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1 - 도래(到來)

2010.08.24 06:02

비벗 조회 수:330 추천:2

extra_vars1 14 
extra_vars2 134942-1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마법세기력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엔 ‘마법’이란 게 쓰이지 않는다. 신도, 악마도, 요정들도 모두
오래 전 떠나갔다. 그리고 잊혀졌다. 우리는 잊었다. 우리가 유일하게 신비를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물’이다. 그 유일한 신비조차 나 같
은 용병에겐 술자리의 안주거리 이상의 외경을 받지 못한다.


 


우리에게 마법세기력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법시대의 서막을 알린 대마법사 위리암의 탄신일은, 아무래도 지금으로부
터 약 삼천 칠백여년 전인 모양이다.


 


교교한 달빛 아래 우리는 말없이 서 있다.


 


은빛 기사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달빛을 세고 있다.


 


우리는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삼천 년에 육박하는 세월을 넘어 도래한
은빛 기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침내 그녀가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난 이상한 심정이 되
었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하더라?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참,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떠올리며 이
날을 기다렸으나…… 아아, 나로서도 이 괴리에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구나.
이래서야 나를 모르는 그대가 나를 찾아온 것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가슴이 아프다.


 


아, 이런 감정, ‘연민’이라고 부르던가?


 


“루포리여,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나는 조금 놀랐을 뿐이다. 나는 나의 시
대를 저버린 방랑자, 여행의 첫걸음에 이미 인연의 끈을 놓은 시간의 사생아이
니, 사백 년 후이거나 이천육백 년 후이거나 그리 구애될 것은 없느니라. 그러
니 모쪼록 나를 위해 슬퍼하지는 말거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 자신은 분명 슬퍼하고 있다. 거기엔 무언가 사정
이 있는 듯했지만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
라본다. 은빛 머리카락에 비해 볼 땐 터무니없게도,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이는
검은 빛깔이었다.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문득 그렇게 말해버렸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은빛 기사 역시 아무 고민 없이 대답했다.


 


“있다. 염치불구하고 요청하자면, 루포리여, 나의 종자가 되어 다오.”


 


염치불구하지 마!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요,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전 이 분들을 호위할 임무
가 있는 몸이라서요.”


 


“그건 문제없다. 그대 뒤의 청년들을 무사히 돌려보낼 때까지 내가 그대의
길에 동행하마. 그대의 임무가 끝나면 그 때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하자꾸나.
걱정할 것은 없다, 그대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니.”


 


아니,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건 아니다.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역시 사
백 년과 이천육백 년은 차이가 있다.


 


지금의 기사는 그저 세습되는 겸작(兼爵)의 하나일 뿐이다. 왕가가 작위를
내리면 어린 아이도 기사이고, 페넬로페 역시 천식을 앓고 있음에도 언젠가 기
사가 될 터였다. 그러니까, 수습기사 제도는 없어진 지 오래인 것이다.


 


사실, 기사소설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한 말괄량이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수
습기사와 종자가 같은 말이란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잊혀진 이야기이다.


 


“안타깝지만, 기사님, 이 시대의 기사들에겐 종자가 없습니다.”


 


“알고 있다. 마법을 잃은 인간에게 기사도란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겠지. 어
떻게 변질되었을지 짐작이 된다.”


 


어라? 전혀 안 놀란다, 게다가 마법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역으로
내가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지? 그대의 눈앞에 서 있는 나는 결실(缺失)
없는 진정한 기사이다. 나를 모른다지만 그대는 알리오스의 인도로 나를 깨웠
으며, 나는 기사의 의지로 그대를 선택했다. 결정은 임무도, 시대도 관계없다.
오로지 그대의 몫이다. 이제 그대의 뜻을 말해보라. 나의 종자가 되기 싫은 것
이냐?”


 


담담하게, 그녀는 물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알지 못하는 시간에서 온 알지 못하는 기사의 종
자가 된다는 건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내게도 일상이 있고, 가족이 있
고, 동료가 있다. 꿈은 없지만 목표는 있고, 연인은 없지만 애욕은 있다. 그녀
의 종자가 된다면 그 중 대부분은 버려야 하겠지. 다른 건 제쳐두고, 이천육백
년 전으로부터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날아온 사람인 것이다. 그 목표는 결코
사소한 게 아니리라. 나로선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


 


그렇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승낙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은빛 기
사에게, 감히 냉정한 거절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저기, 빛의 신의 인도라고 하신 건, 저희가 처음에 본 그 밝은 빛을 말씀하
시는 겁니까?”


 


다행히 그녀는 내 각설(却說)을 용인해 주었다.


 


“여러 가지다. 어쩌면 그대가 이 동굴에 온 것도, 내가 그대를 종자로 내정
한 것마저도 알리오스의 뜻일 수 있겠지.”


 


에이, 설마 그렇진 않겠지. 우리를 이 곳으로 이끈 돌의 마법이야 그렇다 쳐
도, 나는 기껏해야 비천한 용병이니까. 이천육백 년 전의 기사님을 수행할 아
무런 지식도, 능력도 없다.


 


“에, 그리고, 여기서 지상으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저 굴이 지상으로 이어진다.”


 


하면서 우리가 온 굴 맞은편의 굴을 가리킨다.


 


다행이다. 왠지 그녀의 존재 때문에 나가는 길이 더 걱정됐었는데 말이야.
뭐래도 이천육백 년 전부터 마법이 발현됐던 곳이니까, 우연한 발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입구는 봉쇄해두거나 했으리란 생각에 좀 걱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봉쇄되어 있다.”


 


맞춰버렸다!


 


“처음부터 내가 열고자 마음먹지 않는 이상 결코 열리지 않도록, 마법의 돌
로 굴의 입구를 완전히 차단했다. 인간이 가진 어떤 기술과 힘으로도 그 길은
뚫을 수 없겠지. 나의 마법만이 그 문의 열쇠다.”


 


더구나 철저하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나 방금 잘못 들었나?


 


“마법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는데…… 어째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냐? 그대의 시대에 마
법사가 없다 하여 나를 그 기준에 맞춰 생각해선 곤란하다.”


 


“그게 아니라, 기사님은 기사님이잖아요? 기사님이 마법도 쓸 수 있습니
까?”


 


아, 그야 마법시대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듣긴 했지
만, 마법사가 검술을 배우고 말을 탄다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그런 의
심의 시선에 은빛 기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해가 있는 듯하구나. 대체 언제부터 잘못 전해진 것일꼬. 아까도 말했지
만 마법이 없는 기사란 허울뿐인 거짓이다. 아마도, 그대들의 역사에 그 거짓
기사들의 이야기가 기사의 원형인 것처럼 전해진 모양이나 이제 분명히 말하
마. 기사는 마법사이며, 마법사를 수호하는 전사이다.”


 


“그, 그렇지만 「하늘의 방패」엔 마법사로서 리오 캠벨이 있었잖습니까?”


 


잘 알지 못하는 역사를 언급해본다. 아, 하지만 그녀는 마룡 토벌 이전 시대
의 사람일까, 이후 시대의 사람일까?


 


다행히 후자였던 듯,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의 이야기도 알고 있는가. 생각보다는 많은 게 전해지고 있구나. 사학자
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으리라.”


 


“아…….”


 


뒤에서 왠지 핑크빛인 감탄사가 들려왔다. 릴리아는 사학자인 모양이다. 뭐,
역사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리오는 특별한 존재였다. 「방패」의 기사들은 모두 뛰어난 전사이자 마법사
였지만 그 시기의 마법은 대체로 전투적이고 실용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
었지. 하지만 「방패」는 다양한 마법을 필요로 했기에, 특별하고 다양한 마법을
구사했던 리오를 초빙해 도움을 얻은 것이다. 이제 오해는 풀렸느냐, 루포리
여?”


 


“아, 예,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원래 얘기로 돌아가야지. 마법으로 막힌 입구 얘길 하고 있었던가?


 


“그, 입구를 막고 있는 돌 말씀인데요. 저희가 나갈 수 있도록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싫구나.”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선언했다. 역시 안 되나?


 


“그렇다면, 저흰 어떻게 나가면 좋을까요?”


 


“그 방법은 간단하다, 루포리여.”


 


은빛의 기사는, 한 걸음 나에게로 다가왔다. 달빛이 곧바로 내리비치는 위치
다. 그녀의 은발과 플레이트 메일 위에서 달빛이 새하얗게 부서진다.


 


아름다운 빛의 인형이 되어, 그녀는 내게 고했다.


 


“나의 종자가 되어라, 루포리. 그리고 나와 함께 그대 뒤의 청년들을 바래어
주자꾸나. 그 후 나와 함께 내 숙원을 이루는 영광에 참여하자꾸나.”


 


한 점의 어둠도, 의심도 없는 확고한 신념의 말.


 


이래선 어쩔 수가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 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는 분명히 그 제안에 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기사, 이천육백 년의 숙
원, 그런 건 별로 관심 없다. 단지, 이 시대에 그녀가 이름을 아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그녀가 몸을 마주한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
눈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그녀가 담담히 그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답해 다오, 루포리여.”


 


현실의 이유로 거부하려 했다. 내게도 직업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다
는 말로 나는 그녀가 아니라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굴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도 그녀의 종자가 되어야 한다면, 이젠 정말 변명거리가 없다.
나는 지금 멍청하게도, 전사이자 마법사이며 마법사의 수호자인, 나보다 터무
니없이 강할 것임에 분명한 저 기사님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에이, 이거 참.”


 


나는 어색하게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빠지는, 탄식 비슷한
소리가 얼핏 들렸다.


 


“에, 그리 도움 되는 종자는 못 될 것 같지만, 필요로 하시는 동안 성질껏
모시겠습니다.”


 


“아앗, 루포리, ‘성심’이야.”


 


데니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앗차, 전혀 다른 말이 되고 말았다! 이대
로라면 나는 초유의 신경질쟁이 종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내가 미처 말을
고치기도 전에, 은빛 기사는 검을 뽑고 있었다.


 


스르릉


 


아아, 그 소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취할 것만 같은 소리였다. 검을 잡아
본 이라면 모두 취하고 말 소리였다. 나는 넋을 잃고 검을 바라보았다.


 


은빛의- 그러나 빛을 흡수하는 듯 어두운 빛깔의 칼날. 그녀의 빛나는 은발
과는 다른, 그야말로 검에 어울리는 색을 가진 아름다운 검신이다. 그것은 미
스릴, 마법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검이었다.


 


그 어두운 은빛의 칼날이, 내 왼쪽 어깨 위에 다가와 앉았다.


 


“루포리, 시간의 방랑자에게 시간을 선사한 발견자여, 알리오스가 인도한 내
생애 마지막 반려자여. 이제 그대의 발로 나의 길을 열어라. 그대의 손으로 나
의 적을 쳐라. 그대의 긍지로 나의 죄를 심판하라.”


 


그녀는 여전히 달빛이었다.


 


“나, 엘리제 리 시올리나의 검이 되어라. 나의 종자 루포리여.”


 


아아…… 에에?!


 


 



억겁의 세월이 지난 것 같았다…… 아, 이건 아까 했던가?


 


아무튼 그 이후의 소란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었다. 아니, 실은 나도 넋을
잃어서 잠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잠시간의 상황을 간략히 표
현하자면, 학자들이 기사님을 포위하다시피 둘러싼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
을 외쳤고, 기사님은 아까 내가 소리쳤을 때 이상으로 놀라서 몸을 움츠리다가
하마터면 들고 있던 검으로 내 목을 벨 뻔 했고, 나는 우선 상황을 정리해야겠
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다들 심정은 이해하는데요, 우리 한 분씩 여쭙기로 하
죠. 다들 진정해 주십시오.”


 


혼란이 조금 잦아들었다. 자신을 영웅기사의 이름으로 소개한 은빛 기사님
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다.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루, 루포리여, 나는 이들의 이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이냐?”


 


“아니, 무슨 일을 일으킨 건 기사님이에요.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만요, 한
가지만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긴장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에, 정말로 엘리제 리 시올리나 경 맞으세요? 제겐 아무리 봐도 기사님의
머리카락, 아름다운 은발로만 보이는데요. 저희가 알기론 영웅기사님의 모발은
흑발이었다고 하던데요.”


 


내 얘기에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그녀는 웃었다.


 


“과연, 나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었구나. 그건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영웅
기사라니, 참 과분한 칭호로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그 기다란 은발을 몇 가닥 들어올렸다. 이내 낙엽을 떨
어뜨리듯 그 머리카락을 놓는다.


 


“이 머리카락은, 대가다.”


 


대가(代價)……?


 


“시간에 종속된 인간의 몸으로, 시간을 뛰어넘어 여행을 떠났던 나의 죄악에
대한 아주 값싼 대가이지. 나는 알리오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내 신의 가호를
버려야 했다.”


 


잘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건 아마, 무척 슬픈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내 기사님은, 정말로 바로 그 영웅기사님인 모양이다. 솔직한 심정
으론 아직도 반신반의지만.


 


시간을 뛰어넘는 마법도 곧장 인정했으면서 어째서 믿지 못하냐고 물어보면,
이건 인식상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영웅기사, 엘리제 리 시올리나 경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설이었으며, 신화였다. 인간의 수호자- 방금 전까지 마음속으로 딴
지를 걸던 대상의 격이 ‘과거의 기사’에서 ‘신과 같은 기사’로 승격돼 버린 것
이다. 격차가 너무 크다.


 


이번에는 이성으론 이해가 되는데 마음의 준비가 부족하다.


 


아무튼, 슬슬 학자분들도 궁금증을 풀게 해 주자.


 


“학자 여러분께서도 하실 말씀들이 있는 것 같던데, 레이디 앰린부터 한 분
씩 말씀하도록 하죠. 다들 영웅기사님께 예의를 갖춰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우, 푸로리는 벌써부터 훌륭한 쫑자구나?”


 


“에, 레이디 앰린, ‘종자’입니다.”


 


“그래, 쫑자. 흥.”


 


유리에에겐 발음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굉장히 보로
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아이, 앰린이라 하였느냐?”


 


나의 기사님이 드물게 먼저 관심을 표현했다.


 


“예, 기사님. 노루스의 유리에 앰린 공이십니다.”


 


“앰린이라면 과거에 신세진 일이 있었지. 어린 앰린이여, 고개를 들어 나를
보려무나.”


 


유리에는 탐색하는 눈으로 기사님을 곁눈질하고 있다.


 


“내 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고 싶구나. 모쪼록 내 불민함을 용서
해 다오.”


 


“됐어, 기분 안 상했어. 흥, 만나서 반갑습니다아아~”


 


저기, 그건 기분 상한 티가 너무 나지 않아? 이래서야 완전히, 재밌게 놀다
가 장난감을 빼앗기고 침대에 눕혀진 여섯 살 어린아이의 ‘안녕히 주무세요’
다.


 


이유는 모르지만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재빨리 차례를 넘긴다.


 


“그럼, 레이디 리힐딘, 말씀하시죠.”


 


릴리아는 푸른 눈동자로 기사님을 보고 있었다. 눈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저
계속 보고 있다. 그녀의 어깨를 톡톡.


 


“저기, 레이디 리힐딘?”


 


“어? 응, 어? 어어, 응!”


 


눈이 팽글팽글 돌면서, 정말 화들짝 놀란다. 집중력도 좋은 아가씨다.


 


“영웅기사님께 인사하셔야죠?”


 


“응…… 그렇지만, 그, 물어보면 화낼까?”


 


뭔가를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질문이길래?


 


“먼저 저한테 살짝 말해보실래요?”


 


릴리아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내가 몸을 낮춰 귀를 가까이 하자 귓속말로 소
곤거렸다.


 


“응…… 저기, 원죄, 에 대해서. 그, 오그마의 죽음에 대해서.”


 


원죄? 오그마?


 


앗차, 질문을 들어도 무식한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시대의 역사학자들이 알 수 없는 어떤 진실에 대해 묻고 싶은 모
양인데, 확실히 내가 듣기에도 좀 위험한 질문인 것 같았다. 원죄라는 건 역
시, 영웅기사님의 원죄라는 말이겠지? 초면에 상대방의 안 좋은 기억을 상기
시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미안해요, 레이디 리힐딘. 그 얘긴 다음 기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걱정 말아요, 기사님은 우리와 함께 가실 테니까.”


 


“그건…… 푸로리와 함께 가는, 거지.”


 


갑자기 날카로운 지적이다. 뭐,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릴리아는 기사님의 앞으로 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올리나 경. 유클리드 제국의, 아니, 북 유클리드
왕가의 후손, 릴리아입니다.”


 


어라, 릴리아, 왕가의 후손이었나? 그런데 ‘북 유클리드’는 뭐지?


 


“반갑구나, 리힐딘의 아이야. 그런데 유클리드 제국이란 말은 무엇인지, 물
어도 되겠느냐?”


 


기사님의 의문은 종자의 의문과 정 반대였다.


 


“유클리드 지역, 통일됐습니다. 남 유클리드의 허먼 3세가, 북 유클리드를
병합하고, 군소 왕국의 지지를 받아, 자신을 황제라고 칭한 후, 사람들은 유클
리드를, 제국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 팔백여 년이 흘러, 리힐딘 왕
가는, 여전히 유클리드 제국의, 후작가로서 남아 있습니다.”


 


아아, 그런 역사가 있었나? 일자무식인 나로선 처음 듣는 일이다. 아무튼 천
팔백여 년이면 정말 오래 전 일이니까. 릴리아도 가문의 패배와 병합에 대해
특별한 감상은 없는 듯했다.


 


단지, 과거에서 온 기사님만이 그 얘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는가. 남 유클리드의 록펠러 왕가는 야심찬 왕을 많이 배출했지. 결국
은 그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말았는가.”


 


릴리아가 다시 한 번 인사하고 물러난다. 나는 백작 커플을 바라봤다.


 


“다음은, 컨프턴 공?”


 


둘은 서로 마주봤다. 왠지 답한 것은 페넬로페였다.


 


“으흐흐, 그래, 배알해야지, 영웅기사님.”


 


눈이 빛나고 있다?!


 


아무래도 둘은 이미 일심동체인 듯, 인사도 입을 맞춰 동시에 했다.


 


“다섯 시련의 기사를 뵙습니다.”


 


“다섯 시련인가……. 그걸 말하는 거로구나. 그런가, 그런 이름으로 전해졌
는가.”


 


‘그’게 뭔지 모르는 나는 좀 슬펐다.


 


두 사람은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물러난다, 다음 차례는 아우렐리에인데……
에, 그녀는 내가 묻기 전에 기사님께 다가가 있었다. 그리고 인사한다.


 


“필모어 남작가의 아우렐리에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올리나 경.”


 


“반갑구나, 아름다운 필모어.”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인 아우렐리에는, 잠시 후 기사님께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어, 어째서? 처음 본 사이에 귓속말?


 


기사님도 처음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귓속말로 화답했다. 또
귓속말, 귓속말, 귓속말. 아니…… 그러니까, 왠지 즐겁게 대화하고 있는 것 같
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걸까?


 


어쨌든 그 아름다운 두 여성의 속삭임이 끝나고, 이제 청문회를 마칠 때가
되었다고 나는 판단했다. 청문회라고 하지만 다들 놀랐을 뿐이라서 질문은 하
나도 없었다. 처음에 벌떼처럼 달려들던 기세는, 그녀가 머리카락에 대해 말한
직후 모두 사그라졌던 것 같다. 누구도 의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건 어떤…… 품격이랄까? 그런 문제였다. 과연, 이런 기사라면 만인의 존
경을 받아 부족함이 없겠구나, 이 사람이 아니라면 영웅기사란 이름을 감히 쓸
수가 없겠구나, 하고 다들 승복해버리고 만 것이다.


 


“한 명이 남았거늘, 어째서 부르지 않느냐, 루포리여.”


 


기사님의 말에 난 비칠비칠 웃었다.


 


“이, 일드, 이리 와라.”


 


모른 척 넘어가려 했건만, 슬프게도 기사님께선 이 입만 열면 사건을 부르는
일드를 발견하셨다. 일드는 이름을 불린 강아지처럼 기쁜 표정으로 쪼르르 다
가왔다.


 


“예의를 갖추고 뵙도록 해라, 알겠지?”


 


부릅뜬 눈으로 주의를 주니 두 눈의 반짝임을 조금 잠재우는 일드. 그리고
기사님의 앞으로 다가갔다.


 


“헤헤, 전 일드랍니다. 어, 엄청 예쁘시네요. 저도 조, 종자 시켜주시면 안
돼요?”


 


“…… 바, 반갑구나, 일드여.”


 


일드는 목덜미를 잡혀서 강제 송환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장 동굴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내 종자에겐 그대들을 호위해야 할 임무가 있는 듯하구나. 그렇다면 한 시
가 바쁘니, 당장 길을 떠나도록 하자. 강행군을 펼칠 것이니라.”


 


하는 기사님의 발언엔 다들 흠칫했지만, 동굴을 나서는 일에는 모두 동의했
다. 5월이 되었지만 한밤중의 바닷가 동굴은 한기가 굉장했다. 대체 기사님은
이런 동굴에서 어떻게 수천 년을 보낸 걸까?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그냥 눈
을 감았다 뜨니 미래’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던데 말이다.


 


나는 맨 앞에서 굴을 걸었다. 달빛이 잘 들지 않는 굴이라 어두웠지만, 벽에
손을 대고 걷는 건 어렵지 않았다.


 


“종자를 앞세우고 걷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구나. 감개무량하도다.”


 


“그야, 이천육백 년 만이니까 그러실 만도 하지요.”


 


기사님은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종자는 많이 들이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과업이
무거웠던 까닭도 있고, 아무래도 여성 기사들은 드물어서 말이지. 괜찮은 인재
는 더욱더 드물었던 것이다.”


 


어라? 원래는 여성 기사만 종자로 들이셨던 건가?


 


“그런데, 저는 남자잖아요? 어째서 절 종자로 선택하신 겁니까?”


 


낮은 목소리로 묻자, 기사님은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


 


“글쎄, 그건 어째서일까. 그보다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다.”


 


“넵, 말씀하십쇼.”


 


그녀는 왠지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필모어라는 아이에 대한 것이다. 그대에게 그 아이는 어떤 존재이더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뎁쇼? 제게는 레이디 필모어입죠, 네.”


 


“그러하더냐. 음, 나의 착각이었던가. 그녀를 향한 그대의 눈빛이 평소와 다
르다고 느꼈는데 말이다.”


 


헉 헉 헉!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시다니,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그렇지만 간
신히 속일 수 있었다.


 


그녀는 왠지 즐거운 듯 맑게 웃었다.


 


“후후, 그렇지만 선남선녀로다. 걱정 말아라. 내 보니 그대들은 무척 잘 어
울릴 것 같다.”


 


간신히 속이지 못했다!


 


더 이상 변명하는 건 발밑을 파는 행위 같아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설마하
니 짐작만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전하거나 하시진 않겠지?


 


“내 그대의 마음을 전해 줄까?”


 


“아아악, 그냥 잊어 주세요, 애초에 불가능하다니까요?”


 


여전히 즐거운 듯 웃는 기사님.


 


“그대는 시시한 남자로구나.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늘.”


 


아니, 그 발언, 여러모로 위험하다구요.


 


그리고는 말없이 걷기를 한 다경, 나는 마침내 막다른 길에 섰다. 아마도 굴
의 입구였을 걸로 보이는 통로의 끄트머리에 과연 커다란 돌이 꽉 박혀 있다.
이것이 기사님이 말한 마법의 돌인가. 아니, 하지만 전혀 마법적으로 보이진
않는데? 그냥 바위덩어리 아닌가?


 


“기사님, 다 왔습니다. 앞에 바위가 있네요.”


 


“아아, 그렇구나. 그럼 루포리여, 잠시 내 뒤에 물러나 있어라.”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 우리 일행이 무척 흥미진진, 두근두근, 콩닥콩닥 했
음을 미리 말해둔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우리는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기사님은 바위 앞으로 걸어가, 왼손을 내밀어, 바위를 톡 하고 쳤다. 바위는
흙이 되어 흩어졌다. 신기하게도 흙먼지는 모두 동굴 바깥으로 날려간다. 그건
참 신기한 일이긴 한데…….


 


“에에, 왜에?! 아무 주문도 없고 그냥 톡 치는 것뿐이야?!”


 


유리에의 외침이 우리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런 우리들은 기사님은 웃는 얼
굴로 마주했다.


 


“마법을 거는 것도 아니고 해제하는 일 정도에 주문은 필요 없다. 억지로 이
룬 마법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데도 주문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본말전도가 아
니겠느냐?”


 


“우우, 멋 없어어.”


 


뭐, 그냥 투정일 뿐이다. 우리는 곧 동굴을 나섰다. 나와 보니 밖은 언덕이
었다. 한쪽으론 까만 밤바다가, 한쪽으론 크지 않은 산기슭이 보인다. 그 산은
아마도-


 


“어, 햇님산이다!”


 


“아니, 일출봉입니다!”


 


모국의 관광명소를 이상하게 외우고 있는 유리에.


 


하기야, 어차피 일출봉이란 건 임펠런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어쩌면 노
루스에선 정말 햇님산이란 뜻의 단어로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아
무튼 유리에는 그 산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우리나라다, 우와, 순식간에 우리나라다?!”


 


무척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빠- 아니, 대공 전하 보고 갈까?”


 


“아, 그러고 보니, 뵙고 가야겠네요.”


 


여기가 룽겔 만이 아닌 건 어쩌면 천만 다행일지도 모른다.


 


“정말? 와아, 신난다! 짠돌이 푸로리가 웬일이지?”


 


“짜, 짠돌이라니…… 휴우. 어쨌든, 아직은 알려졌을 리 없지만, 며칠 내로
우리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임펠런 왕실에서 레이디 앰린의 실종 소식을 노루
스에 통보할 테니까요. 그러기 전에 직접 찾아뵙고 무사하단 걸 알려드려야 문
제가 안 생기죠.”


 


“아, 그렇구나. 아빠, 유리에가 없어진 걸 알면 전쟁이라도 일으킬지 모르니
깐, 헤헤.”


 


뭐 딸의 실종 때문에 전쟁까지 일으키는 국가 원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없는
쪽이 좋다.


 


문득 릴리아를 본다. 옆에서 들으며 웃고는 있지만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녀의 실종 소식도 곧 가문에 전해질 텐데, 역시 가족에게 걱정 끼치는 건 싫
은 일이겠지?


 


“레이디 리힐딘, 걱정 말아요. 가까운 마을에 가면 곧바로 편지를 보내기로
하죠. 임펠런의 파발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테니까 충분히 먼저 가서 닿을
겁니다.”


 


릴리아는 왠지 내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아, 맞아. 잊고 있었어. 고마워, 알려줘서.”


 


어라, 그 고민을 하던 게 아니었나?


 


“혹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아, 원죄. 언제 물어보지, 하고 있었어.”


 


아아, 그 질문 말이구나. 하여튼 이 아가씨, 뼛속까지 사학자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요? 기사님한텐 우리가 하는 질문이 수천 년 만에 나
누는 이야기가 될 텐데 혹시 기분 나쁘시면 어떡해요?”


 


릴리아는 낙담한 표정이 되었다.


 


제일 먼저 동굴에서 나섰던 기사님은, 언덕의 끄트머리에 서서 바다를 바라
보고 있었다. 밤이라 육풍이 불어, 은빛 머리카락이 바다 쪽으로 흩날렸다. 태
양이 떠오르는 동해, 그 너머에 있다는 이상향에라도 가 닿고 싶은 걸까? 푸
른 해원을 향해 나부끼는 하얀 깃발-


 


기사님은 나를 돌아보고 웃었다.


 


“루포리여, 머리가 앞으로 휘감겼구나. 신비한 모습이로다.”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시거든요?”


 


그 말에 고개를 육지 쪽으로 기울인다.


 


“루시는,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면 매우 좋아했다. 아름다운 비단의 길 같다
고 말해 줬었지. 그러나, 지금은 모든 색을 잃은 거짓된 머리카락- 전처럼 아
름답지는 않겠지.”


 


그런…… 가? 눈이 부셔 바라보지 못하겠단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좀 쑥스럽다.


 


“눈이 부셔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어이쿠, 쑥스럽다. 기사님도 당황했는지 표정이 몇 번 바뀌었다.


 


“…… 그대는 루시 만큼이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잘 하는구나.”


 


“에, 감사합니다.”


 


루시라는 분은 아마 동료일까? 무척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어, 여정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데인을 경유해 임펠런으로 갈 예정입니
다.”


 


노루스 공국의 수도, 앰린 대공의 궁궐이 있는 데인. 그 곳에 가서 앰린 가
의 가족상봉을 도와줘야 한다.


 


“아아, 좋도록 하라. 얘기했다시피, 그대의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내가 그대
를 따르는 입장인 즉, 어떤 길을 가든 두고 가지만 않으면 된다.”


 


“두, 두고 가다뇨!”


 


깜짝 놀라 반문하자, 기사님은 장난스런 얼굴로 웃어 보인다.


 


아아, 진담과 농담이 구별되지 않는 분이다. 그냥 말하는 것만 듣는다면 분
명히 농담일 텐데, 말할 때의 표정이 너무도 품위 있어서 차마 농담이리라곤
생각을 못하게 된다.


 


“어…… 어떠신가요? 아주 오랜만에 나오셨는데. 여기 풍경은 여전한가요?”


 


고작 이십오 년을 살아온 나로선, 이천 육백여년 만에 지상에 선 기사님의
감흥을 적절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기사님은 웃었다. 맑은 웃음- 그러나 어딘
가 쓸쓸함이 깊이 배어 있다.


 


“자연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 역시 무언가 바뀌었을까, 하고
이리 저리 둘러보았지만, 산도, 들도, 바다도 어디 하나 변한 것이 없구나.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역시 사람뿐인 모양이다.”


 


“그런…… 가요?”


 


그 시절과 다름없는 자연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
히려 그것에 불만인 듯하다. 차라리 전부 다 변해 버렸다면, 하고, 중얼거리는
말이 바람결에 들린 것도 같았다.


 


“엘리제라고 부르거라.”


 


난 그 말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해서, 그저 기계적으로 따라했다.


 


“에, 엘리제라고?”


 


“그대가 나만의 종자이듯, 나는 그대만의 기사다, 언젠가는 헤어져 타인이
되겠지만- 지금 그대와 나는 하나의 ‘기사’다. 언제까지 나를 기사님이라 부르
려느냐?”


 


그런 건가? 잘 모르겠지만,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알았어요, 엘, 엘리제.”


 


왠지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어감이다 싶어서, 나는 말을 더듬고 말았
다. 그렇지만 나의 기사님은 충분히 흡족한 듯 보였다. 쓸쓸함이 가신 웃음으
로 나를 바라본다.


 


“고맙구나, 루포리. 나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종자여.”


 


바람은 서늘하게 우리 사이를 스쳐 가지만, 나는 왠지, 그녀와 내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만나자 마자 포옹했던 그 순간처럼, 서로
를 전혀 알지 못하고,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지만, 우리는 어딘가가 하
나로 이어져 있었다.


 


 


 


 



-------------------------------------


-1화 끝입니다.
-아아, 어제 밤을 새워 썼습니다.
-아아, 어제 밤을 새워 게임을 하기 전에, 한 세시간 동안 글을 썼습니다.
-... 두 말이 전혀 느낌이 다르군요. 글을 쓴 것도, 밤을 새운 것도 사실인데 말입니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글이 듬성듬성, 얼룩덜룩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서도 혹시 그런 느낌을 받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