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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Seven Stars

2010.08.19 20:08

乾天HaNeuL 조회 수:289 추천:2

extra_vars1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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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


 


  한참 비가 오는 축축한 밤이었다.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내리지 않고 비가 온다는 것은 그 지역이 꽤 따뜻한 곳이고, 오늘도 그렇게까지 추운 날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 겨울의 비는 사람의 체온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헉헉.”




  오솔길, 그것도 진흙탕이 된 곳을 열심히 뛰어가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하나같이 후두를 뒤집어 쓴 채, 횃불 하나에 의지한 상태로 위험한 숲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포티스 영감! 도대체 이 길이 맞기는 한 겁니까?”


  “영감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 이 애송아! 그리고 이 길 맞다!”




  천진난만한 음성과 대조를 이루는 굵직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 옆으로 엄청난 화살이 비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조금만 정확하게 겨냥되었다면, 그들은 아마 고슴도치가 되었을 지도 몰랐다.




  “어째 이번 의뢰는 영 꺼림 찍하더니, 이런 함정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짜증을 내는 그―왠지 모르게 그 사람들의 리더처럼 보이는 자―의 후두가 벗겨졌다. 한 밤 중이라 얼굴은 잘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가 들고 있는 횃불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로, 마치 사물을 불태워버릴 듯한 힘을 내뿜어냈다.




  “고블린 열 마리 처치에 금화 열 냥이라니, 사실 말도 안 되었었는데!”


  “그런 걸 지금 탓해서, 뭐하나 애송아.”


  “포, 포티스! 옆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위험을 간직한 그는, 급히 포티스라는 자를 옆으로 홱 잡아 당겼다. 포티스가 있던 곳에, 대략 10여발의 화살이 박혔다.




  “이런 완전히 길이 막힌 것 같네.”




  리더로 보이는 청년은, 왠지 모르게 키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포티스를 옆으로 내려놓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수많은 횃불들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제 어디로 갈 곳도 없었다. 막다른 길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스페란자 씨.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어요?”




  그가 자신의 우측에 서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자, 그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완전히 덮고 있는 후두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뭔가 인간과는 다른, 인간의 귀보다 훨씬 긴 그것이 쫑긋하며,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 존재는 그 긴 귀로 소리를 듣기 위해 한참 동안 집중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방해 돼. 저것들 때문에. 길을 찾을 수 없어.”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졌다. 조그마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빗소리에 거의 파묻혔지만,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다 들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매우 간략한 답변이었지만, 절망에 가까운 현실을 일깨워주는 데에는 일말의 부족함도 없었다. 스페란자의 말을 들은 청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자신의 왼쪽 허리춤에 걸린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뭐야? 싸우겠다는 거냐? 애송이 넌 뒤로 빠져.”


  “동감. 네가 싸우면 오히려 방해.”




  포티스와 스페란자는 청년이 검을 채 뽑기도 전에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참 동안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네가 싸우면 뒤처리를 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도 생각하라고. 너를 지키려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싸우기는 뭘 싸워?”




  가느다랗고, 고음 영역의 목소리였다. 역시 여성의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거친 느낌이 나는 말투였다.




  “그래도 난 어제까지 무려 십일 동안 열심히 수련을 한…….”


  “수련은 개뿔. 거의 잠만 잔 주제에.”




  변명을 하려는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자른 다음, 그녀는 핀잔을 주었다. 그와 함께 자신의 등에 매달려 있는 긴 검을 뽑아 들고 두 손을 잡아들었다.


  후두에,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망토, 그리고 비옷 등, 아무튼 몸매를 잘 알 수 없게 해주는 요소들이 많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아주 연약해 보이는 타입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 들고 있는 검은, 건장한 남자들도 들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길고 큰 양손 검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 놈들의 숫자 줄이기다! 자 한 사람당 대충 서른 마리씩 처치하면 끝이 보일 게야!”




  포티스의 굵직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키가 인간의 반절만하지만, 흉포한 특성을 지닌 고블린들을 향해 뛰어 나갔다. 그와 함께 그들의 무기가 빗방울을 가르며 고블린들을 베어 갈랐다.




  “하아, 또 이렇게 되는 건가?”




  혼자 뒤에 남아버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근처에 있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들의 실력을 잘 알기 때문에 큰 위험은 없을 것이었지만, 그래도 자기 혼자 이처럼 편안하게 뒤에서 쉬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 저들을 돕겠다고 가는 것도 문제였다. 저들의 말 대로 가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는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연약하기 짝이 없고, 가장 싸움을 못하는 존재로, 방해물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이 비는 언제 그치는 거야?”




  그는 자신의 몸을 차갑게 만드는 거센 빗줄기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오늘 이처럼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 이유 중 하나에는 뜻밖의 폭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비가 드문, 특히 겨울에는 가뭄이 극성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인데, 이렇게 많은 비가 쏟아지는 것이 영 이상했다.




  “애송이! 그 쪽으로 한 놈 튀어갔으니 조심해!”




  잠시 하늘을 쳐다보며 다른 생각을 하던 그에게 포티스의 굵은 목소리가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일어나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고블린 한 마리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그 청년은 급히 검을 뽑아 들려고 했는데, 실수로 검을 땅에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엑!”




  더욱 당황한 그는 그 검을 찾으려고 몸을 굽혔다. 그와 동시에 고블린이 휘두른 검이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을 정확하게 베어버렸다.




  “어래?”




  이제 횃불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그러니까 단순한 막대기에 불과하게 된 그 물건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실로 이 상황과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상당히 비슷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어린아이 같다는 것은 차치하고, 그의 생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 고블린이 녹슨 칼을 번쩍 들어 올려서 눈앞의 존재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버리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악!”




  그는 소리를 냅다 내지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본능적으로 손이 앞으로 나오며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에 불과한 것으로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자신은 분명이 그 검에 베여서 엄청난 고통을 느껴야할 상황이었지만, 어떠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떠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았다.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갈가리 찢겨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진 고기처럼 된 고블린의 시체와, 그것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한 여인이었다.




  “베리, 괜찮은 거야?”




  부드러운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들고 있는 커다란 검을 땅에 꽂으며, 슬며시 눈길을 청년에게로 옮긴 다음에 그에게 물었다. 베리라 불린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어적으로 움직이다가 본의 아니게도 진흙탕 속에 들어가게 된 그의 옷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구해주러 온 그녀 역시도 꼴이 영 말이었다.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같다고나 할까나?




  “휴우, 식후 운동감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제까지 도망만 다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약해 빠진 놈들뿐이구먼.”


  “동감.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굴에서 싸우는 것은 위험. 여기까지 온 판단은 정확.”


  “말을 그렇게까지 잘라서 이야기할 건 없잖아, 검은 요정 양반. 하여간 몇 년을 같이 일했는데도 아직도 적응을 못하겄네. 이거야 원.”


  “난쟁이족과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상성이 안 맞는 것은 당연. 어쩔 수 없다.”




  냉철하면서도 뭔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방금 전까지 수많은 적의 심장을 꿰뚫은 검을 정성스럽게 닦은 뒤,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마치 소중한 물건을 간직하는 것 마냥 품안에 넣었다.




  “흥, 사람하고는.”




  거친 목소리의 난쟁이족, 즉 드워프의 포티스는 억센 팔로 자신의 대형 전투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에 묻어 있는 수많은 피와 뇌수가 사방팔방으로 뿌려졌다.




  “이거야 원. 또 날이 망가졌잖아. 대장간에 가서 수리를 해야겠는데?”


  “영감님. 드워프가 대장간을 가다니요. 자기 무기라면 스스로 정비를 해야 정상 아닙니까?”


  “흥, 죽기 직전에 살아난 애송이 녀석이 아직도 입은 살았구먼. 대장간에서 수리를 하든 말든 그건 내 자유니까 신경 끄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침내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이제 달이라도 뜨려나? 오늘은 보름달이라, 달만 떠도 길 찾는데 도움이 될 터인데 말이야.”




  포티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늘은 검은 구름에 막혀서 달빛을 완전히 가린 상태였다.




  “일단 여기서 잠시 쉬시죠. 다들 지치셨을 테니.”


  “너만 빼고.”




  베리의 말에, 차가운 핀잔이 또다시 주어졌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대형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단 한 번에 세 마리의 고블린을 작살 낸 그 여성이었다.




  “아무르 누나.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러게 내가 단련시켜 줄 때 수업을 잘 받았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되었을 거 아니야? 무슨 팀의 리더는 정확한 판단력과 상황 대처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거야! 나 참 기가 막혀서. 오늘 네가 한 사람 분이 아니라 반 사람 분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다.”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이 참에 풀려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발언이었다. 그녀는 속사포로 말을 늘어놓은 다음에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겠어! 다음부터는 꼭 제대로 수련할 테니까, 그만 좀 갈궈.”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베리는 순순히 수긍하였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따름이었지, 속에서는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잠깐.”




  이제 잠시 좀 쉬려고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갑자기 다크 엘프인 스페란자가 한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워낙 긴박하고 위급한 담은 말투였기 때문에, 다들 다시금 긴장했다. 그들은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주변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저쪽에 누군가 있다.”


  “몇 명이나 되는 거예요?”


  “한 명. 숨소리를 들어 보니 인간. 그것도 약해져있다.”


  “예?”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기는 했지만, 사람이 이 험악한 숲속에 쓰려져 있다는 사실은, 또 그것 나름대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베리는 급히 스페란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고, 그 뒤를 아무르가 이었다.


  그가 발견한 사람은 뭔가 이국적인, 아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옷을 입고 있는 한 청년이었다. 아직 앳돼 보이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소년으로 볼 수도 있었다. 만약에 짧은 머리가 아니었다면, 여자 아이로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연약하고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자였다.




  “어이 이보세요! 정신 좀 차려 봐요!”




  베리는 급히 그 사람을 흔들면서 깨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몸에 손이 닿은 순간 지금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비에 체온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호흡도 간신히 이어지는 상황이었고, 어찌 되었든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무르 누나. 빨리 불을 피워요!”


  “부, 불? 아, 알았어. 불 피우는 도구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던가? 아니 저기였던가? 이 호주머니에 있었나? 아니면 이 짐에 있었나? 이잉,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




  싸울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듬직하고, 아니 무서울 정도의 존재이지만,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왠지 모르게 이상해지는 아무르의 모습에 그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는 잠시 멍한 상태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또 시작이군. 하하하, 하긴 저래야 여자답지.”




  걸걸한 포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갑자기 자신의 옆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모닥불이 어느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닥불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능적 물체에 눈길이 갔다. 불의 정령이었다. 자신의 파티에서 정령을 다를 수 있는 건, 스페란자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스페란자 씨.”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일단 그들도 쉬어야하고, 또 이 사람의 체온도 빨리 원래 상태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 근처에 백여 마리의 고블린 시체가 쌓여 있는 것이 한 가지 흠이었지만, 아직 썩을 일은 없었고, 또 그런 일이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 어디서 왔을까?”


  “그러게. 외국인인 거 같기는 한데, 이런 외국 사람은 처음 보는 거 같아. 게다가 머리카락도 완전 검잖아? 서북쪽에서 왔나?”


  “설마. 그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지도 않는다던데.”




  아무르의 말에 베리가 부정하였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서북쪽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간 지방에 틀어 박혀서 전혀 내려오지 않는 인종이었다. 따라서 그곳으로부터 엄청나게 떨어진 이 숲까지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게다가 이런 옷을 입는 사람은 본적도 없어.”


  “음, 가슴 언저리에 뭔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거 어디 가문의 문장이라도 되나?”




  포티스가 그 소년인지 청년인지 알 수 없는 자의 가슴에, 동그랗게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의 긴 수염을 매만졌다.




  “근데 완전 여자처럼 생겼다. 머리만 길었으면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야. 그리고 왠지 피부색도 검은 요정 쪽에 가까운 거 같고.”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야?”


  “응? 왠지 인형 같아서 귀엽다고.”


  “…….”




  왠지 모르게 수줍어하는 아무르의 모습에 베리는 할 말을 잊었다. 이번이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응이 영 되지 않았다.




  “아, 아무튼! 그냥 그렇다고.”


  “어지간히 할 말이 없었나 보네.”


  “동감.”


  “하하하, 그래야 여자답다니까.”




  그녀의 반응에 다들 한 마디씩 해주었다. 덕분에 부끄러워져서 머리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아무르는, 급히 자신의 대검을 쥐고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는 왜 안 와? 오늘부터 고된 훈련을 해야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큰 음성으로 가리려는 티가 확연히 났다. 그러나 그것은 둘째 문제였고, 첫째 문제는 바로 지금 이 상황에서 수련을 시키겠다고 마음먹은 그녀를 어떻게 되돌릴 것인지 하는 거였다.




  “아, 아무르 누나. 그걸 꼭 지금부터 해야 해?”


  “아까 네 입으로 열심히 수련하겠다고 말한 것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험 삼아 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검풍이 일어나서 바로 눈앞에 있는 돌을 완전히 산산 조각 내버렸다.




  “저, 저기 누나. 사실 그 검을 맞상대 하다가는 나는 죽을 지도 몰라.”


  “응? 그러면 더 좋고.”


  “…….”




  왠지 현실 도피 겸, 증거 인멸을 노리는 사람의 모습 같았다. 아니 악귀 같은 그녀의 모습에, 베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지금 그녀와 맞붙으면 십중팔구 죽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 그래도 그렇지. 오늘은 비도 오고 축축하고, 또 연습용 검도 없고. 그러니까 내일부터 하자. 응?”


  “안 돼! 오늘부터 할 거야.”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젓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는 그녀가 이미 마이 페이스 상황에 들어간 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자는 이 중에서 아무도 없었다.







  「으음…….」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게다가 저체온 증상으로 잘못하다가 사망할 뻔 했던 그 사람이, 모닥불의 따뜻함에 점점 정상으로 돌아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처음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게다가 정신도 비몽사몽인 상태였지만, 점차 정신이 맑아지면서 의식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워봤다. 뭔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기분에 그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 머리 아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지만, 왠지 모르게 심각한 두통이 그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었다. 그것을 중심으로는 땅이 건조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곳이 축축한 것을 봐서는 비가 왔었던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보름달…….」




  먹구름이 군데군데 있기는 했지만, 마침 동그란 달이 구름사이로 그 아름다운 빛을 선사하였다. 그 빛은 자신이 있는 곳까지 확연하게 비추며, 그의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주었다.


  어둡지만 확연히 확인할 수 있는 검은색의 눈과 머리카락, 살짝 까무잡잡해서 갈색에 가까운 피부색, 이미 사춘기를 훨씬 넘겨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린 느낌이 드는, 그래서 왠지 모르게 어려보이는 느낌, 오뚝한 코, 커다란 눈망울, 여린 눈썹, 호리호리한 체구 등, 마치 여성을 연상시키는 듯한 외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그의 이름 서기수, 올해 나이 19세, 한창 고등학교 수험생으로 바쁜 생활을 지내던 도중,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난 뒤에 아는 형의 제대 축하 파티를 하기 위해 다들 모여서 여행을 떠나려던 찰나, 무엇인가 이상한 물체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현재 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별로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다시 고개를 내려 주변을 살폈다. 아까 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과 모닥불로 인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일단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키가 작은 할아버지, 아니 아저씨 같아 보이는 자였다. 잠을 자면서도 투구를 벗지 않았고, 게다가 뭔가 괴상한 포즈로 잠을 취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다 큰 어른인 것 같았다.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어서 외모는 잘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미형의 외모를 가진 것 같았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확인은 안 되지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청년으로 보였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사람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어두운 밤에 환한 달빛이 그녀를 비추니, 완전히 한 눈에 반해 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새우잠을 청하고 있기는 하나, 뭔가 고귀한 오라가 온 몸에서 풀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카락 색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아무리 봐도 푸른색 계열인 것 같지, 적어도 한국인처럼 검정 머리칼은 아닌 것 같았다.




  ‘외국인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외국이라 할지라도 검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었고, 또 그들의 옷차림이 왠지 모르게 중세 유럽풍과 살짝 유사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SF 소설 등에서 자주 다루는 시간 여행일 가망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곧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한 여성으로 인하여.


  기수 자신과 비슷한 피부색을 지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저기 한쪽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여성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눈앞에 서있는 여성과는 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달의 여신이 이 세상에 강림한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기수의 정신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귀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귀가 아니었다. 인간의 귀라면, 지금 눈앞의 여성의 귀처럼 길게 자랄 수가 없을 것이다.




  “깨어났나?”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다. 하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매우 간략한 단어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가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




  그 여인은, 기수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뒤로 돌아 굵은 나뭇가지 위로 뛰어 올랐다. 대략 높이 10m 이상이 되는 나뭇가지로 가볍게 날아올라 착지하는 모습에, 기수의 정신은 순간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잠시 후,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을 명석한 두뇌로 바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그의 생각은 단 하나에 이르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지금 그것이 자신에게 발생한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한 거네. 그것도 판타지 세계로. 하하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다니.」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속사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그는 그대로 뒤로 몸을 젖혀, 완전 대자로 뻗어서 누워버렸다. 아직 약간은 축축한 땅이 그의 등과 뒤통수를 간질였다.


  달빛이 다시금 먹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아보았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제까지 계속 기절한 상태로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한 지라 잠이 완전히 달아난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짝 안정이 되자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는 한 다를 여섯 명도 그 이상한 물체에 빨려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 자신이 있는, 이 새로운 세계로 건너왔을 가망성이 높았다.




  ‘태우, 하나, 유진, 루리 누나, 태신 형, 가름 형.’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하나하나 불러보았다. 다들 무사한 것일까?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과 함께 수많은 의구심이 그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러한 의구심과 걱정은 많아지고 심해질 뿐이지, 도저히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난 그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눈을 번쩍 떴다.




  「후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후 해가 뜰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별을 하나씩 세가면서 말이다.


  마침내 동편에서 해가 떠올랐다. 일출과 더불어 아름다운 장관이 연출되었고, 그것이 뒤숭숭한 기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주었다.


  기수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세운 채, 자연이 선사해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면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왜 눈물이 나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눈물을 교복 소매로 닦았다. 어차피 원래 있는 세계로 돌아가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으며, 소중한 사람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점점 그리워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자신이 살던 서울에서도 펼쳐지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기수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냈다. 사실 그것은 멋있어 보이려고 메고 다니는 목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아주 뜻 깊은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엄마…….」




  갈색의 피부, 환한 미소, 그리고 자애로운 애정을 자신에게 마음껏 선사해 주었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절실하게 났다.


  그는 반지를 어루만지면서 옛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슬픈 일도 많았지만, 그것보다는 즐겁고 기뻤던 일이 더 많았다. 그래, 지금으로부터 3년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었다.




  「하아…….」




  엄마 생각이 간절해지자, 그의 눈가에 눈물이 또다시 고였고, 이번에는 끊임없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에 잠긴 적은 많았지만, 오늘처럼 눈물을 많이 흘리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왜 울고 계세요?”




  한참을 말없이 울고 있다가, 문득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작 놀란 기수는, 급히 반지를 옷 속으로 넣은 다음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대충 봐도 180이 훨씬 넘는 키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과, 붉은 태양을 연상시키는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 사람, 즉 베리타스는 매우 걱정스런 말투로 기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기수는 처음 듣는 언어인지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계속되는 묵언에, 베리타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포티스 영감은 기지개를 피면서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고, 아무르는 눈을 비비면서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못하시는 건 아니시죠?”




  말뜻을 알았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터였지만,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기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베리타스의 얼굴과 또 그의 입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기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




  계속되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기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렸다. 괜히 한국어로 이야기를 해봤자 알아들을 가망성도 없었고, 또 괜히 이상한 사람이거나 수상한 사람 취급당할 확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말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이 옳은 판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곤란하네.”




  베리타스의 얼굴에 걱정스런 표정과 당혹스런 표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는 슬며시 뒤로 돌아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 사람 말을 못하는 것 같아.”


  “에? 그런데 어떻게 여행을 다녀? 여행자들은 기본적으로 대륙 공통어를 어느 정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잖아. 저 상태로는 국경도 못 넘었을 텐데.”


  “꼭 여행자일 확률은 없잖아.”




  아무르의 말을 베리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뭐 짐을 세 개나 들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포티스는 손가락 하나로 기수 옆에 놓여 있는 세 개의 짐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여행자가 아니고서야 저 정도로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닐 일은 별로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었겠네.”


  “흐음, 과연 그럴까?”




  베리의 말에, 포티스는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기수의 이상한 옷차림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 지역에서 저런 옷을 입는 지역은 그가 알기론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대륙 어디를 가더라도 저런 이상한 옷을 입는 민족은 없을 것이었다.




  “내가 옷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저 옷을 보게. 자네 저 옷을 어디서 본적이라도 있나?”


  “아니요. 본적도 없는 옷인데요. 흠, 그러고 보니 가슴에 뭔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무슨 가문의 옷이라도 되려나요?”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워낙에 눈이 좋은지라, 베리의 눈에는 그 교복에 새겨진 학교 문양이 아주 뚜렷이 보였다.




  “아무르 누나. 저 문양 본적 있어?”


  “아니. 처음 보는 문양인데. 저런 이상한 문양을 쓰는 가문이나 국가는 아마 없을 거야. 대부분의 국가나 가문은 보통 꽃이나 나무, 뭐 그런 걸 문양으로 사용하잖아.”




  아무르가 하품을 해대면서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의 설명에 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저런 이상한 문양을 사용하는 국가나 가문은 없을 터였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이거 우리 굉장히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거 아니야?”


  “흠, 그러면 내가 저 사람을 두들겨 패서라도 괜찮은 정보를 알아낼게!”


  “에? 아무르 누나 그건 좀!”




  베리가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의 푸른빛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는 불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앉아 있는 기수의 바로 앞에 섰다. 시선의 위치 차이가 좀 났기 때문에, 그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쪼그려 앉았다.




  “…….”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말이다.


  기수는 그녀의 얼굴, 분위기 모든 것을 제대로 관찰하였다. 자신보다 살짝 어려보이는 외모이지만, 성숙한 여인의 멋을 뿜어내고 있는 듯 보였다. 게다가 왠지 모르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빛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다만 그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것이, 단발머리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남자아이 같이 짧게 자른 머리칼과 또 온 몸을 두르고 있는 갑옷들이었다.


  그가 그녀를 관찰하는 동안, 아무르 역시 기수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오뚝한 코에, 커다란 눈망울에, 여린 눈썹에다가, 겉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호리호리한 몸매, 왠지 모르게 여자 아이를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만약 머리카락을 거의 없다고 봐도 만무할 정도로 짧게 자르지 않았다면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으읍…….”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올 뻔했다. 결국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뒷걸음질 쳐서, 그곳에서 도망치듯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풉, 얼굴이 그게 뭐야? 크큭”


  “하하하, 이거 완전히 저 사내놈한테 반했구만!”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아무르의 모습을 보고서 베리와 포티스는 놀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야! 누가 저런 수상쩍은 인간한테 반했다는 거야?”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죽일 듯이 달려 들어가 놓고서는 한 마디도 못한 채, 그것도 얼굴은 빨갛게 익은 채로 도망쳐 올 리가 없지 않나? 하하하, 지금이 참 좋은 때지. 올 해 나이가 열여덟이면, 남자한테 관심이 있을 법도 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포티스 씨! 전 결혼하기 싫어서 집엣…….”




  아무르는 버럭 성질을 내면서 반론을 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응? 아무르,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아직 졸린 것 같으니까 저는 저 나무 밑에 가서 좀 쉴 거예요. 아하하하.”




  그녀는 상황을 대충 수습하고는, 이번에도 역시 도망치듯이 커다란 나무 밑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스페란자가 쉬고 있는 바로 그 나무였다.




  “언니, 한 잠도 안 잔 거야?”


  “아니. 잠깐 눈은 붙였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그녀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 스페란자가 나뭇가지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서, 그 옆에 앉았다.




  “언니 쟤 말이야. 정말 여자 같아. 내가 봐도 반할 정도로. 저런 얼굴을 가진 남자가 진짜 있을 줄 몰랐어. 뭔가 물어보려고 했었던 거 같은데, 앞에서 그 얼굴을 보니까, 할 말이 다 사라지는 거 있지?”


  “그래.”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아무르가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하지만 스페란자는 별다른 대답 없이, 이상한 이방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별로.”




  그녀는 짤막하게 답변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베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아무르는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말은 안 하나?”


  “예, 스페란자 씨. 저 사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요. 말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것도 그거지만, 저 놈 옷차림이 영 신경 쓰인단 말이야. 꼭 계집애처럼 생겨가지고는 말이야. 게다가 가방도 처음 보는 희한한 걸 가지고 다니고 있지 않나? 왠지 고급품인 것 같기도 하니, 뭔가 되는 놈인 것 같기도 하고. 한 번 짐을 뒤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네. 검은 요정 양반, 어떻게 생각하나?”




  그 둘은 스페란자에게 주구장창 설명을 늘어놓은 다음에,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스페란자는 잠시 말없이, 또다시 그 사람을 노려보듯 쳐다본 다음에 입을 열었다.




  “별로. 위험한 것 같진 않다.”


  “에? 정말요?”


  “그래.”




  일행 중 가장 예민한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하자, 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빙긋 웃었다. 수상한 사람이라 해도,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베리가 뒤통수에 양손을 가져다 대면서, 시선을 내려 포티스를 바라보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그―사실 그는 올해 나이 162세로 125세의 스페란자보다 훨씬 연상이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이 파티의 리더는 자네가 아닌가? 최연소인 14살에 단 네 명으로 구성된 해결사 집단인지, 용병 집단인지 뭔지 모를, 길드도 아닌 길드를 만들어낸 자네가 알아서 하게.”


  “영감님. 왠지 모르게 말에 뼈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또 영감이라고 했겠다! 나는 아직 결혼도 못 간 청춘이라고! 난 아직 400년은 더 거뜬히 살 수 있단 말이다, 이 애송이 녀석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포티스 씨.”




  베리는 ‘씨’라는 단어에 강조를 넣으면서 귀찮다는 듯 대충 말을 건넸다. 덕분에 기분이 상한 포티스가 또다시 베리에게 면박을 주면서, 그 둘의 말다툼이 그 서막을 열었다.


  일상처럼 이어지는 그 둘의 싸움을 더는 보기가 싫었는지, 스페란자는 어느새 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낯선 이방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제 가장 처음으로 그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느라고 그 사람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기수의 중얼거림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낯선 언어였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느낌의 말을, 눈물을 흘려 가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예민한 귀로 다 들었었다. 아니 그 전에도, 그 사람이 처음 깨어나면서부터 중얼거리던 것을 그녀는 모두 듣고 있었었다.




  “레 아우렌 돌린(당신 어디서 왔지)?”




  요정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물어봤다. 반신반의하면서 한 번 시도라도 해보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수는 자신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소용없나.”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스페란자가 그러는 사이, 기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침이었기에 그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피부색은 그의 생각대로 짙은 갈색의 것이었고, 또 어제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던 뾰족하면서도 긴 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럽고 차가운 은빛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게다가 다른 여성과는 달리, 포니테일로 묶은 상태로도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그것도 170이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를 가진 상태인데도 거기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진 사람, 아니 요정이었다.




  ‘피부가 검은 편이니까, 다크 엘프나 뭐 그런 거겠지?’




  판타지 소설은 별로 읽은 편이 아니었지만, 얼마 전 친구한테서 빌린 책에서, 다크 엘프라는 종족에 관해 언급된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만약 소설의 묘사가 정확하다면, 눈앞의 여성은 다크 엘프라고 부를 수 있을 터였다.




  “간단한 것부터 묻는 것이 좋겠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던 스페란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기수의 시선이 그녀의 입으로 향했다.




  “스페란자. 이름, 스페란자.”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기수도,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굳게 다물려고 했었던 그 입을 열었다.




  “이르음? 스페란자?”


  “그래. 이름, 스페란자.”




  발음이 아직 명확한 편은 아니었지만, 처음 치고는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스페란자였다.




  “너는?”




  그리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기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알 수 있었던 기수는, 자기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서는 말을 꺼냈다.




  “기수. 이르음, 기수.”




  성은 불필요할 것 같아서 자신의 이름만을 말해주었다. 자신의 소중한 엄마가 지어주신 그만의 이름이었다.




  “기수. 간단한 이름이군.”




  여전히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을 기수는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뒤로 시선이 저절로 옮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세 명의 사람들이 어느새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정말 공통어를 모르는 거였네.”




  베리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왜 이름부터 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후회하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그도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베리타스. 이쪽은 포티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은 아무르.”




  자신을 필두로, 포티스와 아무르를 차례대로 가리키며 그들의 이름을 기수에게 알려 주었다.




  “베리타스, 포티스, 아무르.”




  기수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따라 불러 보았다. 그것도 정확한 발음으로 따라 부르자, 베리와 아무르는 만족스러워 하면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떠올렸다.




  ‘정의, 강인함, 사랑, 그리고 희망.’




  다른 말은 잘 못 알아들었지만,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고, 또 그들의 이름에 담긴 의미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틴어와 이태리어에서 그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일한 의미를 간직한 단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우연히 단어가 발음만 비슷한 동음이의어일 확률이 더 높았다.




  “좋아요, 기수 씨. 그런데 그 다음부턴 뭘 물어봐야 좋지? 나이? 그런데 숫자도 다르게 세지 않을까?”




  베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물었다. 아무르는 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채, 눈동자를 하늘로 치켜세우면서 생각에 잠겼고, 포티스는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스페란자는 시도해보려면 네가 하라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맞다! 숫자 기호는 다를 수도 있어도, 막대기로 표시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누나!”




  아무르의 의견이 좋다고 생각한 베리는 급히 나뭇가지 하나를 찾더니, 땅바닥에 막대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열네 개까지 그린 다음 마쳤다. 그리고 그 옆에 숫자 ‘14’를 써놓았다.




  “…….”




  기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숫자 ‘14’에 시선이 멈추었다. 앞의 막대기의 개수와 똑같은 숫자를 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숫자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던가!




  “이게 제 나이에요. 나이.”




  베리가 빙긋 웃으면서 왼손으로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또 오른손의 나뭇가지로는 땅바닥에 새겨진 막대기와 숫자를 가리켜며 말하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기수는 깜짝 놀라면서, 베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풍기는 분위기, 얼굴, 풍채 등과는 달리 엄청나게 어린 베리의 나이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무엇인가 깨달았는지, 짐짓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어린 녀석이었네. 그런데 여기선 태어나면서 나이를 먹나, 아니면 생일이 지나야 나이를 먹는 건가?’




  외국에서는 만 나이를 따지고, 한국에서는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고 시작하는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알려주는 것이 좋을지 몰랐다. 게다가 이곳과 원래 세계와의 날수가 똑같은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옆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물어본 다음에 정정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땅바닥에 ‘19’라는 숫자를 새겼다.




  “이야! 이거 숫자 기호는 동일하게 사는 지역에서 왔나 보네!”




  베리가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사실 기수가 그 기호를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쓴 것이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리헬에서 사용하는 해당 숫자 기호를 사용하지만, 일부 지역들에서는 자신들만의 기호로 수를 표시하는데다가, 리헬의 기호를 전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열아홉이면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잖아.”




  아무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바닥에 ‘18’이라는 수를 새겼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162와 125를 더 새겼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14’라는 숫자를 가리키며 베리를 바라보았다.




  “십사나, 열넷이라고 해요. 이건 열여덟이나 십팔, 그리고 이건 백육십이나 일백예순둘, 이건 백이십오나 일백스물다섯이라고 하죠.”




  기수는 베리의 입 움직임과 발음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여기서 ‘나이’라고 불리는 것을 머릿속에 새겼다.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베리 일행은 험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무거운 짐을 세 개나 들고 있는 기수가 뒤따르고 있었다. 사실 그들 일행은 베리를 어느 마을에 놓고 가려고 했지만, 기수가 한사코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 게다가 스페란자도 ‘데리고 가.’라고 말을 하는 바람에, 베리타스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일행과 함께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한 명 지키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런 계집처럼 생겨가지고 비리비리한 놈을 데리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괜찮겠죠, 뭐. 어젯밤에 고블린은 다 처치한 것 같고, 이제 확인만 한 다음, 당당하게 마을로 돌아가서 항의를 하면서 금화 열 냥만 받으면 되잖아요. 위험한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하하하!”


  “이게 다 네 놈 때문이다. 길드장인지 뭔가 하는 것을 노리는 녀석이 돈 관리는 전혀 못하지 않나!”




  포티스가 또다시 핀잔을 주자, 베리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영감님이 항상 보석, 보석, 보석 노래만 하다가 보니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애당초, 영감님이 보석만 팔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궁핍하게 매일같이 노숙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도대체 이 보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보석이 들어 있는 겁니까!”




  베리는 포티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주머니를 한 것 움켜지면서 말했다. 그 안에는 가지가지 보석들과 더불어 아직 세공을 마치지 않은 원석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허허, 애송이 녀석! 네 놈이 만질만한 물건이 아니야.”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포티스가 베리의 손등을 딱 때리면서 주머니를 그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줄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던 베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비아냥거렸다.




  “흠, 그래도 이렇게 되돌아가면서 보는 건데, 우리가 이렇게 많이도 해치웠구나. 근데 숫자는 세고 있겠지?”


  “에? 안 셌는데.”




  아무르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은 베리가 대답하였다. 그의 대답에 아무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팀의 리더가 이 모양 이 꼴인데다가, 포티스는 보석 모으는 취미, 그리고 스페란자는 애당초 돈 개념이 없는 요정인지라, 이 파티는 궁핍함이 항상 붙어 다녔다. 하지만 그녀도 어떻게 불만을 토로할 수 없는 것이, 그녀도 사실 돈 개념이 그다지 있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런 식으로 수긍하고 사는 것이었다.




  “뭐 금화 열 냥이면 어디야. 그냥 그것만 받아도 되겠지. 아하하하!”


  “하아…….”




  앞으로 이 파티가 어떻게 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 모든 모습을 기수는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거지, 말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들의 언어를 모두 듣고 관찰하며, 머릿속에 열심히 저장하였다.




  ‘길바닥에 너저분하게 쓰러져 있는 괴물이 고블린이라고 하나 보네.’




  이제까지 올라오면서 갑옷을 입은 고블린의 시체만 잔뜩 보고 있었다. 대충 백 여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그 정도 되는 숫자를 이 일행이 해치웠다고 생각하니, 순간 오금이 저려왔다. 이 사람들은 무진장 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




  싸늘한데다가 짧기까지 하지만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매혹적인 목소리가 일행의 시선을 그곳으로 완전히 돌렸다. 가장 앞장서서 나가던 스페란자의 목소리였는데, 그녀는 한손가락으로 동굴을 가리키며, 고개를 살짝만 돌린 채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위험한 기운이 감지되나요?”


  “아직.”




  베리는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동굴인지라 웬만해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맡은 바 의뢰는 철저하게 완수한다는 것이 신념이기 때문에, 그 안으로 살며시 발을 들여 놓았다.




  “Light!”




  스페란자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오른손에 빛을 내뿜는 공이 생성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호오, 저것이 마법인가 뭔가 하는 건가 보네. 진짜 이 세계는 저런 것을 사용할 수 있나 보다. 확실히 판타지다운 세계군.’




  제일 뒤에서 그들을 뒤따르던 기수가, 스페란자의 마법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환한 빛을 내뿜는 그 공 덕분에, 어두침침한 동굴 안에 들어갔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천연 종유석 동굴인가?’




  물방울이 군데군데에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위에서는 마치 석회암이 고드름처럼 달려 있었고, 땅에서는 석회질이 포함된 물방울이 계속 떨어진 덕택에, 아래서 위로 식물이 자라가듯 성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굴의 크기도 상당히 큰 편인데다가, 지금 스페란자가 들고 있는 빛을 내뿜는 공 덕택에, 아주 화려한 장관을 연출해내며, 기수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 안에도 고블린의 시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각종 잡동사니가 동굴 곳곳에 너저분하게 나뒹굴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고블린들이 이 동굴을 생활 터전으로 잡은 것 같았다.




  ‘근처에 마을이 있다면 불안할 만도 하겠네. 이 동굴은 고블린이라면 이백 마리도 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니.’




  고블린의 크기는 인간의 반도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의 몸집이라면, 이 정도 크기의 동굴에서는 엄청난 수가 서식할 수 있을 것이었다. 확실히 이제까지 올라오면서 보아왔던 그것들의 시체의 숫자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케케켁!”




  갑자기 어디선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그곳에는 아직 살아남은 고블린이 무려 열 마리나 더 있었다.




  “하아, 이래서 최종 확인이 필요한 거야. 여러분 저 놈들을 마지막 한 마리까지…….”




  베리타스가 막 말을 끝내려던 찰나에, 성질 급한 아무르가 이미 그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녀는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대검을 단 한 손으로 꺼내들고는 마치 검무를 추듯이 이리저리 휘둘렀다.




  “켁!”




  고블린들은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도끼나, 단검들을 땅에다 버려두고, 혼비백산한 상태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동굴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르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르 누나! 더 들어가면 위험하다니까.”




  어제도 동일한 패턴으로 녀석들을 쫓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베리는 급히 아무르를 말리려고 했지만, 전투에 돌입하기만 하면 이성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남지 않는 그녀의 불같은 성격 덕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매만졌다.




  “쫓아가죠.”




  베리는 그렇게 말한 다음, 급히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 가지였고, 기수도 무거운 짐을 고쳐 메면서 침을 꿀꺽 삼키며, 그들의 뒤를 이어 달렸다.




  ‘이 동굴 엄청 길잖아.’




  이제까지 들어온 거리만 해도 대략 백여 미터는 되는 것 같은데, 그들을 쫓으면서 다시 백여 미터는 더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원래 세계에서 석회암 동굴 중 최장 동굴은 대략 20km는 가볍게 넘겨주었고, 한국에서도 1km가 넘는 석회 동굴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정도 길이를 가지고 놀랄 일까지는 없었다.




  「어래?」




  이것저것 생각을 하면서 뒤쫓다가, 갑자기 앞의 사람들이 멈춰 서자, 깜짝 놀라면서 급히 다리를 멈추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지만, 간신히 넘어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제일 무거운 가방, 즉 루리 누나의 가장을 실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이런.’




  그는 급히 그것을 다시금 챙겨 들고는, 밑바닥을 툴툴 털었다. 다행히도 떨어뜨린 장소에는 물기가 없어서 가방이 더 더러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미 지난밤의 비 때문에 완전히 흙탕물로 더럽혀진 상태라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멈춰선 거지?’




  기수를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갈림길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두 개, 세 개와 같이 간단한 것이 아니라, 무려 백 개는 돼 보이는 엄청난 갈림길이었다. 덕분에 그들이 지금 서있는 장소는, 상당한 사람들이 살 수 있을 만큼 상당히 넓은 공터였다. 대략 축구장 필드 크기만 한 것 같았다.




  “여기가 녀석들의 본거지인 것 같은데, 상태를 보니 도망친 놈들이 마지막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 녀석들 고블린치고는 발걸음이 너무 빠른 것 같아. 내가 아무리 뒤쫓아 가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아무르가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면서 말하였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고.”


  “동감.”




  그녀의 말에 스페란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였다. 그녀는 어느 한곳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빛의 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서, 매우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이, 뭔가 꺼림칙한 냄새가 나는데, 다들 조심들 하라고.”


  “예, 놈들이 오고 있는 것 같네요. 저기 기수 씨!”




  베리는 포티스의 말에 동의하면서, 급히 기수를 불렀다. 기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니까 저기 가서 계세요.”




  그는 손가락으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가리켰다. 기수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곳으로 총총 걸음으로 향했다.




  “네 놈도 저 녀석 옆에 가 있어. 이번에도 대략 백 마리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네 놈 지켜줄 힘 같은 건 없으니 말이야.”


  “동감.”




  포티스의 핀잔과, 거기에 더하는 스페란자의 촌철살인에, 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수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일단 전투력이 제로인 사람들이 사라지자, 남은 전투 인원 세 명은 각자의 무기를 고쳐 잡은 채 갈림길 저편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구멍에서 먼저 놈들이 뛰쳐나올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들의 긴장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온다.”




  뛰어난 청력과 더불어 가장 예민한 신경을 지닌 스페란자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을 향해 20여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고블린이 활을 사용해?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어!”




  아무르가 깜짝 놀란 어조로 말하였다.


  사실 스페란자의 마법 덕택에 화살이 제대로 보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고슴도치 신세가 될 뻔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녀석들의 위치를 포착해 냈다. 그리고 그녀는 망설임 하나 없이, 주문을 외우고는 그곳을 향해 마법을 날려버렸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동굴이 툭툭 무너졌다. 그리고 녀석들의 시체가 산산조각 나며, 이곳저곳으로 널브러졌다.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스페란자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포티스가 달려 들어가서, 대형 전투 도끼로 해당 구멍의 천장을 쳐버렸다. 워낙 강력한 힘이었기 때문에, 그 구멍을 비롯해서 다른 곳까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면서, 그 안에 숨어 있던 고블린들이 압사 당했다.




  “에, 다음부터는 굳이 어느 구멍에 있다는 것을 안 알려줘도 될 것 같아요, 언니. 하하하, 놈들이 이제 도망가는 건 그만두고 전면적으로 싸울 생각인 것 같은데요?”




  아무르의 말대로, 녀석들이 이제 구멍 안에서 숨어서 전투하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략 팔십여 마리 정도 되어 보이는 고블린들이 모두 무장을 제대로 한 채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고블린 정도가 아무리 무장을 잘 한다 해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동굴에 난반사 되며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무르의 말처럼, 숫자도 많고, 무장도 잘 되어 있는 고블린들이었지만, 녀석들은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단 10여분 만에 단 세 마리를 남겨둔 채 모조리 전멸 당하였다.




  “흠, 이제 마지막 세 마리만 처치하면, 에!”




  잠시 검을 뒤로 물린 것이 화근이었다. 고블린이 갑자기 뒤로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하필이면 기수와 베리가 있는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녀석의 손에는 사람 한 명은 가볍게 죽일 수 있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에에에에!”




  깜짝 놀란 베리는 다급히 검을 뽑아 들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검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제 돌진해 오는 고블린과 그들의 사이는, 고블린의 걸음걸이로 대략 열 걸음, 사람 걸음으로 치자면 다섯 걸음 정도 되는 아주 가까운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실질적인 위험이 코앞에 닥치고 만 것이었다.




  “위험해!”




  아무르의 외침이 그들의 귀에 도달함과 동시에, 고블린이 도끼를 양 손으로 움켜쥐고는 머리 뒤로 도끼를 넘겼다. 그 자세는 마치 장작패기를 하려는 모습 같았는데, 상대가 고블린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을 던질 생각인 것 같았다.




  「…….」




  마침내 고블린의 손에서 도끼가 내던져졌다. 고블린의 힘으로는 얼마 못 갈 것이 뻔한 도끼였지만, 이렇게까지 가깝다면 문제없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터였다.


  기수는 자신들을 향해, 아니 정확하게는 베리를 향해 날아가는 도끼를 눈도 깜짝이지 않은 채 계속 바라보았다. 시선은 계속 회전하며 날아오는 도끼를 향해있었고, 그의 왼손은 베리를 향해 있었다.


  도끼가 막 베리의 이마를 제대로 작살내려던 찰나, 기수는 그를 손으로 밀어제쳐서 위험에서 구해냈다. 그 다음에 기수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고블린을 발견하더니, 그대로 녀석에게 강력한 돌려차기 한 방을 먹였다.




  “…….”


  “…….”


  “…….”




  자신들의 길을 방해하던 고블린 둘을 처치하고, 막 뒤쫓아 오던 그들은, 순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헤?”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베리 역시 멍한 표정으로 기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연약한 몸으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단지 발길질 한 방에, 고블린의 눈이 뒤집혀질 정도의 위력이 나왔는지, 그 모든 사실 덕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괴, 굉장하시네요! 정말 고블린이기는 한데, 일단 무장을 한 놈을 어떻게 한 방에 날려 버릴 수가 있으신가요! 저도 그것 좀 알려주세요! 네? 알려주세요!”


  “설마 우연이겠지? 어떻게 이런 몸에서 저런 위력이 나올 수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사기야, 사기! 나도 10년 이상을 검을 들면서 열심히 수련을 한 나머지, 몸에 근육이 잡혔는데, 너는 근육도 없는 것 같잖아!”




  베리와 아무르는 기수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신들의 말을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수는 단지 말없이 웃으면서 볼을 손가락으로 매만질 따름이었다.




  “저 놈은 애송이보다 쓸 만할 것 같군. 안 그런가, 검은 요정 양반.”


  “…….”




  포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페란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고, 어둠 속 저편을 향한 상태였다.




  “어이 왜 그런가? 아직도 놈들이 남은 건가?”


  “별로.”




  스페란자는 시선을 그곳으로부터 거둔 다음 차갑게 한 마디를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단지 그녀의 그런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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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A4 19페이지 분량입니다. 스크롤의 압박은 잘 감상하셨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