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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序

2010.08.05 08:09

비벗 조회 수:149 추천:1

extra_vars1 (그림은 릴리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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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날의 여정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사실 오늘 새벽의 전투
가 우리 일행의 첫 곤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풍광을 즐기며 유유자
적 말을 몬다. 인원도 꽤 많고, 숲을 거쳐야 해서 마차를 가져오지
못해 짐말을 다섯 마리나 달고 가기에 대열은 길을 따라 길게 늘어
섰다. 공격받는다면 꽤나 위험한 상황이지만 아직 숲이 깊지 않고,
평탄한 삼림지대라 시야가 넓으니 괜찮다. 내일이면 아마 산골짜기
에 접어들게 되겠지만.


 


자애롭고 위대하신(내 실수를 웃으며 넘겨주신) 오션 클링턴 선배
님과 세 분 2기 선배님들, 그리고 나와 동기 놈, 4기 2명과 5기 4
명으로 구성된 우리 「성난 소」의 3조 12인은, 아홉 명의 학자들을
호위해 목적지로 모시라는 명령을 받고 수행중이다. 비록 우리 용병
대가 마족과의 전투, 토벌에 특화된(그래서 좀 시끄러운) 용병대이긴
하나, 그 힘은 임펠런 내 다른 어느 용병단도 따를 바가 없기에 대
학의 귀족 어르신들이 우리 「성난 소」를 지명했다고 한다, 이건 마
린 형님 말씀. 난 우리의 임무를 되새기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옆에서 걷던 동기 놈이 불퉁댔다.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 거여, 넌?”


 


“제나인, 어찌하여 너는 그렇게 툴툴거리느냐?”


 


내가 또 늙은 학자의 흉내를 내자 제나인 헤이튼이 피식피식 웃
었다.


 


“닥터 일스터, 제가 술이 고파서 죽겠습니다그려.”


 


난 속으로 움찔했지만 담담한 태도를 견지했다.
이 술고래에게 데니스의 비싼(독한) 술을 줬다간 큰일 난다. 관계
자 모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만다.


 


“어리석은 아이야. 참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단다. 술도 없고,
있다손 쳐도 선배님들이 네 분이신데 무슨 방법으로 술 냄새를 숨기
려느냐?”


 


사실 나는 술 냄새를 숨길 비약을 갖고 있다. 아직 시험해보진 않
았지만, 전에 들렀던 주점에서 다른 용병대의 늙은 선배님께서 록펠
러 잎을 술자리에 깔아두고 마시고, 자리가 파한 뒤에 록펠러 차를
마셔 주면 냄새를 거의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물론
그 사실은 후임들과는 공유했지만 이 주생주사(酒生酒死)의 바보에
겐 가르쳐준 바 없다.


 


“흑, 그렇죠……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요?”


 


나는 연기력을 발휘해 안쓰럽다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제나인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미어지
는구나. 오늘 밤에는 푹 자도록 하여라. 내 너를 대신해 두 식경을
보낼 것인즉.”


 


“어? 진짜여!?”


 


놀란 제나인이 상황극을 던져버리고 사투리로 급하게 물었다. 좋
아, 미끼를 건드렸구나.


 


“뻥이야.”


 


한 번은 찌를 튕겨준다, 놈이 더 확실하게 물도록.


 


“에이, 싸나이 루포리가 한 입으로 두 말 할 리가 없제! 너만 믿
고 나 일드헌티 말헌다?”


 


음, 오늘 6번초가 일드였던가? 일드한테 할 말이 있던 나도 고개
를 주억거리며 놈의 곁에 붙었다. 이미 완전히 낚여서 나와 아우렐
리에 아가씨 사이에 가교를 놓아 주려 애쓰는 고마운 물고기를.


 


5기 15번인가 16번인 일드 에손은 후위에서 말을 걷고 있었다.
우리의 접근을 받은 그는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에, 아, 5기 일드한테 어쩐 일이세요?”


 


“얌마, 똑바로 말 못혀? 어디 감히 루포리 일스터 어른 앞에서!”


 


제나인이 날 치켜주곤 실실 웃어보이자 일드도 대충 감을 잡은
듯했다.


 


“네에, 헤헤, 죄송해요. 에헴, 5기 15번 일드 에손, 일스터 선배님
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음, 아주 바람직한 후임의 전형이다.


 


“일드야, 이따 7번초 내가 서기로 했다. 이 주정뱅이는 푹 자라고
내비 둬.”


 


착한 내가 동기의 근무를 대신해주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일드는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또 얼마나 빚지셨는데요?”


 


“이런 무엄한! 나를 뭘로 보고!”


 


난 화가 나서 제나인의 동전주머니를 빼앗아 5브론즈를 꺼냈다.
제나인은 멍한 표정이다.


 


“훗, 5브론즈 받았다.”


 


일드가 완전 넘어가려는 걸 보며 제나인은 화도 못 내고 울듯이
떠나갔다. 난 일드한테 묻고 싶었던 걸 떠올렸다.


 


“내가 물어보려던 게 뭐였지? 머리 사이즈? 스리사이즈? 그거 사
이즈?”


 


내 혼잣말에 당황한 일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난 곧 진짜 목
적을 기억해냈다.


 


“야, 일드야.”


 


“예, 일스터 선배님.”


 


조금 뒤쳐진 우리 목소리는 다른 애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난 질문했다.


 


“캐롤린 있잖아, 너희들한텐 걔가 대체 어떻게 보이냐? 니 감상도
좋고, 주변 애들 평가도 한 번 싹 불어봐.”


 


일드가 행동이 멍청해서 그렇지 머리가 멍청한 녀석은 아니다. 특
히 주변 돌아가는 상황이나 타인의 심정을 감지하는 데엔 탁월한 능
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사실 아직 잘 모르는 놈이다). 난 신참이나
다름없는 5기 애들에겐 그 말썽쟁이가 어떻게 비치는지 무척 궁금
했다.


 


“여왕님요? 헤헤, 좋은 분이시죠. 예쁘시고, 성격도 털털하시고,
우리 같은 신참들도 잘 챙겨주시고, 진짜 천사 같으세요. 저희 기수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걸요?”


 


아냐, 악마라니까!


 


“근데…… 이건 일스터 선배님이니까 말하는 건데요……”



오오, 드디어 말하는구나, 진실을!


 


“몸매도 멋지신 것 같아요. 요즘 들어 한결 더 볼록해진 가슴이
정말…… 켁!”


 


내 원투 펀치에 헤롱거리는 일드를 두고 난 절망에 빠져 그 자리
를 벗어났다. 악마는 이미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
로지 나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인 듯한 기분에 난 고독을 느꼈다. 동
기들이고 4기들이고, 이제 5기 애들의 평가까지 일치한다.


 


아니, 잠깐만, 이렇게 되고 나면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란 논
리적 결과에 귀납되는 거 아닌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난 캐롤린의 모든 걸 알고 있지.”


 


내 혼잣말에 근처에 있던 4기 데롤이 깜짝 놀랐다.


 


“여왕님을요? 설마, 선배님…… 컥!”


 


놈에게 원투 펀치를 날려 주곤 난 다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왠지
캐롤린의 사악한 홍소(哄笑)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떨쳐내느라
고생 좀 했다.


 


대열의 중간쯤을 지나는데, 앞에서 무리지어 걷던 학자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새빨간 머리카락의 유리에 아가씨
다.


 


“푸로리, 아니, 루포리, 잠깐 와 봐!”


 


…… 대체 내 이름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왠지 푸
로리란 이름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듯한 그녀에게로 난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러면서 지나치는 청년 학자들에겐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
사했다. 학자란 무릇 귀족이다.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간 형
장의 이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역시나 페넬로페 아가씨가 두 유학파 아가씨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리 명심해야 했던 한 가지가 있다면, 이 일행의 학자
는 9명이고, 한 명은 지도자로서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고, 네 명은
청년으로서 방금 지나친 저 집단이고, 나머지 네 명이 내가 오늘 이
야기를 나눈 세 여성과 아우렐리에 아가씨인 것인데, 스무 명 이상
의 일행 중 여성이 단 네 명이면 그녀들은 함께 행동하게 마련이다.


 


유리에 아가씨의 부름을 받잡고 속으로 구시렁대며 다가갔는데 아
우렐리에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자 난 놀랐다. 아가씨가 내게 눈인사
를 보내셨을 때는 급기야 공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기억 저편
에 묻어뒀던 요상한 인사를 했다.


 


“태양이 우리의 그림자를 비추도록, 반갑습니다, 레이디 여러분.”


 


이러면서 속으로는 ‘그것은 천상의 윙크였다! 나는 신이었다!’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으응?”


 


유리에 아가씨는 비음을 내며 날 쏘아본다. 장난감을 발견한 두
돌 아이의 눈빛처럼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찔끔하고 있는데, 다행히
릴리아 아가씨가 말을 받아 줬다.


 


“달이, 우리에게 그, 등을 비추도록, 반가워, 루포리.”


 


“어, 그건 어떤 인사인가요, 릴리아?”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다. 다른 아가씨들도
그 인사가 무척 궁금한 듯 릴리아 아가씨에게로 시선을 모으고 있
다. 집중된 시선에 당황해서 목을 움츠린 금발 아가씨가 대답했다.


 


“빛의 신, 알리오스의 이름으로 나누는 인사, 입니다.”


 


그리고는 말을 못 이었다. 난 움츠러든 릴리아 아가씨를 위해 보
충 설명했다.


 


“고전의 시대에, 알리오스의 사제와 신자들은 태양이 비추지 못하
는 그림자처럼 소외된 곳에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달빛처럼 알리지
않는 선행으로 알리오스의 은총을 나누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하더라구요. 참 좋은 뜻이죠?”


 


“우와아, 어렵다! 푸로리는 그거 어떻게 알았어? 의외로 똑똑하
다, 난 대학에서도 못 배웠는데에.”


 


두서없이 묻는 유리에 아가씨. 말을 재빨리 하며 내 주의를 뺏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일부러 푸로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지금도
내가 정정할까봐 염려하는 듯 불안한 눈빛이다.


 


아까는 루포리가 예쁘다고 하더니! 제멋대로인 아가씨다.


 


“예전에 나이 지긋한 용병 선배님께 배웠습니다, 레이디. 그 분의
집이 고전시대부터 이어진 가계여서, 어렸을 때 고문에 나온 이야기
들을 많이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대단히 유구한 집안의 용병이로구나…….”


 


페넬로페 아가씨는 여운을 남기며 날카로운 눈으로 날 보고 있다.
그 시선이 마치 재료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요리사의 눈빛 같
아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긴장하고 있는데,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화제를 바꿔 주셨다.


 


“릴리아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집에 책이 있습니다. 읽었습니다.”


 


암, 독서는 숙녀의 교양이지.


 


그러나 우연히 읽은 게 아니라 그 지식의 깊이가 빛의 신 알리오
스까지 닿았다고 한다면, 이 아가씨 정말 열심히 책을 읽었을 것이
다. 그만큼 오래된 태초의 신이니까.


 


그나저나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흘끔 보니까, 우리 대원들은 예의 아우라를 뿜고 있고, 젊은
학자들은 내가 혹시 실수를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현격한 나였기 망정이지-


 


으음……?


 


앗차, 다시!


 


-현명한 나였기 망정이지, 다른 예의 없는 용병이 이렇게 귀족들
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면 벌써 큰 실수를 열 번은 하고 호된 꼴을
당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훗,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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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올려놓고 보니 너무 길어서 다시 자릅니다.


-유쾌하게 쓰려고는 하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