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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기묘한 이야기-Repetition(반복)

2010.10.01 06:58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157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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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기억(記憶)이란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데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Prologue



물에 넣어진 설탕처럼 부드럽게 녹아 흐르는 햇살도, 30분 동안 5분마다 시끄러운 기계음을 울리는 휴대전화도, 귀를 찌르는 벨소리도 깨우지 못했던 시현의 잠을 깨운 것은 난폭하게 흔드는 손길이었다. 처음엔 부드러운 정도였던 진동의 강도는 단조증가 하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곡선이 상한선에 다다르면 진동 운동이 타격으로 바뀌었을 테지만. 시현이 상한선에 다다르기 전 아슬아슬한 순간에 눈을 뜬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퍽퍽하게 피로감이 진 눈을 따뜻한 무언가가 덮었다. 희고 가는 여자의 손이었다.

"어제 몇 시에 잤어?"
"그냥 와서 잤어요."

한번 들은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청아한 음색. 그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시현은 그녀의 손을 얼굴에서 끌어내리며 상체를 반쯤 일으켜 벽에 늘어지듯 기대었다. 겨울날 늦은 아침의 햇볕은 그다지 따갑지 않았다.

"벌써 오늘이 가는 날이었군요."

그렇게 말한 시현은 배터리가 한 칸 남은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 십이 분.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일어나본 지도 얼마 만이었더라? 당연히 기억날 법한 일도 그에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열 시 비행기표 끊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빨리 가 봐요."
"그걸 어떻게 기억해?"

바닥에 널브러진 시현의 바지를 주워 올리던 그녀가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며 물었다. 시현은 갑자기 슬퍼졌다. 아무리 떠난다지만 정말로 오늘부터 나와 ‘타인’으로 지낼 생각인 건가.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이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보고 기억력 좋다고 말해준 건 선배가 처음이었습니다. 잊으셨군요."

그녀의 대답 없이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시현은 눈을 감고 자는 듯이 벽에 기대앉아있었고, 그녀는 방 안을 대충 정리하는 데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표는…… 열한 시 반으로 다시 예약했어. 그리고 정리 좀 하고 살아."

당신에게서 그 말이 참 듣고 싶었는데. 그는 그 말을 하고 싶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을 억지로 참느라 입술을 작게 오므렸다. 관두자. 공연히 이런 말을 했다간 해묵은 상처만 다시 도질 뿐이다. 왠지 오늘따라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이런 일로 자신이 동요할 리가 없다.

"알았어요."

갑자기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아주 잠깐 눈썹을 찌푸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표정을 가장했다. 무엇 때문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할 수 있으면 아침은 거르지 마. 귀찮더라도 해 먹고. 정 안 되겠으면 인스턴트라도 먹어."
"생각은 해보죠."

이 사람은 자신이 떠나는 마당에도 남을 걱정하는구나, 하고 시현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아리 사람들에겐 괜한 말 하지 말고."

돌연 그녀의 입에서 '괜한 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시현은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가슴 속을 기어 다니며 이곳저곳 구멍을 뚫어놓는 것 같았다. 참기 어려운 슬픔에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넣고 최대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기 위해 시현은 평생 쓸 자제심을 다 짜내야 했다.

"알았어요."

조금 늦게 대답하긴 했지만 흠 잡을 데 없이 평범한 어조의 대답. 그녀는 만족했는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현에게 다가와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려놨다.

"미안, 잠깐 수고 좀 해. 그리고 귀국할 때 선물 사서 올 테니까─"
"선물 같은 건 안 사도─"

둘 다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침실용 탁자 위에는 그녀와 시현이 서로 반쯤 끌어안은 채로, 동해 수평선의 일출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낡은 액자에 담겨 있었다. 액자에 조각된 조금 비뚤어진 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는 조악한 연인들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그 하트모양과 사진 속 자세히 보지 않으면 웃는지 알 수 없는 시현과 행복하게 웃는 예전의 자기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접어 탁자 위에 엎어놓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갈게. 그리고 누가 보기 전에 그거 치워."
"알았어요."

시현이 방을 나가는 전 연인의 등 뒤에 대고 그 말을 할 때에는 아무런 자제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그는 그 사실에 짐짓 놀라워했다.



#0-0 monologue 1



"어제 몇 시에 잤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 사람」의 얼굴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기에(물론 당연하게도 착각에 불과했지만), 시현은 조금 기분이 울적해졌다. 왜 하필 지금에 와서야 「그 사람」의 꿈을 꾼 것인가.

"그냥 와서 잤어요."

먼저 질문한 주제에 그녀는 시현의 대답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거실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시현을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쓸데없이 깨끗하군요.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난다고 해야 할까."
"쓸 일이 거의 없다보니…. 다른 방은 지저분할 겁니다."
"자랑이네요."

그녀의 사나운 되받음 이후로 그녀가 휴대전화 자판을 연방 눌러대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계속됐다. 아무래도 오늘도 「그 꿈」을 꾼 모양이군. 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저기압인 것도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다. 원인 제공은 자신이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미안해요.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그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아까와 같은 상황의 재연을 막기 위해 시현은 황급히 덧붙였다.

"컴퓨터라도 할래요?"
"손님 계정으로?"

다 안다는 표정의 그녀 앞에서 시현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꿰뚫어 보았다면 더이상 할 말은 없다.

"금방 비워 주죠."

그녀는 손사래를 내쳤다.

"필요 없어요. 배고프니까 점심이나 시켜줘요."
"내가 만들겠습니다."
"당신, 그다지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설마 점심 사 먹을 돈도 없는 건 아니죠?"

칼같이 떨어지는 거부 의사. 미간에 조금 주름을 잡은 채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에게 그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1─그의 시점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 당신에게 닥친 고통은 현실이다."

- 룬 언그알레이, 『낙천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의 대담』 中




문이 열리고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자, 바의 뒤에서 와인 잔을 닦고 있던 중년 여성이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녀는 검은색 샤넬 투피스 차림에 작고 동그란 독서용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자, 눈썹을 살짝 추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손님들 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래서 왔어요."

그녀는 어련하셔, 라고 말하고는 하던 작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바의 주인 겸 사장이다. 본명은 기억나지 않지만(본인이 그 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란 이유도 있다.), 통칭 '마담'으로 불린다. 바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술병과 한쪽 책장에 가득한 음반과 책들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좁게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답답하지도 않으면서도 등 뒤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지난번에 같이 왔던 ‘그 아이’는?"
"집에 있을 겁니다."
"싸웠나?"

여자의 감이란 건가. 오늘따라 예리하시네. 물론 마담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내가 그것을 인정할 이유는 없다. 거기까지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단순히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그 말, 농담으로 한 거라면 전혀 안 웃겨."

사람이란 결국엔 그렇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이다. 마담의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상황을 인식하는 토대가 자기 입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변하지 않았군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책장에서 음반을 하나 꺼내 들며 마담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하는 술은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일'을 마친 후 즐기는 술 한 잔과 음악은 나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오래된 LP와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 서적이 멋스럽게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도 내 발걸음을 유혹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Graveworm의 위치가 그대로인 걸 보니."
"그들의 음악도 그대로지."

마담의 재치 있는 답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낡아빠진 구식 쥬크 박스에 LP를 올려 두고 동전 몇 개를 집어넣었다.

"A Dreaming Beauty……."

곧 쥬크 박스에서 음악에 흘러나왔다. 그 거친 비트를 들으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깊이 생각할 것이 있을 때도 종종 이곳을 찾아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른 바와 달리 음악이 많고, 또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나를 만족하게 했다.


─Across the open fields, on burial ground.


'오늘 역시 어제의 반복, 이젠 지겹다 못 해 한숨부터 나온다.'

이렇게 또 오늘도 판에 박힌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특별히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열을 기울이는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 그것이 마음 한구석에 걸린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같은 행동을 취하며,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물론 100%는 아니겠지만, 단지 그것뿐인 일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Beside the ancient lake, through painful screams.


아무것도 없이 단지 반복될 뿐이라면, 그런 일상 따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나?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는 것인가?아니, 산다는 것조차 그냥 반복되는 나선의 흐름에 묻히는 것인가? 일상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지루함과도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일상이라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방법조차 모르면서….


─When pride of darkness rise, upon the sky. We are marching…


그러나 어제 본 뉴스는 나로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우자(愚者)가 작은 정의감과 쓸데없는 인도주의를 만족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향해 가서 멋대로 죽은 정도로 잘도 침체되어 있다.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한다거나, 애도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자살 지원자가 이상에 도취해서 폭주한 결과로 죽어버렸고, 단지 그것뿐이다. 한탄스럽기는커녕 우스꽝스러움의 극에 달한 희극이 아닌가.


─Side by side!!!


그럼에도, 모두가 한결같이 우울함을 생각나게 하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비극적인 무대의 배우를 연기하는 것은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었다. 안면도 없는 인간이 죽었는데, 슬퍼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했으니 도의적인 책임감에 은혜를 느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죽어 있다. 생전에 어떠한 일을 했든 간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기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광경을 이런 식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이 비정상일 거라고 머릿속 한구석에서 냉정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우리네 인생을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했다. 발밑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세상은 오로지 적막에 휩싸여 있고, 누구도 말하지 않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 아득하고 무서워서 숨이 막혀온다.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서 생각해버린다. 내가 없는 날이란 게 언젠가는 와버리는구나. 그런 세상조차 상상할 수 없는 날이라는 게 언젠가는 와버리는구나.

나는 그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그 낳은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았다. 그리고 결국은 머릿속이 완전하게 비어 버렸다. 사념의 끝은 그저 무한했다. 무한의 세계 속에서 난 아주 작고 작아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맹렬하게 움직이는 분자들 속에서 나란 한 유기체로서의 삶은 너무 매우 어려웠다.

이 순간이란 겨우 그런 정도이다. 그리고 우리네의 인생이란 고작 그런 정도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보잘것없는 순간이 끝없이 어우러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



#1-1 monologue 2



"무신경하네요. 어디를 가서 이제 돌아오는 거죠?"

저물녘이 되어 돌아온 시현은 분명히 잠근 뒤에 열쇠까지 들고 나갔던 자신의 방에서 나온 그녀를 보고 순간 얼이 빠졌다. 그녀는 아직 놀라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컴퓨터도 뒤져봤는데, 기대하고 있던 파일은 안 나오더군요."

그녀의 시선 끝에 걸린 거실 구석의 컴퓨터 모니터엔 '동영상 파일 검색 결과' 창이 띄워져 있었다. 시현의 기억 속에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려 준 기억은 없었다.

"덕분에 잘 쓰기는 했지만… 의외네요. 생각보다 금욕적이군요."

아무런 반성의 기미도 없이 태연한 기색으로 서 있는 그녀를 보자, 그는 순간 자신이 화를 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가장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손을 어깨 위로 슬쩍 들어 올렸는데, 거기에는 은빛 열쇠가 반짝거리고 있는 것을 본 시현은 황급히 안주머니로 손을 뻗어 열쇠를 확인했다.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열쇠가 하나 더 있는 것인가.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지만, 당신 몰래 복제한 적은 없어요.
주방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슬쩍했을 뿐이지."

「그 사람」이 아직 여기에 살고 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열쇠였나…. 그 열쇠를 처분하는 걸 깜빡했군. 시현은 조용히 그 열쇠로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머니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뒷걸음쳐 소파까지 물러났다.

"나한테도 보여주지 못할 게 대체 뭔가요?"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에 시현은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냉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화 안 났으면 좋겠지만 났어도 내지 마요. 내가 먼저 화낼 테니까."

그 문장이 가진 의외성에 시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똑바로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손 위에는 「그 사람」이 치우라고 말했던 예의 그 액자가 있었다. 기어이 발견된 것인가. 그 자신이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도 한몫했겠지만.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며 약간 힐난하는 듯한 인상을 지었다.

"당신, 지금 나 말고 따로 만나는 여자라든지 있어요?"

이유야 어찌하든 동거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엔 꽤 거북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현이 뭐라고 생각하던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로 대답을 재촉했다.

"있어요?"
"없습니다."

시현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도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실연당한 때는?"
"……1년하고 7개월 전."

「그 사람」에게 끝내자는 말을 들었을 때군요, 라는 말은 두 사람에게 필요 없는 말이었기에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대로 잠시 모두가 침묵하는 순간이 흘렀다.

"……당신,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이잖아요."
"예."

그러고 보면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셨던 게 이 나이였지, 시현은 속으로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도 사랑해요?"

누구를, 이란 질문도 그에겐 전혀 필요 없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액자가 떨어져 방바닥에 거세게 부딪히며 유리파편을 흩뿌렸다. 가슴속에서 떨어지는 그 유리조각에 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말은 잘하네요. 그런 사람이 액자를 아직 가지고 있는 건 어떻게 변명할 생각이죠?"

그녀의 말끝 부분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시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고함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쾅하는 문소리가 아직도 시현의 귀에 윙윙거리는 중에 문을 잠그는 착 하는 소리가 더해지자, 시현은 참기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감정이 밀려와 가슴부터 땅으로 꺼지는 듯했다. 서 있기가 어려웠다. 아니, 왜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현은 모든 것을 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