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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序

2010.08.08 05:08

비벗 조회 수:181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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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늘에 멍하니 제사를 올린 지 두 다경이 지났다. 여학자들
의 천막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가 된 것이다. 내려
놨던 정신줄을 급히 찾아 잡고는 비상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니, 이건 은유가 아니라 진짜다.


 


사랑이니 뭐니, 나답지 않은 것들을 너무 생각해서 그런가. 아무
래도 오늘은 걸어 나오는 그녀를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4기
가 들어와 부대생활이 풀린 이후로는 처음으로 정자세를 취해 외부
를 경계중인 내게, 자박자박 발소리가 다가왔다.


 


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허억?”


 


내 얼빠진 목소리에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화가 나신 듯했다.


 


아니, 이미 화가 나 계신 듯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름다운 아미
를 한껏 찌푸리고, 페넬로페 아가씨보다도 더 심통맞은 표정을 지은
채 내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페넬로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루포리? 그 애가 왜 그렇
게 우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히 당신의 부하가 그 아일 깨워
서 함께 나갔고, 당신과 한참 얘길 나눈 그 아인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어요. 울다 지쳤는지 지금은 잠들었지만…….”


 


입을 떡 벌리고 보는 내게 아가씨가 예의 그 화난 표정으로 매서
운 눈빛을 쏘았다.


 


아아, 그 모습도 정말 귀엽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니까요! 이러긴 싫지만, 나 정말 루포리
를 미워할 수도 있어요. 내 말 알겠어요? 정말 화낼 거라구요!”


 


나는 살면서 이렇게 귀엽고도 무시무시한 협박을 들어본 적이 없
었기에 당장 진지하고도 열렬하게 내 사정을 변명했다. 난 사실만을
말했다. 물론 「루포리 종마설」이나 내 몇몇 대사 등 망측한 부분은
살짝 왜곡하면서.


 


한 다경에 걸친 내 전심전력의 변명에 그녀는 조금씩 화를 풀었
다. 데니스의 내밀한 사랑 이야기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더니,
페넬로페와 내 대화 대목에선 숫제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응응, 그
래서요?’ 하고 재촉한다.


 


“그 말들은 사실 다 연기였습니다. 닥터 컨프턴이 레이디 클라시
에를 사랑하고 있단 걸 전 가장 충격적으로 전하고 싶었죠. 들은 얘
긴데, 불안정한 상태에서 고백을 받았을 때 여성들이 더 잘 받아준
다고 하더라구요.”


 


“아하하, 그런 게 어딨어요?”


 


그녀가 밝게 웃으니 나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제가 봤을 땐 닥터 컨프턴처럼 괜찮은 남자 흔하지 않거든요?
그런 친구랑 어려서부터 친했다면, 레이디 클라시에로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으리라 저는 믿어요.”


 


아니라면 큰일이지만. 아가씨는 미소 띤 얼굴로 날 보고 있다.


 


“루포리…… 우선, 아까 화낸 거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나는 깊게 고개를 숙여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심 중얼
거린다. 걱정 말아요. 당신한테라면 이 루포리, 뺨을 맞아도 즐거울
테니까.


 


“그리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어어, 뭐가 고마운 걸까 물어보면 대답해 줄 만한 상황인가, 이
거? 확신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염두를 굴려 보다가, 뭔가가 머리에
팍 떠올랐다. 오오, 그렇다면,


 


“레이디 필모어, 혹시, 레이디 클라시에는……”


 


“응…… 그래요, 루포리. 그 애, 데니스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마음으론 감동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 데니스의 짝사랑이 아
니었어!


 


“실은, 곁에서 보기에 좀 안쓰러웠어요. 같은 백작가라 하지만 무
가인 클라시에 가문은 이미 그 힘이 쇠락해 가고 있었거든요. 비록
장자가 아니라 하나 촉망받는 젊은 컨프턴을, 클라시에의 장녀는 데
릴사위로 맞을 엄두를 낼 수 없었죠. 그것뿐이면 어떻게 되련만, 소
꿉친구였던 두 사람,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페넬로페는 자
기가 참 못났다고 말하곤 했어요. 누구에 비겨 본 걸지는 안 봐도
뻔하죠. 누가 봐도 완벽하고, 눈부신 소꿉친구가 늘 그녀 곁을 지켰
으니까요. 그 행운이 오히려 그녀에겐 자괴감이 된 거에요. 그녀의
단점까지 속속들이 아는 저 완벽한 사람이, 그녀를 결코 사랑할 리
없다고 단정했던 거죠. 나도 데니스와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
중재해 주질 못하고 그저 시간에 맡기고 있었는데, 아, 다행히도 신
께서 무심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당신을 보내 데니스도 페넬로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려 줬으니, 이제 두 사람은 모든 장애를 뛰
어넘을 거예요.”


 


오랜 고민을 털어놓듯 얘기한 그녀는, 이제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뭘 했느냐고? 난 불경스럽게도 그녀를 외면
한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야말로 너무도 감사했으니까, 내가 믿
는 하늘의 아저씨한테.


 


“거기 가게 되면, 정말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황당한 혼잣말에 당황한 아가씨께 설명했다.


 


“저 겁먹고 있었어요. 제 심정 짐작 되세요? 만약에 레이디 클라
시에가 제 말을 안 믿거나, 아니면 데니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되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구요. 그런데 저기 계신 아저씨가 제 소원을 이뤄주셨네요.”


 


아가씨는 내 이상한 방식의 숭신(崇神)을 듣곤 밝게 웃었다. 그리
고 물었다.


 


“소원까지 빌었나요, 루포리? 뭐라고 빌었어요?”


 


“좋은 여자가 좋은 남자를 좋아하게 해 달라고요. 근데 이거 너무
당연한 건가요? 하핫!”


 


아가씨는 잠깐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이상한 소
원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다.


 


아가씨는 이내 나처럼 즐거워했다.


 


“응, 당연한 소원이네요. 그래서, 그 소원 이뤄질 것 같아요.”


 


“하핫, 무슨 말씀을, 이뤄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뻐하고 있잖
아요? 맞죠?”


 


아가씨는 너무 기뻤는지, 밝은 얼굴에 한 줄기 눈물 선까지 그리
며 웃고 있었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웃음이 잦아질 때 즈음, 눈인사만을 남기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난 아쉬움에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5기 애
들을 깨울 시간이 됐음을 깨달았다.


 


새 하루의 시작이었다.


 


 



식사 후에, 난 데니스와 페넬로페 아가씨의 방문을 받았다. 대단
하다. 진실이 알려진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이미 서로서로 달콤해
진 듯 보이는 이 신생 커플은, 어째서 자기들끼리 달콤함을 나누지
않고선 멍청한 이 솔로를 놀리러 온 것일까?


 


“루포리, 너는…… 너의 맹세를 지켰구나.”


 


데니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꿈결처럼 말했다. 으으으, 닭살 돋아,
이 양반아!


 


“고맙다, 넌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을 주었단다.”


 


페넬로페 아가씨는 한결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이제 더는 초롱
초롱한 눈빛을 보내지 않아 부담을 던 나도 유쾌하게 대답했다.


 


“닥터 컨프턴, 레이디 클라시에.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십쇼. 10년
안에 세계를 주름잡는 해결사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이 문구 어떻습
니까? 해결사 루포리 일스터 : 연인들의 큐피드!”


 


뜬금없는 농담을 지껄이는 내게 당황해서 괜찮은 문장이다, 관심
을 끌 수 있겠다 등등 실없는 감상을 얘기하고 나서 그들은 말을
그쳤다.


 


잠깐의 침묵 후, 데니스가 내게 기다란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네게 혹여 닥칠 위험에서 이것이 널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구
나.”


 


눈치를 살살 보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번개처럼 목함을 열어 봤
다. 선물은 역시 받은 자리에서 보는 게 제 맛 아닌가?


 


목함 안에는 한 자루 검이 칼집과 함께 들어있었다. 호화로운 비
단 안감 위에 놓인 검은 의장용 검처럼 아름답고 빛났다. 그러나 그
날과 재질은 결코 멋만 부린 의장용 검의 것이 아니다. 이 재질은
필시-


 


“저기, 닥터 컨프턴, 이거 미, 미스, 스릴 아닙니까?”


 


잠깐 고민하던 데니스가 밝게 웃었다.


 


“아하하, 루포리, 「미스릴」이라고 말한 거냐? 음, 네 생각대로다.”


 


내가 「까무러치기 일보직전」 표정을 짓자 그가 변명(?)했다.


 


“물론 도금일 뿐이야. 잘 벼린 칼에 아주 얇게 한 겹 미스릴이 덮
여 있다고 하더군. 허나 그것만 해도 어지간한 전투에선 이가 나가
지도, 부러지지도 않겠지.”


 


에잇, 그 뿐이 아니다! 같은 미스릴이 아니고선 어떤 칼도, 갑옷
도 이 검을 막을 수 없다. 도금일 뿐이라고? 아니다, 결코 부서지지
도, 깨지지도, 녹지도 않는 신비의 금속 미스릴은 한 겹만 있어도
풀 플레이트 메일의 강도를 웃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미스릴로 만든 칼이란 건 마법시대의 유물로 이제는 만들 수도
없는 희소품, 즉 초초초고가의 사치품이란 말이다!


 


“끄악, 못 받아요! 이런 걸 제가 어떻게 받습니까!? 이거 하나면
우리 용병대를 사고도 남을 걸요?”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내가 이 검의 재질을 알아본 것도 미
스릴제 검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어디서 봤는지는 묻지
말라. 「성난 소」 용병대의 대장이 미스릴제 검을 갖고 있다는 건 극
비 중의 극비니까.


 


데니스는 왠지 이상하다는 투로 갸웃거린다. 내가 뭔가 실수한 걸
까? 데니스는 갑자기 웃었다.


 


“하하, 루포리,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네게 준다고 했어?”


 


응? 그 말 아니었나?


 


“잠깐 빌려주겠다는 거야. 네가 이 검의 도움 없이도 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강해졌을 때 내게 돌려줘. 그리고 그 때
우리의 아이에게-”


 


데니스는 페넬로페 아가씨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다정한 눈빛을 주
고받는다.


 


“너의 그 강해진 검술을 가르쳐다오. 이 나라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한 검사가 되도록 도와줘. 이 검의 임대비용이 그
정도는 되겠지?”


 


오오, 이 친구 장삿속도 있었군. 엄청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게
좋은 상재(商材)는 아닌 듯하지만.


 


우선 목함을 닫는다. 누가 보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곰곰 고민한
다. 이걸 받아, 말아?


 


페넬로페 아가씨가 데니스와 눈짓을 하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루포리, 넌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어. 우리도 네게 뭔가
해주고 싶단다. 그 검을 못 받겠다면 다른 걸 줄 수밖에 없지.”


 


응? 다른 거?


 


아가씨는 내게 좀 더 다가와 소곤거린다.


 


“새벽에 네가 말했잖니? 튼실하니까, 언제든 불러 달라면서?”


 


끄아악! 끄아악!


 


“이 검,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잘 지키다가 훗날 돌려드리겠습
니다!”


 


데니스는 웃었다.


 


“아니, 그 칼로 네 생명을 지키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받아 줘서
고맙다. 우리 아들 가르칠 검술도 잊지 말고 잘 만들어야 돼?”


 


페넬로페 아가씨가 데니스의 곁으로 돌아가자 이성이 좀 돌아왔
다. 휴우, 십년감수했다.


 


팔자에 없는 검술 개발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며 그들을 배웅한다.
젊은 학자 커플은 정답게 대화하며 멀어졌다.


 


“그런데 페넬로페, 어떻게 저 친구를 그렇게 쉽게 구슬렸어? 무슨
비결이 있는 거야?”


 


“아, 그거? 응, 나중에 쟤가 말을 잘 안 들으면 말해. 가르쳐 줄
테니까.”


 


무무무무슨! 그걸 가르쳐 줬다간 데니스는 분노에 몸을 떨고 난
공포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데니스의 말이라면 이제 무조건 복종
하기로 결심하며, 떠나는 마님의 등에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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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일주일의 끝입니다.


그리고 또 내일은 일주일 분량을 써야 할 텐데...


음, 읽어주는 분도 없는 데 성실연재란 건 참 보람 없는 노력이네요.


 


... 아니지, 애초에 보여주려고 쓴 글도 아니고,


습작 답게 성실하게 계속 써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