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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Seven Stars

2010.08.27 07:41

乾天HaNeuL 조회 수:247 추천:3

extra_vars1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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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갈림길


 


  베리 일행은 촌장이 나가고 난 뒤 대략 삼십 여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토리아로 인해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그 적막감을 간혹 없애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이 앉아만 있는 이유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 베리 때문이었다. 기수는 그에 대해서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아무리 짧아도 1년 이상을 같이 여행한 다름 사람들은, 현재의 베리가 매우 이상한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떤 이는 팔짱을 킨 상태로 베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흐음, 묘한 분위기네.’




  기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비어있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힐끗거리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베리가 그 오랜 침묵을 깨면서 입을 열었다. 그는 탁자 위에 양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의 두 눈에서는 굳은 결의가 느껴질 정도였고, 조금의 미소도 떠올라 있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는 단호함이 배어 나왔다.




  “저는…….”




  또박또박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음성에서는 오랜 고뇌가 엿보였는데, 덕분에 기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의뢰를 받아들일 겁니다.”




  침착하면서도 긴장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그들의 예상대로였다. 베리타스는 이번 일에 돈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임에도 틀림이 없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포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을 꿀꺽 삼키더니 굳게 다문 입을 나지막하게 뗐다.




  “이유를 알려 줄 수 있겠나, 베리타스.”




  기수가 그들과 만나고 난 뒤, 사상처음으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포티스였다. 그 정도로 지금은 장난을 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설마 돈 때문은 아니겠지. 너의 얼굴, 너의 몸짓, 너의 말투, 그 모든 것이 지난 2년 가까이의 시간에서 보아왔던 그 어떠한 것보다도 듬직하다고 할까나. 아무튼 긴장해 있고, 또 결의에 차있는 것 같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 아주 큰 이유가 있겠지.”


  “예. 분명히 저에게는 그 이유가 존재합니다. 금화 500개를 뛰어 넘는 훨씬 큰 이유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려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저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포티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기대어 세워 둔 자신의 무기로 향해 걸어간 다음에, 그것을 어린 아이를 만지듯 어루만졌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할 텐가? 설마 또다시 도발이라는 하수를 두지는 않겠지?”


  “…….”




  그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베리는 천천히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포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몸이 또다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사실 저도 이번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큽니다. 소머리 괴물에 어렸을 때 크게 놀랐던 기억이 여전히 저를 얽매고 있고, 그것보다 더한 녀석을 해치우러 가야한다는 사실은 저를 도망가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의뢰는, 단지 돈 때문에 모든 걸 망각한 채 달려들 정도를 훨씬 능가하기도 합니다.”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나가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는 눈을 뜨고는 자신의 일행에 포함된 사람들, 아무르, 포티스, 스페란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수를 차례차례 바라본 다음에 다시 말을 해나갔다.




  “이번 일에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사지에 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한 분도 저와 같이 가지 않겠다, 나는 갈 수 없다고 하신다 해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그의 음성이 커졌다. 온 집안을 울릴 정도로 높은 음성이었다.




  “저는 혼자서라도 가야합니다.”




  한 마디, 또 한 마디, 끊어가면서 말하였다. 굳은 결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말투였다. 사실 그의 말로 인하여,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피가 끓는 것 같은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죽일 수도, 미궁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살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베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대로 이마를 땅에다 대었다. 자신이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으로 간절함을 드러내며, 그는 그들에 마음에 호소하였다.




  “…….”




  포티스는 그것을 보더니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오른손을 그의 왼쪽 어깨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으면서 말하였다.




  “당연히 네 놈 혼자서 죽게 내버려둘 수야 없지. 나는 애송이, 네 녀석과 함께 그 망할 잡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그 목을 따러 가야겠네.”




  베리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고개를 급히 들었다. 장난기가 조금 담겨 있기는 했지만, 결의를 나타내는 포티스의 말을 듣고 그는 감사함을 느꼈다.




  “뭐, 나야……. 그래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겠네. 너를 돌봐 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뭐, 그렇다고.”




  아무르는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참가의 뜻을 밝혔다. 스페란자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임으로 뜻을 함께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수였다.


  사실 기수는 그곳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었다. 사실 미노타우르스와 같은 괴력을 지닌 괴물에 그의 체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체의 급소를 노리는 타격 방식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을 터였다. 아니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전문적으로 무술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니었고, 이런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뿔뿔이 흩어진 다른 친구들을 찾는 것이었고, 또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나도 가야겠어. 오히려 네가 말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와 또 여기에 이는 다른 분들이 나에게 나타내준 그 친절에 보다파고 시퍼.”




  기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베리를 응시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베리는 천천히 일어서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언젠가 꼭 그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흥, 그런 복잡해 보이는 이유 같은 거 필요 없다, 애송아. 그냥 빨리 필요한 짐이나 챙겨서 그 미궁인지 뭔지 하는 것에 들어가 그 놈의 멱이나 따자고.”




  포티스가 주먹으로 베리의 가슴팍을 툭툭 치면서 말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 눈에서는 반드시 이 일을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강인함이 뿜어져 나왔다.






  “저 촌장님.”




  마을의 청년은 자신과 함께 걷고 있는 촌장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뗐다. 지금은 등이 굽고,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며, 또 한쪽 다리를 절고 있기까지 하였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촌장에게는 다른 노인들과는 다르게, 확연히 알 수 있는 기개가 존재하였다.




  “왜 그러나, 호린.”


  “저들이 과연 그 놈을 처리해줄까요?”




  호린이라는 마을 청년의 질문에 촌장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여쁜 아이를 바라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드시 그리 해줄 거네. 저들을 이끄는 자는 꼭 그곳에 가야할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일세. 두려움이 아무리 자신의 몸을 지배하더라도, 마치 계약에 묶인 자처럼 갈 수밖에 없을 걸세.”


  “…어떻게 그렇게 확언을 하실 수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하긴 뭐 촌장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요. 이제까지 마을에서 억울하게 죽은 녀석만 벌써 서른 명 남짓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래. 그나마 그 정도로 막은 것이 다행일 지경이지. 만약 놈이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아마도 큰 재난이 왕국 곳곳에서 벌어지게 될 거네.”




  상상만 해도 손발에 땀이 배어 나왔다. 촌장은 두 손으로 잡고 있던 지팡이를 꽉 움켜잡고는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임시 병동이었다. 마을 회관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매년 잔치를 열 때마다, 그러니까 마을의 총각과 처녀들이 부부의 연을 맺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또 수확의 계절에 풍성한 잔치를 열기 위해 사용하던 장소였다. 그런데 이제는 환자들로 가득 찬, 그런 슬프고도 비참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화기애애하게 웃던 사람들이, 지금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기절하였다.




  “촌장님.”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환자를 돌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그는 손짓으로 그들을 만류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하도록 하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글로티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던 청년들 중 하나였다. 이제 결혼을 한지 1년도 안 된 신혼의 달콤함을 만끽하던 그 녀석이, 지금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눈물자국으로 얼굴이 엉망진창 상태로 지쳐 쓰러진 그의 아내가 있었다.




  “후우……. 못난 녀석.”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었던가? 그렇게 꽃다운 나이에, 아름다운 아내를 내버려두고, 혼자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다니, 몹쓸 놈이 따로 없었다.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계셨는데. 저도 잘……. 아 저기 오시네요.”




  호린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촌장이 찾는 그 사람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그, 아니 그녀를 가리켰다.


  피가 묻은 앞치마를 벗으면서 환자들을 관찰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의사의 모습이었다. 강한 신념이 담긴 검은 눈동자로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또 다른 여성이 다가오더니 다른 앞치마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의 몸을 가리켰는데, 그 노란 물을 들인 원피스마저도 피범벅인 상태였다. 그것을 본 상대방 여자는 뭔가 복잡한 미소를 짓더니, 손짓으로 어디론 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결국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말은 안 통해도 의미는 다 통하는 것 같군.”


  “그래도 여기 온지 일주일이 좀 넘으셨는데, 상당히 많은 단어들을 배우신 것 같더라고요. 실력도 출중하시고, 머리도 좋으시고, 또 미모도…….”




  호린은 말을 하다가 급히 멈추었다. 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호린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었는데, 확실히 그의 말대로 그녀의 미모는 상당히 뛰어났다.


  호리호리한 날씬한 체구에, 웬만한 여성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만큼의 큰 키, 뽀얀 피부, 초롱초롱한 검은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었다. 단지 한 가지 옥에 티는 대충 말아 나무 막대기 비슷한 것으로 꽂아 넣어 정리한 검은 머리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자를 보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긴 머리칼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또 주변에서 사람이 자꾸 죽어나가는데 치장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아……!”




  멀리서 다른 환자들을 돌보다가, 이곳에 온 촌장을 마침내 발견한 그녀는 급히 그가 있는 곳에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촌장에게 인사를 하였고, 촌장 역시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고맙네, 의사 선생.”


  “아…닙니…다.”




  그녀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었는지 더듬거리면서 말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접한 지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고, 애당초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루리, 기수와 더불어 낯선 곳에 강제로 초대당한 일곱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저 못난 녀석, 끝까지 살리려고 애쓰신 것도 고맙네. 끌끌, 다른 사람들 마음에 무거운 짐만 내려놓고, 눈 한 번도 안 뜬 채 그리 가려고 하다니.”




  그녀는 촌장의 말을 단편적으로 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마음에 와 닿았다. 루리는 슬픈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리면서, 촌장과 죽어가는 환자, 그리고 그 환자 옆에 쓰러져 있는 아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루리는 잠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팔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맥을 짚었다. 지금 그 사람의 상태와 맥의 상태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녀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이런 상태는 곧 임종을 의미하였다. 어떠한 약도, 어떠한 치료법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 그래서 루리는 마을의 촌장을 부른 것이었다. 하다못해 그의 마지막을 마을의 어르신에게라도 보여드리기 위해서였다.




  “…….”




  원피스의 한쪽에 꽂혀 있는 깃털을 뽑아다가 글로티라는 사람의 코에 가져다 댔다. 호흡도 약해진 상태로, 깃털은 별달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한손으로 잡고 있는 그 사람의 맥박은 점점 더 느려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힘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몸은 차가워지고 있었으며, 생명의 기운은 꺼져만 갔다.




  ‘나는 또 구해내지 못하는 걸까? 눈앞에서 지쳐 쓰러진 이 사람을 단지 이대로 보내야만 하는 걸까?’




  입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그녀는 속으로만 말하였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느낌, 슬픔에 온몸이 젖어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절망감에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마을에 온지 어느덧 팔 일째, 그 동안에 그녀가 떠나보낸 사람은 스무 명도 훨씬 넘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더 추가될 때가 온 것 같았다.


  루리는 침대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그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이미 심신이 엉망진창의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지만, 루리가 끈질기게 흔들어대자 마침내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에 죽어가는 자신의 남편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녀의 눈에서는 또다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아…….”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루리의 눈에서도 물이 고이더니,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주변에 점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다들 감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하는 데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어가던 사람이 마침내 자신의 생명 줄을 놓고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루리는 그 사람의 몸에 더 이상의 움직임, 즉 호흡을 하기 위한 움직임이 없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깃털을 그 사람의 코에 가져다 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미동이라도 보였던 그것이, 이번에는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루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망하셨…습니다.”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사용한 문장이 아마도 방금 말한 그것이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슬픔을 자아내는 말도,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게 만드는 말도 그것일 터였다.


  루리가 떨리는 음성으로 사망을 확인해 주자, 그 사람의 아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글로티를 흔들어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용없을 터였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이제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그 사람이 다시 깨어날 일은 없을 테니.


  울부짖는 아내, 옆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고는 허망한 표정과 함께, “내가 죽어야 하는데.”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는 촌장. 그들의 모습은 루리의 마음을 있는 대로 흔들어 놓았고,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입을 틀어막고는 그곳을 뛰쳐나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었다. 그녀는 우물가에 꿇어 앉아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사람을 살리는 의료인이 된 목적은, 단지 부모님의 말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이 계속 죽어나가자 자신감도 사라졌고, 또 자신이 왜 이 길을 택했는지 후회감만 늘어났다.


  그녀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한 십 여 분 가까이 눈물을 흘린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것 같았다. 루리는 우물을 길어 그 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냈다. 그리고는 남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그녀는 굳은 결의를 다지면서 다시 자신의 전장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그들을 삶의 길로 되돌려 놓는 전쟁을 하기 위해, 돌아갔다.






  베리 일행은 미노타우르스의 왕이 산다는 미궁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오기까지 이성을 잃은, 아니 애당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붉은 눈동자의 미노타우르스들만 십 여 마리 이상을 봤고, 그 중 한 마리하고는 직접적으로 조우하여서 전투를 벌였었다. 스페란자의 재치 있는 함정 주문과 포티스의 괴력으로 손쉽게 잡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어려움 없이 이곳까지 올 수는 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군요.”




  미궁의 입구 주변은 탁 트인 공간으로 그곳을 어슬렁거리는 미노타우르스들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다. 그것들에게 들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바람을 등지지 않았다는 점과 또한 아직 숲속에 숨어서 기척을 완전히 지운 상태라는 점이었다. 물론 베리나 기수가 자신들의 힘으로 기척을 지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스페란자가 정령을 하나 소환해서 냄새나 기척, 존재감들을 완전히 감춰놓은 상태였다.




  “여기 있는 놈들이 다 나 같은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 대 일로도 붙을 수 있겠다만, 애당초 파티의 리더라는 작자가 전혀 싸우지를 못하니. 쯧쯧.”


  “…….”




  이미 상당히 고취되어 있는, 그러니까 미노타우르스를 두 마리나 처결한 포티스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허리를 쫙 피고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베리타스를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베리는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입을 다문 상태였다.




  ‘쳇, 기껏 띄워 주었더니 괜히 또 나만 가지고 구박이야. 괴력 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드워프 주제에 무기도 못 만들고, 보석 세공에만 정신이 팔리고……. 응?’




  속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다가, 문득 자신의 옆을 스르르 하면서 지나가는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얼굴 가득히 떠올리면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붙잡았다.


  베리타스가 붙잡은 것은 가늘고 긴 생명체로, 다리가 없어서 배로 바닥을 기어 다니며, 혀를 날름거리는 놈으로, 즉 뱀이었다. 머리의 형태가 삼각형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성이 있는 위험한 놈은 아니었으니, 포티스를 놀리는 데에는 최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포티스 영감님.”


  “영감? 너 또 나를 영감으로 불렀냐? 애송이 자식이, 힘도 더럽게 없고, 체력도 없고, 싸움도 뒤지게도 못하…….”




  포티스는 베리를 마구 구박을 하다가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베리의 한 손으로 향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였다. 얼굴은 완전 백지장마냥 사색이 질렸고, 또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는지 영 이상하게 호흡을 하고 있었으며, 또 연신 입을 벙긋거리며 손가락으로 뱀을 가리켰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단단히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이거 제 마음의 선물입니다, 포티스 씨.”


  “네, 네, 네 놈!”




  베리가 일어서서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가자, 포티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베리가 또 앞으로 나가면 포티스는 또 뒤로 물러갔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무르는 숨을 죽인 채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평소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만을 짓던 스페란자까지도 약간의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기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 포티스 씨. 혹시…,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뱀…, 싫어하세요?”




  기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였다. 그는 포티스의 얼굴과 몸짓을 뚫어지게 관찰하였는데, 그의 질문을 들은 포티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치기는 했으나, 뭔가 뜨끔하였는지 얼굴색이 확연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들켰다는 사실 때문에 약간의 절망감도 얼굴 표정에 드러났다.




  ‘이건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공포의 대상물을 보는 정도네.’




  그 반응을 본 기수는 포티스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기어 다니는 뱀에 엄청나게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 받으세요!”




  천하의 악동이 된 베리가 온몸을 꼬고 있는 뱀을 포티스에게 툭 던졌다. 하필이면 그것이 포티스의 어깨에 정확하게 떨어졌는데, 녀석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포티스의 목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으아아악!”




  포티스는 걸걸한 목소리로 온 산에 울려 퍼질 법한 비명을 질렀다.




  “포티스 씨!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면……!”




  비명 소리 덕분에 주변에서 어슬렁대던 미노타우르스들이 그들의 위치를 발견하였다. 녀석들은 꼬리에 불붙은 소가 앞으로만 돌진하는 것처럼 맹렬하게 기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하였다.




  “온다.”




  스페란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품 안에 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예리하게 갈아 놓은 검이 과연 어느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르 역시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싸울 준비를 하였는데, 아무래도 불리한 상황인지라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베리!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장난을 지금 친 거야? 완전히 들켰잖아?”


  “들킨 건 내 책임이 아니고, 포티스 영감님이 소리를 지른 것 때문이잖아. 그리고 별달리 걱정할 필요도 없어.”


  “뭐?”


  “녀석들의 성미에 대해서 촌장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신 한 가지 사실이 있잖아. 그것만 있으면 녀석들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봐.”




   베리는 침착하게 말하였다.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 트라우마의 대상인 미노타우르스가 한 마리도 아니라 다섯 마리나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가운데, 그토록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에 기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제 고작 열넷, 아직 어린 아이와 같은 면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을 다루는 면에서, 그리고 행동하는 면에서 어른 못지않은 면들이 많은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기수 형.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뭔데?”


  “내가 봤을 때는 형은 스페란자 씨와 맞먹을 정도로 몸놀림이 좋은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녀석들을 좀 유인해줄 수 있겠어?”


  “유인? 내가?”




  기수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히 띄웠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인하는 일이라면 자신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스페란자가 하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뭐라고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란자를 슬쩍 쳐다 본 다음에 그것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너 제 정신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미끼 역을 저 사람한테 맡긴 거야?”


  “뭐 두고 보라고.”




  아무르는 한 손으로 베리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마구 흔들면서 말하였지만, 그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기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게다가 그의 입가에는 여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포티스 영감님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니, 우리에게 남은 비장의 카드는 스페란자 씨네요. 부탁해요!”


  “알았다.”




  그는 아직도 정신이 나간 채로 해롱거리는 포티스를 슬쩍 본 다음에, 스페란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응시하면서 장난기가 가득 찬 음성으로 말하였다. 아무리 봐도 행동하는 것이 영 지금 상황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란자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으며, 또 그의 부탁에 따라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들이 미노타우르스 사냥을 준비하기 시작할 무렵, 기수는 이곳저곳 뛰어 다니면서 녀석들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다니고 있었다.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집단 다구리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기수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잘 보며 몸을 움직였다. 그가 서있었던 곳마다 그것들의 강력한 공격이 떨어져서 거대한 구멍이 파이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도끼 자국, 칼자국, 그리고 바위가 떨어진 자국 등이 남아 있었다.


  몬스터들과 전투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학교에서 있었던 모종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혼혈이기에 남들과 달랐고, 남들과 달랐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것은 곧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학교가 끝난 후 뒤편에서 얻어터지기 일쑤였고, 그런 세월들이 축적되면서 일 대 다수로 싸우는 능력이 강화되었다. 적들의 공격을 피하고, 또 그것에 치명적인 공격을 입히는 것, 그것이 기수의 싸움이었다.


  다만 지금은 피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노타우르스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였고, 또 녀석들에게는 어떠한 약점이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으니 분명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만한 급소가 있을 법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어어어!”


  “이런 더 빨라졌잖아.”




  급히 뒤로 물러서다가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녀석들 중 하나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를 태세였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릴 상태였다.




  “망할!”




  이런 말도 안 되는 역할을 자신에게 왜 맡긴 것인지, 베리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원망의 시선을 보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녀석의 공격을 마지막까지 보고, 다른 녀석들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최적의 위치로 피신하는 것뿐이었다.




  ‘앞에 둘, 오른쪽에 하나, 뒤에 둘. 그렇다면 비는 곳은 왼쪽. 그런데 그곳에는 지금 날카로운 바위들이 많아서 좋지 않아. 그렇다면 어느 곳으로 뛰는 것이 좋을까? 뒤에 있는 녀석 중 하나는 지금 무기를 들고 있지 않으니 그곳으로? 하지만 녀석들의 손아귀 힘은 사람을 훨씬 능가할 텐데, 그곳으로 피한다고……. 에잇! 그렇다면 정면 돌파가 가장 합리적이겠다!’




  머리를 굴리면서 가장 안전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마지막까지 도끼의 움직임을 관찰한 다음에 옆으로 살짝 몸을 틀어서 그것을 피한 뒤, 앞으로 몸을 굴리면서, 방금 공격을 한 미노타우르스의 가랑이 사이를 굴러서 지나갔다. 그리고 뒤로 텀블링을 여러 번 하면서 그곳에서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졌다.




  “체조 배운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구나. 하하하.”




  녀석들과의 거리를 상당히 벌려 놓은 다음에, 어색한 웃음을 터드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단지 몸이 유연하다는 이유만으로 중학교 때 체조부에 억지로 끌려가서 마루운동을 했었던 일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기수 형! 아주 좋았어!”




  옆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서 베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더 먼저 시선이 간 사람을 스페란자였다. 그녀의 주변에 거대한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고, 또 머리 위에는 날카로운 창의 형태를 띤 빛들이 생성되어 있었다.




  “Ray Spear!”




  스페렌자의 날카로움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것은 산을 타고 퍼져 나가서 다시 메아리치며 돌아왔는데, 그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빛의 창이, 마치 투창이 된 것 마냥 날아가 미노타우르스 중 하나의 심장을 꿰뚫어 저 먼 곳으로 날려 버렸다. 다른 빛들도 남이 있는 녀석들을 꿰뚫어 그들이 있는 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보냈다.


  그것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스페란자가 쓰러지려 하였다. 옆에 서있던 아무르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사지에서 이리저리 도망치고 다니는 시간은 주문 영창의 시간이었네. 그런데 만난 지 고작 팔일 밖에 안 된 사람에게 그런 위험한 부탁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


  “이 주문은 5써클이 넘는 건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를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좀 많이 걸렸어. 그런데 형 정말 대단하다? 특히 녀석들을 피해 정면으로 돌진하여 피하는 걸 보고는 간담이 써늘해 질 정도였어!”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즐겁게 웃으며 넉살을 떠는 베리의 모습에 기수는 불만을 더는 늘어놓을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현재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그런 치찬 같은 거 안 먹힌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만약 상처를 입었거나 혹은 죽어가고 있었다면 너를 원망하여 저주란 저주는 있는 대로 퍼부어쓸 텐데 말이야.”


  “쳇. 그렇군. 하지만 뭐 형과 스페란자 씨 덕택에, 당분간 밖에 나가 있는 녀석들은 이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야. 동료의 시체를 뜯어 먹느라 바쁠 테니.”




  베리의 말에 기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미궁 밖에 있는 녀석들은 맛있는 피 냄새에 이끌려서 이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미궁 안으로 들어가서 그 괴물과 결전을 버리는 일 뿐이었다.




  “다만 문제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이 미궁 지도만 봐도 머리가 어지럽다는 것 정도?”


  “그래? 줘봐.”




  그의 중얼거림에 옆에 서있던 아무르가 그것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것을 베리에게 돌려주었다. 눈이 해롱해롱 돌아가는 것을 봐서는 확실히 골치 꽤나 아픈 지도임에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용족이 자신들의 언어로 기록한 거 같아서 말이야. 여기에 부가 설명들이 여러 가지 있는 것도 같은데 도대체 이게 뭔 말인지는 모르겠어.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왕이라는 존재가 갇혀 있는 위치가 어디이고, 또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 다음 제일 중요한 것은 함정이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 뭐 그 정도?”




  그가 지도를 땅에 펴 놓은 채 여기저기를 가리키면서 설명하였다.




  “저기 스페란자 씨가 어느 정도 용족어를 아시지 않나요?”


  “문자를 읽는 법만. 그 외에는 몰라.”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방금 전의 마법 공격으로 상당히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도 나무 기둥에 기대어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호롱불로 뛰어드는 나방 같은 심정으로 들어가야겠네.”


  “이 지도에 다른 장치 같은 것은 되어 있지 않을까?”


  “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용족들이 과연 그런 귀찮은 짓을 했을지 모르겠네.”




  기수의 질문에 베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지도에 시선을 옮겨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기수 역시도 베리의 옆에서 지도를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지도를 만져 보았다. 가죽을 여럿 덧붙여서 만든 것 같았지만, 가장 표면에 있는 것은 왠지 두꺼운 한지와 비슷해 보였다. 지도가 그려져 있는 가장 윗면은 약간 황갈색을 띠었고, 그 외에는 전부 짙은 갈색이었다. 오래되어 보이지만 보존 상태가 꽤 좋은 것을 봐서는, 판타지에서 간혹 나오는 보존 마법 같은 것으로 보호한 듯싶었다.




  “뭐 여기서 머리만 써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으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요. 아, 물론 스페란자 씨의 체력이 회복되는 대로…….”




  베리가 눈을 감은 채 쉬고 있는 스페란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그녀는 금세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낸 다음에 그녀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동굴로 향하였다.




  “아, 지금 가도 되겠네. 아무르 누나, 기수 형. 가자.”


  “그런데 포티스 씨는?”




  기수가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뱀을 목에 두르고 있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강제로 둘러진 상태로 있는 포티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베리는 피씩 웃더니, 그에게로 다가가서 그 뱀을 목에서 떼어내 먼 곳으로 던졌다.




  “포티스 씨.”


  “…….”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베리는 포티스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여러 차례 그를 불렀고, 1분여간을 그렇게 한 뒤에야 그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애, 애송이 네 놈!”


  “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포티스 시. 벌써 스페란자 씨는 안으로 들어갔다고요. 게다가 여기서 저를 두들겨 패셔봤자 남자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이제 기수 형도 다 알게 될 거에요. 포티스 영감님이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킥킥킥.”




  여전히 포티스의 양 어깨 위에 양 손을 올려놓은 상태의 베리, 그는 지금 매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포티스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포티스는 고개를 살짝 움직여서 베리의 뒤에서 지도를 들고 서있는 기수를 쳐다보았다.




  “네 놈은 죽일 놈이다. 내 기필코 애송이 네 녀석을 땅에다가 매장하고 말 것이야.”


  “예, 예. 하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빨리 스페란자 씨를 뒤쫓아 가는 것이 좋을 듯싶군요.”




  베리는 대충 상황을 정리한 다음에 동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그는 기수가 들고 있는 지도를 넘겨받은 뒤에 조심스레 미궁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스페란자가 이미 빛의 공을 만들어낸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벽 주변을 이리저리 관찰하면서 위험한 물건이 있는 지 관찰하고 있었는데, 다행하게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것은 없는 듯 보였다.




  “흠, 제 걸음으로, 앞으로 오십 보 정도는 아무런 위협이 없을 겁니다. 다만 그 녀석들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녀석들의 수가 많으면 그대로 후퇴를 하여서 방법을 간구할 겁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눈을 지도에서 떼어 미궁 안을 둘러보았다. 환한 빛의 공이 주변을 비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미로를 구성하는 평평한 벽에는 형형색색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을까? 실로 놀라워. 뭐라고 할까나, 그림 같은 것도 왠지 미궁의 분위기하고는 전혀 맞지 않은 것 같구.”




  아무르가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천천히 벽으로 다가가 그것을 쓰다듬었다. 아직까지 별달리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베리베리. 여기에 뭔가 글자 같은 것도 새겨진 것 같은데?”


  “글자?”




  베리타스가 그녀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자신들로 인한 그림자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오른손의 손등에는 특별한 아이템을 부착한 상태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 형태의 것으로, 그것으로부터 여린 빛이 새어나와 그 글자를 비추기 시작하였다.




  “이건 또 무슨 문자야? 엄청 오래된 글이잖아.”


  “이 글 알아볼 수 있어? 나는 이런 글자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게……, 이런 글자가 있다는 것만 알지, 실제로는 나도 몇 번 본적이 없어서. 아마 이 중에서 이 글을 알 법한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왜?”


  “천 년 전에도 사라진 문자라고 알고 있거든.”




  베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른 곳을 관찰하였다.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유심히 관찰하였는데, 뭔가 아름다워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 같았다.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건질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거 같아요. 아마도 이 그림은 미궁에 들어온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그의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만 기수는 그 그림에 완전히 정신이 뺏겨서, 베리가 다시 부를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까지 미궁에 설치되어 있다는 함정이 있는 곳까지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여유로운 마음이었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오는 길에 미노타우르스들의 울부짖음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베리타스.”


  “왜 기수 형?”


  “내 생가게는 이 그림들은 이곳을 만든 사람이 그린 게 확실한 것 가타. 그것도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아마도 입구 쪽에 새겨진 글은 그 그리믈 보고 난 뒤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놓은 것 같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두서없이 정리되어 있는 수십 수백의 그림들, 그리고 기호처럼 생긴 수많은 문양들. 예술적이기는 했으나 그 안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저 미궁을 만든 존재가 심심풀이로 그린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내 생각인데. 여기에 있는 그림들 중 일부만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는 걸 거야. 무슨 법칙이 있는 것만큼은 화실한 것 가타.”


  “형,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그 존재를 멸하는 것부터야. 그것들을 모조리 정리한 다음이라면 느긋하게 이곳을 관찰할 수 있겠지. 아 다들 멈춰요!”




  대화를 나누다가 베리가 갑자기 소리를 치면서 멈추어 섰다. 그는 지도와 주변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위험한 구역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 천천히 오른쪽 벽으로 바싹 붙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매우 조심스레 꿇어앉더니, 바닥에 놓인 돌 하나를 들어다가 앞으로 툭 던졌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 벽에서 무수히 많은 창들이 튀어나왔다.


  “하하하, 이제부터는 꽤나 스릴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웃을 일이냐, 애송아? 도대체 여기를 무슨 수로 지나가야 하는지 말을 해보라고! 설마 벽에 바짝 붙어서 지나가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닐 테지?”


  “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영감님!”


  “뭬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이 망할 젖비린내 나는 애송아! 애당초 이딴 좁은 길로 나 같은 녀석이 무슨 수로 지나갈 수 있겠냐!”




  포티스는 손가락으로 창끝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간신히 사람 하나가 지나갈 법하기는 했지만, 포티스와 같이 통통한 체구를 지닌 사람에게는 무리였다. 아니 사실인즉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건장한 베리타스에게도 무리였다. 아마 이곳에 있는 다섯 명 중에서 그곳을 가장 수월하게 지날 법한 사람은 스페란자와 기수, 둘 뿐이었다.




  “뭐 농담입니다. 이런 장치는 단지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일 뿐, 꼭 모두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지도 옆에도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또 용족어라서 모르겠고.”


  “아 답답하게 말만 늘어놓지 말고! 지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말해. 안 그러면 나는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 터이니.”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포티스 영감님.”


  “네 놈이 내 성질머리를 긁어 대서 그렇다!”




  그들의 말싸움이 또다시 시작되고야 말았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에 잠입해 들어왔는데, 저렇게까지 신나게 말싸움을 하는 것에 기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그들을 말리기 위해서 손뼉을 탁탁 친 다음에 천천히 함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는 양쪽의 벽을 잘 관찰한 다음에 뭔가 문양이 어긋나 있는 그림이 있는지, 혹은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거나 들어가 있는 돌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여기 있네.”




  좀 떨어져서 보면 마치 하나의 돌로만 만들어진 벽 같았지만, 실상 그것은 여러 개의 벽돌을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기수의 눈에 밖으로 살짝 튀어 나온 벽돌 하나가 들어왔고,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안으로 꾹 밀어 넣었다.




  “정답!”




  벽돌이 안으로 완전히 들어감과 동시에 무섭게 튀어 나왔던 창들이 도로 들어갔다. 기수는 그것을 보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왠지 모르게 재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쳇, 내가 하려고 했었는데.”


  “하하, 다음에는 네가 하면 되잖아.”




  그들은 그 길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곱 개의 갈림길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각기 다른 길로 통하는 통로네요. 왼쪽에서 세 번째 있는 것이 그 존재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군요. 도대체 뭐가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함정일 것 같으니까 저기로만 가는 것이 좋겠군요.”




  베리가 손가락으로 해당 입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런데 베리.”


  “왜, 누나?”


  “그 소머리 괴물들은 무슨 수로 함정을 다 피해 다니는 걸까? 녀석들은 이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것 같은데. 혹시 함정이 전혀 없는 또 다른 길이 있는 건 아닐까?”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베리타스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면서 혀를 쳤다.




  “누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도 마. 그 소머리들은 소보다도 지능이 떨어지는 데 무슨 수로 함정을 다 피해 다닌다는 거야?”


  “뭐, 뭐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니? 그런 생각 할 수도 있는 거지. 흥! 나쁜 놈.”


  “…….”




  또 토라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골머리가 더 쑤셔오기 시작한 베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면서 신세를 한탄하였다. 그 모습을 본 기수는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면서 약간의 위로를 해주었다.




  “아무튼 다들 가요. 일단 저 길로 가면 탁 트인 공간이 나오는 것 같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에 함정이 대략 백여 개 이상 있나 보네요.”


  “에? 백여 개? 애송이 그게 정말이냐?”




  포티스가 반문하자, 베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 미궁을 만든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그리 많은 함정을 설치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만든 사람은 아마도 변태이거나 사람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귀찮게 뭔 놈의 함정이 이리 많은지. 게다가 미궁에다가 그리 많은 그림을 그려놓은 건 또 뭐 뭔지. 함정으로는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해놓고서는, 그림을 그려놔서 사람을 현혹하고. 뭔가 정신이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사람이 분명해요!”




  불평불만을 있는 대로 늘어놓으면서, 베리는 지도에서 알려주는 그 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길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길이 상당히 비좁다는 사실이었다. 통통한 포티스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다.


  기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역시 양쪽 옆에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여기서 무슨 작업을 통해 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꽃들인가? 그런데 다 처음 보는 것뿐이네.’




  그 벽에 그려진 것은 아름다운 꽃들이었는데, 붉은 장미와 비슷하게 생긴 꽃부터, 마치 죽음을 암시하는 보라색 꽃까지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전부 합쳐서 스물다섯, 아니 스물여섯 종이구나. 하나만 특이하게 아무 색도 없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관찰하다가 마침내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섰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함과 동시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해골들이 거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는 확실히 위험한 곳 같군요. 그 소머리 괴물들의 해골도 있고, 다른 몬스터들의 해골도 잔뜩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상한 것은 사람 해골은 없는 것 같네요.”




  멀리서 관찰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의 해골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미궁에 들어온 사람들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촌장의 말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상하네요.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지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테고. 사실 이 지도가 유일무이한 설명서라고 들은 것 같은데.”


  “촌장의 말이 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잖나.”




  포티스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였다. 순간 기분이 상한 베리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포티스는 휘파람을 불면서 외면하고 있었다.




  “휘파람 불면 뱀 나오는 거 모르십니까, 포티스 영감님?”


  “뭐, 뭐! 뱀? 어디 있나? 뱀 어디 있어?”




  뱀이라는 단어에 기겁을 하면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만약 어린 아이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면 귀여웠을 텐데, 이것은 영 이미지가 맞지 않았다.




  “하하하.”




  그 모습을 베리는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포티스가 향하는 곳이 위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포티스! 그곳엔 함정이 잔뜩 있어요. 더 이상 가지 마세요!”




  다급하게 외치면서 포티스에게 다가갔다. 포티스 역시도 베리의 외침에 깜짝 놀라면서 더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섰고, 베리타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디려고 했다.


  그는 한 발자국을 앞으로 더 내딛자마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스위치 같은 것을 꾹 하고 누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




  위험이 곧 닥쳐올 것을 깨달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제일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스페란자는, 자신의 예민한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작은 소리여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전혀 들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는 급히 그들의 옷의 뒷목 부분을 잡아채고는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그와 동시에 그들 모두를 감싸는 방어막을 전개하였다.


  배리어가 전개되자마자 엄청난 수의 화살이 그 원형으로 된 넓은 공간 이곳저곳을 날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발사되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아니 마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듯이 화살이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녔다.




  “윽!”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배리어 전개는 간신히 때를 맞출 수 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신음 소리를 속으로 집어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그녀의 입가에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게 뭐야? 완전히 화살 천국이잖아.”


  “그래도 다행이다. 스페란자 언니가 없었다면 우린 모두 고슴도치처럼 되었을 거야. 휴우.”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화살사례가 멈추었고, 스페란자가 펼친 배리어가 서서히 사라졌다.




  “언니 고마…, 언…니?”




  아무르가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르는 급히 쓰러지는 스페란자를 부축하였는데, 그때야 비로소 그녀의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언니! 정신 차려 언니!”


  “스페란자 씨, 괜찮으세요?”




  베리와 아무르는 그녀를 마구 흔들어대면서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때 날카로운 음성이 그들의 동작을 멈추게 하였다.




  “더는 흔들지 마! 이거 독화살이야. 그것도 부자나 천오 같은 위험한 독이 무든 것 같아!”




  기수는 땅에 떨어져 있던 화살들 중 하나를 주어다가 혀 아래에 대 보았었다. 짜릿한 통증이 혀를 통해 전해지는 것을 깨닫자마자 급히 외친 것이었다. 조금 맛만 본 것이었는데, 혀 전체가 마비되는 것이 상당히 높은 독성이었다.




  “어, 어떻게 하지? 여기서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인데. 베리! 회복약 가지고 있는 거 없어?”




  아무르가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베리타스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애당초 그런 약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누군가가 다치면 스페란자가 항상 치료를 해주었었고, 그녀가 다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자신의 사소한 장난이 이런 일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 베리는, 자기 자신을 힐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손으로 가슴을 두들기면서 실의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네가 그렇게 넋이 나가면 어떻게? 언니, 정신 좀 차려 봐요! 정신을 차려서 치료 마법을 하셔야죠! 언니!”


  “이런 제길.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놈들이 몰려온다!”




  위급한 상황에 첩첩산중이라고, 엄청난 화살 폭풍 소리를 들은 미노타우르스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녀석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미궁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백 퍼센트 당할 게 분명했다.




  “애송이! 빨리 결정을 내려! 네 놈이 우리 파티의 리더지 않나!”




  포티스는 자신의 도끼 자루를 굳게 움켜잡으면서 외쳤다. 하지만 베리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내 잘못이야.’를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기수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야! 네 녀석이 그렇게 정신이 나가 이쓰면 어떠게 해! 이대로 있다가는 그녀는 죽고 말거야! 그리고 네 놈은 평생 그녀를 죽게 내버려둔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 자책하겠지. 그렇게 되고 싶어?”


  “…….”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미노타우르스들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는 더욱 날카로워진 음성으로 말을 하였다.




  “그래! 네 놈은 여기서 죽어라. 포티스 씨, 아무르 빨리 가요!”




  그는 급히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것을 찢더니, 왼쪽 어깨에서 심장으로 가는 길목을 그것으로 아주 강하게 동여 맺다. 피가 아예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필이면 왼쪽이야. 심장 근처라서 독이 더 빨리 퍼지는데.”


  “녀석들이 온다! 어서 가자!”


  “베리! 정신 차려! 녀석들이 온다고!”




  아무르가 베리를 흔들면서 깨우는 사이, 기수는 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큰 키에 비해 상당히 가벼워서 안고 가는데 별달리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몸이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하면서 재빨리 도망을 가야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서 가자! 그 정신 나간 녀석은 그만 챙기고.”


  “뭐? 하지만 여기에 이렇게 버려두고…….”


  “그럼 끌고 와!”




  기수는 날카롭게 대답한 다음에 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일단 그들이 들어왔던 길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목이었기 때문에 미노타우르스들이 그곳으로 쫓아올 일은 없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고, 그것은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창이 마구 튀어나오는 함정은 들어올 때 이미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서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그들은 미궁의 밖으로 뛰어 나갔는데, 밝은 햇살과 더불어 엄청난 수의 미노타우르스들이 입구 밖에서 그들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망할.”




  어림잡아서 스무 마리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고, 또한 기수의 팔위에는 부상당한 채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는 스페란자가 있었다. 사실 지금 그녀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있었고, 호흡도 매우 가빠지는 것이 재빨리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일이 벌어질 터였다. 따라서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누군가가 그녀를 업고 마을로 돌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베리타스!”




  기수는 급히 베리타스를 부르며 그를 응시하였다. 아무르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베리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베리는 속에서 불이 끓어올랐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로 베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




  “꺅! 뭐, 뭐하는 거야?”




  아무르가 비명을 지르면서 베리를 부축하였다. 하지만 기수는 인정사정없이 그에게 발길질을 두세 차례 이상 더 해주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이 분을 살리는 거야!”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얻어터지는 베리에게 기수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스페란자를 넘겨주었다. 베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받아 들었는데, 기수는 그런 그의 멱살을 잡으면서 외쳤다.




  “여기는 우리가 맡는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얼른 마을로 뛰어 가! 그리고 반드시 그녀를 살려 내!”




  단호하면서도 분노가 가득 담긴 어조였다. 몇 대 얻어터진 뒤 그런 말을 듣자,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인지, 베리의 불같은 눈동자가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나중에 맞은 건 꼭 되갚아 줄 테니까!”


  “살아 이쓰면 그것도 좋겠지.”


  “아무르 누나! 길을 열어 줘!”




  베리의 외침에 아무르는 천천히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더욱 움켜잡았다.




  “우어어어!”


  “구어어어어!”




  울부짖는 미노타우르스들의 괴성이 귀에 들렸다. 그녀는 검을 똑바로 잡고는 살며시 눈을 감아 정신을 집중하였다.




  ‘나는 지금 모든 힘을 검에 옮긴다, 나는 옮긴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녀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검은 그녀의 힘으로 말미암아 강렬한 에너지로 휘감겨 있었는데, 아름다운 푸른빛이었다. 그것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파멸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베어 버린다!”고 외침과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그 에너지는 강력한 참격이 되어서 미노타우르스들을 양 옆으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베리는 아무르의 참격이 만든 바로 그 공간을 따라 뛰어나갔다.




  “우어!”




  두세 마리 정도의 미노타우르스들이 그들을 쫓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곳에는 기수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네 놈들의 상대는 우리다!”




  겉으로만 당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상 싸움이 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기수의 등에는 한층 고조된 긴장감으로 인하여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사지를 비롯한 온 몸이 전율감에 떨리고 있었다.




  “거참, 녀석이 이럴 때까지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우리가 이번에 제대로 된 녀석을 주은 것 같단 말이지. 하하하하,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르.”


  “그거야, 뭐 그럴 지도 모르죠.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말이에요.”




  그들의 대화는 사뭇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긴장의 끈을 조금도 놓지 않은 채 미노타우르스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녀석들이 언제 움직일 것인지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할 참인가? 일단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는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퇴로까지 막혔다고. 그 망할 잡것들이 안에서 튀어나올 것 같아. 이거 정말 손에서 땀이 다 나는군. 이런 긴박한 순간은 내 평생 처음인 것 같네.”




  포티스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하였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녀석들의 붉은 안광이 미궁 안에서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수는 대략 여섯 정도. 그렇다면 녀석들은 도합 서른 마리 정도 되었다. 단순 산술 계산으로도 한 명당 열 명을 상대해야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도 마법사 없이 말이다.




  “앞으로 대형 참격은 몇 번이나 날릴 수 있지?”


  “세 번이요. 마음만 같아서는 열 번도 더 날릴 수 있는데, 강한 걸 날리면 날릴수록 검이 금방 망가져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그래? 그렇다면 최대한 녀석들을 한 곳에 모아 놓는 것을 생각해야겠군. 때마침 몸놀림 좋은 미끼 역이 저기에 있으니 말이야.”




  포티스가 고갯짓으로 기수를 가리켰다. 사실 기수는 녀석들의 공격을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는데, 그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가 서있던 장소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서, 방금 전에 이곳에 있었던 각종 구멍들을 더욱 키워놓고 있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녀석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뒤에 있는 바보 녀석들부터 정리하는 거지!”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막 동굴 밖으로 울부짖으며 뛰쳐나오는 미노타우르스들에게 달려들었다.


  그것들에게 가장 먼저 공격을 날린 것은 포티스였다. 포티스가 강력한 도약으로 뛰어 오른 뒤에 도끼를 휘두르고 뒤로 물러서면, 그 다음 연타 공격을 아무르가 날리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녀석들을 일렬로 배치되고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녀석들 모두를 박살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시선은 내가 다 끌 테니 준비하게!”


  “알았어요!”




  여섯 마리가 거의 일렬로 섰다. 정면에서 보자면 옆으로 나란히 선 것이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아무르가 힘을 모을 때까지의 약간의 시간 동안 녀석들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었다.




  “이 놈들! 내 힘을 마음껏 보여주마!”




  포티스는 지면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딱딱한 돌이 도끼날에 부딪혀서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그는 그것을 정확하게 가격하여 여섯 마리 전체에게 날려 보냈다. 워낙 강하게 날려버렸기 때문에, 놈들은 고작 돌멩이에 얻어맞고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하하하하하! 이 놈들 어떠냐?”




  그는 계속하여 돌멩이를 도끼로 쳐서 날려 보냈다. 커다란 바위가 도끼질 한 번에 분쇄되어 공중으로 뛰어 오르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것들을 향해 발사하는 섬세함, 또한 돌멩이 하나하나에 실린 엄청난 괴력, 실로 굉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포티스가 그것들의 움직임을 봉쇄해 놓은 동안에, 그녀는 급히 녀석들의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 미노타우르스들이 정확하게 한 줄로 서있는 위치에 서서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였다.




  “벤다, 벤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베어 버린다!”




  푸른빛의 에너지가 검에 고이기 시작하였다.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그녀의 몸에서부터 일어난 강력한 힘은 그녀의 검으로 흘러들어갔다. 또다시 푸른빛이 검을 완전히 휘감자, 아무르는 두 눈을 번뜩 뜨면서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죽어라!”




  그녀의 외침과 더불어 여섯 단말마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단 한 놈도 빠짐없이, 푸른빛의 참격이 삼켜버려서 완전히 분쇄시켜 버렸다.




  “좋았어! 이제 남은 놈은 스물여섯이군. 그리고 이미 저 녀석이 한 자리에 거의 다 몰아 붙였어. 아무르,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하아, 하아, 할 수는 있는데 일렬이 아니라서 범위를 좀 더 넓혀야할 것 같아요. 그러면 딱 한 번 밖에는…….”




  아무르가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면서 말하였다. 안색도 창백한 것이 힘을 상당히 많이 사용한 듯 보였지만,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숨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침착하자. 기회는 단 한 번 뿐.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만들어준 귀중한 기회야.’




  숨을 고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검을 들고 있는 손에는 이미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라도 녀석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힘을 끌어 모으고 있는 동안, 이미 5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미노타우르스들의 신경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시킨 기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겉옷은 스페란자의 독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찢어버렸기에, 그는 상체가 겉으로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덕분에 그의 몸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균형 잡인 근육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다들 알 수 있었다. 물론 호리호리한데다가 뭔가 여성의 그것마냥 곡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직 인가?’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서 아무르와 포티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엄청난 폭격 소리에 미노타우르스들 여섯이 한꺼번에 분쇄되는 것을 곁눈질로 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시선을 붙잡아 두고 있는 놈들을 박살내는 일 뿐이었다.




  ‘젠장, 이제 피할 곳도 마땅치가 않잖아.’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 놈들의 공격을 한 시간도 넘게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녀석들의 공격은 단조롭기 그지없었고, 단지 파괴력만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것들의 공격에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서, 주변에는 온통 구덩이만 잔뜩 패였다는 점이었다.




  “기수 오빠! 피해!”


  “……!”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오빠라고 불러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르의 외침을 기다렸다는 듯, 뒤로 텀블링을 하며 녀석들에게서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졌다.




  “아스트라피 블레이드!”




  아무르의 검에는 이전 두 번의 경우는 다른 빛이 맺혀 있었다. 파랗기는 파랬는데, 예전 것은 조금 하늘색과 비슷한 푸름이었다면, 이번 것은 드넓은 대양의 짙은 푸른빛이었다. 게다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달랐다. 초승달 형태의 참격이었던 지난 두 번의 공격과는 달리, 이번의 공격은 미노타우르스들을 모조리 집어 삼킬 정도로 광범위한 것으로,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사정없이 떨어지는 것처럼 생겼다.




  “구어어!”


  “크어어어어!”




  녀석들의 비명소리가 산악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비명소리는 이윽고 잦아들었다. 단 한 마리도 빠짐없이 그 공격에 휘말려 전멸한 것이었다. 마치 진짜 벼락에 얻어맞은 것 마냥 그것들의 시체는 불에 탄 것 같았고, 또 사정없이 갈라져 있었다. 지면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노타우르스들의 공격으로 이미 수십 개 이상의 구멍이 패여 있었지만, 방금 전의 공격으로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 마냥 녀석들 모두가 빠져버릴 정도의 넓고도 깊은 구멍이 생성되었다.




  “하아, 하아……. 이…제, 조금도 못 움직이겠어.”




  아무르는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면서 주저앉았다. 검은 칼끝부터 떨어져서 그대로 땅에 박혔는데, 그 순간 그 큰 검에 이리저리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망가져버린 자신의 검을 쓴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아무르.”


  “포티스 씨도요. 이거 정말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에요.”


  “그래, 그렇지.”




  포티스는 아무르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간 곳은 방금 전 아무르의 공격의 여파로 숲 안쪽으로 튕겨나간 기수가 있는 곳이었는데, 기수는 대자로 뻗어서 누워 있었다.




  “하하하, 이거 살다보니 이런 경우도 있네요.”


  “네 놈, 간덩이가 참으로 부은 놈이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미끼 역을 자청해서 하니 말이야. 하하하하! 하지만 나는 그런 네 놈이 참 보기 좋다.”




  그 둘은 산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사선을 넘나든 전우라는 것은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문득 기수는 그러 생각이 들었다.




  “스페란자 씨는 괜찮겠죠?”


  “흥, 그 망할 요정 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죽으면 꽤나 꿈자리가 사납겠지. 죽든 말든 그것 마음대로지만, 내 꿈에 튀어나와 귀찮게 굴 것 같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해.”


  “훗, 그렇겠죠.”




  기수는 가쁜 숨을 정리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기수는 뿔뿔이 흩어진 자신들의 친구들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기 포티스 씨.”


  “왜?”


  “지도 가지고 계세요?”


  “…….”




  그의 질문에 포티스도 이제야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아무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쳐서 뻗어 있는 아무르의 모습만이 보일 뿐 지도의 종이 나부랭이 같은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애송이 녀석이 가지고 가지 않았겠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기수는 고개를 저었다.




  “베리 녀석은 여기 나올 때 손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 녀석 빈손이었다고요.”


  “이 망할 잡것! 내 다시 만나기만 하면 그 목을 뿐지러 버릴 테다. 그 중요한 지도를 망할 녀석들이 가득 차 있는 미궁에 두고 와!”




  포티스의 분노의 외침이 메아리치며 산 전체에 널리 퍼졌다.





  엄청난 폭발음이 등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좁은 오솔길을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있는 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남아서 싸우고 있는 그들이 걱정되었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팔로 안고 있는 그녀, 즉 스페란자를 마을까지 안전하게 옮기는 것이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봐요, 스페란자 씨!”




  손과 팔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 달리고 있는 자신보다 더 가쁜 호흡, 거기에 더해서 온몸을 적시고 있는 땀 등, 그녀의 상태는 겉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 내 책임이니까, 제발 죽지마는 말아요.”




  울먹이는 소리로 부르짖었다.




  “제발…….”




  어른처럼 행동하고, 어른처럼 생각하고, 또 어른처럼 느끼려고 노력했던 생활들이었으나, 여전히 자기 자신은 열넷밖에 먹지 않은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상황에서 왜 그런 장난을 쳤을까? 만약 그것만 아니었다면 함정이 발동될 일도 없었고, 스페란자가 자신들을 감싸다가 독화살에 맞을 일도 없었고, 결국 이런 위급한 상황에 놓일 이유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섣부른 행동을 후회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그의 눈에 그 마을이 들어왔다. 이제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달리지 못할 것 같았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끝까지 달렸다. 마을 어귀에 들어선 순간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양 옆으로 비켜섰다.




  “비켜요, 비켜!”




  일단 아는 집이 촌장의 집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행이도 현재 그들이 있는 위치에서 그 집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가 부상자를 안고 촌장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본, 한 마을 젊은이는 급히 그를 따라가서 촌장의 집 문을 열었다. 베리는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들이 어제 묵었던 손님방으로 들어갔고, 두 개의 침대 중 하나에 그녀를 엎드려 눕혔다.




  “여기 의사가 없나요?”


  “의사라면 한 분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젊은이가 의사를 부르러 나간 사이에 촌장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워낙에 급했던지 늘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마저도 놓친 상태로 벽을 짚어가며 뛰어 들어온 그는, 스페란자의 상태를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함정은 모두 그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촌장의 질문에 베리는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촌장은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이쪽입니다, 아가씨!”




  밖으로 나가서 의사를 부르러 갔던 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마을에 있는 유일한 의사, 즉 루리를 그 안으로 데리고 왔다.




  “이 분입니다. 빨리 봐주세요. 위급하신 것 같아요.”




  루리는 그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급히 스페란자에게 다가갔다. 등에 꽂혀있는 화살과 그녀의 현재 상태를 보고 난 뒤, 그녀는 화살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나이프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녀의 몸속에 박혀 있는 화살을 빼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살촉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잘못하다가는 살이 뜯겨나갈 가망성이 있었다.




  “불은 여기에 있는데, 나이프 같은 건 없어요. 식칼류 외에는 이 집에…….”




  이 집에 살고 있는 토리아가 불이 피워진 화로를 가지고 오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들고 있는 식칼이 화살을 뽑아내는데 도움이 안 되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머지는 다 병동에 있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리는 급히 고개를 돌려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루리의 눈빛이 전하는 바를 깨닫고는 급히 뛰어나가려고 했다.




  “단검이라면 스페란자 씨가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품 안에…….”




  말을 듣고 있던 베리는 스페란자가 애용하는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루리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토리아는 화로를 루리 옆에다가 두었고, 루리는 단검을 화로의 숯불 안에다가 집어넣어 그것을 달구기 시작하였다.




  “게레스와 베레네로 약을……!”


  “예? 게레스, 베레네, 아아, 알겠어요!”




  루리의 말을 듣자마자 토리아는 뛰어 나갔다. 그리고 그 동안에 칼날이 모두 달구어지자,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들고는 화살이 박혀 있는 왼쪽 어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단 그녀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에, 왼손을 뻗어서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달구어진 칼날을 조심스럽게 상처 부위 가까이 가져다 대었고, 그 다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칼날을 화살촉에 바로 근접하게 찔러 넣었다.




  “아아악!”




  정신을 거의 잃고 있었던 스페란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이, 이봐요, 지금 무슨 짓을?”




  베리가 깜짝 놀라면서 말하였지만, 루리는 전혀 그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자신의 할 일을 계속 할 뿐이었다. 그녀는 화살대를 움켜잡고는 뽑아내었다. 화살촉의 모양이 한 번 박히면 잘 빠지지 않도록 갈고리 형태가 되어 있음을 보고는 자신이 좋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화살촉을 바닥에 대충 던져 놓은 다음에 스페란자의 상처 자국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거기서 피를 뽑아낸 다음에 바닥에 뱉기를 수차례 연속으로 한 다음에, 근처에 있던 컵에 물을 따른 뒤 대충 입을 헹구어 냈다.




  “무슨 독인지 아시겠소, 의사 선생.”


  “모르겠…네요.”




  촌장의 질문에 루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화살촉은 순 피만 잔뜩 묻어 있었고, 혹시 다른 화살을 가져온다고 해도 독성이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터였지만 무슨 독인지는 전혀 알 수 없을 터였다. 만약 절대 미각이라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또 모를까.




  “여기, 약을 달여 왔어요!”




  토리아가 커다란 컵에다가 약간 누런빛을 띠는 약을 달여 왔다. 실상 차를 내온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연한 색이었는데, 그것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토리아가 건네 준 컵을 받자마자 급히 스페란자의 입가에 흘려 넣었다. 하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스페란자가 그것을 마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주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지금 독이 포함된 피를 빨아내고는 입을 대충 헹군 상태라서,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루리는 약이 든 컵을 스페란자와 동행인으로 보이는―실제로도 동행하고 있는 베리타스에게 건네주었다.




  “예? 약을 왜 저한테…….”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베리였다. 루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의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음에, 스페란자의 입을 가리켰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된 베리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제, 제가 그런 일을 할 수는……!”


  “시간 없어.”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면서 컵을 더 앞으로 들이댔다. 베리는 엉겁결에 컵을 받아들고는, 컵에 든 누런빛의 물과 스페란자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빨리 해. 이대로 죽일 셈?”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는, 생판 모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스페란자의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런 점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베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약을 입에 머금었고, 그 다음으로는 스페란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댄 다음, 그 물을 그녀에게로 전해 주었다. 그녀가 그것을 마실 때까지 계속 그 상태로 있었고, 그러고 나서는 나머지를 모두 마시게 할 때까지 계속 반복하였다.


  그가 스페란자에게 약을 먹이는 동안, 루리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자신의 입을 깨끗하게 헹구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하여 자기 자신도 그 약을 마셨다.




  ‘혀가 완전 얼얼하잖아.’




  너무 바삐 움직이다 보니, 혀가 마비된 것도 몰랐었는데, 지금은 혀부터 시작하여 온 입안이 마비된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좋지. 저 사람, 독에 당한 것 외에도 상당히 기력이 쇠진한 것 같은데. 아니, 그것보다 기혈이 뒤틀린 듯한 느낌이…….’




  독을 몸에서 빼낸 뒤 해독약―맞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을 먹였다. 효험을 어느 정도 봤는지 스페란자의 호흡이 상당히 안정된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스페란자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또 그녀의 손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맥을 짚었다.


  정상인의 맥이었다면 분명 손끝에 부드러운 느낌이 들 터, 하지만 스페란자의 맥은 거칠면서 뭔가 뒤엉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색도 여전히 좋지 않고, 가끔 호흡도 불안정해졌으며, 또 여전히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가장 위급한 상황은 넘겼지만, 이대로 가만 두면 도로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그때였다. 문득 루리의 눈에 어디서 많이 본 가방이 들어왔다. 그것은 자신이 여행을 갈 때마다 짐을 챙기던 바로 그것이었고, 팔일 전쯤에 기수가 대신 들어준다고 가져갔다가 그대로 헤어져버려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바로 그 가방이었다.




  「기…수인 건가?」




  그녀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얼거렸다. 주변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베리는 그 중에서 ‘기수’라는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루리를 응시하였는데,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가방을 뒤지는 중이었다.




  “이보세요, 지금 무슨 짓을 하시…….”




  베리는 강한 어조로 그녀를 만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저 가방, 기수 형이 사용했었던가?’라고 중얼거렸다. 답은 ‘아니다.’였다. 단 한 번도 기수가 저 가방 안에 손을 대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의 베리와 달리 루리는 조금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이 찾아낸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여행을 다닐 때 만일을 대비하여 챙기고 다니는 일회용 침이었다. 그녀는 비닐을 찢고서 그 안에 들어있는 침관과 침을 하나 꺼내들었다.




  ‘할 수 있어. 기혈이 뒤틀린 거라면 단지 순환을 해주게 하는 것만으로도 살릴 수 있어. 그리고 왠지 이 사람…, 아니 사람처럼 생기지는 않았네. 어쨌든 그녀의 회복력은 상당히 강해 보이니까.’




  이제 처음으로 자신이 맡은 환자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뾰족한 귀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루리는 그런 것에 당황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다음,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침을 놓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치료법에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있었다. 가늘고 끝이 뾰족해 보이는 물건을 사람의 몸에다가 찌르는 치료법 따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맥은…….’




  대략 열 방 가까이의 침을 놓은 다음에, 그녀는 다시 스페란자의 맥을 짚어 보았다. 아직 거칠고 뭉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침을 놓기 전과는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다. 또 스페란자의 호흡도 많이 안정되었고, 체온 역시도 적정 수치로 내려가고 있는 듯 보였다.




  “휴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긴장의 끈이 풀린 나머지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베리 역시, 스페란자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리의 힘이 풀림과 동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손수건이요.”


  “고마…워요.”




  루리는 토리아가 건네 준 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닦아 낸 다음에, 다시 한 번 자신의 가방을 쳐다보았다. 겉에는 진흙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안에 든 것은 전부 무사하였다.




  “일…행 주에 기…수라는 사람이 있나?”


  “예? 기수 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데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아까 전에도 그녀가 기수를 언급했었다. 그때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제대로 묻는 것을 봐서는 확실히 그를 언급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베리의 대답을 듣고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하였다. 아무도 모르는 이상한 세계에 홀로 떨어졌는데, 이제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어가던 사람도 마침내 살릴 수 있었고, 그리운 사람들 중 한 명도 곧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그녀의 기분을 한층 고조시켰다. 그러다가 문득 기수의 대단한 능력이 떠올랐다.




  ‘그 아이 분명……. 그런데 어떻게 물어야지?’




  루리는 속으로 열심히 생각했다. 해야 할 질문이 있는데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땅에 떨어져 있는 화살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베리를 바라보았다. 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루리를 쳐다보았는데, 루리는 손가락으로 화살촉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연스레 베리의 시선이 화살촉으로 향했다.




  “화살촉이 왜요?”


  “독.”


  “예, 독이 묻었죠.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제가 보니까 스페란자 씨는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무슨 독?”


  “예? 그건 저도 모르는데요.”




  베리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하였다. 루리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면서 다시 질문 하였다.




  “기수, 무슨 독?”


  “…저기 외람된 말씀이지만, 질문을 하려면 제대…….”




  질문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베리의 눈에 그녀의 전체적 모습이 들어왔는데, 기수처럼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졌고, 또한 기수를 아는 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정보로 통합되어, 진실을 가리켜 주고 있었다.




  ‘이 사람은 기수와 같은 곳에서 왔다.’




  그는 올바른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터였다.




  “기수, 무슨 독이라…….”




  그녀는 또다시 어눌하면서도 억양이 좀 이상한 어조로 물었다. 베리는 그녀의 질문을 잘 듣고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추측해 보았다. 중요한 것은 ‘기수’, ‘무슨’, ‘독’이었는데, 질문을 제대로 조합해 보면, ‘기수가 무슨 독이라고 말했는지’에 관해 물어보는 것 같았다.




  “기수 형이 무슨 독이라고 말했냐고요?”


  “어, 아마도.”




  루리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로 대충 대답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무슨 부자? 처노?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워낙 경황 중에 들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게 뭔가요?”




  베리의 대답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루리는 그 중에서 자신의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부자, 혹은 천오. 독성이 강한 식물로 작은 동물들에게는 한없이 치사적이고, 약으로 사용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그러면 괜찮아.”


  “예?”


  “이제 괜찮아.”




  그녀는 따뜻한 음성으로 말하면서, 스페란자의 몸에 꽂혀 있는 침들을 뽑아냈다. 본래라면 침을 이리저리 돌려주는 수기법을 활용해야 했지만,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할 정도로 기(氣)가 체내에 많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별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눈앞에 누워있는 스페란자의 경우는 기가 더욱 강하여, 곧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기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꼭 사례를 할게요.”




  루리가 천천히 일어서자, 베리 역시 벌떡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과 더불어 손사래를 치며,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수 형, 아세요?”


  “기수… 친구.”


  “친구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한 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어디?”


  “예?”


  “그 아이 어디?”




  루리는 이제야 자신이 가장 원하던 정보를 베리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베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말을 해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해주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하고서 입을 열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은 손짓 몸짓을 총 동원해서 설명한 뒤에야, 루리는 그들이 현재 위험한 상황에 빠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거짓말…….」




  기쁨으로 고양된 감정이 순식간에 걱정과 절망으로 바뀌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허탈해 보였고, 또 매우 슬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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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글 중에 나오는 탕약은


 


'감두탕'입니다. 감초와 대두라는 아주 간단한 약재 두 가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부자 독을 해독하는데에는 참으로 좋습니다. 그 외에도 녹두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ㅡ.ㅡ


 


그래서 한약 먹을 때 녹두 든 음식은 피하라고 하는 겁니다.


 


녹두의 해독 능력은 정말 뛰어나거든요. ㅇ_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