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1 - 도래(到來)

2010.08.21 10:01

비벗 조회 수:262 추천:2

extra_vars1 13 
extra_vars2 134942-1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억겁의 세월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런 내 판단과는 달리, 실제로 그녀가 날 안고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
았던 모양이다. 간신히 풀려난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학자들과 일드는 여전히
멍하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은빛의 기사를 바라본다.


 


그녀는 달빛 속에 고고하게 서서, 나와 내 뒤의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객관적 진실만을 사용해서 부연하자면, 그녀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키였으며 훤칠한 데니스에 비하자면 아이와도 같았다. 결코 우리를 내려다볼
수는 없었다.


 


‘내려다본다’는 느낌은 그저 내 주관이었다. 내 기묘하게 왜곡된 시계 속에
서, 우리가 무슨 일을 겪고, 무슨 이유로 여기 왔으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분명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세월은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이렇게나 사람이 그리워질 거라곤 한 번
도 생각해본 적 없었거늘,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아아, 그렇지만 그대도 참
대담하구나. 이런 적극적인 인사는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보았다. 눈을 뜨자마
자 보이는 것이 단단한 남성의 가슴이라니, 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더구
나. 탓하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여라. 그저 조금 놀란 것뿐이다. 혹시 이 시
대엔 그런 인사가 보통인 것이냐?”


 


미지의 사태에 처해 미지의 존재를 만났으니, 어떻게든 정보를 얻고 대화를
이끌어 도움을 얻어야 한다고 그 와중에도 냉정하게 판단한 나였다. 그래서 중
간까진 잘 따라가며 대답과 질문을 여러 가지 준비했는데, ‘적극적인 인사’에
서 다시 멍청해졌다.


 


아니, 그러니까, 방금 그 ‘기습 포옹’을 그 한 마디로 정리하신 겁니까! 애초
에 의도한 바도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처음 보는 사이에 갑자기 포옹을 하며
인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겁니까!


 


그녀는 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래, 그런 이야기는 차차 해도 좋겠지. 그대 역시 마음이 급하다는 것을
안다. 염려치 말거라. 그 점에서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도달하였느니- 오히려 서두르는 내 자신을 멈출 수가 없을 정도
다.”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 내게 모르는 이야기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이
대로 듣고만 있어도 정보를 꽤 얻을 수 있겠으나,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
다.


 


그녀는 분명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떤 계획에 의해
내가 이 곳에 왔고, 그녀를 만난 게 반가워서 그녀에게 격하게 ‘인사’했으며,
나와 그녀가 어떤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고 그에 따라 서둘러 무언가를 할 것
이라는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런 오해를 빌미로 정보를 훔치는 일은, 눈앞의 작은 은빛 기사에게는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좀, 말씀을 좀 드려도 되겠삽삽니까?”


 


앗, 말이 꼬였다! 아니, 이건 당신이 문제야, 아까부터 시대착오적인 이상한
고어체로 말을 하니까 나까지 무심코 꼬여버렸잖아!


 


그녀는 그녀대로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말을 쓰는구나…… 아니, 아니다. 미안하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
는지는 모르나 고작 수십 년 정도의 세월은 아니었을 것이니, 내가 그대의 말
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해야겠지. 그대에겐 반대로 내 말
이 기이하게 들리겠구나?”


 


“아니, 그건 그렇지만요, 방금 그건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우선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대뜸 소리를 치자 그녀는 겁을 먹은 듯 한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덩달
아 나도 놀랐다.


 


그야, 공동 안에서 내 외침이 상당히 크게 울리긴 했지만, 왠지 이 세상 사
람이 아닌 것 같은 은빛 기사가 그렇게 놀랄 거라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저 난, 아무 의심 없이 내가 계획된 대로 그녀를 찾아온 동료일 거라고 바보
같이 믿는 모습에 좀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왠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을 뿐
이다.


 


하지만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빛으로 둘러싸여 있던 그녀인 만큼, 비현실적
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 합당하고, 나로선 그 비현실이 어떤 존재인지 알 도
리도 없다. 그렇지만 외견으론 아무리 봐도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아가씨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대포 화통을 삶아먹은 내 커다란 외침 소리에 놀라지 않
을 리가 없었다.


 


건전하고 순수한 청년 용병인 나는 그 약한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저기요, 우선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 너무 화내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 아아, 조금 놀란 것뿐이니 염려치 말거라. 대화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
기도 하지만, 그대는 목청이 참 크구나. 내가 한순간이나마 움츠러들고 말다
니, 대단한 성량이다.”


 


성량이야 별로 장기는 아니라지만, 칭찬을 들어서 마음이 더욱 약해졌다.


 


“아뇨, 그게 아니라요, 다른 얘긴뎁쇼. 정말로 기사님께 죄송한 일이 하나
있어서 그럽니다. 부디 침착하게 차분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거
들랑요.”


 


…… 자꾸 약해진다고 날 비난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죄송합니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이 새하얀 아가씨 굉장한 미인이거든요? 이상한 고
어체로 말하지만 목소리도 맑고 밝고 아름답거든요? ‘이 시대’니 ‘시간이 지났’
느니 이상한 말은 하지만 그것도 미인이 하면 왠지 신비롭게 들릴 뿐이거든
요? 세계 인구의 절반을 대변하여 저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 왠지 세계 인구의 다른 절반이 화낼 것 같다. 방금 한 생각 취소!


 


아무튼 내 약한 모습과 약한 발언에 그녀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느낀 듯
했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심각한 표정으로 내 눈을 보고 있다.


 


“그대의 말을 경청하겠다. 말해 보라.”


 


“그러니까, 다름이 아니라, 방금 말씀하신 그 얘기들 말입니다, 사실 저희들
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흰 이 곳에 우연히 왔을
뿐입니다. 기사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릅니다. 아, 허락받
지 않은 곳에 함부로 왔다는 자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저희 의도가 아
니라 마법에 말려든 것뿐이라서 말이죠, 그, 너무 탓하지 말아주셨으면, 감사
하겠는데요…….”


 


그렇게, 전부 다 고백했다. 미지의 존재와 교섭할 때 고백이란 결코 좋은 방
법이 아니다. 그렇지만, 난 내 앞의 기사를 좀 믿어보기로 했다. 이번엔 그녀
가 미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일행의 안위가 달린 문제니까, 사적인 감
정으로 처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는 아니고, 단지……


 


오랜 시간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 완전히 엉망이 됐다는 것도 모른 채, 기쁜
표정으로 내게 반가움을 표하고 계획을 얘기하며 들뜨는 그 어린아이 같은 모
습이, 가슴 한구석에 숨겨 뒀던 양심이란 놈을 사정없이 찔러댔던 까닭이다.



앗차, 결국 사적인 감정이구나.


 


“아아……”


 


나지막이 탄성을 흘리는 은빛 기사. 그녀의 표정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무
슨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는 힐난 같기도 했고, 세상 다 산 노인이 겨울 먹구름
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내 예상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후, 놀랍게도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랬구나. 그래……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사의를 보여야 마땅하겠
지. 분명히 말하건대 그대에겐 잘못이 없다. 내 오해를 그대에게 전가할 만큼
나는 옹졸하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힐끔거리지 말고 그만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숙인 채 힐끔거리다가, 들키고 말았다.


 


그렇지만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아까까지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이 상황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서두르는 마음을 누르지
못한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고 했다. 사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리웠다고 했다.


 


그런데 도래한 사람이 고작 나였던 것이다.


 


아무 관련도 없는 자가 나타나 갑자기 끌어안고(재차 강조하지만 고의가 아
니었다), 기대하게 만들고, 결국엔 실망시켰다. 나 같아도 화가 난다 그 상황.
그러니 그녀도 분명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어쩌면 그녀는 놀라울 정도의 인격자? 아우렐리에 아가씨만큼?


 


놀라울 정도의 인격자일 가능성이 있는 은빛 기사는, 고개를 살짝 든 내 얼
굴을 탐색하듯 보고 있었다.


 


“이제껏 멋대로 얘기해놓고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 몇 가지만 더 묻고
싶은 게 있다.”


 


“예! 물론, 성실히 답해 드리겠습니다.”


 


무심코 또 큰 소리를 내자,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마치 ‘어
쩔 수 없는 녀석이구나.’ 하고 고소(苦笑)하는 것 같았다.


 


“올해는 몇 년이 되는지 알고 싶구나.”


 


아아, 그렇다.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이었다.


 


물론 내 이성 속에는, ‘그런 마법같은 일 있을 수 없다’는 상식이 오래 전부
터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내 상식이란 이 시대의 상식일 뿐이다. 우리 일행
을 이 먼 바닷가로 데려온 공간 마법처럼, 달빛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동굴 통
로마저 남김없이 비춘 그 새하얀 빛처럼, 내 눈앞의 은빛 기사 역시 이 시대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라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올해로 1505년이 됩니다. 지금은 5월 초순이고요.”


 


아, 정확한 날짜는 모르니까 못 가르쳐드려요. 아마 8일 저녁이나 9일 새벽
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오월이란 건 물푸레의 달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천오백오 년이라니,
어느 역법으로 천오백오 년인 건지 모르겠구나. 혹 마법세기 역법으로 센 것이
냐? 그렇다면 사백 년이나 지나고 말았다는 것인데, 희소식은 아니로구나.”


 


으아아악, 이 사람, 진지한 표정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릴리아를 보았다. 아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학자들과 함께 나와 은빛 기사의 대화를 보고만 있던 릴리아는, 내 시
선에 굳은 표정으로 몇 걸음 걸어나왔다. 내게선 오른쪽 뒤로 두 걸음쯤 떨어
진, 기사로부턴 대충 다섯 걸음쯤 떨어진 그런 거리에 멈춰섰다.


 


은빛 기사의 시선이 자연스레 금발의 소녀에게로 옮겨갔고, 릴리아는,


 


눈을 꾸욱 감으며 말했다.


 


“제국력으로, 천오백오 년입니다.”


 


기사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표정이었다.


 


릴리아가 눈을 떴다. 옅은 보랏빛 눈동자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세기력으로, 올해, 삼천칠백 년 정도가 됐을 겁니다.”


 


이번에는 은빛 기사가, 눈을 감고 말았다.


 


 


------------------------
-지난 주말에 비축을 못해놨더니, 밤중에 타이핑하느라 죽겠네요.
-그래서 오늘도 짧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글 바로 아래 있는 멋진 글에 비해 너무 짧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뜬금없어! 그보다 시청자가 아냐! 졸리면 가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