상은, 작은 렌즈에 갇혀 있을 뿐이다.


어떤 여자가 샤넬의 제품을 걸치고 있는지, 어떤 여자가 요즘 유행하는 신상 구두를 신고 있는지를 감상하던 너는 어떤 여자를 보고 코웃음을 치고 만다. 그 여자는 너와 너무나 상반되는, 너무나 촌스러운 여자에 불과하다.


주름이 잔뜩 진 와이셔츠에 색 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겨드랑이에 법전처럼 보이는 두꺼운 책을 낀 채 걸어가고 있다. 너무나 한심한 모습이다. 너는 너의 128mb의, 스스로를 피사체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논리구조를 최대한 작동시켜 그 여자를 비판적으로 응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심하고 못난 그녀를 보며 스스로의 우월감을 고양시키던 너는 그녀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서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녀가 멈춰선 지점에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음을 포착한다.


그리하여 너의 열등감은 비로소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의 열등감은 비로소 폭발하기 시작한다.
너의 발밑에 있던 여자가, 어느새 너의 정신 위에 군림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한다. 네가 생각해왔던 고독과 지성의 결정체였던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아니, 그러한 순차를 밟아온 너의 생각의 행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을 때, 그러한 너의 감정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반전을 꿈꾼다. 그가 너를 바라보기를, 그리고 너에게 도취되어 그녀의 손을 놓고 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기를 소망한다.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너에게 건네며 너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보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한다. 초조감이 뒤엉켜 엉망이 된 오르가슴이 방광을 짓누른다. 오줌을 지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때.




# 4


『넌 정말 어리석은 여자 정신 나간 여자 내 앞길을 막고서 떠날 땐 언제고
철이 없는 여자 숨겨놨던 남잔 어디다 버렸니 지금 당장 꺼져버려』



오종혁, 「Get a way」中




# 4-1


“커피숍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노래를 틀어도 좋은 것 같아요.”


커피숍의 종업원인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난 그녀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수긍한다. 그녀의 주름진 와이셔츠도 색 바랜 청바지도 모두 마음에 든다.


커피숍이라도, 이런 노래가 어울릴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자주 드나들던 눈앞의 커피숍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을 굳힌다.




#5


그때 남자가 너를 바라본다. 너는 미칠 듯한 경악과 황홀감에 사로잡혀 그와 눈을 맞춘다. 너는 이 순간 운명을 믿는다.


너는 이 순간 운명을 믿는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이나 운명을 믿는다고 욕해오던 너였지만, 지금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너 자신에게 해당되는 일이면, 이 세상의 모든 비합리는 합리로 옷을 갈아입는다. 지금 너에게 운명은 너와 가장 잘 어울리는 최고의 섭리며 구성이다.


그러나.
남자는 금방 눈을 돌리고는 다시 그 주름진 와이셔츠에 색 바랜 청바지를 입은 촌년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는,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다. 도심의 저편으로 희미해진다.


아, 허무함이여.
너는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소파에 한층 더 몸을 묻으며 우울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지금 너는 너 스스로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여자라고 생각한다.


너는 너의 반투명의 비늘 같은 매끈한 피부를 바라본다. 그리고 수많은 남자가 쟁취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너의 미모를 다시금 상기한다. 너의 빛나던 아름다움이 패배해버린 이 순간의 기억을 몸으로 느낀다.


문득 너는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죽어버린 너의 모습을 상상한다.
죽은 너는 여전히 매끈한 피부에 붉은 입술을 지닌 채로 투명한 유리관에 얌전히 누워 있다. 너는 부패하지 않는다. 너는 썩지 않는다. 영원한 아름다움 속에 너는 잠들어 있을 뿐이다. 수많은 남자가 움직이지 않는 너의 모습을 보고 울부짖는다.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의 배를 찌른다. 목을 매단다.


그런 상상을 하며 너는 어느새 아름다운 여자로서의 너의 매력에 다시금 도취되기 시작한다. 조금 전의 패배는 128mb에 저장되기엔, 너무나 커다란 모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