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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기묘한 이야기-Repetition(반복)

2010.10.02 04:22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168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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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의 시점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다 어쨌단 말인가?"

- 룬 언그알레이, 『끝이 좋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中




"주문한 블루 스카이Blue Sky 여기 있어."

근사한 동작으로 마담이 술잔을 내밀었다. 마치 푸른색의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한 작은 술잔이었다. 바다와도 같은 푸른 하늘의 술, 그 주위를 아지랑이 같은 옅은 불길이 감싸고 있었다. 블루 스카이를 주문할 때마다 나는 잔 속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그 푸른빛에 매료되자, 마담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슬슬 우리 애들이 돌아올 시간이야."
"그렇군요……."

그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종소리가 나며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이 바, 크로노스Χρόνος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왜 Chronos가 아닌 Χρόνος로 가게 이름을 정했냐고 물었더니 그게 그리스 원음에 가깝단다. 그리고 낯선 문자에 신기해서 들어오는 손님도 적잖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게 노림수가 아니었을지. 뭐, 나하곤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둘 중에 키가 조금 작고 어려 보이는 여성이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선배?"

그런 날이 있는 것이다.


그래,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다. 설마 이런 곳에서 학교 후배를 만나게 될 줄이야…. 내가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 같군. 아는 사람과 마주친다는 건 내게 적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젠장할.

"뭔가, 오랜만이네요."

어딘가 뜬금없는 발화처럼 느껴진다. 잠깐 정신이 나간 사이에 생략된 대화가 있었던가? 아니면 있는 지 없는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잠재의식이란 놈이 불현듯 뛰쳐나와 내 몸을 지배하기라도 했었나?

"그래."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역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뭔가 오랜만인 것이다. 안녕하세요도, 잘 지내셨어요도, 격조했습니다도, 심지어 그냥 오랜만인 것도 아닌 ‘뭔가 오랜만인 것’이다. 함축도 생략도 없이, 그저 뭔가 오랜만인 것. 갑자기 눈앞에서 활자가 붕괴하는 것 같았다. 뭔가. 뭔가. 뭔가. 뭔가. 뭔가. 뭔가. 뭔가. 뭔가. 뭔가.      로 구성된 덩어리들이 내 눈앞에서 춤추듯이 날아다녔다. 이걸 게슈탈트 붕괴현상이라고 부르던가?

"슬슬 얼굴 잊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언젠가는 잊어버리는 게 좋을 얼굴이지."

나는 지나가는 말투로 그렇게 툭 던졌다.

"그 무심한 말투도 여전하네요, 선배는."
"그런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정을 한 번 올려다보고, 앞을 내다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뭔가’ 범행의 결정적 단서를 발견한 사립탐정처럼 눈을 가늘게 뜬 후에, 다시 천정을 보고, 앞을 보고, 다시 그녀의 눈을…….

"물어봐요, 그냥."
"의사소통의 93%는 비언어적인 거라 하지 않았나?"
"그 나머지 7%가 바로 지금 같은 때를 위해 있는 거라고요."

제법인데.

"너, 울었어?"
"아뇨."

나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범인을 바라보는 사립탐정의 눈으로─.

"자꾸 눈 그렇게 뜨지 마요."
"그러니까, 울었어?"
"아뇨."
"……이러니까 내가 나머지 7%를 신용할 수 없는 거야."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거린다. 뭐야, 혹시? 뇌의 상류에서 선택지들이 떠내려온다.

1. 안아준다. 2. 안아준다. 3. 안아준다. 그래, 하는 수 없지, 하며 두 팔을 벌린 순간,

"안으면 소리 지를 거에요."

그녀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여전하네요. 선배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눈언저리가 깊이 얼룩져 있었다.

이 아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반쯤 심심풀이 삼아 하는 카운슬링을 통해서였다. 심리학을 전공한 적은 없지만, 관련 서적을 말 그대로 질리도록 읽어봤기에 이론적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카운슬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볼 기회였다. 심심풀이 삼아라고 표현했지만, 전문적인 상담을 요하는 사람은 정신과를 가지 의사 면허도 없는 아마추어에게 올 일이 없었기에, 내 입으로 말하기엔 그렇지만 교내에서 평판은 그런대로 좋았다.

그러나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말하지만, 무료봉사다. 난 학생에게 돈을 갈취하는 취미 따윈 없다. 상담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 이미 대가나 마찬가지였기에, 행여나 사례비를 주더라도 커피나 음료수로 바꾸는 편이다. 이 아이 역시 만성적인 우울증과 간혹 찾아오는 분노 폭발로 내게 상담을 받았지만, 특이하게도 그녀는 중학교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학교 이후는 간간이 기억나는데 그전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별다른 일이 없어서일 거에요."

그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전의 일들을 기억하는 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녀는 머뭇거리며 자기 가족은 정말 화목했으며, 특징적인 일들이 없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차츰 면담이 진행되고 기억을 억압하던 저항에서 풀려나면서 그녀는 어릴 적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하나 둘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주 아프고 우울해하던 엄마, 동생이 태어나고 외가에 보내졌던 기억, 집에는 별 관심이 없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등등…….

그녀는 왜 중학교 이전의 기억을 하지 못했을까? 왜 결코 화목하지 않았던 집을 화목했다고 말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찾아오긴 했지만, 자신의 무의식을 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 아무 힘이 없던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섭고 힘들었던 사건들을 아예 잊어버리려고 했다.

상처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아예 기억을 지워 버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화목하지 않은 집’을 ‘화목한 집’이라면서 기억을 왜곡시키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어릴 적 아무 문제가 없는 화목한 집에서 잘 자란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 이처럼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마음 속에서 곪게 되고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지 터져 나와 그들을 괴롭힌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가 '미해결된 경험'으로 남아 현재를 좀먹는 것이다. 이 아이의 만성적인 우울증과 분노 폭발 또한 어릴 적에 입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때와는 영 딴판으로 달라진 그녀를 보니 신선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당시 아 아이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설득했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낸 것은 이 아이 자신이니까. 남자보단 여성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난 아직도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여자는 참 신기해……."

푸른 술잔 속의 불길이 꺼져 가고 있었다. 내 눈 속에 비친 그 작은 하늘이 조금씩 일렁거렸다.

"방금 무슨 말 했어요?"
"아무 말도."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분명히 제 귀엔 들렸다고요."

뭔가 쏘아붙여 주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만다. 이번에도 역시나 뭔가의 문제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아."

그녀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작게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 응시할 때는 좀처럼 시선이 얽힌다, 라는 묘사 따위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런 표현이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 신선함이다. 그 탓에 고민하고 있던 뭔가의 부조리를 잊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능하면 떠올리지 말아줬으면 했는데, 어쩔 수 없는 건가.

"우리, 이렇게 친했던가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말이 있다. 해야 할 말과 할 필요가 없는 말. 그리고 할 필요가 없는 말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 해도 될 말에도 두 종류가 있다…… 아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만하자.

"뭐."

나는 블루 스카이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 순간이 좋았다. 목을 타고 넘어들어오는 그 뜨거운 감각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마신다.’ 실제 하늘의 맛을 알 수는 없지만, 꽤 근사한 표현이었다. 그 대신 다른 술에 비해 취하기 쉽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술꾼이 아니다.

몇 분? 몇십 분? 확신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몇 시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억겁의 시간이니 어쩌니 하며 소설에서는 늘 침묵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그냥 소설을 읽을 때나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

정말 그렇게 느껴지는 침묵도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믿어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그녀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당사자에게 늘 듣기 좋은 형태로 나타나진 않는다.

"미안해요, 오빠. 저도 모르게 그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힘겹게 말을 토해낸다.

"잘 모르겠지만, 반가웠나 봐요."

이 아이는 이미 인과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걸까. 아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만담이었는데, 아무래도 여기까진 것만 같다. 모처럼 평범한 화제를 고민할 시간일까.

그녀의 하얀 뺨과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까. 평범한 사람들은.

최근에 영화 뭐 봤어? 영화 볼래? 요즘 듣는 노래 있어? 노래방 갈까? 근래에 본 책 있어? 교보문고 가볼래? 최근, 요즘, 근래, 최근, 요즘, 근래, 그리고 또 최근, 요즘, 근래. 미지수 X를 구하려면 몇 번이나 알고리즘을 돌려야 할까.

젠장할.

프로게스테론 성인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백만 년 전쯤이었나 보다. 결국, 화제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왜 울었어?"
"그냥요."
"그러냐."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도 덩달아 시큰둥하게 입을 연다.

"한 번."
"뭐?"
"한 번밖에 안 물어봤잖아요?"

아하. 그런 거로군.

그러나 예전의 자신이라면 타인이야 어떻게 되건 알 바 아니었을 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나 자신이 그것을 원했다.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지도 않고, 필요 이상으로 접점을 만들지도 않는다.

손을 돌려 닿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움켜쥐고, 놓지 않고, 끝내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메말라 있다. 무언가를 얻기에는 부적합하지만, 아무하고도 관계성을 맺지 않는다는 조건을 성취하려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좋았다. 목적하는 것을 찾고, 이용할 수 있는 타인은 최대한 이용하고, 서로 금을 그어 나누어떨어지면 그만일 테니까.

애초부터, 이해타산 외에 나의 비상식과 타인의 상식은 결국 평행관계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접점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되는 형식의 행위이다. 역시, 자신은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상냥한 인간은 아니다. 사람이 말할 정도로 상냥한 인간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서, 나는 황량해진 가슴에 차가운 감개를 느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겠지만, 난 일부러 타인의 상처를 건드리는 취미는 없어."
"보통은 여기서 더 물어봐야 정상 아닌가요?"
"지금 그 말은 내가 정상이 아니란 뜻을 돌려서 한 거 아니야?"
"자각하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우리 학교에서 선배만큼 특이한 사람도 없을걸요."
"너, 놀라는 거 너무 티 나게 한다. 얼굴 근육이 부자연스러워."

그러고 보니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이 자리에 “그녀”도 함께 있었다면 놀라 자빠질만한 광경이겠지. 하긴, “그녀”가 지각하는 내 이미지도 어떤 의미에선 가장(假裝)한 모습이지만.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 취한다는 것도 뜻밖에 피곤한 일이다. 동성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게 이성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오빠는 뭔가 바보 같은데 천재라는 느낌이에요."

그런 말을 들으면 뭔가 획기적인 반박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에 시달리잖아. 나는 뭔가 바보 같은 천재의 심정으로 골몰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울었구나."
"벌써 이해하지 마요."
"왜 울었는데?"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분 나쁜 직감은 때때로 잘 맞았다─이럴 때만 묘하게 들어맞는 그런 예감이란 것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쓸모없다고 생각한 채─대화에 몰두하다 보면 불현듯 그런 순간이 온다. 아, 지금이구나― 라는, 그런 순간 말이다.

"헤어졌거든요."

누구와? 하고 물을 만큼 나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풀기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멋대가리 없는 소리를 내버린다.

"아아."


침묵에도 종류가 있다. 그렇게까지 세밀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침묵에도 향수처럼 투명한 색깔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다. 맛도 난다. 무슨 맛이냐고? 글쎄. 지금은 지나치게 신 오렌지 같은 느낌일까. 어색함은 어쩐지 오렌지색 같은 느낌 아닌가?

"으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만화나 소설에서 백만 번쯤 이런 상황이 등장한다고 해서 내가 그런 상황을 항상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괜히 물어봤죠?"
"네가 시켰잖아."

이런 어린아이나 할법한 반박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문예부는 아무 일 없지?"
"네, 선배가 나간 뒤론 더 좋아지지도 않고,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이니까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 사람」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변하지 않는다. 정지停止. 정체停滯. 언제까지나 그대로. 내가 그날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벗어날 수 없이, 영원히.

─"다른 사람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날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본인을 위해서 행동하고,
─날 좋아한다고 했지만 날 이해해주려고도,
─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더이상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제 끝내자."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헤집는 행위는 언제 해도 황산이 든 용기에 손을 집어넣은 기분이란 말밖에 못 하겠다. 마치 산채로 몸속의 장기를 끄집어낸 것 같은 불쾌감이 끝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은 맞았다. 나라는 인간을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하게 본 것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러므로, 내 곁을 떠난 것이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 사람」을 끊어낸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사실은 끊어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난 아직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사람」에게 용서받고 싶다고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잘못이 없다. 「그 사람」이 잘못할 리 없다. 그러니까 죄는 나에게 있다.

언제나 화사하게 웃어주던 그녀의 모습. 언제나 부드럽게 자신을 감싸 안아주던 그녀의 모습. 나는 어쩌면, 다시 한 번 그것을 경험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바로 그 순간을─.

"…빠?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잠시 술기운이 도져서 그래."

내가 그렇게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손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걱정하는 얼굴이 애처로워 보이는 건 갸름한 얼굴이라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위로는 이 아이에게도 필요할 터인데. 도리어 내가 위로를 받았어.

"부장은 여전히?"
"수연 선배가 맡고 있어요."

당시 문예부 부장이 「그 사람」이었기에 헤어지고 난 뒤, 이 아이와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도망쳤다, 라고 생각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런 마당에 더는 문예부에 있을 필요조차 없었기에 내 발로 나왔다. 부원들에겐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겠다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서 괜한 말은 하지 말라고 했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므로. 그러나 헤어진 후 연락은 전혀 없었다.

나나 「그 사람」이나 서로에게 먼저 전화할 타입은 아니니까. 아니, 둘 다 상대를 피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거기다가 「그 사람」에게 다른 애인도 생겼는데 구태여 헤어진 남자에게 연락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나? 그래도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과거는 지울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까란 문제는 지금 정할 수 있지만, 이미 있었던 사실을 부정할 순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이 아주 조금, 나를 힘들게 한다.

난 단칼에 「그 사람」을 끊어냈다고 생각─결과적으로 착각이었지만─했지만, 보는 모든 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모든 일을 의심하고, 그 뒤의 의미까지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난 왜 그 단순한 일에 대해 굳이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뒤의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에 찌들어 선가?

나 자신이 지저분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원래 자기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럼 어차피 내가 보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지저분한 얼굴과 속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오빠는 여전히 수연 선배 좋아하시나 보네요."

나는 차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아직 좋아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감정적인 미련만큼은 버렸을 터인데….

"그렇게 보여?"
"표정에서 다 드러나요.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런 얼굴 하지 않겠죠."

그런 걸까. 갑자기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거짓말이지만.

"…미안해요."
"왜 갑자기 사과해?"
"방금은 선배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역시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이런 한심한 만담 따위로 위로가 될 리 없다. 그 찰나에 또 눈이 마주쳤다. 같은 마주침이라고 해서, 항상 똑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저기."

입을 여는 동시에 후회하고 만다. 바보처럼 허공을 움켜쥔 오른손이 부표처럼 떠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귀에 속삭이기라도 한 것처럼 또렷한 문장이 들려왔다.

그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라고.

"………."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란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 그리고 나오코. 여주인공에 관한 묘사를 떠올려 보니, 불현듯 옆에서 인상을 쓴 채 술잔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애를 의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이 아이, 자세히 보면 어딘가 닮지 않았나?

"그런데 아까부터 왜 선배랑 오빠랑 헷갈리게 섞어서 부르냐?"
"흠."

그게 그렇게 심각한 고민거리였는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푹 인상을 썼다. 순간 아주 깊은 늪 같은 곳에 손을 쑥 찔러 넣은 듯한 찜찜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늪 아래에는 뜬금없이 광활한 바다가 있다. 멀리서 동료 물고기가 꼬리를 파닥대며 허겁지겁 헤엄쳐온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동료 물고기가 헉헉거리며 아가미를 뻐끔댄다. 도망쳐! 은빛 그물망이 내려온다. 어디선가 화재경보가 울린다.

"섞어 쓰면 어쩐지 미묘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멍이랄까, 머엉이랄까. 아니면 머어엉이랄까. 수줍게 웃으며 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여자란 생물은 정말이지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나는 겸연쩍게 고개를 돌렸다. 철없게도 이래서 사람 만나는 게 재밌다고들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적당히 놀려."
"헤헤."

왠지 모르게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얼마 만이었을까. 최근에는 이런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던 것 같다. 삶의 여유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아와서일까?


"뭔가, 이런 질문 하면 이상한 애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요."
"괜찮아. 원래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니까."

그녀는 못 들은 것처럼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요?"

가끔 여자들이 이러면 남자는 정말 혼란스러워진다. 개미가 된 기분이다. 개미에게 세상은 2차원이다. 그 2차원의 세계에 갑자기 호기심 많은 꼬맹이의 손가락이 쿵, 하고 나타나면, 개미로서는 그저 황당무계할 뿐이다. 동서남북 어디서 온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웬 분홍색의 괴생명체가 출몰한 것이다.

"어차피 헤어질 텐데, 왜 굳이 힘들게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파하는 걸까요?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헤어질 텐데, 정말 사랑한다면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는 게 진짜 사랑하는 거 아닌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깍지를 끼며 말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여자애들은 너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경향이 있어."
"칫. 기분 나쁘네."

나도 그랬었고 말이지. 뒷말은 일부러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오빠, 이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미리 준비해 둔 대답 같은 거 없어요?"
"대답이라 봐야……."

애초에 그런 식으로 물으면 대답할 기분이 나겠냐?

"설령 남성혐오증이 있는 여성이라 해도 나중엔 애인을 사귀게 되니까. 사귀기 전의 자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겠지만, 길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한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 그렇게 다들 연인이 되는 거고."

그 말에 작은 고개가 한참을 갸웃댄다.

"뭔가 안 어울리네. 오빠, 운명론자였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게 되는 게 사랑이 아닐까. 자신의 의지로든, 아니든."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전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사람은 사랑할 기회가 와도 선택할 수 있어요. 이 사람을 사랑할 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하고 말이죠. 사랑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에요."

진지한 눈동자에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싫지만 져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지중에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정말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에게나 ‘특별한 사람’은 있지 않아? 운명이든, 우연이든 간에 사람들은 그걸 일컬어 인연이라 불러."
"특별한 사람 같은 건 없어요. 사람은 자기 주관대로 다른 누군가를 보잖아요? 설령 자신에게 있어 누군가가 ‘특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도 역시 자신이 ‘특별한 사람’ 일거란 보장을 어떻게 하죠?"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다. 특별한 사람은 없다. 문득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만난 여성 중 멀쩡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주로 정신적인 의미에서─.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 중에선 「그 사람」이 상위순위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서 멀어지면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물론 좋은 여성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떠났다. 거기다가 애인까지 있는 사람에게 이제 와서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을 의심하면서 봐야 한다는 것보다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다시 말해서, 한 번 내 곁을 떠난 사람이 두 번 떠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이야기도 그쯤 했으면 이제 일해야 할 시간이지? 미안해요, 시현 씨. 이 아이도 아는 사람을 봐서 반가웠던 모양이니까."
"응, 알았어. 그럼 선배, 나중에 봐요."

내가 손을 들자 그녀들은 바의 구석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샤워실과 침실이 있었는데, 그건 이곳에서 생활하는 마담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사람 따라 말투 바꾸는 거, 나라면 금방 피곤해져서 관둘 것 같군."

마담이 팔짱을 끼었다. 이 사람은 어떤 자세를 취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단 말이야. 전에 모델 일이라도 했던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저 아이나 너나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
"전 별로 웃겨서 웃은 건 아닙니다만."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진짜로 유쾌해지는 일은 없었다. 늘 어두운 굴 밑바닥에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의식 중에 나는 연기를 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애쓰고 있을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 사람이 원하고 있는 대화의 리듬에 어울려주고 있는 겁니다."
"댄스파티에서 상대방의 호흡을 맞춰주는 것처럼?"
"뭐, 비슷하군요."

대충 대답하며 사교장에서 위압감을 뿌리는 마담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럴듯하군.

"제가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것 아닙니까? 폐가 된 건 아닌지…."
"별 걱정을 다 하는군. 오래간만에 왔으니 술이나 한 잔 더해."

나는 마담이 건네준 술잔을 들었다. 향긋한 향기, 하지만, 술잔 속에 자신의 눈이 비치자 술잔을 흔들어 지워버렸다. 마담은 내가 블루 스카이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니,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가까울 것이다. 시선 저편에서 마담이 보드카를 다시 집어 들었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굳었어. 정말 무슨 일 있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대답했다.

"…조만간 ‘그 남자’가 이 도시에 돌아올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보드카를 붓는 마담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술 몇 방울이 튀어 바를 더럽혔지만, 마담은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침착하게 닦아냈다. 역시 프로야.

"이제와서 돌아올 필요는 없을 텐데?"
"7명을 살해하고도 홀연히 종적을 감춘 연쇄 살인마의 예전 거주지는 여기 말곤 없습니다."

나는 술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아마도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을 생각이겠지요. 그것도 아주 소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