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yswichard * Fantasy Location *

2009.05.24 04:17

찰드 조회 수:1127 추천:1

extra_vars1 반란의 마침표 
extra_vars2
extra_vars3 102287-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parksuyong1 
extra_vars9  

예상한 대로다.


 


병선의 그 청순하고도 성스러운 얼굴과 마주하니 국현은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말문이라도 열어볼 요량으로 견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다녀 왔느냐?”


 


“성벽에 올라갔었어요.”


 


“성벽?”


 


물론 임펠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성벽을 말하는 것이다. 국현이 의심쩍게 물었다.


 


“기병들이 순순히 성벽으로 올라가게 해주더냐?”


 


“네.”


 


몹시 간단한 대답이지만 그 말엔 많은 뜻이 숨겨져 있다. 우선 가장 먼저 국현의 머리속을 스친것은 역시나 모든 궁성 사람들이 마법사 길드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다행이구나. 하지만 연아. 기병들이 다 우리 마법사 길드를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가급적이면 그들과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도록 해라.”


 


“...네.”


 


병선은 고개를 갸웃 했지만 그래도 이제 성숙한 사고를 완성해가고 있는 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도 궁성과 마법사 길드 간의 미묘한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래, 성벽에는 어쩐 일로 올라갔지?”


 


“넓은 들판과 산들을 좀 보고 싶어서요. 여기 수도에는 그런곳이 많지 않으니까 가끔 그렇게 보기라도 하지 않으면 좀 갑갑해요.”


 


그 이야기가 나오자 국현은 잘됐다 싶었다. 병선에게도 말문을 틔울 기회를 줄때가 온듯 했다. 국현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점잖게(보이도록 애쓰며) 병선을 바라보았다.


 


“병선이도 같이 봤겠구나.”


 


“네.”


 


역시나 조용한 음성. 견연의 약간 쾌활한 음성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분위기가 이제 11살 난 어린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확실할까?


 


“어떻더냐? 기분이.”


 


병선은 조용히, 조심스럽게 국현을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하다가 한순간 채념한 표정을 짓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그냥... 좋았어요. 저도 견연 언니처럼 도시 한가운데에만 있으니까 갑갑했었어요.”


 


“그랬구나.”


 


국현이 살며시 손을 들어 병선의 그 새하얗고 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병선이도 연이도... 갑갑한 상태였구나. 내가 그것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누가봐도 화기애애한 가족 분위기였으나 병선의 바로 옆에 있던 연은 그때 순간적으로 병선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앞으로 좀더 너희들에게 신경을 쓰마.”


 


“그런데 뭐 긴히 할 얘기라도 있으세요? 후원으로 따로 부르시길래...”


 


고맙게도 연이 먼저 물어봐 줬으나, 국현은 결국 병선에게 전해둬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니다. 뭔가 좀 말해두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오랜만에 좋은 감상을 하고 와서 무거운 이야기로 흥을 깨고 싶진 않구나.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견연은 역시나 활발하게 국현에게 인사하고는 후원을 나왔으나 병선은 거의 도망치다시피 따라나와 견연의 손을 잡고 걸었다. 국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 들어갔다.



 


“와아...”


 


탁씨는 병선의 손놀림을 감상하고는 손뼉을 쳤다.


 


“우리 병선이, 이제 제법인걸? 이제 주머니 속에 든 지폐 몇장 정도는 우습겠어?”


 


도대체 왜 부모뻘 되는 사람이 자식의 도둑 흉내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누가봐도 이상한 풍경이다. 그리고 용케도 병선은 그것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상해보여요.”


 


“응? 뭐가 말이냐.”


 


“아빠가 저의 도둑질을 보고 좋아하는 거요.”


 


“하하하... 음, 그래. 그것도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병선은 열었던 지갑을 다시 닫아 탁씨에게 돌려주었고, 탁씨는 지갑에서 어느정도의 돈만 꺼내 챙긴 후 다시 길바닥에 던져놓아 두었다. 그의 방식은 항상 이렇다. 그렇게 해두면 누군가가 주워 가져버렸을때 그 사람을 자기를 대신할 범인으로 만들 수가 있고, 운좋게 본래 주인이 다시 발견한다고 해도 자신이 흘린줄로 알 것이다.


 


그렇게 잠시 마법사 길드의 병선의 방 창문을 통해 탁씨와 함께 환한 달빛을 바라보던 병선은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예의 그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근데... 아빠.”


 


“응?”


 


병선의 얼굴에 다시금 쓸쓸함이 묻어난다.


 


“아빠는... 내 친아빠가 아니라고 했죠?”


 


국현이 그렇게도 말하기 어려워 했던 것을 탁씨는 이미 옛날에 병선에게 말해버렸던 것이다. 차라리 일찍 알아두는게 나중에 상처를 덜 받을 것이라는 탁씨의 판단에서였다.


 


“왜, 또 그 생각이 나는 게냐?”


 


“아뇨... 이젠 괜찮아요. 그래도 일찍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다행히도 병선은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었다. 탁씨는 안도감을 느꼈으나 실상 병선의 고민은 다른데에 있다.


 


“그럼... 지금 제 진짜 엄마 아빠는 도저히 찾아낼 길이 없나요?”


 


“글쎄... 길드장 녀석이 알아보고 있을텐데. 벌써 10년이나 지난 얘기구나.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찾아낼 방도가 없는 것일테지.”


 


“......”


 


병선의 얼굴이 다시 우울해졌다. 탁씨는 그제서야 병선의 기색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표정이 안좋구나, 병선아. 무슨 일 있느냐?”


 


“아빠...”


 


병선이 젖어들어갈듯한 눈으로 탁씨를 올려다보았다.


 


“제 말... 아빠는 믿어 주실거죠?”


 


“응?”


 


심상치않은 수양딸의 어조에 탁씨의 음성 또한 약간 낮아져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 말해보거라.”


 


“길드장님은... 절대 제 진짜 엄마 아빠를 찾아주지 않을 거예요...”


 


탁씨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아니, 적어도 국현과 병선이 마주하는 광경을 자주 접하지 못한 탁씨로서는 상상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탁씨가 병선에게 얼굴을 가까히 하며 물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게냐?”


 


“길드장님은... 저, 저한테 안좋은 마음이 있어요. 틀림 없어요.”


 


드디어 병선은 오래도록 느껴왔던 수치스러운, 그래서 더더욱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힘들었던 말을 꺼내었다. 늘 함께 놀았던 연에게조차도 못했던 말이었으나, 탁씨는 양아버지요, 자신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성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어떠한 신뢰감이 작용했던 것이리라.


보통 어른이었다면 “어린놈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라고 일갈을 쳐 버렸겠으나 탁씨는 “보통 어른”이 아니었다.


 


“설마 국현이가... 너에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하느냐?”


 


만나온지 20년이 넘은 친구였으나 탁씨는 병선이가 절대 없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되려 어떻게 국현이 그런 짓을 할수 있는가에 대한 충격만이 남는다. 병선의 가녀린 몸이 가늘게 떨려온다.


 


“절... 절 보는 눈빛이 이상해요. 제 어깨나 머리를 쓰다듬을때도 이상한 감정이 느껴져요. 한번은 제 치마를 잡은 일도 있었고요...”


 


꽤나 적나라한 말이었지만 거짓을 모르는 병선으로서는 능히 할수 있는 말이다. 탁씨는 심상치않은 얼굴로 병선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두 팔을 들어 병선의 양 어깨를 짚었다. 국현이 할때와는 달리, 병선은 그 손길에서 안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병선아. 난 내 딸의 말을 믿겠다. 지금부터는 내가 널 보호해주마. 평소처럼 국현이를 대하거라. 국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난 그 상황을 늘 감시하마. 아빠를 믿어보아라.”


 


“네...”


 


그 말을 끝으로 병선은 힘이 다 빠져버린듯 탁씨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탁씨는 그런 수양딸을 조심스럽게 안아주며 한편으로는 국현을 향해 이를 갈기 시작했다. 절대 그럴리가 없다고 믿어왔던 20년 묵은 친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배신감 탓이었다.



 


그 후로 약 일주일이 지났고, 탁씨는 매일매일 국현과 병선이 만나는 광경을 감시해왔다. 그러나 탁씨는 이상하게도 국현에게선 별다른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친근하게 말 몇마디 건네는게 고작이었고, 어쩌다 병선의 몸에 손을 대도 그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몇번 어깨를 토닥여주는 정도였다. 탁씨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선이가 예민한 탓일까...? 고작 저 정도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그때, 탁씨가 있던 길드 건물 옥상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탁씨가 돌아보니, 그는 견연과 비슷한 또래인, 푸른 더벅머리의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시원한 눈매를 가진 소년 길드원, 김재범 이었다.


 


“아니? 아저씨.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오늘은 어느쪽을 가볼까 탐색 중이었지.”


 


탁씨는 담담하게 둘러대었고 재범은 피식 웃으며 탁씨에게 다가왔다.


 


“병선이 때문에 수도 밖으로 못나가신지 꽤 되셨다면서요? 갑갑하시겠어요.”


 


“그렇구나. 어찌됐건 병선이는 내 수양딸 이니까... 내가 보살펴야지.”


 


“네. 이해해요.”


 


탁씨가 앉아있는 벤치에 나란히 걸터앉은 재범은 어느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곤 한참동안이나 그쪽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는 길드원이 아니니까 믿고 말하는 건데요...”


 


“무슨 이야기냐?”


 


“아저씨는 온드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탁씨가 못마땅한 눈으로 재범을 바라보았다.


 


“온드라 이야기는 왜 하는게냐?”


 


“히페인츠 라는 나라에 불만이 많은 길드원이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


 


이 역시 웬만한 어른이라면 또 쓸데없는 소리! 라며 일갈쳐 버렸을 이야기였지만 역시나 탁씨는 “웬만한 어른”이 아니었다.


 


“너까지 그런 생각을 하느냐.”


 


“온드라는 마법사들에 대한 대우가 아주 좋데요. 이곳 길드원 이라면 당연히 생각해볼만한 일 아니겠어요?”


 


“...혹시, 연이도 그런 생각을 하느냐?”


 


탁씨는 불안한 마음에 물었으나 재범은 “피.” 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걔는 길드장 비서 엄마 때문에 감히 그런 생각을 못해요. 어찌보면 불쌍하죠.”


 


“길드원들이 나라에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국현이가 늘 말하지 않느냐? 국왕 전하께서는 마법사 길드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계신 듯 하다고. 반드시 언젠가는 마법사 길드가 [법관]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거라고 믿고 있다지 않느냐. 너희들도 좀 그런 희망을 가져 보려므나.”


 


“...역시 탁씨 아저씨세요. 혼내기 바쁜 다른 어른들 보다는 아저씨랑 이야기하는게 훨씬 좋은걸요. 병선이가 부럽네요.”


 


거기까지 말한 재범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밝게 웃으며 탁씨를 돌아보았다.


 


“조금 마음이 개운해요. 그럼 저도 국왕 폐하께 희망을 걸어볼께요.”


 


“그게 옳은게다.”


 


탁씨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재범은 다시 옥상문을 닫고 건물 안으로 내려갔다.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던 탁씨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국현과 병선이가 만나던 장소를 보려 했으나 이미 그 둘은 어디로 흩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후...”


 


방으로 돌아온 국현은 다시금 방금 전 만났던 병선이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50대가 넘은 자신이 고작 10살 남짓한 꼬마 여자아이에게 이토록 끌릴 수 있는 걸까.


 


“............”


 


병선 앞에선 애써 태연한 척 했으나 그것 만으로 힘을 다 써버린듯 국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또다시 병선의 초상화를 집어들었다. 근 일주일간 더 심해진것도 같다.


 


“.....탁병선...”


 


자연스럽게 되뇌어진 아이의 이름. 국현은 어느새 실제 아이에겐 절대 할수 없는, 해서도 안되는 온갖 손짓을 초상화에다 대고 마구 해대었다.


 


“안돼.”


 


손가락이 물감자국으로 얼룩져갈 즈음, 국현은 문득 재정신으로 돌아와 초상화를 팽게치듯 책상 위에 도로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그 손을 그대로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 병선이는 10년간 우리가 키워온 마법사 길드의 딸이 아닌가. 딸에게 이런 생각을 품다니 안될 말이다.’


 


후, 하고 내쉬어지는 한숨. 그는 가만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미친 짓이라고 속으로 외쳤으나 잠시도 못가서 또다시 그의 눈 앞은 병선의 그 어린 사슴같은 몸매로 가득 채워졌다.


 


 


-----------------------------------------------------------------------------------------


 


묘하게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요 -_-; 어쩌다 이렇게 됐지.