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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序

2010.08.07 05:05

비벗 조회 수:273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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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는 청년 학자들에게 돌아가고, 난 아가씨들에게 돌아갔다.
아가씨들의 분위기는 얼핏 봐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페넬로페 아
가씨의 저기압은 거의 태풍 급이었다. 아까는 몰랐지만 이젠 이유를
안다.


 


그녀는 돌아온 날 잠깐 쏘아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고, 고개
를 도리도리 젓더니 곧 외면했다.


 


음, 이럴 땐 눈치껏 행동해야지.


 


“저기, 레이디들께 폐가 되는 것 같아 저는 슬슬 물러나 보겠습니
다.”


 


아가씨들은 날 잡지 않았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미안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눈인사했고(여전히 눈부셨다) 유리에 아가씨는 안 어울
리게도 용병들처럼 씨익 웃어보였다. 금발의 아가씨는 눈치를 보더
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이름이?”


 


“아아, 예, 루-포-리-입니다. 이상한 이름이죠?”


 


머쓱하니 웃자 그녀도 웃는다. 그러나 왠지 곤란하단 투의 웃음이
다.


 


“이상해. 별나. 잘 가.”


 


…… 너무 진솔하잖아! 생긴 건 순하디 순하게 생긴 아가씨가 내
이름을 놀려대니 슬펐다. 유리에 아가씨도 그렇고, 아무래도 유색
모발 아가씨들은 내 이름을 가만 두지 못하는 모양이다.


 


페넬로페 아가씨를 설득해야 하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기다리자.
아직 여정은 사흘이나 남아 있다.


 


 


차분하게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해가 지고 나서, 그러니까 따지자면 여정이 이틀 남게 되자, 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야 단 둘이서 조용한 이
야기를 나눌 수 있지? 데니스와 한참 얘기한 것 때문인지 뭔지 내
게 큰 반감을 가진듯한 페넬로페 아가씨는 날 볼 때마다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봤다. 소심한 나로선 접근부터가 힘들다.


 


아니, 그것보다 얘길 하게 된다 해도 문제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데니스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풀 수 있을까?


 


사실 직접 그를 향한 분노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 풀기가 어려울
듯했다. 예로부터 종교, 정치, 가문간의 다툼에는 절대 끼어들지 말
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유 : 맞아죽기 십상이니까.


 


그러나 넓은 오지랖으로 주제넘은 맹서를 한 나는 어찌됐든 데니
스를 도와야 했다. 잘은 몰라도, 그건 아마 페넬로페 아가씨 또한
돕는 길이 되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사실 둘이 결혼해서 튼튼 쌈박한 아이 열두어 명 낳아 잘 기르면
되는 거잖아? 데니스는 사랑을 이루고, 아가씨는 아이를 얻는다. 오
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생각들을 하며 후임들이 세워 준 천막에 들어가 드러누웠다.
잠깐 고민은 미뤄두자. 열 세 식경만 지나면 나의 아름다운 그녀
를 만날 수 있다. 아우렐리에 아가씨이~!


 


 


일드는 실수 없이 나를 찾아 잘 깨웠다. 까마득한 5기 후임들에게
우리 중견 3기 선배들은 아마 꽤나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1, 2기
선배님들은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그들과 얽힐 일이 없다. 4기는 그
래도 바로 위 기수이자 그들의 훈련 시 조교로 보조했기에 좀 친밀
감이 있을 테지만, 비(非)지휘관급 대원 중 최고참인 우리 3기는 구
조적으로 그들을 갈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나나 제나인
은 그나마 장난치기 좋아하고 가벼운 성격이라 정도가 덜했지만 다
른 동기들은, 아아, 차마 내 입으론 말 못한다. 지금 혹시라도 자는
제나인을 조금이라도 건드릴까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 천막을 나서
는 저 일드를 보라. 안쓰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복장을 갖추고 일드와 교대하자 이미 한 다경(茶頃=10분)
이 지나 있었다. 난 아우렐리에 아가씨와 만나 나눌 이야기들을 점
검하느라 잠깐 하늘을 보고 있었고, 그래서 일드가 자기 천막 아닌
다른 곳으로 새는 걸 보지 못했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껴 바라본 곳에는 놀랍게도 일드가 페넬로페
아가씨를 수행해 다가오고 있었다. 으아아, 저 자식 뭐하고 있는 거
야?


 


‘야-! 너- 제-정-신-이-냐-!’


 


입을 벙긋거려 멀리 다가오는 놈에게 화를 내 봤지만, 저 녀석,
긴장했는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길 안내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쨌
든 잠시 후 우리는 삼자대면하게 됐다.


 


일드를 내가 노려보자 페넬로페 아가씨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 루포리. 내가 깨워달라고 부탁했어. 그러니 네 충실한 부
하는 이만 자라고 돌려보내렴.”


 


음, 그렇다고 하는 데에야 내가 화를 낼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귀
족의 부탁을 용병의 위계질서를 내세우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아
닌가? 난 순순히 일드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가 천막 안에 들어가
자, 아가씨는 조금 머쓱했는지 허리께에 닿은 까만 머리카락을 만지
작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그
표정은 나로선 처음 보는 것이다.


 


낮에 문득 육감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잘 발육한 몸을 본다.
분명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가씨일 것이나 그 몸의 굴곡은
농염하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군살이란 찾을 수 없
이 탄력적이고 유연하다. 숙련된 교관인 내가, 지금 간소한 잠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이다. 분명하다. 분명 아직도 미련을 버리
지 못하고 매일 몸을 단련하고 있겠지. 늘 짓고 있는 저 찌푸린 인
상은 어쩌면 외롭고 보람 없는 수련의 나날이 만든 것일까.


 


내가 침묵하자, 그녀는 조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까, 혹시 닥터 컨프턴과 무슨 얘길 했니?”


 


곤란하단 듯한 표정이지만 여전히 말투는 위엄이 넘쳤고 직선적이
었다.


 


그녀답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거 참. 생각하니 웃기네. 이렇게 당당하고 신념으로 가득한 아가
씨다. 난 왜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한 걸까?


 


그녀를 믿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어차피 하나뿐이다. 처
음에 생각한 대로, 불길이건 급류건 목숨 걸고 뛰어들 따름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페넬로페 아가씨, 데니스가 제게 자신의 사
랑을 고백했습니다.”


 


…… 그녀는 도대체 무엇에 먼저 놀라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했
다. 좋아, 일단 마음을 뒤흔드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잠시 후에, 제일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말도 안 돼!”


 


작은 절규에 나는 웃었다. 사실인뎁쇼? 좀 오해하셨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부탁했습니다. 아가씨와 제가 함
께 있는 걸 볼 수가 없으니, 제발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말아 달라고
요. 아주 절실한 부탁이더군요.”


 


페넬로페 아가씨가 공황 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뭐라고 중얼
거리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잠깐의 뜸을 들여 그녀가 이성을 좀 찾
길 기다렸다.


 


사실은 내가 이성을 잃은 상태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얼굴만 반반한 용병이 집적거리는 걸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 잠깐, 잠깐만?”


 


그녀의 다급한 외침은 듣지 않는다.


 


“하아, 내 여자는 내가 지킬 거라며 마구 화를 내시기에 저도 진
저리가 났습니다. 귀족들의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깊고 일편단심인
가요? 정말이지 당신이란 분, 제가 넘보기엔 너무 높은 성벽을 갖고
계시네요.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러면. 휴우~”


 


마지막 한숨은 좀 작위적이었지 않나 고민하며 살짝 아가씨를 본
다. 고개를 갸웃한 채로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음, 역시, 이 아가씨
모르고 있었어.


 


난 단순한 놈이다. 별로 대단한 계책도 모르고, 별로 대단한 통찰
력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됐다. 데니스 그 친구가 정말 착
하고, 성실하며,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청년이란 걸.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란 놈은, 문란한 과거는 있어도 순수한 사
랑은 몇 번 해 보지 못한 놈이다. 밤에 사랑했던 여자가 아침엔 여
자 마음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사랑을 안다
고 하면 웃기지만, 그래도 이번엔 내 작은 신념에 걸어 보았다.


 


페넬로페는 좋은 여자다, 데니스는 좋은 놈이다!


 


그리고 좋은 여자는 좋은 놈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지그시 페넬로페 아가씨를 바라본다. 그녀는 혼란한 표정으로 한
가지만 물었다.


 


“정말…… 이니? 데니스가 그렇게 말했니?”


 


아직 혼란한 감정만 가득한 듯한 그녀를 난 끝까지 최선의 연기
로 대했다.


 


“설마, 그 친구 짝사랑인가요? 이거 뭐야, 그럼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 아가씨, 혹시 나랑 놀 생각 아직 있다면 언제든지 와
요. 나 아주 튼실하니까, 알죠?”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하고 헛소리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녀는 다행
히 내 사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중얼중얼, 어느 천막으
로 들어간다. 넋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저 모습이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고백을 들은 소녀의 당황이
어야 할 텐데.


 


아니라면 내 발에 불똥 붙은 거다. 죽기 살기로 수습해야겠지. 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마음에 새기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계신 아저씨, 한 번만 제 사정 좀 봐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