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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일곱별

2010.10.17 10:05

乾天HaNeuL 조회 수:122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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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2 첫 번째 임무


 


  아침이 밝았다. 밝은 햇빛이 창문 안을 비추었다. 바로 밖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음…….”
  아무도 없는 서재처럼 보였지만, 사람의 신음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있는 책들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밤송이 같은 머리가 위로 툭 튀어나왔다. 기수였다.
  기수는 원래 입고 있던 학교 교복은 이미 벗어버린 지 오래였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건네 준 회색빛의 평범한 옷을 입은 상태였다.
  “벌써 아침인가?”
  잠을 늦게 잔 탓에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어제보다 더 심각하였다.
  “하암, 졸려라. 어제 너무 늦게 잤나 봐.”
  하품을 길게 하며 책들로 어지럽혀진 바닥을 내려 보았다. 서재의 한쪽에 침대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지만,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그냥 잠들었었다.
  기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한 권 집어 들더니, 아무 생각 없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책장에 꽂아 넣었다. 기수는 다른 책들도 책장 안에 도로 꽂아 넣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충 책장에 돌려놓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수는 정확하게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단지 책의 제목만 보고도, 해당되는 책의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 이걸로 다 집어넣었네. 그러면 이제 내가 안 읽은 책들은…….”
  마지막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기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선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로 향했는데, 그것들은 처음 보는 문자들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요정들의 언어나 드래곤들의 언어로 기록된 건가? 나중에 공부해 봐야겠다.”
  기수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누군가 서재의 문을 똑똑 두들겼다. 기수는 들어오라고 말했고,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베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베리는 여전히 잠에 취한 얼굴로, 사방팔방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을 손으로 억누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베리의 시선은 침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기수가 없는 것을 보고는 이리저리 눈길을 돌렸다.
  “벌써 일어났네.”
  “예. 전 뭐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서요.”
  “그런데 눈은 왜 아직도 빨개? 혹시 어제도 늦게 잔 거 아니야? 그러다가 몸 상한다. 가뜩이나 혼자서 이렇게 떨어져 사는 건데, 몸 관리라도 잘 해야지.”
  “하하하.”
  기수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응? 뭐가?”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 제 생명을 세 번이나 구해주셨잖아요. 고맙습니다, 베리타스 씨.”
  기수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베리는 깜짝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베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세 번이나 생명을 구해주다니? 나는 그런 귀찮은 짓을 한 기억이 없어.”
  “병사들한테서 구해주시고, 니나 씨한테서 구해주시고, 메모리아 씨한테서도 구해주셨잖아요.”
  기수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가며 말하였다.
  “특히 그제 밤에는 잠도 못 자가면서 계속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안 그랬으면 전 숨이 막혀서 죽었을 겁니다. 어제도 방으로 되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진짜 죽을 뻔했어요.”
  “아아, 그거.”
  베리는 지옥 같았던 그젯밤을 떠올렸다. 귀여운 것이라면 일단 끌어안고 보는 버릇을 지닌 니나는, 그젯밤 노숙을 하면서 기수의 머리를 계속 끌어안았었다. 덕분에 얼굴이 가슴 사이에 파묻혀 숨을 못 쉬게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베리가 니나의 품속에서 기수를 떼어냈었다. 덕분에 그 둘은 잠을 전혀 자지 못했었다.
  “생각만 해도 지옥이야. 아…, 그 괴물 같은 괴력. 도대체 팔목은 나보다 얇으면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그나마 자고 있어서 떼어낸 거지, 안 그랬으면 어림도 없었어.”
  “그래도 이제 괜찮으신 것 같아요. 충혈 된 것이 없어지셨으니.”
  “나야 괜찮지만, 너는 그대로잖아.”
  “간밤에 책을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수의 말에 베리는 잠이 확 깨었다. 베리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리며 기수에게 물었다.
  “책을 읽다니? 내가 알기로는 문자를 익히는 마법 따위는 없는 걸로 아는데.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그런 마법을 만들 사람도 없고. 도대체 무슨 수로 책을 읽었다는 거야?”
  “어제 메모리아 씨가 「초급 공통어」라는 책을 주셨는데, 그 책으로 배웠습니다.”
  “배워? 혹시 원래 알고 있던 문자와 비슷하기로 한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비슷한 문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체계가 많이 다른 것 같았어요. 문법이라든가 여러 가지 것들도 상당히 달랐고, 상황에 따라 읽는 법도 살짝 달랐고요. 그래도 배우는 데 그렇게 지장은 없었습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기수가 답하자, 베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기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머리를 긁적이며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에? 혹시 보실 책이라도?”
  “아니. 나는 여기서 더 볼 책 없어. 관심 있는 책들은 이미 다 읽었거든. 그냥 네가 서재에 지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밖에 나가던 참에 잠시 들려본 것뿐이야. 그리고 조심하라는 말도 해줘야할 것 같기도 하고.”
  베리가 하품을 길게 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벽을 툭툭 쳤다.
  “이 건너편에 사는 변태를 조심해. 게다가 너는 어제 그 문서에 지장까지 찍었잖아.”
  “아, 그, 그거요.”
  기수가 매우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벌써 안 거야? 변태 할망구가 무슨 내용인지 알려줬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인간이 그렇게 쉽게 알려줬을 리가 없을 텐데.”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 하긴. 뭐, 그 일은 길드 내에 있는 다른 녀석들도 다 겪고 있으니까. 어제 대충 몇 명 만나봤으니 알 테지. 길드 멤버들이 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여간 남자 여자 가리지 않는 변태에다가, 하는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 짓들뿐이니까. 물론 다른 녀석들도 그렇게 상식이 있다고는 말 못하지만.”
  베리의 말에 기수는 빙긋 웃었다.
  “아무튼 나는 간다. 모쪼록 변태 할망구를 조심해. 그러면 길드 생활은 조금 편해질 거야. 아니다. 네 경우에는 니나 녀석도 조심해야겠네. 녀석 앞에서는 귀여운 척은 절대 하지 마.”
  “예?”
  “…하긴 그런 게 마음대로 되면 꼬맹이 녀석도 그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겠지.”
  “예?”
  “혼잣말이야. 혼잣말.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하자면.”
  베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천천히 나가며 말하였다.
  “아침에 마스터의 방으로 들어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마. 그러면 십중팔구 후회하게 될 거야.”
  베리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매우 강한 어조로 강조해 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강렬한 경고도 담겨있는 것 같았다.
  기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리는 피씩 웃으며 문을 닫고 갔다. 아니 간 것 같았지만, 이내 다시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쭉 빼다가 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이야. 어제 까먹고 안 물어본 게 있거든.”
  “네? 뭔가요?”
  “너 몇 살이냐?”
  “나이요? 여기 나이로 따지자면 태어난 지 올해로 18년 째 되는 해니까, 열여덟이네요.”
  기수가 답하자 베리는 기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시선을 옮겨 기수의 다른 몸도 살펴보았고 전체적인 키도 눈으로 대충 살펴보았다. 이윽고 “키를 보니 그렇겠네.”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목을 문 밖으로 빼내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였다.
  “참고로 나는 올 해로 열넷이야.”
  베리는 문을 닫고 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기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문을 쳐다보다가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놀랍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지.”
  180이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청년처럼 생긴 사람이 실제로는 열넷 밖에 안 된 소년이었다. 그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성별 및 나이 구분도 제대로 안 되는 자신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담. 계약서에 그런 문구도 있었으니, 앞으로는 확실히 여자로 오해받게 생겼네. 하하.”
  기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 바로 아래에 있는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몸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젖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파란 하늘과 녹색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새들의 흥겨운 지저귐도 들렸다.
  기수는 잠시 말없이 바깥 광경을 쳐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 부위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안에 있는 물체를 어루만지며 쓸쓸한 표정을 짓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 잘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분들을 찾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눈을 천천히 잠기며 어머니와의 옛 추억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색은 그리 길게 가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번쩍 눈을 뜨며 눈을 쳐다보았다.
  “응?”
  문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그곳에 메이드 복을 입은 사람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마음에 급히 소녀에게 달려갔다. 메이드 차림의 소녀는 엉거주춤 앉더니 빨갛게 부어오른 코를 한 손으로 잡고 울기 시작했다.
  “앙, 아파요. 너무 아파요.”
  “저기…….”
  갈색의 트윈 테일 머리, 보름달 같은 얼굴,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 초승달 형태의 눈썹, 결정적으로 크고 동그란 녹색 눈망울을 지닌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눈물은 통통한 볼 살을 타고 양 옆으로 흘러내렸다. 기수는 어쩔지 몰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을 리가 없으시겠다.”
  그러다가 기수의 시선이 문득 소녀의 가슴으로 향했고,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기수는 급히 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초등학생 중고학년 정도의 체격에 비해 가슴의 발육이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도대체 왜 다 이래? 눈 둘 곳이 없잖아.’
  기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소녀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괜찮으신가요?”
  “힝……. 아파요. 응? 응?”
  소녀는 아픔을 참지 못하며 계속 눈물을 흘리다가, 그제야 자신의 앞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불행히도 소녀의 뒤통수가 기수의 턱을 강타했다.
  기수가 자신의 턱을 붙잡고 신음 소리를 냈다. 소녀도 아픔이 느껴지는 뒤통수를 양 손으로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굴렸다. 그러다가 허리를 90도로 숙여가며 사죄를 표현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죄송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고개도 숙이고 허리도 숙이며 사죄하는 것도 여러 번이나 계속 되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미안해하실 건 없습니다. 저 괜찮아요.”
  “정말요? 고마워요. 감사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이번에는 감사의 인사를 수차례 반복했다. 소녀의 거듭된 인사에 기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허리를 숙일 때마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다. 기수는 결국 시선을 소녀에게 고정시키지 못했고, 먼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눈을 다른 곳으로 슬쩍 돌렸다.
  “저기 그런데요. 혹시 여기가 어디인가요?”
  “예?”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기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제가 길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여기가 어딘지 혹시 아시나요?”
  “…….”
  부끄러웠는지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두 집게 손가락을 맞닥뜨렸다. 목소리 자체는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아름다웠고, 또 외모와 동일하게 귀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모기소리 마냥 매우 작았다.
  “여기 서재인데요. 혹시 어디를 찾으시는 겁니까?”
  “저기…, 그게 주인님의 방을 찾고 있었는데요. 이 지도를 건네 드려야 해서 어제부터 찾고 있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그게…….”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두루마리를 앞으로 내밀고는 울먹이며 말하였다. 또다시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기수는 당황하며 왼팔을 왼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여기 바로 옆이 마스터의 방이에요.”
  “정말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소녀는 또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수십 차례나 반복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치며 방 밖으로 나갔는데, 이번에도 문틀에 걸려 꽈당 뒤로 넘어졌다.
  ‘흰색…….’
  넘어지면서 치마가 나풀거렸다. 덕분에 기수는 본의 아니게 치마 속을 보고 말았다.
  “아야야. 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소녀는 아픈 엉덩이를 매만지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가 그리 미안한 건지 또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방향을 돌려 걸어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기수는 급히 소녀를 불러 세웠다. 소녀가 가고 있는 방향이 정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으로 왼쪽을 분명히 가리켜 주었는데, 소녀는 오른쪽으로 가려 했다.
  기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띠운 채, 소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녀는 당황한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린 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굉장한 길치잖아.’
  소녀 앞에 선 기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초 절정의 방향 음치였다. 저택 내에서도 길을 잃고, 오른쪽 왼쪽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상 최악의 길치였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
  기수는 손가락으로 바로 옆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기수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결국 기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소녀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고, 메모리아의 방으로 직접 안내해주었다.
  “여기라고요.”
  “감, 감사해요.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소녀는 또다시 고개를 연신 숙여댔다. 이제는 무덤덤해진 기수가 아무 말 없이 메모리아의 방문을 두들겼다. 메모리아는 이제야 일어났는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기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고, 소녀는 안으로 차분하게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도 여지없이 문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위험!”
  기수가 급히 소녀의 몸을 부축했다. 그녀를 일으켜 세워놓고 보니, 손에서 물컹거리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윽!”
  황급히 손을 뗐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소녀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덕분에 기수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열심히 소녀를 달래던 찰나, 갑자기 목에 뭔가가 휘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힝,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염둥이 아니양.”
  메모리아는 팔로 기수의 목을 휘감으면서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였다. 얇은 이불로 몸을 휘감은 채 기수의 등 뒤에 찰싹 들러붙었다. 기수는 뒤에서부터 나는 여인의 매혹적인 향기와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저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리아.”
  “응? 뭐양?”
  “…지금 속옷은 입었나요?”
  “아닝.”
  “…….”
  기수는 아침에 메모리아의 방에 들어가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베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저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는데요. 좀 놔주시겠습니까? 여기 이 분이 리아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해서 전 안내만 해준 거라서.”
  “응? 누구?”
  메모리아는 졸린 눈을 손으로 비비며 베리 앞에 서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큼직한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메모리아의 실눈이 번쩍 뜨였다.
  “루시앙! 왜 울고 있엉? 설마 또 길을 잃어서 혼자 울고 있었던 거양?”
  메모리아는 기수를 휘감고 있던 팔을 다 풀지도 않았다. 대신에 오른팔로 루시아를 잡아, 자신의 몸을 두르고 있는 이불 안으로 끌어 당겼다.
  “…….”
  기수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변했다. 이제는 잘 익은 사과처럼 되었다. 기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현 상황에서 도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왜 울고 있엉? 루시아, 누가 괴롭힌 거야. 말해. 그러면 내가 이 주먹으로 꿀밤을 먹여줄 테니까.”
  “저기 그게…….”
  루시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베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방금 전의 일은 사고라는 것을 루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응? 이 아이가 왜?”
  “저기, 그, 그것이요.”
  루시아는 말을 더듬었다.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의 실수 정도는 넘어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뭐야. 혹시 기수가 너한테 야한 짓이라도 한 거양? 그런 거양?”
  “예? 그, 그, 그런 거 아녜요!”
  말을 더듬는 바람에 제대로 된 변명이 되지 못했다. 메모리아는 기수를 엉큼하다는 듯 바라보며,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뭐양. 너도 예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거양? 그래도 남자는 여자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거양. 나는 만져도 되지만.”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건 고의도 아니었고 그냥 단순한 사고……!”
  메모리아의 말에 발끈한 기수는 눈을 번쩍 뜨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단순한 사고이며, 자신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입이 떡 벌어진 상태로 굳어버렸는데, 사고회로가 완전히 정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수가 굳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뒤로 돌아서는 여파로 메모리아의 몸에 감겨있던 얇은 이불이 흘러내려 그녀의 상반신이 겉으로 들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모리아의 손의 위치가 루시아의 가슴에 향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그냥 향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다는 듯 주무르고 있었다.
  “응? 이 아이 왜 이랭?”
  메모리아는 손을 펴서 기수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기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전히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루시앙. 얘 왜 이럴까?”
  “저, 저는 몰라요. 그리고 이 지도만 드리려고 왔을 뿐이니까,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 그, 그럼 저는 일하러 가볼게요! 죄송해요!”
  루시아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메모리아의 손에 넘겨준 다음에 도망가듯 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그녀의 뺨은 홍조를 띠었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힝, 벌써 가버렸넹.”
  메모리아는 고개를 빼들고는 다람쥐처럼 날쌔게 도망가는 루시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다가 발이 엉키면서 여러 번 넘어졌지만, 루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쏜살 같이 가버렸다.
  “음……. 벌써 지도가 완성 되었구낭. 기특하기도 해라.”
  손에 들고 있던 기다란 두루마리를 양쪽으로 펼쳤다. 다 펼쳐놓고 보니 양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넓은 지도였다.
  메모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지도를 소파 가운데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시선은 탁자 위 지도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대충 벗어두었던 속옷을 챙겨 입었고, 그 위로 마침내 옷을 더 입었다. 입으나마나 속살이 거의 다 들어나는 탱크 탑과 초미니 스커트였지만, 어쨌든 더 이상 속옷 차림은 아니었다.
  “내 귀염둥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닝?”
  여전히 눈을 지도에 고정시킨 상태로 메모리아가 기수에게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높은 음이었다.
  “아,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라?”
  마침내 정신이 되돌아온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좌우를 살펴보다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냈다.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코가 시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기수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면서 메모리아를 쳐다보았는데, 그녀가 뭔가에 열중하는 모습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수는 잠시 제 자리에 말없이 서있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닝?”
  “예? 아, 예.”
  속으로는 ‘이게 다 당신 탓이잖습니까.’라고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매우 차분한 어조로 답하였다.
  “그러면 위층에 올라가서 베리베리와 니나를 불러주겠닝?”
  “베리타스 씨와 니나 씨요. 알겠습니다.”
  기수가 천천히 뒤돌아서는 사이 메모리아가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쯤이면 아마 재미난 장면을 볼 수 있을 거야.”
  “예?”
  메모리아의 말에 기수가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다시 지도 보는 것에 열중하였다.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저택에서 일하는 한 하녀의 도움으로 저택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저택 내부만 도는 데에도 근 한 시간 가까이 걸렸고, 저택 바깥의 정원을 살펴보는 데에는 몇 시간이 더 걸렸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저택 내에서 일하는 여러 사용인들을 볼 수 있었고, 또한 다른 길드 멤버들도 만났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여기서 왼쪽으로 간 다음에 다시 오른쪽으로 가야지.”
  어떤 사람은 심각한 방향 음치라서 저택 내부에서도 길을 잃었지만, 비상한 기억 능력을 지닌 기수는 아무 문제없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냈다.
  “안녕하세요, 기수.”
  “일찍 일어나셨네요.”
  지나가면서 다른 하녀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아침 일찍 부지런히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기수는 가볍게 미소를 얼굴에 띠운 채 그들에게 목례를 하며 갈 길을 계속 갔다.
  기수는 오른 손으로 계단의 난간을 잡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위층에서부터 뭔가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 괴력녀야!”
  많이 들어본 음성이었다. 이제 막 변성기가 지나서 아직은 조금 중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저음 영역의 중후한 목소리였다. 기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는데, 남자의 괴성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으악! 이거 놓으라고, 괴력녀야! 나를 죽일 셈이야! 이 악마! 마녀! 괴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를 죽이다니. 죽인다면 검을 사용하지, 이렇게 팔을 붙잡고 있겠어?”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의 음성도 들렸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매우 차가운 어조였다.
  기수는 마지막 남은 계단을 올라가서 목을 앞으로 쭉 뺐다. 예상한 대로 그 음성들의 주인공은 베리와 니나였는데, 차마 눈 뜨고는 지켜보기 힘든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니나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지만 팬티바람이었다. 물론 가슴에는 흰색 압박 붕대를 칭칭 감아 놓아서 중요한 부위는 다 가려놓은 상태이기는 했다. 다만 문제는 뭇 남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 마디로 메모리아처럼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거 놔!”
  베리의 찢어지는 음성이 또다시 들렸다. 현재 베리는 니나에게 양손을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는데, 죽을힘을 다해 니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었다.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로 옆에 있는 메이드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예? 아, 어제 새로 오신 기수라는 분이시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지금 베리타스 씨와 니나 씨, 뭐하고 있는 중인지, 혹시 아십니까?”
  “아 저거요. 저 분들이 돌아오면 늘 일어나는 행사 같은 거예요.”
  하녀의 말에 기수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행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베리가 끌려가는 모양새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꼭 죽으러 가는 사람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요.”
  “음……. 베리타스 입장에서는 비슷할 거예요. 지금 목욕하러 가는 중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기수는 또다시 하녀에게 질문을 했고, 하녀는 빙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베리타스는 물을 무서워해요. 덕분에 잘 씻지 않으시죠. 그래서 저택에 돌아올 때면 매번 니나가 저렇게 억지로 목욕을 시키는 거랍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도망치시다가 잡히셨어요. 그것도 문 바로 앞에서요.”
  재미있다는 말투로 술술 설명해주었다. 기수는 그제야 이해가 갔는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베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베리는 소리를 질러대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야! 네 녀석! 오늘도 나를 이렇게 버리는 거냐?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리고 어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네 녀석 그 눈 안 깔아? 너도 그 눈 확 파버린다!”
  팔다리를 아동 바동거리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베리의 모습은 영락없이 철부지였다.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를 지녔고, 얼굴마저도 잘 생긴 청년 같아서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베리는 여전히 열 넷 밖에 안 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모든 저항이 수포로 돌아가고, 베리는 결국 욕탕 안으로 던져졌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고, 잠시 후 물에 빠진 생쥐 꼴의 베리가 목욕탕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뒤로 니나가 손을 탁탁 치며 밖으로 나왔다.
  “응? 이게 누구야. 기수잖아.”
  “아? 예.”
  마침내 니나가 기수를 발견했다. 그녀는 재빨리 기수 앞으로 걸어왔고, 귀여운 물건을 열심히 관상하기 시작했다. 반면 기수는 눈 돌 곳이 마땅치 않아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옆에 서있는 하녀는 킥킥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타월을 니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니나는 긴 타월을 받아 들고는 몸에다가 대충 둘렀다. 하녀의 손에 들린 수건을 받아 들고는 젖은 머리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다 올라오고.”
  “메모리아 씨가 불러서요.”
  “마스터가? 벌써 다음 임무가 정해진 건가.”
  니나는 머리를 다 말렸는지 수건을 하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예.”
  니나는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베리의 한쪽 팔을 붙잡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쾅 하며 닫혔고, 그 뒤로 여러 비명 소리가 들린 끝에 처참한 몰골이 된 베리가 문을 스르르 열고 나왔다.
  곧 이어 니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늘 입고 다니는 옷으로 갈아입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수 앞에 섰다.
  “벌써 검을 챙기신 건가요?”
  “응.”
  기수는 니나의 등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슬쩍 보며 말하였다. 시선을 돌려 베리의 허리춤을 보니 그의 허리에도 검이 있었다.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메모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메모리아는 턱을 괸 채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만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기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구경은 했닝?”
  “…….”
  기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소파로 걸어가 메모리아 반편에 앉았다. 기수의 양 옆으로 니나와 베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베리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물었다.
  “루시아가 지도를 완성했거든. 그래서 다음 임무가 정해진 거지.”
  “다음 임무? 어딘데?”
  “이번에도 국경 지대야. 하일린 지역의 변경 마을인데, 이름은 펜도르야. 아주 귀한 차나무들이 자라서 변경에 있는 마을치고는 꽤 커.”
  “거기에도 유적지가 있어?”
  베리는 귀를 후비며 물었고, 메모리아는 씽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펜도르 마을 근처에는 드래곤 레어가 있어. 바로 여기.”
  메모리아가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높은 산악 지대 가운데에 동굴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거기가 아마도 드래곤 레어인 것 같았다.
  “…그럼 보물이 있겠군.”
  순간 베리의 눈이 확 뜨였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희망에 가득 찬 소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이번 임무는 하나가 아니라 둘.”
  “둘? 또 뭐가 있는데?”
  “훗, 그건 하일린 영성에 도착해보면 알 거야. 아, 그리고 제논!”
  메모리아가 고개를 돌려 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수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메모리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자신을 ‘제논’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저 부르신 건가요?”
  “그래, 오늘부터 제논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예? 언제요?”
  기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좌우에 앉아 있는 니나와 베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본 뒤, 메모리아의 얼굴에 시선을 옮겼다. 그들 모두 메모리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예.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는데요.”
  “아하하, 미안.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내가 기억력이 가물가물한 가봐. 아직 오십도 안 넘었는데 어떡하지.”
  메모리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아무튼 오늘부터 너는 제논이야. 저택 내의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알려줄 거고.”
  “무슨 의미이신지?”
  기수가 여전히 이해가 안 된 눈길로 메모리아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너무 특이하잖아. 그러니까 의심을 안 사게 제논이라고 하라는 거징.”
  “아, 예.”
  메모리아의 친절한 설명에 기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번 임무에 따라가.”
  “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베리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아직 이 녀석은 싸우는 법도 모르잖아.”
  “그걸 네가 말하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메모리아가 키득거리며 말하자, 베리는 꼬리를 내리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러면 이 녀석한테도 뭔가 주겠다는 거여, 뭐여.”
  “음, 지금은 아무 것도 빌려줄 수가 없어. 여기에 없거든.”
  “하아……, 그러면 어쩌라는 거야? 적어도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방어 무기 정도는.”
  베리가 말하는 도중에 메모리아는 탁자 위로 단검 하나를 올려놓았다. 별다른 세공도 없고, 아무런 장치도 없는 평범한 단검이었다.
  “어차피 가는 길만 좀 위험할 뿐이양. 레어에 들어가면 그렇게까지는 위험하지 않을 걸? 다만 레어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 문제지만. 호호호.”
  쾌활하게 웃는 메모리아가 영 미덥지 않았다. 베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옆에 앉아 있는 기수와 니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니나에게 물었다.
  “니나는 어떻게 생각해?”
  “짐이 하나 더 늘어나도 나는 상관없어.”
  “…….”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 아니 제논 너는?”
  “응? 아 저요. 뭐라고 할까,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기수―이제 제논이라 불리게 된 그는 망설이며 대답하였다. 자신 앞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리며 한참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메모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씩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고민할 거 없어. 어차피 이건 너한테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내가 알기로 펜도르에 있는 드래곤 레어는 종족 전쟁 전의 것으로 몇 천 년도 더 된 곳이니까. 잘 하면 차원의 문에 관한 것들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여기서 계속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그냥 바람을 쐬러 간다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갔다 와.”
  “그렇다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논의 대답을 들은 메모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제논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하였다.
  “아무래도 갑옷도 필요하겠지? 적어도 몸을 보호할 만한 것이 있어야 좋겠네.”
  “아니요. 저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제논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메모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어 질문했다.
  “왜? 적어도 몸을 지키기 위한 거잖아.”
  “그래. 나도 귀찮지만 갑옷은 입고 다닌다고. 금속으로 된 것이 무겁다면 가죽으로 된 거라도 입어 두는 것이 좋아. 대개 여행자들은 그렇게 입고 다녀.”
  옆에 있던 베리가 거들었다.
  “아, 저는 그냥 편한 옷이 좋아요. 갑옷 말고 편한 옷은 없나요?”
  “편한 옷? 그런 거야 저택 내에 많이 있…….”
  “잠깐! 이 녀석 입을 옷은 내가 챙길 테니까, 마스터는 이제 그만 잠이나 퍼질러 자.”
  메모리아가 말하던 도중 베리가 중간에 잘라 들어왔다. 베리는 메모리아의 얼굴을 향해 팔을 쭉 뻗으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시늉까지 했다.
  “왜? 내가 옷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옷은 전부 이상한 옷들뿐이잖아! 그런 옷을 입고 이 녀석이 밖을 돌아다니면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더 받겠다. 그러니까 이 녀석 의복은 내가 챙겨줄 테니, 너는 신경 끄고 잠이나 더 자.”
  “힝…, 내가 챙겨주고 싶었는데.”
  못내 아쉬웠는지 메모리아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그리고 가녀린 눈길로 제논을 응시했는데, 제논은 메모리아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무슨 옷일지 대충 예상이 되었고, 게다가 남자가 입을 법한 옷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 가자.”
  베리가 벌떡 일어서자, 니나와 제논도 따라 일어났다. 베리와 니나는 성큼성큼 방 밖으로 나가버렸고, 제논은 나가기 전에 메모리아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응, 조심행.”
  메모리아는 제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제논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아무쪼록 조심해…….”
  혼자 남은 메모리아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지막하게, 조금은 슬픈 것 같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메모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용의 푸른 빛 상의와 하의를 입은 제논의 모습도 보였다. 아주 편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다만 더운 여름에 긴 팔을 입고 걷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훗…….”
  메모리아는 제논이 긴 팔을 입은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가서, 실소를 터뜨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쾅 하며 열리는 소리가 났다. 메모리아는 고개를 돌려서 누가 들어왔는지 살펴보았다.
  “어머, 루시아!”
  바닥에 엎어져 있는 루시아의 모습에 메모리아는 급히 달려갔다.
  “또 넘어졌엉? 자, 착하지. 어서 일어나렴.”
  “힝, 아파요.”
  “그런데 무슨 일이야?”
  메모리아는 루시아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루시아는 잠시 훌쩍거리다가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걱정스런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리며 메모리아에게 물었다.
  “저기 베리타스와 니나는 어디 있어요?”
  “응? 방금 갔는데. 왜?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는 거양?”
  “그게…….”
  루시아의 설명을 들은 메모리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급히 창문가로 뛰어갔지만, 이미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어떡하죠?”
  “괜찮을 거야.”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메모리아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함인지 씽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시선을 다시 창가로 돌리는 순간, 메모리아의 표정은 더욱 어둡게 변했다.


 
  케이롄의 시골 마을에 위치한 지하 저택. 그곳은 창문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했다. 습기도 자주 차는 매우 음습한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에는 매우 부적당한 곳이었다.
  벽에 설치된 횃불들이 지하 저택을 은은하게 비췄다. 저택을 수비하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자들이 무기와 횃불을 들고 복도를 거닐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방에서는 세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방은 횃불이 단 하나도 없어서 서로의 위치만 간신히 파악이 될 뿐이었다. 키가 매우 큰 한 사람은 벽에 기대고 있었고, 평균 키 정도의 사람은 방의 중앙에 서있었다. 마지막으로 키가 조금 작아 보이는 사람은 그들 반대편에 서있었다.
  “그래서 뭔 말이야.”
  벽에 기댄 채 서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마치 쇳소리처럼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였고, 매우 거친 어조였다.
  “그 말 그대로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고작 납치 따위나 하라는 말이잖아. 그런 귀찮은 짓은 저 인간한테나 시켜.”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남자가 말했다. 마치 고함지르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방 밖에서 순찰을 돌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언성을 낮추어라.”
  키가 조금 작은 남자가 매우 침착한 어조로 말하였다.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말투였지만, 침착하면서도 낮게 가라앉아 있는 어조였다. 조금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한 가지 흠이었다.
  “어이. 철가면. 네 놈도 뭐라고 한 마디 해봐.”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방 중앙에 서있는 사람이 조용하게 중얼거리듯 답하였다. 왠지 남자와 여자의 음성 중첩된 것 같은 희한한 목소리였다.
  “흥, 짜증나는 녀석.”
  남자는 바닥에 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하다. 너희 둘이 힘을 합쳐서 처리해라.”
  “도대체 그 인간이 뭐하는 놈인데?”
  “그 소년은 키시스다.”
  “뭐? 키시스?”
  벽에서 등을 떼며 그가 반문했다. 어둠 속이라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잔뜩 떠오른 상태였다.
  “이틀 전 국경에서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희한한 생김새에 특이한 복장의 소년이 별안간 나타났기 때문에 추격을 했으나, 파탈리아가 개입하는 바람에 놓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 소년의 짐은 우리가 확보해 조사할 수 있었다. 낯선 의복들과 대륙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문자로 된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키가 조금 작은 남자가 매우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였다. 거친 말투의 남자는 도로 벽에 등을 기대었고, 이번에는 뒤통수까지 벽에 기댔다.
  “높은 분들이 그 인간이 필요하다, 이 말이로구먼. 크크크, 키시스. 그러면 조금 재미가 있겠군. 아아, 그래. 한 가지 물어봐야할 것이 있지. 만약 그 놈이 반항을 하면 어떻게 하나?”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면…….”
  “존재라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존재라면 뭐 어쩌라는 거야?”
  “만약 그 자가 케이롄에 방해가 되는 자라면.”
  그 남자는 벽에 주먹을 내려치며 신경질적으로 묻자, 반대편의 남자가 천천히 입을 떼며 말을 이어나갔다.
  “죽여도 상관없다.”
  “크크크, 그래야지. 그래야 재미가 있지!”
  키가 큰 남자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것인지 벽을 주먹으로 연신 두들겨가며 웃고 있었다.
  “그 자는 지금 파탈리아의 개들과 함께 하일린의 변경 마을인 펜도르로 향했다. 목적지는 펜도르에 있는 드래곤 레어다.”
  “파탈리아의 개들과? 그 망할 그랑비르 녀석들과 함께 라고? 크하하하! 이거 참 유쾌하군. 재미있겠어. 그 망할 것들의 얼굴을 찢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는데. 킥킥킥.”
  “부하들을 데리고 가라.”
  그 말에 키가 큰 남자는 피씩 실소를 터뜨렸다.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펜도르에는 전장의 영웅도 있다. 부상을 입고 은퇴했다고는 하나 얕볼 수 없는 자다.”
  “…전장의 영웅? 크하하하! 이거 정말 더더욱 재미있게 되었군. 그래. 전장의 영웅 정도를 상대하려면 부하 녀석들도 좀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군. 예우 차원에서라도 말이야. 큭큭.”
  그 자는 전율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며, 금방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소년이다. 피부는 갈색, 머리와 눈은 까맣다. 머리칼은 매우 짧다. 가능한 생포해서 데리고 와야 한다.”
  “알았어. 이런 건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은데. 아주 즐겁게 해주지. 아, 다만, 그 자식의 팔다리 한두 개 없어져도 내 책임 아니니까. 나중에 뭐라고 하지나 마.”
  남자는 크게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 중앙에 서있던 자도 천천히 뒤로 돌아 문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키가 조금 작은 남자가 무덤덤한 어조의 말로 그 자를 불러 세웠다.
  “푸파. 키시스를 확보하면, 너는 드래곤 레어를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예.”
  남자의 말에 그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대답하였다. 그 자는 방을 나선 뒤 천천히 문을 닫았다.



  하일린 영지, 그곳은 파탈리아 최북단에 위치한 여러 영지들 중 하나로, 케이롄과의 접경지대였다. 언제나 전쟁의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몇 개월 전에 끝난 전쟁 후 잠시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포탈을 타고 텔레포트를 하여 하일린 영성에 도착한 베리 일행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방팔방으로 무기를 든 병사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띠였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도에서 오셨나 봅니다.”
  포탈의 관리인이 종이와 펜을 내밀자, 베리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네. 뭔 일이라도 있나?”
  “아직 이야기를 못 들었나 보십니다.”
  “무슨 소문?”
  베리가 묻자 관리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지금 여긴 완전 전쟁 분위기입니다. 몬스터가 갑자기 떼거지로 나타났거든요. 워낙 수가 많아서 영지의 변경 마을들은 모조리 고립되었어요. 전멸한 마을도 여럿 있고요. 그래서 바깥에서 살던 농노들이나 자유농민들이 모두 영성 안으로 들어오려고 아우성이고, 이래저래 문제가 많습니다.”
  “…망할 마스터 자식.”
  메모리아가 왜 임무가 하나가 아닌 둘이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된 베리는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이틀 전부터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쪽만 이런 것이 아니라 변경 지대의 모든 영지들이 다 이렇습니다. 듣기로는 케이롄도 몬스터의 출몰이 급격하게 늘었다고 하더군요.”
  “펜도르로 향하는 길목도 역시 막혔나?”
  “거긴 한 달 째 고립되었습니다.”
  관리인의 말에 베리의 눈이 커졌다. 베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관리인에게 재차 물었다.
  “한 달? 무슨 말이야? 몬스터 출몰은 이틀 전부터라고 했잖아.”
  “유일한 통로가 고블린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수가 워낙 많아서 뚫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는지, 그냥 포기를 해버리더군요.”
  “영주 녀석이 아주 겁이 많네.”
  베리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자, 관리인은 화들짝 놀랐다. 관리인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이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들 쉬쉬하고 있으니 너무 그렇게 말하지는 마십시오. 잘못하다가 끌려가서 죽습니다.”
  “우리를 끌고 갔다가는 오히려 손해나는 장사일 거야.”
  “예?”
  어리둥절한 표정의 관리인을 뒤에 남겨둔 채, 베리는 다른 일행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니나와 제논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봅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마스터가 우리 엿 먹였어.”
  “예?”
  제논이 깜짝 놀라며 묻자, 베리는 두건으로 감싼 머리를 긁적이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몬스터로 완전 길이 막혔나 보더라고.”
  “펜도르는?”
  “거기는 고블린한테 점령당했나 봐. 영주가 포기할 정도니까 수는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니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오십 아래면 해볼 만한데.”
  “…혼자서 오십 마리를 상대할 수 있는 네가 괴물이다. 원래 병사 한 명당 열 마리 정도가 한계잖아. 거리가 벌어져 있으면 더 힘들고.”
  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였다.
  “베리. 너 뭔가 믿는 거라도 있어?”
  “믿는 거라면 당연히 있지. 안 그랬으면 내가 여기까지 애당초 오지도 않았어. 임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고 말한 그 시점부터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맴돌았거든. 그래도 하일린이니까 온 거라고.”
  베리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제논과 니나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일단 포탈 타워를 나선 다음 길거리를 활보했다. 지나가면서 수많은 병사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번화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병사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간혹 경비병들이 창을 든 채 이리저리 순찰을 도는 것만이 보였다.
  “여기는 왜 오신 건가요? 순 상점만 있는데요.”
  “이 상점들 중 하나에 볼 일이 있어서.”
  좌우로 수많은 상점들이 있는 번화한 길이었다. 상점에서 나오는 사람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모두 화려한 옷차림의 부인들인 것으로 봐서는, 이곳은 고위층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만을 상대하는 곳 같았다.
  제논은 신기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원래 살던 곳에서도 번화한 상점가가 있었지만, 지금 걷고 있는 거리는 생전 처음 보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각 상점들을 살펴보았고, 또한 길거리를 걷고 있는 우아한 부인들도 보았다. 마차도 여러 대씩 지나다니고 있었다.
  “어서 저리 꺼지지 못해!”
  날카로운 음성이 제논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앞서 나가던 베리와 니나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가던 길을 멈추었다.
  제논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마차였다. 마부로 보이는 사람에 마차에서 내려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는데, 상대는 허름한 옷차림의 여인과 어린 아이였다.
  “이것들이 감히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함부로 오는 것이냐? 순 비렁뱅이들이 남작님의 마차에 손을 대?”
  또다시 마부가 발길질을 했다. 제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급히 달려가 그 사이에 양팔을 벌리며 끼어들었다.
  “그만두십시오. 아직 어린 아이와 그 어머니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야 이건 또. 네 놈은 또 뭔데 함부로 끼어들고 난리야? 네 녀석이 지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어허, 그러고 보니 네 놈 생김새를 보아하니 야만족인가 보구나. 허허, 이래서 야만족들은 안 되는 거야. 순 남의 영토로 기어 들어와서 구걸이나 하고, 더럽게 시리. 에잇 퉤.”
  마부는 땅바닥에 침을 뱉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만족이라고 하셨습니까?”
  “흥, 네 녀석 같은 야만족들이 파탈리아에 넘어 오니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거다. 이딴 놈들을 도대체 왜 기어들어오게 내버려두는지. 에잉,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 에잇, 퉤퉤!”
  마부가 또다시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제논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때 마부가 모시는 남작이라는 자가 거들먹거리며 상점에서 나왔다.
  남작이라는 자는 화려한 옷을 입기는 했으나, 배가 불룩 튀어나온 대머리였다. 아주 볼썽사납게 생긴 추남이었다. 그 자는 자신의 마차 근처에서 뭔가 일이 터진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 채 마부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니 글쎄 이 놈들이 마차에 손을 대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혼내주던 차였는데, 웬 녀석이 갑자기 난입을 했습니다.”
  “뭐야 이것들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매우 불쾌한 음성의 사내였다. 그 자는 살 때문에 움푹 꺼진 눈으로 제논과 그 뒤에 있는 모자를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혀를 쳤다.
  “쯧쯧, 이런 비렁뱅이 같은 놈들. 전부 다 야만족이구만.”
  남작은 보는 것도 역겹다고 느꼈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때 제논의 뒤에 쓰러져 있던 여인이 남작에게 기어가서 그 자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잡았다.
  “나리, 제발 한 푼만 주십시오. 제 아들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리!”
  “아니 이 년이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남작은 주저 없이 발을 휘둘렀다. 그 자의 발은 정확하게 여인의 얼굴을 강타했고, 여인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게다가 남작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여인을 두들겨 패려고 하였다.
  “무슨 짓입니까!”
  제논이 급히 손을 뻗어 남작의 지팡이를 막아냈다.
  “아니 이 놈은 또 뭐야? 네 놈도 오늘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카스틴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이 놈을 끌어내 힘껏 두들겨 패라. 저 년은 당장 목이라도 베 버리고!”
  “예, 남작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마부는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순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베리가 마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아니 이 놈들은 또 뭐야?”
  남작과 마부가 갑자기 나타난 베리와 니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베리는 냉소적인 미소를 얼굴 가득 띠운 채 서있었고, 니나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 표정이었다.
  “아아, 이것 참. 잠시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우리 일행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말이야. 그래도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냥 내버려두고 가기도 그렇고. 뭐 돼지 같은 놈과 개 같은 놈을 상대하기는 너무도 싫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
  베리는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다 들렸다. 덕분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 놈이 지금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아니면 더위를 먹고 실성을 한 것이더냐!”
  남작이 화가 잔뜩 나서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는 바람에 얼굴을 붉게 달아올랐다.
  “이야, 이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정말 듣기 거북하네. 완전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생겼어. 아이고, 내 귀야.”
  베리는 자신의 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뭐, 뭐라? 이 놈이 정말 죽고 싶은 거로구나.”
  “너야말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물어.”
  남작이 한껏 소리를 내지르자, 베리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의 붉은 눈은 여느 때보다도 더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치 맹수의 눈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그 눈을 직접 응시한 남작은 다리에 힘이 갑자기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나, 남작님!”
  마부가 깜짝 놀라며 남작의 몸을 부축했다.
  “네, 네, 네 놈이!”
  남작은 너무 화가 나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베리는 천천히 쭈그려 앉으면서 냉소적인 어조로 말하였다.
  “괜히 다치고 싶지 않으면 집에 가서 밥이나 처먹고 뒹굴기나 해.”
  “뭐, 뭐야?”
  베리는 발광하는 남작의 꼴불견 같은 모습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다시 천천히 일어서서 제논에게로 다가갔다.
  “너도 참 일거리를 늘리는 인간이다.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보라고. 구경만 했지 아무도 도와주지도 않았잖아. 너도 꽤 피곤한 성격이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냥 보고 지나갈 순 없었어요.”
  제논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답하였다. 베리는 피씩 웃으면서 다시 쭈그려 앉았다. 여전히 땅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여인을 향해 동정심 가득 어린 표정을 띠우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아주머니, 이거 받으세요.”
  베리는 돈 주머니에서 금화 한 개를 꺼내들어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여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손에 들린 금화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인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동안, 니나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 들고서 여인의 품에 넘겨주었다. 여인은 아이를 품에 꼭 안고는 계속 고맙다고 인사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 돼지 같은 놈의 성격 상 가병이라도 이끌고 나타날 분위기거든요. 그리고 이곳은 이민족들이 살기에는 별로 좋은 환경도 못 되니까, 길이 뚫리는 대로 왕족들의 영토로 넘어오시는 것이 낫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할지.”
  “이제 그만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째 곧 싸움이 날 것 같으니까요.”
  베리는 빙긋 웃으며 말하였다. 등 뒤로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베리는 급히 여인과 아이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자, 베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뒤돌아서 보니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 여우 한 마리가 그려진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남작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에도 새겨진 문양이었다.
  “남작 각하. 괜찮으십니까?”
  가병들 중의 우두머리가 남작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한 남작은 씩씩거리며 불쾌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저 놈들을 끌어내 죽기 전까지 패버린 다음 목을 베어버려라. 그리고 방금 도망간 연놈들도 찾아내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 내 그래야 이 분이 풀릴 것 같다.”
  “예, 알겠습니다, 각하.”
  그 자는 남작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리고는 일사분란하게 병사들에게 지시를 했고, 일부 병사들이 급히 사라진 여인을 쫓으려고 하였다. 그때 니나가 검을 뽑아 들어서 그들을 제지하였다.
  “…감히 누구 안전에서 검을 뽑아 드는 것이더냐.”
  “돼지 남작 앞에서지.”
  “…….”
  니나가 차갑게 웃으며 답하자, 가병들의 대장은 말문을 닫았다. 눈짓으로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창을 든 병사 여럿이 니나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은 제논과 베리를 에워쌌다.
  “저기 베리타스 씨.”
  “호칭은 빼고 베리라고 불러.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그리고 왜 늘 존댓말이야?”
  “아니 그런 건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아무튼 베리. 상황이 좀 많이 안 좋아진 것 같은데요.”
  “좀 많이? 너도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이구나. 이걸 봐라. 도대체 상황이 좀 많이 안 좋아진 거야? 완전 날 샌 거지.”
  베리가 자신들을 에워싼 병사들의 수를 세며 말하였다.
  “우리 쪽에 열둘. 니나 쪽에 여섯. 대장이 하나. 열아홉 명이군.”
  “경비대나 수비대가 와야지 않을까요?”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 놈들은 오지도 않을 거야. 남작이나 백작의 기세에 눌려 지내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 와서 뭐를 해? 저기를 보라고. 당장이라도 뛰어와 상황을 정리해야할 경비병 놈들이 눈치나 슬슬 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잖아.”
  베리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제논은 눈을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무장한 경비병 둘이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구경을 하던 무리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행여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눈초리였다. 상점가의 주인들도 자신의 가게 안에 콕 틀어박힌 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어느 사회나 다 이렇군요.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 짓도 못하고, 다들 자기 안위만 살피네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사이,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논이 살짝 시선을 돌려 니나가 있는 곳을 보니, 그녀가 병사들과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 그쪽은 안 봐도 돼. 문제는 우리 쪽이라고. 참고로 말하자면 말이야. 영성 내에서 공격 계통의 마법과 고대의 유물 사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거든. 그리고 나는 말이지!”
  병사 하나가 창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자 베리가 급히 검을 뽑아 들어서 막아냈다. 하지만 엉거주춤하며 결국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싸움을 못하거든.”
  “…저기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제논이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찐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베리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뭔데?”
  “여기서 싸우면 무슨 벌을 받게 되나요?”
  “세력권이 다른 귀족들 간의 다툼은 왕도 어떻게 할 수 없어. 한 마디로 공격 계열의 마법과 고대의 유물만 사용하지 않으면 장땡이야.”
  베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답하였다. 또 다른 병사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돌진을 했는데, 베리는 매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저희는 귀족의 가병이 아니잖아요.”
  “마스터가 귀족이잖아. 우리는 곧 귀족의 가병과 동급이라는 거지.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란디스 비르에 속한 우리가 저 놈들보다는 몇 계급이나 더 높은 거지만.”
  “그러면 싸워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거군요.”
  “야! 자꾸 말 시키지 마! 지금 피하는 것도 벅차…….”
  베리가 고개를 돌려 제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제논의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어서, 왠지 베리 자신만이 공격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제논 역시도 병사들의 사정없는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하나 거칠어지지 않았고, 아주 평상시처럼 대화를 했었던 것이었다.
  병사 하나가 창을 휘둘렀다. 제논의 허리가 뒤로 90도 가까이 꺾였고, 창이 제논의 코 바로 위를 지나갔다. 바로 그 상태에서 양 팔을 뒤로 뻗었고, 곧바로 손바닥이 땅에 닿으며 텀블링을 했다. 상당히 강한 힘으로 바닥을 밀어냈는지, 몸이 잠시 위로 붕 떴는데, 바로 그곳으로 창 세 개 정도가 날아왔다.
  “뭐야… 저 녀석.”
  베리는 우두커니 서서 제논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베리를 공격하던 다른 병사들도 넋이 나간 채 구경만 했다.
  “저건 완전…….”
  유연한 몸놀림, 부드러운 움직임, 적절한 신체의 활용.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베리는 제논의 움직임을 보고 메모리아를 연상시켰다. 비정상적인 유연성을 지닌 메모리아의 육탄전도 현재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메모리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녀석 꽤 하잖아. 저건 진짜배기네.”
  베리는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왼쪽에 다섯, 오른쪽에 셋.’
  제논은 지금 여덟 명의 병사들과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네 명은 베리 옆에서 넋을 잃은 채 구경만 하는 중이었고, 또 다른 여섯 명은 니나에게 실컷 깨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 일단 내 책임이니까, 확실히 결말은 내야할 거야. 저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리저리 피하면서 병사들의 얼굴 모두를 확인했다. 제논은 병사들의 눈에서 전의를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싸우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쁜 상관을 만나 고생을 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제논은 여러 번 망설이며 피하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쉬고 계세요.”
  제논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땅에 양 발이 모두 닿는 순간 양쪽에서 두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제논은 빙그르 돌면서 그들의 칼과 창을 피했고, 칼을 든 병사의 목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별로 크지도 않고 연약해 보이는 주먹이었지만, 제논의 공격을 제대로 얻어맞은 병사는 목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제논은 쓰러진 병사의 등을 밟고 위로 뛰어 올라 오른발을 강하게 휘둘러, 자신에게 달려오는 다른 병사의 턱을 쳤다. 지면에 양 발이 닫자 빙그르 돌면서 옆에 있던 자의 오금을 발로 내려찍었고, 동시에 손날로 다른 자의 후두부를 강하게 내려쳤다.
  “뭐, 뭐야?”
  “다들 조심하게!”
  무기도 들지 않은 사람한테 순식간에 네 명이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자도 있었고, 고통스러워하며 땅을 뒹구는 자도 있었다. 이제 남은 자는 네 명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병사들 중 하나가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제논을 향해 돌진했다. 너무 막무가내 돌진에 피하기도 매우 쉬웠다. 제논은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상대의 오른팔을 붙잡았고, 그대로 관절을 꺾어버렸다.
  “크악!”
  그자는 고통스러워하며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빠져버린 오른팔을 왼손으로 붙잡았다.
  “뭐, 뭐냐 도대체 저것들은 뭐냔 말이다!”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구경을 하던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번쩍 들어 올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조금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겐가! 당장 저 놈들의 목을 베어버려라. 당장 말이다!”
  “예, 제게 맡겨주십시오.”
  마침내 대장이 검을 뽑아 들었다. 병사들이 사용하는 투박한 물건이 아니라 잘 세공된 양품이었다.
  “미안하지만 거기까지다.”
  “…….”
  그자가 제논에게 걸어가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린 차가운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는 니나가 검 끝을 남작에게 향한 채 서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작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는데, 특히 다리가 오들오들 떨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네 녀석이 감히 누구에게 검을 겨누는 것인가?”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말하였다.
  “이런 천한 것에게 검을 겨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 밑의 부하들이 불쌍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크윽! 네 년이 만약 남작님께 상처 하나라도 낸 다면, 얼굴을 완전히 뭉개주겠다.”
  “무엄하다! 감히 더러운 입을 누구한테 놀리는 것인가?”
  니나가 높은 음성으로 말했다. 고압적이고 위엄이 실린 목소리에 다들 깜짝 놀랐다. 특히 남작은 니나의 기세에 완전히 눌렸는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거기다가 오줌까지 지렸다.
  “또 시작이네. 휴우……. 뭐 이걸로 됐으니 좋은 건가. 그렇다면 나는 마무리를 좀 해야겠네.”
  멀리서 구경하던 베리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니나 옆으로 걸어왔다. 베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작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의 눈동자와 남작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더러운 놈. 오줌까지 지리고. 냄새가 풀풀 난다. 이 돼지 녀석아.”
  “이, 이, 이!”
  남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두려운 나머지 뭐라고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붉은 눈동자가 남작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만약 우리가 가고 나서 그 모녀를 건드리면, 네 놈은 그 날 죽는 날이다. 그란디스 비르의 명예에 걸고, 반드시 그렇게 해주겠다. 그것도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 각오하라고.”
  “그, 그란디스 비르!”
  남작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왕성에 있는 중형 길드이지만, 그 이상의 힘을 휘두르는 강력한 길드라는 소문도 있었다. 게다가 그란디스 비르의 마스터는 템펠덴 남작이었다. 자신과 작위 자체는 동급이었지만, 수도에 있는 남작이 몇 계급 더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이런 몬스터처럼 생긴 면상을 더 이상은 못 봐주겠네. 니나, 제논. 가자.”
  베리는 신경질을 부리며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니나와 제논이 따라갔다.
  “저기 괜찮을까요?”
  “뭐가?”
  “이대로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그 아주머니하고 아이도 걱정이 되고요. 혹시 백작이라는 분한테 모든 사실을 고하는 건 아닌지.”
  제논이 걱정스런 어조로 말하였다.
  “저런 겁쟁이 놈들은 오늘부터 며칠 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집에서 벌벌 떨 거야. 그리고 백작한테 일러 바쳐도 아무런 소용도 없어. 아마 백작은 그 말을 듣자마자 저 녀석 목부터 베려고 할 걸?”
  “예?”
  베리의 말에 제논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변방의 백작이지만, 템펠덴 가문 뒤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변태 할망구가 고작 남작밖에는 안 되지만, 실세 중의 실세거든. 물론 수도 내에서는 떨거지 인생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이런 변방의 작은 영주한테는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존재인 것만큼은 확실하지. 그러니까 걱정할 건 없어.”
  “예……. 그렇군요.”
  제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너 진짜 잘 싸우더라?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냐?”
  “그냥 살다보니까 좀 그렇게 되었어요.”
  “네가 살던 곳에서도 싸움이 그렇게 많은 편이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별로 싸우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이렇게 되었네요.”
  제논은 쓸쓸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베리는 제논의 표정을 읽고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베리는 정말 친절하네요.”
  “응? 뭔 소리여?”
  베리는 제논의 칭찬에 깜짝 놀랐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베리는 제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내가 뭐가 친절하다는 거야? 나는 그런 거하고 담 싼 사람이야. 귀찮아 죽겠는데 그런 친절한 짓은 왜 해?”
  베리가 말하던 도중, 옆에서 걸어오고 있던 니나가 손날로 베리의 머리를 쳤다. 베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니나를 힐끔 노려봤다.
  “왜 때려 또?”
  “하는 짓이 애 같아서.”
  “…나 아직 애 맞거든? 열 넷 밖에 안 된 애 맞거든? 시집 갈 나이 훨씬 지난 이 아주머니야!”
  “…….”
  이것이야 말로 매를 버는 행동이었다. 니나는 손날로 베리의 머리를 여러 차례 더 가격하였다. 도대체 그 얇은 팔에서 어떻게 그리 강한 힘이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로, 아주 강력한 파괴력을 베리에게 선사해주었다.
  “아파 죽겠잖아!”
  “아직 1년 밖에 안 지났어. 그리고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니나는 시선을 앞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제논은 니나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 여성들은 만 16세가 되면 보통 결혼을 하게 되니까, 니나 씨의 나이는 열일곱이네. 그렇다면 나보다 한 살 어리잖아.’
  제논은 니나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니나는 제논의 눈길을 눈치 채고는 고개를 돌려 제논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왜?”
  “아, 아니요. 아무 것도.”
  “내가 아직도 결혼을 안 해서 신기하다는 거야?”
  “아닙니다! 그런 거. 사실 제가 살던 곳에는 여성분들이 서른이 넘어도 결혼을 안 하는 경우도 흔하거든요. 보통 스물이 넘어야 결혼을 하고요.”
  제논은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듯 말하자, 니나는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중간에 서있던 베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뭔가 핑크빛이 보이는데.”
  “…….”
  “…….”
  베리의 중얼거림에 공기는 급속도록 냉각되었다. 그리고 니나의 주먹이 베리의 배에 꽂혔다. 당연한 응징이었다.
  “컥, 컥!”
  너무 강한 충격이었던지, 베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배를 움켜잡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다가, 간신히 호흡이 안정되자 벌떡 일어서며, 뭐라고 몇 마디를 또 해댔다. 그 결과는 또다시 니나의 응징이었다. 이번에는 얼굴 사방팔방에 이루어져서, 베리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대략적인 응징이 끝나자, 니나는 손을 털면서 입을 열었다.
  “목적지는 어디야? 아직도 덜 온 건 아니지?”
  “여기입니다, 누님.”
  매우 공손해진 베리가 손으로 왼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니나와 제논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포티스 보석상점?”
  제논은 간판을 읽어보았다. 간판으로 그 가게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지만, 이곳에 자신들이 왜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그 할아범을 만나러 온 거야?”
  “그래. 이번 일에는 영감탱이가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겠네.”
  니나는 베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아시는 분인가요?”
  “뭐 설명하자면 길지만. 한 마디로 요약 설명을 해주자면, 포티스는 준 길드 멤버야.”
  “예? 준 길드 멤버라니요?”
  “들어가 보면 알아.”
  베리는 보석상점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방울이 딸랑하는 소리가 나자 안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여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보석을 찾고 계십니…….”
  손님의 얼굴을 본 상점 주인의 말이 끊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에 있던 물건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나가라! 이 망할 애송이 녀석아!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오는 것이냐!”
  “어이 영감. 말로 하자. 말로!”
  베리가 날아오는 물건들을 피해가며 말했다. 하지만 결국 커다랗고 단단한 물체에 정통으로 박치기를 했다.
  “악!”
  베리는 자신의 코를 움켜잡았다. 코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니나는 품에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베리에게 건네주었다.
  제논은 베리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입과 코를 틀어막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을 본 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하지만 얼굴의 혈색이 싹 사라지는 것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니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뭐라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가게 문을 박차고 나온 주인 때문에 말을 해주지 못했다.
  “뭐야. 니나, 너도 왔나?”
  “예. 오랜 만이에요, 포티스.”
  니나가 포티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 앞에 서있는 포티스는 키가 100cm 안팎 정도 밖에 안 나가는 사람이었다. 온 몸이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마가 탁 튀어 나와 있으며, 광대뼈 부근과 볼에 살인지 근육인지 어쨌든 툭 튀어 나와서 눈은 움푹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더하여 갈색 머리칼과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다.
  “그리고 이 계집처럼 생긴 놈은 처음 보는 놈일세. 이 놈은 뭐냐?”
  “이버네 새로 드러온 제노니라고.”
  “네 놈한테 안 물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아.”
  베리가 코를 움켜잡은 채 설명을 하는 도중, 포티스가 말을 무섭게 잘라버렸다. 베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포티스를 내려다보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이상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기, 아니 제논이라고 합니다.”
  “…이름처럼 이방인 같이 생겼군. 아무튼 반갑네. 나는 이곳에서 작은 보석 상점을 하는 포티스라고 하네. 보이는 것처럼 드워프지.”
  “에? 아, 예.”
  난생 처음 보는 드워프였다. 제논은 눈과 얼굴에 신기함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왠지 의심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설마 그랑비르의 일로 온 거라면 나는 절대 사절이네. 그 변태 녀석의 일 따위는 절대 안 도와줘. 특히 베리 네 녀석의 짜증나는 상판 때문에 더 사절이다.”
  “아니 왜, 포티스?”
  “네 놈 때문에 겪은 모욕이 생각나서 그렇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
  포티스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가게 안으로 횅하니 들어갔다. 베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성큼성큼 따라 들어갔다. 니나와 제논도 그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도와줘. 펜도르에 가야하는데 우리 셋이서는 못 뚫고 들어간다고.”
  “흥. 그냥 가서 고블린 놈들한테 맞아 죽는 것이 좋겠군.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갑자기 베리가 순순히 포기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베리. 무슨 짓이야. 포티스가 필요하다고 말한 건 바로 너였어.”
  “그래요. 이대로 돌아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니나와 제논이 베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베리는 이미 다 포기했는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면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 드래곤 레어에 가서 기껏 데리고 가려고 했더니. 뭐 나만 좋지. 그냥 우리 셋이서 어떻게든 해서 뚫어야겠네. 고블린이 수가 많아도 기껏해야 고블린일 테니까. 아……, 과연 무슨 보석이 있을까?”
  뒷모습이라서 다른 사람들은 베리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특히 말끝을 슬며시 흐리면서 눈을 위로 치켜세운 채 포티스의 반응을 잠시 기다렸다.
  포티스는 자리에 앉아서 보석 세공을 다시 시작하려다가, 베리의 중얼거림에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창고 같아 보이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우당탕탕 소리가 난 후, 대형 전투 도끼를 든 포티스가 튀어 나왔다.
  “좋아. 까짓것 내가 한 번 크게 인심을 써주지.”
  체일 메일, 가죽으로 된 갑옷, 금속제제의 부츠와 건틀릿까지 완벽한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베리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씩 웃으며, 속으로 ‘생각대로야.’라고 중얼거렸다.
  “하아…….”
  니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제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른 세 명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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