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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문학 (구창도 완결 릴레이) [Tialist] 11~14

2006.11.22 02:28

아란 조회 수:4811

[Tialist] 011 : 파괴하는 자와 지키는 자
글쓴이 : 영원전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본부'란 분위기가 딱딱하고 왠지 사람이 살수 있는 최소한의 물자만을 공급해 준 후 직원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곳이 인류의 최후의 보루라 하더라도 직원들이 편안하게 쉴 곳을 마련해 주기는 하다.  항상 목숨을 거는 일터에서 편안한 곳이 어디 있겠냐 만은..  하여튼 간 그런고로 본부에선 직원들을 위한 편리한 시설들을 자금이 깨지지 않는 한도까지 만이라도 제공해 주었다.  간단한 아침, 점심을 먹는 이곳 카페도 그 '편리한'시설 중의 하나이다.  항상 하던 데로 아침을 먹으러 카페에 들어가는 문을 여는 카렌티어스를 보자 유우키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여."

  카렌티어스는 그 소리에 황당해 하는 표정으로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저번에 아카라를 데려간 후론."

  "..  당신, 그렇게 태연하게 커피 마시면서 있어도 괜찮습니까?"

  유우키는 잠시 커피 잔을 바라보다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별로 상관없는데."

  "아니, 아니.  일본말입니다.  일본."

  "아, 그거.  별 걱정을 다하는 군."

  그는 커피 잔을 가볍게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은은한 커피의 냄새만으로도 행복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유우키를 카렌티어스는 한심하게 바라보며 그의 반대 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설마 셰나님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해서 오셨다, 라고 하실 겁니까?"

  "하하하, 잘 알면서 그러는구만.  하지만 이유가 아주 없는 것도 아냐."

  그의 목소리에서 난데없는 심각함이 묻어 나왔다.  갑작스런 그의 변화에 시큰둥하던 카렌티어스는 자연히 관심을 보였다.

  "..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커텔님도 어디 가신 것 같고.  하지만 이제 됐어.  너라면 말해 줄 수 있겠지."

  아직 뜨거울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품위 같은 거 다 내다 버리고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 마셨다.  그렇게 순식간에 비워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크게 한숨을 쉰 그는 카렌티어스에게 물었다.  

  "그 트론, 그거 도대체 뭐였나."

  "..  예?"

  "우리를 그 괴물에게서 구해준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말야.  그런 걸, 아군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도대체가, 몸을 재생시키고 맨손으로 그 거대한 몸을 찢어발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한 행동.  그건 도대체 뭐지?  너희들은 무엇을 만들어 버린 거야?"

  카렌티어스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이내 한숨을 쉬면서 상관없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어차피 나온 거니 말해도 이젠 괜찮겠지요.  그 트론의 코드는 Tron - mark 02 Skadi.  예전 트론 프로젝트가 개시되었을 때 트론 프로젝트를 선두 지휘했던 티아세리스 에르나가 3번째로 건조한 기체이죠.  사용된 코어는 티아리스트의 코어의 조각중 하나인 '혼돈.  예전 테스트를 강행했을 때 폭주 해버린 기체로..

  유우키는 카렌티어스의 말에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야 아무 3류 해커라든지 갔다가 쓰면 금방 나올 수 있는 공식 자료야.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그런 괴물을 조종하고 있는 파일럿이다."

  카렌티어스는 잠시 움찔했다.  파일럿을 알고 싶다니.  이 남자는 자신에게서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나돌고 있어.  소문이.  비밀병기란 것은 강력한 만큼 정보도 꽤 빠르게 퍼지니까.  실화든 과장이든.  하지만 이건 분명 짚고 넘어가야겠어."

  유우키는 자신의 웃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는 동안에도 그는 말했다.

  "..  파일럿의 성이 프로브..  라지, 아마?"

  카렌티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거기까지 알 수 있는 거지?

  "..  사실인가 보군."

  "..  파일럿은 SS-X00라는 코드로서 불릴 뿐입니다."

  그는 라이터의 부싯돌을 세게 당기며 가스를 열었다.  마찰로 인해 빚어진 작은 불꽃은 라이터에서 새어나오는 가스를 타고 올라가 파랗고 붉은 원반형의 불덩어리를 현상했다.  유우키는 마치 물에 담그듯이 자신의 담배 끝을 불에 잠시 맡겼다.  그의 입에서 연기가 나자 유우키는 가스를 닫고 라이터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후 카렌티어스를 사납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날 그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었나?  내가 무슨 정치적이라든지 군사적이라든지 라는 목적으로 정보나 캐 가는 사람으로 보이나?  섭섭하군, 카렌티어스.  누가 커텔님의 아들내미 아니랄까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어 가는 건가?"

  "..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갑자기 성질을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카렌티어스에게 유우키는 태연하게 담배를 물며 답했다.

  "아니.  그저 만약 나라면, 자신의 친족을, 시즈미를 그런 괴물에 태울 수 있는지 몰라서 말야."

  다시 한번 담배 연기가 그의 입에서 길게 뿜어져 나왔다.  마치 유우키의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려는 듯.

  "나라면 말야..  그렇게까지 해서 용을 죽이려고 하지는 못 할 것 같아."

  "..  죽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  뒤져버린다면 그건 본부 속에서 명령이나 하는 놈이 아니라 직접 싸우고 있는 네녀석 친족이겠지."

  "죽지 않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스카디는 무적입니다.  파일럿 또한 크로킹 없이도 동조 율이 200%를 육박하고요.  절대 죽을 리 없습니다."

  "'절대'란 말을 난 절대 믿지 않아.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나 역시 너와 같았다.  뭐, 너완 달리 근거 없는 소원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시즈미가 트론을 움직였을 때, 그리고 네가 그녀의 폭주를 막고 함께 용을 물리쳤을 때, 난 너희들이 절대로 용 따위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좀더 평화로워질 거라고 생각했지."

  유우키는 낮게 웃다 담배연기에 걸려서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겨우 기침을 멈춘 그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크흠..  얘기가 조금 센 듯 하지만, 어쨌든 요점은, 그렇게 된 이상 친족을 잘 보살펴 주라는 거지.  시즈미가 너에게 해준 것처럼.  바로 잡아주라구."

  "..  결국 결론이 그겁니까?  당연한 말을 갔다가 빙빙 돌려서 말하는 재주가 있군요, 당신은."

  "..  당연한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구만."

  이제 막 일어서려는 카렌티어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살펴 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 지 알고나 있는 거야?"

  "..  뜻..  말입니까?"

  "그것은 소모품의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인정이다."

  "..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네녀석.  당연하잖아.  그 어떤 것이든 한 생명을 어차피 없어질, 일회용 방패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놈이 소모품을 보살펴 준다면 서로 상처만 받을 뿐.."

  "유리카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카렌티어스는 두 손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말하다 이내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뭔가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  게다가 여자냐?  그렇다면 더욱 더 힘들겠구만.  꽤 민감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네가 그녀와 다른 트론 파일럿들의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어?  없을걸.  어느 한쪽을 망가뜨리지 않는 한.  그리고 망가지는 쪽은 그녀일 가능성이 많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대체."

  그는 담배를 카렌티어스에게 향했다.  마치 막대기나 회초리로 상대를 지목하는 듯이.

  "그녀가 나타남으로서 넌 알게 모르게 소모품들과 가까워지게 될 거다.  하지만 커텔님이라던지 여러 높은 분들에게 네가 그들과 얼마나 가까운지 어떤지는 상관 안 해.  모든 소모품들은 그들에겐 자신들을 지켜주는 고깃덩어리들일 뿐이야.  물론 유키라란 사람도 그들에겐 일개의 방패막이일 뿐이야.  조금 단단한 방패랄까.  하지만 그 뿐이지.  너는 갈림길에 들어 설 수밖에 없을 거다.  소모품들과 같이 걷던지, 아니면 그들과 같이 걷던지.  그들의 길은 서로에게 이질적이야.  공존하고 있는 건 공통의 적을 가진 지금 뿐.  어느 곳으로 들어서나 다시 되돌아 올 수는 없을 거다."

  타 들어가 힘을 잃은 담뱃재는 중력에 의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청소부가 아니라도 일단 실내이다 보니 누구라도 보면 당장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릴 일이겠지만 지금 카렌티어스나 유우키에겐 그런 사소한 것까지 눈에 하나씩 들어오지 않았다.

  "..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거다, 카렌티어스.  유리카란 존재는 너에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처하게 만든 거야.  물론 두 길 모두 그 나름대로의 가시밭을 지니고 있어.  아프지 않은 곳은 없다."

  "..  또 모르죠.  제가 다른 숨겨진 길을 찾아낼지도."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난 그 숨겨진 길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말야.  뭐, 예언가도 아니니까."

  유우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린 뒤.

  "하지만 말야.  만약 선택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난 네가 올바른 길을 걷길 바란다.  시즈미도 물론 그걸 원하고 있을 꺼야."

  "..  둘 중에 올바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건..  네가 무엇이 '올바르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달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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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텔은 만족한 듯 스크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방적인 살육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이 스카디의 두 번째 출전.  대략 열 마리를 육박하는 용들의 공격에 경악해 혼란에 빠진 본부에 카렌티어스와 유리카를 호출해 본부 방어 명령을 내린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마에 적색 원뿔모형의 코어를 지닌 흑색의 개와도 같은 모습으로 보아하니 유럽에서 자주 출몰한다던 '헬 하운드'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부러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코어가 그들에게 있어 스카디와의 싸움에 치명적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일단 리치가 짧아 쉽게 동화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유럽 쪽은 어찌되었지?"

  옆에서 놀라운 것을 넘어서 황당해 하며 넋을 잃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던 유 박사는 갑작스런 커텔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네.  오늘 아침, 우리 시간대로 9:32분쯤에 오직 네모 함장이 다루는 한 척의 함정과 12사도만이 살아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커텔은 자신의 손가락을 탁자에 리드미컬하게 두들겼다.  그 많은 트론과 함정을 사용해도 안 되는 것인가.  베히모스의 힘이 그리도 강대한 것인가.  아니면..

  "..  그렇게 무식하게 마구잡이로 돌진 해 들어가니 너덜너덜 해져 돌아 올 수밖에.  차라리 소수의 엘리트 그룹들을 침투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었는데 말이야."

  화면에서 스카디가 돌진해오는 헬 하운드의 머리 뿔을 또 한번 잡았다.  마치 고양이가 잡아먹기 전 쥐를 가지고 노는 듯 몇 번 이리저리 흔들며 땅바닥에 패대기를 친 후 스카디는 한 손으로 그 용을 동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로서 7번째 희생양.

  "..  정말 쉽게도 처리하는군요."

  "그렇지.  200%의 동화율.  재생 능력.  흡수 능력.  동화능력.  저런 것을..  완벽하다고 부르는 것일까."

  "..  당신이 추구하는 '완벽함'은 그런 것이었습니까?"

  "유 박사는 아닌가?"

  그녀는 잠시 턱을 괴고 머뭇거리다 이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조금...  다릅니다."

  커텔이 흥미를 가지며 물어보기도 전에 오퍼레이터가 다급하게 외쳤다.

  "마크 20, 0, 5!  마크 20, 0, 5!  좌표 24, 12, 3에 용 두 마리 출몰!  그다지 본부에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진 않으나.."

  마침 스크린에서 마지막 헬 하운드를 곤죽으로 만든 스카디는 어느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론 마크 02 스카디 목표 변경!  새로운 용들에게 빠르게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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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죽여버릴께 - !"

  -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유리카.  다른 트론에게 맡길 수 있는 문제야.  벌써 10마리나 되는 놈들을 상대했잖아.

  "괜찮다니까!!  이 녀석들, 너무 약했어!  좀 더 필요하다고!  단지 똑같은 놈들이 아니길 바랄 뿐이야!"

  유리카는 같이 있지도 않는 카렌티어스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는 앞에 보이는 두 마리의 생명체를 목격함과 동시에 더욱 더 커졌다.

  "있다, 있어!  와, 트론과 비슷한 크기잖아!  뭔가 도마뱀 같기도 하고 말이야!!  재밌겠는데!!"

  유리카의 전투에 대한 욕망에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스카디는 그의 오른 손을 뒤로 젖혔다.  그것의 듀거 란스는 그 팔에 융합된 체 태양에 비춰져 그 날카로움을 자랑했다.

  "자, 일단 하나 GO -!"

  스카디의 듀거 란스가 황색의 덩치가 있는 용을 향해 빠르게 찔러갔다.  그리고 듀거 란스는 그것과 강도가 비슷한 것과 불꽃이 튀길 정도로 강한 마찰을 일으키며 쇠가 서로 긁히는 소리와 함께 퉁겨져 나갔다.

  "어..  어라?"

  유리카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고기가 잘려지는 소리와 함께 스카디의 오른팔이 듀거 란스와 함께 날아갔다.  놀란 표정으로 스카디의 재생되는 오른 손을 잠시 바라본 유리카는 동시에 마치 비웃고 있는 듯한 모습의 청색용이 건물에 옆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찌르려 한 황색의 용 보단 크기가 작았지만 그것의 오른 팔은 무릎까지 미쳤고 게다가 붙어있는 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해 그것의 몸보다 도 큰 오른 팔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헤, 이 녀석들, 제법인데?"

  유리카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청색용을 향해 도약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에 손을 데기도 전에 무언가가 스카디의 발을 끌어 당겼다.

  "아앗?!"

  엄청난 힘에 의해 날아가 건물에 부딪히기 전에 유리카는 볼 수 있었다.  날카로운 판자 모양의 각질을 지니고 있는 한 쌍의 거대한 구기를.

  "쳇, 놀고 있네!!"

  그녀의(카렌티어스의) 눈에 등에 한 쌍도 아닌 두 쌍의 거대한 방패 구기를 달고 있는 황색의 용이 보였다.  은근히 부아가 치민 유리카는 괴성을 지르며 이번에는 황색의 용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청색용은 그녀가 다른 용에게 달려드는 것을 가만히 보지 못했던지 어느새 스카디의 등에 착지해 그것의 손톱을 트론의 어깨에 파들어 가면서 땅바닥으로 함께 곤두박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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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거, 흥미롭군."

  마치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 마냥 커텔이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유 박사는 그런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제 눈으론 스카디가 지금 용에게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렇게 보이는 가?"

  유 박사는, 이렇게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커텔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감인가?  스카디는 그 어떤 용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자신감인가?  하지만 도대체 그 자신감을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단지 레비아탄을 찢어 죽였다는 것으로부터?  물론 레비아탄을 단신으로 죽여버린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용의 관점으로 봐서, 과연 유리카가 죽인 레비아탄은 센 존재였나.
  스크린에서 스카디가 여태껏 쓰지 않았던 트라이 건을 왼손으로 동화시켜 마구잡이로 황색용에게 쏘기 시작했다.  견제용인 트라이 건이었지만 스카디의 손엔 미니건과도 같은 화력을 자랑하며 대량의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쏘던 스카디는 이내 먼지로 인해 목표를 제대로 잡을 수 없자 총격만을 멈춘 체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정도 화력이면 죽었을 지도..?"

  유 박사의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억측을 비웃기라도 하 듯 난데없이 청색용이 먼지의 대지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스카디의 왼손을 잘라나갔다.

  "..  빠르군."

  "하지만 스카디도 저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지 않나요?"

  "물론.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목표를 잡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제대로 된 스피드를 낼 수가 없는 거야."

  커텔은 팔을 모아 자신의 턱을 괸 체 말을 이었다.

  "저 용들은 우리가 이제까지 싸워왔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똑똑해.  만약 한 놈 씩 스카디와 싸웠다면 그들은 몇 분도 가지 못하고 그녀의 먹이가 됐겠지.  한 용은 속력과 날카로움.  한 용은 방어와 힘.  그 둘이 서로를 보완해 주며 싸우고 있기에 스카디를 저렇게 까지 코너에 몰고 갈 수 있는 것이지."

  "다른 트론들을 준비시킬까요?"

  유 박사의 물음에 커텔은 낮게 웃었다.

  "상관은 없는데."

  "하지만 아까 전에 당신은 그들이 스카디를 코너에 몰고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코너에 몰고 있다고 했지 스카디를 진짜 죽일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은 아니야.  말했잖은가.  스카디는 무적이다.  저런 것들에게 당할 리가 없어."

  유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커텔의 말에 반론했다.

  "'스카디'가 무적이지 '유리카'가 무적인 것은 아닙니다.  유리카는 아직 10살 밖에 안된 어린애이고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카라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때 완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유 박사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면을 응시하는 커텔에게 등을 돌리며 그녀는 말했다.

  "정비시키고 오겠습니다.  말해 둬야 할 것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스크린에서 다시 한번 청색용에게 몸이 뚫리는 스카디를 뒤로 한 체 문을 열고 통제실에서 나갔다.

***************************************************************

  "으아아아아악!!!!"

  고통에 의해선 지 분노에 의해선 지 이젠 분간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유리카는 황색용이 4개의 넓고 단단한 구기로 만드는 '방패'를 주먹으로 마구 쳐댔다.  하지만 그녀의 트라이건을 이용한 무차별적인 총격이라던 지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찔러 들어오는 듀거 란스도 뚫지 못한 그것을 주먹으로 부서뜨릴 수 있다면 그건 환상일 것이다.

  "부셔 버릴 수 없다면...."

  그녀는 손바닥을 펴 용의 방패에 밀착 시켰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팔 주위에 액체성의 물질이 방패로 스며들었다.

  "먹어버리겠어!!"

  하지만 승리의 미소도 잠시 뿐.  스카디의 손은 이내 청색용의 날카로운 손톱에 의해 몸과 분리되어 소멸했다.

  "이익..  짜증나네, 이거!!"

  - 유리카, 본부에서 지원이 온다.  일단 합류하기 좋게 뒤로 빠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이 딴 놈들도 처리 못할 것 같아?!!"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한 말과는 달리 그녀는 두 마리의 용에게 계속적으로 농락 당했다.  커텔이 말한 대로, 한 마리 당의 능력으로 스카디를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서로 번갈아 가며 협공을 하니 유리카는 누구 하나에게 전략이라던 지 화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해주고 또한 보호해주며 서서히 자신들의 적을 지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뜻밖의 기회가 유리카에게 찾아왔다.  청색용이 스카디의 머리를 손톱으로 그은 다음 착지 할 때 잠시 중심을 잃은 것이었다.  유리카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당연한 이치로 본래 그리 단단한 몸을 가지지 않은 청색용은 그 한 방에 멀리 날아가 한 건물에 무참하게 부딪혔다.

  "쳇..  치지 말고 잡아서 찢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일단 잠시만이라도 황색용만을 상대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마치 연극을 끝내려고 강제로 명령을 내리는 감독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동작을 해 보이는 악역을 맡은 배우처럼, 황색용은 그 커다란 구기들을 스카디에게 뻗어 댔다.  유리카는 각각 다리, 몸, 어깨에 박히는 나머지 3개의 구기를 무시한 체 두 손으로 한 구기를 단단히 잡고 침식시키기 시작했다.  

  "게임 끝났어, 빌어먹을 놈아."

  유리카는 드디어 웃었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결과는 역시 그녀의 승리였다.  그녀와 스카디는 무적이다.  그녀와 스카디를 이길 것은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위화감이 그녀의 온 몸을 휘감았다.  안간힘을 쓰며 빠져 나오려는 노력에 빳빳해져야 하는 구기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이건..  뭐랄까, 잘려져 버린 도마뱀의 꼬리를 짓밟고 있는 포식자의 그 허무맹랑한 느낌이랄까.

  "뭐..?"

  그녀에게 현실은 무슨 일인지 깨닫게 하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단지 건네 준 것은 스카디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리고 날려 버리는 하얀빛의 폭발 뿐.  



  "뭐지, 저 폭발은?"

  트론 마크 06 시엘의 파일럿인 지나가 목표지점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물었다.

  - 서둘러야 되는 거 아닐까.  무슨 일이 일어 난 것 같은데.

  드로우를 타고있는 지수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누구에게나 그러치만) 걱정이 가득 베어 있었다.

  - 스카디에게 뭔 일이 있겠어.  그저 뭔가를 발사했거나 했겠지.

  이번엔 언제나처럼 이시스를 조종하는, 이중에서 가장 많은 실전 경험을 지닌 에릭이 말했다.  하지만, 항상 지나가 그와 대하면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의 목소리 어딘가는 마치 바람이 지나다닐 것만 같은 구멍이 있는 듯 했다.

  - 아니, 믿지 못하겠지만 스카디가 당했다.

  카렌티어스의 목소리가 지나에게 울려 퍼졌다.  항상 냉소적이고 차갑다고 생각한 그의 목소리.  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를 온기와 마치 비가 올 것만 같은 습기를 지니고 있었다.

  "에?  무슨 말이야, 그게?"

  - 나도 묻고 싶군.  그게 말이 돼?

  - 확실히 완전히 침묵된 것은 아닐 테지만, 지금 당장은 연결을 할 수 없다.

  "용이..  그렇게 강한 거예요?"

  그녀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용과 대면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옷은 이미 흘러내린 땀들로 인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마치 옆에서 지켜본 듯이 지수가 말했다.

  - 걱정할 것 없어.  넌 그냥 그걸 황색의 용에게 쏘면 끝나는 거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고마워요, 언니."

  확실히 유 박사가 말한 대로, 자신이 할 일은 오직 황색의 용에게 '그것'을 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청색용이 아무리 빨라도 제대로 대처하기는 힘들 테니, 어떻게 보면 굉장히 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상황이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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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해는 중천에 떠 폭발과 건물의 잔해로 뭉개진 대지를 비추었다.  황색용은 그 빛에 조금 눈이 부시는지 낮게 크르릉 거리며 자신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스카디가 묻힌 건물더미로 그 큰 몸을 움직였다.  그때 청색용이 어느새 그의 옆에 착지해 자신이 마무리하겠다는 듯 오른 손에 힘을 주었다.  황색용은 가만히 아무 소리 없이 뒤로 빠졌고 청색용은 탐욕스럽게 건물 더미를 향해 뛰어갔다.
  그때 황색용은 거대한 힘이 자신에게 강림하는 것을 느꼈다.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재생 된 구기로 막으려 했을 때 그것은 보았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것 같은 붉은 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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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들었어?  그것의 구기는 아무리 강력하다지만, 무적은 아닐 꺼야.  그저 순식간에 재생 되 우리가 못 본 것뿐이지만, 듀거 란스로 조금이나마 그 방패에 상처를 입히는 걸 확인했어."

  유 박사의 말에 에릭이 끼여들었다.

  "그럼 더 강력한 것을 쏘면 일단 방패를 뚫을 수 있다, 그겁니까?"

  "물론 방패를 잠깐이나마 뚫을 수는 있겠지만 금방 재생 될 거야.  그러니까 플랙시온 거너를 쏜 다음 재생되기 전에 끝내 버려야 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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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또 한방을 똑같은 곳에다 쏘아 데었다.  워낙에 범위가 넓기도 한 공격이라 한 목표에 집중 포화라는 게 좀 무색하긴 하지만.  이 것으로 충전된 3방은 모두 쏘았다.  이 정도 화력이면 아무리 재생이 빨라도, 아무리 방패가 단단해도 틈이 보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유 박사가 예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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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도록 이면 먼지 바람이 가시기 전에 찔러 들어갔으면 해.  코어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확인했어.  그것의 몸 정 한가운데에 코어가 있다.  찌르기만 하면 돼.  방패를 너무 믿는 나머지 몸 자체는 그리 단단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유 박사는 지수를 보며 말했다.

  "눈이 나빠도 그 정도면 문제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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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화염의 회오리가 몰아치기에 더 이상 시야라는 것은 필요치 않았다.  지수는 그보다는 기계에 부착되어 있는 코어 추적 레이더와 황색의 용이 플렉시온 거너에 맞기 전에 서 있었던 좌표를 일치시키기에 바빴다.

  "..  여기다!!"

  상당한 속도로 폭풍을 헤쳐 나가며 그녀는 어렴풋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 플렉시온 거너의 위력에 의해 구기들은 아예 소멸해 버렸고 그것의 몸조차 성한데 없었지만 자줏빛을 발하는 코어는 계속적으로 그것의 몸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코어에게 한치의 자비도 주지 않은체 지수의 드로우는 그대로 플라즈마 커터를 그것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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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저는 왜 출격하는 거죠?"

  에릭이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유 박사에게 물었다.  유 박사는 상당히 즐거운 듯 유쾌하게 그 질문에 답했다.

  "그 용들이 스카디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가졌던 것은 순전히 그것들의 팀플레이여서 이지.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보여주면 되는 거야."

  그녀는 마치 마침표를 찍듯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공격과 방어의 팀플레이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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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로우가 황색용의 코어를 찔러 들어갔을 즘 먼지 바람이 조금 걷혔다.  조금 정신이 없었던 청색용은 금새 황색용의 처지를 보고 황급히 그것을 도우러 달려갔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저 무기가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게 하지만 않는 다면..
  너무나도 드로우에 집착한 나머지 청색용은 이지스가 그들의 사이를 막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손톱으로 이지스의 몸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의 기대와는 달리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장벽에 의해 오히려 찔러 들어가던 손톱이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청색용이 뒤로 빼는 순간, 황색용의 코어는 밝은 빛과 함께 파괴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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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냈어!'

  지나는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깊게 내쉬며 편안하게 자신의 몸을 좌석에 기댔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카렌티어스는 차갑게 질책했다.

  - 아직 일은 반 밖에 끝내지 않았어.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마.

  "아, 네, 넷!"

  무의식 적으로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듯(상사이긴 하지만 역시 나이가 엇비슷한 카렌티어스를 대부분은 '반' 반말로 대한다) 대답한 지나는 이내 이변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황색용이 소멸되자 청색용은 아예 공격 할 생각도 안하고 그들의 반대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  저거?!"

  - 젠장, 꽁무니를 빼기는!

  - 쫓아가야 해!

  - 지나!  더 멀리 가기 전에 저격해라!

  "저격하라고 해도..!"

  그녀는 허둥지둥 K-11A2 레이저 저격 소총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소용없는 짓이란 것을 깨달았다.  청색용이 달아나기도 전에 스카디가 묻혀있는 건물더미에서 갑자기 촉수와도 같은 물건이 튀어나와 그것의 몸을 관통한 것이었다.  등뒤에서 공격을 받아 피하지도 못 한체 청색용은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했다.

  "아.  스카디가 정신이 든 것 같네요."

  - ..  아냐..  이건..

  머뭇거리는 카렌티어스의 목소리는 곳 이어지는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에 묻혀 버렸다.  잠시 후 스카디는 자신을 누르고 있던 건물 파편들을 여기저기에 날려버리며 모습을 들어냈다.
  그리고 아직 정체 모를 색깔에 뒤덮여 있는 스카디의 촉수(사실 그것은 철봉과도 비슷한 물체와 동화된 트론의 오른손이었다)는 드로우의 오른 쪽 어깨를 순식간에 찌르며 나아갔다.

  - 꺄아아아아악?!

  - 무슨 짓이야, 유리카!!

  카렌티어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스카디는 계속 자신의 팔을 드로우의 어깨에 찔러 들어갔다.  스카디의 파일럿 이름이 유리카라는 사실은, 그리고 그 카렌티어스가 파일럿을 코드이름으로 부르지 않은 사실은 지나의 귀엔 비명을 지르는 지수의 목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에 의해 지나에게 무시당했다..

  "그만둬, 이 괴물녀석아!!"

  지나는 시엘의 보조무장인 트라이 건과 양 무릅에 부착되어 있는 M450a1 155mm 레일건을 들어 에릭, 지수, 그리고 유리카가 있는 곳으로 거리를 좁히며 촉수를 향해 동시에 쏘아댔다.  몇 발의 정확한 사격으로 재생이 되기도 전에 촉수가 끊어진 동시에 지나는 스카디와 드로우의 중간에 섰다.  에릭의 이지스는 지수에게 달려가 본체와 떨어져 소멸되어 가는 스카디의 팔을 드로우에게서 뽑으며 부축해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같은 아군이란 말이야!!"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스카디는 지나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곤 재생된 팔을 이번엔 시엘에게 마치 죽이려는 듯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공격이 오리라는 듯 대충 예상한 지나는 그 즉시 팔을 향해 집중적으로 쏘아됐다.
  문제라면, 스카디의 재생능력으로 인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그녀의 화력과 맞서고 있는 것뿐일까.

  "으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른다고 없는 화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도 괴성을 지르는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독기, 분노, 그리고 증오가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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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카!!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그만 둬!!"

  - ..  다 죽여버릴 꺼야..  다 찢어 버릴 테다!!  밟고 찌르고 씹고 잘라버리고 말 꺼야!  꺄야아아악!!!!"

  카렌티어스는 당황했다.  이런 적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기에 더욱 더 당황했다.  확실히 폭주상태는 아니다.  폭주라면 기체와 파일럿이 따로 움직이는 것.  지금 스카디는 완벽하게 파일럿에 동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유리카는 이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가.

  "유리카.  잘 들어!!  용들은 이미 죽었어.  네가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군이야!  정신 차려!!"

  - 이제 다 필요 없어!!  아군이든 용이든 사람이든 트론이든 죽여 버릴 꺼다!!  아무도 날 업신여길 수 없어!!  모두 다 없애 버릴 꺼야!!

  카렌티어스는 어떻게든 자신의 동생을 설득시키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 안쪽에서부터 강한 충격이 일어 난 것이었다.  고통스럽게 구토를 하며 그는 점점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  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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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엘과 스카디는 서로 좀처럼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지나는 계속 총을 쏘고 있었고, 유리카는 맹목적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자신이 트론과 싸우는 것인지 용과 싸우는 것인지 이미 그런 건 정신적으로 분간이 불가능한 지나에게 한가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의 총탄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마치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트라이 건이 철컥 소리를 내며 자신의 탄창이 비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동시에 순식간에 재생되어 그녀에게 달려드는 스카디의 오른 팔.

  "아.."

  죽음이 문턱까지 왔는데도 지나는 왠지 허무했다.  어쩐지 남의 죽음을 느린 동작으로 지켜보는 것처럼.  마치 잘려져 버린 흑백 영화 테이프처럼 짧았던 그녀의 인생의 추억이 눈앞에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의 숨소리 역시 더욱 더 가빠졌다.  스카디의 팔이 그녀를 뚫기 전에 먼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  지수 언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새 눈을 감고 있던 지나는 아직도 자신의 숨소리와 턱에서부터 떨어지는 땀방울을 느끼자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지나는 그녀를 막아주고 있는 에릭의 트론 마크 04 이지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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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뭘 하고 있는 거야, 스카디.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없잖아."

  에릭은 낮게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지만 그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스카디의 공격은 비록 건물 뼈대를 동화시킨 것뿐인데도 그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앞에 안 보이겠지만, 이미 목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또한 유리카가 장님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에릭에게 쓸데없는 정보일 뿐이었다.

  - 내 이름은 스카디가 아니라 유리카야!!

  "그래, 그래.  유리카.  어쨌든 이제 그만 멈춰."

  - 안 멈추면 니가 어쩔 건데?

  갑자기 스카디의 공격의 강도가 늘어나자 에릭은 이를 악 물며 이지스 실드의 강도를 더욱 더 높였다.  아까 전 시엘이 한 것처럼 이번엔 이지스가 그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 어쩔 거냐고 묻고 있잖아!!  이렇게 막기만 하면서 뭘 어쩐다는 거야!!  응?  응?!

  그녀가 한 번씩 자신의 팔로 이지스의 실드를 칠 때마다 에릭은 양 어깨의 판넬에 무리가 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도 연기까지 세어 나오고 있었다.

  - 다 죽여 버릴 테다!  다 파괴 시켜 버릴 꺼야!  날 아프게 하고 날 화나게 만든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시켜주고 밟아준 뒤 웃어 줄 테다!!  아하하하하!!

  "..  그렇게 다 없애 버릴 거냐?  최강의 트론에 탄 체 기분 잡쳤다는 그딴 이유로?  정말로 그럴 거냐?"

  에릭의 말에 유리카는 더욱 더 화가 난 모양인지 악에 받쳐 외쳤다.

  - 그러니까 묻잖아!!  대체 니가..  뭘 어쩔 거냐고!!!!!

  갑자기 스카디의 주먹에서부터 감당하지 못할 힘이 들어오면서 이지스의 실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체 몇 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져 버렸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에릭은 비명을 질렀고 이지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 꺄하하하!  어차피 어쩌지 못하는 힘에 무릎을 꿇고 비명이나 질러댈 수밖에 없겠지!!  어차피 무너질 것 같은 벽일 뿐이야.  쓸데없이 명령에 의해서만 쓸모 없는 것을 지키는 쓰레기!!

  "..  쓸모 없는 걸 지키고 있다고..?  내가?"

  - 나는 달라.  다 부셔 보일 테다.  그 다음엔 누구도 날 업신여기지 못할 꺼야.  누구도 날 아프게 하지 않을 꺼야!

  이지스는 서서히 일어났다.  판넬이 파괴 된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리면서, 하지만 완고하게 일어섰다.

  "..  그딴 이유로 이곳을 파괴하려 든다면..  난 끝까지 지킬 거다.  끝까지 지킬 꺼야.  네가 파괴하지 못하도록."

  갑작스런 그의 기세에 유리카는 조금 주눅이 들은 듯 했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며 아직도 건물의 한 부분이 동화되어 있는 날카로운 그녀의 오른팔을 이지스에게 날렸다.

  - 죽어!!

  하지만 스카디의 팔은 중간에 이지스의 팔에 잡혀 버렸다.

  "..  지켜 보이겠어.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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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텔님!!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이러다간.."

  커텔은 안절부절못하는 유 박사를 한심하게 쳐다보다 이내 차갑게 말했다.

  "지금 나에게 유리카를 멈추라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아마 이지스가 파괴될 수 있겠지.  파일럿도 즉사하고 말이야.  어쩌면 모든 트론이 스카디의 손에 파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 손실은 스카디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유 박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커텔을 쳐다보았다.  이 남자, 진심인 건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요즘 자네는 너무 감정적으로 치 닫고 있어.  물론 한대 한대의 트론은 비싸지만 스카디가 그 정도로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난 몇 대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네.  당연한 거 아닌가?"

  유 박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오퍼레이터 중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트론 마크 04 이지스 엘레멘탈 코드 발동!!"

  "뭐?"

  커텔과 유 박사는 동시에 스크린을 주시했다.  스카디의 오른 팔을 잡고 있는 이지스의 앞으로 희미한 빛이 생기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엘레멘탈 코드 타입..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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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칼날과도 같이 빛은 스카디의 오른 팔을 잘라내며 거대한 막을 형성했다.  두께로 보면 이지스 실드에 비해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지만 겉모습만으로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건 성급한 결론이다.  실제로도 분에 찬 유리카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는 데도 불구하고 막은 꿋꿋이 에릭을 막아 주고 있었다.

  - 이아아아아아악!!

  멋대로 포효하고 있는 유리카에게 에릭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분노해서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싶은 지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만둬.  정말 쓸데없잖아?!"

  - 크크..  내가 무슨 이유로 분노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야?  그런 거야?

  확실히 에릭도 알고 싶었다.  용에게 농락 당한 화풀이 치곤 그녀의 공격은 너무 살의가 깊었다.

  - 모를 꺼야.  같은 소모품이라 해도.  10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체 언제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느낌을 네가 알아?  평생을 암흑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하나밖에 없는 오빠라는 존재를 손으로 밖에 느끼지 못하는 그 고독을 네가 알아?  모르겠지?  알 리가 없어.  소모품이란 딱지만 똑같을 뿐이지, 멀쩡한 눈이 있고 멀쩡하게 걸어다닌, 보통 '인간'인 주제에 나를 어떻게 알아?  이해하려고도 하지 마!!  어차피 이해 같은 거 할 수 없을 테니까!!  상상도 못하겠지?  내가 이제까지 겪었던 멸시와 증오, 그리고 지금도 짊어지고 있는 이 어둠을!!  

  유리카에 대해 지금에서야 이름정도 밖에 알지 못했던 에릭은 지금 대화로부터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런 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아픔을 짊어지고.
  하지만 그는 그녀와는 또 다른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  분명, 난 이해하지 못해.  너의 그런 상처들, 겪어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해서 뭐 잘난 듯이 응석 부리지 말라고!!  난 분명 멀쩡한 두 눈을 지녔어.  그리고 멀쩡한 사지를 가졌지.  하지만 말야, 그렇기 때문에 난 너와는 다른 아픔을 겪었어!  물론 어떻게 비교해 보면 내 상처가 조금 더 작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의 잣대를 도대체 누가 재는 거지?!  너인가?  나인가?  아니면 다른 '인간' 들인가?  다른 사람들이 상처 없이, 시련 없이 자라왔고 자신만 그런 아픔을 겪었다는, 그런 오만한 생각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지 마!!  비웃고 싶으니까!!"

  - 누구를 비웃는 다는 거야!!

  스카디가 있는 힘껏 실드를 내려치자 에릭은 무언가 뜨겁고 붉은 액체를 토해냈다.
  
  - 누가 누구를 오만하게 내려다본다는 거야?!  내가?!  아니겠지!!  그건 우리를 조종하는 그 '인간'들이겠지!!  다 죽여 버릴 꺼야..  이 놈이고 저 놈이고!!  

  "..  그러니까..  내가 막을 거다.  날 쓰러뜨리기 전엔 아무 것도 파괴하지 못해."

  -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이것도 파괴 될 뿐이야!!  무얼 위해 그렇게 까지 하는 거야?!  차라리 아무렇게나 공격이라도 해봐!!  그래, 그 실드를 사용해서 날 묶어보기라도 해봐!  왜 그렇게 지키려고만 드는 거야?!  

  에릭은 유리카의 질문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이다.  자신은 무엇을 이리도 지키려고 하는가.  왜 지키려고 하는가.  '지킨다'에만 급급한 나머지 정말 본질적인 것을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지스의 여기저기에서 조금 씩 피가 스며 나왔다.  기체 자체가 스카디의 공세에 버티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몰랐었는데..  말야.  지금에 와서야 미란이가 그때 무슨 기분이었을지 대충 알 것 같아."

  - ..  뭐?

  "내가 그저 본부를 지키고 싶다, 인류를 구하고 싶다, 뭐 그런 것으로 지금 너를 막고 있는 게 아니란 거야.  난 그저, 내 앞에서 누군가에 의해 알던 자가 죽어 나가는 게 보기 싫을 뿐이야.  하지만 때론, 맹목적인 공격으로 구하지 못할 때가 있지.  때론 방어가 남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일 때가 있는 거야."

  - ..

  스카디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지만 유카리는 확실히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에릭은 왠지 자신이 그녀에게서 수긍을 얻어 가는 듯 싶었다.

  "물론 이지스의 실드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난 결국 미란이를 구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래서 더 더욱 지키고 싶다.  그녀가 지키고 자 했던 것을.  그녀가 태어나고 숨쉬고, 그리고 나를 만났던 이 곳을.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것을 계승해 대신 지켜주고 싶다.  그녀가 남아 있기를 원했던 거를.  왜냐하면 그때 난 방패를 가지고도 구해주지 못했으니까.  그녀를..."

  에릭의 뺨에서 땀과 함께 전혀 엉뚱한 것이 흘러내렸다.  눈에서부터 태어나는 물.  억눌렸던 감정과 기억이 서로 엮이면서 밀어내는 것.  한 줄기의 눈물을 시작으로 에릭은 울기 시작했다.  미란이가 생각나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방패가 깨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더 이상 방패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듣기 좋게 말을 하긴 했지만 행동이 받쳐주지 않는 한 그것들은 모두 쓸모 없는 잡소리일 뿐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그와 이지스는 스카디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주저앉을 텐가.  그런 행동은 정말로 자신이 했던 모드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죽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아아아아악!!!"

  에릭의 방패가 한 순간에 나마 강해졌다.  심지어는 공격하고 있는 스카디의 팔을 녹여버릴 정도의 특별한 능력까지 보였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자 막 보다는 이지스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여러 곳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파트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팔목, 팔꿈치 이런 식으로 땅에 떨어져 나가다 그 다음엔 다리가 위고 팔 전체가 차가운 땅바닥으로 낙하하는 등 꼴이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은 굳건하게 버텼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스카디는 더 이상 막을 치지 않았다.  그저 이지스의 앞에 서 있을 뿐.

  -  ..  난 미란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네 아픔이 뭔지도 몰라.  별로 상관하고 싶지도 않고.

  아까 전에 분노에 찬 소녀가 아닌 것 같은, 왠지 슬프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 하지만 너도 잘났다고 그렇게 떠벌리지 말아.  나도..  소중한 사람쯤은 있어.

  스카디는 힘없이 이지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동시에 이지스의 막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  ..  오늘 일은..  정말..  아..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그렇게 까지 막아주어서.

  하지만 에릭에게서 더 이상의 대답은 오지 않았다. 그저 다리까지 무너져 가만히 하늘을 쳐다볼 뿐.  노을로 인해 붉어지는 하늘 저편에선 BR-C2 수송기들이 전투에 지친 트론들을 옮기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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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 빠?!"

  유카리가 휠체어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한 걸음에 달려나가려는 것을 유 박사가 간신히 말렸다.  트레이닝은 받고 있지만 아직 까진 약한 그녀의 다리를 위해 주어진 휠체어가 오늘은 그녀에게 방해가 되는 듯 싶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병실 침대에 앉아있는 카렌티어스는 어찌 할 줄 모른 체 그저 무표정으로 일관하였다.

  "오빠, 이제 괜찮은 거야?  이제 머리 안 아파?"

  "아..  응.  괜찮아."

  "정말이야?"

  "괜찮다니까."

  유카리는 계속 '괜찮다'를 연발하는 그녀의 오빠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지 걱정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고 나선 침대시트에 얼굴을 파묻혀 흐느끼기 시작했다.  카렌티어스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더욱 더 당황하면서 무슨 말도 하질 못한 체 그저 그녀의 머리를 다독거려 주었다.

  "..  미안해..  난 정말로 오빠를 좋아하는데..  정말로 지켜주고 싶은데..  오히려..  오히려 아프게나 만들고.."

  카렌티어스는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 했고 또한 그녀가 이렇게 까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에 대해 사뭇 감동했다.

  "아아.  괜찮아.  정말 별거 아니야.  또 유카리가 잘 해주었으니까.  기분이 정말 좋아졌어."

  "..  진짜?"

  "응."

  그녀는 손으로 카렌티어스의 얼굴을 더듬었다.  아예 눈이 망가져 버린 유카리에겐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카렌티어스의 입장에선 조금 불편하다면 불편했다..

  "나 정말 열심히 할께.  이젠 절대로 오빠를 안 아프게 해줄 꺼야.  많이 가르쳐 줬어.  그 사람이.  이젠 절대로 이런 실수 같은 거 하지 않을 꺼야.  근데..  뭐였지?  그의 이름?"

  이름이라..  하긴, 그들에겐 코드뿐만이 아닌 그들만의 이름이 있었지.

  "..  에릭이야."

  "응.  에릭.  오빠가 인제 괜찮은 거 아니까 에릭에게도 다녀올 깨.  내가 많이 아프게 했거든."

  "그래.  난 이제 괜찮으니까."

  기쁘게 손을 흔들며 유 박사의 도움으로 나가는 유리카의 뒷모습을 보며 카렌티어스는 잠시 생각했다.  사태를 들어보니 아슬아슬 했지만 그 일로 인해 그녀와 다른 트론 파일럿과 관계가 어느 정도 호전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위해서 좋은 일일까.  무슨 일을 예견하는 오멘일까?

  "제발 용 이외에 다른 일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누구도 상처 같은 건 바라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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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alist] 012 : Cooking, 믿음
글쓴이 : 아란


“미안해. 나, 여태껏 나만 괴로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미안해.”

에릭은 유리카가 자신에게 사과하러 올 줄은 전혀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에릭은 유리카의 초점 없는 회백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미안하면, 앞으로 우리를 조금은, 믿어달라고.”

“에?”

“아무리 최강의 트론이면 뭐해? 적들은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게 아니잖아. 아아, 정정당당이란 말을 쓰는 것이 우습지 참. 뭐, 그런거야. 너 혼자 잘났듯이 날뛰지 말라고. 더 이상, 누군가가 내 앞에서 죽어나가는 건 싫으니까...”

에릭은 말끝을 잠시 흘렸다.
미란이가 생각났다.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용과 함께 소멸하는 것을 선택했는지 그는 모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모두를 지켜주려고 했다는 것만은 그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뚝, 뚝.

어느새 에릭에 눈에서 다시금 한줄기 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내 침대 시트에 떨어져 내렸다.

“에릭, 우는 거야? 내가 또 뭔가 아프게 했어?”

눈이 망가진 유리카에 귀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침대 시트에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 소리에 유리카는 이내 손으로 에릭에 얼굴을 더듬으며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란이처럼 날뛰지 말라고. 그러다 죽어버리면 남은 자들은 어쩌라는 거야...”



“오빠~”

유라시아 나리아스 본부 내 카페에서 늘 하던 데로 가벼운 밀크 커피를 마시던 카렌티어스의 귀에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카인가?”

카렌티어스는 조용히 테이블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서자 예상대로 유리카가 저 쪽 복도에서 휠체어에 탄체로 아무렇게나 카렌티어스를(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카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사람은 A-X48(지수)이었다.

‘케이지에 다른 아이들과 금방 친해진 것인가? 그럼, 다행이지만.’

“앗?”

카렌티어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런 카렌티어스를 발견한 A-X48은 놀란 듯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에, 지수 찾은 거야!! 오빠 어디 있어?”

“에, 언니라고 불러야지. 내가 너보다 더...”

“그치만, 오빠가 그랬는걸. 실제 나이는 내가 더 많다고.”

“그, 그야 그렇겠지. 우, 우리들은 약으로 강제로 성장시킨 거니...”

“그러니까, 서로 높여 부를 필요가 없으니까, 나쁘진 않잖아.”

“그, 그래도 서, 성장 상태만 보면 이쪽이 언니인 건 변함이 없어!!”

A-X48과 유리카에 대화를 들으며 카렌티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뚜벅뚜벅 걸어서 A-X48과 대화에 열중하는 유리카의 (아카라의 것과 같은 색의)블루블랙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하였다.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이지? 유리카.”

“아!! 오빠!!”

유리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과 카렌티어스의 목소리에 곧 카렌티어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A-X48, 유리카와 이야기 해줘서 고맙다고 생각한다.”

“아, 네, 네...”

A-X48(지수)은 카렌티어스가 절대 고맙다거나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 못한 듯, 상사 대하듯(실제로 상사지만...) 연신 네, 네 거렸다.

"오빠, A-X48이 아니야. 지수야, 지수."

유리카의 핀잔에 카렌티어스는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 유우키가 한 말이 생각났다.

'..게다가 여자냐? 그렇다면 더욱 더 힘들겠구만. 꽤 민감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네가 그녀와 다른 트론 파일럿들의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어? 없을걸. 어느 한쪽을 망가뜨리지 않는 한. 그리고 망가지는 쪽은 그녀일 가능성이 많지.'

잠시 유우키가 한 말이 떠올라 생각에 잠겼던 카렌티어스에게 유리카는 갑자기 뭔가 잊고 있었던 것이 막 생각났다는 종이 봉지를 꺼내서 카렌티어스에게 보여주면서 소리쳤다.

"아, 맞다! 나 오빠 주려고 과자 만들었다."

"그래. 누가 가르쳐 주었지?"

"지나랑 지수랑 가르쳐 줬어. 유 박사님도 가르쳐 주셨고. 나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

카렌티어스는 아주 살짝 용안을 개방해 종이 봉지에 담긴 과자들에 형태를 바라보았다.
예상외로 과자들은 아주 '정상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바로 용안을 닫아버렸다. 그저 형태만 살펴볼 요량이었지만, 용안을 너무 빨리 닫아버린 것으로 인해 중요한 정보를 읽지 못 했다는 것은 나중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 정도라.'

속으로 감탄을 한 카렌티어스는 손을 뻗어 과자 하나를 집으며 말하였다.

“그럼 어디 맛 좀 볼까.”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카렌티어스의 혀끝에 닿는 무언가 이 말로 표현 못할(번개가 우르릉 꽝꽝 거리는...) 맛에 카렌티어스는 정신을 하마터면 잃을 뻔 했다.

‘이, 이 맛은... 유리카 넌 도대체 뭘 집어넣은 거지?’

간신히 과자를 그대로 꿀꺽 삼켜버리고 속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려고 안간힘 쓰는 카렌티어스에게 유리카는 대답을 요구했다.

“어때? 오빠? 맛있지?”

‘유리카, 이건 도저히 인간이 먹을 게 못돼...’

카렌티어스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대답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래. 나쁘진 않아. 이만 가볼...”

갑자기 뒤로 빠지려는 카렌티어스에 손을 유리카가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말하였다.

“정말?”

“그, 그래.”

“좋았어!! 오빠 점심 아직 안 먹었지? 내가 해줄게!!”

“유, 유리카, 오빠는 바쁘...”

“아냐. 아무리 바빠도 아무것도 안 먹으면 못 버틴다고. 나 오빠에게 도움되려고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카렌티어스는 그저 하나뿐인 동생인 유리카가 상처 받을까봐 한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냉정하게 정직하게 이야기 할 걸 하며 후회하긴 늦었다. 그대로 유리카에 손에서 빠져 나오지 못 한 채로 어떻게 빠져나갈지 망설이는 카렌티어스에 모습을 A-X48(지수)은 자신도 모르게 귀엽다고 느껴버리고 있었다.

“카렌티어스도... 우리와 다르지 않구나...”

어떤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일까. A-X48은 그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리카의 휠체어를 밀며 생각했다.



“오빠!! 괜찮아!! 오빠아~”

유리카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먹다 갑자기 쓰러져 버린 카렌티어스를 흔들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유리카 미안하다. 정말 냉정하게 말해서... 네 요리는 폭탄 그 자체야...’

카렌티어스는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 말을 결코 내뱉지 않은 채 속으로만 간직하며 기절해 버렸다. 유 박사는 유리카에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 남매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서 바닥에 창백한 얼굴로 기절해 버린 카렌티어스와 그런 카렌티어스를 걱정하는 유리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 박사님!! 오빠가, 오빠가...”

유리카에 목소리에서부터 뭔가 심상찮음을 눈치 챈 유 박사는 곧 탐정처럼 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 박사의 두 눈은 카렌티어스가 쥐고 있는 포크에 한입 억지로 베어 문 흔적이 역력한 소시지를 바라보며 테이블에 놓인 같은 소시지 요리를 하나 집어 들어 조심스럽게 먹어보았다.

콰쾅~ 우르릉 꽝꽝...

입안에서 울려퍼지는(그럴 리가 없지만...) 천둥번개 소리.

‘이... 이 맛은...’

하마터면 졸도할 뻔한 유 박사는 간신히 비위를 진정시키며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이거 누가 요, 요리했지?”

“에, 오빠 주려고 제가...”

“유리카... 이건 도저히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카렌티어스와 달리 유 박사는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좌표 X 45 Y 13, 에 용 출현!!”

“3방향에서 동시 침입입니다!!”

오퍼레이터들에 보고에 커텔은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리 편한 사정은 아니었다.

-아버지. 용이 출몰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찮나?”

-괜찮습니다.

“그럼 됐다. 어서 코어 컨트롤 링크 시스템을 제어하도록.”

카렌티어스는 아직도 그때 맛본 끔찍한 요리 때문에 여전히 상태가 안 좋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쉴 수도 없었다. 자신이 코어 컨트롤 링크 시스템을 조작하지 않는 다면 트론은 폭주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마크 02 스카디는 북동쪽 좌표 X 12 Y 34로 이동해서 적을 맞이한다.”

-응, 알았어. 그리고 오빠... 아깐 미안.

“신경 쓰지 마.”

카렌티어스는 유리카에 대답에 그렇게 대답한 뒤 곧 다른 트론의 파일럿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마크 03 드로우는 북서쪽 좌표 X 69 Y 98로 이동, 역시 적을 처리한다.”

-아, 네. 네!

“마크 05 이지스는 남쪽 좌표 X 90 Y 85로 이동 역시 적을 처리한다.”

-내 역할은 방패가 아니었나? 뭐 상관은 없지만.

“마크 06 시엘은 산 정상에서 저격 모드로 대치한다.”

-네.

카렌티어스가 바라보고 있는 전략 맵에는 각 트론들이 자신들에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점으로 표시되었다. 그 전략 맵을 바라보고 여러 상황 데이터들을 읽어나가면서 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각개 격파나 다름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마크 02 스카디, 마크 03 드로우, 마크 05 이지스들에 중앙에 스나이퍼 격인 마크 06 시엘에 배치만 봐도, 이 작전은 적들을 각 트론들이 한자리에 잡아둘 동안 시엘이 저격용 라이플로 용에 코어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한번에 날리는 것이 실패할 경우라도 곳곳에 미사일 터렛 등에 방어 시설이 견제와 붙잡아두기를 강행하기에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크 06 시엘. 네 임무는 특별히 막중하다. 부담 갖지 말도록.”

- 아, 알겠습니다. 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네 친구를 믿지 못하나?”

카렌티어스에 말에 B-X49(지나)는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럴 리가요.

곧 용을 맞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생각보다 순조롭게(용이 약한 걸지도 모른다.) 별 피해 없이 침입해온 적 개체 3마리 중 2마리를 처리해 버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순조롭다. 뭔가 함정이 있을 거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과는 별도로 카렌티어스는 열심히 용안으로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열심히 각종 주파수, 공간 등등을 뒤져대고 있었다. 이겨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전에 한번 겪어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 개체 모두 소멸.”

한 오퍼레이터에 보고를 끝으로 유라시아 본부 곳곳에서 안도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뭐 트론들과 파일럿들을 3번 게이트로 귀환하라고 하지요.”

유 박사는 수화기를 들어 카렌티어스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화기에는 카렌티어스에 찢어질 듯한 외침이 들려올 뿐이었다.

“마크 02 스카디 피해!!!”



갑자기 트론 마크 02 스카디에 발밑에 진흙이 들썩거리더니 갑자기 거기서 날카로운 촉수 같은 것이 트론 마크 02 스카디에 오른팔로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스카디에 오른팔이 잘려나가며 잘린 곳에서 검붉은 액체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큭! 이게!!”

유리카는 순간적인 기습으로 인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두 다리를 오른팔을 재생시키려고 하면서 왼팔로 오른팔을 잘라버린 진흙질에 날카로운 촉수를 잡아 뜯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카디에 발밑에 진흙에서 순식간에 여러 진흙질 촉수들이 스카디에 몸 곳곳을 붙들기 시작했다. 실로 놀라온 속도로 붙들면서 유리카가 당황하는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스카디에 오른팔을 잘라버린 날카로운 촉수가 이번엔 스카디에 코어를 노리며 단숨에 찔러 들어왔다.

“안돼!!”

갑자기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어깨(스카디의 어깨지만)를 쿵 밀쳤다.
어찌나 빠르게 달려와서 그 힘으로 부딪쳤는지 부딪친 스카디에 어깨는 조금 으스러졌으며 그와 동시에 스카디를 얽매던 진흙질 촉수들이 모조리 뜯어져 버렸다. 그리고 스카디에 코어를 노리던 날카로운 촉수는 그것에 오른팔을 뚫어버렸다.

“꺄아아아아!!!”

내질러지는 비명, 그리고 유리카에 두 눈에 보여지는 건 바로 그때 유리카에게 공격을 당했던 마크 03 드로우가 오른팔을 촉수에 뚫린 채 순식간에 침식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까에 드로우가 스카디를 밀쳐낸 덕인지 촉수를 내뻗은 용에 모습도 드러났다.
진흙질에 거인에 모습을 한 용이었다.



“용 출현!!”

“마크 03 드로우!! 용에게 접촉, 오른팔이 침식당하고 있습니다!!”

오퍼레이터들에 각종 보고.
커텔은 대형 PDP에 비친 전투 화면을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미사일 센터에 각종 미사일과 화력을 용에게 집중시킨다.”

“예?”

“어차피 마크 03 드로우에 코어는 그런 공격으로 파괴되지 않는다. 코어만 무사하면 다시 만들 수 있지 않나? 뭘 새삼스럽게 놀라나?”

유 박사는 커텔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행동에 이젠 별 감흥도 나지 않았다.
미사일과 화력으로 총 공격이라. 그 공격에 용에 코어도 안 날라가는데 트론에 코어도 물론 날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파일럿은 죽는다. 어차피 소모품이라는 것, 그렇기에 가능한 결론이었다.

- 아버지. 제게 잠깐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커텔은 카렌티어스에 갑작스런 통신에 잠시 생각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좋다.”



-마크 06 시엘, 지금부터 마크 03 드로우에게서 용을 떼어낸다.

“어, 어떻게!!”

지나는 카렌티어스에 갑작스런 말에 어쩔 줄 몰라 대답했다.
카렌티어스는 곧 바로 입을 열었다.

-넌 언제나 시뮬레이션에서 명중률 90%이상에 명실공히 유라시아 지부에선 명사수다. 그 능력을 살려서 단 한방에 용에 코어를 뚫던가, 아니면 용을 자극해 드로우에게서 떨어뜨리던가, 둘 중 하나다.

“나, 난 못해!! 절대로!! 지수 언니를 쏠 수 없...”

-해야 한다!! 아니 해내어야 한다!! 하지 않는 다면 곧 모든 미사일과 화력이 용에게 집중된다. 물론 드로우에 파일럿이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B-X49에 저격 능력이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용만 쓰러뜨릴 수도 있다. 하지 않는 다면 A-X48도 죽고, 드로우도 크게 손상된다.

지나는 엄청나게 망설이는 듯 했다. 솔직히 시뮬레이션과 실전은 많이 다르다.
시뮬레이션에선 90%에 명중률 이었을지 몰라도 실전은 또 모른다. 하지만,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흑... 하겠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지나는 곧 조종간을 붙들며 단숨에 저격 모드로 나갔다. 그리고 단숨에 드로우를 침식해 가는 용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얼마간에 침착한 조준 끝에 당황한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용에 자그마한 은색 코어가 포착되었다. 그리고 지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방아쇠를 당겼다. 날아가는 탄환은 단숨에 용에 은색 코어를 꿰뚫었다.
용은 그대로 행동을 정지한 채로 뒤로 무너져 내렸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이지스가 단숨에 드로우를 안고 뒤로 후퇴함과 동시에 용은 폭발했다.



“지수는 어째서 날... 난 지수를 그때 죽이려고 했는데...”

유리카는 지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젠 서로 등을 맞대고 믿어야 하는 동료잖아.”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지수에게 지나가 와서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언니... 나야 말로 정말 미안해...”

“아니야. 네 저격 솜씨는 확실히 믿고 있었는걸. 네가 아니었으면 나 죽었을 거야.”

지나는 이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달려와 지수에게 안기며 울기 시작했다. 지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유리카까지 갑자기 지나와 함께 껴안았다.
유리카는 갑자기 자신을 껴안는 지수에 행동에 당황했지만, 이내 뭔지 모를 감정이 복받쳐 올라 지나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다들 청승맞게 뭐하는 거야. 살았으면 그걸로 됐잖아. 절대 아무도 죽지 않아. 내가 막아 줄 거니까.”

에릭은 어느 새 가져온 손수건으로 지나와 유리카에 눈물을 닦아 주며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카렌티어스는 곧 뒤돌아서서 가기 시작했다.

카렌티어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리카는 다른 케이지에 아이들과 관계는 몰라도 적어도 파일럿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믿고 아끼는... 그러니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아카라 생각이 났다. 아무도 아카라에 대한 이야기나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카렌티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카라, 넌 지금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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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alist] 013 : Bohemian Rhapsody
글쓴이 : 다르칸


겨울 22 : 00  바티칸 제국의 수도인 바티칸.

신이 선택한 제국은 갑작스런 용들의 공격에 난잡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용의 모습은 백색의 날개를 지닌 천사의 모습. 그렇지만, 날카로운 이빨과 함께 여신의 적나라한 나체를 드러낸 모습은 북구신화에 등장하는 조인족의 괴수 하피. 그들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스무마리가 넘어 보였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와 삐죽하게 솟은 손톱으로 대재를 휘저어 놓는 괴수들을 베어넘긴 것은..붉디 붉은 것.

- 이히히히-. 피 보다 붉은 분이 내려오셨나이다

높이가 20m에 달하는 붉은 색 거인은 오른 손에 쥐어진 지금이라도 타오를 듯한 붉은 성검으로 한 하피의 목을 갈라버렸다.

- 신께서 북부의 권자에서 굽어보사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을 내쫓아 원죄를 내리셨나이다

마치, 성경의 구절을 읽는 듯한 무변음으로 줄줄이 읆어지는 '그'의 대사와 함께 붉은 거인의 모습이 서서히 달빛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깨의 쇄갑은 위로 툭 올라 솟은 것이 날카로웠으며, 마치 코트를 걸친것 처럼 둥그스름한 붉은 철판이 기체를 감싸고 있었다.

- 인간의 날개를 빼앗아 버리니, 인간들이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더라 신께서 이르시길.

파아악. 붉은 철판은 높이 펼쳐졌다. 그것의 모습은 날개. 그리고 드러난 기사의 모습은 최강의 12 사도인 베드로.

- 최후의 날 내릴 심판에 내가 찍을 직인은 배신자와 그와 함께한 이들에게 666층의 지옥을 경험하게 할 것이라. 크하하핫!! 크으하하하하하하하!!!!

서겅.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섬뜩한 모습과 함께 불타오르는 붉은 성검은 하피 세 마리를 동시에 베어버렸다. 트론의 눈에 서린 안광은 흡사 미친 자의 그것과 흡사했다.

- 크아악-! 건방진 인간!!

- 크하하핫! 이 괴물들아! 덤벼라! 덤비란 말이다! 신이 남긴 최후의 보루를 넘본 죄를 내릴 것이라!! 666층의 지옥을 경험하게 해주마!

현란하게 몸을 돌리며, 동그랗게 남은 붉은 잔상과 함께 하피 대 여섯 마리가 고기 덩어리가 되어 썰어졌다.

- 자, 보아라!! 이것이 베드로에게 신께서 허락하신 하늘을 여는 열쇠이다!!

정확하게 대지로부터 수직으로 내리찍힌 성검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문양만 불꽃의 무늬가 새겨진 것이 아닌, 실제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듯이 화염을 일렁이던 성검은 이내 뽑혀져, 하피들을 난도하기 시작하였고, 찔린 하피들은 재도 남기지 않고 타 버리고 말았다.

- 으응? 뭔가? 겨우 끝난 거냐? 크하하하! 재미 없어! 재미 없다! 덤비란 말이다!! 덤벼! 에엥?! 역시나 너로구나 리샤 발렌타이인-! 그래, 역시 네년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나?

"알고 있었나...?"

붉은 색의 베드로 앞에 나타난 것은 땅딸막한 소녀였다. 이제 키가 160cm나 될까? 그 소녀의 이마 정 가운데에는 노란 색의 섬뜩한 눈알이 하나 박혀 있었고, 그것은 호기심 어린 눈길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 자-! 촉수를 늘려서 덤벼라!

촤아아악. 베드로의 파일럿 안데르센 신부는 철저한 적의를 드러내고 작은 소녀를 향해 화염검을 휘둘렀다. 간단하게 옥염을 피한 소녀의 몸은 서서히 노란색의 섬뜩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눈의 등장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몸 어느 곳에서도 눈을 보지 못 할 곳은 없었다. 달빛을 받음에도 어둠의 종족처럼 더욱 더 어두워 지는 그녀의 몸에서는 하늘거리는 촉수가 일어섰다. 그와 더불어 그 소녀의 몸은 촉수에 얼키고 설켜 거대한 거인이 되었다.

"꺄하하하하-! 역시 네 녀석은 강해! 재미있다구"

어린 아이의 투정처럼 웃음을 연신 흘리면서 거인은 하나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바로 붉은 트론. 12사도 베드로의 모습이었다.

- 으히히히히! 구역질 나누나! 감히 네 년이 나의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라니!

"으음, 그치만 이게 제일 쎈 걸?"

- 좋아, 좋단 말이다. 덤벼라 애송이 계집

"좋아!"

화르르륵. 간단하게 리샤의 베드로에서도 화염검이 쳐 올라왔다. 일렁이는 화염검을 든 두 사도는 누가 악마이고 누가 천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모습을 하고 서로에게 날카로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캉. 처음으로 맞부딪힌 것을 시작으로 두 트론은 격렬하게 검무를 추기 시작하는데. 하나가 오른 쪽으로 화염검을 휘두르는 듯 하면서 다시 위에서 내리찍히고, 다른 하나가 발을 내지르는 듯 하면서도 날개를 퍼덕여 날아올라 검을 내리찍었다. 혼잡하게 화염이 일렁이면서 주위를 파헤치기 시작하자. 바티칸은 금세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결국 교황은 직접 오퍼레이터 마이크를 집어들 수 밖에 없었다.

- 안데르센 신부!! 바티칸 밖에서 싸우게나!

- 흐으으음, 멍청이 교황 성하께서 김빠지게 하시는 군. 좋아...계집년아 나와 밖에서 싸우자구 크크큭!

"으음, 좋아!"

두 베드로는 서서히 떠 올랐다. 붉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 두 기체는 바티칸 밖으로 나가 이름도 모를 언덕 위에 섰다. 견고하다 못해 아름다우기 까지 한 모습은 가히 예술. 어마어마한 거액을 투자해서 예술가들이 조각한 것이 확연히 티가 났다. 게다가 과학력의 총집합체라는 나노 합금은 나노 단계로 나뉘어진 분자들을 제 조합하여 만든 것으로 개발자들의 말에 따르면, 태양 중앙부까지 진입할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내구력을 지녔다고 호언장담하는 그것이다.
차캉. 창! 한참이나 다시 서로의 목을 노리는 것에 열의를 올리던 모습이 하늘에 비춰졌다. 용 역시 신이 만든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시련인가?

- 그만 꺼져라!!

"꺄하하하하!"

파가가강. 길게 횡으로 그어진 화염검에 리샤의 베드로는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진짜보다 약간 더 짗은 붉은 색을 띈 리샤의 베드로는 묘한 미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대로 화염검을 내밀었다.

"꺄하하하-!"

촉수들이 수 백개 튀어나와 안데르센 신부가 있던 자리에 처박혔으나, 안타깝게 안데르센 신부는 똑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는다. 언제나와 같이 최후의 것.

- 크큭. 너의 처벌은...사형이다!!

이른바 최후의 심판이라 불리는 것으로써 상대의 신체에 성검 가운데 있는 낙인을 찍는다. 본래 그것은 레이져 유도이고, 그것은 바티칸 상공을 유유히 떠다니는 1 세기 이전의 유물인 초 거대 항공레이져 위성에서 쏘아내는 중력포의 목표물로 인식된다.
.
.
.
- 미치겠군..

베히모스는 자신의 머릿 속에 투영되는 위성에서 축적되고 있는 우주의 중력에너지에 기가 질린단느 표정을 하고서는 리샤를 소환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보랏빛 레이져가 직경 30m가 넘는 범위를 불바다로 만드는 장면에 몸서리쳐 버렸다. 다행히도 항공레이져 위성 '미카엘'이 이미 지구에서 조종 불가능한 상태이고, 조준이 가능한 베드로의 성검이 반경 40m에서만 조준할 수 있다는 데 안심할 뿐이었다.

"이잉! 베히모스님. 왜 또 불렀어요?"

- 미쳤느냐? 저런 괴물 레이져에 맞으면 나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텐데!

"..."

언제나 같은 일과. 신의 무력이라는 바티칸과 베히모스의 끝날 날 없는 소모전의 양산은 유럽연합군의 패퇴 뒤로 변하질 않고 있었다.
.
.
.
그 시각 남태평양 심해.

- 미치겠군.

오랜만에 등장한 레비아탄은 지루함에 몸둘바를 몰랐다. 요즈음 자신이 하는 짓이라고는 가끔 오가는 고속정이나 항공기 따위를 잡아 족쳐버리는 짓거리 밖에 없었다. 불같은 성격인 그가 지루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으나, 멤피스토의 명령이었기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리 둔하지만 목숨이 달랑 거릴 일을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 제길! 멤피스토?! 그 따위 허접 쓰레기 따위에게 굴복하다니!! 그 때 티아리스트님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솔직히 말해서 멤피스토는 요한 파우스트의 일화처럼 그다지 강한 악마가 아니듯이(멤피스토는 요한의 부탁을 들어주는데도 군주인 루시퍼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낮은 계급의 악마이다. 다만 유명할 뿐...)그의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솔직히 힘이라면, 베히모스도 누를 자신이 있으나, 베히모스는 그 비상한 모사꾼 스타일의 두뇌 때문에 건드릴 수 없으나(잘 못하면 생매장당한다.) 티아리스트나 북극의 루시퍼가 없는 현재엔 멤피스토 따위 뒤집어 엎어도 된다....멤피스토의 능력이라면 베히모스를 능가하는 모사꾼이라는 점일까나? 게다가 위험하게도 멤피스토는 마인드 컨트롤을 사용한다. 강제적인 명령권이라는 것 말이다.

- 레비아타아아안-!!

'으이구 망나니 멤피스토'

레비아탄은 속으로 열심히 멤피스토를 씹어대면서도 그가 있는 남극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그다지 먼 거리라고 생각치도 않으니까. 아메리카에서 아시아까지를 이틀만에 오간 레비아탄이니 별로 대수롭지도 않았다. 낙하산은 싫다....레비아탄이 소망하는 것은 언젠가 더 높은 상관들에게 칭찬을 얻고 베히모스나 멤피스토를 비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망상을 꿈꾸며, 바쁘게 몸을 놀리고 있었다.

- 레비아타아아안!!!

- 아, 간다니까요!!!

약간은 정겨운 모습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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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alist] 014 : 화이트 크리스마스, 파티!
글쓴이 : 영원전설


  한 남자가 검은 조끼를 단단히 껴입은 체 예전엔 공원이었을 듯 한 곳을 지나 가까운 곳에 보이는 유라시아 지부를 향해 차곡차곡 쌓인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 조금 산만한 것인가.  부드럽게 내리는 눈들을 손으로 잡아 본다던 지 자신의 주체하지 못 할 정도로 사자 갈기 마냥 양옆으로 퍼진 검은머리를 긁적인다던 지 여러모로 딴 짓을 하며 느릿느릿 걷는 그를 보면 누구든지 저 사람은 이곳에서 노숙하러 온 것이다, 라고 할 판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양손을 쭉 펴 기지개를 하며 입을 열었다.

  "..  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거지."

  12월 25일.  티아리스트의 강림 후 만신창이가 된 세계라지 만, 아직도 그전의 세계가 만끽했던 그 날의 향기는 남아 있는 듯했다.  이젠 반짝거리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라던 지, 길가에 널려있는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으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을 사주세요~!'라는, 상업성 짙은 광고들도 과거의 추억이 되 버린 지 오래이지만.

  "딱, 이럴 땐 애인이라도 하나 끼고 그저 돌아다닌 것도 좋을 텐데 말이야.  소원도 빌고..  아니, 그건 새해였던가.  음..  상관없나.  어차피 소원이래 봐야 애인이 없는 이상은 '이번 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세요'정도 이니.  어쨌든 이런 날엔 맥주가 적격일 텐데.  그저 일 같은 거 다 놓고 마음껏 즐기는 거지.  용들도 그 정돈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그 자식들은 휴일도 없나보지?  옛날에 아버지가 그때마다 사주신 선물이 아직도 눈에 훤하군.  뭐였지, 내 8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슨 로봇 이였는데..  비행기로도 변했지, 아마?  아, 비행기로 변신시킬 때 망가뜨린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참 많이도 망가뜨렸네.  옛날에 시즈미 인형가지고 레슬링 하다가 솜털덩어리로 만들어서 울린 때도 있었지.  참, 시즈미도 그땐 정말 어렸었는데 말야.  울긴 또 많이도 울었지.  언제나 눈물 방울을 눈언저리에 달고 다닌 놈이었는데.  역시 세월이란.."

  "유우키 대위님!!"

  유우키라 불린 그 남자는 천천히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진한 갈색의 눈동자에 오렌지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 한 명이 눈에 불을 킨 체 달려오고 있었다.

  "여어."

  "'여어'가 아니에요!!  도대체가, 용에 습격..  아니지, 용을 본 것만으로도 흥분해서 멋대로 트론을 조종해 박살을 내놓고선 그렇게 내빼는 게 어디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시 정비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판국에, 유라시아 지부엔 통신만으로도 연결 할 수 있잖아요?!"

  유우키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 입을 열었다.

  "이봐, 셰나, 내가 뭐 그렇게 멀리 간 건 아니잖아.  그리고, 너야말로 다른 사람 시키면 될 것을."

  이번엔 그녀가 난처해질 차례였다.

  "아.. 아니..  저기 그러니까..  급해서 그랬죠!!  대위라는 사람이, 아무 생각도 안하고 그렇게 가버리다니.  저흰 레이카비크에 12월말까지 가야 된다 구요!!  또 츠라 대령님께 한 소리 들으려고 작정했어요?!"

  "아아, 혼나는 건 나니까 걱정하지마."

  "그러니까.."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총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발자국 소리만이 들리던  조용한 환경(물론 셰리가 오기 전까지)에 익숙해졌던 유우키의 귀는 저 거대하고 불쾌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후..  이젠 누구에게나 휴일은 없는 건가?"

  잠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던 유우키는 셰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셰나.  이만 가볼까."

  "네?  아..  네."

  마치 강아지 이름 부르듯 '셰나, 셰나'하는 것에 그녀는 조금 불쾌했다.  그냥 '소위'라고 하면 될 것을...

  "아니, 잠깐만요!!"

  "음?"

  아주 태연하게 오히려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는 그를 보며 셰나는 결국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그 쪽은 유라시아 본부 쪽이잖아요!!!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곳은 저쪽이라고요!!"

  손가락을 마구 휘저으며 회색의 건물이 있는 곳의 반대쪽을 열심히 가리키는 셰나를 향해 유우키는 살짝 웃어 주었다.

  "나도 알아."

  "지금 대위님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말씀 하시라고요!!"

  "카렌티어스에게 인사정돈 하고 가야지."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에겐 이미 임무가.."

  "어차피 여기에 불시착한 이유도 설명해야하니까."

  "그런 건 본부가 알아서 해 줄 거잖아요!"

  "미리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자, 가자."

  "이봐요오.."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걸어가 버리는 골칫덩이 상사로 인해 셰나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일단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

  - 적 코어 소멸.  본부로 귀한 하겠습니다.

  - 에, 뭐야, 에릭, 그런 말투.  딱딱해.

  - 음?  하지만 비행기 파일럿이라던 지 같은 사람들은 역시 이렇게 말하던걸.

  - ..  혹시 그거보고 따라하는 거야?

  - 지수도 봤어?

  - 응.  나도 빌려봤어.

  - 에이, 뭐야, 뭐야?  그게 뭔데?

  카렌티어스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왠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보통의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생활이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유리카가 도착하는 대로 코어 컨트롤 링크를 종료시키려는 그의 귀에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 괴물들 다 죽여버렸어, 오빠~!  이제 곧 갈게~!

  카렌티어스의 온몸에 닭살이 처참하게 돋아났다.  한참동안 이 갑작스런 정신공격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앉아 있는 그의 귀에 다시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 봐봐, 유리카.  반응이 없잖아.  애초에 '오빠'라는 걸 집어넣은 게 말이 안 되는 거라고.

  -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하는 걸?

  - 생각을 해봐.  에릭한테 카렌티어스는 일단 '오빠'가 아니잖아?

  - ..  지나.  그건 당연한 거구.  일단 문제는 에릭의 말투라고 생각해.  너무 느끼하잖아.

  - 그럼 이상한가?

  - 애초에 남자 목소리에 그런 여자들이나 쓰는 대사를 말한 게 잘못이야.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이던 카렌티어스는 이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저 나이대의 애들이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실제 나이가 네다섯 살 정도 인 것을 생각한다면 저런 것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직 많은 것이 새로우니까.    
  유리카가 귀한 한 것을 확인한 뒤 카렌티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방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왠지 뒷골에서부터 별로 안 좋은 기분을 느끼며 방문을 연 카렌티어스의 눈에 싱글싱글 웃고있는 유우키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어."

**********************************************

  "..  그렇게 됐다는 거지.  커텔님에게도 비슷하게 말해 두었어."

  카렌티어스는 한 손은 찌푸려진 미간을 마저 피고 또 한 손으론 카페의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상황정리를 하려 애썼다.  
  하지만 저렇게 유유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방금 뽑은 커피를 마시는 유우키를 보면서 그런 게 될 리가 없다.  일단 화부터 날 수 밖에.

  "..  그런 건 우리가 처리할 수도 있었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듣자듣자 하니 애초에 육지를 기어다니는 놈을 하늘에서 덮쳤다는 소리가 '용이 당신들을 습격했다'가 아니라 '당신들이 용을 습격했다'로 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원래가 국가연합은 알트 아이젠을 곱게 보질 않는데 말이죠, 그냥 조용하게 지나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이런 사고를, 그것도 우리 지부에 내시는 겁니까?!"

  유우키는 정말 태연하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말했다.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는 사람이 회까닥 가버리는 날이랍니까?"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도 확실히 오늘 대위님 맛이 간 듯 합니다."

  카렌티어스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셰나에게 눈을 흘기며 유우키는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말야.  그저 네 녀석들을 만나고 싶어서 말이지.  구실로서 딱 좋잖아.  '유라시아 지부를 구하기 위해 용과 사투를 벌여 끝내는 승자로 군림, 다음엔 잠깐의 휴식'.  뭐, 이런 거랄까?"

  그는 카렌티어스에게 몸을 기울이며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놀러온 건 아니라고.  이번에도."

  무슨 소리를 하나 조금 심각해진 카렌티어스에게 유우키는 다시금 황당한 얘기를 했다.

  "파아티?!  아니, 요즘 세상에 무슨 얼어죽을..?!"

  마치 때 쓰는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유우키가 말했다.

  "이봐, 카렌티어스.  네 녀석도 너무 정서가 메말랐군.  오늘은 크리스마스라고.  게다가 아무리 북쪽이라도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야만 이루어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이런 날에 크게는 못해도 적어도 이제까지 잘 싸워준 그들에게 뭐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어른도 아니고 말이야.  너희들은 너무 차갑게 굳어가고 있어.  더 이상 가다간 동상에 걸릴 거야."

  "..  정말로 그 것 때문에 그 상공에서 트론을 타고 뛰어내리신 겁니까?"

  그는 팔짱을 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난 더한 이유로도 뛰어내릴 수 있어."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아래에서 섹시한 여자가 보였다 라든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뱉은 유우키의 말에 잠시 차가운 침묵이 돌자 그는 수초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곤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아, 물론 이미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그건 일단 일어나지 않겠군.  안 그래, 셰나 소위?"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왜냐하면 그땐 대위님의 그 썩어빠진 정신에 시원하게 구멍을 뚫어 드렸을 태니까요."

  *****************************************

  본래 케이지란 말처럼 간단한 건물이 아니다.  아니, 이젠 건물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도.  예전의 아카라의 첫 출전때 출몰한 용에 의해 케이지는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시설은 지하에 다시 재 건설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본부완 조금 떨어진 이곳은 직접 유전자 조작이 완료된 아이들의 생산을 하는 방, 아이들을 수용하는 넓은 몇 개의 방에 그들을 먹여주는 급식소, 그리고 불량품을 처리하는 방까지 꽤나 크고 넓은 시설이다.  유리카, 에릭 등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그 중에서도 Cage 1번 시설.  트론을 움직이는 파일럿들만이 쓸 수 있는 곳이다.  이 말은 즉 미래의 파일럿들이 머무르고 있는 Cage 2 등에 그들은 자유자재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지만 그 반대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Cage 1의 시설이 특별히 더 좋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다른 케이지 보단 조금 작은 방에, 특정한 시간대에만 시청할 수 있는, 바퀴가 달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18인치 TV와 비디오 플레이어, 곳곳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슬리핑 백, 그리고 나머지는 소량의 책이라던 지 그림도구 등 어쩌다가 한번씩 그들의 요구에 응해 주어지는 놀이도구들이 하얗게 칠해진 시멘트벽의 한 구석에 쌓여있는, 다른 케이지완 별 다를 바 없는, 어떻게 보면 극히 '평범'한 방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단지 그저 분류하기 좋게 방을 나눈 것일까 나.  마치 한 서랍에 들어가 있는 많은 양의 서류들을 디바이더로 정리한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마스?"

  지수 옆에 꼭 붙어있는 지나가 자신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가장 먼저 유우키에게 물었다.  

  "글쎄.  특별한 날이야?"

  유우키는 에릭의 질문에 픽 웃으며 말했다.

  "특별한 날이지."

  "그러니까 무슨 날인데?"

  카렌티어스는 잠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연설하려고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본래 교회에서 예.."

  "먹고 노는 날이다."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유우키를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카렌티어스를 무시한 체 그는 유리카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먹고 놀아?  정말?  그런 날이 있어?"

  "그럼, 그럼.  있고 말고."

  "근데 왜 이전엔 없었지?"

  에릭의 날카로운 질문에 카렌티어스가 우물쭈물하며 뭔가 변명을 자아내려 하였다.  아무래도 갑자기 이런 날을 만든다는 건 역시 어색한 법이다.  이것은 마치 친구의 생일을 여태까지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생일날 나타나 생일 빵을 때리며 '생일 축하해'라고 헛소리 해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우키가 애초에 그런 것을 신경 썼더라면 파티 어쩌고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을지라.  

  "그거야 네녀석들이 몰랐으니 지나친 거지."  

  너무나도 잔인한 대답이었다.  모른 게 죄였단 말인가.  잠시 멍하니 유우키를 쳐다보는 그들을 둘러보며 카렌티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셰나만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수습이 되었을걸.  하지만 그녀는 볼일이 있다며 어딜 나간 상태.
  얼어붙을 것 같은 썰렁한 공기에 유우키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이제 내가 왔으니.."

  "여기서 애들 모아놓고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시라카와 대위."

  방문을 열고 안경을 한 손으로 지긋이 올리며 유 박사가 차갑게 물었다.  얘기에 열중한 나머지 방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  아.  아아-!  이거 안녕하십니까, 유 박사님."
  
  "안녕 이고 뭐고 말이죠.  레이카비크에 갔다고 들었건만, 여긴 또 언제 들린 거죠?"

  "이 아저씨가 오늘 파티를 한 대요~!"

  유우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리카가 유 박사를 향해 밝게 말했다.  처음 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그녀의 불평 불만을 다 들어주며 계속 옆에서 도와준 유 박사를 일부러 싫어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러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유리카가 하지 못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거짓말이나 눈치를 보는 것에 서툴렀다.

  "이봐, 유리카.  난 아저씨가 아니야.  훨씬 젊고 또 아직 미혼이란 말이다."

  유리카는 잠시 보이지도 않는 그를 쳐다보다 카렌티어스에게 말했다.

  "오빠.  눈 좀 열어 줘."

  물론 카렌티어스를 뺀 누구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몰랐다.  본래 하는 행동을 봐서 유리카는 장님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고 트론을 조종할 땐 그저 그녀에게 사람들이 무언가 특별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도로 생각했었기에 카렌티어스가 한숨을 쉬며 유리카와 함께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그들 모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아저씨 맞잖아."

  그녀의 초점 없던 회색 눈동자는 탐스러운 적색의 눈동자로 바뀌어 유우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은 비록 살기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깊은 붉은 색을 내고 있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량의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  그래.  나 아저씨 맞아."

  유우키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공기를 맴돌았던 침묵은 카렌티어스의 웃음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처음엔 끅끅거리는 소리로 참으려 애쓴 것 같았지만 이내 봇물이 터지듯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천하의 시라카와 대위님이 자신을 아저씨라고 인정하다니!!  정말이야, 예전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와서도 절대로 자신은 아저씨가 아니라고 하더니..  푸하하하!!"

  "너..  안 닥칠래?"  

  "아, 저번엔 또 뭐라고 했더라.  그때 그 상태로 어떤 여자를 붙잡고 느끼한 목소리로 오빠가 뭐해줄게 어쩌고 하다가 '아저씨가 주책이야'라는 소리 듣고 한동안 방안에서.."

  "이 새끼, 너 정말 안 닥칠래?!"

  뭔가 좀 황당하기도 하고 분위기 파악이 제대로 안돼 그저 그 자리에 서있는 다른 일행들을 놔두고 그들은 서로를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확실히, 카렌티어스의 이런 모습은 그들에게 전혀 상상조차 가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유 박사야 시즈미가 죽기 전의 카렌티어스의 모습을 이미 봤으니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용에게 침식당한 어머니를 죽이고 피범벅의, 그때엔 흉측한 모습을 지녔던 유리카를 끌어안은 체 그들에게 나타난 아이.  그런 깊은 아픔을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고뇌와 슬픔에 젖어 빛을 피하고 어둠을 쫓던 아이.  시즈미는 카렌티어스를 그런 괴로움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린 사람이었다.

  ‘아이는 아이답게 놀아야지, 벌써부터 궁상떨면 못 쓴다고.’

  하지만 시즈미의 죽음은 다시 카렌티어스를 죄책감의 사슬에 결박시켰고, 그 결과 그는 마치 잘 훈련된 군인처럼 차갑고, 정에 이끌려지지 않는 소년으로 탈바꿈했다.  마치 이제 다른 생명들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듯.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 장벽이, 마치 점점 뜨거워지는 대기에 의해 서서히 녹아 가는 거대한 빙산처럼, 금이 가기 시작한 때가.  
  유 박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유리카에 의해서든 아니면 저기서 카렌티어스의 목을 장난스럽게 조이고 있는 유우키에 의해서든, 비록 이것이 하루밖에 가지 않는, 그리고 그 하루가 지나면 금새 다시 그의 마음이 얼어붙어 버릴지라도, 아직 저렇게 장난을 칠 정도의 마음이 허가되었다면 인간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금 같은 시대에도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봐.  A..  아니, 지수, 지나. 유리카.  그만 가볼까?"

  자신들의 눈앞에 놓인 난장판에 억지로 웃지 않으려고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에?  어디 가게요?"

  "물론 요리 할 재료를 구해보러 가야지.  파티 안 할 꺼야?"

  "할 꺼야, 할 꺼야!"

  유리카가 몸부터 먼저 움직이려 하자 가까이 있던 지수는 황급히 그녀의 휠체어를 잡고 천천히 밀어 주었다.  그때 다급한 듯 에릭이 말했다.

  "아..  전.."

  "응.  넌 저기서 뒹굴 거리고 있는 두 남자들과 잘 해봐."

  "에?!  잠깐, 저도.."

  "빠이, 빠이 ~ !"

  매정하게 방문을 닫고 나가는 유 박사 일행에 허탈해진 에릭의 목덜미를 유우키가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사러 가볼까?"

  "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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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과 싸우기 위해 철옹성 마냥 우뚝 서 있는 유라시아 지부의 본부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다.  전문적인 기계 오퍼레이터와 트론 담당 기술자, 과학자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카페의 주방장, 청소부까지 아주 폭 넓은 직업 군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살기 위한 주택 등이 본부 주위에 건설된다.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한 곳이 인구밀도가 집중되면 될수록 사회 안에서 개개인의 역할이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역할이란 방금 말한 여러 직업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요구로 인해 저절로 생겨난 역할도 있다.  '딜러'는 그 새로운 역할들 중하나이다.
  딜러란, 국가 연합에서 지급 해주는 의복과 식량, 소량의 가전 제품 등을 소비자와 직접 연결 시켜주어서 그 중간에서 이익을 보는, 한 마디로 예전 시대의 소매상이다.  그들은 여러 단체로 나뉘어져 각각 여러 지급된 물품들을 나누어서 여러 곳에서 돈을 받고 팔고 있는데, 초기엔 배급된 물품들을 동시에 여러 곳에 지급하기 위해 이런 것이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많은 소매상들이 자신들만의 가계를 열어 서로 경쟁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많은 소매상들과 인파들을 뚫고 시장 지부를 빠져 나온 유 박사는 조금 씩 빛을 잃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항상 직면하는 위험을 무시하는 듯 한 저 투명한 하늘.  그 곳에서 빛나는 별은 영원하건만, 왜 그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들은 그렇게나 짧고 일시적인 것일까.

  "아..?"

  누군가의 목소리에 유 박사는 자신의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그 곳엔 오렌지 색 단발머리의, 17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누구야?"

  유리카는 마치 상대방을 보려고 하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물 쭈물 하면서도 유 박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유 이리 박사님이시죠?"

  유 박사는 자신의 안경을 고쳐 잡으며 유심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얼굴.  하지만 바로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뿌옇게 먼지가 쌓인 거울을 바라보는...
  거울?

  "제가 유 이리입니다만..  당신은?"

  "전 알트 아이젠 소속의 셰나 소위입니다."

  "..  알트 아이젠이라면 유우키의..?"

  셰나는 다행이라는 듯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대위님을 저런 식으로 부른다면 그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소리가 된다.  비록 대위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어눌한 행동을 많이 하시지만, 타인에겐 절대로 약점을 잡히지 않는, 어떻게 보면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 분과 함께 왔죠.  박사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이..  에...  어?"

  셰나는 자신의 주머니 곳곳에 손을 찔러봤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이 그녀의 손 긑에 느껴지지 않았다.  유 박사일행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그녀는 자신의 온 몸을 뒤져보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저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아, 저, 그게.."

  그녀는 마치 망치에 세게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오늘 아침의 일을 기억해냈다.  유라시아 지부 근처를 지나갈 때 그 문제의 사진을 뚫어져라 보다 유우키 대위의 돌발적인 출격 때문에 사진을 그녀의 방에다 내 팽개치고 나온 것이 그녀의 머리 속에 생생하게 방영되면서 그녀는 이를 갈았다.  어떻게 만난 사람인데..

  '그 남자 평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 전혀 없잖아!!'

  "저..  죄...  죄송했습니다!  그럼 이만..!"

  얼굴이 빨개지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잡은 것은 지수였다.  정확하게는 옷자락을 잡은 것이지만.  

  "어디 가세요.  유우키 오빠는 저 쪽에 계시는데."

  "아저씨라니까."

  끝까지 아저씨라 우기려는 유리카에게 살짝 눈을 흘기며 지수는 셰나에게 말했다.

  "저기, 어차피 만나야 하실 텐데 저희와 같이 가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요?"

  셰나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황당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파아티 라구요?"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셰나는 자신의 앞에 그들이 만든 음식과 음료를 앞에 놔두고 그저 멍하니 자신의 주위를 바라보았다.  별로 볼 것도 없고 밋밋한 방의 중앙에서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먹고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기도 하는 그들을 보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유 박사는 어딜 나갔는지 보이지 않으니, 더욱 더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뒤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지수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아니..  그냥."

  지수는 셰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어디 아프신 건가요?  잠깐 밖으로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신경 쓰지마."

  셰나가 고개를 저으며 젓가락으로 부침개로 추정되는 음식을 집어먹었다.  바로 그 다음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

  "..  아프시죠?"

  "..  아니.  아픈 건 아니지만...  사탕이 필요한 것 같아."

  "네?"

  셰나는 손가락으로 문제의 부침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쓰다고."

  "아..  아무래도 유리카가 만든 걸 드셨나보네요.  그래도 전 보단 나은 편인데."

  "전 보단?"

  "전엔 음식이라기 보단 독약이었죠."

  지수는 살짝 웃으며 셰나를 바라보았다.  

  "아..  근데 셰나 언니는 왜 머리 색깔이 주황색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셰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별로 신경을 안 쓰던 점이라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물어오니 자신도 궁금해진 것이다.  언제부터일까.  이런 머리를 가지게 된 때가.  자신이 동양인인 점을 생각해 볼 때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머리는 아닐 것이다.

  "글세..  왜 일까."

  "..  언니도 모르는 거예요?"

  "..  응.  기억이 안나."

  "기억이 안 나면 한번 마시고 봐봐!!"

  유우키가 뒤에서 셰나를 잡은 다음 원통형의 모습을 한 물체를 그녀의 입에 갖다 데었다.  갑자기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놀란 셰리는 그의 팔을 잡아 몸을 젖히며 ...  던져 버렸다.

  "무헥?"

  원통형의 물건은 짙은 노란색의 액체를 사방으로 뿌리며 날아가고 유우키는 인형들이 쌓여있는 벽 구석에 요란하게 착지했다.

  "에구구.."

  "으웩, 퉤, 퉤!!  이거 뭐야?!  당신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유우키는 머리가 아픈 듯 뒤통수를 문지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사방에 흐트러진 액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아..  맥주가 쏟아져 버렸네."

  '맥주'란 소리가 나오자마자 셰리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니, 맥주라고요?  이 인간이 정말 머리를 어따 두고 오셨나?!  어쩐지 무슨 파티 타령을 하나 했어!!  그렇게 대충 애들 꼬신 뒤 자기가 술 처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  도대체 나이를 헛먹은 거야?!  미성년자들에게 술 마시는 걸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마시라고 입에 갖다 데다니!!  당신이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그나저나 그 맥주들은 어디서 난 거야?!  어디서 그런 걸 파는 거야?!  도대체가 요즘 같이 발 잘못 디디면 죽는 세상에 그런 쓰레기들을 팔 생각을 하다니!!  다 미쳤어!!  세상이 잘 못 돌아가고 있는 거야!!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원래는 그저 일본에서 호출 받아 본부로 돌아가는데, 빌어먹을 대위가 멋대로 일을 벌려놔서 술이나 처먹고!!  나 죽어야 되는 거야?!  맛이 이상했어!!  아니, 어떻게 보면 관계없을지도 몰라.  죽었으면 벌써 몇 번이나 죽었지!!  이런 걸로 죽을 리가 없지!!  암!!  그나저나 이 누런 액체들은 뭐지?  더럽잖아!!  역시 사람들이란 자신들의 주위를 항상 자각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거야!  안 그러니까 이 꼴이 나지!!  솔직히 말해서 난....."

  셰나는 처음엔 정말로 화가 난 듯 야자타임에나 감히 입에 담을 여러 가지 탐스러운 욕과 함께 맛이 가긴 했어도 엄연한 상사인 유우키를 몇 분 동안이나 질책하다 알코올이 몸에 돌기 시작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고, 유우키가 지루한지 하품을 하는 동시에 앞으로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  헤에.  짜식.  몇 모금 마셨다고 저렇게 쓰러지긴."

  유우키는 득의 양양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듯한 셰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  아저씨.  우리 오빠 왜 안 일어나요?"

  유리카가 카렌티어스를 계속 손으로 흔들어 보며 유우키 '아저씨'에게 물었다.  카렌티어스는 어지러운 듯 신음소리를 내며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아. 그 녀석, 피곤해서 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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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잠시 후 돌아온 유 박사가 방의 상태를 본 직후의 마음속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웃기긴 하는데 황당해서 웃지는 못하겠고, 저런 것을 마셔댄 유우키 등에게 화가 나긴 하지만 하고 있는 꼴들이 너무 웃겨서 제대로 화도 안 나고, 그렇게 좀 어중간한 기분일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랄까.

  "..  아, 박사님 오셨군요."

  눈을 가늘게 뜨며 유우키가 그녀에게 말을 걸자 유 박사는 일단 화부터 내기로 했다.  도대체가, 이십 몇 살이나 먹은 사내놈이 애들을 데리고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건가.  진짜로 애들이 마시고 자는 건지 피곤해서 자는 건지는 둘째 치더라도, 이 술 냄새는..  아무리 크리스마스라도 언제어디서 용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 판국에!

  "유우키..  도대체 이게 뭐죠?!"

  그는 태연하게 손으로 방을 훑으며 말했다.

  "보시는 대로."

  "저도 눈은 달려 있어요!!  아니, 도대체 맥주 같은 것은 어디서..."

  유우키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 설교는 제 부하 놈에게 충분히 들었어요.  이제 그만 들어도 될 듯 싶은데.."

  "이게 그 정도로 넘어갈 문제 에요!!  파일럿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으니 만약 용이 쳐들어오면 누가..?!"

  갑자기 전 구역에서 사이렌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단 한가지.

  "..  타이밍 정말 좋네.  어떡할 거죠, 시라카와 대위님."

  그녀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동시에 지나가 낮게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에..?  무슨 소리?"

  유우키는 지나의 머리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크리스마스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지."

  유우키는 다시 유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도저히 술을 마신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맑았던 지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박사님.  여기서 방 좀 치워주고 애들에게 이불 좀 덮어주세요.  추울 것 같은데."

  "뭐..?  잠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차."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 박사를 무시한체 한 손으로 셰나를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참 내.  어떻게 이렇게 깊이 잔담.  한 캔도 안 마신 주제에.  누가 잡아먹어도 모를 것 같네."

  투덜거리며 방문을 나가기 전, 유우키는 유 박사에게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적어도 이 하루만은 애들이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해주어야지요."

  *************************************************

  "좌표 0, 3, 42에서 용 서서히 접근!!"

  오퍼레이터의 다급한 외침에 커텔은 물었다.

  "파일럿들은 아직 인가."

  "보고된 바론 아직 대기실에도 가지 못한 듯 합니다."

  커텔은 얼굴을 찡그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늦는 것인가.  죽은 것도 아니고, 다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늦을 수가 있나.

  "..  저기..."

  20대 중반의 짧게 자른 갈색 머리를 지닌 남자 오퍼레이터가 조심스럽게 커텔에게 말했다.  커텔은 마치 뼈로 만든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가진, 두발로 활보하는 건물 크기의  용의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스크린에 눈을 떼지 않은 체 응답했다.

  "뭔가."

  "사실 위협적인 요소가 아니라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알트 아이젠의 트론이 케이지 부근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파일럿들의 대기 상태 지연과 무언과 관련이 있을지도..?"

  "알트 아이젠의?"

  커넬이 말을 체 끝내기도 전에 한 오퍼레이터가 외쳤다.

  "정체불명의 기체가 용을 향해 빠르게 접근!!"

  "추정 결과 알트 아이젠 소속의 트론 메가세리움 베타(Beta)로 판명!!"

  동시에 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텔의 옆에 있는 스피커에서 유우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아, 아.  들립니까, 커텔 지부장님?

  "..  시라카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 보시다시피 용을 처리하기 위해 나선 겁니다.

  "지금 보고 있네.  파일럿들은 어디 있나?"

  - 케이지 안에서 쉬고 있죠.

  "..  무슨 꿍꿍이야?"

  유우키는 난처한 듯한 목소리로 통신을 보내왔다.

  - 크리스마스이지 않습니까.

  "그게 어쨌다는 건가."

  - 아직 애들인 그들에겐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날이 필요한 것입니다.

  커텔은 조금 황당한 한 듯한 말투로 물었다.

  "오래 살다 보니 별 일을 다 보겠군.  시라카와 대위.  그들에게 도대체 그런 날이 왜 필요하단 거지?  그들은 병기이네.  우리들을 보호해줄 병기.  용과 싸우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고 그들의 삶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이야."

  - 그들은 인간이기도 합니다.

  "인간인가?  그들이?"

  -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있고, 똑같이 말을 할 수 있으며, 똑같이 웃을 수 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감정 있는 '인간'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정의는 무엇이지요?

  "..  내가 그것까지 자네에게 말해 줄 필욘 없을 것 같군."

  - ..  염려 붙들어 놓으시죠.  용은 확실히 처치해 드리겠습니다.

  "나도 자네가 그리 했으면 좋겠네.  서로에게 해가 끼치지 않도록."

  - ..  라져.

  무언가가 잠기는 소리와 함께 통신은 끊어졌다.

  **********************************************

  "후."

  유우키는 잠시 한숨을 쉰 뒤 능숙하게 다시 트론을 조종하게 시작했다.  그가 망가뜨린 트론 메가세리움 알파 대신 베타를 타 느낌이 조금 달랐지만 기본적인 것은 모두 비슷해 그는 무리 없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었다.

  - 대위님.  무리한 짓은 하지 말아 주시길.

  그의 앞에 붉은 색 영상이 나타나며 말했다.  색깔 때문에 어떻게 모습을 판별하긴 불편했지만 짧게 자른 머리를 지닌 20대 중반의 남자인 듯 했다.

  "언제 내가 무리하는 것을 봤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유우키를 향해 그는 조소를 띄며 한마디 던졌다.

  - 오늘 아침에 아주 자세히 봤죠.

  "시끄러.  네 녀석이 내 집중을 흐트러뜨린다."

  유우키의 트론은 트론의 팔목크기정도의 어설트 건을 들어 용에게 난사하기 시작했다.  용은 괴로운 울부짖음을 내면서도 조금씩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코어 서치 아날리시스 완료.  

  "그렇게 보고만 하지 말고 어딘지 가르쳐 주지 그.."

  갑자기 용이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두 팔을 트론에게 쭉 뻗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의 팔은 말도 안되게 늘어나더니 그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칫..  젠장."

  - 그것의 코어는 머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  어떤 놈들은 꼭 딱 튀는 데에다 코어를 걸어 놓는단 말이야.  근데 저게 꽤 단단하더군."

  - 편하게 말만 하고 계실 때가 아닐 터인데요.  그러다가 침식당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 대신 츠라 대령의 면상에다 가운데 손가락을 들이밀어 주겠나, 히르첼 중위?  죽기 전에 그걸 꼭 한번 해보고 싶은데."

  - ..  사양하겠습니다.  

  "그렇겠지."

  유우키는 자신의 손을 빠르게 놀렸다.  동시에 가죽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용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뒤로 내뺏다.  그것의 앞엔 날카로운 날들이 단정하게 솟아 나온 양팔을 가진 유우키의 트론이 서있었다.

  "근접전 전용의 베타답구먼.  별개 다 있어."

  그의 트론은 오른 손의 날들을 자동으로 집어넣고 뒤로 손을 뻗어 무언가 거대한 것을 잡았다.  사슬이 풀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유우키가 뽑아 들은 것은 듀거 란스.  그 거대한 무기가 표출하는 위압감에 질린 것인지 용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다시 재생된 팔을 뻗었다.

  "이런.  그 공격밖에 없나보지.  다행이구만.  쉽게 끝날 것 같아서."

  유우키의 트론은 용의 손이 다시 자신을 휘감기 전에 듀거 란스를 조준해 힘껏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란스는 그대로 용의 얼굴에 박혔지만, 그것으론 모자랐는지 아예 용과 함께 날아가 근처의 건물에 그대로 꽂혔다.  동시에 끈쩍한 소리와 함께 용의 머리가 터지더니 머리 없는 몸은 힘없이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다행히도 만만한 상대였어.  이것도 어찌 보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 만일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선물이 되겠군요.

  눈은 대지에서 방금 일어난 격렬한 전투와 살육을 무시한체 계속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  한 해의 피날레가 가까워짐을 알리는 메센저 마냥.

  ***********************************************

  "으음..."

  카렌티어스는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케이지 1번 방 슬리핑 백 안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벌떡 일어서다 금새 후회했다.  엄청난 두통이 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카렌티어스는 손끝으로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편지를 발견했다.

  "..  음?"

  카렌티어스는 편지를 주운 후 용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어제의 일은 꿈에 불과한 것처럼 잘 정리 돼있는 방안엔 에릭, 지나, 지수, 유리카와 유 박사가 슬리핑백에서 자고 있었고 셰리와 유우키만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갔나?  그럼 이건 유우키 형이 쓴 것이겠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카렌티어스는 이내 편지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 크리스마스는 본래 기쁨의 날이지.  그때 넌 아주 어려서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알며 살아왔어.  그 날은 또 시즈미의 생일이기도 하니까.  잊을 수가 없지.  
  기뻤다, 네가 아직도 시즈미의 생일을 기억해 주는 것에.  어떻게 알았냐고?  시즈미의 무덤 위에 있는 새 꽃을 보고 단숨에 알았지.  너에게 가기 전에 잠시 들렸거든.  하, 오빠란 사람도 제대로 선물을 못 챙겨주는 판인데.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걸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본래 주머니가 가벼워서 말이지.  그때 파티 생각이 난 거다.  뭐, 조잡하다고 생각한다면 할말없다.  내 머리가 어딜 가겠냐.
  파티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조촐한 분위기였지만, 난 어쩔 수 없이 느껴버렸다.  그들의 인간성을.  웃고 울고 화내고 미소짓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우리들을.
  카렌티어스.  이거 하난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인류를 위해 그들을 찍어내고 마구 부려먹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지.  이것은 역사를 배워 알겠지만,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부려먹었을 때와 같은 원리야.  그들을 인간으로 대접해주면, 부려먹을 수 없으니까.  
  웃기는 얘기지.  그들을 지켜주는 자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다니.  그렇게 자신들의 몸을, 자신들의 목숨 하나 하나를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기에 우리들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거다.  진보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어.  
  이런 사건이 있었지.  사람이 많은 버스에서, 남에게 해를 주는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어떤 청년이 나서서 주의를 주다 총을 맞아 쓰러지고 가까이 있던 흑인 소녀도 다쳐서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체 살아가게 만든 사건.  많은 버스 안의 사람들은 그 청년을 욕했지.  쓸데없는 일에 끼여들어서 일을 자초했다고.  어리석은 놈이라고 욕했어.
  네 생각에, 어리석은 쪽은 누구라고 생각하니?
  네가 어떻게 생각 하냐에 달렸지만, 난 그 청년 같은 사람이 될 거다.  물론 그 와중에 많은 관계없는 사람들이 다칠 수 도 있어.  나에게서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고, 정말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  많은 사람들이 날 비웃거나 욕할 수 도 있어.  
  하지만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한 길로 갈 거다.  그 어떤 것이 나를 잡아끈다 해도.
  내가 너에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리카 때문이다.  저번에도 그 건에 대해 우리가 서로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지.  난 너를 믿지만, 그래도 여동생이란 존재는 누구라도 나에게 시즈미를 떠올려 주기에 조금 우울할 때가 있어.  그리고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해주지 못한 많은 것을.
  절대 유리카를 울리게 하는 일은 하지 마라.  어떤 길을 걷던, 결코 그녀를 울리지마.  그것이 오빠로서의 너의 책임이다.
  나처럼 다 늦은 다음에 후회하지 마라.
  ..  뭐, 딱딱한 얘기는 이쯤에서.  이렇게 쓰다보니 시간이 꽤 가는군.  도대체가 말이야, 사내녀석이 맥주 한 캔 마시고 그렇게 가냐.  몇년만 있으면 어른이 될 놈이.  아직도 알갱이는 꼬맹이란 말이야.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땐 부디 어른이 되 있기를.

                                                                                   유우키 시라카와 -

  "..  편지 좀 잘 쓰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잖아.  어른이 되라 라는 게 맥주를 잘 마시라는 거야 뭐야?  정말이지.."

  투덜거리며 편지를 다시 접고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다 넣는 카렌티어스.  그의 눈시울은 조금 젖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