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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삼국지 속의 숨겨진 진실(출저:네이버지식IN)

2005.07.26 05:25

GreenRose 조회 수:1754 추천:1

1, 관와와 황충의 일기토는 없었다.



관우는 황충과의 일기토에서 황충의 말이 발을 헛디뎌 쓰러져서 죽기를 기다리는 황충에게 '말을 갈아타라 다시 깨끗이 싸우자'라는 멋진 멘트를 남기고 진영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장사 태수 한현은 황충에게 활을 가지고 싸우라고 한다. 그러나 황충은 관우의 사람됨에 감동하여 관우를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하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에 내일이찾아온다. 황충은 역시나 관우와의 일기토에서 활을 메고 온다. 그리고 화살없이 활을 팅팅 몇번 쏜다.



관우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지만 그것이 화살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황당해한다. 그리고 이번엔 황충이 활에 살을 넣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관우의 두건을 꽤뚫고 황충은 미소를 남기고 성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관우는 이것이 어제의 은혜를 갚으려고 한 황충의 행동인 것을 알고 감동한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남쪽의 여러 군을 평정하자 황충은 그에게 귀순하였고, 유비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갔다.'라고 간단하게 적혀있다.

필자가 읽고 있는 정사를 배경으로 쓴 '공명의 선택'이라는 책에서는 '요립'이라는 자의 천거 를 받아 황충이 귀순했다고 써 있다.

이 얼마나 뛰어난 나관중의 창작능력인가.  이렇게 재미있고 멋있는 장면을 창작한 나관중

의 창작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2, 조조는 꿈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



조조는 꿈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었는가?

조조는 늘 기회만 있으면 사람을 죽였지만, 이것은 몽중살인(夢中殺人)이라는 전설과도 비슷한 얘기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가 되면 갑자기 능변이 되어 재미있고 이상하게 이야기한다.



그럼 조조는 정말 꿈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었던 것인가?

연의 제72회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조는 암살을 두려워하여 항상 측근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 했다.  "나는 꿈속에서 사람을 잘 죽인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너희들은 결코 내게 다가오지 않도록 하라."

어느 날 조조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이불이 흘러내렸다. 측근이 급히 이불을 주워 다시 덮어 주었다. 그런데 조조는 갑자기 벌떡일어나 칼을 빼 들고 측근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잠들었다. 한참 있다 잠을 깬 조조는 너무나도 놀란 시늉을 하며 말했다.

"누가 나의 측근을 죽였는가?" 실은 이러이러하였다고 신하들이 설명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남의 이목을 꺼리지 않고 울며 슬퍼하며, 정중히 장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측근들은 조조에게 정말 꿈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수명 중에는 두 번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  조조에게 이와 같은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면, 조조는 확실히 세상에 드문 변태 살인광이다.



정사에는 이 이야기에 관하여 아무런 흔적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나관중의 착상이 아니라 실은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설신어』의 이야기 대부분은 믿을 수 없는 전설 따위의 이야기이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채택한 의도는 아주 명백하다.





3, 황충은 오나라 정벌전에 나가지 않았다?



황충은 유비에게 귀순한 후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봉장으로 유장을 공격하면서 언제나 제일 먼저 적진을 함락시켰다. 그는 촉을 평정한 후에는 정서대장군이 되었고, 유비의 한중공략 때에는 정군산에서 조조 군을 대파하며 조조의 부장 하후연을 죽여 유비가 승리를 거두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 후 건안 24년(219)에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오호대장의 한 사람으로 봉해졌다.



그런 황충의 죽음에 대해 「삼국지연의」제83회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장무 2년(222) 정월에 황충은 유비를 따라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노장은 도움이 안 된다는 유비의 말에 오기가 난 그는 적진을 돌파하여 오의 장수 사적을 죽이고 반장을 쫓아내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는 진영으로 돌아오라는 충고도 무시한 채, 다음날 다시 한번 반장에게 싸움을 걸었다. 반장은 일부러 패주하며 황충이 뒤를 쫓아오도록 했고, 계략에 감쪽같이 속은 황충은 복병에게 걸려 오의 장수 마충이 쏜 화살을 어깨에 맞고 그날 밤에 죽었다.

그러나 사서를 조사해 보면, 나관중이 황충의 죽음을 전면적으로 허구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황충전>이나 관련 자료에 의하면, 그는 건안 25년(220)에 죽었다. <황충전>에는 그가 성도에서 병사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후 1년이 지나 부활해 유비를 따라 오나라를 정벌하고, 반장을 혼내준 후 전장에서 죽은 것으로 바뀌었다.

황충은 죽은 후에 ‘강후’의 작위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강후의 묘가 어디인가는 정사에도, 「삼국지연의」에도 언급이 없다.



청대의 「성도현지」에 기록된 바로는, 청의 도광 연간에 성도시의 황충교 일대에서 그 지방 농민이 사탕수수를 저장할 굴을 파면서 검, 인골, 한나라 때의 벽돌 등을 적지 않게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벽돌들 중에는 ‘황강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성도의 유원이라는 학자가 이 사실을 알고 그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계속 발굴했는데, 그는 묘를 만드는 데 쓰인 벽돌과 ‘황강후공휘자한승지묘’라고 쓰인 석비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황충교가 바로 황충의 묘라고 단정했다고 한다. 바로 이 유원의 모금활동으로 지금은 관의 바깥을 덮는 널의 형태로 황충교가 남아 있을 뿐이다.





4, 관우를 치료한 의사는 화타가 아니였다



관우가 화타에게 수술을 받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화타는 패국(沛國) 초군 사람으로 자를 원화라 한다.  이 화타를 맞이한 관우의 양자 관평은 주태를 치료 했다는 명의를 직접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고 화타가 왔으니 부친의 병도 나으리라 여기고 관우를 치료하게 했다.

이때 관우는 가히 신적이게도 그 아픔을 억누르며 태연히 마량과 바둑을 두었다는 사실또한 알것이다.



위의 <연의>의 내용대로 라면 관우는 살을 가르고 뼈를 긁어 내는 수술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치러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신적인 존재로 받들어 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건 믿을 만한게 되지 않는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긁어내는 수술에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사> 관우전에도 <연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정사 관우전의 일부

<일찌기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다. 의원이 이르기를 '화살촉에 독이 있어 그것이 뼛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 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리고 술을 마시며 담소르 나눌 뿐 태연했다>



물론 이것은 <연의>와의 차이가 있다. 팔의 위치가 그럴뿐더라 바둑을 두고 있었는지 조차 말이다.

이 당시 화타는 '마비산' 이라는 마취약을 쓰고 있었다.  <정사>화타전에 의하면, 화타는 절개를 필요로 하는 수술일 경우 반드시 마취제를 써서 죽은 듯 만들어놓고 환부를 절개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관우를 수술한 의원이 화타였다면 분명 마취약을 쓰게 하기 위해 죽은 듯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위의 <정사>관우전 일부내용에도 나와 있듯이 관우는 태연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위의 사실로 미루어볼때 관우를 수술한 의원은 화타가 아니었다.  그리고 위글을 보다가 한가지 질문을 할것이다.  '관우가 죽은 듯 만들지 마라고 명했을수도 있지 않나?' 이런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화타 자신이 절개수술에는 마취약을 사용하는데 의원이 치료하는데 그것을 명할리는 없다. 더군다나 굳이 그렇게 할필요는 더더욱이 없다.





5, 화타는 의원이 아니었다



화타는 자가 원화이며,조조와 같은 패국 초현 사람이다.전국시대 명의 편작과 함께 고대 중국의학을 대표하는 안물로도 유명하다.

화타는`오금희`라는 체조를 창안했는가 하면 `마비산`이라는 전신 마취재를 써서 외과수술을 하기도 했다.<<연의>>에 따르면,그가 관우의 팔을 갈라 독을 빼내는 수술을 했다고 하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정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화타의 의술을 신기에 가깝다. 단 몇번의 뜸질만으로도 병을 낫게 하고,침을 놓으면 침을 빼자마자 병의 차도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또 외과술도 시행했는데, 마취제를 써서 환자를 죽은 듯 만들어놓고 환부를 절새했다. 창자에 병이 있으면 창자를 잘라 씻은 다음 다시 꿰맨 후에 고약을 발라두었는데, 4일이나 5일이 지나면 통증이 사라지고, 한 달이 지나면 완쾌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외과술에 비해 전혀 뒤질 바 없는 의술인 것이다.

한 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감릉의 사이라는 벼슬아치의 부인이 임신했는데 복통이 있었다. 이에 화타는 맥을 집어보고 뱃속의 태아가 죽었음을 알았다. 그는 곹 사람을 시켜 부인의 배를 만져보게 하여 `왼쪽에 있으면 아들이고 오른쪽에 있으면 딸일 것` 이라고 했다. 부인의 배를 만져본 사람이 `왼쪽`에 있다고 하자, 화타는 탕약을 써서 태아를 밖으로 나오게 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아들이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화타가 길을 가다 목구멍이 막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그의 신음소리를 들은 화타는 환자를 살펴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방금 왔던 길 끝에 떡을 파는 집이 있소. 그곳에 마늘을 잘게 부수어 시게 만들어 놓은것이 있으니 3되 사서 먹도록 하시오.그러면 병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오."

화타의 말대로 했더니 환자는 뱀 하나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가 조조의 뇌를 수술하자고 했다가 조조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정사>>에 의하면 화타의 명성을 들은 조조가 그를 가까이 두고 두통을 치료하게 했는데,그의 손이 가는 곳마다 통증이 사라졌다고 한다.이렇듯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진 화타였지만 사실 그의 본업은 `의원`이 아니었다.<<정사>>화타전의 기록을 보자.



화타의 절묘한 의술은 무릇 이러했다.그러나 그는 본래 선비였으므로 의원이 직업인 것처럼 보이자 늘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다.

고대 중국의학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그가 의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서주땅을 떠돌며 학문을 했던 선비였다. 여러 경전을 통탈하여 박식한 까닭에,패국상 진규의 천거를 받아 효렴에 뽑히기도 할 정도였다.

그렇듯 재주 많은 화타였지만 그의 최후는 불행한 것이다.조조가 중병에 걸리자 화타를 시켜 치료하게 했는데,화타는 고향으로 돌아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아오지 않았다.이에 노한 조조가 그를 붙잡아 죽여버린 것이다.

오늘날 화타의 의술은 전해지지 않는다.<<정사>>에 의하면 화타는 죽기 전에 옥리에게 한 권의 의서를 주려고 했다 한다.그러나 법을 어기는 것이 두려웠던 옥리가 받지 않자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의 신기한 의술은 역사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는데,동양의학의 발전을 위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 맹획(孟獲)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사실인가?



이 글을 보시는 분들 거의 다 아시다시피 제갈양의 `칠종칠금`이라는 고사성어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제갈양은 남만왕 맹획을 7번잡고 7번 풀어줬을까..? 어떻게 보면 좀 의아해할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뭐 마음을 잡아야 되니까..` 라고 이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유비가 죽은 후에 제갈양은 유선을 부탁한다는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와 정치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남중(촉의 서남쪽 영창, 익주, 월수, 장가의 사군)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은 옹개였는데, 그의 촉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소수민족의 수령인 맹획, 월수이왕 고정, 장가군승 주포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225년에 제갈양은 2년 동안 관청을 폐쇠하고 내정과 외교를 처리한 후, 대군을 이끌고 남만을 정벌해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맹획을 일곱 번 붙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 준 이야기는 바로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로, 「삼국지 연의」에서는 제 87회에서 90회까지 지면을 대폭 할애해 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면 역사상 정말로 `칠종칠금`이 사실이었을까..?

옛부터 지금까지 이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이도 있고 부정하는 이도 있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긍정론자들은 칠종칠금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1. 배송지의 주에서 인용한 「한진춘추」에 다음의 글이 쓰여있다.

"제갈양이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모두 풀어주려고 하자, 맹획은 깊이 반성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은 분이십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2. 「화양국지」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남만 정벌에 나선 제갈양이 맹획을 생포하여 일곱 번 사로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더니, 맹획은 완전히 굴복하여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은 분이십니다. 변경의 백성은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3. 「삼국지집해」 에는 장약기의 「전운기략」을 인영해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은 각각의 장소를 고증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해서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재매있게 저술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와 관련된 전설이나 고사는 지금도 서남의 소수민족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



한편 부정온자들은 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1. 진수의 정사는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권위있는 사서인데, 거기에는 칠종칠금의 이야기는 없을 뿐 아니라 맹획조차 나오지 않는다.



2. 청나라 때의 「통감집람」은 이얼게 보고 있다.

"칠종칠금은 이야로서는 재미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갈양의 남만 정벌은 원래 `만이(蠻夷)`를 심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더구나 당시 제갈양이 가장 서두르던 것은 북쪾의 위나라를 치는 일이었다. 누차 풀어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을 정도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여유가 없었다. 제갈양은 노수를 건나 전지에 이르기까지 불과 4,5개월 밖에 소비하지 않았고, 정세는 절박해 서둘러 되돌려 북벌에 나서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에 얽매여 있을여유가 없었다."



3. 셋째, 정사의 <장의전>에 의하면, 남중 정벌 후의 남중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남이가 다시 한 번 배반하여 수장을 살해했다고 씌여져 있다. 때문에 제갈양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전략이나 칠종칠금의 이야기는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 1983년 「삼국지」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된 사천대학 무월 교수의 논문과 방국유 운남대학 교수의 <제갈양남정로선고기>, 그리고 담량소(성도 무후사 박물관) 얀구원의 <제갈양 칠종칠금에 대한 질의> 등도 모두 두 번째 통감집람에 나와 있는 설의 입장에서 있다.



이처럼 제갈양의 맹획을 사로잡고 다시 놓아 주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 대개의 견해이다.





7, 제갈량의 호 `와룡`은 방덕공이 지었다



사서에 의하면 제갈양은 숙부가 죽은 후에 남양군 등현의 융중에 숨어 살면서,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동료들 중에서도 그는 뛰어난 존재였으며, 뜻도 원대해 항상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기 때문에 `와룡선생`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다.

그럼 제갈양을 왜 와룡이라 칭했는가? 와룡이라는 칭로는 자칭인가, 타칭인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서가 제갈양을 추천하는 장면에서 그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는데, 서서는 제갈양이 살고 있는 곳에 와룡강이라는 언덕이 있어서 스스로 와룡선생이라고 칭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와룡강이라는 지명은 후세 사람이 「삼국지연의」에 억지로 갖다붙였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당시 융중 일대에는 와룡강이라는 이름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제갈양을 와룡이라고 칭했는가?



사서에 의하면, 당시 융중에서 제갈양의 지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그의 두 스승, 곧 방덕공과 사마덕조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의 접촉과 이해를 통해 `제갈양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고 있고 계략을 잘 짜는 영걸`이라고 간파했다. 그래서 방덕공은 제갈양에게 와룡이라는 아호를 내렸으며(동시에 방통을 봉추하 칭송했다),사마덕조는 그를 세상 정세에 밝은 준걸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와룡의 칭호는 타칭이며 제갈양의 재능과 덕에 대한 평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융중이 위치하는 양양 일대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유명한 대호족을 들자면 방, 황, 괴, 채, 마, 습, 등의 세력이 있었다. 후한의 중,후기 이후로 지방은 거의 호족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만일 그들의 지지와 인정이 없었다면 그 땅에 발판을 쌓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표가 형주 입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방, 채, 양 세력의 지지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제갈양도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외지인에 이러한 지지와 인정이 없다면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융중에 있을 때에 형주의 호족세력 중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 특히 덕망있는 명사와 많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청함스로써 자신의 식견을 넓히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하려고 애썼다.



양양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물산이 풍부했고 엘리트 문화인이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지방에는 많은 인재가 나온 것 이외에도 다른 곳에서 이주한 준걸이 많았다.

제갈양도 그 중 하나로 적지 않은 사람들과 우정을 맺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예를 들면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 조카인 방통, 의성의 마량, 마속 형제, 박릉의 최주평, 영주의 서서와 석도, 여남의 맹건 등 젊은 명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들과는 우정이 특히 돈독해 왕래가 잦았다.

청년 시절의 제갈양은 비범한 뜻을 가져 스스로를 관중, 악의에 견주고 있었으므로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제갈양을 잘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다.

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갈양은 혼인이라는 루트를 활용했다. 그의 큰 누이는 괴기와 결혼했고, 둘째 누이는 방산민에게 시집을 갔다. 그 자신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을 처로 선택했다. 황승언은 채모의 매부였기 때문에 채모는 제갈양에게 처의 외숙부가 된다. 그렇게 제갈양은 양양의 여섯 대호족 모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 제갈양은 방덕공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방씨 가문의 방덕공은 양양의 호족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인물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교류 범위가 넓고 식견이 높아 유표는 몇 번이나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그의 신변에는 재주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들어 학문을 서로 교류하고 시국을 논했으며, 방덕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당시 그의 품평은 사대부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갈양은 방덕공을 끊임없이 방문해 가르침을 청했다. 게다가 늘 겸허한 태도로 마루 밑에서 절을 했고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었다.

방덕공도 항상 그에게 책을 빌려주어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인연으로 인해 서서히 그는 제갈양의 성격, 재능, 포부를 깊이 알게되었다, 그래서 와룡이라 칭한 것이다.

이 품평은 제갈양을 큰 호수에 엎드려 있는 용에 비유한 것으로, 시기가 오면 반드시 구름 위로 날아올라 그 비범한 본 모습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와룡이라는 아호가 평가받아 널리 알려지자 제갈양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는데, 제갈양이 이같이 와룡이라는 아호를 얻은것은 그가 이상을 위해서 분투한 결과물이며, 당시의 사회로부터 지지받고 인정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8, 조진과 제갈량은 싸운 적이 없다.



조진(?~231)의 자는 자단이며 패국의 초현 출신이다. 조조의 친척으로 위문제 조비 때에 진서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위문제의 유언에 의해 진군,사마의와 함께 대신으로서 위명제 조예를 보좌해 대장군에 오르고 소릉후에 봉해졌다.



조진은 제갈양의 제1차 북벌 때에 독령제군으로 파견되어, 장합에게 가정의 마속에게 공격하게 하고 학소에게 진창을 지키게 했다. 「삼국지연의」 제 100회에는 바로 이 조진이 죽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4차 북벌에서 제갈양은 위군도독 조진의 진영을 공격했다. `촉군의 공격은 있을 수 없다`며 사마의와 내기를 했던 조진은 그 때문에 너무 창피한 나머지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조진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안 제갈양은 즉시 편지를 써서 투항한 위군 병사를 통해 조진에게 전하게 했다. 그 편지에는 조진을 배우지 못한 후배라고 칭하며, `무슨 낯으로 고향의 노부를 대하며, 무슨 뱃심으로 고향집의 대청에 오르랴`하는 야유가 적혀 있었다. 조진은 이것을 읽자마자 분함을 못이겨 그날 밤 진중에서 죽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229년 봄에 제갈양은 무도,음평 두 군을 공략하고, 다음해 7월에 제4차 북벌 준비에 임했다. 위나라는 불리한 전쟁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세 갈래로 군사를 보내 사마의, 조진 등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는 한중으로 몰려갔다.



이 작전은 대사마 조진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촉군에게 여러차례 침공을 당한 이상,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고 판단한 그는 위명제에게 여러 방면에서 병행하는 작전을 제안한 것이었다. 즉,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동쪽으로부터 한중을 공격하고, 장합 등은 야곡에서 한중을 향하고, 조진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북쪽의 자오곡으로부터 곧장 한중으로 쳐들어간다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대승을 거두어 제갈양을 혼내 줄 수 있다고 조진은 확신했다.



조진은 계획대로 8월에 장안을 출발해서 자오곡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에서 30여 일 동안이나 퍼붓는 비를 만나 한 달이 넘도록 계곡에서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또한, 제갈양은 성고,적판 일대에 주둔하며 삼엄한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명제가 화흠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조진 등에게 후퇴를 명했기에 조진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조진이 촉 정벌에 실패한 다음해, 즉 촉의 건흥 9년(231) 2월에 제갈양은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진출해 제4차 북벌을 시작했다. 제갈양이 기산을 포위했을 때에, 위명제는 대사마 조진의 병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 급히 대장군 사마의를 형주에서 장안으로 불렀다. 그리고 장합, 비요, 곽회 등의 군사를 이끌고 제갈양에게 대항하도록 명했다. 그 후 머지않아 제갈양은 기산 공격애 성공했고 조진은 낙양에서 병사했다. 그러므로 조진이 죽은 것은 제갈양의 제4차 북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제갈양이 진영을 습격하고 서신을 보냈으며, 그 서신을 본 조진이 분함을 못이기고 죽고 말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진은 확실히 촉을 공격했지만 이것은 제갈양의 제4차 북벌 이전의 일이다. 게다가 큰 비가 계속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제갈양과 싸운 적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역사상 실존 인물인 조진은 병으로 죽은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진이 제갈양의 서신에 의해 죽었다고 한것은 나관중이 제갈양을 우상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다.





9, 관흥과 장포는 오나라 정벌전에 죽었다



관흥과 장포는 각각 관우와 장비의 아들이다.

「삼국지연의」 제81회에는 관우,장비가 죽임을 당한 후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있다.



유비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술잔을 나누며 함께 생사를 맹세한 두 아우가 비명에 간 이상, 자신만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을것을 결의했고, 유비가 곁에 가까이 두고 있던 관흥과 장포에게 친위대를 맡기고 몸소 군사를 지휘하여 동진했다.

촉한의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오나라 병사들은 투항하고 말았기 때문에 촉한의 대군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의도에 이르렀다. 그 동안 관흥과 장포는 오나라 좌도독인 손환과 이이 등을 해치우고 사정을 죽였으며, 마충을 물리치고, 효정을 공격해 빼앗아 오군을 대파했다.



이렇게 관흥과 장포는 오군과 교전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원한과 분노를 씻어 충의의 정신을 발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 관흥과 장포는 정말로 오나라 정벌에 참가한 것인가?



정사의 <관우전>에 의하면, 관우에게는 확실히 관흥이라는 아들이 잇었고, 어릴 적부터 평판이 좋아 제갈양이 중히 여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역관의 나이에 죽었다. 그러므로 일찍 죽어버린 관흥이 특별한 군공을 세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오나라 정벌에 참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포도 마찬가지이다. 정사의 <장비전>에 의하면, 장비에게 확실히 장포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장비가 죽기 전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장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정벌에 참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일이었다.



결록적으로 둘 다 유비의 오나라 정벌에 참가한 일이 없었다.

나관중은 관우와 장비가 화를 입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 전체를 두 영웅의 위대성으로 관철하기 위해 솟아나는 격정과 거침없는 상상력, 자신의 글재주를 이용해 관우와 장비가 죽은 후 그아들들의 영웅적 행위를 허구화한 것이다.



즉, 오군에게 손해를 입히고, 황충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어려움 속에서 반장을 베고, 관우를 매도한 미방과 부사인을 죽이고, 관우를 살해한 마충의 목을 베고, 손권을 협박해 장비를 살해한 범강,장달 두 흉악범을 송환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따위의 영웅적 행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관중의 이런 허구화는 이미 낡아 버린 관우의 장비의 인간상과 유,관,장의 충의의 정을 강화했고, `호장은 호아를 낳는다`는 창작성의 관점을 인상 깊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10, 맏형은 유비가 아니라 관우였다



중국문학사에서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을 남남끼리 형제를 맺는 관계의 소설이라 일컫는다면,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소설 가운대 <와강채> 이야기, 「설악전」중의 <우고>, <탕회>, <악비>의 이야기, 「삼협오의」 중의 <오서취의> 이야기 등은 모두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이 결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유, 관, 장의 결의이다. 사람들은 도원결의를 의형제의 정을 표현하는 대명사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 이야기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세사람이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원의 숲속에서 소와 양을 바쳐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맹세함으로써 의형제를 맺는다. 이때 나이순으로 유비가 맏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민간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을 때, 누가 형이 되고 누가 아우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한바탕 옥신각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세 사람 모두 형이 되고 싶어 그것을 나이가 많고 적은 순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서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가를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같은 연, 월, 일을 대었다.



이때 유비가 태어난 시간으로 순서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장비가 가장 먼저 자기가 태어난 시는 새벽녘이었다고 했고, 관우는 "나는 더 빠르다. 태어난 시는 첫닭이 막 울었을 때였다" 라고 했다. 그러자 유빈느 한술 더 떠 그 전의 캄캄한 한밤중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자신이 막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말했다.

"둘다 거짓말 마시오. 이건 없었던 일로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유비가 물었다. 장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큰 나무가눈에 띄었다. 장비는 나무 오르기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모 오르기로 정합시다."

장비는 이렇게 말하고는 유비와 관우의 동의도 얻지 않은 채 나무에 달려들어 단숨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지만, 그는 줄기 중간 정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 한가운데라면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는 아우가 있으므로 이것으로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나무 밑둥에 다가서더니 선채로 나무를 부둥켜안았다. 장비는 의기양양해서 크게 외쳤다.

"둘 다 형님이라고 불러!"

유비가 말했다.

"서두르지 마! 자네에게 묻겠는데 이 나무는 뿌리가 먼저인가, 아니면 줄기가 먼저 자란 것인가?"

"물론 뿌리가 먼저 있었지."

"바로 그거야. 그러니 우선 `나`라는 사람이 있고서야 자네들이 있는 것이네."



장비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또 다시 번복을 하자니 이미 한 번 스스로 약속을 깨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신이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우는 유비의 지혜가 뛰어난 것을 보고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유비, 관우, 장비의 순으로 서열이 결정된 것이다.



위와 같은 민간의 전설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정보는 얻을 수 있다. 곧 유비, 관우, 장비의 형제 순서는 나이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유비가 최연장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들 중 최연장자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 기록된 유비의 나이는 중평 원년의 도원결의 때 이미 28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의 <선주전>에는 태어난 연도는 없고, 장무 3년인 223년에 죽었을 때가 향년 63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의 나이는 만으로 계산하지 않는 것을 근거로 하면, 유비가 태어난 해는 연회 4년이 된다. 따라서 중평 원년에는 24세이지 28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관우의 나이는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장비전>에는 "관우는 장비보다 몇 살 연상으로,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형으로 모셨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정방의 「소설총고」에 의하면, 청나라 때 관우의 고향에서 출토된 `관후조묘비기`에, 관우는 연희 3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여림의 「관공연보」에는 "관우는 실은 유비보다 한 살 위였다." 라고 쓰여 있다.



장비는 「삼국지연의」에 55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221년에 이미 죽었다는 설이나 「관공연보」에 기록된 `장비는 유비보다 네 살 연하`라는 설을 가지고 추리해 본다면, 장비는 57세에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사람의 의형제가 되었을 대 관우는 25세, 유비는 24세, 장비는 20세가 된다. 그러므로 나이순으로 볼 때의 맏형은 관우이지 유비가 아닌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설은 역사서의 `은혜가 형제와 같다`라고 하는 기술을 근거로 한 상상이며,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은 나관중의 삼국지가 정확성에 문제가 있다는 한 예에 불과하다.





11, 조자룡의 장판파 싸움은 과장되었다.



조운(?~229)은 자를 자룡이라 하며 상산군 진정현 사람으로,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지만 나중에 유비에게 귀의했다. 삼국시대의 풍운아였던 조운과 관련된 미덕과 일화는 천 년이 넘게 세상에 널리 알려져 왔다. 유비가 조운을 오호대장의 한 사람으로 봉한 것에서, 조운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으로 굳어졌다. 「삼국지연의」 제41회에는 조운이 홀로 말을 타고 유선을 구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조조의 대군이 형주로 밀고 들어갔을 때, 유비는 10여 만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신야에서 강릉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때 장비에게는 후방을 맡기고 조운에게는 가족을 부탁했다. 당양에 이으렀을 때, 조조 군에게 추격을 받아 저항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혼란에 빠졌다. 유비는 처자를 내팽개치고 남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유비의 가족과 떨어진 조운의 주변에는 기병 30~40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그는 어지러운 전쟁터를 이리저리 헤매며 간옹과 감부인을 찾아내고, 조인의 부하 장수인 순우도를 찔러 죽인 후 미축을 구해낸다. 감부인 등을 장판파까지 데려다준 조운은 되돌아가 미부인과 유선을 찾아다니다 도중에 조조의 부하 장수인 하후은을 죽이고, 조조의 자랑거리인 청홍보검을 빼앗는다.

이때 조운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창 한자루와 말 한필뿐이었지만 푸호도 물러시지 않았다. 오로지 유선을 찾아다니다 토담 뒤에 마른 우물 옆에서 미부인과 유선을 발견했다. 더구나 미부인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조운을 몇 번이나 "이 엄중한 포위망에서 구하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짐이 될 뿐이라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조운은 미부인이 목숨을 끊는 것을 보고, 조조의 군사에게 시체를 욕보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는 토담을 무너뜨려 마른 우물을 덮었다. 그리고 나서 즉시 가슴에 대는 갑옷 끈을 풀어 엄심갑(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유선을 품고, 말에 올라 쏜살같이 포위망 속으로 돌진했다. 도중에 조홍의 부장인 안명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길을 열었다.

그러나 장합의 부대가 습격해 왔다. 조운은 장합을 피해 옆으로 도망치다가 사람과 말 모두 구덩이에 떨어졌다. 장합이 즉시 창을 내찌르려고 했을 때 한 줄기 붉은 광선이 구덩이에서 떠오르며 말을 탄 조운이 하늘을 가르고 뛰어올랐다. 이 광경을 본 장합은 몹시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경산 정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조조는 조운의 기세를 보고 부하에게 말했다.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 생포하라."

엄중한 포위를 뚫고 탈출했을 때, 조운의 옷은피로 물들여 있었다. 유비를 만나자마자 그는 말에서 내려 엎드려 울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빌고는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유선을 유비에게 바쳤다.



이처럼 조운이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한 이야기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사의 기술이 아주 간력한 것으로 보아 모두가 사실 그대로 단정할 수는 없다.



<조운전>에는 유비가 당양의 장판에서 추격을 받는 장면의 기록이 있다.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을 때, 조운은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고 그 생모인 감부인을 보호하며 같이 난을 피했다."



조운이 직접 주인을 구한 것과 관련된 기사는 원문에 불과 한 문장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행위와 동작, 결과를 나타내는 말은 `안고`, `보호하고`,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정도일 뿌능로 아주 간략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원대 「삼국지평화」의 묘사도 아주 간단해 원문에 2백 자 내외의 서술이 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도 조운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관중은 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실을 기초로 허구화하고 과장하여 긴장감있게 일련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조운의 문무를 겸비한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다. 나관중이 과장한 조운의 지혜는 미부인이 자살했을 때 담을 무너뜨려 시체를 덮은 것에 나타나 있고, 그의 용맹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계속 싸운 것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피곤에 지쳐 있으면서도 적에게서 보검을 빼앗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도 말을 달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장수들 베고 창을 배앗으며 단신으로 조조 진영의 명장 50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사실은 조운이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며 재빨리 물러난 곳은 관산이었다. 이런 상황에 적군 속에서 종횡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조운이 장판에서 적과 육탄전을 벌여, 목숨을 걸고 유선을 구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2, 황개는 고육지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나라 대장 황개의 자는 공복이며 영릉군 천릉(지금의 호남성 영릉) 사람으로, 처음부터 손견의 거병에 가담해 적벽대전에서의 공로로 무봉중랑장으로 승진했고, 나중에 군수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제46회는 황개가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이 몸을 괴롭히는 고육지계를 이용해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이야기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의 노장 황개는 주유에게,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공을 감행하고 싶다고 자청한다.

"웬만큼 힘든 고초를 겪지 않으면 조조도 신용하지 않을 것이오." 주유가 이렇게 말하자 황개가 대답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고육지계를 실행하겠습니다."

다음날 주유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각자 3개월 분의 군량미를 받아 적에 대비하라."  황개는 일부러 반대했다.

"만약 지금 바로 조조를 물리치지 못한다면 투항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기를 떨어뜨릴 작정인가?"



격노한 주유는 호통을 치며 황개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그러나 문무백관이 입을 모아 애걸하자 곤장 백 대를 치는 것으로 벌을 바꾸었다. 모두다 또다시 애원했지만 주유는 책상을 뒤집으며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그리고 즉시 형을 집행할 것을 명했다. 50대까지 맞았을 때 황개의 살이 찢기고 피가 흘러나왔다. 백관이 다시 입을 모아 용서를 빌자 주유가 말했다.



"50대는 맡아두겠다. 다시 한 번 사기를 저하시키는 날에는 보태어 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형을 받은 후 계획대로 바로 조조에게 앞으로 항복할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게다가 채중과 채화가 형을 받은 모습을 자세히 조조에게 보고했으므로 조조는 황개의 투항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 후 적벽의 화공 이야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황개가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사실이다. 정사「오서」<주유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적벽에서 손,유 연합군이 조조 군을 우연히 만났을 때, 주유의 부장 황개는 `적은 큰 세력이고 아군은 전혀 힘이 없으니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화공에 의한 속공을 제안하고는 스스로 살행을 떠맡았다. 그리고 사전에 조조에게 투항했다는 거짓 편지를 몰래 보내두었다. 조조 군은 황개의 선대가 나타나자 목을 베고 황개의 모습을 살피며 `황개가 투항해 왔다`고 떠들어댔다."



배송지도 또한 <강표전>을 인용해 황개가 보낸 항복편지의 전문을 싣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황개가 조조에게 투항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 조조 군이 너무 강해 오나라가 대항해 싸울 수 없고, 둘째 이러한 사실은 모두 아는 바이며, 셋째 오나라의 정치는 부패해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분간하기 힘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리면 황개는 정말 고육지계를 사용한 것일까?

위에서 본 역사 자료나 적벽대전에 관계한 사람들의 전기를 조사해 보아도 이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주유와 황개가 고육지계를 꾸민 흔적도 없으며, 황개가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요컨대 황개의 거짓 투항은 고육지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나관중이 황개의 거짓 투항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고육지계를 만든 목적은 제갈양에 의한 적벽 화공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13, 육손은 제갈량의 팔진도에 갇힌적이 없다.



정사의 <유비전>과 <육손전>에 의하면, 유비가 백제성으로 도망치자 오군의 장수인 서성,반장,송겸 등은 추격해 유비를 생포할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육손은 이이와 유아의 소부대로 한동안 추격하게 했을 뿐, 대부대는 위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재빨리 후퇴시켰다. 이처럼 애초에 육손이 유비를 추격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제갈양의 팔진도에 혼나는 따위의 일도 있을 수 없었다.



원대는 「삼국지평화」속에 이미 제갈양이 여덞 개의 돌산을 이용해 육손을 격파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며, 이 시대에 이미 `제갈양이 돌을 이용해 육손을 항복시키다`라는 제목을 가진 잡극이 있었다.



공손술이 촉을 차지하고 있을 때에 백제성이라고 개명된 어복현의 현성은 전한시대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유비 때 다시 영안성이라고 개명했는데, 원래 이 성은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 백제산성에 있었다.



육손이 곤경에 처했다는 팔진도는 이 성의 서쪽 어복포에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수팔진이라고 불렀다. 유비가 이 수팔진의 동쪽 백제성으로 후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육손이 만약 촉군을 추격했다 해도 우선 백제성을 통과하지 않으면 수팔진에 이를 수가 없다. 당시에는 백제성을 넘기 전에 수팔진으로 가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양이 교모하게 팔진도를 설치해 육손을 곤경에 바뜨렸다는 것은 단순한 전설일 뿐이다.





14, 맹달은 제갈량의 북벌 전에 죽었다



맹달(?~228)의 자는 자도이며 부풍군 사람이다. 그는 우너래 유장을 섬겼지만, 건안 16년에 법정의 수행원으로 유비를 맞아 싸우러 갔을 때에 유비에게 귀순해 건안 24년에 유봉과 함께 상용을 공략했다. 219년 오가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죽였을 때, 유봉과 맹달 두사람은 산성이 함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시종 관망할 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나중에 맹달은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위에 투항했다.



그는 위나라에서 산기상시, 건무장군, 평양정후 등에 봉해져 신성(지금의 호북성 방산 일대)태수에 임명되었는데, 「삼국지연의」 제 94회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조비가 죽은 후 맹달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제갈양이 북벌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를 배반하고 다시 한 번 촉을 따라 낙양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제갈양에게 이 계획을 전하는 한편, 상용태수 신탐과 금용태수 신의 두 형제-에게 거병에 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신탐형제는 동의하는 척 하며 몰래 맹달의 심복 이보와 외조카 등현과 모의해 사마의에게 사신을 보내 밀고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마의는 우선 참군 양기를 신성으로 보내 맹달에게 촉을 정벌할 준비를 재촉하도록 함으로써 맹달을 안심시키고는 바로 군사를 일으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해 신성을 포위했다.



이보다 전에 제갈양은 맹달에게 서신을 보내 사마의의 움직임에 대비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맹달은 사마의가 있는 완성에게 신성까지는 1천2백 리나 되므로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사마의가 자신의 거병을 알아도 위나라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므로 출병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막상 포위되자 성을 지키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때 신탐 형제가 구원하러 온척하며 이보, 등현 등과 함께 기회를 틈타 성곽을 점령했고, 맹달은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맹달은 제갈양의 북벌 이후인 228년 봄 이후에 죽은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정사의 <명제기> 및 「진서」<선제기>의 기록에 의하면, "맹달이 위를 배반하고 다시 촉으로 귀순하려고 한 것은 위나라 명제 태화 원년(227) 12월의 일이었는데, 사마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배도겸행(밤낮없이 달려 두 배로 행군함)하여 8일 만에 성밑에 당도했다. 이후 여덞 방면에서 공격하기를 16일 동안 계속했고, 그 후 맹달의 외조카 등현과 부장 이보의 투항으로 간신히 맹달을 붙잡아 죽였다. 이것이 태화 2년(228) 정월의 일이었다."고 되어 있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맹달이 죽은 것은 제갈양이 북벌에 나서기 전의 일이지 북벌에 나서 농우를 배앗은 후의 일이 아니다. 그외에 신탐 형제가 맹달의 계획에 가담한 사실도 없고, 등현과 이보는 항복하고 성을 넘겨주었을 뿐 내통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제갈양과 맹달이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는 것은 「삼국지」와 「진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촉서」<비시전>에 실린 `제갈양이 맹달에게 보내는 글`은 225년 말에 쓰여진 것이다. 남중 정벌을 마치고 개선한 후 한양에서 맹달의 근황을 들은 제갈양은 맹달을 다시 한 번 촉을 따르게 함으로써 장차 북벌에서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이 분명해진다.



첫째, 맹달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를 배반하고 촉을 따르려 했다기보다는, 제갈양의 장기간에 걸친 공작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나관중이 창작한 `사마의가 해를 붙잡아 맹달을 사로 잡았다.`는 이야기는 전부가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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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 차기 대선에 대한 고찰 [25] 우주연방 2005.08.09 312
635 남녀 평등에 대해. [22] 레드샤크 2005.05.28 313
634 우리 인류가 우주로 진출해 외계문명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 어떻게 될까??? [12] 우주연방 2005.06.04 313
633 장애인과 정상인? [12] 배달두산 2005.12.08 314
632 세계연합은 언제쯤 성립될 수 있을까? [15] 우주연방 2005.06.03 315
631 왜 살아야 하는가? [40] 우주연방 2005.05.30 316
630 꿈 그것은 무엇인가.. [11] 샤리야옹 2005.05.31 316
629 이번 강교수 사건. [9] 래그래갈 2005.10.22 316
628 현대차-정몽구 회장 가문의위기는 현대차의 위기? [8] 죄인 괴수 2006.04.28 316
627 요즘 음악 프로그램에 대해서.... [13] 슈크림소녀 2005.07.11 317
626 세상은 아직도 소수의 몇몇을 위해 돌아간다. [14] 마법학교졸업생 2005.08.08 317
625 박정희에 대한 평가? [15] 네코군 2005.12.05 317
624 의료, 금융, 교육 자본주의에 맞게하자 [11] 우주연방 2006.01.09 317
623 딱한가지 부탁할것 [8] 강수호 2005.12.01 318
622 우리나라의 인재대우에 관한 생각 [8] 우주연방 2005.08.10 320
621 인간의 존엄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22] 우주연방 2005.06.25 321
620 파일이 업로드되지 않습니다 [7] 요즘들어 2006.02.18 321
619 쌀개방은 곧 서민의 슬픔이다. [12] 죄인 괴수 2005.11.29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