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는 우주는 아무 가치가 없다.
2010.03.15 03:57
이 시간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물에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과학적이고 일반적인 법칙을 말한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우리가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한 사물이 과연, 우리가 죽고 나서도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
수천억을 넘어 수조원이라고 한들, 죽은 사람에게 쓸모가 있는가?
죽은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無라고 전제할 경우, 죽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남는다고 하는 명예조차도 가치가 없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은 후가 태어나기는 커녕 수정란이 생기기도 전처럼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전제한다.
살아 생전 아무리 이름을 남기길 원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명예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족조차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존재를 잃어버림으로서 스스로의 가치 또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상에서는 하루에도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들이 단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돕기를 거부한다.
그들의 생명의 가치는 그렇다면 어디에서 나오며, 그들이 굶어죽지 않게 구호물자를 보내줄 도덕적 의무는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생명이 존엄한 이유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생명이 인간 사이에 평등해야 하는 이유는?
약육강식의 정글 법도를 누르고 만인이 평등한 이유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건 자연의 법이 아닌가?
굶어죽어가는 아이들의 생명이 내 생명만큼이나 귀하다는 건, 단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귀하다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법인가?
내 생명이 내 재산에 우선되듯이 그들의 생명도 내 재산에 우선되는 이유는?
그들은 어차피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내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다른 누군가에게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결국은 그 누군가에게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아닌가?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가 사라지면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어떤 재화에도 값을 매길 사람이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 전 우주는 가치를 부여하는 나로부터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인류에 값을 매기는 존재가 없이, 인류와 인권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사회에서 옳고 그른 것이란 무엇인가?
가치를 보호하거나 생성하는 것은 옳고, 가치를 파괴하는 것은 그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값을 매기신 영혼이 없다면, 영혼없는 인간의 죽음이 파리나 바퀴벌레의 죽음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
단지 다른 인간에게 쓸모가 있어서?
바퀴벌레도 서로에게는 쓸모가 있다. 암놈은 숫놈에게 쓸모가 있고, 숫놈은 암놈에게 쓸모가 있다.
알을 낳아 서로의 유전자를 퍼뜨리니까.
지구 반대편의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아이들이 굶어죽는 것이 안타까운 이유는, 인간에게 쓸모없는 그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기 때문이다.
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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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尹主]
2010.03.15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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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尹主]
2010.03.15 04:57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제 생각이니까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냥 겸손히 물을 따름이고요.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따지는 건 아녜요;; |+rp+|17452|+rp2+|17453|+rp3+|main_sibal -
S.J.Rush
2010.03.15 05:32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인간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에 의해 무엇이 결정된다고는 볼 수 없겠네요.
신이란 것은,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하나의 정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정신에 의해 우리들의 가치가 매겨진다라...모순이죠.
지구에 굶는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말 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굶는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사람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연쇄작용 같은 것이죠.
생각해보시죠. 사람이 없다 치면 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신은 존재해도 우리 '사람'들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죠. 아니,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없다는 것 자체부터가 모순입니다.
신은 우리 '사람'들의 정신일 뿐이지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잘 살게 해 달라고 빌면 이루어질까요?
물론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그건 사람이 행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음...말이 길었군요. 아무튼 제 의견은 이겁니다.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 우주에 가치가 매겨지지, 신이 있음으로 인해 우주에 가치가 매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rp2+|17454|+rp3+|main_sibal -
S.J.Rush
2010.03.15 05:33
써놓고 보니 이상하네요. 아무튼 이건 토론일 뿐입니다.. 알거라고 믿습니다. ㅎㅎ |+rp+|17454|+rp2+|17455|+rp3+|main_sibal -
Evangelista
2010.03.15 07:36
2년 전이 나았다...|+rp2+|17456|+rp3+|main_sibal -
천무
2010.03.15 17:51
누군가 없다고 하여 모든것이 가치가 없게 만드는것이 그들이 원하는 진리라면.
나는 무가치의 세계에 버림받은 가치없어진 어린양들에게 가치를 일깨워주는데 힘을 쏟겠소.
법정스님 스타일로..ㅡ.ㅡ;|+rp2+|17457|+rp3+|main_sibal -
슈퍼스타
2010.03.15 20:15
너무나도 종교적인 발언이라 이런 글에 태클을 걸고싶진않다..|+rp2+|17458|+rp3+|main_sibal -
용호작무
2010.03.15 21:23
좋은 글인데 읽기 힘들다 ;ㅅ;... 읽고 댓글 달게요.|+rp2+|17459|+rp3+|main_sibal -
샌슨
2010.03.16 00:14
하느님이 그렇게 좋다면 일단 하느님에 대한 모든 글 부터 읽어보세요.
재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과연 하느님은 언제부터 우리의 문명과 존재했으며
과연 그것이 올바르게 일치하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하느님하느님 하고 따르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
난 그런거 찾아보다가 경전과 비경전 그리고 그 당시 시대상 조사 까지 하면서 읽어봤는데
신이라는 건 애초 그냥 인간이 믿고 싶어서 만든게 아닌가 싶습니다.|+rp2+|17461|+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02:28
"재수가 없어서"라는 부분을 좀 더 깊이있게 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국가에는 재벌 아들딸과 엄친아, 엄친딸이 존재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상놈이 있어서 날 때부터 만렙 풀템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었고 아닌 사람이 있었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윤회, 환생, 업보 등으로 풀이함으로서 죄를 씻고 공덕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스님들께서는 고대 사회에서 승려 집단의 가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의 문제와 책임을, 본인에게 물은 교리입니다. 반면 사회주의 정치가들은 "날 때부터 만렙 풀템으로 태어난 걸 어쩌라고?" 반문합니다.
그리하여 불교 사회에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천인공노할 대죄를 지은 사람이 환생하였다 하여 형벌을 받고 있는 죄인 취급을 받았고, 또한 부잣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전생에 큰 공로를 세워서 그렇게 태어났다 하여 부잣집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양반 상놈의 계급 사회에서도 양반은 단지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것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유교보다도 불교의 영향이 훨씬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해서 양반으로 환생한 것이니까요.
불교의 이론대로라면 굶어죽는 아이들은 결코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자신의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이론을 살펴볼까요?
굶어죽는 아이들은 자신의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돕지 않는 사람들의 돕지 않는 죄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돕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굶어죽는 아이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신앙에서는 그 죄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죄없이 죽음으로서 그 책임을 지셨습니다. 굶어죽는 아이들은 결코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돕지 않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 즉 우리의 죄 때문에 응당 영혼의 가치를 지닌 자로서의 권리인 생명권을 침해당한 것입니다.
왜 그것이 악한 마음인가? 왜 도와야 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굶어죽는 아이들의 생명권, 즉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 해당하며, 또한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자세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할 때 첫째로는 하나님이 지우신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니 명령불복종의 죄가 되고, 둘째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우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신성모독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선악이나 정의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고 절대선한 존재 없이, 누가 선악이나 정의를 감히 이루고 결정한단 말입니까?
인간의 힘으로요? 어림반푼어치도 없습니다.
아마 법치 제도로 80퍼센트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가정해도, 나머지 그 재수없는 20퍼센트의 불의는 누가 짊어져야 할 책임일까요?
20퍼센트의 악인이 오래 살고 의인이 핍박 받는다면, 선하게 사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선악과 정의는 의미가 없으니 이미 그 가치를 잃게 되는데, 강하고 약한 것만이 가치가 있는 약육강식의 법도 안에서는 강한 것이 선이고 약한 것이 악이며, 이긴 자가 의인이며 진 자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걸 아는 전지함이 없기에 범죄자라고 판결을 내린다 하여 모두 범죄자가 아니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능함이 없기에 범죄자를 다 잡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단 1퍼센트에게도 우주가 불의하다면 그 1퍼센트에게는 우주가 의미가 없으니 가치 또한 없습니다. 어떤 선을 행해도 악으로 돌아오고, 어떤 의를 좇아도 죄로 돌아오는 1퍼센트의 입장에서는 우주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뭘해도 소용없으니 사는 의미 또한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건 또 왜 살까요? 죽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는 無라고 전제하면 인생은 가치가 없습니다.
도와주지 않은 자의 책임을 물어 굶어죽은 자의 억울함을 갚아주는 존재, 전지전능하고 절대선한, 절대가치의 영원한 존재가 바로 우주에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rp+|17452|+rp2+|17462|+rp3+|main_sibal -
ぎる
2010.03.16 02:50
개인적으론 '하나님' 보다 객관적으로 수용할수있는 '하늘님'이..
어딘가 계시겠지?|+rp2+|17463|+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03:21
말씀하셨듯이, "우리들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정신에 의해 우리들의 가치가 매겨진다"는 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이 존재함으로서 생기는 정신"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고 절대선하며 영원한 존재를 경배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며 가장 우선되는 가치입니다.
지구의 굶는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구의 굶는 아이들을 보살펴줄 책임을 인간에게 부여한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보살펴 주지 않는 이에게는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이 없는 우주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고로 존재 가치 또한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 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현실에서 사람은 존재하므로 신이 없다는 결론은 참이 아닙니다.
if p then q, Not q, not p의 논리학 공식을 적용했을 때,
"만일 사람이 없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논증의 구조는 아래와 같이 변형됩니다.
"신은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은 존재한다."
즉,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사람은 존재한다"는 논증이 성립됩니다.
유효한 논증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만일 사람이 존재한다면, 신은 존재한다"는 논증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실에서 사람은 존재합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사람은 존재합니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사람이 존재합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신이 존재하는 것이 되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일 사람이 존재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라고 할 경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로 변형됩니다.
여기서 보시다시피 사람은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 없이 악한 사람만 있고 의인 없이 죄인만 있는 우주에 가치는 없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조차도 기준이 없고,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의 기준조차 없는 우주에 가치는 없습니다.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을 판가름할 수 있는 이는, 전지전능하고 절대선하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절대선한 존재이기에,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rp+|17454|+rp2+|17464|+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03:37
하늘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늘은 전지전능하거나 절대선하거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여 하늘에만 계신분이 아니며 절간에도 계십니다.
모든 곳에 계시지만 아무 곳에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신을 칭하던 한울, 한얼, 한알 중에서 한알을 따와서 하나님으로 칭한 이유는,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열매를 맺는 십자가 대속 교리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rp+|17463|+rp2+|17465|+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03:49
신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간이 믿고 싶어서 만들었다는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이 공허한 우주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이 바로 제 주장입니다.
신이라는 것의 존재를 만들었다는 논리는, 그대로 인간의 영혼이라는 개념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논리로 직결됩니다.
영혼이 없는 인간은 로봇만큼이나 인격이 없으며, 금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 정의 또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억압을 정당하다고 믿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논리 역시 성립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악이나 정의는 단지 강한 자의 이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약한 자를 상대로 휘두르기 위해 강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일까요?
강간을 금지한 법은 그렇다면 정의가 아니라 성욕을 채우지 못한 불쌍하고 약한 남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딸 가진 부모들의 자식농사 만족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인가요? |+rp+|17461|+rp2+|17466|+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04:22
딸 가진 부모들은 안정적인 가정을 이룬 강한 자들입니다. 반면 성욕을 채우지 못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잉여남에게 강간을 금지한 법령에 의한 억압은 강한 자들이 사회적 약자를 성고문하는 일이 아닌지요. |+rp+|17461|+rp2+|17467|+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16 09:12
위대한 영도자 없이 일정한 흐름이 있을리 없다고 단정하실 것만은 아닌 것같네요. 사람 하나하나는 분명 죽은 뒤 아무것도 없게 되지만, 이 세상에는 동시에 태어나 동시에 죽는 사람들 말고도,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서로 다른 시대에 죽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함께 하나의 패턴을 이루었다가, 어느 순간 흩어져 그 패턴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역사나 법률, 윤리, 사상, 제도, 온갖 인간이 만든 것들은 인간이 지상을 정복했다고 뻐기기 시작한 이래로 수명이 다할 가능성이 거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인간의 창조물 가운데 어떤 건 사라지지만 어떤 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계승되건, 형태를 바꾸건 간에 말이죠. 예컨대 불교가 탄생한 지 수천년이 지났건만 불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인간이 창조했지만 창조자 손을 떠나 무한한 패턴을 이루기 시작한 모든 창조물들은 사실상 인간과 분리되어 스스로 생존하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을 결정하는 게 인간일 수는 없지만, 인간의 선악을 결정하는 게 먼 옛날부터 인간이 이어오던 패턴일 가능성이 없지 않죠.
하지만 그 패턴이 하느님과 동일시, 혹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냐 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인간이 패턴을 만들었다는 쉽게 증명할 수 있지만, 하느님이 스스로 그 패턴을 만들었다 혹은, 하느님이 인간더러 그 패턴을 만들라고 시켰다는 건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과거 인류에겐 숱한 예언을 배풀어 그들을 행복케 했던 하느님이 현대 우리에겐 한참 뒷얘기인 묵시록 이외 어떠한 예언도 남기지 않은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결국 죽어서 무가 된다는 결말이 있다는 게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이 죽어서 무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설령 무가 된대도 그 무와 비교되는 지금 삶이 있지 않습니까? 삶은 그 이후의 무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네요.|+rp2+|17468|+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16 09:19
절대 선한 이가 세계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절대 악한 이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절대악에 영웅적인 항거를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신도로서 적절치 않은 논의지만 논리적으론 타당하지 않을까요?
공부 내공이 부족하다보니 문득 떠오른 이같은 생각에 반박할 증거 찾기가 만만치 않네요; |+rp+|17468|+rp2+|17469|+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17:35
잘 살게 해 달라고 비는 건 믿어도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한 십계명을 어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인생에 감사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당연히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리가 없습니다. |+rp+|17454|+rp2+|17471|+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17:42
절대 악한 이는 가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절대 악한 이는 스스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惡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악인에게 아무리 쓸모가 있어도 결국은 절대악인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따라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惡은 가치를 파괴하는데서 시작합니다. |+rp+|17468|+rp2+|17472|+rp3+|main_sibal -
협객
2010.03.16 17:52
쓸모없는 존재에게는 아무리 쓸모가 있어도 죽쒀서 개준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낭비일 뿐입니다.
낭비라는 이름의 가치의 파괴에서 악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악은 가치를 창조하지 않고 파괴만 할 뿐입니다.
무엇이 선하냐 악하냐는, 가치가 있는 일을 하느냐 아니면 가치가 없거나 가치를 파괴하는 일을 하느냐로 정의됩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 상대편 골에 골을 넣으면 스코어지만 우리편 골에 골을 넣으면 자살골이 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애써서 상대편 골에 골을 넣어도 자살골 한 번 넣으면 골 하나를 더 넣어야 하게 됩니다. |+rp+|17468|+rp2+|17473|+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17 05:41
역시 길어지는군요....하지만 마지막까지 이 머리나쁜 중생 한 명 구원해 주시길;;
절대 악한 이는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결국 축구 경기에서 넣는 자살골도 가치는 가치인 거죠. 스코어가 변하니까요.
줄곧 절대적인 선이 있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은 가정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관점에서 굉장히 오만한 거죠. 하느님이 정말 인간과 독립되어 먼저 존재한 분이시라면,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이 '이런이런 게 절대선이다'라고 규정짓는다는 자체가 우스워보일 따름이실 겁니다. 진정 만물의 창조자라면 그가 감지하는 건 단 두 가지, '균형'과 '변화' 아닐까요?
하느님이 절대선이란 건 굉장히 민감한 얘기입니다. 왜냐면 그가 티 한 점 없는 선한 이라는 걸 인정하고 강화하면 할수록, 그를 상대하는, 어쩌면 그와 거의 동등한 능력을 가진 절대악이란 게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세상이 하느님 단 하나의 원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기독교의 일원론적 세계관을 유지하기가 까다로워집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단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선악 대비의 정점이라 할 수 있겠죠. 감히 절대선에 도전할 정도로 강대한 악이라니요!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선 하나만이 아니며, 선과 악 두 가지 힘이 세계를 움직인다는 주장이 담긴 게 요한계시록이기 때문에, 그 텍스트가 성서 전체 텍스트 가운데서도 가장 이질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겁니다. 최소한 신약 내에서만큼은 말이죠.
갑자기 불교의 관점에서, '곤궁한 자는 전생에 죄지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곤궁한 자고 부유한 자고를 넘어서 애당초 불교의 논리에서는 부유하고 곤궁할 '나'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곤궁한 건 즉 내가 곤궁한 거고, 내가 부유한 건 곧 그들이 부유한 겁니다. 따라서 불교는 모든 존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하고 가엾게 여깁니다. 즉 불교에서 남을 위하고 돕는 일은, 굳이 가치를 부여하는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선한 행위란 거죠. 그 행위로 인해 남이 행복하면 곧 내가 행복한 거니까요.
'진짜'라는 수식어를 함부로 붙여 얘기한다면, '진짜 기독교'는 신을 상정해야만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진짜 불교'는 신 없이도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철학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신이 있건 없건 선악이 있건 없건 그 자체를 무시하고도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관점에 따라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하느님 없는 우주는 무한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rp2+|17478|+rp3+|main_sibal -
협객
2010.03.18 02:43
인터넷에 돌던 이야기긴 하지만 간단한 예가 있습니다.
절대악과 절대선을 논하셨는데, 뜨거움이 있다면 차가움도 있다고 생각하시겠군요?
하지만 뜨거움의 경우 6000도를 넘어서 어디까지 뜨거워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차가움의 경우 절대0도라고 부르는 -273도인가까지밖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밝음과 어둠의 경우 역시, 밝음은 어디까지 밝아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둠의 경우는 빛이 없으면 어두운 겁니다.
악의 개념을 선의 결핍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즉, 디지털 개념으로 봤을 때 하나님을 1의 가치로, 하나님이 없는 우주를 바로 가치가 없는 0의 가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표현일 뿐 현상 자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뉴튼의 만유인력이 표현일 뿐 현상 자체는 아니듯이 말입니다.
성경도 인간의 문자로 기술되고 번역되면서 또 번역되는 과정에서 신학자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끼어들면서 복음 자체라기보다는 복음을 표현한 것이 되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이해 역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읽다 보면 성령이 임하여 성령을 통해서 직접 복음을 듣는 편이 훨씬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은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직접 구하셔야 할 겁니다.
존 로크와 데카르트가 경험론과 이성론으로 인지/지식/지혜가 어디서 나오는지 논했지만, 개나 원숭이를 아무리 교육시켜도 결국은 인간과 똑같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보다도 더 옳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rp+|17478|+rp2+|17479|+rp3+|main_sibal -
협객
2010.03.18 04:05
간단한 증거로 반대되는 것과 모순되는 것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검은색이 흰색의 반대된다고 하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많은 색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검은색과 안검은색을 말한다면, 검지도 않고 안검지도 않은 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를 반대되는 관계가 아닌 모순되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기독신앙에서는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면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지도 않고 마귀의 지배하에 있지도 않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반대되는 관계가 아닌, 모순되는 관계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죽음과 안죽음, 죽음과 삶은 모순되는 관계와 반대되는 관계가 똑같죠?
죽지도 않았으면서 살아있지도 않아 있는 상태는 있을까요?
하나님이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고 있거나, 아니면 죽은 것을 뜻합니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가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rp+|17478|+rp2+|17480|+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18 07:14
좋은 얘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겸허하게 몇 자 묻고 또 제 생각도 적어볼까 합니다.
악의 개념을 선의 결핍으로 생각한다라느니, 차가움은 뜨거움의 결핍이라느니, 어둠은 밝음의 결핍이라느니 하는 말들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경험적 사례들을 드셨으니 저도 사례를 들어야겠죠? 어쩌다 차를 마실 때가 있는데 가끔 저는 100도씨 물을 만지고 앗 뜨거워, 라고 하고는, 미지근한 물을 만지곤 이건 덜 뜨겁네, 혹은 저것보단 더 서늘하네(더 차네)라고 얘기를 하곤 합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결국 차가움과 뜨거움은 항시 함께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또 램프를 켤 때 간혹 조도가 강, 중, 약으로 조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는 약이 중보다 더 어둡다고도 말하지만 덜 밝다라고도 얘기합니다. 빛과 어둠이 항시 공존하는 개념이란 뜻입니다.
한없이 밝게란 개념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보통 눈앞이 새하얗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상상하게 됩니다만, 우리 눈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빛 양이란게 한계가 있어서 사실상 이런 상태가 되고도 한참을 더 밝아질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눈앞이 새까맣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도,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어두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절대 영도와 초고온은 어떨까요? 절대 영도에서 분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초고온 상태에서 분자는 흔히 플라즈마 상태가 되어 분해된 채 빨리 움직인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절대 영도는 측량하기 쉽지만 초고온은 온도측량이 사실상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플라즈마 상태를 인간이 완벽히 통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도가 얼마나 더 올라갈지 모른다는 건 현실적인 한계일 뿐이고, 만일 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온도를 높일 수 없는 극한의 고온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절대 영도나 초고온도, 혹은 극도의 밝음과 어둠도 사람에게는 둘 다 극한환경인 것은 사실일 겁니다. '거기에는 선이 없다'랄까요? 반면 디지털 개념에 있어 0과 1은 어느 하나가 가치가 있고 다른 하나가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일 겁니다. 1이 없으면 아쉬운만큼 0이 없어도 아쉬운 건 똑같을 테니까요. 디지털에서의 0과 1은 둘다 동등한 가치가 있는 거겠죠. 이 표현을 가지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이 있는 우주와 없는 우주, 0과 1, 빛과 어둠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둘 사이에 어떠한 가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싶네요.
하느님과 마귀 얘기도 제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느님과 마귀가 왜 모순관계일까요? 성경을 가지고 설명을 한 번, 사례를 가지고 다른 방향에서 설명을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과 마귀는 모순 관계가 아닙니다. 마귀도 하느님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마귀나 질병에게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말하며 권능을 발휘할 수 없었겠죠. 또 최후의 심판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지배하에 있는 죽은 이들만 끌어와 심판하는 게 아니라 '여태 죽은 모든 이'를 되살려 심판하신다고 말하셨습니다.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도 궁극적으론 하느님의 지배하에 들어가므로, 하느님은 이들 모두를 소환할 권능을 가진 것이죠.
하느님과 마귀 관계를 일반적으로 오해하기 쉬운 이유는 사실, 기독교의 선천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원래 일원론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하느님 한 분이 유일하게 세계를 창조하고 운영하시니까요. 하지만 성경에선 마귀가 '선의 결핍'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 주체로 나옵니다. 즉 이런 상황입니다. '하느님이 유일하게 세상을 지배하시는 힘이야, 그런데 실은 세상을 움직이는 다른 힘도 있어.' 이렇게 귀엣말해주는 상황이란 거죠. 때문에 교부철학이니, 복잡한 이론들이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불완전한 일원론이기 때문에요. 하느님과 마귀를 모순 관계로 보는 경우, 즉 명확한 이원론으로 보는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입니다. 반대로 기독교보다 분명하게 일원론적 세계를 그리는 것이 이슬람교라고 하더라고요. 기독교는 사실 정도를 지키기 굉장히 어려운 종교란 겁니다.
사례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협객 님은 하느님 = 가치, 마귀 = 무가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방금 전 얘기하기론, 엄밀히 말해 무리가 있다고 하긴 했습니다만 여기선 이 논리를 그대로 가지고 말해볼까 합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하느님과는 평생 인연이 없으셨지만 이 분이 가치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얘기하실 분은 없을 겁니다. 있을까요? 있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가치없는 분이, 하느님이 있는 삶을 사는 수많은 가치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이해인 수녀님같은 분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는가, 라고요.
김수환 추기경님은 평생 하느님을 신실하게 믿고 가치있는 삶을 사셨지만, 그분이 보신 성경 말씀은 어떻습니까? '정본'이라는 기독교 성서와 천주교 성서를 비교하면 천주교 성서는 기독교 성서보다 몇 개 텍스트가 더 들어가고 내용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오점 없는 하느님 말씀'이라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평생 안고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하느님이 있는 삶을 사신 걸까요, 아니면 다른 삶을 사셨던 걸까요?
님이 얘기한 가치와 무가치로 이 두 분을 분류해 보죠. 법정 스님은 하느님이 있는 가치있는 삶을 사셨나요, 하느님이 없는 가치없는 삶을 사셨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은 하느님이 있는 삶을 사신 걸까요, 그렇지 않은 걸까요? 분류하기 곤란함이 있다면, 그건 님이 생각하고 계신 가치와 무가치는 모순 관계가 아니라 반대 관계인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없는 우주는 가치 있는 세계는 아니어도 가치 없는 세계도 아니라고요. 저는 이 명제가 더 마음에 듭니다.|+rp2+|17481|+rp3+|main_sibal -
Vermond
2010.03.18 23:12
간만에 글을 썼지만 결국 1:1배틀화|+rp2+|17493|+rp3+|main_sibal -
Vermond
2010.03.18 23:13
참고로 글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고 이전 경험에 의거해 안 읽기로 했습니다
귀찮구요 |+rp+|17493|+rp2+|17494|+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19 06:08
배틀이라기보다 그냥 수다 떠는 거죠 뭐...;;
사실 이런 주제야 항상 결론 안나는 거지만서도 다른 사람 생각 들어본단게 어딘가요;; |+rp+|17493|+rp2+|17495|+rp3+|main_sibal -
Vermond
2010.03.19 06:36
수다는 실시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인데
그걸 감안하면 수다라고 하긴 힘든게 댓글토론이죠
길어서 읽기도 귀찮아요 |+rp+|17493|+rp2+|17496|+rp3+|main_sibal -
RainShower
2010.03.24 10:48
흠... 글쎄요... 이글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겐...
쭉 읽어봤는데, 마치 하나의 판타지를 보는것같기도하고;; 그냥 던져보는 말이지만,
만약 여기가 신이 없는 세상이라면 저희 전부다 무가치한 존재인가요?? 여태까지 저희 살아온건 다 거짓말인가요? 글쎄요... 최소한 무가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된다는건데....;;;;
협객님께서 신이 있다고 믿으시는 한 이곳은 가치가 있지만, 전 신이 없다고 믿으니까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게 되는군요..; |+rp2+|17503|+rp3+|main_sibal -
협객
2010.03.26 00:35
난해하긴 합니다만...
증명의 문제라면, 이 전제에서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이 없다고 전제했을 때 세상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있다는 것은 있다는 쪽에서 증명해야 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이 신이 있다면 신이 있다는 쪽에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없다면, 세상에 가치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rp+|17481|+rp2+|17505|+rp3+|main_sibal -
협객
2010.03.26 01:16
세상이 가치가 없다고 한 전제는 곧, 무신론자의 삶과 존재 역시 가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가 있는 세상에서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피조물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치가 없습니다.
창조되지 않았다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의미를 증명해야 하고, 인생의 의미를 증명하려면 인생의 목적과 목표의 존재를 증명해야 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무소유 사상으로 살다간 법정스님이 어쩌면 가장 앞서서 인생에 의미는 없다고 대답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의 무소유 사상은 소유의 의미 없음을 선포하는 사상 아닌가요? |+rp+|17503|+rp2+|17506|+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26 03:05
오랜만에 뵙습니다. 덕분에 조금 더 여쭙고 배울 수 있겠네요.
창조주가 있는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피조물이란 게 등장할 수 있기나 한지,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물론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가능하겠습니다. 천사조차 얻지 못해 부러워한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이라면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애초에 인간에겐 왜 '자유 의지'가 주어졌을까. 인간에겐 그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게 아닐까 하고요. '자유 의지'의 행사가 가치없는 일이라면, 어째서 하느님은 그 가치없는 일을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혔는가, 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어쨌건, '자유의지' 행사 그 자체가 가치있다면 이는 인간에겐 무한한 생활 양식이 존재하고, 그 생활양식 각각은 모두 '자유 의지'에 기반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 가지없는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즉 하느님의 우주란 협객님 얘기와는 달리 '모든 것이 가치있는' 세계며, 거기선 굳이 가치를 측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개개 존재 자체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하느님의 세계 전체를 가치있게 꾸미고 있기 때문이죠.
아울러 설령 우리가 창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유 의지'에 기반한 논리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자유 의지'란 굳이 누군가에 의해 부여받았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아도 우리가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존재 및 가치는 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자유 의지'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p2+|17508|+rp3+|main_sibal -
협객
2010.03.26 05:12
저도 해주신 답변을 읽고 많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성경에서 하나님과 마귀 중 누가 더 사람을 많이 죽였느냐고 묻자 90퍼센트가 넘는 응답자가 하나님이 더 많이 죽였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치없음" 판정을 받고 폐기처분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보다 훨씬 위에 있는 계명이니 폐기처분되어도 그건 인간이 악해서 폐기처분된 것일 뿐 하나님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선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폐기처분하셨지만 인간이 계명을 어기도록 마귀가 속였으니 마귀가 악한 것이고 결국은 마귀가 죽인 것입니다.
창세기에도 하나님은 분명 인간에게 에덴 동산 가운데에 있는 지혜의 열매와 영생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음에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명을 어기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
최근 접한 기독교 교리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사실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거부한 인간은, 자유가 없이 마귀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교만의 죄를 범하면서 마귀가 죄악으로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분법적으로 죄와 죄가 아닌 것, 둘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다고 볼 때, 자유의지란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죄를 택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힘 또는 마귀의 꾀에 속아서 죄를 택했다면 그것은 결코 자유의지의 행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교리를 접했을 때 저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만약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출애굽기에도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어"라고 쓰여서 바로의 장자가 사망에 이르기까지 재앙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피조물은 바로, 마귀에게 속아서, 또는 마귀의 유혹에 빠지거나 마귀의 힘에 굴복하여 창조주의 명을 거부하게 된 피조물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자유의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마귀한테 당한 것입니다.
즉,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붙들려서 가치없게 되어 폐기처분 예정인 인간과, 하나님이 택하셔서 구원받은 인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과연 하나님의 원수인지 아니면 인간의 원수인지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마귀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에게 가치가 없는, 그래서 폐기처분 예정인 피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마귀를 하나님의 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 자체가 가치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간단히 말해서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게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경쟁 기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것을 원하여 정반대의 기도를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두 농부가 있습니다. 한 농부는 비가 더 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른 농부는 비를 덜 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경우 비가 더 오는 게 가치 있을까요, 아니면 비가 덜 오는 게 가치 있을까요? 민주주의에서는 기도하는 농부의 숫자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 비가 더 오면 비가 더 오는 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비가 덜 오면 비가 덜 오는 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과연 책임있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그 "자유의지"의 행사라는 것을 통해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있게 파고들면 결국은 자유의지는 없고 단지 마귀의 힘에 패하여 마귀 소굴로 잡혀들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아직 반도 답해드리지 못한 채 삼천포로 빠진 듯합니다만... 나머지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rp+|17508|+rp2+|17510|+rp3+|main_sibal -
레니
2010.03.26 16:23
으와! 여전히 기네요~ 읽느라 혼났음ㅋ 하나님이 있다고 했을때 없다면 예수님이 세상을 관리하지 않을까요!? 없다면 또 그 다음으로 높은 천사나 사람이~~ 그래서 가치가 없어질리가 없다고 생각함.|+rp2+|17511|+rp3+|main_sibal -
협객
2010.03.30 19:55
예제를 많이 주셨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천주교에서 도마 안중근을 100년간이나 "살인자" 취급해왔다는 건 무식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는 또 안중근 의사가 아닌 안중근 장군이라고 칭하려고 했다는군요?
다윗이 돌팔매질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골리앗이 어떻게 죽습니까?
안중근이 총쏜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는다는 건 매우 성경적이지 못한 발상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서 도마 안중근에게 순교를 허락하시고 안중근의 손에 이토 히로부미를 붙히신 것임을 카톨릭은 인정하고 성 도마 안중근 성인이라고 정정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도 아나니야와 사피라를 죽인 살인자라고 해야겠네요? 도마 안중근 의사는 베드로 사도처럼 성령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이룬 성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그 "대일본제국"이라는 이름과, "일본인"이라는 민족의 이름을 갖고 하나님을 상대로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려고 한 죄를 하나님께서 도마 안중근 의사를 쓰셔서 멈추신 것임을 카톨릭에서는 하루 빨리 증언해야 합니다.
비신앙인들은 "국가적인" "민족의" 그런 말들 많이 갖다 붙히는데 일제 시대 일본인의 만행을 살펴 보면 그 "국가"나 "민족"을 나눠서 차별대우한건 일본인들이었지 한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인은 그 "국가", "민족"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형제에게 너무나도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도마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성 잔다르크입니다. |+rp+|17481|+rp2+|17513|+rp3+|main_sibal -
협객
2010.03.30 20:06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야와 사피라가 잘못된 봉헌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 또한 "국가"나 "민족"을 들먹여서 하나님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였습니다. 아나니야와 사피라가 베드로 앞에서 죽은 것이 성령의 힘이었듯이,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것 역시 성령의 힘입니다.
프랑스에 잔 다르크 성녀가 있듯이, 한국에서도 "성 안중근 도마"가 세례명으로 쓰일 수 있어야 합니다. |+rp+|17481|+rp2+|17514|+rp3+|main_sibal -
협객
2010.03.30 20:14
도마 안중근 의사는 순교성인으로 추대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사고가 나서 죽어도 순교했다고 말하는데, 안중근 의사의 경우 천주교 신자로서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다가 사형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천주교에서 말하는 "복자"보다는 "순교성인"이라고 하는 쪽이 맞습니다. |+rp+|17481|+rp2+|17515|+rp3+|main_sibal -
윤주[尹主]
2010.03.31 16:28
재미있는 얘기였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 이야기하진 못할 것 같네요.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해서...
이번엔 그냥 제 생각만 얘기해두고 가려고 합니다. 뒤에 댓글이 달린다면, 그것까진 보겠지만요.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 기준에 아무 가치가 없는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수많은 책들, 글들, 설교들이 쏟아져나오지만 정전이라 할 수 있는 성경은 바울 시대 이후로 단 한 번도 새로운 내용이 넣어진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이후로 로마까지 계속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이 어째서 오늘날엔 선지자와 말씀을 주지 않으실까요.
구약 시대의 야훼는 직접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 선지자를 통해 얘기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것이 올바른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에 대해 그저, 개인적인 추측과 설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치있는 세상일까요. 협객 님의 생각에 따르자면,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마귀가 강한 말일이라는 의미겠지요.
신이 없는 종교이면서 가장 현세적인 종교로 유교를 꼽습니다. 시조인 공자는 괴력난신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늘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제사를 지내도록 권합니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단 걸 알 수 있죠.
제가 앞에서 얘기한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보면, 유교야말로 진정한 말일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없는 시대,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유교는 제시해 줍니다. 즉 신이나 귀신, 마귀같은 온갖 이해 불가능한 존재들을 믿지 말고 현재 생활 속에서 자연과의 균형, 인간 관계의 균형 등을 유지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죠.
결국 이런 얘기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균형잡는 법을 스스로 궁리하고 조화를 도모할 정도로 성숙한 존재입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주셔서 실패 가능성을 공인하고 너그럽게 이해하신다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나요? 자유 의지를 마귀의 권위로 보는 건 너무나 섣부른 판단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주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우주라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인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품성을 닮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신을 가정하지 않고도 가치를 논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신자와 비신자는 화해할 수 있을 겁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언어가 약간 필요할 뿐입니다만. 비신자들은 그 언어를 배우고 익혀서 물어 오는데 신자들은 비신자들의 언어를 배우고 익힐 의사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뜻이 있다면 길은 통한다고 하던가요. 기독교는 성을 쌓는 종교란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가끔은 길을 만드는 데도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두서없는 긴 이야기였습니다만, 아무튼 무신론자 얘기 줄곧 들어주시고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p2+|17516|+rp3+|main_sibal -
Yes-Man
2010.04.06 08:39
전 신의 존재를 믿지만, 찬양하고 의존하진 않죠.
의미없다라... 사실 신이 있던 없던 유한한 인간의 명으론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애초에 죽으면
천국으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는
썩은 시체에 불과하니까요.
시점이란 것은 참 주관적인 겁니다.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신을 믿든 안 믿든 과거에 죽은 이들은 그저 죽은 이들일 뿐
현재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거니까요.
님께서 신이고, 어느 곳에서도 소멸하지 않는 존재라면 분명 님의 주장은 맞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신이 있든 없든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죽으면 이곳에서는 소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나름의 의미아닌 의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실 죽음 앞에서 이 세상에서 이룬것은 쓸모없는데 다 의미를 두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럴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습니다.
신의 존재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를 믿고싶고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찬양과 의존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rp2+|17522|+rp3+|main_sibal -
금목걸이
2010.04.11 19:25
옛날 배페 돌아다니다가 이런 꼬릿말을 본적 있는거같은데;;
"난 당신의 자식이라면서 지옥으로 보내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딱히 전 이런 종교적문제에 관심을 보이진 않지만;;
진짜 종교는 너무 어려운거같아유 ㅠㅠ|+rp2+|17530|+rp3+|main_sibal -
PianoForte
2010.04.12 13:21
다분히 신앙고백성 글이네요. 뭐 원래 신앙이란 '믿는 사람에게는 진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로 반박할 건 없을 듯 하네요. 저도 하나님을 믿고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 왔으니까요. 굳이 제 생각을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세계관, 가치관, 신앙(종교)관을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기독교만 해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쪼개져 있고 개신교 밑에는 또 수많은 교파들이 갈라져 있죠.|+rp2+|17531|+rp3+|main_sibal -
협객
2010.04.14 04:55
최근 측근과 담소를 했는데.
"국가"와 "회사"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국가는 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만질 수 있나요?
회사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건가요?
국가의 존재를 증명하라든지, 회사 또는 법인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하면, 증명가능한걸까요?
심지어, 자연수, 정수, 유리수 등등은 과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증명이라는 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나라"를 지킨다고들 하는데, 과연 존재나 하고 있는 것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신의 존재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미 증명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속아서 증명을 이해하지 못하여 거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 중에도 과학적인 증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rp+|17522|+rp2+|17533|+rp3+|main_sibal -
Yes-Man
2010.04.14 21:14
그렇게 따지지 마세요.ㅋ
전 종교를 무시하고 싸우자는 사람이 아닙니다.ㅋㅋ
저도 신을 믿습니다. 하지만 저를 납득시킬 근거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보면 되겠네요.
어릴적에 몇번 갔었지만 그때 질문도 많이 했지만
역시나 저를 납득시키지는 못했어요.ㅋ
그냥 그렇다는겁니다.ㅋ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신이 존재하더라도
님의 지금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뭘하든
현재의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rp+|17522|+rp2+|17535|+rp3+|main_sibal -
HelenKiller
2010.05.07 12:50
메모장에 쓰고 '자동 줄 바꿈'한 채로 복사해서 줄이 이상하게 띄어 졌습니다. |+rp+|17547|+rp2+|17548|+rp3+|main_sibal -
HelenKiller
2010.05.07 12:53
1. 가치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협객님께서는
"우리가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한 사물이 과연, 우리가 죽고 나서도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써 보지요.
"어떤 사람 갑이 어떤 사물 A에 가치를 부여했다. 갑이 죽었을 때, A는 갑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써 보겠습니다.
"5월 1일 미술가 갑이 찻잔 그림을 그렸다. 갑은 그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해 했다. 5월 2일 갑이 죽었다. 2일에 찻잔 그림은 갑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
여기에 답을 해보자면, 일단 2일에 찻잔 그림은 '갑에게 보여 갑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서의 가치를 더 이상 갖지 못 합니다. 하지만, 1일 갑이 죽기 전에는 그러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시간이 흘러 상황이 바뀌어 가치를 잃는다고 해서 갑이 죽기 전에도 가치가 없게 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찻잔 그림이 2일 무가치하다고 1일에도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 다르니까요.
2. 신과 인간이 아니고도 우주에 가치를 부여할 존재는 있습니다.
원숭이는 단단한 돌멩이에 '껍질이 단단한 열매의 알맹이를 먹기 위한 도구'로써 가치를 부여하겠지요. 식물은 '좀 더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는 자리'에 가치를 부여할 것이고요. 협객님 말씀대로 바퀴벌레 암컷은 수컷에게 있어서 종족 번식할 파트너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지구는 목성에 프렌드쉴드로서의 가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구로 향해 날아오는 수 많은 소행성들을 목성이 몸빵해주고 있으니까요.
3. 하나님이 보기시에 귀한지 어떤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이하 P로 표기)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여서, 어떤 사람들은 P를 원조하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P를 원조하려 하지 않습니다.(협객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아이들이 단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돕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원조하는 사람들(이하 S로 표기)은 어떤 이유에서 P를 원조할까요?
협객님 말씀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기 때문'일까요? 오직 그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으로만 설명해야 겠지만, 다른 이유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뭐 어떤 독특한 사람이 아무에게나 돈 뿌리는 걸 즐겨서 원조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 말고 보다 일반적인 경우를 얘기해보겠습니다).
3-1)의식적인 이타( 중 한 가지 예)
다음과 같은 논증을 거쳐 원조를 하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①나와 P는 마찬가지로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②P가 위기에 처했고, 내가 그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P를 구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괜찮다고 여겨지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사회 구성원 중 하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할 수 있는 다른 구성원이 그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괜찮은 사회'이다.
③'사회 구성원 중 하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할 수 있는 다른 구성원이 그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괜찮은 사회'라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P가 나를 구하지 않는 것이 괜찮다고 여겨질 것이다.
④그렇게 되면 내가 위험해진다. '나를 위해서라도' P를 구해, 이 사회를 '구성원 중 하나가 위험할 때 다른 이가 도와주는 사회'로 만들어야겠다, 즉 원조해야겠다.
이 논증에 수긍하는 사람들은 S에 들어가겠죠. 이 논증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거고요. 이 논증은 범주를 좁게 잡을수록 타당하고 넓게 잡을수록 타당도가 떨어집니다.
좁게 잡은 예를 들면, "소주 10병 마신 ○○대 1학년생 모군이 비틀거린다면 이 세상은 소주 10병 마신 ○○대 1학년생은 비틀거리는 세상이다. 나도 소주 10병 마신 ○○대 1학년생이므로 나도 비틀거릴 것이다."는 상대적으로 타당합니다.
넓게 잡은 예를 들면, "TV 속 아프리카 사자가 네 발로 달린다. 사자는 생물이다. 이 세상은 생물이 네 발로 달리는 세상인가보다. 나도 생물이다. 그러니까 나도 네 발로 달린다"는 상대적으로 타당도가 떨어집니다.
원조 문제에서 P를 자신과 얼마나 동일시하는지 느끼는 정도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므로 어떤 사람들은 원조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조하지 않습니다.
3-2)무의식적인 이타( 중 한 가지 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존재에 대해 자신과 무의식적으로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칼에 베여 아파하면,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걸 알지만, 자신이 베인 게 아니란 걸 의식적으로 알지만, 으으~하고 괴로워합니다(특히 어릴수록,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그러합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옆 사람이 울면 자기도 따라 울음이 나옵니다.
위 논증이 타당하지 않다고 느낀 사람 중에서도 P에 대해 큰 무의식적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S에 들어갈 수 있겠죠(P가 고통스러운 게 나도 고통스러워).
4. 절대적 존재가 존재할까요? 삼천포일지 몰라도 말 나온 김에 선과 악 개념도 얘기해봅시다.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그가 귀하다면 귀한 거겠지요. 절대적 존재가 P를 귀하게 보는 것이, P에게 원조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죠. 불가능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전 절대적 존재가 있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협객님은 절대적 존재(하나님)를 믿으시는 것 같고, 협객님의 정의관이 그와 관련된 것 같은데요,
제 좌우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들 정의로워, 주관적으로 말이지"
전 절대적 정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살 때 TV만화를 보면서 고민해봤습니다. 한 쪽이 흔히 착한놈이라고 불리고, 다른 쪽이 대개 나쁜 놈이라고 불리는데, 과연 옳은 호칭인가.. 둘 간에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착한놈이라고 불리는 놈이 나쁜놈이라고 불리는 놈을 마주치자마자 폭력으로 쫓아내버리는 모습은 저에게 과연 그를 '착한놈'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한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쁜놈'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나쁜놈'도 자신의 정의 안에서는 옳은 행동을 하는 겁니다. 즉 정의로운 겁니다.
세상에는 저의 정의도 있고, 제 친구의 정의도 있고, 뭐 무수히 많은 정의들이 있습니다.
이런 정의들이 모여, 인류에게 좋을 거라고 일반적으로 공통적으로 판단되는 '보편적 정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든지,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된다든지, 친구들하고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든지..
이 보편적 정의는 개개 정의들이 종합된 것이므로 몇 사람들의 정의가 바뀌거나 다른 정의를 가진 이들이 사회에 참여하면 어느 정도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 개념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정의로운 행동이 다른 이에게 불의일 수 있듯이 누가 볼 때는 선한 것이 다른 이가 볼 때는 악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갑의 정의에 부힙하는 일은 갑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일이지만 을의 기준에서 볼 때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만약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의 선악 기준을 절대적으로 따라야겠지만 말입니다.
|+rp+|17547|+rp2+|17549|+rp3+|main_sibal -
HelenKiller
2010.05.07 19:17
1. 가치 판단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협객님께서는
"우리가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한 사물이 과연, 우리가 죽고 나서도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써 보지요.
"어떤 사람 갑이 어떤 사물 A에 가치를 부여했다. 갑이 죽었을 때, A는 갑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써 보겠습니다.
"5월 1일 미술가 갑이 찻잔 그림을 그렸다. 갑은 그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해 했다. 5월 2일 갑이 죽었다. 2일에 찻잔 그림은 갑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가?"
여기에 답을 해보자면, 일단 2일에 찻잔 그림은 '갑에게 보여 갑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서의 가치를 더 이상 갖지 못 합니다. 하지만, 1일 갑이 죽기 전에는 그러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시간이 흘러 상황이 바뀌어 가치를 잃는다고 해서 갑이 죽기 전에도 가치가 없게 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찻잔 그림이 2일 무가치하다고 1일에도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 다르니까요.
2. 신과 인간이 아니고도 우주에 가치를 부여할 존재는 있습니다.
원숭이는 단단한 돌멩이에 '껍질이 단단한 열매의 알맹이를 먹기 위한 도구'로써 가치를 부여하겠지요. 식물은 '좀 더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는 자리'에 가치를 부여할 것이고요. 협객님 말씀대로 바퀴벌레 암컷은 수컷에게 있어서 종족 번식할 파트너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지구는 목성에 프렌드쉴드로서의 가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구로 향해 날아오는 수 많은 소행성들을 목성이 몸빵해주고 있으니까요.
3. 하나님이 보기시에 귀한지 어떤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이하 P로 표기)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여서, 어떤 사람들은 P를 원조하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P를 원조하려 하지 않습니다.(협객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아이들이 단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돕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원조하는 사람들(이하 S로 표기)은 어떤 이유에서 P를 원조할까요?
협객님 말씀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기 때문'일까요? 오직 그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으로만 설명해야 겠지만, 다른 이유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뭐 어떤 독특한 사람이 아무에게나 돈 뿌리는 걸 즐겨서 원조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 말고 보다 일반적인 경우를 얘기해보겠습니다).
3-1)의식적인 이타( 중 한 가지 예)
다음과 같은 논증을 거쳐 원조를 하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①나와 P는 마찬가지로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②P가 위기에 처했고, 내가 그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P를 구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괜찮다고 여겨지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사회 구성원 중 하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할 수 있는 다른 구성원이 그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괜찮은 사회'이다.
③'사회 구성원 중 하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할 수 있는 다른 구성원이 그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괜찮은 사회'라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P가 나를 구하지 않는 것이 괜찮다고 여겨질 것이다.
④그렇게 되면 내가 위험해진다. '나를 위해서라도' P를 구해, 이 사회를 '구성원 중 하나가 위험할 때 다른 이가 도와주는 사회'로 만들어야겠다, 즉 원조해야겠다.
이 논증에 수긍하는 사람들은 S에 들어가겠죠. 이 논증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거고요. 이 논증은 범주를 좁게 잡을수록 타당하고 넓게 잡을수록 타당도가 떨어집니다.
좁게 잡은 예를 들면, "소주 10병 마신 ○○대 1학년생 모군이 비틀거린다면 이 세상은 소주 10병 마신 ○○대 1학년생은 비틀거리는 세상이다. 나도 소주 10병 마신 ○○대 1학년생이므로 나도 비틀거릴 것이다."는 상대적으로 타당합니다.
넓게 잡은 예를 들면, "TV 속 아프리카 사자가 네 발로 달린다. 사자는 생물이다. 이 세상은 생물이 네 발로 달리는 세상인가보다. 나도 생물이다. 그러니까 나도 네 발로 달린다"는 상대적으로 타당도가 떨어집니다.
원조 문제에서 P를 자신과 얼마나 동일시하는지 느끼는 정도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므로 어떤 사람들은 원조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조하지 않습니다.
3-2)무의식적인 이타( 중 한 가지 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존재에 대해 자신과 무의식적으로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칼에 베여 아파하면,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걸 알지만, 자신이 베인 게 아니란 걸 의식적으로 알지만, 으으~하고 괴로워합니다(특히 어릴수록,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그러합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옆 사람이 울면 자기도 따라 울음이 나옵니다.
위 논증이 타당하지 않다고 느낀 사람 중에서도 P에 대해 큰 무의식적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S에 들어갈 수 있겠죠(P가 고통스러운 게 나도 고통스러워).
4. 절대적 존재가 존재할까요? 삼천포일지 몰라도 말 나온 김에 선과 악 개념도 얘기해봅시다.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그가 귀하다면 귀한 거겠지요. 절대적 존재가 P를 귀하게 보는 것이, P에게 원조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죠. 불가능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전 절대적 존재가 있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협객님은 절대적 존재(하나님)를 믿으시는 것 같고, 협객님의 정의관이 그와 관련된 것 같은데요,
제 좌우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들 정의로워, 주관적으로 말이지"
전 절대적 정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살 때 TV만화를 보면서 고민해봤습니다. 한 쪽이 흔히 착한놈이라고 불리고, 다른 쪽이 대개 나쁜 놈이라고 불리는데, 과연 옳은 호칭인가.. 둘 간에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착한놈이라고 불리는 놈이 나쁜놈이라고 불리는 놈을 마주치자마자 폭력으로 쫓아내버리는 모습은 저에게 과연 그를 '착한놈'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한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쁜놈'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나쁜놈'도 자신의 정의 안에서는 옳은 행동을 하는 겁니다. 즉 정의로운 겁니다.
세상에는 저의 정의도 있고, 제 친구의 정의도 있고, 뭐 무수히 많은 정의들이 있습니다.
이런 정의들이 모여, 인류에게 좋을 거라고 일반적으로 공통적으로 판단되는 '보편적 정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든지,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된다든지, 친구들하고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든지..
이 보편적 정의는 개개 정의들이 종합된 것이므로 몇 사람들의 정의가 바뀌거나 다른 정의를 가진 이들이 사회에 참여하면 어느 정도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 개념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정의로운 행동이 다른 이에게 불의일 수 있듯이 누가 볼 때는 선한 것이 다른 이가 볼 때는 악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갑의 정의에 부힙하는 일은 갑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일이지만 을의 기준에서 볼 때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만약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의 선악 기준을 절대적으로 따라야겠지만 말입니다.|+rp2+|17550|+rp3+|main_sibal -
유물
2010.05.24 11:04
국가와 회사가 존재하는냐 에 대한 내용은 조금 무리수가 아닐지...
국가와 회사는 인간이 규정해 놓고 살아가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느냐는 인간이 규정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그냥 존재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을 토대로 말하면 '결국 신도 인간이 규정해 놓았기에 있다고 말할 수있다' 일수밖에요 ;;
개인적인 생각으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유물론자이고 무신론자 이기때문에;;; |+rp+|17522|+rp2+|17566|+rp3+|main_sibal -
파라켈수스
2010.06.08 08:45
요약하자면
협객: 예수천국 불신지옥
질문있는데요
1.
아이티 지진에서 얼마 못살고 매몰된 어린아이들이 죽기위해태어난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 이라는 (협객님 가정에의한) 신이 귀하게 여기는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 뒀네요.
그것도 기도하기까지하는
2.
신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쳐요. 그것을 인간의 텍스트로 옮긴 성경은 절대적일수 없죠
그렇다면 오류있는 텍스트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정말 신의 말씀을 따르는 걸까요
3.
규율은 그것이 적용되는 시스템의 요구에 맞추어서 정해지죠. 상대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도 시스템에 속한 일종의 규율이고요.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슬람의경우 부자가 돼지를 키우지못하게 하려고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규율이 세계화 되어서 전세계에 퍼졌다고 해서 온 우주의 질서가 될까요? 전세계에 이슬람이 퍼져서 돼지고기 못먹으면 돼지고기 안먹는것은 진리 라고 생각하실건가요? 저는 그것이 인간의 오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제 질문이약간 핀트가 안맞는것같지만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rp2+|17568|+rp3+|main_sibal -
신해종
2010.06.27 02:06
여기 분들은....참 이성적인 분들이시네요. 다른 데에 이런 글 올렸으면 집중포화 받았을텐데.
솔직히 놀랐습니다.|+rp2+|17578|+rp3+|main_sibal -
슬라정이
2010.06.28 08:02
꽤나 나이가 드신 분들이라 그런가요 ^-^ㅋ |+rp+|17578|+rp2+|17579|+rp3+|main_sibal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죽는게 안타까운 이유는 그가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낫게 살 수 있었을텐데 재수가 없어서 그럴 기회를 못 얻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건 아닐까요.
아니, 차라리 그 모든 것 이전에, 세상 모든 게 가치있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므로 가치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나요.
그 하느님이란 우리에게 값을 매기는 존재가 아니라 외로움을 나누는 존재인건 아닐까요. 그래서 신도들은 두려움 이전에 사랑과 겸허함으로 하느님에게 자발적인 봉사를 하려는 거고요.
어수선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론입니다.
세상에 홀로 있어도 선과 가치를 좇도록 만물을 만든 게 하느님이 아니던가요? 만물이 선과 가치를 좇는 한 그를 가치없다 할 수 있을까요? 궁극적으로, 창조의 관점에서 보아도, 하나님 없이도 우주는 그 자체가 가치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rp2+|17452|+rp3+|main_sib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