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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일곱별

2010.10.17 10:08

乾天HaNeuL 조회 수:849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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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4 드래곤 레어


 


  이른 아침, 베리 일행은 숲을 헤매는 중이었다. 제스퍼가 잡아간 토리아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망할. 어디가 어디인지 아직도 모르겠네.”
  베리가 신경질을 부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로 시선을 돌리든 똑같은 길만 펼쳐졌다. 어느 곳으로 가야 드래곤 레어에 도달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지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겠어.”
  “그럼 어떻게 하는가?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토리아라는 계집은 능욕을 당하고 죽을 걸세.”
  “망할.”
  베리는 포티스의 말에 짜증을 내며 들고 있던 지도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아, 열 받아 죽겠네. 그 망할 자식. 잡히기만 하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테다. 아 짜증나!”
  “애송이 녀석. 그 녀석은 나와 니나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녀석이네. 자네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애당초 이렇게 무모하게 녀석들의 뒤를 쫓아봤자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네.”
  “하지만 영감!”
  베리가 소리를 내질렀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현재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길.”
  베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시선을 돌려 니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니나가 업고 있는 제논이었다. 어제 오스카의 죽음을 목견한 이후로 정신을 잃은 채 몇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그 녀석은 어때?”
  “아직.”
  니나가 간단하게 답했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도대체 무슨 수로 시렌트 애시 녀석들이 제논의 존재를 알아챈 거야. 아, 돌겠어.”
  “어이 애송이. 도대체 시렌트 애시는 뭐하는 놈들인가? 그런 놈들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듣는데.”
  “나도.”
  포티스와 니나가 베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베리는 굳은 얼굴을 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계속되는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망할 것들은 케이롄의 비밀 조직이야. 하는 일은 요인 암살과 고대의 유물을 찾는 거고.”
  “그럼 길드인가?”
  “아니. 길드는 아니야. 정식으로 등록조차 되지 않은 사조직이나 마찬 가지야. 뒤에서 누가 움직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망할 조직이라고. 나도 그것 밖에는 몰라.”
  베리는 나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상당히 신경질이 난 표정이었기 때문에 포티스와 니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특유한 중성적 음성의 신음 소리였다. 제논이었다.
  “제논!”
  니나는 조심스레 제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논은 여러 차례 얼굴을 찡그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이 제논! 정신 들어?”
  니나가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논은 여린 미소를 얼굴에 띠운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살짝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곧바로 균형을 잡고 똑바로 섰다.
  “우리… 지금 어디까지 온 건가요?”
  제논이 베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베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지금은 몇 시 정도 되었나요?”
  “6시부터 나와서 세 시간 째 헤매고 있으니 대략 9시 정도?”
  “3시간 정도 남았네요.”
  여전히 힘이 없는 어조였다. 제논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숲으로 옮겼다. 한참 동안이나 길을 쳐다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걷는 수준이었지만,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제논! 뭐하는 거야?”
  베리를 비롯한 다른 일행이 급히 제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보기와는 달리 걸음이 빨라서 니나만이 그를 제대로 쫓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제논!”
  니나가 제논을 부르며 어깨를 잡았다. 제논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며 니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여기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길을 더 잃을 거야.”
  “아니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제논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어느새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상태였다. 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
  니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헥헥. 저 녀석 왜 이리 걸음이 빨라?”
  “크윽, 보기보다 건강한 젊은이군.”
  베리와 포티스가 그들을 따라잡고는 숨을 헐떡였다. 베리는 더 이상은 못 뛰겠다고 짜증을 내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어 올려 니나를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니나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베리는 고개를 들어 올려 니나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뭐야 의외로 가까이 있었잖아.”
  “저기가 드래곤 레어인가 보군.”
  아직은 멀어보였지만, 확실히 그곳에 드래곤 레어의 입구가 있었다.
  “제논. 어떻게 된 거야?”
  베리가 물었다. 제논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베리는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섰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뒤쫓기 시작했다.
  대략 삼십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그리고 결국 드래곤 레어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어의 입구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고, 그것은 제스퍼 일행이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뭐야 벌써 도착이야?”
  베리가 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수로 찾아낸 거야? 지도도 없는데. 제논, 네 머리에는 나침반이라도 들어있는 거냐?”
  “나침반이 들어있더라도 여기서는 무용지물 아니었던가요?”
  제논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아, 몰라. 됐다, 됐어. 말하기 싫으면 관둬라. 어차피 들어도 머리만 아플 거 같으니까. 게다가 이제 시간도 두 시간 반 정도만 남은 거 같고.”
  베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양이 점점 중천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들어가자!”
  베리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니나가 팔을 들어 올려 베리를 멈춰 세웠다. 베리는 한숨을 내쉬며 니나의 팔을 옆으로 치우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를 너무 바보 취급하지 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베리는 땅에 있는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베리는 돌멩이를 툭 하고 앞으로 던졌다. 돌멩이가 입구 바로 앞 돌멩이에 닿는 순간 엄청난 폭발이 발생했다. 뿌연 먼지가 일어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이런 바보 같은 함정에 걸릴 정도는 아니니까.”
  베리는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레어 안으로 들어갔다. 니나와 포티스도 피씩 웃음을 터뜨리며 따라 들어갔다.
  “…어머니. 제게 용기를 주세요.”
  제논은 잠시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목걸이에 걸려있는 어머니의 유품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정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제논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뭔가에 부딪혔다. 한족 눈을 찡그리며 앞을 바라보니 니나가 가만히 서있었다.
  “왜 그러세요?”
  “문제가 생겼어.”
  “예?”
  니나의 말에 제논은 앞을 바라보았다. 길이 양 갈래로 나뉜 것이 보였다.
  “들어오자마자 갈림길을 만드는 드래곤이라니.”
  “그러게 말일세. 이런 희한한 드래곤은 처음 보네. 하긴 신룡의 레어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지만 말일세.”
  베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나는 음성으로 말하자, 포티스가 베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베리는 슬쩍 포티스를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뭔 한숨을 그리 내쉬나? 땅이 다 꺼지겠네.”
  “아아, 알고 있어. 그래도 짜증나는 건 어쩔 수가 없잖아. 쳇. 아무래도 두 팀으로 나눠서 가야할 거 같아. 니나, 제논, 어떻게 생각해?”
  베리의 질문에 니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논도 입을 다문 채 뚫어지게 베리만을 쳐다보았다. 베리는 검은 두건을 벗어던지며 머리를 더 심하게 긁적였다.
  “그러면 내 마음대로 정하지 뭐. 나하고 포티스가 오른쪽. 니나하고 제논이 왼쪽. 어때?”
  “알았어.”
  “예,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니나와 제논이 왼쪽 갈림길 바로 앞에 다가서자 베리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조심하라고.”
  그들이 멈춰 뭐라고 하기 전에 베리는 손을 흔들며 포티스와 함께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갔다. 갈림길에 들어가자마자 캄캄한 어둠이 그들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게다가 베리는 뭔가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하아……. 포티스.”
  “왜?”
  “아무래도 대박 꽝을 뽑은 것 같아.”
  “하아?”
  포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베리는 땅에 꿇어앉았다. 등에서 긴 막대기를 하나 꺼내들어 불을 붙인 뒤 포티스에게 건네주었다. 포티스는 그것을 받아들여 바로 앞을 비췄다.
  “뭔가, 이건.”
  복잡한 수식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불빛에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는데,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포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마법으로 된 함정이야. 그것도 아주 복잡한 술식으로 된 마법진으로 구성된… 아 몰라. 아무튼 굉장히 복잡한 놈이야. 젠장. 이거 그 자식들은 왼쪽으로 갔나 봐.”
  “그렇다면 우리는 오른쪽 길을 모조리 우리 힘만으로 돌파해야한다는 겐가?”
  “아마도. 마법의 경우는 내가 하고, 힘쓰는 거라면 포티스가 해야겠지. 어때. 자신 있어?”
  베리가 포티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포티스는 오른팔에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자신 있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러면 잠시 내 뒤로 물러나 주면 고맙겠네.”
  “나이 든 사람한테는 존대어로 부탁하는 거다.”
  “그런 건 나하고 관계없다니까.”
  베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땅에 손바닥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손에서 여린 빛이 뿜어져 나와 땅으로 서서히 흘러들어갔다. 빛은 금세 땅에 그려진 마법진으로 향했다. 빛을 받아들인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아. 이거 뭐야. 진짜 복잡하잖아. 아, 이딴 걸 내가 왜 해석하고 앉아 있어야 해!”
  짜증 섞인 혼잣말을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해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어이 애송이.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
  “포티스. 전혀 안 괜찮아!”
  베리는 눈을 번쩍 떴다. 붉은 눈동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와 함께 마법진의 빛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베리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아. 짜증나 죽겠네. 여긴 우리가 처음 지나 가는 게 아니야.”
  “무슨 뜻인가?”
  포티스가 물었다. 베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어떤 녀석이 먼저 지나갔어. 그것도 함정 마법을 잠시만 해제시킨 뒤 말이야. 자신들이 지나가면 재가동되게. 그것도 술식을 살짝 바꿔가면서.”
  “난 마법에 대해 잘 모르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게.”
  “한 마디로 마법에 관해 잘 아는 녀석이 먼저 지나가면서 더 강한 함정으로 바꿨다는 거야. 해제 방법도 완전히 비틀어 버렸고. 더 이상 자세히 설명 못하니까 알아서 생각하라고.”
  베리는 손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포티스는 여전히 이해를 못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뒤따라갔다.
  “그런데 말이네, 베리.”
  “왜?”
  “괜찮은 건가?”
  “뭐가?”
  포티스의 물음에 베리는 슬쩍 뒤 돌아보며 포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또다시 함정 지대가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는 멈춰 섰다.
  “이번 건 더 대박이잖아.”
  베리는 짜증을 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렇게 니나와 제논 둘을 보내도 괜찮은 건가?”
  “에? 뭐라고? 당연히 괜찮지. 니나는 여자라도 힘이 포티스와 맞먹는 괴력녀고. 제논은 허약해 보여도 은근히 강하다고. 게다가 키시스이니 뭔가 힘을 가지고 있을 거란 말이야. 우리보다 저쪽이 더 막강한 조합이라고. 나는 기껏해야 함정 해제나 할뿐이고, 사용할 무기는 하늘의 심판 정도밖에 없고. 포티스는 믿을 게 힘밖에 없잖아.”
  “뭐야 이 애송이 녀석아!”
  포티스가 소리를 버럭 내지르며 주먹으로 베리의 머리를 쳤다. 베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화를 내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지금 정신 집중해야하니까 좀 가만히 있어 봐.”
  베리는 손바닥을 땅에 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또 다시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여길 지나간 녀석은 누구야? 완전 대박으로 함정을 개조해 놨잖아.”
  베리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포티스가 들고 있는 횃불을 받아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포티스가 물었지만 베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게 앞으로만 사뿐사뿐 걸었다. 그렇게 마법진의 중심 부위까지 걸어간 뒤 천천히 검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칼날 부위에 횃불을 가져다 댔다. 검에 기름이 발라져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칼날에 불이 붙었다. 불은 마법진을 따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인가!”
  포티스가 있는 곳까지 불길이 다가오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게다가 베리는 불길 가운데 완전히 휘말려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자네 죽고 싶은 겐가!”
  “죽긴 왜 죽나?”
  베리가 껄렁거리며 대답했다.
  “이 마법진은 이렇게 해제하는 거야.”
  “뭐?”
  베리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퉁겼다. 그 순간 불길이 더욱 거세가 타올랐고, 베리의 몸은 불길 때문에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포티스는 걱정스런 얼굴로 베리가 있던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윽고 불길이 잠잠해졌다. 베리가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불에 그슬린 자국도 하나 없는 상태였다.
  “애송이. 네 녀석은 머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
  “하아…….”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에, 포티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네 녀석. 니나와 떨어져서 괜찮은 건가?”
  “괜찮다니까. 내가 애도 아니고.”
  “아직 기껏해야 열 넷 밖에 안 된 녀석이 별 소리를 다 하는 군.”
  포티스가 도끼날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여간 옛날부터 네 놈은 마음에 안 드는 애송이였다. 하는 행동과 말이 죄다 거짓이니.”
  “거짓이라니. 나는 언제나 진지하다고.”
  “매번 이런 식으로 중요한 문제는 은근슬쩍 피해가는 건가? 겁쟁이 녀석 같으니.”
  포티스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베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 됐네. 어차피 그건 내 문제도 아니고 자네 문제니. 어서 길이나 가세.”
  “흥. 썩을 노인네.”
  “뭐가 썩을 노인네인가! 나는 아직 청춘이네!”
  베리의 말에 발끈한 포티스는 주먹으로 베리의 배를 쳤다. 베리는 억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대략 십 분 동안 말없이 계속 걸었다. 특별한 함정도 없었고, 갈림길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계속 걷다가 베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짜증으로 가득 찬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포티스가 베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함정인 건가?”
  “함정은 함정인데……. 이건 뭔지.”
  베리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환한 빛을 내뿜은 공이 생성되었다. 베리는 그것을 천장까지 띠웠다.
  “이건 뭔가?”
  포티스가 양쪽 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고 답했다.
  “중요한 것은 저 문을 열기 위해서는 암호 같은 것을 풀어야 한다는 거지.”
  “문?”
  베리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거대한 문이 눈에 들어왔다. 열쇠 구멍이라든가 문손잡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애당초 문이라고 할 수 있을 틈 같은 것도 보이지 않은 벽이었다. 다만 가운데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록된 문자가 용족어가 아니라는 것 정도? 여기에 살았던 드래곤은 참 친절도 하셔라. 인간도 해제가 가능한 함정 마법진을 설치하고, 이제는 친절히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문제까지 내주네.”
  “원래 신룡족이 그런 성격이지 않나.”
  “뭐. 괴짜지. 더할 나위 없는 괴짜들.”
  베리는 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문장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포티스도 마찬 가지였다.
  “이건 도대체 뭔가. 전혀 읽을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은…….”
  벽에 써진 글은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다. 따라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글이었다.
  “쳇. 별거 아닌 트랩이잖아.”
  “무슨 소리인가?”
  베리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불길이 손에서 치솟아 올랐다. 베리는 불덩어리를 눈앞의 벽에 내던졌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베리가 몇 차례 반복하자 이변이 발생했다. 수십 개의 단어들 중 일부가 붉은빛을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강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힘이 있으며 느낄 수 있지만 만져지지 않는 것.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발견하려 하지 않아도 발견할 수 있는 것. 둘러봐도 보이지 않으나, 기다리다보면 나타나는 것. 뭐야 이건?”
  불에 타오르는 글들을 모두 읽어보았다. 읽을 수는 있었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쪽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일한 일을 해봤지만 그쪽 벽면에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베리는 계속해서 바람 계열의 마법과 물 계열의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베리는 마지막으로 흙 계열의 마법을 양쪽 벽에 사용해 보았다. 이번에는 몇몇 글들이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포티스가 황금빛의 단어들을 읽어보았다.
  “기압의 변화에 따라 고기압에서 저기압을 향해 부는 것. 이거… 무슨 뜻인가? 기압은 또 무슨 말인가?”
  포티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베리를 쳐다보았다. 베리는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쳤다.
  “답을 찾아낸 건가?”
  “뭐. 찾아낸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은 해봐야지.”
  베리는 걸음을 옮겨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벽, 즉 문 앞에 섰다. 마법진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별다른 장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베리는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포티스는 잠시 떨어진 위치에서 베리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베리는 눈을 감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봐서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베리의 손에서 산들바람이 일었다. 이윽고 산들바람은 강렬한 회오리로 변했다. 베리는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벽에 그려진 마법진을 향해 던졌다.
  회오리는 베리의 마법진에 부딪히자마자 사라졌다. 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포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 고대의 사람인지 드래곤인지 알 수 없는 자가 기술한 책인데, 날씨에 관한 책이었지. 거기에 기압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고.”
  “그래서 정답이 바람이라는 건가?”
  “뭐 그런 셈이지. 두 개의 문구가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 바람이더라고. 바람은 확실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거잖아.”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강렬한 빛을 내뿜던 마법진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리고 벽 가운데에 기다란 틈이 생기더니, 문이 되어 양쪽으로 열렸다. 베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포티스가 그 뒤를 이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또다시 검은 어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리가 또 다시 주문을 외워 빛나는 공을 만들었고, 그것을 천장에 띠웠다. 주변을 둘러보자 엄청난 금과 보석들이 보였다.
  “대박이네. 확실히 드래곤 레어네.”
  “오… 이건! 이건 아주 귀중한 금강석이 아닌가.”
  포티스는 땅에 떨어져 있는 것들 중 무색투명한 금강석을 집어 들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리저리 자신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클 정도로, 매우 커다란 원석이었다.
  베리는 피씩 웃으면서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장식이 잘 된 검들부터 오래된 책들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또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발자국들이었다. 그 발자국은 먼지 위에 새겨진 것으로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베리는 발자국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발자국은 어느 한 곳에서 끊어져 있었는데, 그곳은 보물이 가득 한 방의 중심부였다. 베리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중심부로 향했다. 아무런 마법진도 그려져 있지 않았고, 대신에 커다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원 안에는 여러 가지 도형들과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식에 불과했다.



  왼쪽 갈림길로 들어선 니나와 제논은 아무런 말없이 걷기만 했다. 벽에 박힌 수많은 수정들이 밝은 빛을 내며 그들의 발걸음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길을 찾은 거야?”
  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논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며 답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 말을 누가 믿겠어.”
  “그렇죠?”
  제논이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그래도 돼. 너도 지금 이것저것 복잡할 테니. 하지만 나와 베리는 믿어줬으면 해.”
  “…….”
  제논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논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은근히 벽을 만드는 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니나의 말에 제논이 물었다.
  “만난 지 며칠 밖에 안 되기는 했지만, 애당초 네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잖아. 게다가 그 말투. 은근히 사람과 벽을 만드는 것으로 밖에 안 보여.”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논은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얼굴에 표정이 싹 사라졌다. 제논은 무표정한 얼굴로 니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니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귀여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거북함이 느껴졌다.
  “뭐 그런 건 별로 상관없잖아요.”
  어느새 제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처럼 여린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우며 걷기 시작했다. 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논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니에요. 단지 제 기억력이 워낙 뛰어난 것뿐이니까.”
  “응? 뭐라고?”
  니나는 다른 것을 생각하다가 제논의 말을 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니나는 혹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나요?”
  “그런 걸 어떻게 기억 해. 보통 다 잊게 되잖아.”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태어났을 때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죠.”
  제논의 말에 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게 어떻게 가능해?”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논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급히 손을 들어 올려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니나는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다가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앞에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었다. 간혹 여자들도 껴있기는 했다. 그들은 모두 몸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 덕분에 바닥은 피범벅이었다.
  니나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중간에 제논이 팔을 들어 올려 막았다. 제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하나 집어 들어 시체들 가운데에 툭 던졌다. 단검이 바닥에 닿자마자 천장, 바닥, 벽 할 것 없이 엄청난 수의 창이 튀어나왔다.
  “함정.”
  니나는 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창들 중 몇 개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니나는 날카로운 창을 검으로 튕겨냈다.
  “저기 니나.”
  “응? 왜?”
  “…조금 살살 해주세요.”
  니나는 제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
  니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처낸 창들 중 하나가 제논의 바라 앞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논이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꼬치구이가 될 뻔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나가지?”
  “글쎄요. 저도 이런 건 영화에서밖에 못 봐서요.”
  “응? 영화? 그건 또 뭐야?”
  니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제논은 아차 하면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살던 세상에 있던 말이에요.”
  “그래?”
  “아무튼 지금은 여기를 지나가는 것이 먼저예요. 보통 이런 함정은 해제 장치가 어딘가 있을 겁니다.”
  제논은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수많은 문양들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제논은 손으로 문양들을 하나씩 매만졌다.
  “의외로 간단하게 만들었네요. 문양이 살짝 일그러진 곳이 있어요.”
  “그래서?”
  니나는 제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아마도 이렇게 문양들을 올바로 바꾸면…….”
  제논은 손으로 문양들을 이리저리 움직여 제대로 맞추었다. 문양이 제 모습대로 맞춰지자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이윽고 소리가 멈추자 제논은 땅에서 다른 단검을 주어 들었다. 그리고 함정 지역에 단검을 툭 하고 던졌다. 단검이 땅에 닿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논은 입으로 길게 숨을 들이 쉰 다음,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함정 지대에 발이 닿았지만 창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런 것 같네.”
  니나는 검을 도로 칼집에 꽂아 넣었다.
  “이쪽 길을 지나간 사람은 키가 큰 사내인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바닥에 그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거든요. 그리고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면 마법으로 모조리 막아냈을 겁니다. 게다가… 왠지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도 않았고.”
  제논이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그런 남자와 일을 함께하는 녀석이라고. 단지 본성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그렇겠죠?”
  니나는 특유의 차가운 어조로 말하자, 제논은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갑옷 입은 녀석 이야기는 꺼내는 거야?”
  “글쎄요. 왠지 모르게 동질감 같은 게 느껴져서요.”
  “동질감?”
  “그냥 느낌일 뿐입니다.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제논이 말을 끝내고 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걷다가 또다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함정 지대에 도착했다. 첫 번째 함정과 달리 많은 수가 죽지는 않았다. 딱 세 구 정도가 쓰러져 있었을 뿐인데, 신기한 것은 핏자국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니나 숨을 쉬지 말아요!”
  제논이 급히 자신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고, 니나 역시 그렇게 했다. 바닥에서부터 자욱한 연기가 흘러나오자 그들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한참 동안 숨을 참은 채 달렸고, 간신히 안전한 곳에 도달하자 한꺼번에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도대체 저건 뭐야?”
  “독가스인 것 같아요.”
  “독가스? 그건 또 뭐야?”
  “저도 모르겠어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제논은 답하였다.
  “저길 어떻게 지나가지?”
  “벽에는 아무런 장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돌파하자니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오네요.”
  니나의 물음에 제논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차라리 베리와 포티스 씨가 간 길로 가는 것이…….”
  “너 포기가 빠르구나. 그런 사람은 성공 못한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네요.”
  제논은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내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어?”
  니나가 물었다. 제논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손뼉을 쳤다.
  “니나. 검기로 연기를 일순간 날려버릴 수 있어요?”
  “그거야 가능하지.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일단 해보는 데 의의가 있는 법이죠.”
  “…왠지 불길해. 그런 장난기 가득 찬 얼굴로 말을 하면, 왠지 베리처럼 사고를 일으킬 것 같다고.”
  니나가 나지막한 어조로 말하자, 제논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기만 했다. 그래도 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들은 다시 독가스가 피어나오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니나는 숨을 최대한 들이마신 다음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은 푸른빛으로 휘감겼다.
  니나의 검도 푸른빛으로 휘감겼다. 니나가 검을 강하게 내려치자 푸른빛의 섬광이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땅에서 풀풀 피어오르는 연기가 푸른빛에 휘말려 날아갔다.
  제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급히 앞으로 뛰어갔다. 그러면서 시선을 사방팔방으로 돌리며 독가스가 피어오르는 구간의 벽과 땅, 천장을 모두 살펴보았다. 마침내 제논은 특이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땅에서 또다시 독가스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숨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제논은 급히 멈춰 서서 손을 벽을 향해 뻗었다. 그가 손을 뻗은 곳에는 붉은 보석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제논이 그것에 손을 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당혹한 표정에 니나를 바라보았다.
  “비켜!”
  니나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검기로 호두알 크기 정도의 붉은 공을 박살냈다. 그것은 붉은 섬광을 사방팔방을 뿜어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
  제논은 잠시 말없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땅에서 더는 독가스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제논은 깊이 숨을 내몰아쉬었다. 제논은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땅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니나 역시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땅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다행이네요. 그걸 파괴하는 게 정답이 아니었다면 우리 둘 다 죽을 뻔했어요.”
  “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어서.”
  “니나는 행동이 먼저군요? 저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항상 한 발 늦는 편인데요.”
  니나는 제논의 말을 듣고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었다. 니나는 너무 웃어서 배와 턱이 아파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나한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은 없어. 아마 네가 두 번째일 거야.”
  “첫 번째는 베리인가 보죠?”
  니나는 말없이 가만히 천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제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만 가죠. 이러다가 늦겠어요.”
  “그래.”
  제논과 니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런데 여기 참 신기하네요. 수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계속 걸어도 안이 밝으니.”
  “그러게.”
  입구에서는 벽에도 수정 장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천장에만 수정이 달려 있었다. 천장에 달린 수정에서는 여린 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비추었다. 특별히 횃불을 킬 필요가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주변이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했다.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는데, 이번에는 찬란한 황금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제논과 니나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꽤 넓은 원형의 방이었다. 천장에는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수정들이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에는 수많은 문자들로 빼곡했다.
  “저쪽이 문인가 봐요.”
  제논이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꽉 막힌 것처럼 보였지만 네모난 틈새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저기를 어떻게 들어가?”
  니나가 물었다. 제논은 어깨를 으쓱하며 문이라 생각되는 곳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행히 문 근처에는 별다른 함정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비릿한 피 냄새에 제논은 입과 코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왜 그래?”
  “피 냄새가 나요.”
  “피 냄새?”
  니나도 문 근처로 다가갔다. 확실히 비릿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아무래도 문은 맞는 것 같은데 함정이 있나 보네.”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여는 장치는 벽이나 바닥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제논은 뒤로 물러서며 벽과 바닥을 열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글들도 문을 여는 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 언제 문자를 터득한 거야?”
  제논의 말을 듣고 니나가 물었다. 제논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제라고 답했다.
  “확실히 너 기억력 좋구나. 대륙 공통어가 제일 쉬운 문자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터득하기 어려운 건데.”
  “뭐… 언어 계열은 원래 또 좋아해서요.”
  제논은 시선을 벽에 고정시킨 채 말하였다.
  “나의 실수는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한 걸까?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서 모두를 불행에…….”
  제논은 손가락으로 벽의 문자들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읽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자책,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나았다는 생각, 모두에 대한 미안한 감정 등이 실려 있는 글이었다.
  문득 제논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더 이상 소리 내어 읽지도 않았다. 니나가 슬며시 제논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제논!”
  니나가 제논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흔들어댔지만 제논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벽의 문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논! 왜 그래? 정신 좀 차려 봐!”
  니나는 제논의 뺨을 손으로 때렸다. 서너 대를 때리자 마침내 제논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왼쪽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 또 다른 생각에 잠긴 것인지 희미한 눈초리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왠지 모를 거북함도 느껴졌다.
  “제논 괜찮은 거야?”
  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논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다만 이 글이 너무 슬퍼서 그랬습니다.”
  “슬퍼?”
  “제게는 슬퍼 보이거든요. 그런데 드래곤도 자책감에 빠지나요?”
  제논이 묻자 니나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에 관해서 누가 잘 알 수 있겠어.”
  “하긴 그렇겠네요.”
  니나의 말에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논은 벽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상당한 분량이었지만 책을 읽는 속도가 워낙 빠른 편이라, 읽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여기에 살았던 드래곤 이름이 이우니우스인가 봅니다.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어요.”
  제논이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니나도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확실히 이우니우스라는 문자가 써져 있었다.
  “이우니우스는 여섯 번째 달로 태양의 달을 가리키는데?”
  “하지만 다른 단어들과 달리 이 부분만 필법이 달라요. 다른 건 뭔가 고딕체 형식으로 써놨지만, 이우니우스라는 단어만은 흘림 형식으로 썼거든요.”
  “뭐. 그러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그런 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잖아?”
  니나의 말을 듣고 제논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 중요한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여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제논은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 다양한 그림들 중에서 중앙에 새겨진 거대한 흰색 드래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고, 거대한 날개를 지녔고, 아름다운 흰색으로 빛나는 드래곤이었다.
  “이게 룩스 드래곤의 본 모습인가 봐요?”
  “아마도 그렇겠지.”
  “흠… 바닥에도 별다른 장치가 없어 보이는 데요?”
  “그래?”
  니나는 제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제논이 말리기도 전에 푸른빛의 검기를 문을 향해 날렸다.
  “…….”
  제논은 말없이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문에는 조그마한 흠집조차도 나지 않았다. 니나는 검을 칼집에 도로 꽂으면서 제논을 바라보았고, 제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변하는 수정들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천장의 중심부에 달린 수정은 흰색 빛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흠…….”
  제논은 턱을 매만지며 바닥을 보았다. 원형의 바닥의 정중앙에 위치한 것은 백금색의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제논은 걸음을 옮겨 눈 바로 위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 천장을 응시했다.
  “니나. 저것만 부실 수 있으세요?”
  “어디를?”
  니나가 제논의 곁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은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수정들 사이였다. 수정들 틈새에 있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빛을 전혀 발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저렇게 작은 원은 힘들 거 같은데. 단검 같은 것이 있다면 좀 모르겠지만.”
  “단검이라면 제가 가지고 있어요.”
  제논이 품속에 가지고 있던 작은 검을 꺼내 니나에게 건네주었다. 니나는 검을 받아 들고 심호흡을 하였다. 여전히 시선은 검은 원에 둔 채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녀의 몸이 푸른 오라로 휘감겼고, 그것은 단검도 마찬 가지였다.
  니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있는 힘을 다해 도약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대략 봐도 10m가 넘어 보였다. 하지만 니나는 어느새 천장 근처까지 뛰어 올랐고, 단검을 쥔 손을 위로 뻗어 올렸다.
  단검에 맺힌 푸른빛이 뿜어져 나가 검은 원 부분만을 정확하게 파괴하였다. 니나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살짝 뒤로 물러섰다.
  천장에서부터 빛의 기둥이 서서히 내려왔다. 그것은 드래곤의 백금색 눈동자를 비추었고, 그 순간 땅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제논과 니나가 눈을 들어 문이 있는 곳을 보니, 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진상 역시 알 수 있었다.
  “웁!”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제논은 급히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돌렸다. 니나 역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시체들이 있었다. 전부 돌문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시체들이었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피 냄새만 맡으니까 빨리 가자.”
  “네.”
  제논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달리기 시작했다. 짓이겨진 시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탁 트인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논과 니나가 큰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돌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서 굳게 닫히자, 진동하던 피 냄새가 조금은 가셨다.
  “여. 조금 늦었네.”
  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 보니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서있는 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또한 그 옆에 서서 대형 도끼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포티스도 보았다.
  “여긴 보물 창고인가 보네요.”
  제논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보물들을 보며 말했다.
  “보물 창고이기는 하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 까요? 더 이상 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제논이 묻자 베리는 손가락으로 중앙에 새겨진 원을 가리켰다. 제논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원 안에는 여러 가지 문양들이 새겨져 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였다. 단지 장식에 불과한 것 같았다.
  “녀석들의 발자국은 여기서 사라졌어. 그것도 갑자기.”
  제논은 먼지 위에 새겨진 발자국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 원 안에 뭔가 장치가 있는 것 같은데 천장을 봐도 아무 것도 없고, 주변을 둘러 봐도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마법에 반응하는 장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에 반응하는 장치도 아니야. 도대체 그 자식들은 무슨 수로 이걸 가동시킨 거야?”
  베리가 신경질을 잔뜩 부리며 머리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그리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짜증나. 망할 것들. 왜 불쌍한 어린 녀석은 잡아 가고 난리야. 그 녀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서 잿더미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야. 망할 놈들.”
  베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을 여러 차례 주먹으로 내리쳤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저만 없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뭔 헛소리야? 그 자식들 한 짓이 왜 네 잘못이냐?”
  제논의 말에 베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그것이 왜 자네 책임인가? 자네가 키시스라는 강력한 힘의 보유자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앞서 차원의 문에 휘말린 단순한 희생자라네. 어제 일을 자네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일세.”
  “맞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포티스와 니나도 제논에게 한 마디씩 해주었다. 제논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 말아 먹을 장치를 가동시키는 법을 알아내지 못하면 큰일이야. 앞으로 2시간가량 남기는 했지만 그 자식들이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알 수도 없고. 아니면 벌써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니까.”
  “아마 벌서 일이 터진 이후일 수도 있네. 어젯밤 녀석들을 끝까지 막았어야 했는데. 젠장.”
  포티스는 이를 갈며 도끼로 바닥을 찍었다. 쿵 하는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베리는 벌떡 일어섰다.
  “영감. 다시 한 번 바닥 쳐 봐.”
  “알겠네.”
  베리의 말을 듣고 포티스가 다시 바닥을 강하게 내리 쳤다. 속이 텅텅 빈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렸다.
  “포티스. 이번에는 여기 원 안을.”
  베리가 옆으로 비켜서자, 포티스는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은 다음 강하게 도끼로 원 안을 내려찍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속이 비어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묵직한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뭔가 소리가 다르군. 그런데 보통 문이 되는 곳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나야 정상 아닌가?”
  “그렇지. 보통은 그게 정상이지. 하지만 여기는 드래곤 레어야. 녀석들이 하는 짓을 인간의 생각으로 완전히 읽는 것은 불가능하잖아?”
  베리가 피씩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안이 꽉 찼으니 부셔야 하는 겁니까?”
  “부수긴 뭘 부셔. 그런 귀찮은 짓을 했다가는 레어가 다 무너져 내리겠다. 너는 아직 마법과 관련된 걸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제논의 물음에 베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왠지 콧대가 더 높아진 느낌이 들었다.
  “1서클밖에 못 쓰는 애송이 녀석이 말은 잘하는구먼.”
  “영감. 지금 한 번 해봐는 거야?”
  “애송이. 네 녀석의 전투 감각으로는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사실 애송이 네 놈은 저 제논이라는 청년한테도 질 거 같은데?”
  포티스의 핀잔에 베리가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천장에 떠있는 빛을 받은 팔찌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니나가 다가가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꽝 쳤다.
  “왜 때려?”
  “맞을 짓을 했으니까.”
  “…….”
  베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축 늘어졌다.
  “빨리 녀석들을 쫓아가는 방법이나 찾아.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잖아.”
  “알았어. 찾으면 될 거 아니야! 뭐 이미 찾았지만.”
  베리는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각종 보물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 물건들을 골라낸 다음 낑낑 거리며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리의 힘으로는 무리였기에, 포티스가 나서서 그것들을 옮겨 원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대략 열 개 정도의 보물을 옮겨 놓자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뭔가가 바닥 밑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베리는 유유히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렀다.
  “어이. 빨리들 오라고.”
  다들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며 원 안에 들어갔다. 그 순간 원 안의 바닥이 천천히 아래로 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도착하였다.
  베리 일행이 다른 바닥으로 옮겨 내리자, 원 바로 밑에 있는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기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장까지 올라갔고, 마침내 그들이 지나왔던 입구를 틀어막았다.
  “이 녀석은 정말 머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니나?”
  “그냥 바보 어리광쟁이일 뿐이에요. 그것도 악동.”
  니나는 포티스의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포티스는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다 들리거든?”
  “들리면 어떻게 할 텐가? 니나와 싸우기라도 할 텐가? 아니면 나와 싸울 텐가?”
  “…너희들과 싸울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베리는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도착한 공간은 바닥이 정삼각형인 커다란 방이었다. 벽은 가로가 조금 더 긴 직사각형이었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자면 삼각기둥의 형태였다.
  “뭐야. 여긴 또 입구가 어디에 있는 거야?”
  “그러게요. 아무 것도 안 보이네요.”
  벽과 바닥을 아무리 둘러봐도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틈새도 없었고, 수정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림 같은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빛나는 방에 불과했다.
  “도대체 그 작자들은 어디로 간 거야?”
  바닥을 아무리 살펴봐도 발자국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굉장히 신기하네.”
  제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빛나는 벽을 향해 다가갔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벽에 손을 댔다. 벽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갑자기 벽의 빛이 손으로 옮겨 붙었다. 제논은 깜짝 놀라며 벽에서부터 손을 뗐다. 하지만 손에 옮겨 붙은 빛은 점점 손목과 팔을 타고 몸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제논!”
  베리를 비롯한 다른 일행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제논을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제논의 몸을 완전히 휘감은 강렬한 빛은 곧 사라졌다.
  “뭐였지?”
  제논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주먹을 쥐었다 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논의 시선이 벽에 닿자, 그는 벽에 생긴 이변을 깨달았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화려하네. 금으로 치장한 거 같잖아.”
  제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또다시 손을 뻗어 벽에 가져다 댔다. 따스함이 더욱 강렬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처럼 이상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제논.”
  “네? 왜 그러세요?”
  베리의 불음에 제논은 뒤를 돌아보았다. 베리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제논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벽에 손을 대는 거로 해제되는 장치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장치라니? 아 짜증나. 망할 도마뱀 같으니. 이딴 장치를 만들어 놓고 나를 물 먹인 거야? 아 짜증나. 짜증나!”
  베리가 투덜거리며 발로 땅을 쳤다. 니나가 발끈하며 주먹으로 베리의 뒤통수를 때렸고, 베리는 혹이 난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주저앉았다.
  “아프잖아!”
  “맞을 짓을 하잖아.”
  “제길! 나중에 꼭 복수할 테다!”
  “하려면 해.”
  물론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베리는 신경질을 잔뜩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해? 빨리 안 오고.”
  베리는 슬쩍 뒤를 보며 말했다. 다른 일행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베리의 뒤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베리는 심호흡을 한 뒤 양 손을 문에 댔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문을 밀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은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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