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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1 - 도래(到來)

2010.08.17 10:08

비벗 조회 수:14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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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에 아가씨는 상기된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으응, 루폴~”


 


왠지 유클리드 말로 나를 ‘여보’ 하고 부른다.


 


“사랑해요. 알죠?”


 


아아, 알다마다, 나는 너무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가는 허
리를 꼭 껴안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을 포개었다. 너무도 달콤한 맛
이 났다.


 


 



“휴우.”


 


평생 기억에 남을 꿈이었어.


 


좋은 꿈을 꾼 듯했다. 깨어나자마자 그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 직후,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꿈은 순식간
에 잊혀졌다.


 


“아우렐리에 아가씨!”


 


외치며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 어디에도 부상이나 구
속물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난 일어선 후 잠시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멍청히 서 있어야 했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영웅기사님의 생가도, 그 근처에 있으리라 짐작되는 삼림 언저리
도 아니었다. 난 동굴 안에 있었다.


 


알 수 있었던 건, 천정의 구멍으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와서였
다. 그건 좋다. 문제는 들어오는 빛이 ‘햇빛’이 아니라 ‘달빛’인 점이
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한나절? 혹은 이틀? 사흘?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람 모습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갔다.
엎어져 있길래 뒤집어 보니, 유리에였다. 상처는 없고, 숨도 쉬고 있
다. 확인을 마친 후 다시 일어서서 둘러본다. 울퉁불퉁한 동굴의 바
닥 이곳저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이제 분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 중 아우렐리에 아가씨의 모습을 찾은 난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레이디 필모어, 정신 차려요!”


 


그녀도 상처 없이 잠든 듯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 눈살
을 찌푸리더니, 금세 눈을 떴다. 그리고 코앞에 드리워 있는 내 얼
굴에 놀란다.


 


“어머! 어…… 뭐하고 있나요, 루포리?”


 


예쁘게도 놀라는 사람이다. 다행히 몸에는 별 이상 없는 듯하다.


 


“레이디 필모어? 침착하게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저는 지금 불경
하게도 당신을 깨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 이해해요, 루포리. 그런데…… 저 이제 일어나도 될까요?”


 


내가 뚜껑을 덮듯이 그녀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직 주변을 보지 못했다. 난 천천히 몸을 젖혀 편하게 앉았다. 아
우렐리에 아가씨는 아주 침착하게 놀랐다.


 


“여긴, 동굴이군요? 그 돌이…… 우릴 데려온 건가요?”


 


빠른 판단, 좋은 분석이다.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에, 공간이동 마법이란 거 말씀이시죠? 제가 볼 때는 일단 그런
것 같은데요- 저도 방금 일어났을 뿐이거든요. 그놈의 돌도 보이질
않고요.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레이디는 몸이 좀
어떠신가요?”


 


질겁할만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내게 애써 웃어보였다.


 


“전 괜찮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여기 저기 쓰러져 있습니다. 닥터 컨프턴과 레이디 클라시에, 레
이디 앰린, 레이디 리힐딘, 그리고…… 제 후배 일드 에손이 있더군
요.”


 


아무래도 마법에 휩쓸린 건 내 곁에 있던- 그러니까 내가 들고
있던 돌 근처에 있던 몇 명으로 한정된 것 같았다. 일드가 언제 내
곁에 왔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이제 그 분들을 깨우겠습니다. 잠시 앉아서 쉬세요.”


 


“아, 아뇨, 같이 가요.”


 


혼자 남는 게 두려운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난 거의 본능적
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두우니 손을 잡을게요.”


 


변명이었다. 그러나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믿어 주었다.


 


우리는 유리에를 깨웠다. 그리고 유리에가 다른 학자들을 깨웠다,
커다란 비명으로.


 


“꺄악! 꺄악! 꺄앗!?”


 


아우렐리에의 차분한 모습과 정말 대조된다.


 


대공가의 차녀가 큰 소리를 쳤음에도 동굴 안에선 다른 동물 등
의 움직임이 느껴지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 일어난 사
람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많이 놀란 듯 일어나자마자 서로를 부르
며 무슨 말들을 했으나, 모든 목소리는 데니스의 외침에 묻혔다.


 


“페넬로페! 페…… 아아, 정말 다행이다! 다친 데는 없어? 네가
잘못됐다면 난 정말……”


 


학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후, 난 한 명이 부족하단 걸 깨달
았다. 바위틈에 누워 코를 골고 있던 그를 발로 깨웠다.


 


불명예스럽게 깨어난 일드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으헤헤헤, 이거, 꿈이지!?”


 


머리를 한 대 때려 주자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일행이 모두 모이자, 중구난방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있던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일의 심각성은 이미 모두 느꼈을 터였다. 데
니스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화제를 꺼냈다.


 


“우선 루포리, 네게 묻자. 아마 이건, 그 돌의 마법이겠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모든 분들께 사죄드립니다. 제가
함부로 움직이는 바람에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 책임이 큽니
다.”


 


탓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 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우리도 설마 집 밖에 그런 마
법 도구(artefact)가 남아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걸. 차라리 마법
도구를 빠뜨리고 간 발굴대 학자 분들의 잘못이겠지.”


 


마음씨 좋은 데니스는 날 감싸준다. 페넬로페가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다. 혹시 자그마한 생채기라도 났더라면 저렇게 착한 사람이
라도 화를 냈을지 모를 일이다.


 


데니스의 곁에 붙어 불안한 시선으로 동굴을 둘러보던 페넬로페가
오늘의 본제를 입에 담았다.


 


“여긴, 정말이지……. 루포리, 네 생각을 말해 보렴. 여긴 도대체
어디지?”


 


“아, 예.”


 


지명을 받아 대답하며 한 발 나서긴 했는데, 경청하겠다는 표정으
로 주목하는 학자들을 둘러보니 왠지 위축된다. 꽤 친해졌다곤 하지
만 그래도 귀족들인 것이다. 할 수 없이 일드를 쳐다보며 말을 시작
했다.


 


“우선은…… 그렇군요. 다들 느끼셨을 테지만, 우선 확실히 짚고
넘어가죠. 이 바다냄새와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로 여기가 바닷가라
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원하게 인정하는 사람도 없었
다.


 


그런 사람 있을 리 없다, 나를 포함해서.


 


“기온으로 보면 북해나 남해는 아닐 테니까, 아마 룽겔 만이나 동
해안일 겁니다. 어느 쪽이든 말을 달려 한 달 이상을 가야 하는 거
리죠. 전 마법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데, 혹시 레이디 리힐딘은
이 정도의 이동 마법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고전시대의 신을 알고 있던 릴리아라면 마법시대의 마법에 대해서
도 해박할 수 있다 싶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마법, 몰라. 우리, 무척 멀리 왔어.”


 


“어, 이런 장거리를 뛰어넘는 이동 마법은 모르신단 말씀이죠?”


 


릴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학자들도 동의하는 눈치
다. 잠깐 날 보던 그녀는 이내 웃음을 지우고 설명을 계속했다.


 


“「하늘의 방패」에 마법사 있었어요. 리오 캠벨, 당대에 가장 대단
한 마법사였어요. 「방패」, 공간이동 할 때, 십 리 이상은 안 했어요.
그게 공간 마법의 한계라고 누군가, 말한 기록은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보다, 공간 마법, 잘 한 사람, 없다고 알아요.”


 


아우렐리에 아가씨도 동의했다.


 


“그래요. 그는 「방패」의 작전을 위해 공간 마법을 오랫동안 연구
했다고 해요. 그런 그가 하지 못한 마법이라면 어느 마법사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우린 여기 왔잖아? 마법 아니야?”


 


유리에가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곤란한 표
정만 지었고, 내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렇죠. 그래서 겁이 나는 겁니다. 저야 마법이 뭔지는 잘 모르
지만, 이런 먼 거리를 이동시키는 마법은 어떤 전설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사람들이 부풀린 민담에도 없는 마법을
우리가 겪게 된 거죠. 그 돌이 도대체 어떤 고명한 마법사가 남긴
마법 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범상한 위인은 아니었을 거고,
또……”


 


내가 주위를 의식해 말을 끝맺지 못하자, 데니스가 씁쓸한 표정으
로 말을 받았다.


 


“그런 마법 도구가 아무 이유 없이 장원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우린 어쩌면 그 마법사의 뭔지 모를 목적에 이용되
고 있는지도 몰라.”


 


거기까지 말하자 유리에도 상황을 좀 이해한 듯했다. 신비로운 동
화를 듣는 표정으로 ‘우화아~’ 하고 감탄한다.


 


“그거 참 큰일이다?”


 


아가씨, 그게 지금 우리 입장이거든요?


 


정말이지 위기감이 없는 아가씨다.


 


“마지막으로, 저 쪽에 좁은 통로가 하나 나 있는 걸 확인했습니
다. 다른 곳은 암반으로 거의 막혀 있더군요. 그 통로도 지상으로
이어졌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우선 그 쪽
으로 가 보죠.”


 


내 의견에 반론이나 보충은 없었다. 공식적인 폐회 없이 회의가
끝나자 개인정비 시간이 되었다. 난 당장 출발할 생각으로 말한 거
였지만, 아가씨들은 이 미지의 모험에 흥분한 듯 모여 서서는 이야
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리에의 정신없는 수다에 웃으며 화답하는
아우렐리에 아가씨만 여전히 침착해 보였다.


 


난 홀로 통로를 바라봤다. 미지의 구렁텅이다. 달빛이 드는 구멍
이 있는지 아주 컴컴하진 않았으나 이쪽보단 어두웠다. 뭐, 잘 보이
지 않는 안쪽은 어찌됐건, 입구는 두 명이 어깨를 맞대면 꽉 찰 듯
좁은 모양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일드를 후위에 세우고 내가
홀로 앞장선다. 그 안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어차피 인원에 비해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 일행인 것이다. 안전을
염려한다면 후미에 전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도 없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꼬, 학자처럼 고민하고 있는데 데니스
가 다가왔다.


 


“내게도 칼을 다오, 루포리.”


 


“엣, 닥터 컨프턴?”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삐져나온 잡종(barstard
sword)의 손잡이를 가리켰다.


 


“네 칼을 빌려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손은 하나라도 많
은 편이 좋겠지. 어쨌든 루포리, 지금 넌 칼이 두 자루잖아?”


 


내게 칼이 두 자루…… 가 있긴 하다. 망토 안감에 숨겨둔 미스릴
보검을 떠올린다. 야영할 땐 모포 대용으로 쓰기도 하는 망토인 만
큼 안감은 두터웠고 장검 하나 숨긴 건 티도 나지 않았다.


 


확실히, 데니스가 검을 들고 있다면 유사시에 분명 도움이 될 것
이다. 아마 실전 경험은 없겠지만, 잘 단련된 상체가 그의 훈련이
결코 어지간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검이 있다면, 아
마도 페넬로페만큼은 그 어떤 위난에서도 무사하리라.


 


“예에. 호위를 맡은 임장에선 염치없지만, 지금은 그 말씀에 따르
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직무유기다, 이거. 대장장이가 손님에게 ‘손이 모자
라니 좀 도와!’ 하며 풀무질을 시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아아, 두 명이 다섯 명을 지키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
비해 세 명이 네 명을 지키는 건 누워서 떡 먹듯 쉬운 임무다. 전투
인원 한 명 차이지만 기댓값은 전혀 다른 것이다.


 


보검은 애초에 그가 줬던 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게 최선이겠
지 하며 망토를 벗기 위해 가죽 벨트를 풀었다.


 


약간의 방호력과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긴 하지만, 망토는 조용
하고 신속한 행동에 방해를 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용병들은 보통
망토 위로 어깨에서 허리를 가로지르게끔 가죽벨트를 매어 망토를
고정하곤 한다. 내 잡종의 경우 그 가죽벨트에 달아서 어깨에 매이
는 식이어서, 망토를 벗기 위해선 가죽 벨트와 함께 바닥에 내려놓
아야 했다.


 


데니스는 그 가죽 벨트를 들더니, 자기가 맸다.


 


“줬던 칼을 다시 빌리는 것도 뭣하니, 이 칼을 좀 빌릴게.”


 


“어…… 외나무되지만 그거, 안 어울리시는데요?”


 


그는 밝게 웃었다.


 


“핫하, ‘외람’이야, 이 친구야.”


 


난 잠깐 뭐가 ‘외람’인지 생각하다가, 데니스가 다시 페넬로페 곁
으로 돌아가자 정신을 차렸다. 이크, 또 실수했네. 어쨌든 검을 꺼내
야지.


 


망토의 윗부분에 난 흠집에 손을 넣어 보검을 꺼낸다. 내가 늘 쓰
던 잡종 검보단 열다섯 치(45cm)쯤 작은 롱소드 계열의 칼이다. 등
에 걸기엔 좀 짧은 것 같아 허리 쪽의 끈에 대충 꽂고 망토를 둘렀
다.


 


그렇지만, 문득 생각한다. 데니스가 내 실용주의적(그러니까 조금
도 멋이 없는) 잡종 칼을 매고 있는데 내가 이런 보검을 차고 있어
도 되는 건가? 신분과 겉멋의 상관관계에 대해 곰곰곰 고민을 하는
데, 어느새 유리에가 내 옆으로 다가와 보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와아, 와아, 푸로리 좋은 칼 찼네?”


 


“에…… 제 검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이 검으로 레이디 앰린을 지
키겠나이다.”


 


내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자 유리에는 눈을 크게 떴다.


 


“에엣? 푸로리 멍청이?”


 


이 아가씨도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음, 난 멍청이인 건가? 제
법 잔머리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여기가 어쩌면 노루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쳐, 대공의 차녀에게 이제부
터라도 공손히 대해볼까 했던 내 변덕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해 본 말이에요. 어쨌든 지키긴 할 거지만.”


 


유리에는 잠깐 날 지그시 본다.


 


“그건 고마워. 그래도 푸로리, 너무 무리하면 안 돼? 혹시 푸로리
가 다치면 나 좀 슬플 거야.”


 


이번엔 무척 상냥한 말을 했다. 이 아가씨가 이런 말도 할 줄 알
았나, 싶어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유리에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 싸울 때 보니까 미친개가 따로 없던 걸? 조마조마해서 보
기 힘들었어.”


 


“예이, 예이.”


 


상냥한 얼굴로 심한 말을 한 그녀는 사뿐 사뿐 아가씨들 곁으로
돌아갔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어찌됐건 유리에는 호위의 0순위다. 여
기가 어느 바닷가이건 간에, 기록상 노루스 대공의 차녀는 현재 임
펠런에 유학 와서 유적을 답사하는 중이다. 그런 중요한 분이 낀 답
사대를 왜 우리 용병대가 맡아 호위하게 됐는지는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어쨌건 이 아가씨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때
는 우리 용병대가 아니라 임펠런 왕국 자체에 위기가 닥친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아우렐리에 아가씨와 유리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면 난-


 


음, 난-


 


그러니까, 난-


 


으으음……


 


“루포리.”


 


“아! 레이디 필모어.”


 


잠깐 고민하던 사이,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내 곁에 와 있었다. 놀
란 표정을 가까스로 감추고 미소를 그려보이자, 그녀는 하얗고 가느
다란 손을 들어-


 


내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루포리가 함께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우리
들끼리였다면 정말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


 


“예? 에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턱의 감촉에 멍해진 채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루포리? 레이디 앰린은 저렇게
보여도 실은 외로움도 많이 타고 겁이 많은 소녀예요. 레이디 리힐
딘도, 지식은 깊지만 바깥세상엔 처음 나온 거나 다름없어 무척 혼
란스러울 거예요. 그 점은 데니스나 페넬로페도 다를 바 없죠, 영지
안에서만 지내온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봐요. 지금은 누구도 불안
을, 비관을 입에 담지 않고 있네요. 오히려 입가에 작은 웃음을 머
금고 탐험을 기대하고 있죠.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건가요, 루포
리?”


 


아아, 나, 마법사였던가?


 


너무나 맑고 포근한 여신님의 목소리에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아
까 루포리가 절 깨우기 전에, 저 실은 살짝 깨어 있었어요. 몽롱했
지만 조금은 기억나요.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죠. 눈도 뜨지 못한 채,
그 돌이 빛을 뿜어내던 순간 떠올렸던 수많은 불길한 상상들을 곱씹
어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루포리의 얼굴을 본 순간
아, 아무 일도 아니었구나, 다 잘 풀리겠구나, 하고 안심했어요. 정
말, 이상한 일이죠?”


 


아아, 그런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것 같던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솔직한 표
정으로 진심을 말해왔다.


 


그래, 그랬으리라. 난 대체 왜, 이 여린 아가씨를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던 걸까? 이제 스물 둘이나 됐을, 무척
아름답고 차분하지만, 어리고 순수한 처녀다. 무척 놀랐을 것이다,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걱정하는 날 위해서 놀라지 않은
척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던 그녀…… 왠지 가슴 한구석이 찡-
했다.


 


“걱정 마세요. 정확하게 예지하신 겁니다, 그거. 아무 일도 아니고
다 잘 풀릴 테니까요.”


 


내 호언장담에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밝게 웃었다.


 


“예, 루포리를 믿어요.”


 


그리고 그녀도 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조오오오-았어! 대공 차녀고 여신님이고 문학소녀고 닭살 커플이
고, 내가 다 지켜내 보이겠다! 걱정·불안·염려 따위 어디 끼칠까보
냐!


 


내가 결연한 의지로 그렇게 불타오르자,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있
던 일드가 배시시 웃었다.


 


“은근히 단순하신 구석이 있으셔요, 네.”


 


난 넓은 아량으로 녀석의 발을 밟아 그 오해를 불식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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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습니다. 어느새 화요일이 되어 새벽 1시네요.
어쨌든 주 3회 연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월 수 금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